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특집 / 틱낫한(釋一行) 스님

20~21세기를 관통하며 혼탁한 세상에 등불을 밝힌 선지식이 떠났다. 틱낫한 스님(1926.10.11 ~ 2022.1.22)은 평생 독신 비구로 산 승려이자 명상가이며 평화운동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프랑스의 플럼빌리지에서 인터뷰하거나 그가 지도하는 명상에 참여하면서 본 틱낫한은 2,600년 전 붓다의 가르침을 지금으로, 저 멀리 천상을 떠도는 관념적인 가르침을 우리가 살아가는 여기로 가져온 분이었다. 

여기서는 익히 틱낫한의 수많은 저서를 통해 알려진 이야기가 아니라, 인상 깊게 각인됐던 틱낫한의 10가지 모습을 나누려 한다.

 

1. 죽음은 비극이 아니다

“삶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 조각 뜬구름이 사라짐이라”. 죽음은 일상사지만, 보내는 마음은 일상적이지 않다. 특히 틱낫한처럼 세연을 다하고 노환으로 가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 아쉬움이 큰데, 한창때 암이나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지난해 절친을 보내고 나니 그 허전함이 크다. 또 다른 친구가 암이 전신에 퍼져 힘들어하고 있다. 그와 종종 만나 산책하고, 죽음에 대해 이야기도 나누고, 죽음에 관한 책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조금 나아지는 기미에 희망을 품다가 암이 더 전이됐다는 소식에 망연자실해 하는 그를 마주하면, ‘생사의 환(幻)’에서 벗어나라는 말을 차마 하기 어렵다. 그럴 때 틱낫한은 몸을 벗으면서 마지막까지 빛을 남겼다. 말기 암으로 고통받는 친구에게 틱낫한이 남긴 죽음에 관한 다음의 글을 보내주었다.

이 몸은 내가 아니다. 이 몸은 나를 가둘 수 없다. 나는 경계가 없는 생명이다. 나는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다. 저 넓은 바다와 하늘, 수많은 우주는 다 의식에 의하여 나타난다. 나는 시초부터 자유 그 자체였다. 생사는 오고 가는 출입문일 뿐이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숨바꼭질의 놀이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내 손을 잡고 웃으면서 잘 가라고 인사하자. 내일, 어쩌면 그 전에 다시 만날 것이다. 근본 자리에서 항상 다시 만날 것이다. 삶의 수많은 길에서 우린 항상 다시 만난다.

 

2. 가장 쉬운 깨달음

승찬 대사의 〈신심명〉은 ‘지도무난(至道無難)’으로 시작된다. ‘지극한 도가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별의 덮개로 가린 눈으로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이다. 어떤 부분을 만지더라도 코끼리의 일부이긴 하지만, 코끼리 자체를 알았다고 할 수는 없다. 깨달음의 분상에서 설하는 선어(禪語)와 중생들의 몰이해 사이엔 은산철벽이 가로놓여 있다. 선사는 은산철벽을 내려오지않고, 중생은 은산철벽을 오르지못한다.

틱낫한은 임제종 사찰에 출가한 선승이지만, 은산철벽을 넘어 세인의 손을 잡았다. 마치 삼중 장애자인 헬렌 켈러에게 처음 언어를 가르치던 설리번이 헬렌 켈러의 손을 끌어와 자신의 입술에 갖다 댄 것 같은 자비다. 분별이라는 은산철벽을 그토록 쉽게 안내해준 그의 책을 만난 것은 아마도 “거기서 그것과 하나 되시게”였던 듯하다.

그는 어묵동정간에 알아차림을 하면서 이제 일상에서 도와 하나 되게 한다. 차를 준비할 때, 차를 따를 때, 설거지하거나, 빨래할 때도 도를 행하게 하는 것이다.

그릇이 명상의 대상인 것처럼 천천히 설거지를 한다. 모든 그릇을 성스러운 물건으로 여긴다. 마음이 흩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호흡을 따라간다. 빨리 일을 마치려고 서두르는 일이 없도록 한다. 그릇을 닦는 일이 당신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릇 닦는 행위가 곧 명상이다.

틱낫한은 마음을 모아 그릇을 닦지 못한다면 당신은 침묵 속에 앉아서도 명상을 할 수 없다고 한다. 《금강경》은 세존이 공양 때 밥을 빌어와 공양을 끝낸 다음 가사와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은 뒤 자리를 펴고 앉았다는 대목으로 시작된다. 오직 ‘거기서 그것’밖에 한 게 없는데 수보리는 ‘희유하다’고 찬탄하며, “부처님께서 모든 보살들을 잘 호념하시고 모든 보살들에게 불법을 잘 부촉하신다”고 했다. 2600년 뒤 세인이 일거수일투족에서 그것과 하나 되게 호념하고 부촉하게 한 틱낫한의 공덕은 얼마인가.

3. 열린 종교

16세에 임제 선사를 따르는 베트남의 선(禪) 사찰에 출가한 틱낫한은 조계종에 각별한 형제애를 표했다. 조계종의 옛 이름이 바로 임제종이다.

그가 2003년 임제 가풍의 서옹 스님(1912~2003)이 있던 백양사를 찾았을 때다. 그때 본 백양사 승려들의 모습은 천년 고찰의 큰형님다운 모습이 아니어서 더 잊을 수 없다. 그곳엔 ‘틱낫한이라 할지라도 이곳에선 삼배를 안 하면 안 될 것’이란 고압적 분위기가 지배했다. 틱낫한은 방에 들어서자 서옹 방장에게 공손히 삼배를 올렸다.

그리고 자신을 수행한 수십 명의 제자들에게도 서옹 스님에게 절을 시켰다. 틱낫한이 77세, 서옹 스님이 91세로 사제뻘이니 장유유서의 전통을 지닌 양국의 전통을 봐도, 승가의 법도로도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백양사의 승려들이었다.

열반을 앞두고 의사소통도 어려운 노장을 방패처럼 앉히고 그 뒤를 둘러싸고 앉은 연하의 스님 수십 명은 맞절도 하지 않은 채 틱낫한과 그 일행의 절을 받았다. 현장을 지켜보던 한국인 불자들 사이에서 ‘그런 오만이 한국의 선풍이냐’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무상, 무아, 고, 열반-이 사성제의 진리 체득은 삶의 무아집과 무아만으로 표현된다. 틱낫한은 당시 어땠고, 백양사 승려들의 태도는 과연 어느 쪽이었던가.

 

4. 이웃종교와 진정한 화해

기독교 단체 중에 퀘이커와 함께 가장 비폭력적이고 평화 봉사를 많이 하는 곳 중의 하나가 재세례파(再洗禮派)인 브루더호프 공동체다. 영국과 미국의 브루더호프 공동체에 머물러 본 적이 있는데, 그들은 플럼빌리지와 교류를 통해 틱낫한의 비폭력사상에 깊게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2차대전 전 베트남 중부 사찰에 출가한 팃낙한은 1946~1954년 베트남 지배를 유지하려고 전쟁을 벌인 프랑스의 군인들이 먹을 것을 뺏으려 사찰을 공격하고, 저항운동에 가담한 승려들을 잔인하게 처형하는 것을 보았다. 베트남엔 프랑스 제국을 앞세우고 정착한 가톨릭 세가 지금도 상당하다. 틱낫한은 “당시 프랑스 병사들이 너무나 싫었다”고 고백할 만큼 자신도 고통 속에 있었다. 그러나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않고, 원한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자비심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가 증오심에 매몰되지 않고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프랑스 병사를 진정한 친구이자 형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훗날 프랑스에 정착해 붓다의 가르침을 유럽인들에게 널리 펼 기회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플럼빌리지에 붓다와 예수의 사진을 나란히 걸어놓게 한 그는 “우리는 서양 사람들에게 자기 종교를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고, 자기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 불교를 공부하라고 한다”며 “불교를 이해하면 기독교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고, 그런 뒤 자기 종교로 돌아가 깊이 탐구하면 불교와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플럼빌리지에선 하느님의 왕국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다고 가르친다”고 말했다.

 

5. 권위를 놓은 자유

2003년 플럼빌리지에서 일주일을 보내며, 한국의 사찰들이라면 감히 상상키 어려운 모습을 보고 놀란 것이 있다. 틱낫한이 법문을 하는데, 청중들이 잔디밭에 배를 깔고 손을 턱에 괴고 듣거나, 일부는 누워서 듣기도 했다. 틱낫한도 태이라는 애칭으로 주로 불렸다. 법문할 때도 서로 가볍게 합장만 할 뿐이지, 한국에서처럼 큰절로 삼배를 하지 않았다. 

베트남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유교문화권이다. 따라서 장유유서뿐 아니라 승속의 구별이 엄격하다. 그러나 틱낫한은 플럼빌리지에서 일체의 허례허식과 권위를 모두 버렸다. 그랬기에 서구인들이 누구라도 편하게 플럼빌리지에서 명상하고, 태이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6. 걷기 명상의 평화

걷기 명상은 틱낫한의 트레이드 마크다. 실제 걷기 명상은 붓다 당시부터 해온 위빠사나에서 중시하는 것이다. 기원정사에 가면 부처님께서 예닐곱 걸음을 옮기며 걷기 명상을 했던 포행단이 남아 있다. 위빠사나의 걷기 명상은 엄격한 규율에 따라 마치 슬로비디오를 찍듯이 걸으며 사념처를 챙긴다. 반면 플럼빌리지를 비롯한 명상 처소에서 틱낫한과 함께 많은 이들이 걷는 모습은 단지 말을 하지 않을 뿐 좀 더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여서 어른들이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하기도 한다.

틱낫한으로부터 ‘왜 걷기 명상을 그토록 중시하게 됐는지’ 그 계기를 들은 적이 있다. 1975년 월남에서 미군이 철수하면서 월남전이 끝났다. 미군 편이었던 북베트남 소속과 관련자들은 보복이 두려워 무조건 배를 타고 나갔다. 이들이 보트피플이다. 보트피플들은 주변국들로 입국하려 했지만, 난민들이 한꺼번에 몰려들 것으로 우려한 주변국들은 이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들은 바다를 떠도는 형국이었다. 이미 1960년대 중반 베트남으로부터 추방됐던 틱낫한은 당시 싱가포르에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 수많은 보트피플들이 싱가포르 정부의 입국 허가가 나지 않아 해안가에서 표류 중이었다. 틱낫한은 한시가 급한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어서 몹시 힘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좌불안석하지 않고, 호흡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걸음을 옮기며 걷기 명상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걷기 명상을 하며 꼬박 밤을 새웠는데 동이 틀 무렵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 아이디어가 뭐였는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좌불안석하며 밤을 지새우지 않고, 걷기 명상으로 마음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남다른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었던 셈이다. 

 

7. 사랑의 승화

틱낫한은 《첫사랑은 맨 처음 사랑이 아니다》란 책에서 첫사랑을 고백했다. 스물네 살의 기운 뻗치던 시절 예술가이자 시인이던 그는 베트남 산악지대의 절에서 한 여승을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그는 추운 날 아침 예불을 마치고 여승과 함께 부엌에서 불을 쬐면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다른 말만 늘어놓는다. 여승은 한참 귀 기울여 듣다가 “무슨 말인지 한 마디도 못 알아듣겠다”고 말한다.

사이공 인근의 절로 옮겨온 여승과 불경 공부를 하며 사랑을 나누던 그는 더 이상 이런 관계를 지속하기 어려움을 알고 국토의 북단 불교연구원으로 여승을 떠나보낸다. 이별의 순간 여승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머리를 껴안는다. 그도 몸을 여승의 가슴에 내맡겼다. 그것이 첫 번째이자 마지막 신체적 접촉이었다.

그의 첫사랑과 불법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만약 그에게 불법이 없었다면 그의 사랑은 단지 ‘애착’이나 ‘비탄’으로 머물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울지 않았다. 꽃은 졌다가는 피고, 피었다가 지는 것을 알기에. 그가 첫사랑을 물방울처럼 집착했을 때 그는 물결 따라 애통해했지만, 그것이 물방울이나 물결이 아니라 물 자체임을 알았을 때 여승도, 첫사랑도 더는 오거나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말은 ‘인생의 덧없음’에만 멈추지 않는다.

우리 몸이 공기, 태양, 흙, 물로 이루어진 것처럼 ‘나’는 나 아닌 것으로 이루어졌다. 태양과 흙과 물 등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을 피웠듯이, 그는 불법 속에서 여승에 대한 사랑을 우주적 사랑으로 피워냈다. 물처럼 사랑 또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8. 계율의 현대화

틱낫한이 2003년 방한 중 마지막으로 비중을 둔 것은 ‘새로운 비구계’였다. 그는 김포 중앙승가대학 강연에서 ‘참여불교’의 선구자로서 오랫동안 승가공동체의 청정한 유지와 화합을 고민해온 결과물을 담은 계율 개정안을 발표했다. 비구계는 2500년의 250개 조항 그대로지만, 지금은 당시엔 없었던 자동차, 컴퓨터, 비디오 등이 생겨나고, 사회 풍조도 크게 달라져 변화에 따른 구체적인 지침의 필요에 따른 것이다. 석가모니도 열반 때 “소소한 계율은 버리라”고 한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새 비구계는 ‘살생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 등 원래 계율을 존중하면서도, 이 시대에 승려들이 접하는 것들에 대한 계율을 제시했다. 비록 현대화한 계율이라지만 새 계율은 승려들에게 요구하는 엄격한 그의 기준이 엿볼 수 있다. 이 계율은 △비싸고 좋은 차를 소유하지 말 것 △이성과 단둘이서 자동차를 타지 말 것 △세속적인 필름과 음악, 전자 게임을 소유하지 말 것 △운동경기나 세속적인 영화 · 공연을 보지 말 것 △담배를 소지하거나 피우지 말 것 △부모나 스승, 친구에 대한 은혜를 부인하지 말 것 △세속적인 소설을 갖거나 읽지 말 것 △가사와 장삼을 세 벌 이상 지니지 말 것 △주식을 사거나 투자하지 말 것 등이다.

틱낫한은 다섯 가지 마음다함 훈련법과 그에 준한 세 가지 항목을 추가해 여덟 가지 실천항목을 만들었다 △삶에 대한 경외심 △관대함 △올바른 성생활 △주의 깊게 듣고 상냥하게 말하기 △올바른 소비 △소박하고 정결한 생활 △소박한 침실 △식사 때 지키기이다.

그가 만든 플럼빌리지에서 첫 계율은 ‘모른다’이다. 둘째 계율은 ‘지금 아는 지식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틱낫한은 ‘자신만 진리를 독점하고, 타인은 틀리고 열등하다는 생각이 평화를 깨고 갈등과 폭력을 낳는다’고 했다. 그는 또 “소통이야말로 이해심과 자비심과 평화의 길”이라며 이토록 겸허한 계율을 제시했다.

 

9. 깨달음의 동기, 화

틱낫한이 한국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화》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였다. 화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쉽고도 자비심이 가득하다. 우리는 화가 나면, 한시바삐 그 화를 내쫓으려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틱낫한은 “화는 보살핌을 간절히 바라는 아기”라고 말한다. 부엌에서 일하다가도 아기가 우는 소리가 들리면 어머니가 하던 일을 멈추고 아기를 달래러 달려가듯이, 마음속에서 화가 차오를 때도 바로 자신에게 돌아가 화를 달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화를 주위 사람들에게 쏟아부어 자신과 주위를 모두 고통스럽게 하지만, 화가 났을 때 아기를 끌어안듯이 화를 끌어안고 10분이나 15분쯤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고, 걸음걸이를 자각하다 보면 화에 대한 깨달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불교가 화의 원인을 내적인 것에만 방점을 찍는 것과 달리 그는 좀 더 현실적인 화의 원인을 밝혔다. 즉 좁은 케이지에 갇혀서 스트레스를 받은 닭고기와 그가 낳은 달걀, 또 열악한 사육환경에서 길러진 돼지 등의 고기를 먹음으로써 화가 우리에게 전이된다는 것이다. 

 

10. 누구나 변화할 수 있다

수행의 종교인 불교에서는 고를 낙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중생을 붓다로 바꿀 수 있다는 열망이 무엇보다 강하다. 많은 이들이 불교를 심신을 변화시키는 연금술로 인식한다. 그것이 오히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족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못난 습관과 성격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새롭게 태어나고 싶은 욕심이 과다할 경우 조급증으로 인해 수행을 망칠 수도 있는 셈이다.

2003년 틱낫한을 플럼빌리지에서 만났을 때 ‘이곳은 자신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태생적으로 또는 어린 시절 경험으로 성격이 형성돼 고정된다는 심리학적 관점도 있는데, 수행을 통해 성격이 변화될 수 있는가?’란 질문을 던졌다. 이에 틱낫한은 이렇게 답했다.

“성격은 많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에 한 요소만이라도 더하면 변하는 것이다. 불교에선 모든 게 무상하다고 본다. 100% 변화는 어렵지만 10%, 20%의 변화는 가능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기쁨을 주지 않는가. 어떤 사람은 빨리 변하고, 일부는 아주 늦게 변한다. 빨리 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겐 더 많은 사랑과 인내가 필요하다. 확실한 것은 모든 사람이 변한다는 것이다.”

무조건 100%를 변화시켜야만 변화고, 100%의 깨달음만이 깨달음이라는 완벽주의에서 벗어나 조금만 변화시켜도 변화임을 직시하게 하는 것이다. 핸드폰을 만드는 회사가 디자인을 비롯해 10%의 성능만을 개선한 신제품을 출시해 ‘지금까지 핸드폰과는 전혀 다른 핸드폰’이라고 광고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으니, 지당한 말이 아닐 수 없다. ■ 

 

조현 cho@hani.co.kr

한겨레신문 사회부, 정치부, 문화부 기자와 논설위원 등 역임. 주요 저서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세계 어디에도 내 집이 있다》 《인도 오지 기행》 《은둔》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 등이 있다. 현재 한겨레 종교전문기자이며 수행수도 홈페이지 휴심정 운영자, 유튜브 ‘조현TV휴심정’ 운영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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