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다큐멘터리PD, 작가
김천
전 불교텔레비전 프로듀서

시간은 물과 같아 모든 기억을 씻어 흘려보낸다. 흘러가면 돌이킬 수 없으니 지난 일을 다시 볼 수 없다. 1994년 불교텔레비전은 시작됐다. 불과 30년이 채 되지 않은 일이지만, 그때 일은 거짓말처럼 기억이 없다.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유독 나의 시간은 그 기억을 모조리 부숴버렸다. 얼마 전 옛 동료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에야 그때의 희미한 기억을 찾아냈다. 그는 내게 몇 가지 기억의 실마리를 건네주었다. 

그해 봄, 불교텔레비전 사업본부는 불교방송이 있던 마포 다보빌딩 2층 빈 사무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직 회사가 발족하기 전이라 ‘CA 텔레비전 사업본부’란 간판을 붙이고 본부장 한 분과 경영관리와 편성 제작 책임자 각 한 분이 설립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세 분은 이미 불교방송 개국을 주도한 바 있었다. 나의 일은 그 사업본부에 속해 프로그램 기획과 편성 등의 자료와 내규 등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케이블텔레비전 사업은 문민정부 방송정책의 숙원이라 사업에 관한 사안들이 급속도로 진행됐다. 설립인가와 개국 일정이 워낙 급박한 터라 아무도 순조로운 개국을 기대하지 않던 때였다. 준비부터 방송까지 주어진 시간은 딱 1년. 계획 과정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불가능한 일이다”라는 말이었다. 

영상포교 시대를 열고 불교계를 대표할 새로운 미디어를 만들어야 한다는 교계의 의지와 염원이 워낙 강했고, 불교방송을 원만하게 개국했던 세 분 임원의 경험은 그런 염려를 무색하게 했다. 보이지 않은 장애와 방해를 하나하나 걷어내고 개국을 위한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됐다. 

본디 불교방송 2층에 만들기로 했던 방송국 스튜디오 설립이 안팎의 이유로 무산되자 경영진은 과감히 불교방송 건물 지척, 한강 변에 있던 금호빌딩으로 이전을 결정했다. 그곳은 당시 상당 부분이 비어 있던 건물이라 스튜디오 설비를 만들고 경영본부와 제작본부가 들어설 공간도 충분했다. 물은 바위가 가로막으면 돌아서 제 갈 길을 가는 법이라, 만사가 물 흐르듯 진행되고 있었다.

문민정부가 케이블텔레비전 사업을 추진하면서 내걸었던 기치는 ‘황금알을 낳는 케이블방송’이라, 방송계를 재편하고 사업성을 극대화할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새로운 사업이 시작되기 위해 시급했던 것이 인재의 충원이었는데, 케이블 시대에 대한 희망적인 전망 때문에 지방 방송국과 각 프로덕션 등에서 인력이 쏟아져 나왔다. 

불교텔레비전도 대부분의 제작자들이 그런 경로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제작자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와 종교성은 옅었다. 당시 제작국장은 불교적인 분위기를 배우고 방송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팀별로 나누어 전국 사찰의 영상 자료 제작을 시작했다. 이 자료들은 지금까지 불교텔레비전의 자산으로 남아 있다. 

사람이 모이고 설비가 들어오고 방송국의 외형이 갖춰지자 프로그램의 사전제작이 시작됐다. 과연 개국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도 점차 사그라들어 과연 어떤 모습의 방송이 될 것인가 기대가 커졌다. 당시 제작국 분위기는 불가능한 일을 해낸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사람들은 열심히 자기 일을 다 하고 있었다. 

1995년 3월 1일 채널 32번으로 첫 방송이 나갔을 때 기뻐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분명 감동과 격한 기쁨이 있었다. 여러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방송 내용은 당시 모든 방송사와 비교해서 뒤떨어지지 않았다. 불교 영상 채널로 아침 생방송부터 기획다큐멘터리와 오락, 외화까지 지상파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은 내용의 프로그램을 송출하였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전국에 송출망이 깔리지 않았는데 전력을 다해 힘을 소모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타 종교에 비해 뒤처진 점을 만회하기 위한 전략적인 판단은 옳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안타깝게도 세상의 여건에 시기가 맞지 않았을 뿐이다. 개국 당시의 불교텔레비전은 할 수 있는 만큼을 했다. 

나와 불교텔레비전의 인연은 길지 않아 끝났다. 개인적인 절망의 시간이 있었다. 때에 겹쳐 IMF 금융위기 사태가 닥쳤다. 권고사직을 당했고 내쫓긴 수많은 노동자와 함께 거리로 나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영혼은 낭인으로 떠돈다. 

후회와 미련은 뒤늦게 오는 법이라 방송국에 있을 때 하지 못했던 일들이 마음에 남아 있었다. 나의 눈으로 보는 세상과 나의 목소리로 불교를 이야기하는 프로그램. 그런 이야기들을 독립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 〈망명의 티베트불교〉나 〈틱낫한의 귀향〉 〈달라이라마 지혜를 말하다〉 등을 만들었다. 그것으로 불교텔레비전에 대한 숙제는 끝난다. 

기억은 때때로 오염되고 변질하고 왜곡되고 전염되기도 한다. 그러니 나의 기억이 반드시 그렇다 확신할 수 없다. 이르기를 ‘인간이 번뇌가 많은 것은 기억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라 하였으니, 신라 출신으로 선종을 티베트에 전한 무상(無相) 선사는 기억을 버리고 모두 잊으라(莫忘)고 하면서 그것이 평안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했다. 

불교텔레비전 초창기의 일을 돌아보니 지난 수십 년 전의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오늘은 오늘을 잘 사는 일로써 완성되니, 잊고 잊을 뿐이다. 다만 당시 모든 이들은 열의가 있었고 마음엔 희망이 있었다. 그것이 지금과 다르다. 

김천 / 전 불교텔레비전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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