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편집인)
불교는 개혁의 종교다. 인간을 개혁하여 부처를 만들고, 역사를 개혁하여 진리를 증언하고, 세상을 개혁하여 정토를 이루는 것이 목표다. 부처님이 출현한 것은 이러한 개혁을 모범적으로 보여주고자 함이었다. 부처님이 가르친 팔만사천 법문은 개혁의 이론과 방편을 시설한 것이다. 불교교단이 존재하는 것은 부처님에 의해 추진된 개혁의 사명을 역사사회 안에서 완성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불교는 개혁의 종교였고 개혁의 종교여야 한다.

불교는 불교가 추구하는 개혁의 완성을 위해 첫 번째 목표로 모든 사람을 부처로 만드는 혁범성성(革凡成聖)을 과제로 삼는다.

불교는 누구든지 진리를 깨달으면 부처가 되는 종교다. 어떤 종교도 교도(敎徒)가 교주(敎主)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기독교나 회교 같은 훌륭한 종교도 인간이 신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은 피조물로서만 존재 의미를 갖는다. 신은 세계와 인간의 길흉화복을 지배하는 절대적 권능을 갖는 존재다. 인간은 신에게 자비를 빌고 은총을 구해야 한다. 이를 빌미로 유신(有神)종교는 인간을 억압하고 지배했다. 신이 기뻐할 것이라며 희생제를 지내고 신의 권능에 의존하려고 기도했다.

이에 비해 불교는 어떤 초월적 능력을 갖는 신과 같은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자비로운 신이 있어 인간의 운명을 지배한다면 지금껏 그렇게 많은 기도를 받고도 세상을 불행의 도가니에 방치했을 리 없다. 그 따위 미신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순간부터 인간은 해방된 존재가 된다. 부처님의 출현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해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신으로부터 인간해방을 선언한 불교는 인간에 의한 인간차별도 인정하지 않았다. 계급제도나 신분차별은 신의 속박만큼이나 불교가 극복하고자 하는 대상이었다. 부처님이 깨달은 바에 의하면 인간은 스스로 어떤 동기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의해 그 운명을 결정해나간다. 모든 행불행은 인간 스스로 결정한 생각과 행동에 의해 좌우된다. 부처님은 이렇게 선언했다.

“인간의 귀천은 태생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 행위가 귀하면 천한 사람도 귀하게 되지만 그 행위가 천하면 귀한 사람도 천하게 된다.”

이 말은 신의 이름이나 권력의 힘으로 세상을 좌지우지한 지배자들이 왜곡해온 인간관을 불교가 어떻게 개혁하려 했는가를 알게 한다. 불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을 ‘불자(佛子)’라 부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말이다.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듯 불자는 나중에 반드시 부처님이 될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과제는 오랜 세월 동안 관행으로 인정해온 낡은 가치관을 개혁하여 각성된 안목으로 세상을 살게 하는 전미개오(轉迷開悟)에 있다.

중생이 중생인 것은 온갖 불합리한 허위와 환상, 가설(假說)에 빠져 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모든 존재가 어떤 현실에 놓여 있는가이다. 부처님에 의하면 이 세상 모든 존재는 그것이 생명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조건에 의한 상호의존의 연기적(緣起的) 관계에 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고 저것이 사라짐으로 이것이 사라진다.”

세계는 연기적 조건관계의 산물이며 이 조건적 관계가 해체되면 모든 존재는 변하고 만다. 어떤 존재도 시간적인 변화를 모면할 수 없는 조건[諸行無常]에 있으며, 또한 실체아를 주장할 수 없는 조건[諸法無我]을 벗어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一切皆苦]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명(無明)에 눈이 가려진 중생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도리어 탐진치를 심화시킨다. 이로 인해 중생의 삶은 더욱 각박해진다. 남보다 더 많이 갖자면 더 많이 죽여야 하고, 그 욕심을 위해 화살을 대포로 바꾸어 한다.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확대해온 원인이 여기에 있다. 그 결과가 고통이고 불행이다. 불교는 이 악순환을 멈추게 하려면 지금까지 우리가 좋다고 추종했던 물질 위주로 경도된 가치관을 개혁하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개혁 중의 개혁이고 혁명 중의 혁명이다.

불교의 깨달음을 다른 측면에서 요약하면 삶의 무상성을 체득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생로병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우주는 성주괴공의 과정을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세속적 부귀나 영화나 재물에 과도하게 탐착할수록 불행은 점점 커진다. 반대로 욕심을 얼마나 줄이느냐에 따라 행복의 크기는 점점 커진다. 이것이 바른 안목이고 바른 깨달음이다. 이 불교적 터닝 포인트를 인식할 때 질곡과 불행의 역사는 해탈과 행복의 역사로 바뀐다.

세 번째 과제는 중생적 욕망을 혁파하고 불교적 이상을 현실사회 안에서 구현함으로써 마침내 온 세상이 행복을 성취하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의 완성에 있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고통 위에서 건설되었다. 인간에게 괴로움이 없다면 종교도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성취할 것인가 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 불교는 우선 무엇이 고통의 원인인가를 살펴보라고 말한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욕망과 집착에서 비롯된다. 욕망과 집착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할 줄 모른다. 만족할 줄 모르는 데서 모든 불행은 시작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히말라야를 황금으로 둔갑시키고 그것을 다시 배로 늘린다 해도 인간의 욕심은 다 채울 수 없다. 행복해지고 싶거든 물질적 소유를 늘리려고 하지 말고 욕망을 줄여야 한다.”

따라서 불교는 무엇보다 히말라야보다 높게 솟아오르는 욕망의 크기를 줄이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세상이 온통 물질주의로 치달을 때 정신주의의 가치를 내세워야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물질적 욕망확대를 추구하는 현실에서 매양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불교를 세상 사람들의 욕망에 거스르는 ‘역류도(逆流道)’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불교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어 교리 자체를 변곡시킨 적이 여러 번이다. 인도에서 힌두교적 교리를 수용한 것이나 중국에서 도교와 손잡은 것도 속내는 세속적 욕망의 문제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와 관계가 있다. 가장 개혁적인 종교가 반개혁적인 데로 반동적 회귀를 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현실불교의 역할이 있다. 어떻게 하든 욕망으로 치닫는 사람을 설득하여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정법의 실현이다.

부처님이 출가교단인 승가사회로 하여금 평등과 화합과 검소와 겸손을 보여주도록 가르친 것은 까닭이 있다. 불교적 이상을 역사와 현실 속에서 구현하라는 것이었다. 끊임없는 자기갱신과 성찰을 통해 불교적 이상을 성취해가는 출가교단의 거룩한 모습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큰 힘이 되리라는 것이 부처님의 기대였다.

불교는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끊임없이 자기변화와 개혁의 노력을 거듭해왔다. 부처님이 입멸한 뒤 몇 차례에 걸쳐 그 가르침을 정리하고 결집한 것은 정법계승을 통한 자기쇄신을 위해서였다. 결집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입맛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것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를 밝혀준 당대 지성들의 고뇌의 소산이다. 후대에 이르러 대승불교가 일어나고 결사운동이 전개된 것도 자기혁신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아비달마 시대의 불교는 지나치게 번쇄해진 교리해석의 문제에 몰두해 불교 본래의 사회적 개혁과 구원의 기능을 스스로 축소하고 말았다. 대승불교는 이를 극복하고 불교 본래의 기능이 무엇인가를 반성한 쇄신운동의 하나였다.

그러나 어떤 훌륭한 이상이나 제도도 오래되면 고여 있는 물처럼 썩는다. 대승불교의 지나친 대중 지향은 불교의 본질을 왜곡하는 기복주의를 심화하는 문제를 배태했다. 역사 속의 많은 선각들이 새로운 수행결사(修行結社)를 발의하고 실천을 주장한 것은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대 한국불교도 예외가 아니다. 조선왕조의 억불로 숨을 죽이고 있던 불교가 개항 이후 거센 서구문화의 도전에 응전하기 위해 가장 먼저 부르짖은 것이 불교개혁, 교단개혁이었다. 한용운을 비롯한 선각들의 개혁론은 불교가 어떤 처지에 있는가를 말해주는 논설들이었다. 최근 들어 논의되는 종단개혁이나 자정과 쇄신도 이 맥락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의문이 있다. 불교가 이토록 개혁과 쇄신을 거듭 강조해온 것에 비추어 과연 현실이 얼마나 개혁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원대한 목표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직도 현실은 불교가 추구하는 높은 이상에 크게 미흡하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어쩌면 겉으로만 아는 척하고 속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또는 알고는 있어도 욕심이나 게으름 때문에 실천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불교에 의탁해 뱃구레나 채우려는 외도들이 불교도인 척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부끄러움들과 결별하지 못한다면 우리 앞에 남는 것은 참담함뿐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개혁을 말해야 한다. 정법이 아닌 모든 것은 정법으로 회귀시켜야 한다. 불교적 가치관에 반하는 모든 생각과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거기에 불교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불교평론이 통권 50호를 맞아 전권(全卷) 특집으로 개혁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은 불교가 추구해온 개혁의지와 노력과 성과를 뒤돌아보고 이에 바탕한 새로운 미래를 그려보기 위해서다. 불교평론은 겨우 13년의 세월을 건너왔다. 아직도 지나온 시간보다 걸어가야 할 시간이 더 많다. 사바세계는 중생무진(衆生無盡)이고 번뇌무진(煩惱無盡)이므로 할 일도 무진장이다. 정법이 구현되는 그날까지, 정토가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불교평론이 걸어가는 길에 독자 여러분의 더 많은 관심과 성원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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