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초기불교사상》으로 2021 불교평론 뇌허불교학술상을 수상한 마성 스님이 수상 연설을 위해 집필한 원고이다(시상식 2021년 12월 23일, 불교평론 세미나실).

 

1. 여는 글

초기불교란 붓다가 성도하여 전도를 시작한 때로부터 불멸 후 100년에서 200년 사이에 부파분열이 일어날 때까지의 2~3백 년간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초기불교란 붓다 재세 시부터 입멸 후 승가에서 근본분열이 일어나기까지의 약 150년에서 250년 사이의 불교를 일컫는다. 다만 여기서는 ‘원래의 불교(Original Buddhism)’라는 의미로 초기불교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면 ‘왜 초기불교에 주목해야 하는가?’ 이 물음은 현재의 불교가 초기불교에서 크게 벗어나 있음을 전제한 것이다. 실제로 한국불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각종 불교 행사들은 붓다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 한둘이 아니다. ‘법회’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행사에도 붓다의 가르침을 설하는 법문은 없고, 온갖 형태의 비불교적인 주술과 기복신앙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른바 주객이 전도된 종교 행위가 한국불교의 외형적인 모습이다.

그러면 한국불교가 ‘원래의 불교’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유일한 해답은 ‘붓다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선각자들은 불교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붓다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과 실천 방법은 일치하지 않는다.

 필자가 ‘붓다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붓다의 본회(本懷)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이른바 붓다가 품었던 이상적인 불교교단을 지금 · 여기에서 구현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초기 교단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자는 복고주의(復古主義)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한국불교를 2,600여 년 전 붓다시대의 불교로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런 일은 가능하지도 않다. 왜나하면 모든 현상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다만 붓다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 이상적인 교단을 설립해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과제로 남는다.

그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원래의 불교인 초기불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초기불교를 배우지 않으면 불교의 정체성과 불교의 수행 원리는 물론 승단은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왜 초기불교에 주목해야 하는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초기불교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2. 초기불교에 주목해야 할 이유

1)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이다

첫째는 불교의 바른 신행을 위해 초기불교를 공부해야 한다.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Buddha-sāsana)이다. 우리는 불교가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이 평범한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의 불교 신자 중에는 붓다의 가르침이 아닌 관음교나 지장교 또는 조사교나 산신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할 때의 붓다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 부처님(Sakyamuni Buddha)을 가리킨다. 불교는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불은 전지전능한 신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최고의 경지인 ‘위없는 바른 완전한 깨달음(anuttarā-sammāsaṃbodhi, 無上正等覺)’을 성취한 자이다. 붓다의 제자들은 스승인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수행하여 열반의 경지를 실현하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삼는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는 귀의의 대상이 누구인지조차 불명확하다. 어떤 때에는 삼신불(三身佛), 즉 청정법신비로자나불, 원만보신노사나불, 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에 귀의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아미타불을 비롯한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지장보살 등에 귀의하기도 한다. 이처럼 귀의 대상인 교주(敎主)를 명확하게 내세우지 않는 것이 한국불교의 신앙 형태다. 그러나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교주로 모시는 종교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불자는 석가모니불보다는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을 주된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 심지어 신중이나 나한, 산신, 칠성, 용왕 등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신앙 형태 때문에 많은 사람이 신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큰 혼란을 겪는다. 그 근본 원인은 불신관(佛身觀)의 변천으로 교리가 발전했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테라와다(Theravāda, 上座部) 전통에서는 오직 석가모니불 일불(一佛)만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 때문에 신행과 의례가 간단명료하다. 반면 대승불교에서는 시간과 공간적으로 수많은 부처와 보살이 항상 머물고[常住] 있다고 해석한다. 즉 시간적으로는 삼세불(三世佛)이 현존하고, 공간적으로는 타방불(他方佛)이 현존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다불다보살(多佛多菩薩)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 때문에 처음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들은 매우 혼란스러워한다. 또한 일반 불자들의 신앙 형태도 천차만별이다. 사찰에서 행해지는 의례도 각양각색이어서 무엇을 믿고 무엇을 닦아야 하는지 불분명하다. 이런 상태에서는 올바른 불교관을 형성하기가 어렵다. 확고부동한 불교관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끊임없이 사상적으로 방황하게 된다.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붓다[佛]와 그의 가르침[法], 그리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단체[僧]에 귀의한다는 뜻이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붓다의 가르침을 믿고 바르게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는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신앙(信仰)이 아니라 신행(信行)이라고 표현해야 옳다.

어떤 사람들은 ‘불교는 석가교만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만이 전부가 아니다. 불교가 지나온 수천 년 동안 수많은 불교 사상의 선각들에 의해 해석되고 발전된 것까지 포함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후대에 성립된 온갖 독단적인 신념이나 학설은 물론 위경(僞經)까지 방편이라는 미명 아래 모든 것을 포용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기복주의, 주술주의, 의례주의, 세속적 물량주의, 권의주의 같은 것은, 불교가 극력 배척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비불교적 요소들이 불교 안에서 본질적인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처음에는 선(善)[을] 목적으로 시작한 교리해석이나, 방편의 입장에서 수용한 이질적 신앙이 나중에는 본질과 목적 자체를 왜곡한 예가 적지 않다.

이와 같이 비불교적 요소까지 수용하다 보면 불교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불교는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이다.

모든 교리적 문제는 부처님 그분으로부터 해답을 구해야 옳다. 모든 교리의 문제나 계율의 문제, 또는 인생과 세계에 대한 문제에 대해 대답을 구하는 공식도 하나뿐이다. ‘부처님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씀했으며, 어떻게 행동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를 외면한다면 외도를 지향하는 것이지 불교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붓다가 평생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쳤는지 명확하게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초기불교를 모르면 붓다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압빳숫따 숫따(Appassuta-sutta, 少聞經)》(AN 4:6)에서 붓다는 자신이 설한 교법을 아홉 가지로 나눈 구분교(九分敎)를 배우지 않으면, “뜻(attha)도 제대로 모르고 법(dhamma)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출세간]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지 않는다”(AN.Ⅱ.7)라고 했다. 즉 주석서(aṭṭhakathā)와 성전(pāḷi)을 모르기 때문에 아홉 가지 출세간법(예류도에서 아라한까지의 四雙八輩에 열반을 추가한 것)을 닦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경에서는 출세간법을 닦지 않는다고 했지만, 출세간법을 닦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불교의 바른 신행을 위해 초기불교를 공부해야 한다. 붓다시대에는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실천 수행하여 수많은 아라한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붓다의 입멸 이후 시간이 경과하면서 붓다의 가르침, 즉 교리의 변천으로 인해 불교 신행에도 많은 변질이 생겼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부처님이 그토록 비판하고 배척한 주술주의, 기복주의, 의례주의, 물질주의에 대한 개방이다. 오늘날 세계의 거의 모든 불교는 이 점에서 비불교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방편주의에 매몰되어 무엇이 불교적인 것이고 무엇이 비불교적인 것인가를 구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초기불교에 눈을 돌려야 한다.

 

2) 붓다의 가르침은 합리적이다

둘째는 붓다시대의 종교 · 사상계의 동향은 물론 붓다의 가르침이 타 종교 사상과 어떻게 다른가를 파악하기 위해 초기불교를 공부해야 한다. 불교의 정체성을 바르게 알자는 것이다. 붓다시대의 다른 종교와 철학도 논리적으로 진리를 표명하고 있지만, 불교만큼 합리적이지는 못하다. 붓다의 교설은 보편성과 특수성을 갖고 있다. 붓다시대의 다른 종교와 철학도 나름대로 우주와 인생에 관한 진리를 설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상견(常見, sassata-diṭṭhi) 혹은 단견(斷見, ucceda-diṭṭhi)에 치우쳐 있어서 올바른 해탈의 길로 인도할 수 없다. 그러나 붓다는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른바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인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八支聖道]’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붓다는 입멸 직전에 찾아온 수밧다(Subhadda)라는 외도 유행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수밧다여, 어떤 법과 율에서든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八支聖道]’이 없으면 거기에는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두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세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네 번째 사문도 없다. …… 수밧다여, 이 법과 율에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 있다. 수밧다여, 그러므로 오직 여기에만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두 번째 사문 …… 네 번째 사문이 있다. 다른 교설들에는 사문들이 텅 비어 있다. 수밧다여, 이 비구들이 바르게 머문다면 세상에는 아라한들이 텅 비지 않을 것이다.(DN.Ⅱ.151)

위 경문에 나오는 ‘여기에만(idheva)’이란 오로지 이 교법(sāsana, 붓다의 가르침)에만 성스러운 사문이 있다고 천명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첫 번째 사문이란 예류자(預流者), 두 번째 사문이란 일래자(一來者), 세 번째 사문이란 불환자(不還者), 네 번째 사문이란 아라한(阿羅漢)을 말한다. 이러한 네 부류의 성자는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비구 승가에서만 나올 수 있고, 다른 외도들의 교설(parappavāda)에서는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외도 유행자들은 62견(見) 가운데 상견(常見, sassatavāda)을 주장하는 네 가지 사견(邪見)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아(自我, ātman)와 세계(世界, loka)가 영속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결코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 아라한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붓다는 입멸 직전에 이것을 분명히 밝혔다. 

한편 초기불교는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지적(知的) 측면에서는 합리성과 객관성을 갖고 있고, 정의적(情意的) 측면에서는 윤리성과 인간성을 갖고 있으며, 대사회적(對社會的) 측면에서는 세계성과 보편성을 갖고 있다.

첫째, 지적 측면에서 보면 초기불교는 다른 종교사상에 비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와 철학은 해탈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태동한 종교와 철학보다 이지적이고 이론적이다. 그러나 붓다시대의 육사외도(六師外道)는 인도에서 태동한 종교 사상임에도 불구하고 이론과 실천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초기불교의 대표적 교설인 사성제(四聖諦), 연기법(緣起法), 삼법인설(三法印說) 등은 매우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진리이다. 특히 무아설(無我說)은 어느 종교나 철학에서도 언급하지 않은 불교만의 고유한 사상이다.

둘째, 정서적 측면에서 보면 초기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윤리적이고 인간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모든 종교는 악을 지양하고 선을 권장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모든 종교는 사회악을 뿌리 뽑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모든 악을 끊고, 뭇 선을 받들어 행하며,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붓다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Dhp. 183)라고 정의한다. 다른 종교는 윤리도덕에 만족하지만, 불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특수성이다.

그러나 유일신을 믿는 종교는 타 종교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고 공격적이다. 유일신 종교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성전(聖戰)’도 불사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한 전쟁’을 인정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사람의 생명은 물론 일체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금한다. 이와 같이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윤리적이고 인간적인 종교임은 부정할 수 없다.

셋째, 대사회적 측면에서 보면 초기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몇몇 종교는 지역이나 민족을 위해 성립되었지만, 불교는 특정한 민족이나 국가를 위한 종교가 아니다. 인도의 바라문교나 자이나교는 인도인을 위한 종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유대교는 유대인을 위한 종교로 남아 있다. 반면 불교는 세계의 모든 사람이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인 종교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불교의 승가에는 누구나 입단할 수 있도록 문호가 개방되어 있다.

이와 같이 초기불교는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이것이 타 종교 사상과 다른 불교만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초기불교에 귀 기울여야 한다.

3) 대승불교의 뿌리는 초기불교이다

셋째는 후대에 성립된 대승불교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초기불교를 공부해야 한다. 현재의 한국불교 속에는 대승불교의 다양한 신앙이 혼재되어 있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사상체계와 대승불교의 신앙체계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도 초기불교를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서 대승불교의 다양한 신앙의 뿌리도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 부처님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불교라는 종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한국불교는 역사적으로 대승불교의 전통을 계승해왔다. 한국불교는 외적으로는 대승(大乘, Mahāyāna)을 표방하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힌두교와 별로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중국불교에서 경전의 우열을 구분하기 위해 고안된 교상판석(敎相判釋), 특히 지의(智顗)의 오시교판(五時敎判)을 근거로 아함경(阿含經)은 낮은 수준의 사람에게 설한 가르침이라고 업신여기고, 초기불교를 소승(小乘, Hīnayāna)이라고 폄훼해왔다. 그러나 교상판석은 역사적 사실이 아님이 이미 오래전에 밝혀졌다. 그리고 대승 경전도 붓다가 직접 설한 것이 아님도 밝혀졌다. 대승 경전은 대승불교를 일으킨 자 혹은 대승적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에 의해 ‘찬술(撰述)’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자신이 대승 경전을 저술한 것이라고 밝히지 않고, 경전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석가모니불이 직접 설한 불설(佛說)이라고 가탁(假託)하게 되었다. 대승 경전 찬술자들의 부정직한 태도로 인해 많은 혼란을 겪었고, 불설과 비불설 논쟁을 초래하게 되었다.

어쨌든 대승 경전이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사상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후대에 성립된 대승 경전은 붓다의 가르침을 왜곡시킨 것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붓다의 고유한 사상인 무아론(無我論, anattāvāda)을 유아론(有我論, attāvāda)으로 해석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불교사는 무아론과 유아론의 대립과 갈등의 전개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적으로는 정통파인 바라문교와 비정통파인 사문 그룹과의 대립이었고, 내적으로는 불교도들 사이에 있었던 무아론을 유아론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가 꾸준히 전개되었다. 이를테면 부파불교의 형성과 대승불교의 흥기는 무아론의 해석과 무관하지 않다.

신행적인 측면에서 보면 현재 한국불교는 힌두교 신앙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한국의 불교도들이 가장 선호하는 관세음보살은 힌두교의 시바(Sīva) 신을 불교적으로 전화(轉化)한 것이다. 또 타방불(他方佛)은 인도 종교의 범신론과 유관하다는 사실이 현대의 불교학 연구로 밝혀졌다. 실제로 힌두교도들은 붓다가 힌두교 비슈누(Viṣṇu) 신의 아홉 번째 화신(化身)이라고 믿고 있다. 또 그들은 불교가 힌두교의 일파(一派)라고 여긴다.

대승불교에서 신앙이 되는 관음보살이나 문수보살 등은 힌두교의 신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를테면 《숫따니빠따(Suttanipāta, 經集)》의 《왕기사 숫따(Vaṅgīsa-sutta)》에 “신들 가운데 천 개의 눈을 가진 제석천처럼(sakko va devānaṃ sahassanetto)”(Sn 346)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전재성은 “‘천 개의 눈을 가진 제석천’은 후세의 대승불교에 나오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의 원류가 된다.”라고 했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에서 널리 신앙 되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은 ‘천 개의 눈을 가진 제석천’에서 유래된 것이다.

《사낭꾸마라 숫따(Sanaṅkumāra-sutta)》(SN 6:11)에 사낭꾸마라 범천이 붓다를 찬탄하는 게송이 나온다. 사낭꾸마라(Sanaṅku-māra)는 ‘항상(sanaṃ) 동자(kumāra, 소년)인 자’라는 뜻이다. 주석서에 의하면 그는 전생에 머리를 다섯 가닥으로 땋아 다니던 소년이었을 때 선(禪)을 닦아서 그 선의 힘으로 범천의 세상(brahm-aloka)에 태어나게 되었다. 그는 범천이 되어서도 동자의 모습으로 있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항상 동자 즉 ‘사낭꾸마라’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사낭꾸마라의 산스끄리뜨인 사낫꾸마라(Sanatkumāra)는 고층에 속하는 《찬도갸 우빠니샤드(Chāṇḍogya Upaniṣad, 7.26:2)》와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따(Mahābhārata, iii.185)》에도 나타난다. 또 니까야의 여러 곳에서도 사낭꾸마라 범천이 나타난다. 그는 신들 가운데 붓다께 귀의한 신으로 신들의 왕인 삭까(인드라)와 함께 자주 언급된다. 이 사낭꾸마라 범천을 대승불교에서는 동자의 모습을 한 문수보살로 신앙하고 있다.

대승불교는 불교사상의 저변을 확장해 보다 폭넓은 종교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반면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온갖 비불교적인 신앙까지 다 포용함으로써 결과론적으로 불교사상을 왜곡시키고 타락시킨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중국에서 선불교(禪佛敎)가 출현함으로써 기존의 교학적인 불교 전통까지 완전히 부정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인구에 회자되는 임제의현(臨濟義玄, ?~869)의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여라)’, 덕산선감(德山宣鑑, 782~865)의 ‘석가노자시건시곤(釋迦老子是乾屎棍, 석가 늙은이는 마른 똥막대기다)’,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의 ‘일봉타살여구자취(一棒打殺與狗子吹, 석가모니가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외칠 때 옆에 있었다면 한 방에 때려죽여 살덩이를 개밥으로 던져 주었을 것이다)’라는 파격적인 선언이다. 모두 부처와 조사라는 일체의 ‘우상(偶像)’에도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선사들의 파격적인 행보로 인해 불교의 정체성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중국에서 태동한 선(禪)은 산스끄리뜨 ‘드야나(dhyana)’의 음사 선나(禪那)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뜻은 완전히 다르다. “인도의 ‘dhyana’가 일정한 형태를 갖춘 집중적인 명상을 뜻하는 데 반해, 중국의 선 스승들이 체험하고 가르친 ‘선(禪)’은 존재 전체의 본질에 대한 깨우침 내지는 직관을 통한 자신의 본성품 자각을 뜻한다.” 후스(胡適, 1891~1962)는 “중국의 선은 인도의 요가나 드야나(禪那)에서 나온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에 대한 반동으로 생겼다”고 했다. 어쨌든 선과 드야나는 다르다는 점이다.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러한 형태의 선은 일찍이 인도에는 존재한 적이 없다”고 했다. 또 그는 선을 ‘깨달음의 교리를 중국적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중국 당나라 시대(618~906)의 선사들은 장자(莊子)의 사상과 정신을 계승한 이들이었다. 이들의 근본 통찰은 노장(老莊)사상과 거의 일치한다. 즉 “장자의 근본 사상이 바로 선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단지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장자는 순수 직관에 머물고 있는 데 반해 선은 그것을 ‘가장 본격적인 수련’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 선불교가 태동할 수 있었던 것도 대승불교의 폭넓은 포용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불교는 선의 본질도 잊어버리고 옛 선사들의 몸짓이었던 언행을 흉내 낼 뿐, 삶에 지친 중생들에게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듯, 대승불교의 성립과 전개 과정은 물론 대승 경전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초기불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승단은 승가갈마에 의해 운영된다

넷째는 현재의 불교 교단을 바르게 운영하기 위해 초기불교를 공부해야 한다. 특히 불교의 지도자들은 반드시 초기 경전인 니까야(Nikāya)와 아가마(Āgama, 阿含)는 물론 《율장(律藏, Vinaya Piṭa-ka)》에 정통해야 한다. 율장은 비구와 비구니가 지켜야 할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 pātimokkha)와 승가의 운영 방법을 자세히 제시해 놓은 건도편(犍度編, khandhaka)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사적으로 불교 승가는 승가갈마(僧伽羯磨, Saṅgha-kamma)에 의해 운영되어 왔다. 승가갈마는 오늘날의 ‘회의’에 해당하는데, 승가에서 일어나는 모든 중요한 사항은 승가갈마를 통해 결의하고 집행한다.

요컨대 불교 승가는 바라제목차에 근거를 둔 조직 체계이며, 바라제목차에 의해 통제되고, 승가갈마에 의해 운영된다. 따라서 바라제목차는 실체법이고, 승가갈마는 절차법이다. 이러한 실체법과 절차법을 통해 불교 승가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열반(평화)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한국불교는 붓다가 제정한 율장에 의해 운영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신심 돈독한 불자들과 사회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모두 불교 지도자들이 율장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한국불교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모든 승려가 의무적으로 율장을 배우도록 제도화해야 할 것이다. 특히 종무행정에 종사하거나 불교 지도자급 승려는 반드시 율장에 언급된 승가갈마에 대해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붓다가 제정한 율장에 위배되는 종헌이나 종법을 제정하지 않게 되고, 율장의 정신에 어긋나는 각종 제도를 새로 제정하지 않게 된다. 또 승가갈마에 정통하게 되면 승가 내부에서 일어나는 다툼, 즉 승쟁(僧諍)도 원만히 해결할 수 있다.

율장도 넓은 의미의 초기불교에 포함된다. 이 부분은 재가자에게는 불필요한 부분이지만, 승단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따라서 승려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초기불교와 율장에 대한 견해가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한 개인의 수행도 중요하지만, 불교의 운명을 좌우하는 불교 공동체의 발전도 병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3. 초기불교를 대하는 태도

초기불교를 대하는 태도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초기불교를 경계하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초기불교만이 최고라는 태도이다. 전자를 ‘초기불교 경계주의자’라 부르고, 후자를 ‘초기불교 근본주의자’ 혹은 ‘초기불교 지상주의자’라 부른다. 결론부터 말하면 둘 다 초기불교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그러면 왜 그들의 주장이 잘못된 견해인지 살펴보자.

1) 초기불교 경계주의자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초기불교를 경계하는 사람들, 즉 대승불교 옹호론자들이 내세우는 주장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은 다양한 시각의 통찰이 필요한데 초기불교에서만 그 근거를 찾으려는 것은 문제다. 둘째, 대승불교는 깨달은 사람의 말을 불설(佛說)로 인정하는 경전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대승 경전을 비불설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셋째, 모든 종교 현상은 역사적 문화적 산물이며 따라서 대승 시대에 제시된 관음 · 정토 · 지장 · 미륵신앙을 정법주의 잣대로 재서는 안 된다.

첫째는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을 초기불교에서 그 근거를 찾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사실, 즉 불교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후대에 성립된 다양한 사상도 정법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주장대로 따르면 불교의 정체성은 모호해진다.

둘째는 깨달은 자가 설한 것은 모두 불설로 인정되어야 하며, 그 설한 것도 ‘법성(法性)’, 즉 진리에 어긋나지 않으면 모두 불설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외도(外道)가 설한 것도 ‘법성’에 어긋나지 않으면 불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대승 경전의 성립사를 굳이 외면하고, 인도와 중국에서 만든 위경(僞經)까지 불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지성인의 자세가 아닌 것 같다.

셋째는 대승불교에서 비롯된 다불다보살(多佛多菩薩) 신앙을 정법주의 잣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모든 종교 현상은 역사적 문화적 산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신론이나 다신론은 물론 도교와 민간신앙까지 불교 신앙이라고 받아들여서야 되겠는가?

한편 학담 스님은 그의 저서 《아함경 강의》에서 초기불교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고조되면 세 가지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첫째, 《아함경》과 초기불교의 연구가 교조화되면 자칫 불교철학의 속류화와 연기론의 단순 소박화에로 돌아갈 위험성이 있다는 점이다. 둘째, 초기불교의 연구를 오늘의 삶의 문제를 풀어가는 실천적 관점에서 출발하지 않고, 단지 원시불교를 회고하고 초기교단의 생활상에 복고하려는 학풍이 갖는 위험성이다. 셋째, 초기불교의 연구가 이미 다변화되고 다양화된 대승불교와 중국 종파불교의 사상과 신행 체계를 살리는 방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첫째는 초기불교 연구의 교조화(敎條化)를 염려하고 있다. 교조화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리인 듯 믿고 따르게 됨. 또는 그렇게 함”이라고 국어사전에서 풀이하고 있다. 또 그는 초기불교 연구가 교조화되면 자칫 불교철학의 속류화와 연기론의 단순 소박화에로 돌아갈 위험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불교에서는 어떠한 도그마도 허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초기불교를 정확히 이해하게 되면 후대에 발전한 대승불교의 사상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는 상승효과를 가져올 뿐, 결코 위험성을 초래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초기불교의 연구를 오늘의 삶의 문제를 풀어가는 실천적 관점에서 출발하지 않고, 초기교단의 생활상에 복고하려는 학풍이 갖는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초기불교 연구는 실천수행론을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실천 없는 앎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담 스님은 초기교단으로의 복고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지만, 현재의 한국불교를 2,600여 년 전 붓다시대의 불교로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런 일은 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다.

셋째는 초기불교의 연구가 이미 다변화되고 다양화된 대승불교와 중국 종파불교의 사상과 신행체계를 살리는 방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역사적 성과물과 사상의 축적물을 조화하여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단일한 기반으로 묶어내는 데 기여해야지 전통과 사상의 축적물을 부정하는 데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대승불교는 시간이 경과하면서 다양한 사상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역사적 전개 과정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변천 과정에서 붓다의 본래 가르침을 왜곡시킨 부분까지 수용하는 오류를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2) 초기불교 근본주의자

국내에서 빨리어로 전승되어온 니까야(Nikāya)가 번역되면서 초기불교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초기불교에 호감을 느끼고, 초기불교를 공부하면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들은 초기불교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 초기불교 외에는 불교가 아니라고 대승불교와 밀교 신행자들을 공격하기도 한다. 

특히 이들은 한역으로 번역된 아함경(阿含經)보다는 빨리어로 전승된 니까야를 더욱 신뢰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니까야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모두 역사적 사실이라고 문자 그대로 믿는다. 또 이들은 니까야는 오류가 전혀 없는 붓다의 친설이라는 믿음을 확고하게 갖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부류의 사람을 ‘초기불교 근본주의자’ 혹은 ‘초기불교 지상주의자’라고 부른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대승불교의 사상이나 신행체계를 부정하고 공격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초기 경전인 니까야와 아가마도 부파불교 시대에 편집된 것이기 때문에 수많은 증광개변의 과정을 거쳤다. 또 일부의 초기 경전에는 후대에 성립된 대승불교 사상까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현존하는 니까야에 오류가 없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현존하는 니까야는 가장 보수적이었던 테라와다(Theravāda)에서 완전한 형태로 전승해온 것이다. 반면 현존하는 한역 아함은 여러 부파에서 전승해온 것을 중국에서 번역했는데, 우연히 사아함(四阿含)을 구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를 초기불교로 여긴다거나 빨리 니까야를 붓다의 직설(Buddhavacana, 佛語)로 간주하는 것은 학문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현존하는 초기 경전에서 붓다의 원음을 찾는 노력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4. 닫는 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기불교에 주목해야 할 까닭’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불교의 바른 신행을 위해 초기불교를 공부해야 한다. 둘째는 붓다시대의 종교 · 사상계의 동향은 물론 붓다의 가르침이 타 종교 사상과 어떻게 다른가를 파악하기 위해 초기불교를 공부해야 한다. 셋째는 후대에 성립된 대승불교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초기불교를 공부해야 한다. 넷째는 현재의 불교 교단을 바르게 운영하기 위해 초기불교, 특히 《율장》을 공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율장》에 정통해야 승단을 바르게 운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국불교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이 먼저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승단과 사찰을 운영한다면, 현재의 한국불교는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를테면 현재의 불교 신행 속에 내포되어 있는 비불교적 요소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고, 붓다가 이룩하고자 했던 이상적인 상가와 불교공동체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초기불교를 지나치게 경시하거나 경계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또한 초기불교를 지나치게 추켜세우거나 초기불교 외에는 불교가 아니라고 고집하는 것도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중도(中道, majjhimā-paṭipada)의 입장에서 보면, 둘 다 초기불교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 없다. ■ 

 

마성 ripl@daum.net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 불교사회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철학석사, M.Phil).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서 〈삼법인설의 기원과 전개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동국대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저서로 《마음비움에 대한 사색》 《잡아함경 강의》 《초기불교사상》 《동남아불교사》 등이 있으며, 50여 편의 논문 발표. 제1회 불교평론 뇌허불교학술상 수상. 현재 팔리문헌연구소장.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