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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즈라는 선배가 있다. 구라는 심하지 않은데 뻥이 있다.

구라와 뻥의 차이도 그가 말한 거였다. 서사가 있으면 구라, 없으면 뻥.

그는 자기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있다고 했다. 그게 열리면 바람과 물의 저항을 적게 받아 뭍에서든 바다에서든 누구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술 먹고 자신이 행여 쓰러지는 응급상황이 생기더라도, 불편하게 둘러업거나 그러지 말고 구멍에 장대를 넣어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을지병원으로 달려가는 게 쉬울 거라고도 했다. 학교 앞 단골 술집과 대전을지병원까지는 백 미터 거리였다.

“니 눈에는 명치로 보일 게다. 주먹으로 한번 힘껏 쳐봐라.”

처음 본 날 술집에서 그는 나에게 자신의 가슴을 내밀었다. 명치에 닿는 순간 내 주먹이 구멍으로 빨려들 거라고 했다. 키만 컸지 선배는 지나치게 빼빼했다. 진짜로 때렸다가는 심장마비로 죽을 것 같았다.

군에서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하니 국어교육학과 같은 학년에 월즈 선배가 있었다. 나보다 학번이 3년 늦었고 나이는 네 살이나 많았다. 학번보다 우선하는 게 대한민국의 영원한 장유유서라서 모두가 그를 형이라고 불렀다. 나만 선배라고 했다. 그냥 그러고 싶어 그랬는데 그도 그에 대해 뭐라 하지 않았다. 어디서 무얼 하다 뒤늦게 대학에 입학했는지는 모르나 그에게는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 행성인의 면모 같은 게 있었다. 그는 ‘비 내리는 고모령’ 같은 트로트를 좋아했다. 

“에이, 살살 치니까 그렇잖아.”

내 주먹은 그의 명치에 막혀 더는 나아가지 않았다. 살살 친 것도 아니었다. 살살 쳤다가는 내 말이 말 같지 않으냐며 으르렁댈 것 같아서 제법 치는 것처럼 쳤다. 주먹이 그의 명치뼈에 툭 하고 닿는 순간 너무 세게 쳤다는 각성이 일었다.

그러나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표정 변화도 없었다. 가슴에 있다는 게 구멍이 아니라 엄청난 맷집 같았다. 혹시 아프면서도 죽어라 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을 때, 그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책을 꾸리거나 종이박스를 묶을 때 쓰는 빨간 비닐 끈이었다.

“잘 보라구.”

그는 비닐 끈의 한끝을 셔츠의 단추와 단추 사이로 밀어 넣더니 그것을 눈 깜짝할 사이에 등 뒤로 빼냈다. 계속 빼냈다. 정말로 가슴에 구멍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등으로 빼내던 비닐 끈을 어느 순간 거꾸로 가슴 앞쪽으로 빼냈다. 그러다 톱질하듯 앞뒤로 번갈아 밀고 당겼다.

가슴에 구멍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야 할지 그의 마술에 웃어야 할지 나는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다.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건, 콧수염 거뭇거뭇한 예비역 복학생과 네 살이나 더 많은 선배라는 사람이 벌이는 객쩍은 광경이 어이없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시와 소설을 배우고 그것을 중등 과정의 학생들에게 가르칠 국어교육학과 학생에게 ‘가슴에 난 구멍’이라면 당연히 은유였다. “작가는 가슴에 구멍이 난 사람이다. 그 구멍을 언어로 메운다.”정도라야 미래의 국어 교사에게 어울리지 않았을까. 그런데 빨간 비닐 끈이라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월즈라는 선배의 별명도 어이없음에서 나온 거였다. 선배가 어느 날 동네 레코드 가게인 ‘조치원 랩소디’에 갔다. 지구레코드사의 심수봉 골든 디럭스 음반을 사러 갔는데 마침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가게 주인에게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아저씨, 월즈 있어요?” 주인은 대답하지 않았고, 선배는 심수봉 음반의 한껏 멋을 낸 타이틀 곡명 디자인을 한 자 한 자 눈으로 훑었다. ‘당-신-은-누-구-시…’ 그러나 여학생의 거듭되는 질문에 타이틀 곡명을 다 읽지 못했다. “월즈 있어요?” 주인과 선배의 시선이 여학생을 향했다. 여학생은 꿋꿋했다. “월즈요.” 한참을 갸웃거리던 주인이 마침내 음반 한 장을 꺼내 학생에게 보여주었다. 학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음반을 받고 계산을 한 뒤 레코드 가게를 나섰다.

이 에피소드를 선배는 몇 번이나 우려먹었다.

“그 음반이 뭐였는지 알어? 에프 알 데이비드의 워―즈였어.”

선배는 일부러 워를 길게 발음했다. 한국 가요밖에 모르는 자신도 워―즈 정도는 안다면서, 꿋꿋했던 여학생을 공연히, 몹시, 가엽게 여겼다. 그 뒤로 선배는 누군가 어이없는 짓을 한다 싶으면 영락없이 “헛, 참. 얀마. 너, 월즈다, 월즈!”라며 혀를 찼는데, 그러는 그가 외려 어이없어서 친구들은 그를 월즈 형, 나는 그를 월즈 선배라고 불렀다. 물론 그의 면전에서는 월즈를 슬쩍 뺐지만.

선배가 나를 조치원으로 불렀다. 지난 2월 4일. 입춘이어서 그날을 기억했다. 7개월 만에 만나는 거였다.

“너 미호천 알지?” 그가 전화로 물었다. “조치원 우리 집에서 장욱진 생가 갈 때 너랑 함께 건넜던 하천 있잖아.”

나는 안다고 대답했다. 다리를 건널 때 장욱진의 ‘나룻배’가 미호천을 그린 거라고 선배가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선배가 한참 뜸을 들이더니,

“그 미호천이 말이다,”

하고 심각해졌다. 까닭을 알지 못했던 나는 선배의 다음 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몇 초간 더 뜸을 들이더니,

“미호강이 됐다.”

하고 선배가 말했다.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나는 “그…래서요?”라고 물었고, 선배는 마지막 숨을 토하듯 “승격이 됐단 말이다.”라고 말했다.

비로소 나는 선배의 마지막 말에서, 오래되어 찌들었으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지겨운 학창 시절의 냄새를 맡았다.

천에서 강으로 승격이 되었으니 어찌 축배를 들지 않을 수 있겠냐는 게 전화의 용건이었던 것이다.

재학 시절에도 그런 식이었다. 한때 계엄군이었던 예비역 복학생들은 매일 최루탄 자욱한 교문을 도망치듯 빠져나와 술 마실 핑계에 골몰했다. 마침 독립기념관의 충남 도내 건립이 확정되었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충남 소재 대학에 적을 둔 학생으로서 축배를 들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고 환호했다. 축배만 있었던 게 아니라, 세계 라이트급 복싱 챔피언 김득구가 라스베이거스 링에서 사망했을 때는 애도의 잔을 들었다. 기념하거나 추도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라는 건 없었다. 과학의 날, 재향군인의 날, 김유정 기일, 카잔차키스 기일….

그러니까 이번에도 술 마시자는 거였다. 미호천이 미호강이 된 기념으로. 월즈 선배는 여전히 월즈였다.

 

“너도 그런 게 있냐?”

소주 한 병을 비운 뒤 월즈 선배가 말했다. 질문이 아니라 자기 말에 주목해 달라는 뜻이었으므로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나는 말이야, 이걸 먹기 위해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어.”

탁자 위의 음식을 말끄러미 내려다보며 그가 말했다.

“달걀찜을요?”

“계란찜이라고 하지 누가 달걀찜이라고 하냐?”

“달걀찜이든 계란찜이든, 보잘것없는 것과 인생을 과장되게 등치시키는 선배 버릇은 여전하네.”

선배와 버릇 사이에 넣으려던 ‘경솔한’이라는 말은 뺐다.

“보잘것없는 것과 보잘 것 있는 것을 분별하는 네 버릇은 여전하잖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없어요, 나는 그런 거.”

얼른 대답하면서도 나는 머릿속으로 내가 가장 선호하는 안주는 무얼까 빠르게 떠올렸다. 아닌 게 아니라 없었다.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는지도, 아니면 어떤 안주든 다 무난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존재를 걸고 무언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였는지도.

“내 인생 안주가 계란찜이니 그럼 넌 달걀찜 해라.”

가슴에 구멍이 있으니 주먹을 질러보라던 40여 년 전과 하나도 다를 것 없는 실없는 대화였다. 이젠 모두 육십 중반을 넘긴 은퇴자들이었으면서.

어이없고 서글프면서도 한편으로는 정겨웠고 다행이다 싶었다. 미호천이 미호강으로 승격되었는데 어찌 축배 한잔 없을쏘냐 해서 만난 자리였다. 그래서 승격 일자가 요 며칠 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2019년이었다. 이 또한 월즈가 아닐 수 없었지만 월즈 선배라서 당연하기도 했고, 내가 보고 싶었던 것도 반듯한 선배가 아닌 바로 그런 선배였기 때문에 속옷과 양말 한 켤레만 챙겨 서울에서 내려온 거였다. 서언창가 고동소오리 옛님이 그리워도, 라며 그가 낮게 흥얼거렸다. 그의 노래는 옛날에 비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달걀찜을 굳이 계란찜으로 고쳐 말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나는 국어 선생으로서 아이들에게 계란을 되도록이면 달걀로 쓰도록 권했던 사람이고 그는 한문을 좋아하고 잘 썼던 데다 직업도 교사가 아니었다. 일찌감치 충남도청의 차트사로 취직을 해서 28년 만에 정규직 공무원이 되었고 5년 전 세종청사 조세심판원이라는 곳에서 퇴직한 사람이었다.

관공서에서도 컴퓨터를 활용한 실사 프린트가 주를 이루고 이미 오래전에 차트 대신 파워포인트를 썼기 때문에 그가 이름도 생소한 조세심판원에서 할 수 있었던 일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칠주의’나 ‘콘크리트양생중’ 같은 글자를 화급히 써 붙이는 일 말고는 할 일이 없다고 자조 섞인 푸념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런 글씨마저도, 보는 이로 하여금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 하므로, 있는 실력조차 발휘하지 않고 일부러 거칠게 써야 했노라고.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뻥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글씨를 잘 쓰고 한문을 잘 아는 것은 사실이었다. 노래도 춤도 별로고 공부도 축구도 그저 그랬던 그가 잘하는 것이라고는 한자 글자꼴 분석과 글씨 쓰기였다.

“틈이라는 말이 시간 개념일 것 같냐, 아니면 공간 개념일 것 같냐?”

방금 전에도 그는 소주를 털어 넣고 자신의 인생 안주라는 계란찜을 귀하게 떠먹으면서 물었다. 나는 그의 말이 이어지길 잠자코 기다렸다.

“벽돌 틈이라고 할 때는 틈이 공간 개념이고, 어느 틈에 사라졌다라고 할 때의 틈은 시간 개념이잖아. 틈이 원래 어느 쪽이었겠어?”

이럴 땐 그냥 그를 내버려 두어야 했다. 그는 젓가락 끝에 소주를 묻혀 탁자 위에 闖이라 쓰고 말했다.

“이걸 틈이라 읽거든.”

평생 국어 선생으로 늙은 나도 틈이 한자인 줄은 처음 알았다.

“봐봐. 말이 문 사이로 싸악 지나가는 걸 틈이라 하니 틈은 시간 개념이지. 눈 깜박할 사이. 말은 빠른 것의 상징이잖아. 휙!”

그러면서 아까 그쳤던 노래의 마지막 구절을 흥얼거렸다. 나아그네 흐르을 길은 한이 없어어어라.

그런 식이었다. 내가 그를 두 번째 만났던 것은 대전 성남동의 금강반야원에서였다. 오후 수업을 마치고 대학생불교연합 충남지부 대표 간사의 안내를 받아 처음으로 수요청년법회에 참석했는데 그곳에 선배가 있었다.

그는 대학생이었으나 대불련 소속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법회에 참석했다. 그것도 청중이 아닌 사찰 쪽의 스태프로서. 그는 스님의 설법을 도왔다. 그가 하는 일은 스님의 지시에 따라 경의 구절을 칠판에 적는 거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명부전 위패에 적힌 고인의 이름들도 그가 쓴 거였다.

그의 솜씨를 이미 알고 있던 대불련 회원들과는 달리 나는 반듯하되 거침없는 그의 글씨를 보고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스님이 굳이 그를 대필자로 삼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글씨가 하도 멋져서 판서하는 그와 월즈 선배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수업이 끝나면 대전역에서 통학 열차를 타고 조치원 집으로 돌아가는 그가 그 시각에 반야원에서 일필휘지할 줄이야.

“그런데 틈 얘기는 왜요?”

내가 물었고,

“니가 틈 얘기를 먼저 했잖아. 재취업 그거 끼어들 틈이 없대매? 연금 타는 놈이 더 무섭다니깐.”

뒤늦게 공무원이 되었으나 정규직 근속 연수 부족으로 그에겐 연금이 없었다. 그는 미나리 데침을 초장에 찍어 먹었다. 틈이라는 글자를 쓸 때도 그랬지만 술잔을 들거나 안주를 집을 때 그의 손목 놀림의 느낌은 남달랐다. 춤도 수영도 농구도 탁구도, 몸으로 하는 거라면 모든 게 젬병이었으나 손목 놀림만큼엔 색다른 스웩이 있었다.

“그건 그렇고, 진짜 미호강 승격 기념으로 술 마시자는 거였어요, 오늘? 그뿐이에요?”

내 말에 그는 허공에 굵고 큰 글씨를 쓰듯, 부드럽게 손목을 꺾으며 또 한 잔의 소주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술집의 폴딩 도어 밖으로 입춘의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이따가 그 다리를 건너보든가.”

혼잣말하듯 그가 중얼거렸다.

 

그 다리를 말하는 걸까. 그 다리라면 미호강을 건너는 대교가 아니었다. 조치원읍과 오송읍을 잇는 작은 다리 조천교였다. 미호강의 지류인 조천. 새 조, 내 천. 그곳에 놓인 전체 길이 90미터의 다리였다. 조천교에서 하류 쪽으로 10분쯤 걸어 내려가야 미호강이었다.

나는 그 다리를 기억했다. 내가 대불련 법회에 참석한 지 얼마 안 되어 월즈 선배와 처음으로 말다툼을 벌이던 날 튀어나왔던 다리였으니까.

당시 나는 몹시 불만스러운 대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제대하면 편입 공부를 해서 가족이 있는 서울로 올라가려 했으나 복학을 해 보니 처음 듣는 졸업정원제라는 게 있었다. 학생 수가 정원의 130퍼센트였다. 서울의 사정도 마찬가지여서 어느 대학에도 결원이 생기지 않았고 편입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멋모르고 계엄군 이력을 갖게 되어 어설픈 죄의식에 시달렸던 데다 학교는 연일 반정권 시위로 달아올랐다. 시위에 끼지도 못하고 술만 마셨지만 어디 한 군데 맘 편한 구석이 없었다. 게다가 채플 의무 출석일수가 모자라면 모든 과목을 펑크 내는 학교의 불신지옥식 학사 운영도 참을 수 없었고, 개신교를 제외하고는 가톨릭을 비롯해 어떤 종교 서클도 인정하지도 지원하지도 않는 학교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등록금은 모든 학생에게서 똑같이 받았으면서.

내가 대학생불교연합에 가입했던 것은 그러니까 계엄군의 죄의식과 감리교재단 학교에 대한 불만이 뒤범벅되어 나타난 결과였다.

“거기에 계엄군의 죄의식은 왜 껴?”

그때 선배가 했던 질문도 내가 했던 대답도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다.

“모싯잎떡 때문에요.”

뜨악해하는 선배에게 설명했던 것은 내가 겪은 10 · 27이었다.

새벽에 비상이 걸려 단독군장을 하고 어둠 속의 M60 트럭에 올랐다. 중대장의 작전명령은 위수지역 내 황악산 계곡에 도착해서야 내려졌다. 착검을 하고 절을 포위하라는 거였다.

수배 명단을 갖고 있던 중대장과 전투선임하사가 빠르게 경내로 진입했지만 스님 검거에는 실패했다. 실패는 동이 틀 때까지 계속됐다. 작전 정보가 새어 나간 거라고 중대장은 쌍욕을 쏟았다. 황악산의 다섯 개 암자까지 뒤진 뒤에 백화산 계곡으로 이동해 펼친 마지막 작전에서도 아무 성과가 없었다. 중대장은 식식거렸고 무심하게 떠오른 아침 햇살에 가을 단풍이 눈부셨다. 나와 중대원들이 탈진한 몸을 이끌고 일주문을 벗어나고 있을 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나이의 공양주 보살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커다란 찜통이 들려 있었는데 그 안에는 모싯잎떡이 한가득하였다. 조금 전에 저지른 만행을 까맣게 잊을 만큼 배가 고팠다. 감사하다는 인사가 미처 나오기도 전에 떡이 그 염치없는 입으로 들어갔다. 급히 먹은 모싯잎떡이 목구멍에 주먹처럼 얹혀 눈물이 핑 돌았을 때 나는 주체할 수 없는 모멸감에 휩싸여 뒤를 돌아보았다. 맑은 가을 계곡물에 일주문의 금빛 여섯 글자가 얼비쳤다. 모싯잎떡과 함께 그 이름을 오래 기억하겠노라 다짐했다. 백화산반야사.

“그 다짐이 겨우 이거냐?”

월즈 선배와 나는 언쟁 중이었다. 불교로 기독교를 치겠다는 발상 자체가 유치하고 불온하고 모독적이라고 그가 말했다.

“기독교가 아니라 기독교 재단 학교법인의 잘못을 치겠다는 거예요. 잘못을.”

그렇다고 학교 도서관 앞 잔디밭에서 한 자나 되는 목탁을 탕탕 쳐야 하겠냐고 선배가 나무랐다. 네가 뭔데 잘잘못을 따지냐며. 말이 나온 김에 나는 그동안 선배에게 따지고 싶었으나 참았던 것들을 쏟아냈다. 선배는 불자이면서도 언제나 대불련과 따로 놀았고, 잘난 개인주의고, 종교의 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내 말에 종교의 자유 좋아하시네 콧방귀를 뀌었고, 어느 쪽에서 말하든 해방과 정의 따위의 외침에 속지 말라는 둥 언제나 겁쟁이처럼 비겁하게 말했다고. 그리고 대들었다. 나의 다짐이 왜? 어때서?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학교 권력의 불합리에 맞서 목탁 치고 찬불가 부르는 게 어때서? 그리고 내 목탁이 어째서 한 자라는 거야? 내 목탁은 지름이 정확히 16.7센티거든. 어디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함부로 뻥을 쳐?

내 앞에서 한 번만 더 입을 놀려봐라. 모조리 자근자근 씹어줄 테다. 마음먹고 잡아먹을 듯 대들었는데 선배는 딱하다는 듯 쯧쯧 혀를 차고 일어나더니 집에 가야겠다고 했다. 할 말 없으니 떳떳하지 못하게. 나는 기세를 늦추지 않고 몰아붙였다. 왜 자리를 피하냐, 통학 열차 시간을 핑계로 논쟁에서 도망치려는 거 아니냐, 술 마시다가도 걸핏하면 말도 없이 혼자 사라지고, 조치원에서 매일 토끼 같은 아내가 기다리기라도 한다는 것이냐, 하고 말했을 때 그가

“어.”

라고 말했다.

“아내가 있다고?”

내가 다시 물었고 그가 대답했다.

“어.”

 

지리멸렬해진 싸움을 접고 선배와 금강반야원을 나와 버스 정류장까지 걸으면서 들었던 게 조천교라는 다리 얘기였다.

어느 날 조치원 친구들과 술을 먹다 자시에 조천교를 건넜는데 다리 너머에 금방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 같은 여자가 있었노라고. 그녀가 선배를 콕 집어 말하길, 남들 다 대학 다니는데 너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느냐,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가거라… 해서 뒤늦게나마 입학을 했노라고.

워낙 말의 절반이 뻥이라서 믿을 수 없었지만 조치원집에 두 살 연상의 아내가 있다는 데에는 나름 서사가 보여 조금은 신빙성 있는 구라 정도로 들렸다. 그런데 당시 스물아홉이었던 그에게 정말 아내가 있었다.

“선배는 왜 자정이라 하지 않고 자시라고 해요?”

조천교라면 천상의 선녀였다던 그의 아내 이야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2년밖에 되지 않아 그가 아직 사별의 아픔을 겪고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정이라는 건 없는 거잖아. 자정은 시각이고, 00시 00분 00초를 말하는 건데 아주 순간이잖아. 말이 순간이지 흐르는 한 실재하지 않아. 대신 자시는 밤 11시부터 1시까지니까 시각이 아닌 시간이야. 시간은 있고 시각은 없어. 그런데 나도 하나 묻자. 넌 왜 나를 남들처럼 형이라 하지 않고 선배라고 부르냐?”

갑작스러워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 그러는 것뿐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나 스스로도 석연치 않았다. 선배 같은 방식으로 그럴듯하게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넌 신중한 데가 있지.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고. 나에 대한 실수를 줄이려고 선배라 부른다는 거,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안다. 그런 니가 늘 고마웠어.”

나는 얼른 달걀, 아니 계란찜을 크게 한 스푼 떠서 입에 넣었다. 은근한 새우젓 맛에 혀 밑으로 침이 고였다. 문득 빗물통의 전설이 떠올랐다. 마시고 있는 술도 충청도의 옛 소주 ‘선양’ 맛이었다.

무모하긴 했지만 선양 한 병을 마시고 신학관 붉은 벽돌 건물의 빗물통을 타고 옥상에서 4층 창문으로 진입해 총장과 담판을 지었던 월즈 선배의 기백. 당시 대학 총장은 시위대를 피해 신학관 4층 교목실에서 문을 잠그고 있었는데 유격대 조교 출신이었다는(이것은 나중에 뻥으로 밝혀졌다) 선배가 원숭이처럼 빗물통을 타고 내려가 총장에게서 여섯 개 항의 합의문을 받아냈다.

월즈 선배의 ‘선양 거사’에 대한 온갖 소문이 돌았다. 읍소했다, 자해공갈했다, 월즈의 백부가 충남 연기군 지역구를 가진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의원이다, 총장 소유의 동양란 농장에서 그의 아내가 7년간 회계일을 맡은 적이 있다더라….

그러나 선배는 일절 함구해서 전설은 그야말로 빠르게 전설이 되었는데, 나는 그런 것 다 궁금하지 않았고 다만 여섯 개의 합의 항목 중에 모든 종교 서클을 인정하고 지원한다는 약속이 들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먹었다. 내가 반년 가까이 목탁 치며 싸워도 진척이 없던 일을 일거에 해결하다니. 어느 날 선배는 궁금해 안달하는 우리에게 ‘거사’에 관해 단 한 마디만 하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 한마디가 ‘나는 비겁했노라.’였다.

선배라고 부르는 건 자신에 대한 배려일 거라면서 나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그 앞에서 나는 자꾸 비겁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가슴에 구멍 있슈?”

오랜만에 사투리로 장난을 걸었다.

“야야, 그건 젊은 날의 치기였지. 산해경 좀 읽었다고 잘난 척을 한 건데 니들은 산해경이라는 책이 있는지도 모르더라. 그러니 관흉인에 대해서도 모를 수밖에. 그래서 그 책 내용을 적잖이 써먹으며 니들을 계속 놀린 거야.”

“그래서 지금은 구멍이 없다고?”

소주는 세 병째였다. 병 바닥에 남은 술을 그가 자신의 잔에 마저 따르며 웃었다.

“더 커졌지.”

 

조천교는 조치원읍과 오송읍을 잇는 다리인데 조치원읍은 충청남도고 오송읍은 충청북도였다. 월즈 선배와 그의 조치원 친구들은 늦도록 술을 마시다가 자정이 되면 헉헉거리며 조천교를 뛰어 건너곤 했다. 술을 더 마시려고. 자정이 넘으면 조치원에서는 통금 때문에 더는 마실 수 없었다.

오송읍엔 통행금지가 없었다. 전국 유일의 통금 없는 충청북도였으니까. 통금으로 국민의 이동권을 제한하면서, 해안선이 없다는 이유로 유일하게 충청북도만 숨통을 틔워주었다. 통금이 안보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정권은 충청북도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월즈 선배와 그의 친구들에게는 조천교가 통금 적발 방범대원을 보기 좋게 비웃어줄 엑소더스 통로였다. 술을 마시다가 어디선가 방범의 호루라기 소리라도 들리면 후다닥 술집을 뛰쳐나와 조천교로 내달렸다. 선배와 친구들은 그걸 미드나잇 런이라고 했다.

가끔은 조치원역에 내린 야간열차 하차객에게 다가가 조치원 경찰서장의 직인이 찍힌 ‘야간통행증’을 구걸한 적도 있지만, 집이 가까운 하차객 말고는 선뜻 통행증을 내주는 사람이 없어 한 번 쓴 통행증의 날짜를 위조해 다시 써먹다가 발각된 적도 있었다.

문 닫은 술집에 숨어 자정 너머까지 몰래 술을 마시다가 위조한 통행증을 들고 두리번거리며 밤길을 걷느니 차라리 훨훨 조천교 너머로 줄행랑을 치는 게 편하고 자유로웠다.

그렇게 미드나잇 런의 해방감으로도 충분할 줄 알았는데, 실핏줄까지 훤히 비칠 만큼 피부가 맑고 소주처럼 눈빛이 투명한 그녀(어쨌거나 선배의 지겹도록 거듭되었던 표현)가, 어느 쌀쌀하던 날 자시에 다리 건너 소머리국밥 집에서 샛노란 계란찜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는 거였다. 정말 사람이 아니었다고, 소주 마시는 선녀였노라고 평소의 선배답지 않게 단 일 퍼센트의 익살과 뻥도 섞지 않은 채, 순도 백 퍼센트의 유치함으로 말했다.

그녀를 만나 단박에 두 가지가 실현되었노라고 선배는 말했다. 둘 다 통행금지와 관련된 올나이트였다.

하나는 ‘통금이 없고 친구는 있는’ 즐거운 올나이트 파티였다. 크리스마스이브와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제야에는 통금이 풀렸다. 그런 날 청춘들은 악착같이 밤을 새우며 자유로이 술판을 벌였는데 애인을 동반해야만 파티다운 파티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녀로 인해 선배에게도 비로소 ‘즐거운 올나이트’가 처음으로 실현되었던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통금이 있고 친구는 없는’ 은밀한 올나이트였다. 자정 이후에는 집에도 돌아갈 수 없는 이동권 제한 조치가 통금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무단으로 외박했을 때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합리적 핑계가 통금이기도 했다. 통금 베이비라는 우스갯말이 유행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무려나 월즈 선배가 두 가지 형태의 올나이트를 두루 실현함으로써 이른 나이에 결혼에 이르게 되었던 것도 조천교 미드나잇 런 덕이었다.

“그랬었죠. 샛노란 계란찜이었댔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잊고 있던 선배의 인생 안주인 계란찜의 기원을 상기했다. 조천교도 계란찜도 세상 떠난 선배의 아내를 떠오르게 할 수밖에 없었으나, 조치원에서 월즈 선배를 만나 술을 마시고 있는 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내가 김선녀를 만나기 위해 태어난 거라면 황송하기 이를 데 없는 거겠지만….”

선배가 우아한 손목 놀림으로 잔을 비우고 말했다. 김선녀는 선배 아내의 본명이었다. 그가 방금 한 말은 아까 했던 ‘나는 계란찜을 먹기 위해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어.’라는 말의 오리지널 버전(월즈 선배식으로는 원전)이었다.

“…만약 아내가 나를 만나기 위해 태어난 거라면.”

선배는 원전에 한 마디 덧붙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거라면 미안해. 아내에게 너무 미안해.”

 

김선녀의 양산은 선배의 집에서 5킬로미터나 떨어진 미호강 모래톱에서 발견되었다. 사고 후 열흘만이었다. 2년 전 벚꽃 만발해 화사했던 봄날, 그녀는 선배가 생일 선물로 사 준 레이스 자수 양산을 처음 꺼내 쓰고 조치원읍 으뜸길을 신나게 걷고 있었다. 신나게 걷고 있었을 거라고 선배는 아내의 영정 앞에서 말했다. 바라고 바라던 쿠레타케 캘리그라피 붓펜을 사러 가던 중이었다니까. 그러다 그만 인도를 침범한 급발진 차량에 치여 선배의 아내 김선녀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내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나는 그가 세 번 우는 것을 보았다. 안 울었다고 그가 우겼지만 나는 그의 커다란 눈에 고이는 소주 반 잔 정도의 눈물을 보았다.

글씨를 가르쳐주겠노라 하루라도 더 일찍 말을 했더라면 아내가 미리 붓펜을 사러 갔을 거고, 그러면 그날의 사고도 면할 수 있지 않았겠냐며 그가 울었다. 아내는 그에게서 오래전부터 글씨를 배우고 싶어 했다.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겨온 자신이(실은 자신의 글씨가 배우고 말고 할 게 못 된다고 말해온 선배였지만) 원망스럽고 후회된다고 했다.

그리고 급발진 차량이 아내를 치고서 뒤이어 쓰러뜨린 벚나무 가로수 얘기를 하며 울었다. 웃음이 고통스럽게 섞였다. 검은 줄기 흰 꽃 만발한 벚나무가 바닥에 쓰러진 아내의 몸을 타고 눌렀는데 아내가 죽으면서 그 나무를 서방보다 더 애틋하게 끌어안고 있었다며 선배는 후드득 숨을 삼켰다.

폐역이 된 내판역 얘기를 할 때도 선배는 눈시울을 붉혔다. 목적지인 조치원역에 닿기 전 마지막 역이 내판역이었는데 저녁의 통학 열차가 내판역에 당도할 때마다 “다 왔다. 이제 다 왔다.”며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떠올렸다고 했다.

장례가 끝난 뒤에도 내판역 얘기는 한 번 더 했다. 내판역은 장욱진 생가 옆에 있는데 그곳의 작은 문주천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곧 미호강이 나왔다. 선배가 어렸을 적 종개를 잡던 곳이었다. 등에 모래 문양이 있어 모래에 숨으면 찾기 힘든 어여쁘디어여쁜 물고기였다고.

그 종개가 살던 모래톱에 아내의 자수 양산이 처박혀 있었다고 했다. 아내가 숨진 곳으로부터 5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었다. 얼마나 심하게 치였으면, 아내의 몸이 얼마나 높이 공중에 솟구쳤으면 그때 놓친 양산이 내판역까지 불려갔을까. 선배가 가슴을 칠 때 나는 더 커졌다던 가슴의 구멍을 본 것도 같았다.

“이제 그 종개도 없어졌다.”

선배가 말했다. 딱히 나에게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소주 다섯 병째부터는 잔을 비우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슬슬 자리를 파할 때가 된 것 같았다. 밤이 깊어지자 술집에 빈자리가 늘었고 주변이 고요해졌다. 유리문 밖이 어두웠다. 짙은 어둠만큼이나 추울 것 같았다.

미호강에서만 살아서 미호종개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물고기를 이제는 영영 볼 수 없다고 그가 말했다.

“볼 수 없어진 게 그뿐인가. 제비도 안 보인다.”

선배는 무언가에 화가 난 듯 말했다. 조치원 사람에게는 그럴 만한 걸까. 제비가 안 보인다는 것.

조치원의 조와 조천교의 조. 새 조. 그 새라는 게 실은 제비를 말하는 거라고 언젠가 선배가 말한 적이 있다. 장욱진의 그림에 나오는 검은 새들이 제비라고. 조치원 황금 들판을 걷는 장욱진 자화상의 검은 새 네 마리도 말할 것 없이 제비라고. 자화상의 장욱진이 입은 옷마저도 연미복이라고. 잘 보라고.

강조하지 않아도 조치원의 새가 제비라는 것은 지명이 말해주었다. 연기군 연기면의 연이 제비 연. 연서면, 연동면의 연이 모두 제비 연이었다. 일대가 모두 제비. 그 제비가 안 보인다는 거였다.

“통금도 없어지다 보니 말이야….”

선배가 말했다. 통금이 없어지니 술 먹다 조천교 넘을 일도 없어지더라고. 전국에 통금이 해제되니 통금 없는 충청북도도 없어진 거라고. 미드나잇 런도 ‘다리 건너’라는 것도. 그러면서 자신의 트로트도 없어져 간다고 했다. 한때 트로트가 괄시를 당할 때 트로트를 열심히 불렀는데 이제 트로트 열풍이 부니 자신의 솜씨가 뽀록나서 더는 못 부르겠더라고. 이처럼 없어져도 없어지고 있어져도 없어지니 이게 연기군의 연기설이 아니겠냐는 둥 매우 월즈스러운 아재 개그를 했다.

“없는 것으로 가득 찬 이내 가슴에 어울리는 호를 하나 지었는데 들어볼래?”

“취했으니 이제 형 집에 가서 쓰러져 잡시다. 술은 평생 마실 거니 오늘은 이쯤에서 남겨두고.”

내가 말하자 선배는 하하하 웃으며 너 나한테 지금 형이라고 했냐? 그래 나한테 조심할 필요 없어. 없애. 이제 그 조심하는 거 그딴 거 하나도 안 고마우니 없애. 비워! 그러더니 선배는 탄허, 경허까지 끄집어내며 자신을 경허랬다가 농허랬다가 입 풀린 소리를 했다. 허무를 삼킨다는 탄허, 야아, 이거 죽이지 않냐? 그래서 나는 그 허를 따라 경허로 하고 싶었는데 경허는 너도 알다시피 이미 있잖아. 아아, 거울 경 자 말고 나는 밭 갈 경 자야. 허무의 밭을 갈다. 크으.

선배는 소주 먹고 숨을 토하듯 제멋에 겨워 말했다. 경허. 한자는 다른데 한글과 발음이 같아서 고민을 하던 차에 농허가 떠올랐다고 했다. 허무를 희롱하다. 그래서 그걸로 하려고 하는데 어떻겠냐고 나한테 물었다. 희롱은커녕 허무에 치여 가슴 구멍이 자꾸 커지는 선배가 안타까워서 다시 불렀다.

“형.”

“음, 그려. 아우.”

그의 얼굴이 큰꽃으아리처럼 펴졌다.

“형의 호는 이미 있어?”

“뭔데?”

월즈, 라고 말하려다가

“선양 거사.”

라고 했다.

“야, 그건 쫌… 나 지금 진지하단 말야.”

“궁금한 게 있었어요. 오래전부터.”

나는 40년 전 선배가 했던 한 마디를 그에게 상기시켰다. ‘나는 비겁했노라.’던 말. 비겁했다는 게 어떤 거냐고 묻지 않았다. 선배 같은 사람이 비겁한 수단을 썼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고만 얘기했다.

“그자가 더 비겁했거든.”

선배가 말했다. 그자가 썼던 수단을 그대로 되돌려줬던 것뿐이라고. 그러면서 그러고 보니 아무래도 농허는 자신한테 과분한 닉인 것 같다며 정말로 진지해졌다. 과분한 걸 즉각 알고 내려놓으려는 걸 보니 형은 농허가 될 자격이 있어 보인다고 나도 진지하게 말했다. 이름은 이름처럼 살라고 짓는 거 아니냐며. 이름처럼 살면 되는 것 아니냐며.

“그럼 없는 것도 살려낼 수 있겠다.” 그가 그답게 비약했다. “없어진 것도 우리가 행하면 살아나는 거잖아. 미드나잇 런.”

이로써 그가 ‘이따가 그 다리를 건너보든가.’라고 했던 말을 실행하게 되었다. 술집을 나선 것이 자시였고, 밤공기는 생각했던 것만큼 쌀쌀했다.

 

“진짜 곧 봄이 오려나 봐요. 쌀쌀하긴 해도 공기가 달콤하네.”

“자시잖아.”

자정을 막 넘긴 하루의 첫 맑은 공기라서 그렇게 느껴지는 거라고 선배가 말했다. 세상이 가장 신선해질 때 망자를 부르기 위해 옛사람들은 자정에 제사를 시작했던 거라며. 그러면서 흥얼흥얼 노래를 했다.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진달래, 보리 내음새… 어느덧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그러나 아직은 캄캄하고 추워서 나는 점퍼 후드로 성근 머리를 덮었다. 입춘이긴 해도 2월 초였다.

말로만 듣던 다리를 선배와 직접 걸었다. 새들이 날아드는 하천의 다리 조천교. 새들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대신 천변의 벚꽃 잎이 강바람을 타고 새처럼 날아오른다고 했다.

“보이나?”

선배가 다리 위에서 물었다. 벚꽃도 제비도 아직은 시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제비는 검은 새라서, 오더라도 이런 밤에는 보이지 않을 거라고 내가 말했다.

“넌 제비 모양을 반밖에 못 보았구나. 제비의 반은 딱 벚꽃색이다.”

그러면서 자기는 지금도 보인다고 했다. 늙어도 늙지 않는 것은 그의 뻥이었다.

“아우야, 달릴까?”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선배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저러다 무릎관절이 나가는 거 아닐까 걱정이었지만 그를 붙들기 위해서라도 나는 달려야 했다.

무릎보다는 숨이 먼저 차서 그는 더 이상 달리지 못했다. 20여 미터를 달리던 그가 멈춰서 허리를 굽히고 숨을 몰아쉬었다. 실은 그보다 내가 더 숨이 찼다. 현기증이 일어 잠시 다리 난간을 잡고 몸을 지탱했다. “이제 런은 안 되겠다, 워크로 가자.” 그 와중에도 선배는 기어코 월즈 개그를 흘렸다.

무릎도 호흡도 안 좋은 몸으로 자시에 추운 다리를 뛰어 건너려 하다니, 이거야말로 달밤에 체조하는 거 아닌가 머쓱해지려는데 그가 내처 걷자고 했다. 숨도 안 돌렸는데.

다리 너머에 무엇이 있기에 이다지 건너려는 걸까.

속으로 구시렁거리던 나는 어느 순간 현기증이 말끔히 가시는 걸 느꼈다. 선배가 조천교 너머에서 김선녀를 처음 만났던 게 겨울의 봄인 쌀쌀한 입춘 밤이었다는 기억이, 강바람에 날아오르는 벚꽃 잎처럼 난분분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다리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선배가 다시 물었다.

“보이나?”

나는 천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응, 그러네요.” ■

 

구효서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소설집 《도라지꽃 누님》 《시계가 걸렸던 자리》 《별명의 달인》 《아닌 계절》 《웅어의 맛》 등과 장편소설 《비밀의 문》 《랩소디 인 베를린》 《옆에 앉아서 좀 울어도 돼요?》 《빵 좋아하세요?》 《통영이에요 지금》 등이 있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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