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태용
건국대 철학과 교수

큰 사찰의 법회에 강의를  맡은 적이 있었다. 강의 중에 질문을 던져 보았다.

“부처 되고 싶은 분?”

당연히 모든 사람이 “저요! 저요!!” 하며 손을 다 들었을 것이라고?

그렇지 않다. 10%도 안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손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것도 어떤 분들은 매우 계면쩍은 듯한 모습으로 손을 들었을 뿐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 아닌가? 법회를 마치고 헤어질 때는 늘 하는 인사가 “성불하세요!” 또는 “성불합시다!”가 아니었던가? 요즈음은 좀 다르게 “행복하세요!”라는 인사를 하는 분도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성불’이 모든 불자의 서원 아니던가? 그런데도 정작 부처 되고 싶은 분을 물었을 때 이런 결과가 나왔다면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왜 이럴까를 곰곰 생각하다 보니 단지 문제가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교 전체가 이런 증상을 앓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법회의 마지막 의식은 ‘사홍서원’이다. 그것을 끝에 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서원을 법회 끝나고도 계속 이어가라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법회 뒤에도 사홍서원을 가슴에 품고, 일상의 삶을 사홍서원이 이끌어가는 삶을 살아가는 불자는 얼마나 될까? 가만히 살펴보면 거룩한 사홍서원은 장엄한 법당, 거룩한 부처님께 맡기고 가는 것이 불자들의 자세로 굳어져 있는 것 같았다. ‘더러운 세속에 어찌 사홍서원 같은 거룩한 것을 유출시킬까 보냐!’인가?

또 불자들이 가장 빈번하게 외치는 구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불국토 건설’이다. 그런데 과연 지금 여기에 불국토 건설의 첫걸음을 진지하게 내딛는 불자는 얼마나 될까? 건설해야 할 불국토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구체화시켜 그려보고는 있는 것일까?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이 국토가 어떤 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다른지를 바르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잘못된 국토의 모습을 불국토로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시작해서,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궁극적으로 어떤 모습의 국토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그림이 그려져야 한다. 그런 모습을 불교계에서 찾기 힘든 것이 현실이라 한다면 지나친 말이 될까?

몇 가지 대표적인 예를 들었지만 이러한 문제들에는 공통성이 있다. 높은 이상과 관념만 있고 현실적일 실천을 위한 구체적인 강령과 방안이 없는 것이다. 우선 처음 이야기했던 ‘성불’의 문제를 보자. ‘부처 되고 싶은가?’ 하는 물음에 쭈뼛거리게 되는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는 부처 되면 현재의 삶에 주제가 되고 있는 많은 즐거움을 포기해야 할 것 같다는 아쉬움이다. 두 번째는 부처님은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지만 감히 지금의 현실에서는 엄두를 내기 힘든 그런 이상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이유는 근본적으로는 하나로 귀결된다. 지금 여기의 삶에 부처님의 모습을 겹쳐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보다 더 멋있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길이 바로 부처 되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면 정말 훌륭하고 멋있는 농군이 되는 길이 바로 부처 되는 길과 연결되지 않는다. 상인이라면 보다 양심적이고 멋있는 상인의 길이 부처 되는 길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바로 지금의 자기로부터 부처로 나가는 길이 제시되지 않기에, 지금의 즐거움을 버려야만 한다는 소극적인 생각에 머물고, 차근차근 부처로 나가지 못하고 아예 관념과 이상에만 부처를 담아두게 되는 것이다.

사홍서원도 마찬가지이다. “중생을 모두 건지리라!” 얼마나 크고 거룩한 목표인가? 그런데 모든 중생을 다 건지겠다는 너무나 큰 목표에 압도되어 지금 우리 주변에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중생에게는 작은 도움을 손길도 내밀지 못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번뇌를 다 끊으리라!” 나의 현실적인 괴로움을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 구체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차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불법을 다 배우리라!” 부처님 경전이나 교리 공부에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가? 차분히 불교를 배워나가는 계획을 생활에 반영하고 있는 것인가? 종교인 가운데 불자들이 가장 많이 경전이나 교리의 공부를 뒷전으로 밀어 놓고 있지는 않을까? “불도를 다 이루리라!” 자신의 수행 방편을 가지고 일상 가운데 꾸준히 수행을 지속해 나가는 불자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이렇게 살펴본다면 사홍서원도 너무나 크고 아득한, 단지 관념 차원의 서원에 머무르고 있기에 현실의 삶을 이끌어가지 못하는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법회가 끝나면 거룩한 불전에 모셔놓고 나와서, 현실은 삶은 현실의 논리로 살아가는 게 불자들의 모습 아닌가 싶다.

불국토 건설에 들어가도 문제는 마찬가지이다. 아니 더 심각하다고 할까? 불국토라는 것의 그림이 아예 그려지지 못하고 있다. 너무 거룩하고 완전한 이상이기에 그려내기 힘들 것이라고 변명해서는 안 된다. 오늘의 현실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 가는 것과 불국토 건설의 길이 다른 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자면 불교의 정신을 통해 현실을 비판하고, 보다 나은 내일의 그림을 꾸준히 그려가야 한다. 그런 과정 없는 불국토 건설은 정말 공염불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런 공염불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 지금 불교의 숨김 없는 모습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는 것은 언제나 있다. 그 괴리가 불교에는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듯하지만, 발이 공중에 떠 있다고나 할까? 그 발이 이 현실이라는 땅을 딛도록 해야 할 것 같다.

사홍서원이 구체화되어 나의 일상을 이끌어 가는 진실한 목표가 되고, 보다 멋있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 가는 길의 나날의 종착점에 부처가 있다는 믿음을 지닌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함께 손잡고 나가는 그런 불교……. 이렇게 말하는 것도 단지 이상의 제시에 그치는 것일까? 나처럼 공염불하지 않고 그 구체적인 실천의 묘방을 찾아 이미 실천해 나가는 많은 분이 이미 계시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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