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교는 일단정지(一旦停止)를 먼저 가르친다

허우성 교수
본지 편집위원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대중이 모여 사는 세속 사회 한국-이곳이 바로 우리가 ‘불교와 사회’라는 주제에 대해 글을 쓰는 장소이다. 이 글쓰기는 출세간적 성향이 강한 불교를 세간과 연결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시민이라는 대중은 중생일 것이니 ‘시민 중생’이란 말을 사용할 수 있으리라. 시민 중생의 특성은 움직이는 것이고 그 동력은 주로 욕망과 분노이다.

장아함의 《소연경》에 따르면, 대중은 시대나 하는 일에 관계없이 흔히 십악(十惡)을 범한다. 십악에는 살생, 훔치기, 음란, 거짓말[欺妄], 이간질[兩舌], 욕설[惡口], 꾸민 말[綺語], 인색과 탐욕[慳貪], 질투, 사견(邪見)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소연경》은 십악의 예방책으로서 두 개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왕을 세우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명상 수행의 전통을 회복하는 길이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후자가 더 확실하다. 초기불교도들은 역사를 내려오다가 망각된 선(禪)의 전통을, 출가 수도함으로써 회복하고 계승하려고 했다. 출가 수도와 선정의 궁극적인 목표는 열반이고, 이를 성취하면 욕망과 분노는 완전히 사라진다고 한다(잡아함 《염부차경》). 승속을 가리지 않고 성욕, 소유욕, 권력욕, 명예욕, 증오 때문에 마음이나 몸을 움직인다면, 이는 열반에 이르지 못한 명확한 증거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다음 61인의 제자를 앞에 두고 전도 선언을 했다. “비구들아, 길을 떠나라. 대중들(bahujana)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세상을 동정하여, 인간과 천신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길을 떠나라…… 아주 원만하고 청정한 행(brahmacariyaṃ)을 드러내 보여라.” 하고(율장 《마하박가》). 한국의 불교학자 중에는 이 선언을 ‘사회적 실천’에의 요청으로 읽는 자들이 있다. 하지만 이 선언은 대중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한 사회적 실천을 권하고 있다고 해도, 청정행 곧 욕망과 분노의 정지를 먼저 촉구하고 있음을, 거의 ‘반사회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욕망의 일단정지를 가르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초기불교도들은 세속 사회와 상당한 거리를 두었다. 가령, 장부경전의 《범망경》에 ‘저급한 이야기’로 27종의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자들은 [재가자들이] 신심으로 가져온 음식으로 살면서 저급한 이야기(tiracchāna- kathā)에 몰두한다.” 그 사례 중에는 왕, 도둑, 대신, 군대, 전쟁, 음식, 옷, 탈것, 도시, 나라, 여자, 영웅, 번영과 불운이 포함되어 있다. “사문 고따마는 이러한 이야기를 멀리 떠났다.”라고 한다. ‘저급한 이야기’는 어원으로 본다면 ‘짐승 이야기’란 뜻이다. 짐승이 옆으로 기어가듯이 저급한 이야기는 최상으로 인도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중 매체가 쏟아내는 것은 주로 저급한 이야기가 아닌가? 초기불교의 윤리는 그래서 정치학 없는 윤리학에 가까워 보인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시민 중생의 일반적 성향과 동떨어져 있음은,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자비 관련 일 절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이처럼 모든 존재에 대하여 한량없는 마음을, 온 세계에 대하여 자애로운 마음(metta)을 닦게 하여지이다.”(149) 한국에 이런 어머니가 있다면 한국의 마더 테레사로 칭송받을 것이다.

2. 인간의 일반적 성향은 항상 움직이는 것이다

근대 영국 사상가들은 정치 이론이나 경제 이론을 전개할 때 대체로 인간의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성향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만인은 만인에게 늑대다.”라는 말로 유명한 홉스(Thomas Hobbes, 1588~1679)가 특히 그러하다. 그가 《리바이어던》에서 그려낸 인간은, 《소연경》의 중생과 아주 유사하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은 부단히 움직이는 존재이면서도 그 움직임이 너무나 이기적이고 적대적이어서 서로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은 계약으로써 국가와 법률을 만들어 자연권(自然權)을 제한하고, 국가를 대표하는 의지에 그것을 양도하여 복종해야 한다고 보았다.

역동성이 인간의 일반적 성향이라고 파악했던 홉스는, 사람에게 욕망의 행위를 그만두도록 출가 수도나 열반과 같은 마음의 평정을 권유할 수 없었다. 《리바이어던》 6장에 따르면 인간은 두 가지 운동 곧 생리적 운동(vital motion)과 자발적 운동(voluntary motion)을 한다. 전자는 혈액순환, 호흡, 소화, 영양, 배설 등이고, 후자는 가기, 말하기, 우리의 사지 움직이기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대상을 만나게 되면 신속하게 생리 운동에 대한 유불리(有不利)를 따진다. 이로운 대상에 대해서는 욕망(desire)이 생기고, 해로운 대상에 대해서는 혐오감(aversion)이 생기며, 욕망의 대상은 선(good)이고 혐오의 대상은 악(evil)이다. 홉스에게는 욕망과 혐오감[貪瞋]은 제거 대상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의 생리적 운동을 돕기 위해 일어난 자연스러운 반응일 뿐이다. 홉스가 제시하고 있는 인간의 지복(至福, felicity)은 열반과는 대척점에 서 있다.

사람이 시시때때로 욕망하는 사물들을 획득하는 일에 ‘계속해서 성공하는 것(continual success)’ 다시 말해서 계속해서 번영하는 것(continual prospering)을 지복이라고 한다. 이것은 물론 이 세상에서의 지복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한, 마음의 영속적인 평정(平靜, perpetual tranquility of mind)과 같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삶 자체는 운동에 불과하며, 삶이 감각(sense)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욕망이나 공포(fear) 없이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Levaiathan 6장)

홉스는 “마음의 영속적인 평정”이나 “마음의 휴식 상태”와 같은 것을 궁극 목적이나 최고선으로 보지 않았다. 움직이는 인간에게는 항상 욕망과 혐오감이 있기 마련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홉스는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만족된 생활을 보장해 주는 세력,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세력에 대한 쉼 없는 욕망(restless desire of power after power, that ceaseth only in death)”을 “모든 인간(all mankind)”의 일반적 성향으로 보았다(Levaiathan, 11장).

홉스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동적 인간밖에 없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정치와 경제면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해 온 한국인들, 그리고 최근 대형화된 종교 시설물은 모두 역동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3. 시민 중생이 향유하는 자유는 대체로 욕망의 표현이다

시민 중생은 갖가지 자유와 권리를 향유하면서 욕망을 충족시킨다. 대한민국 헌법에 따르면, 이들에게는 행복추구권을 비롯하여 법 앞의 평등권, 신체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과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재산권·선거권·근로의 권리 등이 있고,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자유와 권리―하지만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위해 경시되어서는 아니 될 것―로는 자기결정권, 일반적 행동 자유권, 평화적 생존권, 휴식권, 일조권, 생명권과 저항권 등이 있다.

욕망은 정치적 자유 행위에서보다 경제적 자유 행위에서 더 잘 보이는 것 같다. 우리 국민은 자유시장경제와 사유재산제 아래에서 헌법상의 경제적 기본권에 속하는 재산권과 직업 선택의 자유를 향유하고, 기존의 재산을 이용하여 재산을 무한정 축적할 수 있고, 그 재산을 임의로 처분할 수 있다. 그리고 시민 중생은 경쟁의 자유, 그리고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과학과 기술의 힘을 충분히 활용할 자유, 자신의 상품이나 서비스를 판매하기 위해 광고할 자유도 있다. 헌법은 청정행 서약을 국민의 의무로 규정하기는커녕 결혼생활을 보장하고 있다.

또한 납세와 국방을 헌법상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어서 불교 신자가 불살생 계율을 내세워 국방의 의무를 거부하면 이는 병역법 위반이 되어 징역형에 처해질 것이다. 이와 같이 재산권과 언론의 자유 등을 행사하는 것이 모두 인간의 욕망 충족이라고 보면, 헌법과 법률은 특정 국가에서 자유와 권리라는 이름으로 국민의 욕망과 분노를 조정하고 제한하는 사회적 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정의와 평등이라는 가치도 자유와 마찬가지로 주로 ‘일단정지’를 경험하지 못한 대중들이 추구하는 것이므로 욕망의 표출과 깊은 관련이 있다.

4. 세속 사회를 향하여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무지에는 욕망[貪]과 분노[瞋]라는 이란성쌍둥이가 따른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나 동물학자 콘라트 로렌츠(On Aggression, 1967)도 욕망이 분노 및 공격성과 얽혀 있다는 부처님의 통찰에 깊이 공감할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에로스적 본능과 같은 생명 보존의 본능은 공격 본능이나 파괴 본능과 거의 함께 움직이고, 에로스적 욕망은 흔히 공격과 파괴에 대한 욕망으로 이어지고 이는 전쟁의 원인이 된다. 프로이트는 인류의 평화 성취 가능성에 대해 비관적이었다(《왜 전쟁인가?》 1932).

탐진치 삼독이 다 없어진 열반을 가르치는 불교, 그리고 홉스가 말한 지복과 세력을 열심히 추구하는 역동적인 한국 사회, 이 둘을 두고 다음과 같은 물음들이 생긴다. 첫째, 홉스의 지복에 불교의 열반을 접목시킬 수 있을까? 서로 반대 방향에 있으니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둘째, 한국인들이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서 자유, 평등, 정의를 열정적으로 추구하면서도 폭력을 최소화할 수 있는 법 제도 실현이 가능한가? 가능해야 한다. 그런 법 제도 실현이 불가능하면 혼란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하지만 정답은 인간의 본성과 제도에 밝은 사회과학자들이 불교학자와 함께 추구해야 한다. 셋째, 역동성도 줄일 수 없고 제도 개선도 불가능하다면, 개인 차원에서 욕망과 분노와 폭력을 줄이기 위해 글쓰기조차 포기하고 도를 닦아야 할 것이 아닌가? 도 닦기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국가가 전쟁을 대비해야 하는 것도 현실이라면 국가 이성에 대한 적절한 옹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욕망을 연구한다고 하면서도 분노나 폭력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런 불교 공부는 반쪽짜리에 그치게 된다. 그리고 욕망에 대해 연구만 하고 도를 닦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공부도 못 된다. 그때 불교는 우리에게 더 이상 열반을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세속적인 성공과 명예-그것도 쥐꼬리만 한 것-를 얻기 위한 수단 정도가 되고 말 것이고, 불교학자(불교도)는 홉스가 언급한 지복을 추구하는 일반 인간과 조금도 다를 바 없게 된다.

다이내믹 코리아는 너무 동적이고 우리는 나태하여 ‘일단정지 이후의 자비’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회, 정치, 국가에 적용하는 일은 지극히 어려워 보인다. ■

 2011년 3월
 허우성(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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