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르노빌 원전 사고 25년의 교훈

박경준
본지 편집위원장
인류는 원래 생존을 위하여 자연을 ‘경작’하며 문명을 일구어 왔지만 현대문명은 그 ‘생존’에 만족하지 않고 욕망의 무한 증식을 꾀하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거의 정점에 달한 인간의 문명은 인간을 엄청난 ‘위험’ 속으로 내몰고 있다. ‘대량생산−대량소비’ 경제 구조의 산물인 생태계 파괴와 기후변화는 말할 것도 없고, 식량난을 극복하기 위한 유전자 조작 식품은 앞으로 인류에게 어떤 재앙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특히 25년 전 체르노빌과 이번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은 우리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이처럼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낸 갖가지 위험에 둘러싸여 있는 ‘위험사회’ 내지는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살고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 교수는 “현대사회는 실패해서가 아니라 성공해서 병을 앓는다.”라고 진단하며, 그의 책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글로벌 리스크를, 생태, 경제, 테러리즘 등으로 구분하면서 ‘세계시민주의’를 제안한다.

우리는 이 ‘위험사회’를 무엇보다도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통해 체감할 수 있다. 체르노빌 사고는 지난 1986년 4월 26일 새벽에 발생했다. 원자로 4호기에 대한 안전 점검을 실시하는 단순 실험 과정에서 핵분열 반응이 나타나면서 근무자가 비상정지 버튼을 눌렀지만, 이것은 핵분열을 가속화시켜 폭발로 이어졌고 화재와 방사능 유출이 뒤따랐다.

다음 날인 4월 27일부터, 원전에서 5㎞ 떨어진 작은 도시 프리피야트의 주민 5만 명을 비롯한 주변 도시와 마을 주민 23만 명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다. 원전 반경 30㎞는 ‘출입통제구역’으로 선포되었다. 우크라이나 정부의 보고에 따르면, 체르노빌 사고 초기 직접 사망자는 56명이며,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추정에 의하면 피폭으로 인한 암 사망자는 약 4,000명이다. 하지만 환경단체인 그린피스나 민간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망자는 3만에서 6만 명에 이르고, 수십만 명이 암과 기형아 출산 등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고 수백만 명이 약물치료 대상자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또한 1986년부터 1992년까지 원전 안팎의 오염물질 수거 작업에 투입된 사람들(청산인; 리퀴데이터)은 연인원 60만에서 100만 명에 달한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25년째를 맞고 있지만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지금도 핵붕괴가 지속되어 뜨거운 열과 방사성 물질이 나오고 있고, 이를 관리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피폭의 위험을 무릅쓰고 교대근무한다고 한다. 더욱이 사고 직후 소련 정부가 군부대와 헬리콥터를 동원해 졸속하게 4호기를 덮은 콘크리트 석관에는 균열이 생겨, 우크라이나 정부는 유럽부흥개발은행 지원으로 철제 방호벽을 씌우는 공사를 진행 중이다.

또한 벨라루스는 국토의 23%가 세슘 137에, 10%가 스트론튬 90에 오염되었으며, 농경지 2,500㎢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고 국토의 3%인 6,000㎢는 출입이 통제된 상태라고 한다. 그리고 아직도 전국에 방사성 물질이 남아 있기 때문에 한 해 약 12만 명의 어린이가 입소하여 체내에 흡수된 방사능 농도를 관리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일본이 왜 후쿠시마 제1원전 반경 20㎞ 안 지역을 ‘죽음의 땅’으로 선포했는지 잘 알게 해 준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 대한 독일 정부의 반응은 신속하였다. 독일은 이미 확정된 원자력발전소의 확장 또는 신설 계획을 무기한 보류하고 구식 원자로는 가동을 중단시켰다. 사고 후 불과 몇 주 만에 ‘환경, 자연 보호 및 원자로 안전부’를 발족시켰고 지방정부들은 방사능위원회를 설치하여 우유와 잎채소의 방사능 수치를 측정했다. 이번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에도 독일 정부는 주정부들과 협의해 2020년까지는 원전을 폐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원전 안전성에 대한 포괄적 재검토를 지시하고, 일본의 간 나오토 총리도 원전 증설 계획 동결을 시사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세계적 추세에 역행하고 있다. 체르노빌 사고의 최대 피해국인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서도 정부가 원전 추가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들 나라와 우리나라는 불감증에 걸린 듯하다. 우리 정부는 여전히 ‘원전은 안전하다’고 홍보하면서 2030년까지 원자력을 통한 발전 비율을 59%까지 높인다는 에너지 계획을 고수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외국 여러 나라에서 자국민에게 한국 방문을 자제할 것을 권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또한 체르노빌 사고 당시, 방사능 낙진이 약 1,100㎞(후쿠시마에서 한국까지의 거리와 비슷) 떨어진 곳에서도 검출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부존자원이 부족하고 수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로서는 원자력 발전과 수출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생명과 생존을 담보로 한다면 우리는 과감히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 인간의 생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 경전에는 인간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기 위한 여러 가르침이 있는데, 그 가운데 ‘바늘구멍(針孔)’의 비유는 매우 인상적이다. 바늘구멍이란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 한 사람이 수미산 위에서 실오라기 하나를 던지는데 그것이 산 밑에서 어떤 사람이 들고 있는 바늘구멍에 꽂히기만큼이나 어렵다는 비유이다. 사람의 생명은 이처럼 희유하고 기이한 것이다. 이렇게 소중한 인간의 생명을 소홀히 다루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구조는 크게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개발론자와 성장론자들은 흔히 주장한다, 세상에는 아직 수많은 실업자가 있고 절대빈곤으로 고통받는 사람도 많다고. 그리하여 개발과 성장의 논리는 아직 유효하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그들의 주장은 약자를 위한 것이기보다 그들 가진 자를 위한 것이기 십상이다.

오늘날 지구촌 재화의 총생산량은 세계인이 살아가기에 결코 부족한 양이 아니다. 문제는 부가 편중되어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고, 많은 사람이 물질 만능주의에 매몰되어 있다는 점이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인간개발 보고서’에 따르면 오늘날 지구촌의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지구인의 절반은 겨우 생존할 정도로 근근이 살아가며 그중 10억 명은 비참할 정도로 가난하다. 반면 최상위에 있는 350명의 부와 수입 총액은 놀랍게도 세계 인구의 45%의 부를 합한 것보다 많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3명이 보유한 재산은 가난한 48개국의 총생산량보다 많다고 한다.

우리는 ‘필요 이상은 갖지 않는다’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가르침을 명심해야 한다. 지율 스님은 “행복에 도달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무엇인가 추구하는 대신 욕망을 버리고 조촐하게 살아가며 자연의 빛과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은 황금의 가치 그 이상이며, 최소한의 것을 누리고 최대한의 것을 이웃과 나누는 곳에 진정한 평화가 있습니다. 최소한의 물질적 생활로 최대한의 영적 기쁨을 누리는 것은 신앙적인 아름다움입니다. 동양에서는 이를 안빈낙도(安貧樂道), 소욕지족(少欲知足)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청빈한 사람에게는 고뇌가 없으며, 순리를 이해하고 우주가 나와 한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생사(生死)가 없습니다.”라고 부드럽지만 분명하게 설한다. 지율 스님의 말씀은 부처님 당시, 아난 존자와 우전왕의 대화를 떠올리게 한다.

우전왕의 왕비가 5백 벌의 가사를 아난 존자에게 보시했는데, 이를 본 우전왕이 존자에게 묻는다.

“이 많은 옷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여러 스님께 나눠 드릴 생각입니다.”

“그러면 스님들이 입던 헌 옷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스님들의 헌 옷으로는 이불 덮개를 만들겠습니다.”

“헌 이불 덮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헌 이불 덮개는 베갯잇을 만드는 데 쓰겠습니다.”

왕의 질문은 계속되었지만 존자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헌 베갯잇으로는 방석을 만들고, 헌 방석은 발수건으로, 헌 발수건으로는 걸레를 만들고, 헌 걸레는 잘게 썰어 진흙과 섞어 벽을 바르는 데 쓰겠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자원을 나눠쓰고 아껴쓰고 재활용하면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불교적 지혜를 실천해 간다면 원자력 발전에 대한 지나친 의존으로부터 점차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경제성으로 보더라도 원자력 에너지는 결코 값싼 에너지가 아니라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원전 폐쇄를 하는 데 필요한 기간은 건설 기간 10년보다 훨씬 길고,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예컨대, 일본 도카이 1호기의 경우, 1998년 가동이 정지됐지만 해체 계획은 2001년에야 이루어졌고, 실제 해체는 2021년이 되어야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 1979년 미국 스리마일 원전 사고의 경우, 발전소 내부의 방사성 물질 제거 작업이 1993년까지 계속되었다. 14년 동안 방사성 물질 제거 작업에 이미 약 10억 달러의 비용을 쏟아부었지만, 본격적인 발전소 해체 작업은 아직 시작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원전 폐쇄에 대한 대비를 매우 소홀히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원전 사고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발생할지 모른다. 후쿠시마의 경우는 강한 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미국 중남부 6개 주를 강타한 토네이도가 브라운스 페리 원전의 전기공급선을 끊어 놓아 비상발전기를 가동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앞으로 지구에는 지진과 해일은 물론, 기상 이변과 주기적인 태양 흑점 폭발 등을 비롯한 어떠한 천재가 일어날지 모른다. 인재 또한 염려스러운 바다. 사람의 실수도 실수지만 의도적인 테러 공격은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하다.

우리는 그동안 입은 원전의 혜택에 감사해야 하지만, 이제 신규 원전 계획은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노후한 원전의 가동을 중지시킴은 물론 원자력 중심의 에너지 정책에 대한 일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혹자는 불교가 원전과 같은 세상일에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증일아함의 다음 가르침을 들려 드리고 싶다.

“병자를 돌보는 것은 곧 나(부처님)를 돌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몸소 병자를 돌보고 싶기 때문이다.”

2011년 6월
박경준(본지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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