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 교류의 기록인 평불협의 여정은 1992년에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북한불교와의 교류는 꿈이 아닌 현실로 바뀌게 되었다. 

1990년대 초까지 ‘금단의 땅’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고 두렵고 어려웠다. 또한 ‘좁은 문’이었다. 그 틈새를 1992년 2월 창립한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평불협)가 열었다. 오롯이 남북불교 교류와 통일을 목적으로 설립되어 30년의 역사를 채운 불교계 통일운동 단체다. 이곳에서 통일의 새 씨앗이 움텄으며, 작은 결실을 보았다. 

1991년 9월 유엔에 남북한의 동시 가입은 남북대화로 이어졌고, 그 대열에 불교계가 동참했다. 해방과 분단 후, 북한 불교계와 46년 만의 해후가 이루어졌다. 1991년 10월, 미국 LA와 뉴욕 등지에서 열린 ‘제1차 남북 및 해외동포 조국통일기원 불교도 합동법회’가 첫 만남이었다. 북한 조선불교도연맹(조불련)의 미국 첫나들이는 북측과 국내의 여러 인사들의 말할 수 없는 고충과 인내가 뒷받침되어 성사되었다. 

그때 맺힌 열매는 공포를 동반했지만 성과가 컸다. 과거 통일운동 중심에서 남북교류 협력을 위한 활동으로 전환됐다. 불교계도 미국 LA에 평불협 미주본부 등과 국내에서도 불교 통일단체가 잇따라 결성되었다. 남북한 교류에서 불교종단의 직접 참여가 가능해진 시기도 이때부터였다. 특히 1991년 남북불교도 합동법회를 계기로, 남측에서 북한불교에 대해 재인식하게 된 것은 이채롭기까지 했다. 

이런 여건 속에서 송월주 회장, 신법타 상임부회장을 중심으로 평불협 중앙회가 창립하고, 같은 해 9월 미국 LA에 평불협 미주본부가 결성됐다. 2000년 이전까지는 국가보안법 등 국내의 제약 때문에 평불협 미주본부의 역할이 더 컸다. 남북불교 교류의 창구는 물론, 북녘 동포 돕기에 이르기까지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임무를 수행했다. 

지난 30년간의 평불협 역사는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기점으로 변화를 맞았다. 그전까지 교류의 ‘문을 여는 길동무’와 같은 모습으로 나섰다면, 그 후엔 평양의 붉은 광장에 다 함께 섰다. 그사이 교류의 주역이었던 인사들이 사라지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김법장, 이지관,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 등이 열반하고, 북측 조불련의 박태화 위원장과 황병준 부위원장, 정묘 성불사 주지 그리고 국외에서도 김도안 미국 LA 관음사 주지 등이 입적했다. 또한 남북불교 교류의 1세대와 2세대 주역들도 크게 바뀌었다.

이 같은 남북불교 교류의 중심에는 평불협의 김도안, 신법타 스님 등이 있다. 1989년 6월과 1991년 4월 평양에 갔던 법타 스님에 대해 북측 사람들은 “혹시 역사학자이십니까?” 또는 “민속학자이십니까?”라고 반문한 적도 있다. 첫 만남의 낯섦과 그 후의 설렘으로 교류 기반을 닦아온 평불협의 역사는 변화무상하고 기나긴 여정이었다. 이제는 ‘중 선생’이란 호칭 대신에 무슨 무슨 스님이라 부르고, 찬불가를 비롯한 《반야심경》 등의 염불까지 남북한 불교가 공유하는 요소들이 생겨났을 정도다. 

일명 국보 33호라 불린 국가보안법 피해를 당한 법타 스님은 1991년 미국 LA에서의 합동법회 후, 불교 교류의 물꼬를 다시 잇기 위해 일본 도쿄를 방문했다. 또 평불협 미주본부 특사파견 등 북측 조불련과 긴밀히 접촉했다. 그 결과, 1995년 5월 중국 베이징에서 남북불교 회의를 재개하면서 ‘어게인 1991’이 됐다. 이때 부처님오신날 봉축 ‘남북 공동발원문’이 의제로 처음 상정된 다음, 1997년 5월 서울 조계사와 평양 광법사에서 열린 봉축법회에서 동시 낭독되는 성과를 일궜다. 

이 시기 남북교류는 1995년 7월 말, ‘백 년 만의 대홍수’라 불린 북측의 홍수 피해와 맞물리면서 인도적 지원에 이은 결속으로 다져졌다. 대한불교조계종에서도 1997년 2월 ‘탁발 금기’의 전통을 깨고, 35년 만에 ‘자비의 탁발’을 통해 북녘 동포 돕기에 나섰다. 평불협은 1997년 12월 황해도 사리원시 만금동에 ‘금강국수공장’을 설립했다. 남북교류에서 비종교 분야를 처음 개척한 협력사업인 국수공장 운영은 2006년 평양에 ‘금강빵 공장’ 설립으로 이어져 2012년까지 지속됐다. 

1995년 11월에 타계한 작곡가 청공 윤이상과의 인연으로 남북불교 교류는 새롭게 전개됐다. 국내에서 가장 먼저 평불협 주도로 1998년 6월, ‘고 윤이상 선생 가족 귀국 추진위원회’가 결성됐다. 이어 명예회복 추진위원회로 조직을 확대한 평불협은 1984년 12월 평양에 설립된 윤이상음악연구소와 교류했다. 현대음악의 5대 거장으로 꼽힌 작곡가 윤이상 사후에, 평양에 머물던 그의 부인 이수자 음악연구소 명예회장은 북한 전역의 사찰을 순례하면서 천도재를 개최하는 등 북한 사찰에 여러모로 영향을 끼쳤다. 

그 이후, 남북불교 교류는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국내외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평불협도 남북공동 행사에 참여했다. 이때부터 3 · 1절 민족대회, 6 · 15 민족통일축전, 8 · 15 민족통일대회, 10 · 3 개천절 및 10 · 4 남북공동 행사 등과 연계하게 되었다. 그리고 개성 영통사와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평불협은 불교계 공동 기념사업에서 많은 노하우를 쌓았다. 

155마일 ‘철의 장막’과 코로나19 팬데믹이 가로막은 북녘으로 가는 길은 지금도 누군가의 용기가 절실하다.

이지범 / 전 평불협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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