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
시인
선화륜(旋火輪)은 횃불 같은 것을 들고 빙빙 돌릴 때에 생기는 불의 원(圓)이다. 회전하는 불의 바퀴를 이른다. 내가 선화륜에 대한 경전의 말씀을 최초로 읽은 것은 《화엄경》에서였다.

 “이 몸의 온갖 부분은 소의(所依)와 지주(止住)가 다 없거니 이런 이치를 깨달으면 몸에 집착이 없으리라. 사실대로 몸을 알면 온갖 사물 환하리니 그 허망함을 알고 보면 마음의 소염(所染)이 없으리라. 몸과 수명이 서로 따라 잇달아 이어지니 선화륜 같은 그것 전후조차 모르리라. 지자(智者)가 있어 온갖 것의 무상(無常)함과 무아(無我)함을 능히 살펴 안다면 상(相)을 떠나게 되리라.”

이 말씀이 내가 접했던 선화륜에 관한 첫 가르침이었다. 이 말씀 외에도 나는 여러 경전에서 선화륜의 비유를 만날 수 있었다. 가령 이런 경구는 내가 자주 인용하는 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눈앞에 있는 미미(微微)한 즐거움은 잠시도 머무르지 않아서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선화륜과 같으며, 파초와 같으며, 퉁기는 물방울과 같아서 이내 흩어지느니라.”

생업을 위해 춘천을 오가면서 내가 가장 많이 본 것은 강이었다. 강은 물의 쌓임을 보여주었으나 물의 쌓임의 변화를 또한 함께 보여주었다. 때때로 강은 흘러넘쳤고, 때때로 강은 그 유량이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강가를 걸었고, 강을 멀리서 바라보았으며, 강과 그 주변에 사는 생명들의 살림을 살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은 내륙 산골에만 살았던 내게 처음으로 물에 관한 시, 〈수변시편〉 연작시를 쓰게 했다.

나는 〈호수−수변시편1〉에서 “물이 물과 함께// 가난한 자매처럼// 시오리를 걸어서// 섬돌 아래에 와// 괸 저녁처럼// 웅크려 앉은 여기// 소곳하게// 고개를 숙인 여기// 손이 트기 시작하는// 늦가을// 물결처럼// 뒷등에”라고 썼다. 이 시는 작년 늦가을 어느 날에 퇴근하고 의암호 수변을 걸어갈 때 느낀 소회를 쓴 것이었다. 때는 꽤 쌀쌀해서 강의 수면이 마치 손등이 튼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해가 떨어지는 때여서 이와 같은 느낌은 일층 강했을 것이었다. 이 시는 물의 유입과 쌓임에 대해 쓴 것이었다.

계류의 물들이 모여 강을 이루게 된 긴 여정을 가난한 자매가 귀가하는 모습과 겹쳐 놓았다. 물의 쌓임을 본 적이 나는 흔하지 않았다. 내가 자란 곳은 사방이 산이었다. 그 산들은 중중해서 산 넘어 산이 있었을 뿐 거대한 물의 쌓임을 목도하는 일은 드물었다. 물론 여름 폭우에 계곡에서 급하게 내려온 물들이 멀리 나가는 것을 본 일은 여럿 있었다. 마을 어른들은 그 광경을 보며 ‘물이 나가신다’라고 말씀하셨다.

물의 쌓임을 본 경험은 〈밤과 호수−수변시편2〉에서도 이어졌다. 시형은 산문의 형태로 바뀌었다. “내 검은 동공에 퍼득이는 새를 담아다오 나는 눈을 감을 수 없소 새의 북향 행렬과 찬 하늘을 담아다오 희푸릇한 별을 쏟아다오 물오리를 내려앉혀 수면을 쳐다오 산을 넣어다오 일하는 소 같은 목덜미 울퉁불퉁한 능선을 넣어다오 나를 열어젖혀다오 일으켜 세워다오.” 이 시는 물의 쌓임을 노래하되, 그 수면의 정적을 깨려는 의도로 창작되었다.

호수의 수면은 늘 고요하고 담담하고 그리하여 파격이 없고 활동이 없고 내향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나는 이 수세에 몰린 물의 상태를 깨뜨리고 싶었다. 물론 정적인 호수의 상태는 방일함과 게으름과 같은 나의 삶의 조건과 상태를 뜻하는 것이었다. 나는 호수 수면에 새와 별과 울퉁불퉁한 능선을 넣어 그 물의 낯면을 출렁이게 파동이 있게 하고 싶었다.

물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지고 또 시간이 흘러가면서 강과 호수의 상태도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가령 물의 유량이 줄어드는 변화는 다음의 시 〈마른 내−수변시편3〉을 탄생시켰다. “마른 내에 눈보라 오네/ 눈보라는 와 퀭한 눈으로 보네// 돌아누운 늙은 등과 어깨를// 마른 내에 눈보라 오네/ 멀리서 눈보라는 와 수척한 얼굴을 묻네// 깡마르고 겹겹 주름진 내 어머니의 가슴팍에” 이 시는 초동(初冬) 무렵에 쓴 것이었다. 마른 내에 눈보라가 들이치는 광경을 보고 쓴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에서 강의 모습은 크게 달라져 있다. 그것은 풍성하고 넉넉한 강의 모습에서 메마르고 야윈 강의 모습으로 바뀜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른 내가 되어버린 강의 처지를 노모(老母)에 빗대어 놓았다.

물과 강을 지속적으로 바라보면서 근래에 한 편의 시를 더 보탤 수 있었다. 〈강심(江心)−수변시편4〉라고 제목을 달았다. 내용은 이러하다. “오늘은 겨울 물안개처럼 떠가네// 오늘은 살얼음처럼 떠가네// 물새는 가고 없네// 이것이 멀리 가는 강의 의지라면// 나는 한복판으로 한복판으로// 밀려가려네// 강을 풀어주면서 묶으면서” 강심(江心)은 강의 한복판을 뜻한다. 겨울이 되면서 강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표류의 모습이었다. 겨울 물안개가 떠서 밀려가는 것을 보여 주었고, 살얼음이 얇게 수면에 생겨 물의 흐름을 따라 떠내려가는 것을 보여주었다. 겨울 강은 폐색(閉塞)을 보여주면서 또 동시에 쓸쓸함과 높은 고독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겨울 물안개와 살얼음의 흘러감 그 자체가 일생(一生)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물과 강에 관한 시가 앞으로 더 창작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한때 내가 물과 강을 바라본 체험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물과 강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무상(無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상에 대해 생각하자 강의 변화는 묘하게도 빙빙 돌릴 때 생기는 불의 원, 선화륜처럼 느껴졌다. 물의 바퀴를 보면서 불의 바퀴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내가 경전에서 “물은 흘러 언제까지 차[滿] 있지 않고 타오르다 머잖아 꺼지는 불꽃”이라고 이른 대목을 읽었을 때 더욱 선명해졌다. 내가 보았거나, 내가 쓴 네 편의 시는 무상을 노래한 것이되, 강이라는 선화륜을 보고 쓴 것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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