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경/지성훈/백경민/피터김/구기성/홍창성

이 에세이를 쓰는 인연
지난여름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지역에서 불교 공부를 원하는 한인들이 모여 현응 스님의 〈사제(師弟)에게 보내는 열두 번의 편지〉를 읽고 토론했다. 두 달에 걸쳐 매주 토요일 오후 미네소타대학 학생회관의 한 쉼터에 모여 세 시간씩 현응 스님의 편지글들을 아홉 차례 논의한 것이다. 모든 모임이 끝난 8월 초, 여러 사람의 순수한 노력과 정성으로 이룬 공덕을 에세이로 만들어 《불교평론》의 독자들과 함께 나누어 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 여기에 소개하는 여섯 편의 에세이다.


돈오(頓悟)―혁명적 깨달음

유선경
(미네소타주립대 철학과 교수)
sun.yu@mnsu.edu

보통사람들에게 돈오(Sudden Enlightenment)라는 말은 깨달음이 순간적으로 갑작스레 다가옴을 뜻한다고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현응 스님은 저서 《깨달음과 역사》에서 ‘깨달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돈오’란 존재와 인식의 분리할 수 없는 역동적 구조에 대한 깨달음으로, 깨달음 이전의 세계관이 깨달음 이후 전적으로 다른 세계관으로 전환된다고 한다. ‘돈오’란 ‘혁명적 깨달음’이다. 여기의 ‘혁명’이란, 20세기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이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제시하는 ‘과학혁명’의 혁명 같은 것으로서, 천동설(Geocentrism)이 지동설(Heliocentrism)로 바뀌는 것과 같이 기존의 믿음체계와 가치관이 전적으로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는 것을 의미한다.
쿤에 의하면 과학과 우리의 과학적 지식은 더 나은 과학으로의 발전과 향상의 길을 걷기보다는 오직 가끔씩 일어나는 전면적인 과학관과 세계관의 대전환에 의해서만 변화한다. 실재론(Realism)을 옹호하는 과학철학자인 카를 포퍼는 과학은 반복되는 반증 과정을 거치며 완벽히 발전된 어떤 ‘참’인 형태의 과학을 향해 발전한다고 주장하지만, 쿤은 완벽히 발전된 과학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며 과학철학에서 실재론을 부정한다. 그리고 쿤은 과학과 우리의 과학지식은 잦은 반증 과정을 통해 개개의 과학이론들이 취사선택되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과학체계는 한동안은 한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점진적으로 과학지식의 축적을 이루어 낸다. 황금기를 누리는 이 과학체계에 반대이론이나 반증 가능성이 있는 새로운 정보가 하나둘 나타나도 기존의 과학체계를 믿는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한다. 그러나 반증 가능성이 있는 정보의 출현이 잦아지고 기존의 과학체계가 이러한 정보나 반론을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없게 되면, 이러한 정보나 반론을 아무 문제 없이 포용하고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과학체계와 세계관이 부상하게 된다. 이로써 기존의 믿음체계와 가치관이 전적으로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는 전면적이고 혁명적인 과학체계의 변화가 일어난다.
과학혁명을 통한 과학의 발전은 귀납적(inductive) 방법에 의한 점진적 과학지식의 축적으로가 아니라 가치관과 세계관의 혁명적 전환으로만 가능하다. 이것이 쿤이 말하는 패러다임 교체(paradigm shift)이다. 과학혁명 이전의 과학체계를 이루던 개념들은, 과학혁명 이후 대부분 사라지거나 살아남은 개념들도 새로운 과학체계 안에서 그 뜻이 바뀌게 된다. 그래서 만약 과학혁명 이전에 천동설을 믿던 과학자들이 ‘행성(planet)’이라 말하며 천동설을 설명하였다면, 그들의 ‘행성’은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하나의 천체(celestial body)를 뜻한다. 과학혁명 이후 지동설의 체계에서 동음의 ‘행성’은 해를 중심으로 도는 하나의 천체라는 새로운 뜻을 가진다. 우리 인식체계의 혁명적 전환은 존재 세계에 대한 해석에 영향을 미친다.

이제 ‘과학혁명’이 갖는 의미를 새기며 현응 스님의 ‘혁명적 깨달음’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혁명적 깨달음’이란 깨달음 이전의 세계관인 본질주의(Essentialism)와 실재론(Realism)에 기초한 믿음체계가 깨달음 이후 전적으로 다른 세계관인 ‘연기’ 곧 공(空)을 이해하는 믿음체계로 전환되는 것이다. 깨달음 이전에는 개개의 사물들이 고정 불변하는 본질을 가지고 있어 그 본질에 의해 규정되고 또 그것에 의해 다른 사물과 구별되고 구분된다고 믿는다. 모든 사물은 각각 독립적인 사물로 존재한다. ‘나’라는 인식의 주체는 인식의 객체인 사물을 바라보며 주체와 객체, 다시 말해, 인식주관과 대상존재라는 두 개의 확연히 다른 영역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연기’ 곧 공(空)을 이해하면 나의 존재를 포함한 삼라만상의 진정한 존재양상이 변화와 관계로 이해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계에서 고정 불변하는 본질을 생각할 수 없으며, 본질이 없기에 그에 의해 규정되는 그 어떠한 ‘것’의 존재는 불가능하다.

아무것도 독립적인 사물로 존재하지 않는다. 개개의 사물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기에, 사물과 사물과의 관계는 그 어떠한 ‘것’과 다른 어떠한 ‘것’과의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존재의 양상은 ‘관계’로만 나타난다. 이 ‘관계’란 개개 사물이 존재한 후 생기는 부차적 속성이 아니라 ‘관계’ 그 자체가 삼라만상이 존재하는 진정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서로서로 연결되어 관계를 맺고 있는 모습 그 자체로서 존재의 본 모습을 깨달은 이후, 대상과 인식주관의 분리는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존재와 인식 두 영역의 역동적인 구조를 터득하게 된다. 깨달음 이전에는 ‘사물’이라는 단어의 뜻이 다른 것과 구별되고 구분되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개체였다면, ‘연기’를 깨달은 후의 ‘사물’이라는 단어의 뜻은 독자적인 실체가 아닌 다른 모든 삼라만상과 연결되어 있는 ‘관계들’이라는 새로운 뜻으로 이해된다. ‘연기’의 ‘깨달음’은 점진적인 절차가 아닌 혁명적인 전환으로, 즉 패러다임 교체로 이루어진다. 천동설 체계에서 아무리 열심히 과학적 지식을 축적시키고 발전시키더라도, 기존의 관점을 완전히 새로 바꾸어 전적으로 새로운 관점을 가져야만 지동설을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돈오란 본질주의와 실재론에 기초한 믿음 체계를 ‘연기’의 세계관으로 혁명적으로 전환해야만 가능하다. 

상상의 날개를 한번 펴 볼 것을 제안한다. 당신이 이차원에 살고 있는 하나의 동그라미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고 상상해 보자. 불현듯 당신은 자신이 사실은 삼차원의 구(Sphere)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당신은 삼차원의 세계에서 구의 단면인 이차원의 동그라미로 알고 살아오고 있었다고 깨달았다. 이러한 ‘깨달음’은 이제 모든 사물이 이차원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삼차원의 부피가 있는 사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당신 인식의 혁명적 전환으로 존재의 진실이 밝혀지며, 이로써 당신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전면적으로 전환된다. 필자는 이런 예가 깨달음이란 우리의 관점을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현응 스님의 가르침을 쉽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범부들의 깨달음

지성훈(시게이트 기술유한회사 선임엔지니어) uidaho@gmail.com

숫자와 공식으로 생활하는 사람에게 철학 또는 종교라는 단어는 마치 추운 한겨울에 잠을 자는 웅크린 곰의 형상을 하게 해 준다. 게다가 미국이라는 곳에서 불교를 철학적인 해석으로 접근하기는 더욱 힘든 상황이다. 그럼에도 아주 소중한 책과 사람의 인연으로 불교를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철학적 접근으로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깨달음, 정말로 장엄함과 웅장함이 느껴지는 단어이다. 단어 자체가 가진 의미의 거대함과 또 달성하려는 노력에 따르는 실질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대중들에게는 접근하기 어려운 경지로만 다가오곤 한다. 그래서도 더욱더 《깨달음과 역사》의 저자인 현응 스님이 ‘깨달음’을 분명히 정의(定議)하고 한국불교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자세히 조목조목 설명하신 점이 반가웠다. 깨달음은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 혹은 성불할 수 있는 수단과 방편이라고만 이해하던 나에게, 불자 깨달음의 길이 중생구제를 위한 ‘보살도의 구현’이라고 가르치는 스님의 글은 정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선 전자에서 말한 ‘깨달음=해탈=성불’은 아주 정적(靜的)인 느낌을 준다. 깊은 산 속 선방의 참선, 면벽수행, 묵언정진 등은 많은 고통과 인내를 요구한다. 그래서 이것은 범부들에게는 깨달음에 대한 접근조차도 어렵게 만들어 버리는 이해이다. 하지만 현응 스님이 펼치는 가르침인 ‘깨달음의 길=실천=보살도의 구현’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로서, 많은 사람이 쉽게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동적(動的)인 것들이다.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불교의 수행과 정진 과정을 정적(static)으로가 아니라 동적(dynamic)으로 해석하고 접근하는 것은, 상자 안에서 생각하는 사람을 상자 밖으로 나오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불교는 일반적으로 무아(無我), 연기(緣起) 즉 공(空)으로 기본적인 가르침을 정의하고 설명한다. 위의 세 단어가 가지고 있는 함축적인 의미는 너무도 고귀하여, 많은 수도자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일생을 바쳐 참선, 기도, 수행과 만행 등을 한다. 하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대중의 경우는 위의 불교의 기본적인 세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일상에 적용하여야 하는지 의문이 생긴다. 우리가 읽고 토론한 현응 스님의 〈사제에게 보내는 열두 번의 편지〉의 대상자는 스님들이기 때문에, 이 글들 안에 대중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질문에 대한 실질적인 해답 또는 눈에 바로 보이는 답은 없다. 하지만 스님의 책은 앞서 말한 것처럼 불교의 가르침을 동적으로 정의하고 해석함으로써 동적인 삶에 익숙한 범부들에게 책을 읽는 본인 스스로 그 해답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의문에 대한 답을 바로 글로써 기술한 해답지보다는, 오히려 질문자 본인이 직접 그 답을 찾아서 느끼도록 만들어서 더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깨달음을 철학적으로 이해하기가 힘든 주된 이유는 많은 자료와 글들이 너무 어렵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는 논리로 아주 장황하게 시작해서, 중간에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데 거의 대부분을 소비하고, 마지막 부분에는 아주 두루뭉술한 결론을 내 버리기 때문에, 간단명료한 결론에 익숙한 범부들에게, 특히 숫자와 공식에 익숙한 내게는 깨달음의 정의를 인식하는 데 많은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책의 저자인 현응 스님은 불자의 길이 깨달음의 길인만큼 그 길은 동시에 보살도 구현의 길이라고 가르친다. 즉, 깨달음을 위한 수행론과 삶의 방식을 이분법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실제로는 모두가 동일하다고 아주 쉽고 간단하게 정의해 놓고, 서로 결합된 실천적인 행동에 의한 ‘보살도 구현’의 길이 깨달은 자들의 길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결국 ‘보살도의 구현’이 깨달음의 길이고, 깨달음의 길이 ‘보살도의 구현’이다. 참으로 간단명료하다. 보살도를 구현하고 난 뒤 깨달음을 얻는다는 의견과, 반면에 깨달음을 얻고 보살도를 구현한다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많이 생각하고 토론해도 결론을 찾을 수 없다. 보살도의 구현과 깨달음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서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인정하여, 일반 생활을 하면서 실천적인 행동을 함과 동시에 스스로 생각하고 반성하면서, 좀 더 나은 개인적인 삶과 발전적인 사회적인 목적을 이루면, 이것이 바로 우리 불교가 지향(志向)하는 정토(淨土)가 아닐까?

자기가 생활하고 있는 삶에 대해 많은 불만을 품고 살면서, 다른 곳을 동경하며 자기 푸념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불만족스러운 감정이 자기의 삶을 오히려 불행하게 한다는 것을 모르는 일이다. 먼 곳에 있는 정토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우둔한 자들이 하는 행동이다. 자기가 생활하는 곳이 바로 정토이며, 이 정토를 더욱더 윤택하게 해 주는 것이 실천적인 행동을 통한 보살도의 구현과 깨달음이다.

 

불교와 기독교의 이상적 공동체 지향과 실패

백경민(미네소타대 사회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loveglory99@gmail.com

지난해 유엔이 발간한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국민 행복도에서 전체 156개국 중 56위를 기록하였다. 이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를 기준으로 해서 살펴볼 경우, 한국은 교육, 직업, 치안, 정치참여의 영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일과 생활의 조화, 환경, 주거 그리고 공동체 생활에서는 하위권에 머물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공동체 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는 한국 인구의 29%를 차지하는 기독교와 23%를 차지하는 불교가 본래의 정신을 구현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 아닐까 한다.

불교의 기본 정신

불교의 두 가지 기본 축은 공(空)과 무아(無我)에 대한 이해이다. 공이란 근본을 이루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관계와 변화의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서는 자신(我) 또는 영혼은 어떠한 현상 또는 과정으로서만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와 변화가 연기 즉 공이라는 것이며, 이런 연기라는 관계에서만 사물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과 무아가 세상의 원리라는 것을 온몸으로 이해하는 것이 결국 불교가 추구하고 있는 깨달음이라 하겠다. 더 나아가 불교에서는 이러한 공과 연기를 이해하면 이에 대한 결과가 행위로서 수반되게 되는데, 이를 보살행(菩薩行)이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보살행은 세상이 결국 공과 연기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면, 나(我)와 남(他)의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결국 남을 나처럼 돌보게 되어 선한 공동체가 형성되도록 돕는 행위로 규정할 수 있다. 요약하면 불교에서 추구하는 것은 공과 연기를 깨달음으로써 결국 이 땅에 불국정토(佛國淨土)를 실현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기본 정신

기독교의 근본은 성경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의 가르침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인간이 그의 피조물(被造物)임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Messiah, 구세주)는 바로 예수이며, 예수는 하나님과 아담과 이브 사이에서 약속한 ‘여자의 자손’으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말세에 재림한다는 것 또한 믿는다. 이러한 기독교의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동시에 예수의 가르침에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가르침이라는 것은 결국 이웃 사랑과 복음 전파로 요약될 수 있다. 예수는 수많은 기적을 통해서 그리고 가르침을 통해서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자신이 실천했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보편적으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그가 전한 이웃 사랑의 가르침과 함께 널리 전하라고 강조했다.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의 인구 50% 이상이 두 가지 종교 중 하나를 믿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이미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사회가 돼야 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우리 사회는 33분마다 한 사람씩 자살하게끔 만드는 곳이 되어 버렸는가? 이는 불교와 기독교가 본연의 정신, 즉 자비와 사랑을 구현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불교는 공과 연기를 깨달아 적극적으로 공동체 내에서 이기심과 집착을 버리고 서로가 서로를 돕는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데 힘써야 하는데, 개인의 심적 평안과 치유 그리고 산사(山寺)에 들어가 개인적인 철학적 화두(話頭)를 풀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하다. 기독교 역시 신앙의 문제를 온전히 신과 나의 관계 그리고 그것의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시 말해 신과 나 자신이 좋은 관계를 형성할 때 신으로부터 많은 복을 얻어낼 수 있고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횡행하고 있다. 결국 이를 요약하면 불교와 기독교 모두 공동체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개인의 문제 해결 그리고 더 나아가 개인의 기복(起福)에 그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불교와 기독교 어디에서도 개인의 복과 성공이 가르침의 핵심이 아니다. 불교에서는 개인적인 깨달음을 바탕으로 결국 불국정토를 이 땅에 이루어내는 것인데, 그것은 현세(現世)에서는 건강한 공동체를 의미한다. 기독교의 천국 역시 《이사야 서》에서 그려진 것처럼 사자와 이리가 아기와 같이 있어도 아무 위험이 없는 곳이다. 즉 건전하고 안전한 공동체를 이 땅에 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불교와 기독교 어디에서도 공동체의 회복이 강조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길은 어디에 있는가

불교에서는 삶의 실재(實在)라는 것이 사실은 공이며 연기에 의해 일어나는 환영 같은 것이라고 본다. 존재에 집착하지 않고 흘러가는 듯한 흐름 속에서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음을 보는 것 그리고 그것을 온전히 내 몸에 체화하는 것이 성불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기독교에서는 예수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것, 이와 동시에 예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는 것이 결국 천국을 이루어내는 길이라고 보았다. 현재 우리는 이러한 근본 가르침과 매우 동떨어진 시대에 살고 있다. 불교와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돌아가서 살펴보고, 내가 아닌 우리를 중심에 놓고 어떻게 보살행을 행할지, 그리고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지 돌아보아야 한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하시고”(창세기 3:15). 이를 원시복음이라고 하며, 이는 메시아에 대한 성경 최초의 예언이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예수라 믿는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이사야 11:6).


깨달음과 실천

피터 김(미네소타 SKK건축회사 건축사) sukkikim@gmail.com

필자는 1998년 미국 미네소타로 건너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건축사로 일하고 있다. 미국이 유럽과 여러모로 가까워 서구문화를 깊이 있게 체험할 수 있었던 필자는 서로 다른 문화를 비교 분석하며 발전의 실마리를 찾아보려는 버릇이 생겼다. 필자는 한국불교가 서구사회의 면모를 더 잘 이해하고 그 바탕 위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해 주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다.

필자가 이해하는 서구문화의 장점과 종교.

미국 문화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지위와 신분, 나이에 상관없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이고 투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존중되고 그들의 의견이 반영되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런 문화를 기반으로 사회적, 정치적 선입견 없이 대다수 사람들이 올바른 방향에 대해 토론한다. 특히 젊은이가 나이 지긋하신 분의 의견에 자연스럽게 반대할 수 있고, 논리적으로 젊은이의 생각이 타당하면 경력이나 연륜은 의사결정에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즉 주도권 변화에 역동성이 보장되고 그 과정도 놀라울 정도로 투명하다. 그렇지만 천주교, 개신교, 이슬람교 등에서 이런 과정이 정당화되지 못하고 무조건 믿음을 강요당하는 것이 눈에 띄는 현실이다.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토론이 금기시되어 있는 이들 종교는 철저한 토론과 검증이 그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으며 자체정화 작용의 결여로 발전이 정체되어 있다. 그렇다면 교육수준도 높고 영향력도 있는 사람들이 왜 이런 종교들의 일방통행을 방관하고 있을까?

현재 미국인 대다수의 정신적 고향인 유럽은 종교적으로 독과점인 형태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왔다. 어쩌다가 약간의 다른 생각이라도 하면 이단으로 몰려 많은 사람이 몰살당하는 참혹한 역사를 수없이 반복해 왔다. 어쩌면 반기를 들지 않더라도 의구심을 갖는 것 자체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게 할 만큼 고통스러운 사건들이 많았고, 이런 참사들이 반복되다 보니 종교적 다양성의 싹을 잘라버렸을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해 본다. 유럽 역사를 조명해 보면 이웃종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이라는 것은, 이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너무도 높은 정신적 경지의 자신감과 투명함이었다. 유럽인들이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었다.

깨달음과 역사

종교의 한계를 인식하고 명쾌한 해답을 찾고 있던 필자에게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즉문즉설을 통해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지는 경험을 한 후 불교가 도대체 무엇을 담고 있는 종교인가를 질문하게 되었다. 홍창성 교수의 주도로 현응 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를 공부하는 모임을 통해 불교의 기본 개념과 주제에 대해 알게 되었다. 공, 무아, 연기에 대한 홍창성 교수의 철학적 설명과 대학원생들의 자유로운 의견이 어떤 값비싼 휴가와도 비교하지 못할 휴식과 기쁨을 느끼게 해주었다. 특히 현응 스님이 펼치는 불교의 기본 가르침과 부처님 말씀의 역동성, 그리고 이에 대한 스님의 철학적 접근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을 설명할 때 탁월하게도 도교의 영향으로부터 불교가 분리되어야 함을 지적했고, 그러면서 불교의 기본적 명제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한 점에 감사드리게 되었다. 또한 공(空)의 가르침을 설파할 때 변화와 관계성의 참의미를 명료하게 선별해 주었고, 주관적 영역과 객관적 대상을 분별하는 데 대한 인식론 차원의 우려도 잊지 않으셨다.

추상에서 행동으로

《깨달음과 역사》를 통해 얻은 필자의 불교에 대한 이해로 비추어 볼 때, 현존하는 한국불교의 모습은 상당히 거리가 있게 느껴진다. 필자는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을 통해 한국으로 전파되는 동안 계시종교(啓示宗敎)와는 상당히 다른 길을 걸었다는 역사적 인식에 눈을 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한국에 정착하고 성장하면서 생겨난 자체정화 작용의 결여를 걱정해 본다. 깊이 있는 철학을 기초로 한 불교지만, 우리 민족의 이러저러한 많은 전통을 그 안에 받아들여 왔고, 그 결과 불교의 본질이 빛나는 진주가 석회 퇴적물로 감싸이듯 감추어지게 되었음을 우려해 본다. 그리고 한때 선불교에 심취했던 스티브 잡스의 말−“나에게 아이디어는 실행되지 않으면 값어치가 없다.

아이디어는 승수(multiplier)에 불과하다. 실행이야말로 수백만 불의 가치가 있다.”−처럼 부처님이 발견하신 진주를 갈고 닦아 세상 사람들과 공유 가능한 형태로 만드는 실천에 관한 연구가 얼마나 있었는지도 궁금하다. 추상적 개념보다 그 개념을 분석해 실천해 나갈 방법의 계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또 그 결과를 개념과 다시 비교해 보고 고쳐나가는, 실천하고 행동하는 불교가 필자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온다. 특히 문화적, 인종적, 계층적 변수(變數)에 흔들림 없는 구체적 행동과 방법의 창조와 계발이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 법륜 스님이 진행하는 정토회나 즉문즉설을 그 시작으로 보고 싶다. 중생들이 삶에 의문을 가지고 방문했을 때 체계적으로 설명해 주고 깨달음으로 갈 수 있는 지도(roadmap)와 구체적 행동과 방법(means and methods)을 제시하여 많은 사람을 현실의 고뇌와 불행을 극복하는 세계로 이끌어야 한다.

실천으로의 움직임은 과거의 말씀에만 안주하지 않아야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진정 공(空)의 사상을 습득한 불자들은 새로운 ‘열 가지 실천적 원력(十大行願)’을 자신의 안목과 서로 간의 철저한 토론을 통해 창조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 내야 한다. 필자가 이해한 공(空)은 항상 변화하고 그 무엇이든 누구이든 고정 불변하는 절대 진리일 수는 없다는 가르침이기에도 더욱 그래야 한다.

항상 자신과 사회를 공(空)의 눈으로 되돌아보고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에 충실한 역동적인 불자들을 만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개인적 관점에서의 실천불교

구기성
(아이오와주립대 컴퓨터공학과 박사과정)
seoninlife@gmail.com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적어도 한 번쯤은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져본다. 과학에서 죽음은 신체의 생명활동 정지를 의미하지만, 종교에서 죽음은 삶에서 어떠한 단계로의 전이(transition)를 의미하고 있다. 즉 죽음은 존재의 여러 가능한 단계 중에서 다른 한 단계로 옮겨 가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의 삶과 죽음에 관한 견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겠지만, 그 대표적인 예는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찾을 수 있겠다.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며,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니,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또한 그러하다.

이 구절을 삶과 죽음의 문제에 적용해서 제 나름대로 해석해 본다면, 삶(色)과 죽음(空)은 느끼고 생각하고 의식하는 것과 같이 순간순간의 한 가지 형태일 뿐 서로 차이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개인의 생각으로 순간적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색(色, 모양/형태를 갖춘 것, shape)은 만들기 전의 공(空, emptiness)과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각각의 개인이 필요에 따라서 명칭을 붙이면서 색을 만들고 그 명칭을 없애면서 다시 공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여기에 시계가 있다고 생각해 보면, 시계라는 물체에 한국인은 ‘시계’라고 명칭을 붙이고 미국인은 ‘watch’라고 명칭을 붙이며 일본인은 ‘時計(とけい, 도케이)’라고 명칭을 붙이다. 만약 지나가는 강아지가 시계를 보면 어떻게 명칭을 붙일까? 아마 먹는 것이 아니므로 관심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는 불이(不二) 사상을 통해서 삶과 죽음, 악과 선, 너와 내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과, 그럼에도 어떻게 해서 다르게 인식되는가를 설명한다. 이것이 흔히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내용들이다. 불교는 우리 관념 속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실은 내가 만드는 매우 상대적이고 순간적이며 인위적인 형태들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상을 만들고 그것을 사용하게 되는 것일까? 서로 다른 상을 만들게 되는 상이한 관점이나 생각의 차이가 서로에게 이해되지 않을 경우 서로 간의 오해로 인해서 충돌이 발생하고 이것이 발전하면 싸움과 같은 문제로 발전하기도 하는데 말이다. 이것은 인간의 업 때문이다. 인간은 감각기관을 통해 자료를 모아 사고하고 그 사고를 바탕으로 말과 행동을 하며 일상에서 필요한 욕구를 충족시켜 간다.

문제는 사람들이 혼자서 살 수 없는 사회적 존재이지만 개개인이 처한 상황이나 조건 그리고 관점 등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서로 차이가 나는 조건에서 공통의 목적을 위해서 어떠한 업(業)을 하다 보면 생각에 차이가 발생하고 서로가 처한 상황이 극단적인 경우에는 그 차이를 좁히기 매우 어려우며, 그로 인해서 충돌이 발생하고 그 정도가 커지면 극단적인 문제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생각이나 기호가 비슷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렇지만 5분 전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5분 후의 내가 처한 상황과 감정 상태가 달라 의식의 차이와 생각의 충돌이 발생하듯이, 우리는 이 다른 것을 얼마만큼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삶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면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이에 대해서 불교가 제시할 수 있는 해결책은 무엇이 있을까? 내가 배운 불교에서는 자신부터 한 발자국 먼저 다가가자는 것이 그것이다. 남에게 주어진 조건의 차이와 그로 인해서 발생하는 상대방의 다른 관점과 상이한 관념을 바꾸기는 어렵다. 게다가 상대방에게 나의 조건을 이해하도록 부탁할 수는 있겠지만 강요할 수는 없다. 따라서 내가 먼저 생각한 바를 명확하게 상대방에게 전달하고, 이에 맞게 행동하여 상대방이 나를 신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즉 상대방이 나를 이해하거나 믿도록 기대하기보다는, 상대방이 나를 믿을 수 있도록 보다 적극적으로 실천해 나가는 것이 실천 불교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상대방은 저의 이런 점을 이용할 수도 있다. 따라서 언제까지나 모두에게 무턱대고 이와 같은 자세를 가질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한 발자국 앞서서 상대방에게 신뢰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상대방이 신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은 어떨까? 즉 나부터 ‘나’라는 것이 단지 명칭임을 인정하고 그 상대성과 순간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회 활동에서 의사소통을 보다 원활하게 하자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시도로부터 곧 가시적인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동의 목적은 내가 아는 공동이익의 추구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호응 없이는 아무것도 진전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구는 점점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자원은 점점 기하급수적으로 줄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어려워져만 가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 충족을 위해서라도, 개개인 간의 충돌뿐만 아니라 조직 간의 분쟁 혹은 나라 사이의 전쟁 등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나부터 자신을 돌아보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대 실천불교는 개개인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 외부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기 전에 자신의 내부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서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즉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개인이 개선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인식하고 문제 해결에 대한 적극적인 노력을 한다면, 생각이나 상황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크게 악화시킬 가능성은 줄어든다고 생각한다.


윤회와 해탈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윤회로부터 벗어나 해탈함은 모든 불교도의 서원이다. 불교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철학으로서 불교는 이 문제에 직접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회피하지도 않는다. 불교철학은 오히려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라는 것이 문제라면서 생사의 문제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음을 보인다. 말하자면 윤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해체’함으로써 답을 준다. 이 ‘해체’ 과정을 살펴보겠다.

현응 스님은 윤회를 ‘현대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고대 인도에서 받아들여졌던 윤회의 개념이 우리에게 적합하지 않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그보다도 연기와 무상의 가르침으로 보면 하루에도 수만 번씩 생성소멸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우리 일상의 모습이 윤회의 실상을 더 제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 몸은 끊임없이 변한다. 몸의 모든 분자가 7년마다 하나도 남김없이 새 분자로 교체된다. 현재 우리 몸은 7년 전에 가지고 있던 분자를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 몸 각 부분은 언제나 나고 죽는다. 한편 우리 마음은 어떤가? 모든 생각도 끊임없이 변하며, 우리의 정서나 의지도 항상 생멸의 과정에 있다. 이런 생각 정서 의지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마음’을 구성한다면 우리 마음 또한 순간순간 나고 죽는 과정에 있다. 연기와 무상에 의해 몸과 마음이 하루에도 수없이 나고 죽는 윤회의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윤회가 바람직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고통(苦)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머무르지 않고 생멸하니 우리가 안주할 곳이 없다. 일상의 크고 작은 일로부터 삶을 구성하는 생로병사의 과정이 불만족스러움은 설명이 필요 없다. 이런 문제들이 삶과 세계를 고해(苦海)로 만드는 근원이다. 이를 해결해야 고뇌에 찬 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 불교는 이 문제에 어떤 답을 주는가?

불교철학은 직접적인 해결책을 주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조명함으로써 그 문제 자체가 존재할 필요가 없음을 보임으로써 문제를 ‘해체’한다. 부처는 무아(無我)를 가르치셨다. 대승에서는 나를 포함한 만물이 공(空)함을 밝힘으로써 다시 한 번 ‘나’가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한다.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나의 죽음’이 있겠는가? 처음부터 어떻게 ‘나’가 태어날 수 있겠는가? 고유한 본질을 가진 개체로서 ‘나’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서는 ‘나’의 나고 죽음이란 처음부터 없으며, 따라서 나고 죽는 문제 또한 원래 존재하지 않다. 없는 문제를 있다고 보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에, 이렇게 문제가 문제 아님을 보여주는 ‘문제 해체’의 과정이 바로 불교가 생사윤회의 문제에 답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나’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불교는 허무주의가 아닐까? 우리 모임에서는 고정불변하며 영원히 존재하는 ‘참나’는 없지만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개의 그룹들−색수상행식(오온: 몸과 네 가지의 의식작용들)−이 모여 상호작용하며 유지시키는 팀으로서의 ‘가상의 나’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을 논의했다. 다섯 명의 선수가 뛰는 어떤 농구팀을 ‘미네소타 드래곤즈(Minnesota Dragons)’라고 이름 지어 보자. 각 선수의 이름은 ‘색’ ‘수’ ‘상’ ‘행’ 그리고 ‘식’이다. 이 팀은 고정불변하지 않으며 영원히 존재할 수도 없다.

어떤 실체라고 보이는 것이 없어서 이 팀이 진정 실재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다섯 선수가 모여 함께 경기를 진행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셈이다. 한편 한 선수 ‘색’은 그 자신 끊임없이 변하며 다른 플레이를 보여줄뿐더러 이 선수가 팀을 그만두고 밖에서 다른 선수가 들어와 대신 뛰기도 한다. 이것은 다른 선수들(수상행식)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색, 수, 상, 행, 식 각각이 끊임없이 변하고 교체되기도 하고 다섯 사이의 상호작용 방식도 항상 변한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요소들의 가변적인 상호작용과 같은 것이 삶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니 고정불변의 본질을 가진 ‘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참나’는 없지만 미네소타 드래곤즈팀과 같이 ‘가상의 나’는 잠시 존재한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나’는 말하자면 여러 선수가 함께 뛰는 하나의 팀과도 같다. 그러나 이런 팀도 결국은 해체된다. 이것이 ‘죽음’인데, 이 ‘죽음’이라는 현상을 두 가지로 해석해 보겠다. 첫째로 팀의 해체가 섭섭하기는 하지만 그토록 비극적 사건은 아니다. 다섯 선수가 함께 뛰지는 못하겠지만 그것이 모든 것의 종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죽음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둘째 해석으로, 미네소타 드래곤즈는 해체되지만 각 선수들이 시카고 불즈와 뉴욕 닉스 등 다섯 개의 팀으로 옮겨가 선수 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 한 팀이 해체된 대신 다섯 개의 다른 팀들이 새로 선수들을 영입하여 활력을 얻어 경기를 펼쳐 나갈 수도 있다. 이런 과정은 여러 팀을 거치면서 오랫동안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 팀의 해체 즉 한 개인의 죽음이 자연과 인간세계에서 연기의 과정을 통해 오랜 시간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많고 적은 긍정적, 부정적, 물질적, 심리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연기의 한 과정으로서 결코 허무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존재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연기의 그물을 따라 한 개인이 온 세계로 퍼져 나가며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삶과 죽음이라는 사건들은 분명 가슴 벅찬 현상들이다. 그리고 생사를, 연기의 메커니즘을 구현하는 하나의 도구로서, 존재세계 전체로 긍정적인 영향을 퍼지게 해나가는 기회로 간주하고 삶과 죽음을 그렇게 십분 이용한다면, 그것은 정말 극도로 멋진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불교가 허무주의가 아님이 분명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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