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종도반HC 전무
이상종도반HC 전무

인생의 절반을 축제와 함께했지만 여전히 나의 화두는 ‘축제’이다. 축제란 말 그대로 축하하여 벌이는 큰 규모의 행사를 말한다. 축하하여 벌이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리라. 문득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이 글을 쓰자니 내게 찾아온 인연에 대한 소중함과 그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겠노라 다짐하게 된다. 

꿈을 안고 열심히 운동했던 학창 시절에 꿈을 접어야 할 만큼의 큰 부상을 입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운동하면서 성격이 매우 밝아졌고 승부욕을 배웠으며 리더십을 키워 갔던 터였다.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잘하는 운동을 더 이상 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지금도 그때를 결코 잊을 수 없다. 

방황의 시절, 귀한 인연이 찾아왔다. 한 축제의 현장에서 무대진행 일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운동을 하며 다져진 밝은 에너지가 이 일과 잘 맞았다. 전체 진행과 사회를 맡아 일하는 동안 이 일이 적성에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더욱 깊이 있는 공부를 하고 싶어졌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던 중 불교 활동을 하는 지인의 소개로 불교 관련 단체들과 연결이 되었고, 불교 행사들이 다른 종교에 비해 매우 열악한 환경임을 알게 되었다. 지인들과 불교 관련 행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먹먹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가장 힘들고 외로울 때 큰 힘이 되어 주고 위로가 되어 주었던 부처님의 도량을 외면하고 세속에 찌들어 살아온 스스로가 부끄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부처님 도량에 회향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이 일을 통해 바르게 신행 생활을 하리라 다짐하면서 내 삶의 방식을 불교에 초점을 맞추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마음 돌리고 나니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고, 불교 행사와 관련한 연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불교 행사를 여법하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공부가 필요했다. 빈틈없이 꼼꼼하게 행사를 준비했다 하더라도 일반 행사에 비해 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몸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함께하면서 섬세하게 진행해야 성공할 수 있는 행사가 바로 불교 행사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대규모 행사에 본격적으로 동참하게 되는 계기를 만났다. 1996년 초겨울에 종로 어느 사찰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당시 조계종 총무원 총무국장이던 지현 스님께서 참석하셨다. 지현 스님은 기존의 제등행렬을 연등축제로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아주 구체적으로 내놓았고 그동안 그려왔던 연등축제의 모습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석가탄신일’이라고 불리던 것을 ‘부처님오신날’이라는 말로 바꿔 부르자고 제안하면서, 불자들만의 축제였던 제등행렬을 국민 모두의 축제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 보자고 말씀하셨다.

지현 스님의 의견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고 오랜 시간 깊이 있게 고민한 결과물이었기에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가까이에서 스님을 뵙고 이야기를 나눈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의견을 피력하는 동안, 강단 있는 스님의 목소리와 흔들림 없이 반짝이는 눈빛은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서울엔 첫눈이 내렸다. 당시 봉축기획단의 책임 실무를 맡고 있던 박상희 간사와 함께 예상치 못했던 함박눈을 맞으며 지현 스님을 모시고 종로의 밤길을 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연등회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환희심이 절로 났고 그해 첫눈은 축복의 눈이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축제에 대한 지현 스님의 생각은 오로지 한 가지이다. 요란함보다는 소박함이고 화려함보다는 어울림이다. 불자들만의 축제가 아니라 전 세계 모두의 축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원력으로 세우고 일했으면 좋겠다고 조언해 주셨고, 이웃과 함께하는 축제이기를 바라셨다.

현대의 사찰은 더 이상 종교만의 공간이 아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대중들과 함께하는 문화공간으로서 역할이 확대되었다. 기존에 내려오던 전통적인 불교 의례나 명절 행사가 음악회, 전시회, 체험마당 등 현대적인 문화프로그램과 접목되면서 종합적인 축제 형식으로 탈바꿈했다. 부처님오신날 연등회를 비롯해 산사음악회, 개산대재, 괘불재, 꽃축제, 역사문화 축제, 차문화제, 사찰음식 향연 등 각 사찰의 역사와 지역적 특징을 살린 다양한 문화행사가 풍성하게 열리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감동과 울림을 주는 불교 문화행사를 기획하고 연출할까. 지금 나의 가장 큰 고민이자 화두이다. 축제라는 화폭에 부처님의 미소를 그리는 화가이고 싶다. 종교를 떠나서 축제에 함께하는 모든 이들이 부처이고 보살이라는 생각이다. 그들의 입가에 미소를 그려 넣어 줄 수 있는 화가가 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겠다. 

1996년 첫 행사를 시작으로 지난 2012년 연등회가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22호로 등록되었던 순간을 떠올리다 보면 또 한 번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리고 10여 년의 세월이 지난 2020년 12월, 마침내 연등회가 세계에서 인정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되었다. 이는 불교문화 연출가로서 살아온 내 인생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이고 기쁨이다. 

그동안 현장에서 겪게 된 수많은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해 왔다. 수집한 자료를 잘 정리해서 문화연출가의 꿈을 꾸는 후배들과 불교 행사를 진행하는 실무자들에게 작으나마 도움을 주고 싶다. 

나의 성장과 신념이 문화 주최자들에게 공감을 주고 우리의 전통문화가 힘찬 발걸음으로 전 세계에 뻗어 나가는 데 이바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상종 / 조계종 도반HC 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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