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불교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가 ‘숭유억불(崇儒抑佛)’이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왕과 유학자들은 불교에 대한 억불, 폐불 정책을 끊임없이 시행했다. 사찰 소유의 전답과 노비를 몰수해 경제권을 억압하는가 하면, 승려들을 부역에 동원했으며, 도첩제를 폐지해 출가의 길을 막기도 했다. 500년간 꾸준히 이어진 존폐의 기로에서 과연 불교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조선 불교를 공부하면서 한 번쯤 가졌을 의문은 《조선 왕릉의 사찰》을 읽으면서 해소할 수 있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사찰이 조선 왕실과 연계해 불교가 명맥
2,500여 년 전 붓다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이러한 물음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1,400여 년 전에 살았던 원효에게도 삶의 여정 속에서 계속 마음을 맴도는 질문이다. 《붓다와 원효의 철학》이란 제목의 이 책에서 지은이 고영섭✽은 거기에 더해 ‘왜’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왜 ‘깨침’ 또는 ‘깨달음’이 중요한가?” 붓다는 “어떻게 깨치고 무엇을 깨쳤을까?” 책의 서두를 이러한 질문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1,400여 년 전의 원효에게도 절실하고 유효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오늘날 우리에게
1. 1980년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신군부, 쿠데타, 민주주의, 민중, 자유, 검열, 노동자, 저항, 올림픽 등이다. 그만큼 1980년대 한국사회는 1970년대까지의 군부독재 몰락으로 시작된 정치적 격동과 변혁의 시대로 기록된다. 1979년 10 · 26사태로 인한 박정희의 죽음과 동시에 등장한 신군부 세력은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등에 업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통해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한 정치적 탄압과 구속을 이어갔다. 이런 가운데 자유와 민주화를 염원하며 신군부의 폭거에 저항하던 국민의 희생은 급기야 5 · 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에드워드 콘즈의 삶과 저술한국 불교학계는 1980년대에는 주로 일본 학계의 연구성과를 수용하였고, 그와 함께 영어권 연구도 학계에 소개되었다. 일본 학계의 연구성과는 기본적 설명이 충실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거시적 관점과 자신의 분명한 주장에서 무언가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런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 영어권 연구성과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영어권 연구성과에서 대표적 인물의 한 사람인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 1904~1979)의 삶과 학문적 성과를 간단히 검토하고자 한다. 콘즈는 독일 사람이지만, 영국 런던에
1. 들어가는 말‘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참으로 쉬운 것 같으면서도 난해한 문제이다. 따지고 보면 붓다의 가르침이란 이 물음에 대한 깨달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자 한 것이 아니겠는가. 중국 선진시대(先秦時代) 사상가 묵자(墨子, B.C. 468?~B.C. 376?)는 ‘서로 함께 나누는 사랑과 이로움’으로 살아야 한다고 단언한다. 나와 남을 분별 짓지 않고 아낌없이 사랑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갈등과 대립, 다툼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 수 있으며, 척박하고 곤궁함 속에서도 남과 이로움을 공유할 때 비로소 참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1. 발견된 불교우리 동양인에게는 자명한 문화 전통이고 역사적 사실인 불교이지만, 유럽인들에게 불교는 근세에 이르러서야 발견되고 지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종교였다. 빗대어 말하면, 어느 한 서양 탐험가가 미지의 땅인 동양의 오지를 여행하며 탐색하다 오래된 사원에서 이상한 조상(造像)과 희한한 문헌 꾸러미를 발견한 것이나 진배없다. 아니면 야만에 가까운 현지인들이 이 탐험가를 이끌어 어느 폐허의 사원으로 인도하고 벽장 속에서 문서 꾸러미를 꺼내 펼쳐 보인다. 그도 아니라면 일단의 토착민들이 모여 문서 쪼가리를 펼쳐 놓고 웅성거리
* 이 글은 《초기불교사상》으로 2021 불교평론 뇌허불교학술상을 수상한 마성 스님이 수상 연설을 위해 집필한 원고이다(시상식 2021년 12월 23일, 불교평론 세미나실). 1. 여는 글초기불교란 붓다가 성도하여 전도를 시작한 때로부터 불멸 후 100년에서 200년 사이에 부파분열이 일어날 때까지의 2~3백 년간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초기불교란 붓다 재세 시부터 입멸 후 승가에서 근본분열이 일어나기까지의 약 150년에서 250년 사이의 불교를 일컫는다. 다만 여기서는 ‘원래의 불교(Original Buddhism)’라는 의미로
— 틱낫한 스님이 우리에게 남긴 가르침필자는 틱낫한 스님(1926~2022)을 오래전에 친견한 적이 있다. 1980년대 중반 하와이대학 유학 시절 캠퍼스 강당에서 스님의 강연을 듣고, 그 직후 스님이 베트남 난민들의 처소에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는 모습을 잠시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이 모두 명절을 맞이하는 아이들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마냥 싱글벙글하며 그를 환대하고 행복해 하는 모습이란! 옆에서 보기만 해도 즐거웠다. 하나의 경이였다. 아, 한 사람의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저렇게 큰 기쁨을 줄 수 있다니! 이제 그분이 떠나셨다. 필자는
20~21세기를 관통하며 혼탁한 세상에 등불을 밝힌 선지식이 떠났다. 틱낫한 스님(1926.10.11 ~ 2022.1.22)은 평생 독신 비구로 산 승려이자 명상가이며 평화운동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프랑스의 플럼빌리지에서 인터뷰하거나 그가 지도하는 명상에 참여하면서 본 틱낫한은 2,600년 전 붓다의 가르침을 지금으로, 저 멀리 천상을 떠도는 관념적인 가르침을 우리가 살아가는 여기로 가져온 분이었다. 여기서는 익히 틱낫한의 수많은 저서를 통해 알려진 이야기가 아니라, 인상 깊게 각인됐던 틱낫한의 10가지 모
제 손으로 버리고더럽다고 하지 않기를부디 내 이름으로누구도 불리지 않기를훗날에 날 버린 만큼짊어지지 않기를— 시집 《물슬천의 아침》(책만드는 집, 2022) 양희영 / 충북 음성 출생. 2017년 《좋은시조》 신인상으로 등단.
전엔 절에 가면 사천왕상이 그렇게 무서웠는데지금은 어둑하고 습내 나는 천왕문을 지나면서도겁 하나 안 먹는 내가 좀 무섭다손가락을 살며시 오므린 금산사 거인 부처님그런 내가 못마땅한지 눈길 한번 주지 않으셨다그전엔 절 아래 마을에 접시꽃이 피었더냐허리 굽혀 물어도 봐주시더니 — 시집 《미풍해장국》(솔, 2021) 오성일 / 경기도 안성 출생. 2011년 《문학의 봄》으로 등단. 시집 《외로워서 미안하다》 《문득, 아픈 고요》 《사이와 간격》.
부처님 뵈러 갔다가적막만 안고 돌아왔다저물녘 산기슭을 타고 내려오는부처님 그림자 적막은 등 뒤에서 달빛을 밀고수만 개의 별들은사리로 쏟아졌다 — 시집 《그 뼈가 아파서 울었다》(실천문학사, 2021) 이영춘 / 197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시지포스의 돌》 《슬픈 도시락》 《시간의 옆구리》 《노자의 무덤을 가다》 《따뜻한 편지》 등. 윤동주문학상 고산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게르의 낮은 문틀에 이마를 자꾸 찧었다들어가고 나갈 때 몇 번씩 되풀이했다머리를 숙이지 않고 겸손을 모른 탓이다 — 《유목의 식사》(책만드는 집, 2022) 김영재 / 1974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목련꽃 벙그는 밤》 《녹피 경전》 《히말라야 짐꾼》 《화엄동백》 《홍어》 외. 중앙시조대상 고산문학대상 가람시조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1994년 3월 27일은 내 기억 속의 보물과도 같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생명나눔실천본부’가 134명 발기인의 원력으로 불교계 생명나눔운동을 공식 선언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어엿하게 창립을 선언하기까지 창립준비위원장 진철 스님, 초대 이사장 태응 스님(전 불교TV 사장), 본각 스님(전국비구니회장), 종실 스님(대전), 광우 스님(전 정각사 주지), 광오 스님 등의 적극적인 지지가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도법 스님(실상사)과 박광서 교수(서강대 명예교수)께서 실무적 틀을 짜고 추진위원회와 운영위원회 등을 구성하며 각고의 노력
시간은 물과 같아 모든 기억을 씻어 흘려보낸다. 흘러가면 돌이킬 수 없으니 지난 일을 다시 볼 수 없다. 1994년 불교텔레비전은 시작됐다. 불과 30년이 채 되지 않은 일이지만, 그때 일은 거짓말처럼 기억이 없다.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유독 나의 시간은 그 기억을 모조리 부숴버렸다. 얼마 전 옛 동료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에야 그때의 희미한 기억을 찾아냈다. 그는 내게 몇 가지 기억의 실마리를 건네주었다. 그해 봄, 불교텔레비전 사업본부는 불교방송이 있던 마포 다보빌딩 2층 빈 사무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직 회사가 발족하기 전
인생의 절반을 축제와 함께했지만 여전히 나의 화두는 ‘축제’이다. 축제란 말 그대로 축하하여 벌이는 큰 규모의 행사를 말한다. 축하하여 벌이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리라. 문득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이 글을 쓰자니 내게 찾아온 인연에 대한 소중함과 그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겠노라 다짐하게 된다. 꿈을 안고 열심히 운동했던 학창 시절에 꿈을 접어야 할 만큼의 큰 부상을 입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운동하면서 성격이 매우 밝아졌고 승부욕을 배웠으며 리더십을 키워 갔던 터였다.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잘하는 운동
남북불교 교류의 기록인 평불협의 여정은 1992년에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북한불교와의 교류는 꿈이 아닌 현실로 바뀌게 되었다. 1990년대 초까지 ‘금단의 땅’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고 두렵고 어려웠다. 또한 ‘좁은 문’이었다. 그 틈새를 1992년 2월 창립한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평불협)가 열었다. 오롯이 남북불교 교류와 통일을 목적으로 설립되어 30년의 역사를 채운 불교계 통일운동 단체다. 이곳에서 통일의 새 씨앗이 움텄으며, 작은 결실을 보았다. 1991년 9월 유엔에 남북한의 동시 가입은 남북대화로 이어졌고, 그 대열에 불교계
1987년, 필자는 2년간의 토목기사 생활을 접고 불교계에서 일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그해 기자를 모집한 불교신문에 응시해 낙방의 아픔을 맛봤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아픔이 이듬해(1988년) 초 창간한 법보신문 공채 1기 시험에 합격하는 토대가 되었다. 낙방 이유가 ‘성적은 좋지만 토목과 출신이 기자를?’이었는데, 법보신문에서도 똑같은 경우가 발생하자 심사를 맡았던 분들이 고심 끝에 ‘원칙대로 성적순’에 합의했다는 것이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군 단위 대회에서 상을 받는 등 글재주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후로는 글쓰기와
대불련(大佛聯)은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의 약칭이다. 한국불교 현대사에서 재가불교 흥기에 청년불교의 중추로서 역할을 담당해 온 대불련, 올해로 60년 차를 맞이하였다. 필자는 1972년에 대불련의 10년 차 중앙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돌이켜 보면 대불련과의 인연은 1970년 여름 송광사에서 있었던 제14차 수련대회에 참가한 것이 시작이었다. 요즘은 템플스테이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이른바 사찰 수련대회는 1960년대 대불련을 시작으로 재가불자들의 수행 프로그램으로 유행하였다. 당시 수련대회는 사찰에서 스님들처럼 출가수행자의 생활을 체험하
1989년 11월 BBS 불교방송 공채 1기 프로듀서로 입사한 나는 편성제작국 편성부로 배정되었다. 불교방송은 1990년 5월 1일 개국했다.라디오 방송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소리로 전달하는 매체이기에 편집할 때 녹음된 소리를 들으며 내용을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 당시만 해도 BBS의 스튜디오는 몇 개 되지 않고 규모도 협소하여 매일 밤늦게까지 녹음하고 편집해야 했다. 개국 당시는 릴 테이프로 녹음하여 방송 콘솔을 사용하여 편집하거나, 편집용 가위나 칼로 녹음 테이프를 이어 붙여서 편집하였다. 방송 콘솔을 사용하는 데에도 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