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분별심을 가지지 말라고 한다. 부처님은 분별하는 것 자체가 망상이며 진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너와 나로 나누고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으로 나누고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는 그 모든 분별심을 내려놓으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고양이가 불길하고 싫다는 분별심을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
그런데 어느 날 딸이 고양이를 키우겠다고 선언했다. 딸은 아주 어릴 때부터 친구가 키우는 고양이에 반했다고 말했지만 나는 반대했다. 딸은 내가 창작실에 간 사이에 고양이를 아파트에 데려다 놓았다고 메일로 통보했다.
일주일 만에 창작실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날, 식구들이 한결같이 늦게 귀가한다고 했으므로 나는 혼자 고양이와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문을 열자 불 꺼진 어두운 아파트의 현관문 앞까지 나왔던 작은 짐승이 놀라서 후다닥 도망쳤다. 나는 집안의 모든 전등을 켜고 고양이를 찾았다. 손바닥만 한 작은 고양이는 안방의 침대 밑에 숨은 채 나오지 않았다. 내가 해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저 녀석이 나를 뭐로 알고. 난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야.’
나는 고양이를 안심시켜주려고 입꼬리를 올리고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그때 처음 고양이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본 셈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고양이의 두 눈이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아름다웠다. 번쩍거리는 광채는 내가 소문으로 알고 있던 기분 나쁜 빛이 아니라 고양이를 고양이답게 하는 고양이만의 매력의 빛이었다. 누구도 가지지 못한 ‘투명’ 그 자체였다.
내가 손짓하고 불러도 고양이는 어두운 침대 밑에서 기어 나오지 않았다. 내가 한바탕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한 병사처럼 현관문을 와락 열었던 것이 문제였을 것이고 내 몸에서 적의의 기운이 뻗쳐 나왔을 것이다. 그 때문에 고양이는 침대 밑으로 숨어서 나를 탐색하는 것이다. 나는 숨어서 나를 살피는 고양이가 안쓰러웠다. 저토록 작은 짐승을 왜 나는 그토록 두려워했던가.
그날 이후 나는 창작실에 갔다가 주말이 되면 집으로 돌아와서 고양이를 만났다. 그때마다 고양이는 부쩍 커져 있었다. 고양이가 커갈수록 할 일이 두 배는 늘었다. 청소기를 자주 돌리고 세탁을 해도 떨어져 나가지 않는 고양이 털을 일일이 롤러로 떼어냈다. 그러고도 고양이 털이 공기 중에 떠돌아다니면서 딸의 입안으로 들어갈까 걱정했다. 더군다나 발톱이 자라나서 딸의 발이나 팔을 할퀴는 것도 문제였다. 그 상처에 소독할 때마다 나는 고양이를 다시 미워했다. 커갈수록 몸에서 비릿한 냄새가 나고 거실이 고양이 용품으로 좁아졌다고 투덜거렸다.
점차 고양이가 집에 오지 않았을 때의 질서가 그리웠다. 간혹 현관문을 열고 고양이가 복도로 나가는 것을 방치했다. 고양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서 찾을 수 없게 됐으면 싶었다. 하지만 고양이가 현관 밖으로 나가기가 무섭게 딸은 고양이를 안고 들어왔고 고양이 역시 현관문을 닫으려고 하면 날쌔게 집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고양이가 집에 온 지 어느새 다섯 달이 되자 딸은 고양이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다고 말했다. 무조건적인 내리사랑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임이 분명했다. 평등하게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한다는 불제자의 마음이기도 했다. 하지만 왜 하필 내 아파트에서 고양이를 키워야 한단 말인가. 나는 처음부터 고양이가 싫었단 말이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고양이한테 조금 나눠주는 게 그렇게 힘들어?”
딸이 그런 내게 물었다. 그 말은, 엄마는 사랑에 인색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야 하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내 가족을 사랑하는 것 외엔 다른 것에 사랑을 베푸는 일을 잊고 지낸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나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혹은 나 자신이고 아들이고 딸이라고 대장경의 어느 구절에 적혀 있었던가. 그런데 그것을 입으로는 잘도 말하면서 작은 실천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이 되어 있었다.
며칠 전 딸은 수컷인 고양이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발정을 하지 않도록 하는 중성화 수술을 해주고 왔다. 그런 뒤 며칠 동안 고양이를 간호하며 두문불출했다.
“그것 봐. 사람들이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은 동물을 위한 게 아니라 인간들의 이기심 때문이야. 고양이를 집에서 키우겠다고 중성화까지 시키는 게 고양이에게 할 짓이야?”
딸은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으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이후 이상하게도 고양이가 내 집에서 훌쩍 사라졌으면 싶던 마음이 사라졌다. 오히려 고양이에게 진심 어린 연민을 느꼈고 고양이와 자주 놀아주고 자주 쓰다듬어주었다.
“불쌍한 녀석. 불쌍하다. 어쩌다 고양이로 태어났니?”
자꾸 고양이에게 그렇게 물어보기도 했다.
고양이가 중성화 수술을 받은 뒤 고양이에 대한 원망스런 마음이 싹 가신 것은 나로서도 예측 못 한 변화였다. 그러니 사랑의 근원은 연민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쌍하고 별 볼 일 없고 위기에 빠진 것을 바라볼 때 배꼽부터 올라오는 이런 연민의 감정이 바로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랑의 감정인 모양이었다.
오늘도 고양이는 내 사랑의 손길이 한번 닿을 때마다 벌렁 드러누워서 온통 하얀 배와 속살을 다 보여주며 갖은 교태를 부린다. 그럴 때마다 내 손이 순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것을 만지며 교감한다. 그럴 때면 나는 나를 힘들게 하고 사랑을 방해하던 그 많은 에고를 벗어던진 순한 사랑의 대상이 되고 싶어지기도 한다.
내가 지금 만지는 것이 고양이든 불심이든 깨달음이든 확실치는 않지만, 확실한 것이 있다면 소문이 아닌 실재의 고양이를 대면한 내 손에 한없이 부드러운 것이 와 닿고 그 부드러움을 느낄 때마다 나는 몸서리치게 행복해한다는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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