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필자는 2년간의 토목기사 생활을 접고 불교계에서 일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그해 기자를 모집한 불교신문에 응시해 낙방의 아픔을 맛봤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아픔이 이듬해(1988년) 초 창간한 법보신문 공채 1기 시험에 합격하는 토대가 되었다. 낙방 이유가 ‘성적은 좋지만 토목과 출신이 기자를?’이었는데, 법보신문에서도 똑같은 경우가 발생하자 심사를 맡았던 분들이 고심 끝에 ‘원칙대로 성적순’에 합의했다는 것이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군 단위 대회에서 상을 받는 등 글재주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후로는 글쓰기와 무관한 삶을 살았던 터라, 온종일 기사를 써내야 했던 수습 시절이 적잖이 힘겨웠다. 선원빈 편집국장과 주필 정휴 스님으로부터 혹독한 조련 과정을 겪으며 조금씩 글쓰기에 눈을 떴다. 열심히 기사를 작성해 올리면, 잘 읽어보지도 않고 원고지가 구겨져 휴지통에 처박히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지금이야 기자를 만들기 위해 악역을 마다하지 않은 그분들이 고맙기 짝이 없지만, 그땐 얼마나 야속하고 얄미웠던지…….

불교신문만이 우뚝했던 당시의 불교언론 지형에서 법보신문의 등장은 안팎의 주목을 받았다. 발행인 월산 스님의 창간 취지가 ‘불교계에도 비판적 정론지가 필요하다’는 것이어서 취재와 보도에 큰 제약은 없었다. 창간 취지대로 진보적 논지를 지향하면서 정론지로서 정체성을 갖춰나갔다. 젊은 혈기로 과하다 싶은 기사가 작성되어 데스크에 올라가도 별다른 제지는 없었다. 훗날 알고 보니, 기자들의 기세를 살려주려는 국장과 주필의 배려였다. 

창간 당시 목표는 불교신문을 넘는 것이었다. 1년 안에 질과 양에서 우위를 차지하자는 결기로 똘똘 뭉쳤다. ‘사건이 있는 현장엔 어김없이 법보신문 기자가 있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심층 분석과 다각적 취재로 차별 있는 기사를 생산하기 위해 밤을 지새운 적도 많았다. 신생 언론사여서 참고할 자료가 없었고, 기자 절반이 초짜인 현실에서 몇 배의 노력이 필요했다. 돌이켜보면 30년 기자 생활 중 이때만큼 치열했던 적은 없었다. 

성장해가는 동안 길잡이를 해준 선 국장은 잊지 못할 스승이다. 뛰어난 감각과 빼어난 문장력을 다 갖춘 분으로 기자들의 언덕이자 롤 모델이었다. 신문을 펼쳐놓고 빨강 색연필로 상하좌우 쓱쓱 그으면 그대로 멋진 레이아웃이 되었다. 소매를 걷어 올리고 기사를 교정하던 국장의 열정은 후끈했다. 마냥 무서웠던 정휴 스님과 혼쭐 난 기자를 따뜻하게 감싸주던 상임논설위원 오현 스님은 이제 와 생각하니 기자들에게 부모와 같은 분이었다. 

기자로 일하며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절망과 보람이 교차한 세월이었다. 절망이 밀려올 때면 수습 시절 선 국장에게서 들은 ‘남산론’ 즉 “남산은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면 오물이 즐비하다. 오염된 곳을 바로잡는 것이 기자의 역할이다.”라는 말을 떠올렸다. 흐름을 통찰하는 안목을 갖게 해준 분이 선 국장이었다면, 수행의 가치를 파악해 하나의 기획물을 생산하는 능력을 길러준 분은 정휴 스님이었다. 

어느 날, 정휴 스님은 필자에게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사들의 삶과 사상을 조명하는 기획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자료를 수집하고, 행적과 일화를 추적 · 발굴하며 연재에 들어갔다. 연재 시작부터 주목받았던 이 기획은 《선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돼 호평을 받았다. 

종단에 큰 분쟁이 일어나면 우스갯소리로 ‘종군기자’가 되어 현장을 누볐다. 종단정치 취재에 염증이 생기면, 수행이나 신행 분야의 취재를 자청해 귀감이 되는 불자들을 만나는 호사를 누렸다. 학술, 문화재 등 또 다른 분야의 취재를 자청, 의식적으로 시야를 넓혔다. 

기억에 남는 건 1990년대 초반 교계 언론 처음으로 ‘문화재 담당’ 기자가 된 것이다. 지정문화재의 70% 이상이 불교문화재인데 전담기자가 없는 것은 문제라는 생각으로 국장에게 지면 배정을 요청해 허락받고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연구소를 찾아가 출입신고를 했다. 1996년 다람살라에서 달라이라마를 인터뷰한 것, 2002년 8일간 북한을 방문해 보현사, 안국사, 성불사 등 9개 북한 사찰을 취재한 것도 잊지 못할 보람이다. 

기자 17~18년 차가 되었을 때, 신문사가 설립 주체인 불국사로부터 독립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찾아왔다. 이때의 복잡한 전후 사정을 일일이 밝힐 수는 없지만, 본의 아니게 신문사 대표직을 맡았다. 2년 후, 지친 심신을 추스르고자 입사 20년을 퇴사 명분으로 삼아 신문사를 나왔다. 

몇 달 휴식을 취한 후 이듬해인 2008년 인터넷 신문 ‘미디어붓다’를 설립해 다시 취재 일선에 복귀했다.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찾은 현장은 어색했지만 행복한 공간이었다. 10년 동안 미디어붓다 대표기자로 일하며 맘껏 기사 쓰고, 시인으로 등단하는 등 보람도 컸다. 수익모델을 찾지 못해 고전하면서도 수행, 초기불교, 불교학, 불교문화(재)와 불교문학 분야 등에서 의미 있는 콘텐츠를 생산하고자 노력했고, 미붓아카데미를 설립해 불교인문학을 진작시키기도 했다. 5년 전 은퇴를 결심하고 귀촌한 뒤 당진의 한 산골에서 밭농사를 지으며, 인연 닿는 매체에 기고도 하고 책도 내는 ‘글 농사’를 병행하고 있다. 

“산골에서 뭐 해요? 대기자가 거기 계시면 됩니까? 불교계가 지금 얼마나 딱한 데…….” 가끔지인들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는다. 부족한 사람을 아직도 대기자로 불러주는 ‘고맙지만 눈먼’ 분들이다. 문제는, 그럴 때 ‘내가 아주 잘못 산 건 아닐지도 몰라……’라는 망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학종 / 전 미디어붓다 대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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