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흠
본지 편집위원
불교평론이 어느덧 창간 10주년을 맞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것이 괜한 말이 아니다. 우공이산(愚公移山)! 어떤 일이든 구성원 모두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온 정성을 다해 끊임없이 10년을 행하면 양의 변화가 질의 변화로 전이하고, 구조의 배열이 바뀌는 법이다. 교계에 진지하고 활발한 토론의 장을 마련하고 불교를 대중화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한 면이 있지만, 우공이산이란 낱말을 떠올리기엔 부족한 점이 많다.

역사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미래를 기억하여 지금 이 순간을 성찰하고 형성하는 것. 이 시점에서 미래의 미래, 미래의 현재, 미래의 과거를 앞당겨 기억하며 현재를 구성해 본다.

욕망의 과잉 시대, 2019년엔 ‘빈 곳’이 완전히 사라질 듯하다. 빈틈마저 개발하고 착취한 바람에 40%의 생명이 멸종위기에 놓이고 44억여 명이 굶주리는 것이 21세기 오늘의 지구촌이다.

자연의 대재앙이든, 철저히 착취당하여 굶주린 자들의 반란이든, 욕망을 끝없이 추구하다가 그것이 신기루임을 통렬하게 깨달은 자들의 집단자살이든, 인류의 미래는 암울하다. 모든 욕망을 끊고 해탈을 이루고자 하는 불교가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과연 어떤 종교나 사상이 그 일을 해낼 것인가.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인간이 연기를 깨닫고 나와 서로 조건이 되고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타인을 위하여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는 삶을 불교가 제시해 주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이 그럴 것인가.

파시즘의 유령이 더욱 짙게 지구촌을 덮을 듯하다. 제국과 자본의 폭력과 억압 속에서 민주주의와 정의의 가치는 형해만 남았다. 가난한 자는 더욱 빈곤해졌고 굶어죽는 이들은 날로 늘어나고, 억압된 자는 더욱 주눅 들고, 불의는 늘 정의를 압도한다.

자본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자 땅과 강을 파헤치고 상품과 무기를 강제하고 자원을 마구 약탈하면서 이에 저항할 경우 무자비한 폭력으로 응징한다. 이를 견제할 언론은 가진 자들의 나팔수가 되고, 폭력을 제한할 사법부는 애완견이 되었다.

냉정하게 보면, 제국과 자본과 국가의 카르텔을 무너뜨리는 일은 ‘불가능한 꿈’이다. 하지만, 불자들만이라도 올바로 깨달아 철저히 무소유의 삶을 지향하고 보살행을 실천한다면 그 견고한 성은 피 흘리는 저항 없이도 허물어질 것이 아니던가.

눈을 안으로 돌려도 마찬가지다. 불교는 신을 따르는 종교도,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상도 아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마음공부다. 무명(無明)에서 벗어나 깨닫는 순간 내 안의 부처를 발견하는 것이요, 부처가 되어도 중생을 부처로 이끌기 위하여 이를 미루고 중생의 고통과 업장 소멸에 참여하는 진속불이(眞俗不二)의 길이다.

그런데 시장과 상품 화폐가치가 절 마당까지 스며들었는지, 신을 만들어 신의 이름으로 이익을 도모하고, 공화(空華)를 지어내 진리라 이름한다. 마음이 아니라 절집을 닦고 키우는 데 더 관심을 기울인다. 부처님을 모신 지 꽤 오래인 분들 가운데 가난한 이웃이나 죽어가는 생명에 전혀 자비심을 보이지 않는 이들도 적지 않다. 안수정등(岸樹井藤) 상태인 것이 대중만은 아닌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절벽에서 곧 끊어질 줄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꿀의 달콤함에 취해 있는 사람들의 등을 쏘는 벌이 되지 않는다면,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칼을 벼려 곳곳을 남김없이 잘라내지 않는다면, 불교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사이비 종교로, 절집이나 불교 관련 대학은 ‘승려·교수 귀족’들의 사교장으로 전락할 것이다.

21세기, 대중은 분명히 중세시대와 다른 고통을 겪고 다른 업장을 짓고 있다. 석가모니께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빈부격차가 심해졌고 해마다 수천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굶주리거나 병에 걸려 죽고 있다. 이는 가난한 이들이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이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무자비하게 착취할 수 있도록 한 구조적 모순 때문이다.

이 모순 속에서 제3세계의 민중들은 일할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있으며 일을 하는 자는 일하면 일할수록 외려 가난해진다. 해마다 평균 5천만 명이 굶어서 생긴 질병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 미디어의 조작에 따른 고통, 정치적 억압과 폭력에 따른 고통, 환경 파괴에 따른 고통, 상대적 박탈감에 따른 고통, 공동체의 해체에 따른 고독과 고통, 자본주의 체제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물화(物化)와 소외에 따른 고통, 해마다 수십 억 개체의 인간과 생명이 죽어가는 고통, 시뮬라시옹에 현혹되는 고통 등 곳곳에서 대중은 중세와 분명히 다른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

물론 불교만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불교는 다행스럽게도 소외의 심화, 욕망 과잉, 폭력과 고통의 일상화, 공동체의 해체, 환경과 생명 파괴 등 21세기의 인류가 맞고 있는 모순과 문제에 대해 대안의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싹이 많다. 그럼에도 지금처럼 중세의 고통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대중은 다른 방법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려 할 것이 아니겠는가.

불교학도 위기이기는 마찬가지다. 지금 한국 불교학은 얼핏 보면 모순으로 보이는 두 가지 과제 ― 초기불교와 경전 텍스트로 돌아가 불교의 근본정신과 진리에 부합하는 것과 21세기의 맥락에 맞게 환골탈태하는 것 ― 를 회통(會通)시켜야 한다. 실체에 대해 올바른 이해가 없는 응용은 늘 오용으로 귀착된다.

초기불교를 연구하는 이들은 동아시아의 대승불교가 중국 사상에 물들어 관념에 빠지거나 초기불교의 정신에서 조금 벗어나 있음을 지적한다. 동아시아 불교를 연구하는 이들은 초기불교 교리가 형이상학적으로 그리 깊지 못하다고 반박한다. 부처님의 말씀, 곧 교(敎)를 따르는 이들은 선(禪)의 비논리성을 나무라고, 부처님의 마음, 즉 선을 따르는 이들은 말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절대 깨달음은 없다고 단언한다.

순수불교를 하는 이들은 응용불교의 무지를 비판하고, 응용불교를 하는 이들은 순수불교의 고루함을 지적한다. 그러는 사이에 동아시아로부터 불교를 전수받은 미국과 서양의 불교가 속속 역류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빚어낸 마음의 문제들, 곧 정신적 빈곤, 불안과 고독, 소외에 대한 반대급부로 불교에 관심을 가졌기에 그들 불교는 마음공부에 충실하다.

서양의 합리성에 바탕을 두고 불교를 수용하기에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다. 초기 경전 텍스트를 바탕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전하고, 이를 사다리로 삼아 부처님의 마음에 이르고자 선정을 거듭하지 않으면, 부처님의 말씀과 마음을 제대로 알되 이를 21세기의 맥락에 맞게 응용하지 못한다면 ‘한국불교학’은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다.

신라인이 극락정토로 생각한 서악(西岳), 선도산에 가면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과 달리 아미타불의 발은 지면을 밟고 있다. 그렇듯 신라인은 굳게 현실에 발을 디디고서 정토왕생을 염원하였다.

부처님의 말씀과 마음에 올바로 다가가고, 교조에서 벗어나 21세기 오늘의 현실에 맞게 해석하고 변용하며, 죽어가는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 안의 부처를 찾아 드러내 나 스스로도 부처가 되는 길을 찾을 때 한국불교와 불교평론의 앞으로의 10년은 의미를 가질 것이다. 연꽃은 꽃향기가 욱연한 산록이 아니라 진흙탕에서 피어난다. ■

2009년 12월
이도흠(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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