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사월은 만화방창의 계절이다. 이 무렵이면 영산홍의 연홍 꽃빛이 아련하던 백화사가 떠오른다. 백화사 툇마루 앞에 말간 연홍빛 영산홍이 꽃망울을 터뜨리면 바로 이곳이 화장세계였다. 이때에 대흥사 반야교 아래의 백화사에서는 차를 만들기에 분주하다.

백화사는 응송 스님(1893~1990)이 수행하시던 도량이다. 천혜의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여기에서 초의 스님이 복원해낸 전통 차가 이어지고 있었다. 소쇄한 차의 결이 살아 있는 이 차는 실로 한국의 풍토성을 담고 있다. 그래서 한국인의 심성과 잘 통하는 차이다. 

30여 년 전만 해도 대흥사 산 내에는 차나무가 거의 없었다. 응송 스님의 증언으론 ‘초파일이 지나면 인근 마을의 아낙네가 찻잎을 팔러 대흥사에 모여들었다’고 하니 혹 초의 스님도 찻잎을 사서 차를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노스님은 당시 60여 통 내외의 차를 가용으로 만들었다. 한 해 동안의 차 양식이었다. 차 철이 되면 강진이나 진도, 담양으로 찻잎을 구하러 가는 것이 일과의 하나였다. 이런 조건에서 차를 만들었기에 차를 만드는 날은 밤을 새우는 일이 잦았다.

노스님과 필자의 첫 인연은 정말 우연이었다. 당시 노스님은 자신의 원고를 윤문할 젊은이를 물색하고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이 벌써 3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저녁 공양 후, 내주신 뜨거운 차 맛은 늘 내 차의 기준이 되었다. 노스님은 금이 간 찻잔, 다갈색으로 물든 잔을 쓰셨다. 오래된 고완(古玩)의 다구에 새겨진 세월의 무게는 늙은 스님의 모습을 닮은 듯했다. 또 노스님의 차 살림살이는 옻칠한 둥근 괴목 소반과 다관, 청자 찻잔 세 개, 잔 받침뿐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필자는 지금까지 차를 만들고, 초의 선사를 연구하는 일이 필생의 업이 되었다.

특히 차를 연구하면서 느끼는 감동이 크다. 필생의 업이 차 연구로 바뀐 것도 노스님과의 인연 때문이지만 이로 인해 초의 선사로 연구가 확대되었고, 초의 선사와 교유했던 추사나 다산, 홍현주, 소치 허련, 신위, 박영보 등으로 연구의 폭이 넓혀졌다. 이들이 차를 통해 자신을 정화하고, 차를 향유하며 느끼는 즐거움을 공유한다는 것은 행운이다. 그래서 더욱 힘이 난다. 특히 당대의 지식인들이 초의 스님을 통해 차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이들이 나눈 따뜻한 정을 한없이 부러워하고, 동경했다. 현대의 우리는 이미 잃어버린 정서이기에 더욱 연민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차의 세계는 정말 아름답다. 차의 맑은 향처럼 속되지 않은 마음은 인간이 잃지 않아야 할 고결한 가치이다. 따라서 차를 즐겼던 이들은 차의 맑은 기운이 몸에서 현현되어 속된 탐진치를 사라지게 하는 것을 몸으로 체득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차를 애호하고 관심을 가졌던 것이리라.

초의 스님과 추사는 이를 공유했던 사람들이다. 추사는 제주 적거에서 자신의 허허로움을 차로 달래고, 인고(忍苦)의 쓰디쓴 고통을 차로 견디었다. 바로 자신의 지극한 벗 초의가 보낸 차로. 이러기에 추사의 걸명(乞茗)은 완곡했고, 때론 협박처럼, 혹은 희유(戱遊)로 일관되었다. 그러기에 이들은 호계삼소(虎溪三笑)의 아름다운 교유를 그 시대에 재현했다. 이들이 조선 후기 유불교유(儒佛交遊)의 귀감이 된 것은 이들의 교유에 징검다리인 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추사는 1851년 제주에서 해배되어 삼호에 머물 때 초의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에는 차와 불교를 통해 다져졌던 우정의 일면이 잘 녹아 있다. 이들이 나눈 해학과 믿음이 어떠했는지를 이 편지에서 살펴보자.

새로 편찬한 어록 《법원주림》 《종경록》을 한번 와서 서로 증험하고 싶지는 않으신가. 대혜의 공안을 타파해 미진함이 없으니 매우 통쾌할 뿐입니다. 햇차를 몇 편이나 만들었습니까. 잘 보관하였다가 나에게도 보내 주시려는가. (중략) 갑자기 돌아오는 인편으로부터 편지와 차포를 받았습니다. 차 향기를 맡으니 곧 눈이 떠지는 것만 같습니다. 편지의 유무(有無)는 원래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그대의) 치통은 실로 마음이 쓰입니다만 혼자 좋은 차를 마시고 다른 사람과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감실의 부처님께서 또 영험한 법율을 베푼 (치통이 일어난 것) 것입니다.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나는 차를 마시지 못해 병이 났는데, 지금 다시 차를 보고 나아졌으니 우스운 일입니다. (珠林宗鏡新編語錄 不欲一來相證耶 大慧一案打破無餘蘊 是大快處耳 新茗摘來幾片 留取將與我來耶 …中略… 忽從轉褫見書並茶包 爲茶香觸便覺眼開 書之有無 本不足計也 第齒疼固可悶 獨喫好茶 不與人同 是龕中泥佛亦頗靈驗施之律耳 可笑 此狀不得喫茶而病 今且茶而愈矣 可笑…)         

당시 추사는 삼호어수(三湖漁叟)라는 호를 썼다. 삼호에서 물고기를 낚는 늙은이란 뜻이다. 《법원주림》과 《종경록》은 제주 시절에도 애독했던 불경이다. 추사는 이 경전을 읽으며, 함께 교리를 증험할 수 있는 법사가 필요했다. 그가 인정한 법사는 바로 초의 선사였다. 이미 대혜종고의 공안을 타파할 정도로 불교적 수행력을 지녔던 추사였다. 하지만 그의 차를 탐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넌지시 ‘몇 차는 몇 편이나 만들었는지’가 궁금했다. 인편으로 보낸 초의 선사의 차를 받고, ‘차 향기를 맡으니 곧 눈이 떠지는 것만 같다’던 그였으니 차의 실증적인 효능을 누구보다 잘 체득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의 관심은 오직 차였다. 치통으로 고생하는 초의 선사에게 좋은 차를 혼자 마셔서 그렇다는 추사의 해학은 차를 공유한 자들만의 수준 높은 통유의 해학이며, 덕산의 방망이와도 같다.

예부터 지금까지 차가 지닌 이로움은 동일하다. 초의 선사와 추사가 나눴던 차의 넉넉한 향이 온 세상으로 퍼지기를 기원하면서 5월이 오면 다시 차를 만들 것이다. 초의 선사에게서 응송 스님으로, 다시 필자에게 이어진 차가 다시 후인에게 전해지기를 염원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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