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준
한국언론문화포럼 부회장

도회의 골목길은 집을 나온 고양이들 세상이다. 밤낮 아무 때나 주택가 골목 아파트 단지 어느 곳에서든 집 나온 고양이들이 목격된다. 물론 처음부터 야생 고양이는 아니다. 주인집 식구의 사랑을 애완견에게 빼앗겼거나 주인으로부터 버려진 고양이로 야생화했을 뿐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집에서 쫓겨난 유기(遺棄) 고양이들이다.

길거리의 고양이들은 사람을 경계하긴 하지만 결코 무서워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날쌘 사람이라도 고양이 근처 1m까지 다다르기 전에 고양이는 이미 안전지대로 물러나 있다. 고양이는 단지 경계의 눈빛을 보일 뿐이다. 그 눈빛은 사람을 비웃는 듯도 하고 원망하는 듯도 하다.

우리 아파트 단지 안에서도 언제 어디서든 고양이를 만날 수 있다. 고양이들은 아파트 단지 내 쓰레기 분리수거장과 음식물 수거함 주변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단지 안을 가로질러 흐르는 시냇가 풀섶이나 지하주차장은 그들의 놀이터다. 날씨가 따뜻할 땐 단지 담을 빠져나가 숲에서 들쥐나 새를 쫓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아파트 단지 안을 흐르는 개울은 주민들에겐 축복이다. 계절에 따라 다양한 자연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비나 눈이 내린 뒤엔 시원한 물소리를 들려주기도 한다.

산보를 나가거나 등산을 나설 때는 어김없이 이 개울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를 이용하는데 그때마다 숱한 자연의 경이를 체험한다. 지나치기에 십상인 쪼그만 야생화의 정교한 아름다움이며 도저히 먹이가 걸릴 것 같지 않은 바위틈 좁은 구멍 입구에 거미줄을 치고 기다리는 1~2mm 크기의 거미, 한겨울 눈을 뒤집어쓴 채 새싹이나 꽃봉오리를 틔우기 위해 자줏빛으로 변하는 나뭇가지 등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경탄을 자아낸다.

그중에서 나를 가장 궁금하게 하는 것은 송사리들의 삶이다. 심한 가뭄으로 모래밭으로 변한 개울 바닥에 다시 물이 흐르면 어김없이 2~3일 안에 작은 송사리 새끼들이 몰려다니는 기적을 목도한다. 수생동물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모랫바닥에 물이 흐른다고 며칠 만에 송사리 새끼가 나타난다는 것은 내 상식으로는 불가사의 그 자체였다. 모래뿐인 사막에 비가 온 직후 며칠 만에 풀이 돋고 꽃이 피는 장면은 TV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이 있지만 물기 하나 없던 모랫바닥 어디에 송사리 새끼가 숨어 있다 나오는지, 아니면 어떻게 알이 살아남아 물을 만나 송사리로 태어나는지 궁금했다. 이 궁금증을 풀겠다고 송사리의 일생을 다룬 책도 읽어보았으나 여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어느 날 꽁꽁 얼어붙은 이 개울가 산책로를 걷다 또다시 불가사의한 장면을 목격했다. 젊은 남녀 뒤를 갈색과 흰색 무늬가 섞인 작은 고양이가 뒤따라 걷고 있었다. 전혀 사람을 경계하는 빛이 없이 젊은 남녀의 애완고양이처럼 20~30cm 간격을 두고 사뿐사뿐 걷고 있었다. 물론 시선은 젊은 남녀를 향한 채. 고양이는 걸음이 느려진 젊은 남녀 앞으로 나서서 고개를 쳐들고 여자 쪽을 쳐다보기도 했다. 여자는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으나 그렇다고 무서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남자가 아는 척을 하자 고양이는 꼬리까지 살랑거리며 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여자가 조금은 겁이 났는지 ‘왜 이러지?’ 하고 자문하는 눈치다. 그러나 고양이는 곁을 떠나지 않았다. 젊은 남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았고 고양이는 뒤로, 옆으로, 앞으로 옮겨 다니며 젊은 남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젊은 여자로부터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나는 걸음을 늦추어 흥미 있게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개울가 산책로가 끝날 즈음 남자가 아무래도 계속 따라오는 고양이가 성가셨던지 손짓으로 고양이를 쫓는 시늉을 했다. 그래도 고양이는 물러설 기색이 아니었다. 그들이 산책로를 완전히 벗어나 차들이 다니는 큰길로 접어들어서야 고양이는 동행을 포기하고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을 한참 지켜보다 낙담한 눈빛으로 개울가 숲 덤불 속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내가 본 현장이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전생에 뭔가 관계가 있었던 사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가. 내 눈에는 분명 고양이와 젊은 여자는 정말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자 주변을 맴돌던 고양이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아니 이게 웬일이야! 그렇게 찾아다니고 그리워했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날 몰라보겠어? 모른다고? 장난치지 마. 당신을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얼마나 기도했는데. 나는 금방 알아봤는데 나를 알아보지 못하다니 섭섭하군. 난 고양이로 태어나고 당신은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그렇게 몰라볼 수 있는 건가? 잘 기억해 봐. 내가 당신의 누구였는지 기억날 거야. 우리 둘 모두 서로에게 얼마나 귀중한 존재였는지. 정말 모르는 척하기야?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게 좋을 뻔했군. 이렇게 냉대받을 줄은 몰랐어. 그렇게 좋아하고 그리워했는데. 언젠가 다시 깨닫게 될 거야.’

그러고 보니 인연, 혹은 연기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경험이 이번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수많은 사람과 스치면서 불현듯 느껴지는 기시감(旣視感)은 물론 개나 고양이 새 같은 동물과의 만남에서도 유별난 교감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생명을 갖고 태어나는 순간 인드라의 망(Indra’s net) 위에 던져지는 게 아닐까. 수미산 꼭대기 도리천에 산다는 제석천왕이 이 세계를 둘러싸듯 쳐놓은 인드라망은 우연 같은 필연, 필연 같은 우연의 끈으로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데 단지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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