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고전

1. 들어가는 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참으로 쉬운 것 같으면서도 난해한 문제이다. 따지고 보면 붓다의 가르침이란 이 물음에 대한 깨달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자 한 것이 아니겠는가. 중국 선진시대(先秦時代) 사상가 묵자(墨子, B.C. 468?~B.C. 376?)는 ‘서로 함께 나누는 사랑과 이로움’으로 살아야 한다고 단언한다. 나와 남을 분별 짓지 않고 아낌없이 사랑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갈등과 대립, 다툼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 수 있으며, 척박하고 곤궁함 속에서도 남과 이로움을 공유할 때 비로소 참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묵자는 누구인가?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지만 막상 그가 누구이며 어떤 사상가인지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묵자의 ‘묵(墨)’은 단순히 그의 성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묵형(墨刑)이라는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고, 그가 ‘천민(賤民)’의 신분으로서 생산 노동에 직접 참여한 탓에 검게 그을린 얼굴색을 형용하는 것이라는 입장도 있다. 유가, 도가, 법가, 명가, 음양가, 농가, 종횡가, 잡가 등 선진시대 학파는 그들의 주된 사상이나 특성으로 학파를 지칭하고 있지만 유독 묵가만이 비조의 성씨로써 학파를 일컫는 것은 ‘묵’이 단순한 사람의 성씨가 아닐 것이라는 추측에서 나온 견해들이다. 백가쟁명의 중심에 서서 세상의 이로움을 일으키고, 해로움을 없애고자 한 사상가이지만 그의 세세한 이력은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묵자는 공자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출생하였으며, 공자와 어깨를 견줄 정도의 영향력을 지닌 학자였다. 하지만 한나라에 이르러 유술(儒術)이 정치 사회적으로 독존적 지위를 구축하였고, 상대적으로 쇠약해진 묵자의 주장들은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는 절학(絶學)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묵자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은 첫째, 유교 사상이 지닌 불합리한 요소에 대해 철저하고 호되게 비판을 가함으로써 유가의 핍박을 피하기 힘들었고, 둘째,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권익보다 백성들의 이로움을 우선시하는 묵자의 이념에 대해 거부감을 지닐 수밖에 없었으며, 끝으로 묵자의 윤리나 정치, 경제 이론들은 난해하면서도 엄격한 실천을 요구하는 탓에 현실 사회에서 여실히 준용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묵자 사상이 다시 부각한 것은 서양 열강들에 의해 화하(華夏)가 처참하게 유린당하기 시작할 무렵부터이다. 특히 신해혁명 이후 수많은 학자와 정치가들은 중국 전통 사상 속에서 제국주의에 대적할 만한 사상적 무기를 찾고자 노력하였는데, 이때 급부상한 인물이 바로 묵자이다. 당시 묵자는 ‘평등과 박애’ ‘과학과 민주’의 큰 스승으로 추앙받았고, 일부 학자들은 묵자 사상이 전통사회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민란의 사상적 근거로 작용하였다는 주장 등을 쏟아 내면서 묵학(墨學)에 대한 연구는 최고조에 달하였다. 중국의 민국(民國) 시기 초 사상계를 주도했던 양계초(梁啓超)는 “후손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위대한 스승 묵자를 땅속에 묻어 두고 있었음”을 한탄하며 위기에 처한 중국을 구할 길은 오로지 묵자의 정신을 계승하여 연구하는 것뿐이라고도 하였다.

묵자의 정신이란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겸상애 교상리(兼相愛 交相利)’, 즉 ‘서로 함께 나누는 사랑과 이로움’이라는 한마디로 개괄할 수 있다. 오직 사랑만이 세상의 모든 번뇌와 고통, 혼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 묵자는 자신의 신념을 구현하여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머리끝에서 발꿈치에 이르기까지 온몸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헌신하였다. 

 

2. 서로 함께 나누는 사랑과 이로움

중국 춘추전국시대, 묵자는 자신이 처한 시대상에 대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위협하고, 많은 자가 적은 자를 해치고, 약은 자가 어리석은 자를 기만하며, 귀한 자가 천한 자에게 오만한” 아수라의 싸움터와 같은 까닭에 “주린 자는 먹지 못하고, 추운 자는 입지 못하며, 피로한 자는 쉬지 못하는, 세 가지의 환난[三患]”에 처해 있다고 진단하였다. 또 이러한 세태의 근본 원인은 사람들이 자신만을 내세우고 집착함으로써 “아버지가 아들을 자애로써 돌보지 않고, 형이 아우를 우애로써 사랑하지 않으며, 군주가 신하를 사랑하지 않는 것”, 즉 ‘서로 사랑하지 않음[不相愛]’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보았다. 사람들은 자신과 남을 상대적이고 분별적인 관점에서 파악하여 서로 경계 짓고, 오로지 자신만의 이로움을 위하여 남을 해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묵자가 아수라장과 같은 세상을 치유하기 위하여 내린 처방은 의외로 간명하다. 다름 아닌 ‘겸상애(兼相愛)’를 통해 무명(無明)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남을 사랑하는 것”이 곧 “자신을 사랑함과 다르지 않다.”라는 사실을 깨달아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다름없이 남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기저에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남을 사랑하는 것’은 상충하거나 모순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나와 남을 나누어 분별하지 말고 상의하고 상보해야 한다는 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남을 사랑하기를 자신의 몸을 사랑하듯이 한다면 어찌 불효와 같은 짓을 할 수 있겠으며, 자애롭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자식과 아우, 신하 보기를 자신의 몸과 같이 한다면, 어찌 자애롭지 않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위의 묵자 진술은 나와 남을 이분법으로 분별하는 어리석은 생각이 세상을 도탄에 빠뜨렸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나와 내 가족, 내 나라를 우선하여 거론한다면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 자신의 나라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므로 천하 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묵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다름없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면, 만약 이 전제가 모든 사람에 의해 제대로 지켜질 수 있다면 “국가와 국가는 서로 침략하지 않고, 집안과 집안은 서로 다투지 않을 것이고, 도둑이 없어지고,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효도하고 자애로울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다툼들이란 자신만을 고집하고, 자신의 욕구 충족만을 추구하면서 일어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듯 남을 사랑할 수 있다면 어떻게 남을 겁박하며 짓밟을 수 있겠는가? 

덧붙여 묵자는 타인을 해쳐 자신을 이롭게 하겠다는 손인이기(損人利己)의 태도를 부정하며, 어떤 친소의 구분도, 존비의 위계도 따지지 않고 ‘남과 함께 나누는 이로움[交相利]’이 곧 참혹한 규환(叫喚)의 지옥에서 벗어나는 구체적인 실천이라고 보았다.

유가의 입장에서 볼 때, 이로움[利]보다는 의로움[義]을 중시해야 하며, 양자는 주종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천하의 혼란은 이로움만을 추종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의로움이 우선되고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묵자는 의로움과 이로움을 애써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로움이란 곧 이로움, 이로움이란 곧 의로움이라는 점을 누누이 역설하고 다녔다. 

가령 그는 “공이란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所謂功 利於人].”라고 하면서 자신이 지닌 능력을 발휘하여 공동체에 이바지함, 즉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을 이롭게 하는 것이 곧 의로움이라고 주장하였다. 묵자가 말하는 의로움이란 타인에 대해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도움이 되는 이로움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가 추구한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 역시 세상에 숨겨지고 가려진 이로움을 찾아 위로는 하늘을 섬기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이로움을 보장하는 사람이며, 결코 자신의 사적인 이로움을 도모하지 않는 사람이다. 

한편 묵자는 천하의 이로움을 일으키는 행위를 ‘겸(兼)’이라고 하였으며, 이에 반하는 행위를 ‘별(別)’이라고 하였다. ‘별’을 ‘겸’으로 바꾸어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위협하고, 많은 자가 적은 자를 해치고, 약은 자가 어리석은 자를 기만하며, 귀한 자가 천한 자에게 오만한” 천하의 어지러움이 바야흐로 종결되어 ‘서로 함께 나누는 사랑과 이로움’이라는 자신의 최종 지향점이 완성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겸상애 교상리’ 학설은 실현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만약 그대가 먼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맡은 일이 녹록하지 않고 길이 험하여 되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면, 그대는 자기 몸처럼 남을 아끼는 사람과 자신의 이로움만 추구하는 사람 둘 중에 누구에게 당신의 처자를 맡기고 떠날 것인가?”

사람들은 ‘서로 함께 나누는 사랑과 이로움’을 너무나 몽환적인 이상이라고 치부한다. 그러나 위에서 제기한 묵자의 물음에 대한 사람들의 회답은 대체로 일치할 것이며, 그들의 답변 이면에 ‘겸상애 교상리’라는 윤리적 행위는 누구만의 이상이 아닌 우리가 모두 간구하고 있다는 점, 또 그러한 세상의 도래는 단순한 꿈으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구현해야 한다는 염원이 부지불식간에 내재해 있다고 할 것이다.

묵자가 제창한 ‘겸상애 교상리’의 논조를 들여다보면 그가 비록 불교의 연기(緣起)에 대해 명확히 알지는 못했으나, 인간은 서로에게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얻은 ‘연기의 자각’과 맥을 같이한다고 생각한다. 붓다가 연기법을 통해 우리에게 일러주는 궁극의 가르침이란 모든 존재는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상대적이고 의존적인 까닭에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로움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서로 함께 나누는 사랑과 이로움은 하늘의 뜻

고대 중국인들은 하늘을 인간존재의 근원으로 이해하였고, 인간이 지닌 모순과 한계는 하늘의 뜻을 여실히 구현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천자들이 곧잘 자신들이 하늘과 혈연관계를 맺었다거나 하늘의 명[天命]을 받았다고 주장하곤 하였는데 이는 통치의 정당성, 즉 자신들의 통치 행위는 하늘의 뜻을 지상에 실현하는 것임을 인정받고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표면적으로 묵자는 전통적으로 계승되어 오던 하늘에 대한 관점을 토대로 하늘이란 만사 만물의 표준이며 인격을 갖춘 전지전능한 존재, 인간 행위를 감제하며 상벌을 내리는 존재임을 긍정하였다. 여기서 나아가 하늘이란 사람을 사랑하고 이롭게 해주는[愛人利人] 절대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땅히 하늘의 뜻을 좇아 삶을 영위해야 한다고 강변하였다. 

묵자에게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이란 ‘서로 함께 나누는 사랑과 이로움’을 실천하는 것이고 하늘의 뜻에 반하는 것은 ‘아울러 사랑하지 않고 사람들을 해치는 행위’를 말한다.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겸상애 교상리’를 단순한 처세술이 아닌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삶의 준칙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하늘의 뜻이란 아비규환의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묵자의 여망인 셈이며, 묵자 자신의 의지를 하늘이라고 하는 지엄한 존재에 의탁한 것이다. 

묵자의 뜻은 통치자들에 의해 갖은 수탈 속에서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쉬지도 못하는 ‘삼환(三患)’에 함몰된 백성들, 통치자들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전쟁이라는 살육의 현장으로 내몰리는 백성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사회적 약자로서 백성들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의 사슬을 끊고, 그들을 착취와 억압, 고통에서 구제하여 모두가 인간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구현하는 길은 오직 ‘겸상애 교상리’뿐임을 신념으로 하였다. 

따라서 묵자의 의지는 곧 백성들의 염원과 상통한다고 할 것이다. 그는 ‘서로 함께 나누는 사랑과 이로움’이 사람들에 의해 일반화되어야 사회적 약자인 백성들의 삶의 질도 긍정적으로 변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겸상애 교상리’가 세상 사람들 모두가 추구하는 준칙으로 보편화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첩경으로써 그는 하늘이라는 절대적 존재를 통해 자기 입론의 근거로 삼고자 한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하늘이 지닌 허구성, 신비성과 환상을 넘어 현실성과 실천성으로 변모시킨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아울러 그는 하늘의 뜻이 곧 ‘군지(君志)’, 즉 통치자의 뜻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하늘의 뜻이 지상에서 온전하게 실현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을 지닌 자들, 특히 위정자들의 각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통치자들이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백성들의 삶은 갈수록 더 피폐해질 것이고, 사회의 혼란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겸상애 교상리’라고 하는 절대적 존재의 뜻을 국가 통치의 방편이나 기준으로 삼게 함으로써 위정자들의 통치 행위를 감제하고자 한 것이다. 

요컨대 묵자는 갖은 핍박 속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모두가 절대적 존재로서 신앙하는 하늘을 빌려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묵자가 언급한 하늘이란 선험적 결정자가 아니며 인간이면 누구나 준수해야 할 보편적 준칙인 ‘서로 함께 나누는 사랑과 이로움’의 실현을 도모하는 존재이며 인간 사회에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고 제어하는 조정자이다. 

 

4. 사랑과 나눔을 실천한 사상가

묵자는 ‘서로 함께 나누는 사랑과 이로움’이 충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이론과 함께 그에 상응하는 현실적 실천이 절실하다고 파악하였다. 오늘날 실천력이 강한 사람을 빗대어 ‘묵돌불검(墨突不黔)’이라고 하는데, 이는 묵자가 천하의 이로움을 일으키고, 해로움을 없애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탓에 묵자의 집 굴뚝이 검게 그을릴 겨를이 없었던 것에서 유래한 성어이다.

먼저 묵자는 대화와 토론 과정에서 자신이 개진한 학설의 합당함을 인정받기 위해 변설(辨說)을 발전시켰다. 변설이란 분별하여 말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묵자는 아무리 세상을 건질 수 있는 묘책이 있을지라도 자신의 관점을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없다면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다고 믿었다. 이는 마치 붓다가 전도를 떠나는 비구들에게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중생들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法)을 설할 것’을 주문한 것을 연상하게 한다.

변설과 관련된 사례를 살펴보면, 가령 사람들이 “겸상애 교상리는 참으로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실천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라고 회의를 제기할 경우 묵자는 다음과 같이 변설을 진행하였다.

오늘날 전쟁터에서 자신을 희생하여 이름을 얻는 일은 사람들이 하나 같이 어렵다고 여기는 일이다. 그런데 군주가 그것을 좋아하면 사람들이 그런 행위를 망설임 없이 행한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롭게 하는 일이 이와 다르겠는가?

공명(功名)이 좋다고 한들 하나뿐인 자신의 생명과 맞바꾸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도 그런 일들이 쉼 없이 일어나는 까닭은 군주가 전쟁터에서 자신의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사람을 충신이라 떠받들고, 그의 공적을 따져 상을 내리는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군주가 만약 ‘서로 함께 나누는 사랑과 이로움’을 존숭하고 이로써 국가를 통치해 나간다면 ‘겸상애 교상리’ 역시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 아님을 예증한 것이다. 자신 주장의 타당함을 강권하거나 겁박하는 것이 아닌 사례를 통하여 논증하고 설득시키고자 한 것이다. 

위의 변설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해 본다면, 즉 만약 우리가 ‘겸애 교리’를 행하는 사람을 추앙하면서, 그러한 인간이 되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아 실천한다면 이는 구현하기 어려운 윤리적 이상만은 아닐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절검(節儉)을 통한 사회 재화의 안정을 추구해야 함을 역설하고 이를 공동체에 준용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였다. 그의 절용과 상장례의 간소화, 음악을 반대하는 등의 이론은 번잡하고 사치스러운 예(禮)를 피하고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제도를 갖추기 위한 실천적 노력이었다. 특히 사회 재화의 낭비와 생산력의 저하를 불러오는 삼년상을 근절하고 5일 동안의 애도(哀悼) 이후 다시 본업에 종사해야 함을 강변한 상장례(喪葬禮)와 관련된 견해는 매우 합리적인 견해이다. 

하지만, 유가로부터 ‘불효’의 이론이라는 오명과 함께 극렬한 비난을 받게 된 학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묵자는 사치와 낭비를 불러오는 불합리한 제도는 반드시 개선해야 하며 자신이 강조하는 절장(節葬)이야말로 죽은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바를 실천하는 진정한 ‘효’라고 맞서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아끼고 줄여야 한다는 소극적 자세에서 벗어나 생활에 필요한 생산 기술을 직접 개발하고 일상에서 활용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객관적 실험을 중시하고 주관적 억측을 배제하는 과학적 태도를 견지하게 되었고 괄목할 만한 이론들을 제시하였다. 특히 묵가의 《묵경(墨經)》은 유가의 과학서인 《고공기(考工記)》와 견줄 정도의 과학적 이론과 기술을 담고 있는데 이는 중국 고대 수학, 기하학, 광학, 물리학 등의 이론 정립과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묵가 과학 정신의 근저에는 묵자의 다음과 같은 입장이 자리 잡고 있다. 

공(功)이란 사람들을 이롭게 할 때 교(巧)라 이르고, 도움이 되지 못할 때는 졸(拙)이 된다.

‘공(功)’이란 기술이나 재능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를 의미한다. 묵자는 기술과 재능을 ‘교(巧)’와 ‘졸(拙)’로 구분하여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교(巧)’,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을 ‘졸(拙)’이라고 하였다. 기술과 재능, 과학은 인간을 생각하고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지적한 것이다. 이는 기술의 진보만을 추구하다가 인간 상실, 인간 소외의 가치 전도 현상을 빚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좋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서로 함께 나누는 사랑과 이로움’을 구현하기 위한 묵자의 실천적 노력은 반전사상(反戰思想)에서 정점에 다다른다. 그가 보기에 남의 나라를 침략한다는 것은 ‘겸상애 교상리’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패륜적 행위, 말하자면 자신을 위해 남의 성과를 노략질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존도 보장받을 수 없는 도박이나 다름없는 행위이다. 더욱이 전쟁을 수행하는 시기는 사회적 생산 시기와 맞물려 있어 전쟁이 발발하면 빈곤의 악순환만 거듭되었고, 그 피해는 오롯이 사회적 약자인 백성들의 몫이었다. 묵자는 전쟁처럼 남의 것을 수탈하고 그것으로 배를 채우는 행위는 동물의 세계에서만 만연된 것이며, 인간은 자신의 노동력에 의해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전쟁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군주들은 부국강병을 실현하는 첩경은 오직 전쟁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묵자는 이러한 군주들의 야심에 맞서 특유의 방어적 전술과 전략을 수립하였다. 손자병법이 주로 공격 위주의 병법을 말하고 있다면, 묵자병법은 강력한 방어 체제를 바탕으로 상대의 공격 의지를 사전에 막아내는 병법이다. 오늘날에도 ‘묵자지수(墨子之守)’ 혹은 ‘묵수(墨守)’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그의 방어 전략은 상당히 주밀하고 탁월하였다.

‘지초공송(止楚攻宋)’은 전쟁을 막기 위한 묵자의 실천적 노력의 일단을 잘 보여준다. 초나라는 공수반(公輸盤)이 새롭게 개발한 무기로써 송나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묵자는 10일 낮과 밤을 걸어 초나라에 도착한 뒤, 송나라 공격의 부당함을 변설로써 조목조목 따지고 공수반과 모의 전쟁을 펼친다. 공수반의 신무기 공격은 묵자의 방어 전술에 미치지 못하였으며 결국 초나라의 공격 의지를 포기하게 하였다. 송나라를 구한 묵자였지만 송나라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들로부터 박대를 당하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고 있다. 

‘지초공송’에서 묵자가 보인 행위는 약소국을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구했다는 표면적 의의보다는 반전 평화에 대한 그의 의지가 얼마나 견고한지를 보여준다. 붓다 역시 전쟁의 부당성을 설법하며 인접국 사이의 전쟁을 막아 평화를 유지하게 한 사례가 전해 온다.

5. 묵자에 대한 제자(諸子)들의 견해

묵자의 ‘서로 함께 나누는 사랑과 이로움’에 관한 학설은 참신하면서도 호소력을 지녔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실천 또한 일관되면서도 헌신적이었다. 무엇보다도 묵자 학설의 최종 지향점은 백성들의 삶에 있었기 때문에 소외 계층이나 약자들로부터 적잖은 호응을 받았다. 이는 자기 학파의 우월성을 확보하여 독점적 지위를 노리던 선진 제자들에게는 위협이 되었고, 이는 묵자 학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맹자(孟子)는 “묵자가 겸애를 주장하는 것은 자신의 아버지를 섬기지 않겠다는 것이다.”라고 평가하면서 묵자를 금수에 비유하였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남는 힘이 있다면 남과 남의 부모를 고려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라고 본 것이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다른 사람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와 다름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불효를 행하는 것과 진배없다는 것이다. 

순자(荀子)의 경우 “묵가의 사상이 유행하면 천하는 검소함을 존중하면서 빈천해질 것이다.”라는 관점을 중심으로 묵자의 절용과 비악(非樂) 등의 경제 이론을 공략하였다. 그에 의하면 천지간의 만물은 풍족하기 때문에 천하의 사람들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는 방법론적인 측면 등을 도모하는 것이 합당하며, 부족하다고 무조건 검소함을 강조하는 것은 천하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비자(韓非子)는 유가와 묵가의 학설 모두 어리석은 학설이며, 상반되는 관점을 지닌 학파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여름과 겨울이 동시에 올 수 없듯이 두 학설도 결코 병립할 수 없는데도 이들 학설이 유행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기준과 표준을 상실하게 했다는 것이다. 

선진시대 학파들이 묵가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하며 비난에 가까울 정도로 폄훼하고 있는 까닭은 묵자 사상이 지닌 독창성과 합리성 그리고 실천성에 대한 견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들과 달리, 장자(莊子)는 묵자에 대해 소상하게 분석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묵가가 검박함을 숭상하고 조직의 기강이 엄격하여 세상의 다급한 일에 쓰일 수 있는 학파라고 평가하고 후장(厚葬), 구장(久葬)과 같은 유가의 번잡한 장례 절차는 죽은 사람을 위한 것도, 산 사람을 위한 것도 아닌 악습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묵자의 절장을 추켜세웠다. 또 묵자가 스스로 고난을 자처하며 지나치게 검약함을 추구하는 까닭에 사람들이 쉽사리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20세기 초, 묵자를 인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중국 학자가 있었다. 그는 묵자가 인도인이었기 때문에 얼굴이 검었고 그래서 ‘묵’이라고 칭한 것이라는 입장을 제시하였다. 이는 분명 견강부회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 기저에는 ‘겸상애 교상리’의 윤리 학설이 ‘자비’의 설법과 사뭇 닮아 있다는 인식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없다. 

붓다의 가르침이 중생이 지닌 근본적인 괴로움을 해결하여 중생의 삶을 진실되고 이롭게 하는 것에 있으며, 종국에는 중생의 행복한 삶을 지향하고 있는 것과 같이 묵자 또한 사람의 가치에 주목하고 ‘서로 함께 나누는 사랑과 이로움’을 학파 입론의 종지로 삼았다. 고해(苦海)에서 버림받은 중생구제를 위해 묵묵하고 꾸준하게 자신들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친 붓다와 묵자의 이타행은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는 우리에게 좋은 삶의 지침이 될 것이다. ■

 

황성규 hskk4285@mokpo.ac.kr

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인민대학 대학원에서 중국철학을 공부하였으며, 공주교육대학과 한남대학교에서 강사, 보문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중국에서 간행된 《묵자의 평민학설(墨子的平民學說)》, 역서로는 방립천 교수의 저서를 함께 번역한 《중국불교철학》 등이 있다. 현재 목포대학교 사범대학 윤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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