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1년 전인 2012년 11월 초순, 프랑스 파리에서의 일이다.

에펠탑 건너편 트로카데로 광장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인파로 뒤덮여 있었다. 대부분 젊은이들이었지만 내 또래 중년들의 모습도 꽤 보였다. 모두 흥분하고 들뜬 표정이었다. 바로 싸이의 〈강남스타일〉 플래시몹이 열리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강남스타일〉. 2012년을 달군 대한민국 아니 지구촌 최고의 아이콘. 그해 우리는 싸이에 열광하고 또 환호했다. 그가 이룬 것은 가히 위업이라 칭해도 지나침이 없었다. 그는 지구촌을 그야말로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한국과 한류의 위상을 높이고 있었고 마침 신명 나게 파리에 입성하려는 참이었다. 

일부러 날을 맞춘 것은 아니었지만 일대의 호기를 부린 유럽 배낭여행 중 파리를 찾았던 나와 아내는 플래시몹 행사 얘기를 듣고 이런 좋은 일이 있나 싶어 서둘렀던 까닭에 앞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기실 싸이는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탄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싸이가 비상하기 시작했을 때 ‘마침내 올 것이 왔구나.’ 했었다. 그동안의 우리 에너지 특히 대중문화 쪽의 그것들이 집약돼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발현된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경제발전이며 민주화는 물론, 한류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투자, IT산업 발달, 하다못해 말 많은 조기유학 풍조며 노래방 문화까지도 싸이의 성공에 기여한 것 아닐까. 

마침내 엄청난 환호 속에 무대로 마련된 자연사박물관 건물 계단에 싸이가 등장했다.

“내가 누구죠?”

선글라스를 벗고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그에게 환호의 함성이 이어진다.

“싸이!”

“준비됐죠?”

팡파르와 같은 전주가 지축을 흔들었고 사람들은 뛰기 시작했다. 그날 그의 공연은 나에게 감격 그 자체였다. 우리말로 “오빤 강남스타일”을 외치는 파란 눈 군중의 함성은 내 온몸의 땀구멍을 열었고 겅중겅중 뛰는 그들의 발 구름은 내 심장을 흔들었다. 돌리고 흔드는 그들의 팔 동작은 내 뇌파를 춤추게 했다.

동영상이며 텔레비전 뉴스의 영상으로 보던 것과는 완연히 다른 감동의 도가니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싶었다. 이런 일이 어떻게 내 생전에 가능하단 말인가 싶을 정도였다. 싸이의 약진에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했으면서도 그랬다. 내가 그 자리에 있게 된 것도 무언가 거대한 뜻이 담겨 있는 어떤 기운의 작용이 아닌가 싶었다.

이날 싸이는 팬들을 위해 〈강남스타일〉을 두 번 불렀다. 멀리서 보이지 않았을 관객들을 위해서였던지 계단 난간에 올라 두 번째 퍼포먼스를 펼쳤다. 자연사박물관 계단은 가운데 공간을 두고 V형 날개처럼 펼쳐져 있었는데, 20미터는 족히 넘을 오른쪽 난간 좁은 경사진 턱에 올라서 몸을 흔드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백척간두 진일보라는 말이 떠오르면서 오래전 탄허 큰스님과 대화가 다시 생각났다.
1970년대 말 나는 멱정 여익구 형과 함께 서울 진관사에서 탄허 큰스님을 친견하고 후원채 툇마루 위에서 꽤 오래 담소를 나누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그때 스님은 이삼십 년쯤 뒤에는 우리의 문화가 세계를 압도해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광장에서, 파리의 에펠탑 광장에서 한국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 무렵 불교의 사회참여 문제에 골몰해 있었던 우리는 솔직히 뜬구름 같은 덕담쯤으로 흘려들었더랬는데 놀라운 예견 아닌가.

스님은 한반도의 기(氣)가 승하고 있으며 한반도 문제의 해결이 곧 세계 문제의 해결이며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한국이 세계를 선도하게 돼 있기 때문에 모든 이가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해야 한다고 하셨었다. 큰스님의 예지력이야 스님이 입적하신 후 다들 익히 알게 되어 유명하기는 하지만 이런 개인적 일화와 기억은 나도 모르게 한류의 발흥에 관한 한 나 스스로를 누구보다 먼저 알았다는 선각자쯤으로 여기게 했던 것이다.

〈강남스타일〉로 욱일승천하던 한류의 기세는 요즈음 한풀 수그러들어 숨 고르기에 들어간 형국이다. 모든 일에 순서가 있고 시간이 필요한 법. 우리 불가에서는 시절인연이 도래해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기실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드라마나 가요 등 감각적이고 표피적인 대중문화만을 앞세우는 것에는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다. 우리 문화의 중심에는 누가 뭐래도 불교가 자리 잡고 있다. 유교, 유학이 외피라면 불교, 불류는 내면이다.

단재 선생은 “공자가 조선에 오면 공자의 조선이 되고 석가가 조선에 오면 석가의 조선이 된다”고 걱정스레 역설적으로 말씀하셨지만 석가에 관한 한 우리는 한국의 석가를 보기 좋게 만들어 냈다. 교(敎)와 선(禪)을 함께 아우르며 중생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통사섭(通事攝)의 석가를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다. 인도와 중국의 불교는 어떻게 되었는가. 불교국을 자처하는 남방의 석가는 도그마화 돼 있지 않은가. 하루에도 몇 번씩 깨친다는 일본의 공안(公案)이 공안인가. 도량을 자신 있게 개방하는 석가의 후예가 또 어디 있는가. 그래서 많은 이들이 한국의 석가를 찾는다.

한류는 이제 그 상승 에너지의 근원을 불류(佛流)에서 재충전해야 한다. 우리의 불류는 고집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광의의 문화다.

다시 탄허 대선사의 말씀으로 돌아가 글을 맺는다.

“앞으로는 누구의 덕으로 사는지 모를 세상이 펼쳐질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는 과연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가 궁금한 일이지만, 모든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종교의 알몸이 세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현재의 종교는 망해야 할 것입니다. 쓸어 없애버려야 할 것입니다. 신앙인끼리 반목질시하고 네 종교, 내 종교가 옳다고 하며 원수처럼 대하는, 이방인이라 해서 동물처럼 취급하는 천박한 종교의 벽이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그 장벽이 허물어지면 초종교가 될 것입니다.”(탄허 스님 저 《부처님이 계신다면》)

 그 중심에 통사섭을 천오백 년 넘게 실천해온 한국의 불교가 있음은 물론이다.

“우리 선조가 적선해 온 여음(餘蔭)으로 우리 한국은 필경 복을 받을 것입니다. 이 우주의 변화가 이렇게 오는 것을 학술적으로 전개한 이가 한국인 외엔 없으며, 멸망이냐 심판이냐 하는 무서운 화탕(火湯) 속에서 인류를 구출해낼 수 있는 미륵의 방안을 가지고 있는 이도 한국인 외에 또다시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은 세계적인 신도(神都), 다시 말하면 정신 수도(首都)의 근거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탄허 스님 저 《주역선해》 제3권).

공맹과 노장에서 출발했지만 원효, 지눌, 퇴계를 거쳐 해월과 증산으로 이어져 현대 물리학과 천문학에도 조예 깊은 석가의 제자에 의해 정리된 우리의 빼어난 정신사는 불류를 머금은 한류로 발현하게 된다는 사자후이다.

일견 정상에 선 것처럼 보이는 지금의 한류는 이제 거기서 진일보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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