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소설은 불교문학 진흥과 새로운 콘텐츠의 개발을 위해 ‘재단법인 보덕학회’의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1. 쿠시나가르의 살라나무 숲. 나무마다 때아니게 일찍 살라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다섯 개의 꽃잎은 촘촘히 맺혀 반짝반짝 윤기가 났다. 길쭉한 잎은 말의 귀를 닮아 있었다. 바람이 불자, 나뭇잎부터 먼저 흔들렸고, 마치 수천 마리의 말이 무리를 지어 들판을 달리는 듯했다. 비구들은 땅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살라 꽃잎은 몇 번 흔들리다 문득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장엄한 꽃비 속에서 샤카무니 붓다가 열반했다.말라 국의 수
✽불교소설은 불교문학 진흥과 새로운 콘텐츠의 개발을 위해 ‘재단법인 보덕학회’의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1.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겠노라, 힘깨나 쓰는 자들이 깃발을 쳐들고 설치는 시절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삼한 땅에서 스님들의 운수행각을 가로막는 법은 없었다. 임금에서부터 무지렁이 백성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을 하늘처럼 섬기는 세상이었다.속세를 벗은 스님이라도 누군가와 연락 주고받을 일은 있게 마련이었다. 저절로 소식을 모으고 나누는 거점 사찰이 정해졌다. 서라벌에서 해변으로 이어지는 설악산의 신흥사, 대관령을 넘어 내륙으로 파고드는
✽불교소설은 불교문학 진흥과 새로운 콘텐츠의 개발을 위해 ‘재단법인 보덕학회’의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소맷자락이 유난히 넓은 도포를 펄럭이며 한 사내가 법당을 지나 요사채 쪽으로 걸어갔다. 어디로 가려는 것인가. 승방으로 가려다 말고 범해는 사내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요사채 뒤편으로 난 산 길로 가려는 것인지, 쪽문을 열고 암자로 들어서려는 것인지 종잡 을 수 없다. 그런데 사내가 쪽문을 연다.“이보시오. 거긴 출입이 금지된 곳이오.”암자의 뜰로 성큼 나서는 사내를 뒤따르며 범해가 그를 제지했 다. 그제야 그는 뒤돌아섰다. 8월
✽불교소설은 불교문학 진흥과 새로운 콘텐츠의 개발을 위해 ‘재단법인 보덕학회’의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 월즈라는 선배가 있다. 구라는 심하지 않은데 뻥이 있다.구라와 뻥의 차이도 그가 말한 거였다. 서사가 있으면 구라, 없으면 뻥.그는 자기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있다고 했다. 그게 열리면 바람과 물의 저항을 적게 받아 뭍에서든 바다에서든 누구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술 먹고 자신이 행여 쓰러지는 응급상황이 생기더라도, 불편하게 둘러업거나 그러지 말고 구멍에 장대를 넣어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을지병원으로 달려가
✽불교소설은 불교문학 진흥과 새로운 콘텐츠의 개발을 위해 ‘재단법인 보덕학회’의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포카라에 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 금희는 승문이 보낸 메일을 받았다. 연락이 끊어진 지 거의 9년 만이었다. 잘 지내나?나는 스리랑카에 있어. 미얀마에서 정식으로 계를 받고 출가했다가 비자 문제 때문에 이쪽으로 옮겨왔어. 재작년에 어느 한국 스님이 태블릿을 하나 사다 줘서 잘 쓰고 있다.버스를 타고 세 시간만 오면 되는 가까운(!) 사원에 와이파이가 있어.모처럼 여유 있게 혼자 앉아 한국 소식이 궁금해서 메일 쓴다. 수요일까지
소나무 숲의 평상오래된 공원 테니스코트 뒤편 낮은 언덕 위, 밑동이 굵은 늙은 소나무들이 십여 그루 서 있다. 땅에 솔잎이 깔려 있고 송진 냄새가 바람결에 퍼진다. 테니스코트는 2면인데 클럽 회원이 80명을 넘어 주말은 늘 붐빈다. 은퇴자들이나 자유업 종사자들은 평일 낮에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시간을 정해 코트에 나간다.45세 프리랜서 작가인 나는 화 · 목요일 오전에 시간이 나서 아버지뻘인 70대 원로들과 공을 친다. 전직이 해군 함장, 고급관리, 교수, 소방서장, 의사, 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사람들이다. 모두 구력(球歷)이 30년
✽불교소설은 불교문학 진흥과 새로운 콘텐츠의 개발을 위해 ‘재단법인 보덕학회’의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1.1367년 시월 그믐, 자시가 지난 시각이라 사방이 지척을 분간하기 힘든 어둠에 묻혀 있었다. 문틈으로 들어온 찬바람이 등촉을 건드리자 별실에 모인 열한 명의 그림자가 벽에 어른거렸다. 첨의재상 오인택의 집이었다. 내로라하는 전직 현직 고려 핵심 세력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전에 뭐라고 했습니까? 지금, 그 근본 없는 중놈이 나라를 망치고 있지 않습니까? 응양군 상호군 조린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애
✽불교소설은 불교문학 진흥과 새로운 콘텐츠의 개발을 위해 ‘재단법인 보덕학회’의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섣달 스무엿샛날 밤. 시동이 걸린 차가 움직인 시간은 정확하게 아홉 시였다. 강변북로의 정체가 풀릴 즈음인 여덟 시 반쯤 떠날 예정이었지만 고양이 세 마리를 이동 상자에 넣고 차의 뒷자리에 태워 안전벨트를 묶는 일에 시간이 걸렸다. 정작 우리의 짐은 벌써 낮에 실어뒀었다. 고향 간다고 기쁨에 들뜬 내가 서너 번이나 주차장에 다녀와 우리는 몸만 나가면 됐다. 설 명절을 고향인 양양에서 쇤다는 결정에 일흔다섯 살의 늙은 몸과 맘은 고
✽불교소설은 불교문학 진흥과 새로운 콘텐츠의 개발을 위해 ‘재단법인 보덕학회’의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둔황에서 서쪽으로 1,500km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만났다. “니마……!” 그녀의 얼굴은 조심스러움과 놀라움, 반가움으로 뒤섞여 있었다. 나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맥주잔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유리컵이 시멘트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났다. 수젠…… 나는 속으로만 그녀의 이름을 소리 내었다. 그녀를 다시 만나리라고는 모래알보다 더 작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서로 알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는 듯, 일리가 눈을 커다랗
✽불교소설은 불교문학 진흥과 새로운 콘텐츠의 개발을 위해 ‘재단법인 보덕학회’ 후원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비로암은 지리산 천왕봉 바로 아래쪽, 등산길에서 30여 분 정도 벗어난 산자락에 있었다. 전문 산악인들만 드물게 들를 뿐 일반 등산객들은 찾기 힘든 곳이었다.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숨겨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주차장에서 ‘경상남도 환경교육원’을 거쳐 법계사까지는 그래도 걸어 올라가기가 수월한 편이었다. 그러나 법계사 위쪽 천왕봉 가는 등산길에서 비로암으로 가려면 너덜겅 초입부터 신경
1.베이징 수두우 공항경광등이 돌연 빨간 불빛을 번쩍이며 요란하게 울었다. 출국심사관이 들어앉은 칸막이 위에 붙은 것이었다. 심사를 대기하거나 심사를 막 통과한 일행들이 심사관 앞에 선 보현에게 일제히 눈길을 돌렸다. 주제넘게 굴더니 잘 걸렸어. 그런 말이 보현의 귓속으로 넘실넘실 파고들었다. 보현은 얼굴이 더욱 화끈거렸다.심사관과 같은 녹색 제복을 입은 사내가 다가왔다. 경광등이 번쩍인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안다는 태도로 칸막이 안으로 손을 내밀어 심사관에게서 보현의 여권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보현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
순천 송광사를 찾는 사람들은 극락교(極樂橋)와 능허교(凌虛橋)를 건넌다. 무지개 모양으로 쌓아 올린 이 두 돌다리 위에는 팔작지붕을 한 화려한 회랑(回廊)이 세워져 있다. 극락교에는 청량각(淸凉閣), 능허교에는 우화각(羽化閣)이다. 청량각은 일주문 밖에, 우화각은 일주문 안에 있다. 마음을 맑게 씻고(淸凉) 일주문을 들어가면 한 마리 나비가 되어(羽化) 자유로이 허공을 날아오른다. “김 선배, 뭐해요? 얼른 들어가야 해요.”앞서 우화각을 건너간 사진기자 박선태가 회랑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때까지 소설가 김진우는
국문장에 붙들려 온 천진암 스님들“머리 깎은 저것들은 무엇이냐?”대왕대비(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노기 서린 목소리가 국문장 기둥을 흔들었다. 대왕대비의 분노에 기름을 붓듯 의금부도사는 억센 목소리로 아뢰었다.“요사스러운 악행을 저지른 천주사학 패거리를 수년간 숨겨준 자들이옵니다. 사악한 무리들과 동거하며 그들이 강학이란 이름으로 혹세무민하는 음모를 꾸미도록 도와준 자들이옵니다. 어제 의금부에서 잡아들였습니다. 이들의 소굴 천진암은 부수어버렸사옵니다.”“간적의 무리를 숨겨주고 놀이판을 만들어주었다고? 어허, 국법 무서운 줄 모르는
그해 봄날은 쓸쓸했다. 해마다 봄이면 그랬듯이 봄인데 왜 이렇게 추운 거야 하며 투덜거렸고 날씨는 아직 쌀쌀한데 홀로 먼저 피어나는 산수유나 목련 꽃을 보면서 봄이 오긴 왔구나 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개학을 맞은 교정은 활기가 넘쳤지만, 한낮에도 그늘 속에 들어가면 사뭇 서늘한 기운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강의가 없는 시간이면 도서관에 가는 대신
✽불교소설은 불교문학 진흥과 새로운 콘텐츠의 개발을 위해 ‘재단법인 보덕학회’의 후원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40년 전 얘기다. 남편이 한 달째 말을 하지 않았다. 아내가 얼마나 미우면 저럴까.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정말이지 오늘은 가자. 어차피 죽을 목숨, 한 푼이라도 덜 낭비하자. 서울 대학병원에서도 모르겠다면 답이
희명 스님, 아니 은사 스님이 입적했다는 것을 알았다.감나무 이파리가 늦가을 바람에 아픈 소리를 내며 절 뒷마당에 굴러다니고, 노란 유자들이 주렁주렁 달린 고목 유자나무 위로 서늘한 가을 하늘이 파랗게 걸려 있던 날이었다. 절 뒷방 툇마루에 잠깐 나와 앉아 있을 때, 주소 띠지도 뜯지 않은 불교 신문이 있기에 무심코 신문을 펼쳤더니 희명 스님의 입적 소식을
여진이 버스에서 내리자, 친절하게도 운전기사는 벌써 짐칸에서 회색 캐리어를 꺼내 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가 든 데다 이런저런 이유로 몸이 굼떠진 탓이었다. 거기다 두 다리가 급할 때면 꼭 태를 내곤 했다. 그녀의 눈길이 한 차례 도로에서 절로 난 길을 따라 깊숙이 들어갔다가 돌아왔다. 꼭 쉰 해 만이었다.버스가 영산호 너머의 종점인 ‘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