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문학평론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와 한 도시에 살며 깊은 친교를 가졌던 오스트리아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에게 〈죽은 자는 말이 없다〉(1897)란 단편소설이 있다. 오래전 독문학 강독시간에 읽은 것이라 분명한 기억은 없지만, 남편 있는 여자가 외간남자와 밀회를 하다가 그 남자가 사고로 죽게 되자 버리고 도망치면서 “죽은 자는 말이 없어.”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이 있었던 것 같다. 불륜 사실을 들키지 않고 무사히 가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안도감과 마치 스스로 살인을 저지른 듯한 불안감이 교차하는 유부녀의 이중적 심리를 묘사한 소설이었다. 세기말의 퇴폐적인 분위기도 있지만, 슈니츨러 자신이 의사였으므로 내면세계의 심층을 냉정하게 관찰하는 분석적 시선도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소설에서와 달리 현실에서는 죽은 자가 말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자들의 순간적 착각일 뿐이다. 죽음은 언제나 자신에 관해 엄청나게 많은 사실을 삶의 세계에 숙제처럼 남겨놓는다. 현대 법의학과 과학수사는 죽음이 남긴 미세한 흔적에서조차 죽음에 이르는 과정의 은폐된 비밀과 사회적 맥락을 읽어낸다. 그래서 완전범죄란 없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어쨌든 사람의 죽음이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다. 자살이든 타살이든, 사고사든 자연사든 죽음에는 수많은 작고 큰 원인들이 직접 간접으로 연관되어 있게 마련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과학이 해명할 수 있는 것은 대체로 죽음의 극히 적은 부분, 말하자면 죽음의 가시적인 부분뿐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면 나는 가끔 신동엽 시인의 수필 〈금강 잡기(錦江雜記)〉(1963)를 떠올린다. 그 수필은 이런 일화를 전한다.

몇 해 전 부여에서 있었던 일인데, 어느 날 새벽 갑자기 요란한 천둥소리에 놀라 마을 사람들이 잠을 깼다. 하지만 뇌성은 곧 잠잠해지고 하늘은 다시 맑게 개었다. 그런데 아침이 되자 마을과 읍내는 놀라운 소문으로 뒤숭숭해졌다. 아까 천둥이 요란하게 치기 직전 여승 세 분이 조약돌 가득한 바랑을 허리에 묶고 강을 향해 걸어 들어가 그대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마침 건넛마을 사공이 날씨를 살피러 나왔다가 어스름 속에서 이 장면을 목격하고 이웃 청년들을 소리쳐 불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고 천둥이 쳤다. 날씨가 잠잠해진 다음에야 절의 스님과 마을 사람들이 강을 뒤졌으나 두어 시간 만에 가장 나이 어린 여승의 시체를 건졌을 뿐, 끝내 다른 두 여승은 자취도 찾지 못했다.

그날 아침 신동엽은 장화를 신고 강가로 나갔다. 초여름의 투명한 햇빛이 비치는 호밀밭을 지나 둘러서 있는 사람들 곁으로 다가갔다. 모래밭 거적 위에는 여승의 시신이 눕혀져 있었다. 그는 그곳을 빠져나와 금강 강기슭을 거슬러 한없이 걸으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이승 저편 피안의 세계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그들은 함께 합장을 하고 열을 지어 점점 깊어지는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멀고 먼 그 겨냥을 향해 아무 잡티 없이 달려가는 빠른 화살이 되게 했을까.”

스님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난 신동엽의 사색은 사뭇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상상을 해본다. 수필에 따르면 그 여승들은 나이가 겨우 스무 살 남짓한 또래들이다. 신동엽이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상경한 것이 1959년이므로, 이 사건은 그 이전 그가 부여에 살던 때 일어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여승들은 열두어 살 때 6·25전쟁을 겪고 가족을 잃어버렸을지 모른다. 어쩌면 더 끔찍한 고난을 당했을 수도 있다. 그런 비극적 경험이 그들을 절로 들어가게 하고 결국 자진해서 속세의 삶을 버리게 하지 않았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들의 죽음에는 단지 젊음의 고뇌와 피안에의 동경뿐 아니라 분단과 전쟁이라는 민족사의 불행도 크게 드리워져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우리는 세월호 참사라는 전대미문의 죽음 앞에서 집단적인 슬픔과 분노에 떨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지난 한 달 동안 매일같이 신문·방송들은 참사의 원인에 관해 다양하게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고의 직접적 책임자만이 아닌 재앙의 뿌리까지 철저하게 진상규명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역관제소, 해경, 해수부, 안행부 등 관계기관의 관행적 부정과 비리는 물론이고 최고 명령기구인 청와대까지 정치적·법적·행정적 책임소재를 낱낱이 추궁해야 한다. 엊그제 다녀온 합동분향소 출구 앞에서 가족들이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는 것을 보고 나는 정부의 대응이 얼마나 미봉책에 그치는지 더욱 실감했다.

부패와 타락, 죄와 악으로 물든 이 세계에서 순수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드문 일이다. 죽음에 대해 갖는 슬픔의 감정은 그 순수함으로 하여 우리의 영혼을 정화한다. 돈도 권력도 또 명예도 죽음 앞에서는 한갓 티끌 같은 것이기 때문에 죽음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진도 해역에서 안타깝게 떠난 꽃다운 죽음들은 강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명한다. 맑고 깨끗한 새로운 나라를 만들라고. 다시는 이런 억울한 죽음이 없게 하라고. 그것만이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는 길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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