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일본의 미술사가인 야나기 무네요시는 “수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소유 방식이다. 그 방식에 따라서 사물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사람 역시 그로 말미암아 마음이 밝아지기도 하고 어두워지기도 한다. 잘못된 소유 방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물건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기쁨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려 할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물건을 소유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소유한 뒤에는 물건을 소유하는 방식 면에서 깊이와 깨끗함이 있었으면 싶다. 수집은 사유에서 성장하지만, 나아가 그것을 일반에 공개하거나 혹은 박물관에 진열하는 행위는 일종의 선행이다. 수집이 사유물에서 공유물로 발전한 것이다. 개인적인 의의가 사회적인 의의까지 갖추는 차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이라고 설파하였다.

우리는 누구나 어릴 때, 우표나 동전을 수집하는 등 한두 가지 정도는 수집해 보았던 기억들이 있다. 수집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 온 인간의 본능적인 행위라고 한다. 이러한 수집의 본능은 누구나 있지만, 수집이 자신을 지배하는 삶이 되는 것은 어떤 계획된 예정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인연의 소치로 만들어지는 것 같다. 예비 된 시간도 없이 어느 순간 인연이 맺어지면 빠져 버리는 속성이 있다. 수집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가야만 그칠 수 있다고 자조할 정도로 중독성이 다른 어떤 분야보다 심하다.

하지만 이러한 중독이 사회적으로는 공익성이 있어 다른 중독과는 다르게 권장되는 분위기도 있는 듯하다. 우리가 아끼고 보호하는 문화재는 국가나 문중이나 사찰에서 전승되어 오는 문화재가 있는 반면, 발굴에 의해 세상에 드러나는 문화재도 있고, 수집 때문에 세상을 빛내는 문화재도 있다. 수집가의 발품에 의해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운명으로부터 구출되어 세상의 새로운 빛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집을 보물찾기라고도 한다. 수집이란 발품을 팔아 찾아다니는 ‘발견하는 재미’가 핵심이듯이 수집가가 세계 곳곳을 누비면서 땀 흘려 수집한 자료들이 국가가 인정하는 문화재로 발돋움하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다.

서두에서 인용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말처럼, 이러한 수집의 기쁨이 한 개인의 비밀 창고 속에 있는 것보다는 세상에 공개되어 보다 많은 사람이 보고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은 금상첨화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자신이 수집한 유물을 사유의 한계를 벗어나 공공시설로 전환하여 사립박물관을 만들어 나눔의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지는 편이다. 이러한 사립박물관 중에는 스님이나 불자들이 자신의 평생을 바쳐 수집한 유물로 박물관을 설립하여, 문화의 시대에 문화포교의 거점으로 박물관을 활용하는 사례들을 종종 볼 수가 있다.

지난 6월 한 일간지 문화면에 실린 박물관 관련 기사의 “박물관 하면 망한다는 당신, 보고 있습니까?”라는 제목을 보면서, 10년 전 필자가 명주사 고판화박물관을 개관하면서 있었던 기자간담회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일간지 문화담당 기자로부터 “박물관 하면 다 망하는데 스님은 왜 박물관을 하려고 하느냐?”는 핀잔 아닌 핀잔을 받았던 것과 ‘작은 박물관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항변한 기억이 새삼 새로웠다.
나의 경우는 박물관 설립이 신기루임을 알게 되는 순간 이미 때는 늦어 오직 할 수 있는 일은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든지 아니면 앞으로 나아가는 길밖에는 없었다. 결국은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할 수밖에 없었다. 역설적이지만 사립박물관의 현실이 빠져나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기에 파도가 출렁이는 벼랑 끝에서 오직 발걸음을 앞으로 내밀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도 수없이 만난 어려운 상황에서 백척간두 진일보의 정신으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새로운 문화포교의 거점으로 명주사 고판화박물관이 성공적인 모습으로 세상에 자리매김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내가 고판화박물관을 설립한 것은 나눔을 실천하기 위한 거룩한 생각에서 차근차근 계획한 것이 아니라 우연한 인연으로 시작한 일이다. 승려가 된 일도, 사찰을 창건한 일도 계획된 일이 아니라 우연한 인연으로 시작되었다. 조각을 전공하기 위해 동국대 미술학과를 진학한 후, 한 학기 마치고 군복무를 할 요량으로 큰 기대 없이 군종장교 시험에 응시했다. 생각지 않게 합격해서 4학년 때부터 낙산사로 들어가 수행했다. 1983년에 중위를 달고 군승으로 복무하면서 시작된 승려 생활이 벌써 32년을 헤아리고 있으니 우연치고는 참으로 지중한 인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박물관에 대한 관심도 이와 비슷하다. 1998년 국방부 법당 주지로 근무할 당시 중국 구화산 성지순례를 하기 위해 머물렀던 항주 골동 야시장에서 고미술품 수집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운명적인 인연이 시작되었다. 구화산 김교각 육신보전에서 전생에서부터 가져온 곡차를 즐기는 습관을 바꾸게 해 달라는 발원이 성취되면서, 혼자만의 발원 성취에 머물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 대한 포교의 수단으로 이용해보자는 뜻에서 고미술품 수집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이때 생겨난 고미술품에 대한 수집 열정은 20여 년에 가까워져 오지만 여전히 열기가 식을 줄 모르고 있다. 그 해에, 치악산 매봉 중턱에 인연 터를 마련하고 치악산 명주사를 창건했으며, 10년 전에 마침내 고판화박물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이 모든 일들을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고미술과 나의 인연이 절대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될 때가 많다. 초등학교 때 서울에 올라와 우리나라의 미술사의 대가인 최순우 선생 집에서 2년간이나 하숙생활을 한 인연도 그렇고, 동국대에서 황수영, 문명대, 장충식 교수 등 최고의 미술사가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그렇다. 한양대 대학원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박물관 관련학자들인 김인회, 배기동 교수에게 지도받을 수 있었던 인연도 남다르지만, 고판화박물관을 두루 보살펴주는 김종규 박물관협회 회장과의 인연도 박물관을 운영하는 데 온갖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는 큰 힘이 되었다.

이런 꿈같은 일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부처님과 은사 스님이신 진철 큰스님과의 인연으로 비롯된 소중한 불연(佛緣)이, 나로 하여금 박물관 설립에 뜻을 품게 하고 지금껏 어려움을 극복하고 계속 매진할 수 있게 하지 않았을까?

우리 박물관에 찾아와 고판화를 감상하는 이들도 저마다 소중한 불연을 하나씩 가슴에 간직하고 돌아가기를 기원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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