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휴전 다음 해 봄이었지만, 영랑사 입구부터 마당에 이르기까지 수십 그루 벚나무에는 진분홍 겹벚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하지만 마당의 흙빛조차 환해지고 어린 가슴을 콩닥거리게 하는 절 마당의 벚꽃과 달리, 대웅전의 낡은 단청에선 울긋불긋한 동네 상여가 떠올랐고 진채색 탱화도 거룩함보다는 무서움으로 다가왔다. 초등
며칠을 일기예보에 귀를 기울였다. 아침 라디오 방송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이번 한 주는 비가 오는 날이 많겠다는데, 그 이번 주가 소풍 가는 날이다. 초등학생 시절이다. 단골 소풍 장소는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숲이었다. 어린 마음에 이른 새벽에 일어나 하늘을 먼저 쳐다본다. 먹구름이 밀려오면 마음이 초조해진다. 소풍 가는 날이 엉망이 되지는 않을지&h
산사에 머물면서 새벽 예불이나 저녁 예불 전에 범종 소리를 듣는 마음은 평온하고도 그윽하다. 멀리 떨어진 산사에서 은은하게 울려오는 타음(打音)에 이은 원음(原音)과 여운음(餘韻音)의 맥놀이소리를 따라가는 것도 잔잔한 기쁨을 자아낸다. 돌이켜보면 사바세계에는 무수한 소리가 존재한다. 모든 것이 소리로 구성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의 소리, 중생의
사월은 만화방창의 계절이다. 이 무렵이면 영산홍의 연홍 꽃빛이 아련하던 백화사가 떠오른다. 백화사 툇마루 앞에 말간 연홍빛 영산홍이 꽃망울을 터뜨리면 바로 이곳이 화장세계였다. 이때에 대흥사 반야교 아래의 백화사에서는 차를 만들기에 분주하다. 백화사는 응송 스님(1893~1990)이 수행하시던 도량이다. 천혜의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여기에서 초의 스님이
벌새, 크기가 작고 벌처럼 윙윙대며 날며, 꽃의 꿀을 먹고 산다고 그렇게 부른다. 일반적으로 화려한 깃털과 긴 부리를 가진 벌새는 꿀벌만 한 작은 종(種)에서 큰 것은 참새 크기까지 약 3백여 종이 지구 상에 서식한다고 한다. 그리고 벌새는 마치 헬리콥터처럼 제자리에서 날면서 꽃의 꿀을 먹기 때문에 1초에 많게는 80번이나 날갯짓을 하고, 고속도로의 자동차
이런저런 사정으로 하던 일을 바꾸게 되었다. 하던 일을 바꾸게 되었다는 건 아주 다른 패턴으로 일상을 보내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학교 저 학교로 다니며 수업을 하고 주말이나 밤중에 그림 작업을 하던 게 일과였다면 지금은 한 장소에 정물처럼 들어앉아 나를 찾아오는 손님을 기다리는 나날을 보낸다. 동적인 생활에서 정적인 생활로 바뀐 것이다. 이 일을 시작하면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와 한 도시에 살며 깊은 친교를 가졌던 오스트리아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에게 〈죽은 자는 말이 없다〉(1897)란 단편소설이 있다. 오래전 독문학 강독시간에 읽은 것이라 분명한 기억은 없지만, 남편 있는 여자가 외간남자와 밀회를 하다가 그 남자가 사고로 죽게 되자 버리고 도망치면서 “죽은 자는 말이 없어.”라
세월호 사고로 다들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 가족들의 마음이 오죽할까 싶어 더 아팠다. 수백 명이 한꺼번에 생명을 잃은 것도 안타깝고 원통했지만, 선장이나 청해진해운, 또는 해경이나 해수부 등 어느 한 곳만 제대로 대처했더라도 귀한 생명들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도 이들 가운데 어느 한 곳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떼죽음을 초래했으니 통탄할 일이었다. 그런데도
불교에서는 분별심을 가지지 말라고 한다. 부처님은 분별하는 것 자체가 망상이며 진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너와 나로 나누고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으로 나누고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는 그 모든 분별심을 내려놓으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고양이가 불길하고 싫다는 분별심을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그런데 어느 날 딸이 고양이를 키우겠다고 선언했다. 딸은 아주
유독 잊히지 않는 새벽예불이 있다. 충북 영동 영국사의 새벽예불이다. 한여름의 새벽 3시였다. 절 마루에서 선잠을 자던 나는 도량석에 겨우 잠을 깨어 법당에 들어섰다. 주지 스님이 혼자 새벽예불을 올리고 있었다. 법당 안에는 주지 스님과 나, 둘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 불교TV에서 프로듀서로 근무하고 있었다. 소설 〈만다라〉의 저자 김성동 소설가를 인터뷰하
경상남도 함안군의 외진 산골에서 6·25 전쟁 중에 태어난 나는, 또래의 동무들이 초등학교 졸업도 못 하고, 심하면 남의 집 ‘애 보기’로 고향을 떠나는 가난한 시절, 가난한 동네에서 자랐다. 그래도 우리 집은 동네에서 제일 살기가 낫기도 했지만, 어머니 아버지의 남다른 교육열 덕분에 나는 마산시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인상이 참 좋습니다.”“행복해 보이십니다.”불교를 만나고 부처님 그늘에 살면서부터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어느 날 남편의 절친 후배가 “형수님, 얼굴이 너무 좋아 보이는 것 아니에요?”라고 농담조로 말하는데, 내가 생각해도 정말 꿋꿋하고 잘 지내는 것 같아 약간 민망스럽기도 했다
선화륜(旋火輪)은 횃불 같은 것을 들고 빙빙 돌릴 때에 생기는 불의 원(圓)이다. 회전하는 불의 바퀴를 이른다. 내가 선화륜에 대한 경전의 말씀을 최초로 읽은 것은 《화엄경》에서였다. “이 몸의 온갖 부분은 소의(所依)와 지주(止住)가 다 없거니 이런 이치를 깨달으면 몸에 집착이 없으리라. 사실대로 몸을 알면 온갖 사물 환하리니 그 허망함을 알고
도회의 골목길은 집을 나온 고양이들 세상이다. 밤낮 아무 때나 주택가 골목 아파트 단지 어느 곳에서든 집 나온 고양이들이 목격된다. 물론 처음부터 야생 고양이는 아니다. 주인집 식구의 사랑을 애완견에게 빼앗겼거나 주인으로부터 버려진 고양이로 야생화했을 뿐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집에서 쫓겨난 유기(遺棄) 고양이들이다. 길거리의 고양이들은 사람을 경계하긴 하지
절에 갑니다. 그냥 절에 가던 오랜 습관처럼 지상의 삶에 목마를 때 한 번씩은 절에 다녀와야 합니다. 숨결마저 따스하게 스민 소박하고 단정한 돌담을 보며 가파른 계단을 올라 드디어 마주한 무량수전. 그 무량수전의 단아한 품위에 한 번 놀라고 무량수전을 등 뒤로 하고 안양루에 올라 바라본 해 질 무렵의 소백 연봉들, 아득히 가없는 봉우리의 파도에 두 번 놀랍
큰 사찰의 법회에 강의를 맡은 적이 있었다. 강의 중에 질문을 던져 보았다. “부처 되고 싶은 분?” 당연히 모든 사람이 “저요! 저요!!” 하며 손을 다 들었을 것이라고? 그렇지 않다. 10%도 안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손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것도 어떤 분들은 매우 계면쩍은 듯한 모습으로 손을 들었을 뿐이다.
이 에세이를 쓰는 인연지난여름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지역에서 불교 공부를 원하는 한인들이 모여 현응 스님의 〈사제(師弟)에게 보내는 열두 번의 편지〉를 읽고 토론했다. 두 달에 걸쳐 매주 토요일 오후 미네소타대학 학생회관의 한 쉼터에 모여 세 시간씩 현응 스님의 편지글들을 아홉 차례 논의한 것이다. 모든 모임이 끝난 8월 초, 여러 사람의 순수한 노력과 정성으로 이룬 공덕을 에세이로 만들어 《불교평론》의 독자들과 함께 나누어 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 여기에 소개하는 여섯 편의 에세이다.돈오(頓悟)
새벽에 일어나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세상을 낮과 다른 눈으로 보는 것이다. 검은 하늘로 깊이 잠긴 도시 안에 얼마나 많은 여인이 숨죽여 울고 있을까 생각해 본다. 이 땅의 여성들은 늘 핍박의 대상이었다. 빛의 속도로 이룩해낸 경제성장이 어쩌면 인권과 문화적 성숙엔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급작스레 편리해진
일찍이 일본의 미술사가인 야나기 무네요시는 “수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소유 방식이다. 그 방식에 따라서 사물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사람 역시 그로 말미암아 마음이 밝아지기도 하고 어두워지기도 한다. 잘못된 소유 방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물건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기쁨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려 할 것이다.”라고
정확히 1년 전인 2012년 11월 초순, 프랑스 파리에서의 일이다.에펠탑 건너편 트로카데로 광장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인파로 뒤덮여 있었다. 대부분 젊은이들이었지만 내 또래 중년들의 모습도 꽤 보였다. 모두 흥분하고 들뜬 표정이었다. 바로 싸이의 〈강남스타일〉 플래시몹이 열리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강남스타일〉. 2012년을 달군 대한민국 아니 지구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