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장에 붙들려 온 천진암 스님들

“머리 깎은 저것들은 무엇이냐?”

대왕대비(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노기 서린 목소리가 국문장 기둥을 흔들었다. 대왕대비의 분노에 기름을 붓듯 의금부도사는 억센 목소리로 아뢰었다.

“요사스러운 악행을 저지른 천주사학 패거리를 수년간 숨겨준 자들이옵니다. 사악한 무리들과 동거하며 그들이 강학이란 이름으로 혹세무민하는 음모를 꾸미도록 도와준 자들이옵니다. 어제 의금부에서 잡아들였습니다. 이들의 소굴 천진암은 부수어버렸사옵니다.”

“간적의 무리를 숨겨주고 놀이판을 만들어주었다고? 어허, 국법 무서운 줄 모르는 패륜들이구나. 사학패들보다 죄질이 더 나쁘구나. 도망친 자는 없느냐?”

“예, 열 명이 얼음덩어리처럼 엉켜 굳어 있었사옵니다.”

대왕대비 곁에 앉은 어린 임금(순조)의 손은 곤룡포 속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어린 임금을 슬쩍 바라본 대왕대비는 임금의 윤허를 받았다는 어조로 짧고 강하게 명을 내렸다.

“독이 퍼지기 전에 당장 끌고 나가 극형에 처하라.”

국문장에 끌려온 열 명의 스님들은 젖은 빨래 같은 몰골이었다.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먹물옷은 피멍으로 얼룩져 검붉었다. 얼룩진 승복 속에 앙상한 몸뚱이가 헐렁하게 담겨 있었다. 어젯밤 천진암에서 체포되어 짐승처럼 질질 끌려서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포승줄에 묶인 손은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발은 부르트고 갈라져 핏덩이 뭉치였다. 얼굴은 팅팅 부어 있었다. 그들은 국문장에 부려놓은 쓰레기 더미였다.

“더 이상 보기 싫다. 당장 끌고 나가 참수하라.”

사악한 무리를 청소해야 한다는 광풍이 온 나라를 휩쓸고 있었다. 자고 나면 임금 앞에 상소장이 쌓였다.

이런 것들이었다.

‘간적(奸賊)이 요사스러운 악행을 저지르며 흉악하게 우리 성상을 헐뜯고 있습니다. 그 패거리들이 똬리를 틀고 날이 갈수록 인심이 미혹되고 있습니다. 성상에 대한 모함이 망극한 지경입니다.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여 성상에 대한 무함을 해명하고 세도(世道)를 정화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조선 땅 천지에 퍼져 나갈 것입니다.’

‘서양의 요술이 윤리를 파괴하고 가정과 국가에 화를 끼치고 있습니다. 요술이 중국에 들어 온 뒤로 서남의 여러 오랑캐 지역에 유행하였고 급기야는 일본에까지 파급되었습니다. 화(禍)를 조장하여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치는 것이 술수로 길흉을 점치는 점쟁이보다도 심합니다. 그들은 날마다 요망한 말을 뇌까리며 화란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 《정조실록》 43권, 정조 19년 7월 7일 병진, 행부사직 박장설의 상소문 중 일부

 

헌부(憲府)(집의 유경 · 장령 홍광일)에서 아뢰기를,

‘근일에 요사스럽고도 흉패(凶悖)한 사학(邪學)이 열화같이 치열해져서 형세의 위급함이 하늘을 뒤덮고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 자성 전하께서 특별히 밝은 전지(傳旨)를 내리셔서 엄중하게 처결하셨으므로, 요요난령(妖腰亂領: 허리를 자르고 목을 베어 마땅한 요사스럽고 악한 자)들이 차례로 형장으로 끌려 나아감에 따라 근저가 뽑히고 소굴이 소탕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약전 · 정약용 형제는 정약종의 동기로서, 몰래 이승훈에게 요서(妖書)를 받아 밤낮으로 탐독하여 민심을 어지럽히고 윤리를 멸절시켜, 세상의 지탄을 받은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엄중하게 추국하는 자리에서는, 처음에는 미혹되었으나 마침내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은 거짓 변명입니다. 통렬하게 반성한 자취는 끝내 증명할 수 없습니다. 옛날과 다름없이 사학에 깊이 빠져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죄를 감하여 살려주어 정배(定配)하는 데 불과했습니다.

이들은 온갖 요사스럽고 간사한 짓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윤리를 훼상시키고 흉흉한 말들을 방자하게 발설함으로써 스스로 금수(禽獸)가 되는 것을 달갑게 여기고 있습니다.’

— 《순조실록》 2권, 순조 1년 3월 18일 갑오 중에서

중국인 신부 주문모까지 처형해버린 마당에 저 멀리 한강 건너 앵자봉 골짜기에 있는 초라한 암자, 천진암에 있던 스님들을 없애버리는 것은 당연하고 간단했다. 중들은 천민 중의 천민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는 천진동이들이었다.

파김치 되어 엎어져 있던 스님들 중 주지 스님이 몸을 가누어 엎드린 채 입을 열었다. 간신히 숨을 쉬며 내뱉는 신음 같은 목소리다.

“전하, 죽는 것은 두렵지 않사옵니다. 소승들의 뜻을 잠시라도 들어주시고 처형해주시옵소서.”

장검을 짚고 임금 옆에 서 있던 어영대장이 화들짝 놀라며 고함을 질렀다.

“어허! 무엄하다. 극형에 처하라는 어명이 내렸거늘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주둥이를 여느냐?”

“자애로우신 전하, 소승의 말을 잠시만 들어주시고 목을 베어도 늦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몸은 허물어지고 있지만 생사를 초탈한 담담한 신음에 어린 임금은 움찔했다. 국문을 마치고 자리를 뜨려다 입을 연 스님과 눈이 마주쳤다. 20미터가 넘는 단 아래에 망가진 몸으로 엎드려 있지만, 맑은 눈에서 뿜어내는 광채가 번득였다. 임금은 대왕대비의 눈치를 보며 침을 삼켰다. 당황해하는 기색을 숨기며 입을 열었다.

“말하라.”

어영대장이 황급히 나섰다.

“전하, 사악한 패거리를 숨겨준 죄가 명명백백하거늘 변명을 들으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그만 편전으로 납시옵소서.”

“하찮은 미물도 짐의 보살핌 아래 있다. 잠시 저들의 말을 듣고 처형하라.”

어영대장은 더 이상 나서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에 대왕대비도 당황했다. 대왕대비는 잠시 자애로움으로 얼굴과 말투를 포장하며 입을 열었다.

“네가 중들의 우두머리냐? 무슨 말인지 말하라. 들어나 보자.”

도시락과 큰 도시락

“토마스 신부, 끌려온 스님이 무슨 말을 했을까?”

“글쎄나, 살려달라고 애걸한 건 아닐 테고. 이미 죽음이 확정되었으니.”

“날 시험하려 들지 말고, 선재 스님이 답을 주소.”

“내가 답을 알면 질문하겠나. 우문현답이나 해보소.”

“현문우답이면 몰라도. 난 엉터리 신부야.”

“나도 엉터리 중인데 뭘. 하하!”

퇴촌에서 천진암에 이르는 계곡은 풍광이 일품이다. 백담사 계곡처럼 장엄하진 않지만 굽이굽이 꿈틀거리고, 오밀조밀한 계곡에 맑은 물이 콸콸 흐르고 있다. 바라만 보아도 속세의 먼지가 훌훌 털려버린다. 다정다감한 개울이 비밀의 정원으로 가는 길처럼 이어져 있다. 일부 계곡에는 음식점들이 자리를 잡고 계곡을 점령하고 있다. 계곡의 끝자락에 ‘천진성역’이 거대한 위용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곳은 샹그릴라일까? 점령군 사령부일까?

“토마스 신부, 네가 신부가 된 게 정말 이해가 안 돼. 학교에서 넌 나 홀로 일진이었잖아. 나쁘게 말하면 쌩양아치. 나도 삥땅 많이 뜯겼다. 때린 놈은 기억 못 해도 맞은 놈은 기억한다.”

“그 얘긴 그만해라. 잊혀질 권리도 없냐? 얼마나 삥땅 당했냐? 이자까지 쳐서 지금 다 줄게. 나도 니가 스님이 된 게 불가사의다. 세월국민학교에서 전교 수석을 하던 놈이 스님이 되어버렸으니. 선생님들은 ‘우리 헌식이는 판검사가 될 거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는데. 넌 배신의 아이콘이야.”

“신 중에서 가장 되기 쉬운 신이 배신 아니냐. 하하! 난 아직 고무신 신세다.”

선재 스님은 신고 있던 고무신으로 계곡물을 퍼서 토마스 신부에게 끼얹는 시늉을 했다. 두 친구는 음식점에서 한참 떨어진 계곡의 상류 쪽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작은 바위에 걸터앉아 신발을 벗고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 신부와 스님이 아닌 묵은 추억이 있는 친구로서 만났다. 몽매한 시절을 지나 지금은 다른 옷을 입고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밤하늘의 별처럼 희미하게 서로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다가 30년 만에 만났다. 그 사이에 도시원은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사제 서품을 받아 토마스 신부가 되었다. 학교에서는 ‘헌식아’, 스님에게는 ‘선재야’라고 불리던 천헌식은 정식 수계를 받고 선재 스님이 되었다.

비가 온 후라 계곡물은 인심 좋은 부잣집처럼 넉넉했다. 선재 스님이 토마스 신부의 연락처를 수소문하여 함께 만나서 여기로 왔다. 세월이 흘렀지만 두 사람에게 낯설지 않은 곳이다. 200여 년 전 다산과 그의 무리들이 천진암에 머물며 스님들과 동고동락하며 격의 없는 교유를 재현하는 자리였다. 선재 스님은 만남의 속셈을 토마스 신부에게 말하지 않았다.

“스님아, 도시락 싸 왔나?”

“신부야, 니가 도시락인데 뭘 또 싸 오나.”

그들은 금방 30년 전으로 돌아가는 기억력을 발휘했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기억은 모난 것을 뭉개버리고 좋은 추억으로 포장된다.

아이들은 친구의 별명을 만들어내는 데 천재였다. 기발한 것도 있지만 대개는 단순한 특징을 포착해서 명명해버리는 시시한 천재들이었다. 친구의 신체적 특이함이나 이름자를 가지고 놀림감을 만들어 즐겼다. 친구의 장점으로 별명을 만드는 경우는 없었다. 대놓고 저항하지 못하는 반발심으로 별명을 사용했다. ‘도시원’의 별명은 별 고민 없이 ‘도시락’이 되었다. 어이없게도 덩치가 작은 ‘천헌식’의 별명은 ‘큰 도시락’이었다.

별명이 도시락이지만 도시원에게는 도시락이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시원은 헌식의 도시락 뚜껑을 빼앗아 들고 이 자리, 저 자리를 돌아다니며 다른 아이들의 밥과 반찬을 약탈해서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아이들은 덩치 큰 시원의 위력 때문에 빼앗겨도 항의하지 못했다. 시원은 자신이 처분할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것은 모두 도시락으로 보였다.

몇 달째 그 짓이 계속되자 헌식의 도시락은 크기가 커졌다. 3단으로 된 찬합이었다. 맨 윗칸에는 나물 반찬, 짠맛 흥건한 무 지가, 나머지 두 칸에는 쌀알이 새치처럼 몇 알 들어 있는 보리밥이 꽉꽉 눌려 담긴 큰 도시락이었다. 큰 도시락에 담긴 음식의 절반은 짝꿍인 시원의 몫이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시원은 금방 호방하게 먹어치웠다. 그로부터 시원의 약탈행위는 멈췄다. 시간이 지나자 반찬 투정도 서슴지 않았다. 시혜가 권리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도시락과 큰 도시락은 그렇게 도시락을 나눠 먹으며 자랐다.

시원은 불온한 착불 택배처럼 어느 날 갑자기 세월리(洗月里)에 던져졌다. 앵자봉을 중심으로 계곡을 이룬 맑은 물은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서 흘러와서 세월리를 지나 남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물이 너무 맑고 깨끗해서 지나가던 달도 몸을 씻고 간다고 세월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세월리를 흐르는 물은 맑고 차고 달았다. 그 물을 먹고 그 물에 얼굴을 씻으며 사는 세월리 사람들, 세월리 아이들은 얼굴이 참 맑았다. 생수병 같은 세월리에 낯선 이물질이 던져졌다. 택배비는 엉겁결에 아이를 떠맡은 그의 외할머니가 지불해야 했다. 아무도 그를 초대하지 않았다. 던져진 그를 보고 마을 어른들은 측은해했다. 아이들은 당황스러워했다. 당황함에는 두려움도 섞여 있었다. 외양부터 그랬다. 거뭇거뭇한 피부, 구불구불한 곱슬머리에 쌍꺼풀이 진 깊게 파인 눈, 툭 튀어나온 광대뼈, 키는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컸다. 아직 아이임에 틀림없는데 팔뚝과 다리에 털이 숭숭 나 있었다. 아이들은 몰래 숙덕거렸지만, 그의 덩치와 아이들이 알지 못하는 신기하고 몽롱한 서울 소식을 토해내는 말재주 덕분에 그는 단번에 아이들 세계를 지배하는 군주가 되었다.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윗다리골 외딴집에 할머니와 함께 산다는 것, 어머니와 서울에서 살다가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가버렸다는 것, 그의 아버지를 아는 사람도 본 사람도 없다. 아주 멀리, 훌쩍, 자기 나라로 가버렸다는 긴가민가한 소문만 떠돌았다. 시원 역시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시원의 할머니는 시원을 떠안은 지 3년 후에 돌아가셨다. 땔나무를 해오다가 돌부리에 걸려 지게에 깔려 돌아가셨다.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장례를 치러 주었다. 혼자가 된 시원에게 마을 사람들은 밥과 반찬을 주기도 하고 보리쌀을 한 바가지 퍼서 주기도 했다. 시원의 가슴은 차돌처럼 단단해져 갔고 용맹은 갈수록 거칠어져 갔다.

나는 그것을 보지 않았다

사흘째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개울을 건너야 도착할 수 있는 학교는 개점휴업이었다. 선재는 불어난 물 때문에 학교에 가지 않고 혼자 관암사를 지키고 있었다. 폭우는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고마운 축복이었다. 주지 스님은 일주일 전에 출타했다. 멀리 있는 사형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

“선재야, 공양 시간 되면 굶지 말고 공양해라. 변변찮지만 공양간에 양식과 반찬거리가 있다. 때맞춰서 부처님께 마지 올리는 것을 잊지 마라. 모레가 초하룻날이다. 천진암 터 주춧돌 앞에 가서 삼배 올리고 오너라. 수십 번 함께 갔으니 이제 너 혼자 갈 수 있겠지. 산길로 반나절은 걸리니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내 은사스님, 은사의 은사스님, 그 위 은사스님이 해온 일이니 잊지 말고 꼭 다녀오너라. 사형님을 만나 천진암 중창 불사를 상의해 보겠다만 사형님도 힘이 없으니 큰 기대는 안 한다.”

대낮에 내리는 폭우는 장관이었다. 나뭇가지가 춤을 추듯 휘청거리고 빗줄기가 허공을 찢으며 장대처럼 땅으로 내리꽂혔다. 그 모습을 보며 선재는 법당 앞에서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폭우를 즐겼다. 밤에는 무서웠다. 시각적인 것은 사라지고 청각적인 것만 살아 날뛰었다. 요사채 끝방에 콕 처박혀 날이 밝기를 기다리며 관세음보살을 무수히 반복했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다.

한밤중이다. 오줌이 마려워 잠이 깼다. 초저녁에 허겁지겁 수박 한 통을 다 먹어 치운 때문이었다. 장대비를 뚫고 해우소까지 가기 싫었다. 주지 스님도 안 계시는데. 변명을 합리화하는 고민을 길게 할 수 없었다. 오줌보가 터질 것 같았다. 불을 켜지 않고 방문을 살짝 열고 바깥을 향해 시원하게 발사했다. 바람이 거셌다. 빗물과 오줌물이 섞여 방안으로 튀어 들어왔다. 선잠 깬 상태에서 얼핏 법당 쪽을 바라보았다. 캄캄한 가운데 움직이는 검은 물체가 보였다. 보자기에 싼 큰 물건을 들쳐 메고 가파른 돌계단을 내려와 빠르게 사라졌다. 법당문을 닫지 않고 사라져 비바람의 힘으로 법당문은 쿵쾅거리며 사납게 여닫이 운동을 계속했다. 선재의 가슴도 쿵쾅거리며 요동쳤다. 잠이 싹 사라졌다.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빗줄기가 조금씩 가늘어졌다.

이불로 몸을 감싸고 앉아있던 선재는 먼동이 희뿌옇게 밝아오자 후다닥 일어나 법당으로 갔다. 낯선 풍경에 아연했다. 부서진 채 엎어져 있는 불전함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다음 풍경에는 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수미단 위에 모셔놓은 부처님이 사라졌다. 선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지 스님의 불호령을 생각하니 머리통이 빠개질 것만 같았다. 속이 훤히 보이도록 부서진 불전함을 바로 세워 놓고 법당 마당으로 나왔다.

법당에서 마당으로 내려오는 돌계단에 비에 흠뻑 젖은 운동화 한 짝이 뒤집혀 있었다. 얼른 주웠다. 세찬 비에 씻겨 깨끗했다. 주워든 운동화 한 짝을 살펴보던 선재는 화들짝 놀랐다. 낯익은 나이키 운동화다. 흰 바탕에 빨간색 부메랑 모양의 로고가 선명했다. 볼펜으로 진하게 쓴 ‘도시락 꺼’란 글씨가 운동화 뒤축에 적혀 있었다. 나이키 운동화를 가진 아이는 시원뿐이었다. 아이들은 그것을 부러워했고 시원은 장수의 지휘봉처럼 신발을 쳐들고 자랑하던 운동화였다. 선재는 운동화 한 짝을 요사채 뒤쪽에 있는 장독대로 가지고 가서 비어 있는 독에 넣었다.

주지 스님이 돌아왔다. 법당에 들러 사태를 파악한 주지 스님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선재는 스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댔다. 얼른 불호령이 내리고 죽비로 자신의 대갈통을 갈겨주면 좋으련만. 주지 스님은 돌부처처럼 말이 없었다. 촌각의 시간은 고문의 연속이었다. 한참 후에야 스님이 입을 열었다.

“선재야, 보았느냐?”

“아무것도 못 보았습니다.”

“흔적은 있었느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됐구나. 그러면 됐다. 니 마음고생이 컸구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어도 이승은 짧다. 너도 이제 머리를 깎아도 되겠구나. 니 부모가 입 하나 덜자고 일곱 살짜리 너를 나한테 맡기며 큰 중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니 마음 씀씀이를 보니 내가 할 일을 조금은 했구나. 이제는 니가 절집에서 산다는 것을 학교 친구들에게 말해라. 내년이면 니가 국민학교를 졸업하는구나. 6년이면 인삼도 수확을 한다. 내 사형님이 계시는 큰절로 가거라. 거기 가서 제대로 중 공부를 해라. 허물어져 가는 여기서 내 시중이나 들며 불목하니로 썩을 수는 없다. 총명한 니 머리가 아깝다만 부처님 공부는 판검사 되는 공부에 견줄 바 아니다. 나는 은사님의 유지를 하나도 못 이루었다.”

선재는 엉망진창 된 마음 타래를 가눌 수가 없었다. 독백 같은 주지 스님의 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전함이 부서지고 부처님을 도난당한 죄, 그것에 대한 상식적 처벌이 내려지기만을 간절하게 원했다.

“그놈도 참 우매하고 처량하구나. 비빌 언덕을 제대로 찾아 등을 비비고, 물길을 보고 낚시를 던져야 하거늘. 밤중을 걷는 중생이긴 그놈이나 나나 똑같구나. 촌구석 절 불전함에 뭐가 들어 있겠노. 빈 통이다. 부처님을 업고 갔으니 그보다 더 큰 공덕이 어디 있겠노. 언젠가는 깨달음이 있겠지. 땔감으로 쓸 수도 없는 부처님이다. 목불이면 아궁이에 넣어 불쏘시개 공양이라도 하겠지만 그건 흙덩이로 빚어 금색 페인트칠한 부처님이다. 나무관세음보살!”

선재는 엉겁결에 스님께 합장하며 ‘나무관세음보살’을 따라 했다.

 

뛰어본들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큰스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퇴촌 쪽에서 관군 수십 명이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어서 피하세요.”

아랫마을에 심부름 갔던 행자가 헐레벌떡 달려오면서 법당문을 후다닥 열며 소리쳤다. 온몸이 땀에 젖은 걸로 봐서 쉬지 않고 단걸음에 달려온 모양이다. 천진암 법당에서 저녁 예불을 올리고 있던 스님들이 동요했다. 목탁 소리가 불규칙으로 떨렸다. 주지 스님은 힘을 주어 소리쳤다.

“계속해라. 단전에 힘을 주고 더 크게!”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이 찌렁찌렁하게 울렸다. 앵자봉이 흔들리고 암자를 둘러싼 소나무 고목 수십 그루가 몸을 비틀며 뿌지직 뿌지직 소리를 냈다. 가지가 부러지고 둥치가 터지며 끈적끈적한 송진이 흘러내렸다.

 

예불이 끝났다. 주지 스님은 스님들을 둥그렇게 둘러앉게 했다.

“선비들은 다 떠났느냐?”

“예, 지난밤에 책 보따리를 챙겨 황급히 떠났습니다. 미처 챙기지 못한 서책과 소지품들은 해우소 뒤에 묻었습니다.”

법당 안에 들어오지 않고 바깥에 있던 행자가 숨넘어가는 소리로 다시 외쳤다.

“스님, 빨리 피하세요. 다 죽습니다. 빨리요.”

“어허, 그놈 참, 시끄럽다.”

주지 스님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스님들은 오금이 저렸다. 탈출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리며 주지 스님의 입만 바라보았다.

“너희 중에 죄지은 놈 있느냐?”

스님들은 움찔하며 곁눈질로 곁에 앉은 스님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지 못했다.

“우리가 지은 죄가 무엇이냐?”

역시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도망은 죄지은 놈이 하는 짓이다. 지은 죄가 있는 자는 지금 당장 떠나거라.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겠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묻지 않겠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행자야, 너는 지금 당장 떠나거라. 아랫마을로 가지 말고 산길을 넘어 세월리로 가거라. 밤길이 무서우면 관세음보살님을 100만 번쯤 부르면서 걸어라. 새벽녘이면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게다. 마음 맑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니 박대하지 않을 거다. 거기 가서 옷을 얻어 입고 살아남아라. 인연 있는 사람을 만나면 여기 있었던 일들을 전해라. 알았느냐?”

법당문에 기대어 부들부들 떨고 있던 행자는 비틀거리며 합장을 하고 천진암 뒤쪽 산길을 향해 냅다 뛰었다.

“스님들, 지금부터 용맹정진합시다. 몇 시간이 될지 며칠이 될지 모르지만 수마를 물리치고 용맹정진합시다.”

자리를 다시 정돈하고 자세를 고쳐 부처님 앞으로 모였다.

“쿵쿵쿵, 쿵쿵 쿵쿵!”

목탁 소리가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처럼 우렁찼다.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염불 소리가 법당 기둥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지진처럼 우렁찼다. 저 멀리서는 횃불을 치켜든 관군들의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의 출현은 무례했다

옥색 도포에 갓을 쓴 말쑥한 선비 다섯 사람이 천진암 뜰에 들어섰다. 옷차림은 말쑥했지만 먼 길을 걸어온 탓에 가죽신은 흙투성이였다. 법당 앞 돌계단에 걸터앉은 그들은 조용한 경내를 향해 소리쳤다.

“누구 없소? 절이 싫어 중들이 다 떠났나? 이리 오너라!”

차림새는 정결하나 말투에는 오만한 먹물 냄새가 풍겼다. 법당에서 사시불공을 올리는 스님들의 독경 소리가 자욱하건만 그들은 일부러 거드름을 떨었다.

“형제님들, 어떻소이까?”

“산속 깊숙한 곳이라 강학하기에 딱 좋소이다. 여기서 굿판을 벌인들 누가 알겠소이까. 하하하!”

예불을 마친 주지 스님이 가사를 벗어 팔목에 걸치며 돌계단을 내려와 그들에게 합장했다. 그들은 예를 받지도 표하지도 않고 각자 주변 지세를 훑으며 중얼거렸다.

“선비님들, 무슨 일로?”

“암자는 옹졸하나 주변 풍광이 일품이네. 어릴 적 이 근처에서 뛰놀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나는구먼. 스님, 날 기억하시오?”

그중 한 선비가 자세와 얼굴을 바로 하니 금세 알 수 있었다. 입가에 이제 막 검은 수염이 자라는 애송이 선비였다. 다산 정약용이다.

“아하, 어서 오시오. 개구쟁이 도련님이 의젓한 선비님이 되셨군요. 험한 산길 오느라 고생들 했소.”

주지 스님은 다산의 손을 덥석 잡고 반가움을 표했다. 다산이 사는 곳과 천진암은 멀지 않았다. 나룻배로 남한강을 건너면 닿을 수 있다. 그래도 산길을 통해야 하니 반나절은 걸린다. 천진암의 지형을 알고 있던 다산이 강학의 장소로 염두에 두고 동료 네 명과 함께 답사를 온 것이다. 은밀하게 강학회를 하기에 적격이었다. 동행한 선비들도 흡족해했다.

“스니임, 우리가 여기서 공부를 좀 하려고 하니, 방을 내어 주시오. 먹을거리는 우리가 준비하겠소이다.”

“누추하지만 요사채에 빈방이 있소. 내 비록 늙고 힘이 부치나 절집을 찾아온 손님이니 성심으로 봉양하겠소. 젊고 총명한 선비들을 섬기는 게 부처님 섬기는 것과 다를 바 없겠지요.”

“고맙소. 천주님의 가호가 있을 거요.”

다산은 어릴 적부터 자주 천진암을 찾았다. 근처 계곡에서 형제들과 고기를 잡고 놀았다. 천진암 강학회(1779년)가 시작된 지 18년이 지난 정사년(1797년. 다산 36세) 5월 단옷날 형제 4명과 함께 천진암에서 놀며 지은 시 중 한 편은 이렇다.

 

지는 해 나무 끝에 숨고

잔잔한 연못 물빛 사랑스럽구나

새로 난 버들 연못에 누워 있고

성긴 버드나무 밤안개를 머금었구나

멀리 대 홈통으로 끌어온 작은 물방울들이

차고 넘치면 가만히 전답으로 들어가네

누가 이 좋은 언덕과 골짜기 가져다가

두어 명 스님들만 차지하게 했던가

 

1827년에 65세의 노인이 된 다산은 옛날의 동료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천진암을 찾아와 현장에서 지은 시에서, 옛 추억을 회고했다.

 

천진암에 오르는 바윗돌 사이사이로 난 실 같은 오솔길은

내 어릴 적에 오르내리며 놀던 길인데 (昔我童時遊),

여기서 우리는 중용, 대학, 서전, 주역 등 상서를 다 외운 후

불에 태워 물에 타서 마시는 소련을 하였었지(尙書此燒鍊)

저명한 호걸들과 선비들이 모여 강학을 하고,

독서를 하던 곳이 바로 여기였지(豪士昔講讀)!

— 다산 〈유천진암기(遊天眞庵記)〉 중에서

 

그들의 생활은 치열했다

그들은 밤안개처럼 천진암에 스며들었다. 은거하여 강학하기에 적합하고 한양을 드나들며 연락을 하고 서책을 가져오기도 용이한 위치였다.

1779년 기해년, 정조 3년 음력 섣달, 정약용(17세), 정약종(19세), 정약전(21세), 이승훈(22세), 이총억(14세), 권철신(44세), 그들은 천진암에 둥지를 틀었다. 이벽(25세)은 열흘 후에 합류했다. 이벽은 권철신이 좌장이 되어 은밀하게 강학회를 개최했다는 소문을 듣고, 한양에서 백여 리 눈길을 걸어 엄동설한에 마재와 항금리를 거쳐, 앵자봉 동편 아래 주어사에 밤늦게 도착했다. 그러나 강학회는 천진암에서 하고 있음을 알고, 그날 밤에 바로 길을 떠나 눈 덮인 앵자산 마루를 넘어 한밤중에 천진암에 도착했다.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에 불을 켜고 토론하고 신념을 다졌다. 생소한 천주교 책을 읽고 토론을 벌였다. 그 내용은 서당이나 사찰, 일반 가정에서는 엄두를 못 낼 것들이었다. 조상을 부정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부정하고, 본 적도 없는 천주님을 줄곧, 지성으로 불러댔다.

가장 연장자인 권철신이 좌장을 맡아 진행했다. 그의 주장이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으면 막내 이총억이 또박또박 반박했다. 저마다 천주 교리에 대해 확신은 있지만 아직 논리가 미약했다. 논리는 미약했지만 결론은 명백했다. 우주는 천주님이 창조한 것이며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다. 예수의 보혈만이 그 죄를 씻을 수 있다. 조선은 아직 천주님의 존재조차 모르는 미개한 나라다. 우리가 피를 흘려 조선이 천주님의 강토임을 알게 해야 한다.

그중 이벽은 천주학 공부의 깊이가 가장 깊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이벽을 스승으로 예우했다. 이벽을 중심으로 하나의 종교가 뿌리내리려는 조짐이 보였다. 바위 밑에 대나무를 심으면 대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아주, 아주 천천히 바위를 들어 올린다. 결국 바위는 굴러떨어지고 대나무는 숲이 된다.

여러 날 계속된 강학회에서, 이벽은 강론과 논증을 통하여, 학자들은 유불선과 여러 경서에 담긴 도리를 하나하나 비교 연구 검토했다. 우주 만물에는 조물주 천주가 계시고, 사람에게는 불사불멸하는 영혼이 있고, 죽은 후에는 상선벌악을 하는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믿게 되었다.

이곳에서 이벽은 〈천주공경가〉를 지었고, 정약종은 〈십계명가〉를 지었다. 권철신은 일과표와 규정을 만들어서 모든 이가 새벽이면 일어나 냉수로 세수를 하고 토론 시간, 기도 시간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학자들의 마음과 몸가짐은 신중하며 열렬했다. 규정과 법도를 어기는 이는 없었다. 특히 이승훈은 숫돌에 갈 듯 자신을 철저히 연마했다고, 훗날 다산은 회고했다.

칠일마다 주일 하루는 천주공경에 바쳐야 함도 알았으나, 그 당시에는 요일이 없었다. 음력으로 따져서 매월 이레, 열나흘, 스무하루, 스무여드레를 주일로 삼아 예배를 했다.

그들의 강학은 계속 이어졌다. 계절이 바뀌고 드나드는 선비들이 바뀌었지만, 강학의 모습은 한결같았다. 주지 스님은 다른 스님들에게 그들을 불편하게 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선비들은 우리 집에 찾아든 갈 곳 없는 새들이다. 언젠가는 떠나갈 새들이다. 부처님 봉양하듯 불편하지 않게 잘 받들어라. 선비들이 무슨 공부를 하는지 관심 두지 마라. 누가 오는지 누가 가는지도 관심 두지 마라. 그건 남의 집 곳간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하고 몰래 훔쳐보는 짓이다. 내 집에 찾아온 손님을 정성껏 대접하라는 주자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르지 않다. 하심(下心)을 잃으면 모든 수행은 헛것이다.”

공양을 준비하는 스님들의 일이 두 배로 늘어났다. 처음에는 음식을 먹고 설거지도 하지 않던 선비들의 태도가 조금씩 변했다. 식사를 하고 난 후에 발우 닦듯 그릇을 깨끗이 닦고, 경내에서 스님을 만나면 하대하듯 뒷짐을 지던 선비들이 스님들과 합장례를 나누었다. 스님과 선비들이 어울려 근처 계곡에서 탁족을 즐기기도 했다.

그들이 바라보는 곳은 다르지만 생활방식은 다르지 않았다. 스님들의 철야정진, 삼천 배 올리기, 묵언수행은 선비들에게 말 없는 가르침이었다. 선비들이 잠을 쫓으며 밤새워 소곤거리는 토론은 스님들에게 자극이 되었다. 공부와 수행이 다르지 않구나. 불이법문이 그들에게 눅눅하게 스며들었다.

다블뤼 주교(프랑스 선교사이며 천주교 조선교구의 제5대 교구장. 병인박해 때 순교. 1984년에 한국의 103위 순교자의 일원으로 시성되었다)는 기록했다.

천진암에서 천주교도 여럿이 모여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천주교 진리를 탐구하고 실천했다. 천진암은 유교 선비들이 불교 암자에서 천주교를 연구하고 실천하기 시작한 곳이다. 유교, 불교, 천주교의 사람과 장소와 사상이 합류한 곳이다. 조선 천주교회가 태동된 한국 천주교 발상지다.

앵자봉 꼭대기에 걸린 구름이 석양을 받아 붉게 타고 있었다. 흥건한 핏빛이었다. 요동치는 바깥세상 소식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주지 스님은 심호흡을 했다. 수십 번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고, 피바람을 동반한 신유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럭저럭 스물두 해가 지났구나. 저들이 찾는 천주나 내가 찾는 부처가 다르지 않겠지.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새들이 떠날 때가 되어가는구나. 새들은 허공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데. 어디론지 무사히 가야 할 텐데.”

 

여기 이 자리는, 여기 이 자리에는

“우와! 어마어마하구나. 입이 딱 벌어지네.”

입구에서 ‘천진성역(天眞聖域)’이란 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비석이 맞아준다. 포장은 되어 있지만 꼬불꼬불한 산길을 헤치고 다다른 천진암은 별천지였다. 산들이 에워싼 곳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이미 여러 번 와본 적 있지만 선재 스님은 토마스 신부의 표정을 살피며 감정을 과장하며 말했다.

“중국 사람들이라면 단박에 ‘샹그릴라’라고 이름 붙이겠군.”

선재 스님은 남의 집의 위용을 칭찬하는 립서비스를 했지만 토마스 신부는 대꾸하지 않고 덤덤했다. 그 역시 처음 방문은 아니다. 신학대학생 시절부터 성지순례를 여러 곳 다녔다. 천진암이 터를 닦고 하나씩 위용을 갖추는 과정을 알고 있었다.

“불교에서도 대작불사는 흔하잖아.”

검은색 신부복, 회색 승복을 입은 두 사람이 다정하게 함께 걷는 모습이 이상하다는 듯이 다른 방문객들은 눈치 보듯 힐끗거렸다. 곳곳에 세워진 조형물 앞에서 방문객들이 사진을 찍고 손을 모아 기도를 한다.

“목적지로 바로 가자.”

선재 스님은 토마스 신부의 팔을 잡아끌었다.

“다 온 거 아니야? 목적지? 어디?”

토마스 신부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일부러 의뭉을 떨었다.

“알면서 왜 그래. 저 위쪽에 있는 묘소로 가자. 주변에 조형물이 너무 많아 기가 빨리는 느낌이다.”

스키장 중급코스 같은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두 사람은 숨을 헐떡거리며 걸었다. 그 옛날 오솔길이었지만 지금은 콘크리트로 포장된 대로다. 길의 끝자락에 단정하게 정돈된 다섯 기의 묘가 있다. 묘는 각각 사방에 석판으로 둘러쳐져 있고 봉분에는 싱싱하게 자란 파란 잔디로 치장되어 있다. 이벽,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정약종 등 5위의 무덤이다.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좋은 위치다.

두 사람은 묘소 가운데 서서 묵념을 했다. 토마스 신부는 성호를 긋고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고 선재 스님은 합장례를 올렸다. 숙연한 묵념이 5분간 이어졌다. 묵념을 마친 토마스 신부가 입을 열었다.

“거룩한 죽음은 불멸이구나.”

선재 스님은 시선을 먼 곳으로 향하며 대꾸했다.

“지세가 참 좋구나. 공부를 하든 도를 닦든 저절로 눈이 맑아지는 곳이구나. 바로 여기가 천진암 법당터다. 여기 묻힌 너의 성조들과 이름 남기지 않은 스님들이 함께 기거하며 수행했던 곳이다. 기록이 있는 죽음만 거룩한 것은 아니지. 기록이 없어도 사실은 변하지 않는 법.”

선재 스님은 무덤 주변을 살폈지만 암자의 주춧돌은 보이지 않는다. 묻어버렸는지 옮겼는지 알 도리가 없다. ‘천진암 강학당지’라는 인색한 글자를 새긴 검은 표지석이 있다. 이곳은 이제 천주교 성지다. 당신들의 천국이다. ‘천진암’이란 세 글자만 기적처럼 생존해 있다. 불구덩이에서 건져낸 사리 세 과.

날이 어둑어둑해져 간다. 갈 사람은 가라고 가랑비가 내린다. 있을 사람은 있으라고 이슬비가 내린다. 어디로 갈까. 토마스 신부는 여기에 마련된 숙소에서 묵기로 했다. 선재 스님은 떠나기로 했다. 토마스 신부가 승용차로 양평 읍내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준다고 한다.

“선재 스님아, 만행 생활 청산하고 작은 절 주지라도 하며 정착하는 건 어때?”

“토마스 신부야, 뭘 줄 게 있어야 주지하지. 아무나 하나. 내 공부로는 남에게 아무것도 줄 게 없다. 신부야, 목이 꽉 조이는 답답한 옷 벗고 장가가서 예쁜 신부나 맞아들여라. 하하하! 니 아버지도 찾아보고.”

“내가 신부인데 무슨 신부를 맞아들이냐. 아버지? 내가 하루에도 수백 번 부르는 게 아버지인데, 아직 안 오시네. 허허!”

선재 스님은 토마스 신부에게 누런 봉투를 건넸다.

“변 신부님께 전해주라. 사려 깊은 분이니 고려할 것이다. 이건 구걸하는 게 아니다. 이름을 남기지 않은 스님들에 대한 예의다. 봉투에 담긴 편지 내용은 이랬다.

존경하는 변기영 신부님

성인 5위의 무덤 곁에 작은 표지석을 세워 이렇게 새겨주십시오.

‘이 자리는 천진암이 있던 곳입니다. 여기 묻혀 있는 성인 다섯 분을 비롯하여 초기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천진암에서 강학하며 천주 신앙의 뿌리를 내렸습니다. 천진암에서 한국 천주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천진암에 계시던 스님들이 강학회를 허락하고 보호해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스님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천주교인들을 숨겨주고 보살펴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스님들의 호의에 경의를 표합니다. 천주님의 은총이 함께하길 기도하며 이 표지석을 세웁니다.’

천진암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승 선재 합장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00년 계획으로 추진 중인 천진암 대성당이 완공되면 세울 머릿돌에 친필 서명하여 이런 글을 새겼다.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에 건립되는 새 성전 머릿돌에 교황 강복을 베푸노니, 하느님이 보우하사 온 겨레가 영원히 화목하기를 비노라. ■

 

✽불교소설은 불교문학 진흥과 새로운 콘텐츠의 개발을 위해 ‘재단법인 보덕학회’ 후원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우상
asdfsang@hanmail.net 

경북 의성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1996년 ‘문학의 해’ 기념 불교문학상 수상. 1999년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울음산》 당선. 펴낸 책으로 장편소설 《비어 있는 날들의 행복》 소설집 《바이칼 여신》 동화 《아빠, 해님 집은 어디야》 시집 《나는 너의 야만스런 비밀을 알지》 등 다수. 한국소설작가상, 동국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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