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수
본지 편집위원, 서울대 교수
이번 불교평론 특집은 한국인에게 불교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주제로 다루었다. 과연 현대 한국인에게 불교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전통적으로 불교는 한국인에게 무엇이었는가를 회고적인 관점에서 조망하는 기획이었다. 현재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해서 과거에 대한 질문으로 확대해 보자는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교는 종교이지만, 또한 철학이며, 가치관이며, 또한 문화 현상이다. 불교는 다층적이다. 불교는 고대 한국인의 철학 전통을 대표했으며, 도덕과 가치를 제공했다. 현재의 삶과 앞으로 닥쳐온 죽음에 대한 독특한 시각을 제공하는 종교였다. 또한 마음을 다스리고 체득하는 삶을 가르치는 정신적 길잡이였고 삶의 결을 빛내주고 예술적 표현을 담아주는 문화적 그릇이었다. 이번 특집은 불교의 역사 속의 이러한 다층적 역할을 각 분야에서 증명해 주고 있다.

우선 서정형은 〈불교는 우리에게 어떤 종교인가〉에서, 불교는 종교인가 아닌가, 불교는 종교인가 철학인가 등의 질문을 따져보고 있다. 우리가 어떤 질문을 할 때에는 질문하는 자의 의도가 그 속에 들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질문에 올바른 대답을 한다는 것은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다.

예, 아니오라는 말이 가지는 함정이 그것이다. 철학개론 수업에서 흔히 예문으로 드는 질문이 있다.“당신은 아직도 부인을 때리시오?” 하고 누가 질문을 하였을 때, 그에 대해 “아니오” 한다면, 마치 이전에 때리다가 지금은 때리는 버릇을 그만두었다는 뜻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리 좋은 대답은 아니다. 그렇다고 “예”라고 한다면, 당신이 한 번도 부인을 때려본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사람이라면 당연히 올바른 대답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을 하여야 할까. 그 질문에 예, 아니오를 대답하기보다는 그 질문이 함축하는 전제를 다시 물어야 한다. 부처님도 이러한 상황에 봉착하여 질문을 점검하라고 가르치신 적이 있다.

그러면 이런 논리에 따라 한국인에게 불교는 종교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불교는 종교이지만 단지 종교인 것만은 아니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 불교를 ‘단지’ 하나의 종교로 인식하는 것은, 서구의 유일신 전통에서 말하는 종교 이해의 프레임 속에서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더욱 곤란한 상황을 가져온다. 이와 같은 근대 초기의 종교 개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같은 근거로 불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하여 폄하하는 이유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 종교학에서는 종교의 의미와 본질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예를 들어 동양의 종교는 신을 가정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따라서 영성이라는 것을 새로운 종교 정의의 하나의 카테고리로 사용한다.

여기서 파생되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한국의 종교 지형 속에서 기독교가 주류를 점하게 되면서, 마치 불교가 기독교의 대척점에 서는 종교로서 이해되고 있는 사실이다. 근대 이후 한국 사회가 서구화되고 서구 종교가 한국의 종교 지형 속에서 점점 기반을 넓혀감에 따라 한국 사람들의 가치관의 기초를 이루고 종교적 세계관과 인생관의 제공처였던 불교의 위치는 다소 애매해졌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현대사회의 다문화, 다종교의 과정을 통해, 불교는 여러 종교 중의 하나로서 다른 문명이나 종교 사상과 경쟁하는 위치에 서게 되고, 나아가 불교의 여러 다층적 역할과 기능 중에서 오직 종교적 기능 하나만이 유달리 더 강조되고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특집호에 발표된 논문들은, 전통 한국에서 불교란, 개개인의 종교적 신념에 관계없이 한국 사회와 문화를 통괄하는 독특한 가치관, 윤리관과 인생관을 제공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더군다나 우리의 미학적 시선, 예술적 품성도 또한 불교적 이념을 기반으로 해서 성숙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선 불교는 전통세계에서 한국인의 철학적 지평이었다.

박종홍 박사가 《한국철학사―불교편》에서 말한 것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한국의 불교 사상은 한국 전통 철학의 근간을 이룬다. 또한 불교는 수신의 중요한 방법이었다. 동양의 종교는 수신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겨 왔지만, 마음의 수양을 통한 개인적 완성을 우선적 가치로 둔다는 점에서 불교의 수양론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성에 수양의 지표를 두는 유학과 목적이 다르다.

특히 불교의 역할 중에서 주목할 것은, 지식의 전수자로서 역할이었다. 아시아의 지식의 역사를 생각할 때, 불교 지식의 전통을 무수한 주석서와 논서를 저술하거나, 그 내용을 분석하여 과문(科文)을 만들거나, 또는 단지 학습함으로써 이 전통을 담지하고 이어 나간 무수한 학승들이 있었다. 이에는 한국불교사에 나타난 무수한 학승들의 이름을 다 거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예컨대 고려의 의천은 그러한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이다. 의천은 고려를 생각하고, 세계를 생각하고, 불교를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는 동아시아의 지식의 지평을 널리 바라보고 그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그 전통을 복구하는 일로 삼고, 중국으로 들어가 없어진 장소(章疏)들을 수집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는 고려를 생각하고, 세계를 생각하고, 불교를 생각한 사람이었다.

사상은 경전 속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예술과 문학 작품을 통해서도 불교 사상은 표출된다. 예술적 표현을 통해 드러나는 종교적 염원과 이상의 세계는 문자 언어보다도 더 강력할 수 있다. 이것을 강우방은 ‘조형 언어’라고 부른다. 그는 〈불교미술로 복원하는 불교사상〉에서 석가모니와 관음보살 조성에서 드러나는 미술적 표현을 분석하여 불교 사상을 추출해 내고 있다.

이종찬은 〈불가와 유가의 시적 교류의 한 단면〉에서 불교 승려들이 지은 시를 소개하면서, 조선시대 유학자들과의 교류 속에서 나타나는 시인이자 문화적 엘리트로서 승려들의 모습을 추적하고 있다. 고급문화와 예술뿐만 아니라 민속과 풍습 속에 나타나는 불교를 빠뜨릴 수 없다. 김용덕의 〈일상의 삶에서 만나는 불교〉에서는 우리가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쓰고 있는 언어와 습속에 들어 있는 불교를 샅샅이 찾아 보여주었다.

석길암은 〈설화에 나타난 한국불교, 그 변주의 양상〉이라는 글에서 이야기, 구술의 전통과 전설과 신화에 섞인 불교 이야기를 분석하고 있다. 불교는 민중의 삶 속에 다가가 용화불교 등의 형태로도 나타났고, 또한 무속과 습합하여,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을 울렸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구미래는 불교의 생사관이 사십구재 천도재 등의 의례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불교 내세관의 특성과 현대적 함의〉라는 제목으로 분석하였다.

한편, 불교는 재가와 출가의 두 가지 삶의 형태를 제공한다. 재가자는 출가자의 복전으로써 그들을 후원하는 역할을 하며, 반대로 출가자는 수행의 이상을 실현해 보임으로써 수행의 모범을 보이고 불교 공동체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여러 가지 다른 역할도 주어졌다.

승려들의 현실참여 등이 그것이다. 정치외교의 측면에서 볼 때, 굳이 임진왜란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불교는 호국의 종교였고 나라를 하나로 묶는 중요한 이데올로기로도 작용하였다. 삼국시대 왕들은 불교를 치세 전략으로도 사용했다.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전륜성왕의 개념은 왕권을 공고히 하는 데 주요한 지배이념을 제공하였다. 김상현의 논문 〈신라불교의 정치외교적 기여〉는 그런 사실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최근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포함한, 공공의 지식 영역에서 불교사와 관련한 많은 내용이 사라지고 있음은 몹시 슬픈 일이다. 이것은 자신의 지성의 역사를 정신 속에서 스스로 지우는 일이다. 요즘 한국의 문화 유전인자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러한 유전인자를 뺀 한국인은 앞으로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이번 기획을 통해 우리는 한국인의 삶과 문화와 가치관의 지평 속에서 불교란 무엇인가를 새롭게 조망해 보았다. 불교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전통과 문명사적 측면에서 재평가함으로써 우리 안목이 조금이라도 확장되었다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앞으로도 우리는 불교가 현대를 거치면서 그 역할과 기대가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를 살펴보고 불교가 미래 사회에 기여할 부분은 어떤 것인지를 따져 볼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이를 꼼꼼하게 따져 보는 일은 현대의 불교지성들에게 부과된 책임이기 때문이다. ■

2011년 9월
조은수(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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