석길암 본지 편집위원

석길암
본지 편집위원

혹자는 말한다. 유구한 역사에 비추어보았을 때 한국불교는 미래의 대안일 수밖에 없다. 또 혹자는 말한다. 서구사회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는 한국사회의 특성상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서구불교의 성장 여파가 한국불교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위기사회의 대안은 불교일 수밖에 없다, 등등.

한국불교계에는 이 같은 낙관론 혹은 희망론이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낙관론 혹은 희망론에 대해 누구도 쉽사리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럴까? 그리고 그러한 낙관론 혹은 희망론이 우리 현실을 냉철히 바라본 뒤에 나온 평가일까? 우리 사회의 누구라도 쉽사리 그 말에 동의할 수 있는 것일까?

그저 긍정적이기만 한 미래 구상에 무작정 동의하기에는 우리 불교에 주어진 현실이 그리 녹록하지 않다.

차라리 그것은 사뭇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그나마 조그만 희망이라도 발견하려는 위안 심리의 결과인 것은 아닌지. ‘불교’는 ‘어떤 것’이고, ‘어떠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손톱만큼의 정체성 인식이라도 있다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현실이라는 미명하에 자연스럽게 저질러지는 그악한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불교를 믿고, 불교에 동의하고, 불교를 말하고 행하며, 불교를 현실화한다. 그것을 우리는 불교인이라 말하고, 그러한 불교인의 집단을 우리는 불교공동체라고 부른다. 한국사회에서 불교인들의 가장 두드러진 행동 특성은 개인적 신행의 위기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공동체적 신행의 위기에는 둔감한 것을 첫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다.

그것이 어떤 원인에서 비롯된 행동 특성인지는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오늘의 한국불교, 나아가 내일의 한국불교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으로서는 쉽게 저지르기 힘든 일들이 공동체 단위에서는 쉽사리 저질러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불교의 전통을 대표하는 모 사찰의 천도재와 생전 예수재의 사업화 시도가 불교계 일각에서 화제가 되고 있지만, 방식에서의 색다름만 제외한다면 어느 사찰에서나 부분적으로는 묵인되고 있던 일에 불과하다. 몇 년 전 본지의 도마에 올랐었던 기복 불교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당연히 이런 사업(?)들은 불교인이라는 개인으로서의 자각, 그리고 불교라는 집단이 어떠해야 한다는 자각에서 한 발 벗어나 있다. 불교공동체라는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으로 보자면 심각하고 당연히 문제 삼아져야 할 사안들이, ‘먹고살아야 하는 현실’ ‘생존이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감’이라는 개인 혹은 공동체의 이익을 훼손하는 사태에 당면하게 되면 슬그머니 이목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리는 일이 수십 년 동안 반복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 반복이 이제는 당당히 ‘전통’이라는 아름다운 이름 아래 ‘당연시’ 되어 버린 것이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이 아닐까.

여기서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고 항변하는 것은 적어도 불교공동체의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치졸한 변명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개인으로서는 엄격했을지도 모르지만, 공동체 전체로 본다면 방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오피니언 리더가 되지 못하고 단순히 이익집단의 하나로 치부되어버린 현실도, 서구에서 불교가 중요한 대안으로서 부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는 미래의 대안으로서 전혀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도, 이웃 종교 공동체들이 자신들의 관점을 선명하게 표명할 때 우왕좌왕하면서 불교공동체의 입장을 선명하게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도, 교세마저 성장은커녕 오히려 후퇴하고 있는 현실도, 실은 이러한 불교공동체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부족으로부터 초래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예순 명의 제자가 생겼을 때,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전법을 선언하면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하고 있다.

나는 이미 인간과 천상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너희도 역시 인간과 천상의 속박을 벗어났다.
비구들아, 자 전도를 떠나거라.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모든 사람들의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마라.
비구들아,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法)을 설하여라. 또 완전하고 흠이 없는 깨끗한 행[梵行]을 설하여라.
비구들아, 나도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의 세나니가마로 가리라.

―SN, Pasa ; 잡아함, 《승삭경(繩索經)》

첫 부분은 전법자의 자격에 해당할 것이고, 두 번째 부분은 전법자의 마음자세에 해당할 것이며, 세 번째 부분은 전법의 기본적 방법론에 해당할 것이다.

첫 번째 부분에서 인천(人天)의 속박을 벗어났다는 것은,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면, 인천(人天)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를 의미할 것이다. 세속의 욕망에 더 이상 속박되지 않기 때문에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며,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 자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지위에 오른 자는 당연히 세상 모든 존재들의 행복과 안락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행위를 짓게 된다. 그러한 사람들의 행동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도록 단 두 사람도 함께 길을 가지 말고 부처님 자신을 포함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길을 가도록 요구한다.

그리고 그러한 전법자들이 전법을 행할 때는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法)을 설’할 것을 요구한다. 가르침의 내용이 명료하고 알기 쉽게, 그리고 논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어긋남이 없도록 설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 전법자들은 ‘완전하고 흠이 없는 깨끗한 행[梵行]을 설’하도록 요구받는다. 설하는 사람 스스로도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우리는 불교도이다. 동시에 불교도는 전법자이기도 하다. 부처님은 출가제자들에게 전법을 요구했지만, 초기 승가공동체에 대한 선언이었을 뿐 사실상 이것은 불교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부대중 전체에 대한 부처님의 요구이기도 하다.

최근 불교계의 자못 실망스런 현실들에 대해서 비판적 성토를 가하고 있는 이들도, 비판적 성토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들도, ‘늘 그렇지 뭐!’ 하고 자괴감에 빠져있는 이들도, 어느 한 켠에서 본분을 다하며 수행과 전법에 전념하고 있는 이들도, 다시 한 번 생각해주기를 바란다.

우리 스스로가 외면하고 있거나 혹은 참여해서 ‘전통’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또 가끔은 ‘현실’이라는 조악한 가면을 쓰고 자행되거나 혹은 방기되는 공동체 단위에서의 만행(?)이 얼마나 끔찍한 현실을 초래할 수 있는지. ‘나’는 아니니까 하고 외면해버린 불교공동체로서의 의무에 대한 방기가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무기력의 원인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무엇이 우리를 지금의 심각한 위기와 고민없는 막연한 희망 사이에서 헤매게 했는지. 부처님이 왜 승가공동체를 형성하여 표류하는 바다에서 의지할 만한 섬으로 삼게 했는지. 우리의 섬은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다에서 그나마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섬으로 여전히 기능하고 있는지.

혹여 우리는 사회에 만연하는 이기주의와 물질적 풍요라는 달콤한 유혹에 휩쓸려서 우리의 의지해야 할 공동체마저도 이기주의로 물들여놓지 않았는지. 내 편안함과 자기만족 때문에 내가 머물고 내가 의지하고 내가 사표로 삼아야 할 공동체를 외면하고 무시하고 남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는지.

한국불교의 희망을 말하고 싶다면, 한국불교가 미래의 대안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이제는 ‘내’가 아니라 ‘우리’, ‘우리’가 아니라 ‘모두’를 고민하는 불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제 근거 없는 희망, 근거 없는 대안론은 버리자.

이제 우리가 외면했던 공동체로 되돌아가야 할 때이다. ■

 2009년 9월

석길암(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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