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대표
세월호 사고로 다들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 가족들의 마음이 오죽할까 싶어 더 아팠다. 수백 명이 한꺼번에 생명을 잃은 것도 안타깝고 원통했지만, 선장이나 청해진해운, 또는 해경이나 해수부 등 어느 한 곳만 제대로 대처했더라도 귀한 생명들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도 이들 가운데 어느 한 곳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떼죽음을 초래했으니 통탄할 일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고 초기에는 TV를 지켜보면서 무사귀환을 비는 기도라도 할 수 있었으나 열흘쯤 지나고부터는 그런 희망마저 가지기가 어려워 참담할 뿐이었다. 그래서 가슴 깊숙이 밀려드는 안타까움과 분노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가족들이야 오죽하겠나 싶었다.

그런데 사고 초기에도 그 가족들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게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 몸도 마음도 가누기가 힘들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온갖 사람의 무책임과 늑장대응으로 살릴 수 있었던 생명을 살리지 못한 데 대한 실망과 분노 때문에 더욱더 견디기 어려울 것만 같았다. 거기다가 구조를 기다리다 초조하게 죽어갔을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가슴이 미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제발 살아남은 가족들에게 무슨 사고가 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그래서 가족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는 길이 없을까 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나 그럴 만한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혹 가족들을 만나게 된다면 이런 말을 하면 어떨까 싶었다. ‘잃은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라고. 거기다가 ‘잃은 가족이 살아있는 가족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너무나 슬프고 원통하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힘을 내서 자기 몫까지 잘 살아달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부디 용기를 내서 열심히 살아가도록 하세요’라고 말이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으나 이것을 말할 기회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런 가운데 지난 5월 5일 진도 팽목항에 가게 되었다. 사고 직후 가보려 했으나 아무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데다 마침 구조활동에 지장이 많아 진도행을 자제해달라는 공지사항도 있어 차일피일 미루어왔었다.

팽목항에 갔으나 역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침 한국재난구호의 조성래 이사장과 김수옥 경기지부장을 만나 가족들의 근황을 자세히 듣게 되었는데, 무척 지치고 격앙돼 있어 구조활동과 직접 관련된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만나기 싫어한다고 했다. 그러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래서 마침 매일 이곳에 들러 상황을 점검한다는 전남도지사 등 몇몇 지인들과 함께 안타까운 마음들을 나누다가 한국재난구호 막사에서 순두부 한 그릇씩을 먹고는 실종자 가족들이 모여 있는 진도 실내체육관으로 향했다. 조금 걸어가다가 이곳에 들른 도법 스님을 만났는데, 실종자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조계종단 주최의 기도회가 있다 고 하여 기도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갔지만 정식으로 기도회에 참여해서 실종자의 무사귀환과 가족들의 용기와 분발을 기원할 수 있게 된 것은 좋은 기회였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에 열중했는데, 사고 20일째나 되어 실종자의 무사귀환을 비는 마음에 못지않게 그 가족들이 실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되기를 비는 마음이 더욱더 간절했다.

이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바로 이런 때 불교가 제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나’ 싶으면서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 온몸으로 다가왔다.

그렇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색즉시공(色卽是空)과 함께 생사불이(生死不二)를 말씀하셨으니, 생과 사가 갈리는 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부처님의 이 가르침만큼 생과 사의 문제로 낙담해 있는 세월호 가족들을 위로할 수 있는 말이 어디 또 있을까 싶었다. 색과 공이 둘이 아니요 하나이듯, 생과 사 또한 둘이 아니요 하나인 것을 확실히 깨닫고 이를 실천한다면 생사를 초월함은 물론 열반에 들어 극락을 누린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부처님의 이 가르침을 숙지하고 체화해서 실천하게 된다면 어떤 상황에 맞닥뜨리더라도 모든 아픔을 이기는 것은 물론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었다.

다만 이것을 그 가족들에게 말해주기가 어렵고, 또 말해준다고 해서 금방 이것을 깨달아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사실 이 진리가 말로서는 쉽지만 이를 진정으로 깨닫고 체화해서 실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또한 분명하다. 그래서 돈오점수(頓悟漸修)란 말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설사 색과 공이 둘이 아니요 하나이듯 생과 사 또한 둘이 아니요 하나임을 깨닫더라도, 깨달음만으로는 부족하고 수행에 수행을 거듭해서 일상적으로 실천할 때만 생사를 초월하는 열반의 경지에 들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렇구나! 그래서 평소 불교의 가르침을 숙지하고 체화해서 일상생활 하나하나에서 실천하는 수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는 너무 어렵다고들 말하나,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불교의 가르침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것을 체화해서 실천하는 것이 어려울 뿐이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좀 건방진 말이지만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간단하고 쉬운 줄로 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이고, 이것이 세상의 이치이자 실상임을 깨닫고 이를 체화해서 생활 속에서 실천하면 생사고락의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의 기쁨을 얻는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것을 온몸으로 깨닫고 생활 속에서 온전히 실천하게 되면, 고락은 물론 생사까지 초월해서 열반에 들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거듭 말하지만 이를 깨닫기도 쉬운 것은 아니지만 이를 체화해서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끊임없는 수행 곧 정진이 필요한 이유이다.

외람되지만 이를 이루는 한 방편으로 필자는 시간만 나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암송하는데, 아마 수천만 번 넘게 암송했을 것이다. 그러고도 아직도 생사의 고락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으니, 내 수행만 헛된 것이 아니라 이 글도 헛될 것 같아 온몸이 저려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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