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수
본지 편집위원 / 서울대 교수
2010년이 저물어가는 즈음 교계와 학계에서 올해 가장 기억될 만한 사건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기억(記憶)이라는 말은 한역 불전에 이미 나타나는 말로 더 보편적으로는 염(念 smṛti)이라고 하여 기억하는 자, 기억된 것 등 다양한 맥락 속에서 쓰인다.

불교에서 기억은 과거의 경험을 현전해 내는 것을 말하거니와, 과거의 정보와 경험을 재현해 내어 자신을 과거와 연결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나 기관이나 제도가 가지고 있는 기억, 또는 기록을 통한 기억 등은 개인의 경험에 남아 있는 기억과는 다른 경우가 많다. 이것을 기억의 변형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올해는 유난히 기억할 일이 많았다.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해이고, 6·25동란이 발발한 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불교 내적으로는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저질러진 10·27법난 3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복잡한 국제적 상황과 국내 정치 이해관계 속에서 아픈 과거의 역사를 다시 경험하는 것이 못내 버거워서인지 신문 방송은 종종 다른 종류의 기억들을 드러내 주었다.

가장 기억되는 것은 봉은사 사태를 둘러싸고 온 종단과 사회가 들썩거린 일이다. 그리고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지만, 현 정권에 의한 4대강 개발사업 추진에 대해 불교계가 전면적으로 반대에 나선 일이다. 그 반대의 목소리는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이라는 무참한 사태에까지 이르렀으나 그 움직임을 저지시키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봉은사 사태의 경우는 화쟁위원회를 만들어서 가동하는 등 적극적인 소통의 노력을 하고 있지만 만족할 만한 결론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건의 전말에는 정권과 종교의 복잡한 역학관계 외에도 종교편향과 같은 문제가 가장 큰 핵심 쟁점인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살펴보면 한국 사회의 곳곳에서 나타나는 종교의 권력화와 종교 차별의 행태는 참으로 심각하다. 자신과 다른 생각과 이념을 가진 사람에 대해 배타적 지배적으로 권력을 쓴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쓴 토머스 제퍼슨은 자기가 쓴 묘비문에서 자신의 일생을 요약하여 “미국 독립선언문을 쓰고, 종교자유법을 제정하고, 학문과 종교의 분리 정신에 의거해 버지니아 대학교를 세운 사람이었다.”라는 짧은 세 문장을 남겼다.

미국의 대통령이었다는 것보다 미국 헌법에 종교자유법을 제정한 일을 더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그 덕분에 미국의 공립학교에서는 기도나 종교적 강독을 할 수 없고, 주립대학에서는 신학을 가르칠 수 없다. 공공장소에 종교 상징물을 전시하는 것을 금지한다. 다수가 믿는 바라 하여서 소수에게 강요되어서는 안 되며 이것은 결국은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고 박해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현재 ‘땅 밟기’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불교 훼손은 이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종 차별이나 성차별 등과 그 맥락을 같이하는 야만적인 행태이다.

하지만 불교계의 반응은 상당히 미온적이었다. 이러한 억압과 훼손에 대해서 사회적 여론이 자신을 주목해 주지 않을까 하는 피해자 의식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될 지경이었다. 계속 불거져 나타나는 다른 현안들을 보면서 이것이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이고 자신을 객관화시켜 볼 수 있는 기회로 돌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관련하여 최근 불교학계에서는 서구 불교에 대해 부쩍 관심을 보였다. 왜 우리는 서구 불교에 관심을 갖는가. 사실 서구에서 불교는 사회적 신드롬으로까지 여겨질 정도로 붐을 이루고 서구 불교의 연원, 현황 그리고 사회적 종교학적 의미에 대해 그동안 20여 종의 학술서적이 나올 정도로 이미 지난 이십 년간 서구에서 연구되어 온 주제이다.

‘내 것’인 불교에 대해 서구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다니 우선 반가운 심리도 작동하는 것 같고 또한 반대로 미국 불교는 신앙이 아니고 문화에 불과하므로 그 실체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경고하는 분들도 있다. 하여간 민족주의건 반미건 100년 전 경술국치를 시작으로 외세에 굴복하여 식민지가 되었던 경험과 60년 전의 6·25동란이 끝난 후 타율적 근대화와 서구화를 거쳤던 그 굴욕스런 역사가 우리 마음속에 남긴 일종의 상처라 하겠다.

한국의 불교계가 이제 눈을 밖으로 돌려 다른 문화 속에서 자신에게 시사점이 되는 어떤 것을 찾고자 하는 것은 특별히 숨길 것도 모자랄 것도 없다고 생각된다. 한국 사회는 인정하든 않든 많은 부분 서구화되었으므로 서구의 불교 수용에 대한 더 나은 이해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만나본 많은 분들은 앞으로 한국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서구 불교의 성장이 모델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말씀들을 했다. 여러 가지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현재도 미국의 불교는 대안적 종교, 신념으로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젊은 계층에 파고들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에 불교가 크게 전파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1960년대 이후 소위 비트 제너레이션으로 대표되는 문인, 작가, 사회사상가 등의 글과 말을 통해서 불교는 사회 저변 특히 젊은 층에 널리 그리고 깊이 퍼지게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 150년 전부터 유럽 지식인들의 문헌 연구를 통해 불교가 알려지고 불교의 사상적 측면에 대해 경도되었던 지식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불교는 책장 속의 불교라고 부를 정도로 소수의 지식인층에 의한 이지적 관심이었다. 이에 반해 1960년대 이후의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 번진 불교는 반이성주의, 자연주의, 즉각성, 깨달음 등의 슬로건을 가지고 스즈키 등의 학자가 소개한 선불교를 주축으로 한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미국의 불교가 50년의 역사를 가지면서 새로운 양상에 접어들고 있다.

이제 서구에서 불교는 개념 속의 사상이거나 소수 돌출자의 것이 아니라, 법복을 입고 좌복에 앉아 좌선수행의 삼매에 빠지는 수행자, 아이들과 함께 주말 법회에 나가는 전문직 부모들, 세계 평화와 환경보호를 주장하는 시위에 참석하는 그런 참여적 불교인의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나 비판도 있다. 그들은 불교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이지 신앙인이 아니라든지, 절에 가서 절도 하지 않는 사람이 불자냐는 힐문도 있다. 불교의 상업화 세속화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각국의 불교 전통, 여러 전통을 달리하는 법사들이 활동하므로 마치 쇼핑몰에 가서 고르듯이 이 가르침 저 전통을 전전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불교계도 상업화하여 베스트셀러 작가나 스타 법사들이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려 애쓰고, 인터넷사이트인 달마넷에서 법문을 내려받는 것으로 불교를 다 알았다고 생각하고 실천수행으로 옮기지 않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 종교가 상품화된 것은 기독교 에반젤리스트들의 텔레비전 채널에서 보듯이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자생적으로 발생한 구미의 불교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는 알 수 없다. 현재까지 볼 때는 대안적 삶의 모델과 가능성으로서 불교의 수행과 실천을 시험해 보고 있고 그러한 과정은 지속될 전망이다. 서구인에게는 그들 나름대로 불교를 받아들일 종교적 사회적 욕구가 있었다.

반면 이 시대의 한국인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불교가 무엇을 해결해 주기를 기대하는지 그 종교적 욕구는 무엇인지를 헤아려 보아야 미래 세대가 원하는 새로운 불교 형태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서구 불교의 강점은 불교를 전통적 종교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불교를 개별적으로 접한 이들이 스스로의 판단으로 선택한 가치체계라는 점이다. 이것이 미국 불교를 무시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아시아에서 온 스승들로부터 전해진 이 이국 종교를 어떻게 새롭게 해석해 왔고 자신의 삶에 어떤 형식으로 적극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적용시켜 왔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중요한 일일 터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에게는 유연한 선수행의 전통이 남아 있고, 수행할 수 있는 사원 공간이 있고, 또한 수행자를 기꺼이 받아줄 스승이 있으며 이것을 기꺼이 장려하는 사회적 종교적 전통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전통 종교로서 전통적인 가치를 대변하는 불교는 앞으로 스스로를 어떤 식으로 규정하고 어떤 식으로 변형해 나갈 것인지 갈림길에 서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2010년 12월
 조은수(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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