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영
본지 편집위원

어떤 구루(Guru)가 저녁예배를 올리기 위해 자세를 가다듬고 앉아 있었다. 그때 아슈람에서 키우던 고양이가 들어와 마음을 산란케 했다. 구루는 제자들에게 예배 시간에는 고양이를 묶어두라고 지시했고, 그때부터 예배 시간이 되면 고양이를 묶어 두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른 뒤 구루가 타계했지만 고양이는 여전히 묶여 있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양이가 죽자 이번에는 다른 고양이를 한 마리 데려와서 묶어두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세기가 흐르자 유식한 학자들이 ‘예배 시간에 묶여 있는 고양이의 전례적 의미’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인도 출신의 가톨릭 신부 앤서니 드 멜로(Anthony De Mello)가 들려준 이야기다. 관습이나 의례에 대한 문제를 고민할 때 곱씹어보게 되는 내용이다. 의례나 전통이 어떻게 탄생하고, 어떻게 정통이라는 권위를 획득해 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과 의례는 나름대로 필요가 있고 처음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만들어진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상황이 달라져도 한번 만들어진 형식은 관례로 남게 된다. 게다가 시간의 퇴적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관습적 의례에 대해 전통이라는 권위를 부여한다. 그때쯤이면 현학적인 표현을 쓰는 학자들이 달라붙어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관습은 종교적 전통으로 고착화된다. 이제 고양이 묶기는 누구도 토를 달거나 거역할 수 없는 종교적 권위가 된다.

역사가 오랜 종교에서 의례는 기본적으로 고양이 묶기와 같은 속성들을 지니고 있다. 인도의 정통 종교였던 브라마니즘은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건강한 아기의 수태를 비는 의례를 행했다. 미래에 존재할 사람보다 의례가 먼저 탄생하는 셈이다. 그렇게 일생에 걸쳐 수많은 의례로 점철되는 것이 브라마니즘의 종교적 전통이다. 부처님은 그와 같은 종교적 의례를 부정하셨다. 그래서 부처님께 귀의한 이교도들은 그들이 행해 왔던 갖가지 의례를 멈추어야 했다. 1천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던 카샤파 삼 형제 역시 부처님께 귀의한 뒤 의례에 동원했던 제구들을 강물에 던져버렸다. 형식적 의례 속에는 날마다 새롭게 형성되는 창조적 내용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세상은 늘 새롭고 모든 사람이 창조적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의례라는 형식과 고정된 그릇에 내용을 담을 수밖에 없다. 더러는 그야말로 의례적으로 반복되는 의례를 따라 해야만 종교적 감동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맥락에서 여전히 고양이 묶기는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받는다. 부처님은 의례를 부정하셨지만 불교에서 다양한 의례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게다가 2,500년이라는 역사와 인도, 중앙아시아, 중국 대륙이라는 다양한 지역적 문화, 그리고 종파적 입장이 더해지면서 불교 또한 방대한 의례 체계를 가진 종교가 되었다.

하지만 시공을 초월한 의례란 있을 수 없다. 세월이 지나다 보면 본래적 의미와 내용은 사라지고 고양이 묶기와 같은 형식만 남아 행해지는 경우도 많은 법이다. 모든 형식적 틀에서 벗어나 심요(心要)를 추구하는 선사들은 그와 같은 의례들을 고양이 묶기와 진배없는 의미로 여겼다. 선은 형식이 아니라 곧바로 본질로 파고드는 직지인심(直指人心)과 여래의 마음을 전하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만해 한용운이나 봉암사 결사에 동참했던 선승들 역시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의례를 바라보았다. 1910년에 발간된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만해는 당시 조선불교의 번잡한 재의식과 의례에 대해 “잡박한 도깨비 연극”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며 복잡하고 번거로운 의례는 모두 폐지하고 간결하게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만해의 이런 입장에 대해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을 받은 근대 지식인의 한계라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만 볼 수 있을까? 의례의 간소화에 대한 만해의 태도가 오리엔탈리즘이라면 브라만의 의례를 부정했던 붓다도, 중국 선종의 파격적인 전통도 서구적 모더니티의 영향 때문이냐는 반문을 피할 수 없다.

의례 개혁을 주창했던 《조선불교유신론》이 발표되고 25년째 되던 1935년 안진호의 《석문의범》이 편찬됐다. 이 책은 당시 조선불교계에서 공전의 히트를 했다. 상하 2권으로 된 이 책에는 사찰에서 행해지는 각종 예불, 축원, 송주, 불공과 천도 등에 관한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담겨 있었다. 간결하고 새로운 의범(儀範)에 대한 요청으로 편찬되었지만, 이 책의 골간은 그동안 행해지던 의식문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 역시 번다한 의례를 현대에 맞게 개편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다만 이 책의 등장으로 한국의 불교의례가 통일되는 효과는 거두었을 것이다.

만해가 의례 개혁을 주장한 지 백 년이 지났고, 불교의례의 전범이 되고 있는 《석문의범》이 편찬된 지도 80년이 다 돼 간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찰에서 행해지는 의례는 여전히 《석문의범》에 근거해 있다. 물론 월운 스님의 《삼화행도집》(1980)과 광덕 스님의 《불광법회요전》(1983) 등 의례개혁에 대한 시도는 계속 이어졌다. 특히 최근에는 조계종에서 《통일법요집》(1998)을 발간했고, 승가대학 교육교재로 《불교상용의례집》(2013)이 편찬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교의 근본사상이 시대적 맥락 속에서 녹아든 의례, 종단적 정체성을 고려하여 다듬어진 의례, 의미와 내용을 교감하고 감동을 주는 의례가 완성되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단순히 번역문을 병기하고, 몇몇 의례문을 한글로 번역한다고 해서 의례의 절차와 내용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례는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담보하는 종합적이고 창의적인 작업이어야 한다.

긍정적인 점은 시대에 맞는 의례를 만들어야 한다는 방향에 대해서는 일정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어떻게 의례를 개혁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입장이 나뉘는데 첫 번째가 복고주의적 태도다. 현행의 의례체계에 대해 문제가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현행의 의례가 전통에 어긋나기 때문이라는 입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의례개혁은 전통복고 내지는 전통복원이라는 입장이 되고, 그것은 고양이를 더 단단히 묶어야 한다는 방향이 되고 만다.

전통의 회복과 전승이라는 태도만으로는 결코 시대적 상황과 부합하는 창의적인 의례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의례는 바로 지금 시점에 통용되고, 기능과 효과를 고려해서 창의적으로 완성할 문제이지 과거의 전통만을 고집해서는 곤란하다. 의례는 당대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천추(千秋)의 전범을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의례는 오늘의 상황과 생활문화를 고려하여 이 시대에 맞는 형식과 내용으로 재정비되어야 한다.

둘째는 선종이나 만해가 그랬던 것처럼 모든 의례를 획기적으로 간소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판단의 배경에는 불교는 태생부터 의례를 배척한 종교였으며, 법(法)의 종교였다는 입장을 깔고 있다. 하지만 종교에서 핵심적인 가치와 내용이 의례라는 형식적 틀 속에 담겨 전승됨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종도들은 의례를 통해 종교적 정체성을 획득하고, 신심과 종교적 감동을 얻기도 한다. 따라서 의례에 대한 지나친 부정은 마지 밥조차 내려먹지 못하는 무능한 출가자를 배출하고, 종교적 통합과 문화의 전승을 단절시킬 위험이 있다. 결국 전통의 계승과 시대적 요구에 대한 조화로운 절충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교리와 역사적 전통에 기반하되 현대적 상황과 조건을 고려하여 의미와 느낌이 살아 있는 의례가 되어야 한다.

종교에서 의례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박제화된 의례만을 고집하는 순간 의례적 반복이 되고, 감동은 사라져서 자칫 고양이 묶기와 같은 우를 범하게 된다. 기도와 수행을 방해하는 고양이는 묶어야 하지만 죄 없는 고양이는 풀어주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례는 무엇이며,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을 것이며, 무엇을 전달하고 공유할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 고민이 뒤따라야 한다. 따라서 고양이 묶기에 대한 의미를 찾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방식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시대와 대중의 마음을 읽고 여래의 마음과 교리를 담아내고자 하는 창조적이고 자신감 있는 개혁이 요구된다.

《불교평론》은 고양이 묶기가 아니라 시대적 맥락 속에 살아 있는 의례의 탄생을 바라는 의미에서 불교의례에 대한 제반 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특집을 마련하였다. 이번 특집에 제기된 내용들이 현대적이고 창조적인 의례를 탄생시키는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

2013년 6월

서재영(본지 편집위원)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