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명 스님, 아니 은사 스님이 입적했다는 것을 알았다.

감나무 이파리가 늦가을 바람에 아픈 소리를 내며 절 뒷마당에 굴러다니고, 노란 유자들이 주렁주렁 달린 고목 유자나무 위로 서늘한 가을 하늘이 파랗게 걸려 있던 날이었다. 절 뒷방 툇마루에 잠깐 나와 앉아 있을 때, 주소 띠지도 뜯지 않은 불교 신문이 있기에 무심코 신문을 펼쳤더니 희명 스님의 입적 소식을 전한 기사가 있었다. 벌써 보름, 보름이나 지난 뒤였다. 스님이 세상 인연을 버린 지. 

뉘라서 정체도 알 수 없는 젊은 객승이 앓아누워 있는 골방에 그런 소식을 알뜰히 챙겨서 넣어주겠는가? 그렇다 보니 스님의 다비식까지 이미 끝난 뒤에야 입적 소식을 알게 된 것이다.

뜻밖에도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귀때기에 피도 채 마르기 전인 열네 살 되던 해 봄, 그 봄에 걸승 차림으로 집에 들른 희명 스님의 손에 이끌려 산문에 들어선 나. 그런데도,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 나서도 별다른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국민학교 졸업 무렵부터 희명 스님은 내 등 뒤에 꼭 붙어 있는 그림자처럼, 낡은 사진의 배경이 되는 바위언덕처럼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희명 스님은 나에게 아버지요, 할아버지였다. 국민학교를 갓 졸업하던 해에 나를 데려다가 밥 먹여주고 학교까지 다니게 해주었으니 내겐 단순히 은사 스님 그 이상의 존재였던 것이다. 희명 스님은 어려서부터 나를 거두어주고 강원에까지 가서 공부하게 뒤를 돌보아주었다. 그런데도 희명 스님은 내게 또 넘어야 할 산이었고, 부수어야 할 얼음 덩어리였으며 탈옥해야 할 감옥을 지키는 간수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저 스님만 아니면, 저 스님만 안 계시다면…….’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말을 머릿속에서 되새기며 가끔은 법당에서 목탁이 무슨 원수나 되듯이 사정없이 두들겨댔다. 마치 목탁이 희명 스님의 벗겨진 알머리통이나 되는 듯이.

 

“스님, 나 뭐 할라고 데려갑니까?”

“공부 시켜 사람 만들려고 데려간다.”

“공부요? 중학교 입학식은 다 끝나부렀는디요. 그라고 내가 지금 사람 아니고 뭐 개나 돼진가요, 사람 만들게······.”

“허허, 고 녀석 말하는 본새치곤……. 사람 거죽만 뒤집어쓰고 있으면 다 사람이냐? 사람 노릇을 해야 사람이제.”

“…….”

그때부터 길바닥의 자갈이 발바닥에 뾰족뾰족 밟히는 것을 아무 느낌 없이 받아들이며 묵묵히 스님의 발뒤꿈치를 내려다보며 따라 걷기만 했다. 가느다란 산길이 나올 때까지 스님과 나는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산에 올랐다. 길이 좁고 이리저리 엉킨 나뭇가지가 얼굴을 할퀴기도 했다. 스님은 앞장서 나가면서 나뭇가지를 잡았다가 내가 지나가면 놓곤 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까지는 먹고 사는 문제가 심각하지는 않았다. 끼니때마다 매번 고기반찬은 못 먹었지만 한 달에 두어 번 중국집에서 짜장면 정도는 사 먹을 정도의 외식은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첫물로 거둔 딸기를 팔기 위해 인근 도시로 딸기 손수레를 끌고 갔다가 엉뚱하게도 실종되고 말았다. 그때 그 도시는 군인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남들처럼 벼농사만 지어가지고는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고 딸기 농사를 지었다. 딸기를 수확하면 손수레에 직접 싣고 도시로 나가 팔았다.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랬다고 하니까 꽤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산 것이다. 그런데 작년 봄에는 딸기 팔러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도시를 군인들이 점령하여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 때였다. 어머니는 도시에서 들려오는 흉흉한 소문이 께름칙하여 아버지가 안 나갔으면 했다.

“시방 거그가 난리판인 모양인께 돌아가는 것 보고 하루 이틀 더 있다가 나갔으믄 좋겄는디…….”

“우리 같은 사람헌테야 뭔 일 있겄어? 데모하는 젊은 대학생들 잡을라고 그라겄제.”

“대학생들만 잡는다고 안 허드만…….”

“너무 염려 마시게. 첫물인께 금방 팔릴 것인께 얼른 팔고 오믄 되제.”

“하여튼 조심하쇼잉!”

아버지는 어머니의 걱정을 뒤로하고 딸기 손수레를 끌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날 이후 어디로 어떻게 사라져버렸는지 모른다. 1년이 지나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온갖 군데에 수소문을 해봐도 아버지 있는 곳을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아버지는 저세상으로 간 듯했다.

그때부터 집안 꼴이 말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어머니가 남의 집 농사일을 거드는 품팔이를 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나는 중학교 진학하는 것도 포기해야 했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데 학교가 무슨 대수냐 싶었다. 국민학교 저학년인 여동생만 겨우 학교를 다녔다. 그때 우리 집 사정이 구지암(九地庵)의 희명 스님한테 전해진 모양이었다. 희명 스님은 돌아가신 할머니가 다니던 절의 주지였다. 절이라 하지만 큰 절인 도순사(道順寺)에 딸린 조그마한 암자이다. 

 

구지암에 도착했다. 중늙은이 아저씨가 희명 스님을 맞으며 합장을 했다.

“이 애가 그 애인가요?”

희명 스님이 합장을 하며 대답했다.

“예. 우리 절에서 살 인연인 모양입니다.”

두 사람은 나를 두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이미 나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러든 말든 그런 거보다는 일단 밥이나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 나서기 전 이른 점심을 먹긴 했지만, 산길을 걸으면서 이미 소화가 다 되어버려 시장기가 몰려왔다. 이런 내 사정을 아는 듯이 아저씨가 나섰다.

“시장하실 텐데 공양부터 하시지요.”

‘공양’이니 어쩌니 하는 말은 모르겠고, ‘시장’이니 어쩌니 하는 말이 귀에 꽂혔다. 나는 희명 스님이 이끄는 대로 한 건물의 방으로 들어갔다. 밥상이 놓여 있었다.

“배 고프쟈? 밥 먹자.”

희명 스님이 상 앞에 앉았다. 나도 따라 앉았다. 반찬은 거무튀튀하게 묵어 빠진 배추김치에 시래깃국뿐이었지만 달게 비웠다. 희명 스님이 내 밥그릇에 자신의 밥을 덜어주었다.

“더 먹어라. 너만 할 땐 숟가락 놓고 돌아서믄 바로 배가 또 고플 것인께!”

나는 사양하지 않고 희명 스님이 덜어준 밥까지 싹싹 비웠다. 여기서 살면 적어도 배는 안 곪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숭늉 가져올까요?”

부엌 쪽으로 난 문이 열리며 긴 머리를 한 여자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러렴!”

희명 스님이 짧게 대답을 했다. 이어 긴 머리 여자가 숭늉이 든 양푼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와 희명 스님 곁에 놓았다. 희명 스님이 양푼을 들어 내 밥그릇에 숭늉을 따라 준 뒤 자신은 양푼째 들고 마셨다. 나는 밥그릇을 들어 숭늉을 마신 뒤 꺼억 하며 트림을 했다.

“밥 먹고 숭늉을 마시면 소화가 잘 된단다.”

희명 스님이 내 트림 소리를 듣고서 한말씀 하셨다.

“이 보살, 거그 앉어 보아라.”

희명 스님이 이 보살이라고 한 긴 머리 여자가 자리에 앉았다. 나는 힐끗 긴 머리 여자를 쳐다보았다.

“얘가 응식이다. 이 보살보다 열 살은 어릴 것이니까 앞으로 동생처럼 잘 보살펴주어라.”

나보다 열 살은 더 먹었다는 이 보살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순간, 보조개가 부드럽게 파였다.

이 보살 누나와 윤 처사라 부르는 중늙은이 아저씨, 그리고 희명 스님과 함께 하는 암자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보살 누나와 윤 처사 아저씨는 절 살림을 했고, 희명 스님은 법당에서 목탁을 치거나 밖에 나가는 게 주로 하는 일이었다. 나는 하릴없이 암자 뒷산으로 쏘다니거나 아래 큰절 도순사에 다녀오곤 하는 게 일과였다. 도순사에 가면 젊은 스님들이 구지암의 이 보살 누나 안부를 물으며 초콜릿 같은 사탕을 주는 게 좋았다. 나는 사탕 얻어먹는 재미에 30분 거리인 도순사를 자주 갔다. 이 보살 누나에 대해 말해 줄 것이라곤 머리를 길게 풀었느냐 땋았느냐, 머리에서 샴푸 냄새가 나느냐 비누 냄새가 나느냐, 치마를 입었느냐, 승복 색깔 ‘몸빼’를 입었느냐 하는 것뿐이었지만, 도순사의 젊은 스님들은 그런 정보만 전해주어도 아주 좋아하였다. 그래서 심심할 때마다 나는 도순사에 갔지만 아무도 윤 처사의 안부는 묻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같은 방에서 자는 윤 처사에 대해 아는 게 더 많다. 잠이 든 뒤 얼마 있다가 코를 고는지, 무슨 노래를 잘 부르는지, 장작을 어떻게 패는지 등……. 그러나 누구도 윤 처사에 대해선 궁금해하지 않았다. 물론 희명 스님에 대해서도 궁금해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희명 스님이 궁금했다. 며칠씩 두문불출하며 아침저녁으로 법당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기도 하지만, 한번 밖에 나가면 여러 날 걸렸다. 무엇하러 밖에 나갈까? 아무래도 희명 스님도 나처럼 심심한 모양이다. 내가 심심할 때마다 도순사에 다녀오거나 뒷산을 쏘다니고 있듯이.

희명 스님은 밖에 나가든 암자에 있든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을 들여다보듯 알고 있는 듯했다. 하루는 스님이 안 계실 때 법당에 들어가 희명 스님 염불 흉내를 냈다. 불상 앞에 턱 앉아 목탁을 손에 쥐고선 염불하는 흉내를 내보았다. 그러나 읊을 수 있는 경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불상 앞에 놓인 과일들을 보고 말을 만들어보았다.

“대~추~곶~감~꼼~짝~마~라~날~만~새~면~내~것~이~다~”

같은 말을 길게 빼면서 중간중간 목탁을 따그르르 하고 한 번씩 치니 그럴싸했다. 희명 스님이 염불을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심심하던 차에 좋은 놀잇거리를 찾아낸 것 같아 뿌듯했다. 한참 그렇게 염불 놀이에 빠져 있는데 뒤통수가 근질거렸다. 돌아보니 희명 스님이 법당문 곁에 서 있었다. 나는 얼어붙듯 모든 동작을 멈췄다.

“아따, 응식이 목청 좋구나!”

희명 스님은 꾸지람 대신 얼굴 가득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머쓱해서 목탁을 한 번 쳤다. 갑자기 커진 목탁 소리가 법당 안을 채웠다.

“목탁 치는 법은 차차 저절로 알게 될 것인께, 우선은 학교 가서 공부를 쪼깐 더 해야 쓰겄다.”

희명 스님은 요 며칠 새 나를 학교에 보내려고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닌 모양이다.

“여그서 삼시롱 면소에 있는 학교를 댕겨라. 고등학교까지 나오믄 그 담엔 강원 가서 공부하믄 된께!”

해가 바뀌어 새 학기가 되자 면소에 있는 중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부는 뒷전이었다. 학교에 가면 심심하지 않아 좋았다. 또, 아침마다 이 보살 누나가 싸 주는 도시락을 점심때 까먹는 것도 좋았다. 이 보살 누나는 절에서 먹는 아침이나 저녁과는 달리 내 점심을 특별히 더 신경 써주었다. 윤 처사 아저씨가 장을 보러 가는 날엔 일부러 내 도시락 반찬으로 쓸 음식 재료를 부탁하기도 했다. 

나는 집의 어머니나 여동생은 떠올릴 새도 없이 절 생활에 점점 빠져들었다. 이 보살 누나는 살가워 좋았고, 윤 처사 아저씨도 푸근해서 좋았다. 그렇지만 희명 스님은 좋다가 싫다가 했다. 나를 위해주는 것 같기도 한데 어떨 때는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을 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절 생활 다 집어치우고 뛰쳐나가고 싶지만, 이 보살 누나 때문에 참았다. 그 무렵, 참을 인(忍) 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오로지 참고, 또 참고 할 뿐이었다.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오니 살림집 부엌 쪽 툇마루에 이 보살 누나가 앉아 어떤 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보살 누나, 무슨 나물이야?”

“응, 머윗대 껍질 벗기는 중이야.”

“그것 다 벗겨야 돼?”

“껍질 안 벗기면 질겨서 못 먹어.”

그 순간 지네 한 마리가 이 보살 누나의 팔뚝을 기어가고 있었다. 나는 머윗대 하나를 집어 지네를 뜰 아래로 걷어냈다. 이어 땅바닥에 패대기쳐진 지네를 발로 꾹꾹 밟아 뭉갰다. 바로 그때 희명 스님이 출타했다가 돌아오느라 절 마당에 들어섰다.

“응식아, 무엇 때문에 그러냐?”

“지네요! 이 지네한테 하마터면 보살 누나가 물릴 뻔했어요!”

“그렇다고 해도 죽일 건 없제.”

“안 죽이믄 또 기어올 텐디 그러믄 어떡해요?”

“그려도 죽일 건 없잖아. 저 마당 한구석 풀 속에다 던져 버리믄 되잖아.”

나는 이런 건 보이는 죽죽 죽여버려야 한다고 했고, 희명 스님은 생명 있는 것은 무엇이든 죽여선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보고 법당에 가서 절을 108번 하며 절을 하는 동안 ‘생명 있는 것을 다시는 해치지 않겠습니다’를 외치라고 했다. 절에 사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생명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면서 오래도록 나무랐다. 

“지네가 보살 누나를 물까 봐 그랬단 말이에요!”

내가 아무리 변명을 해도 희명 스님은 생명 있는 것을 죽이는 살생을 하면 안 된다고 한참 동안 우기셨다. 희명 스님한텐 이 보살 누나보다 지네가 더 소중한 것만 같았다. 나를 혼내는 것 보면 나보다도 지네가 더 소중한지도…….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턴 스님이 마뜩잖을 때마다 법당에 들어가 목탁을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속으로는 ‘스님 미워! 스님 미워!’ 하면서.

학교에서 아이들은 나를 절에서 학교에 다니니까 ‘학승’이라며 놀린다. 어떤 친구는 한술 더 떠 학승과 학생을 합쳐 ‘학스앵’이라며 놀렸다.

절집 사람들은 살생하지 않는다고 개미 새끼도 죽이지 않기에 고기도 먹지 않는다며, 내 도시락 반찬을 갖고 놀리기도 했다. 목장의 점심은 응식이의 도시락 반찬 같아야 한다면서 멸치 한 마리라도 있으면 안 되고 온통 나물 반찬만으로 채워져야 한단다. 그런 놀림에도 꿋꿋했던 건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 주는 이 보살 누나를 생각하면 기운이 났기 때문이다. 그런 이 보살 누나 팔뚝에 지네가 기어갔으니 내가 참을 수 있었겠는가. 그런 속도 모르고 희명 스님은 지네를 죽였다고 나무라기만 했으니…….

 

법당 건물 추녀 끝에서 여름비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한 밤이었다. 절 마당 한구석에선 비에 젖은 달맞이꽃 꽃잎이 땅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중 3 여름 방학을 맞아 학교 갈 일이 없어 밤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고 만화책을 보다가 오줌이 마려워 밖으로 나갔다. 법당 쪽에서 불빛이 새어 나와 비를 피해 뜰 안쪽으로만 붙다시피 해서 법당 쪽으로 가봤다. 뜻밖에 이 보살 누나가 불상 앞에 앉아 있었다.

이 보살 누나는 예불 시간이 아니어도 틈만 나면 법당에 엎드려 기도를 올렸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법당 안에선 불빛과 함께 울음소리도 같이 새 나왔다. 나는 조심스레 법당문을 조금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 보살 누나가 불상을 향해 반듯이 꿇어앉은 채 손을 가슴께에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법당 마룻바닥엔 이 보살 누나의 눈물이 떨어지고 있으리라. 

이 보살 누나가 합장을 한 채 기도하는 자세로 앉아 우는 모습에서 잠시 알 수 없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이 보살 누나가 눈치채지 못하게 곧바로 법당 앞을 물러 나와 윤 처사 아저씨가 코를 골고 있는 방의 문턱에 걸터앉았다. 

추녀 끝에서 떨어지는 빗소리와 이 보살 누나의 흐느낌 소리, 아니 흐느낌 소리보다 더 커다랗게 들리는 듯한 눈물 떨어지는 소리. 나는 오랫동안 방문턱에 걸터앉아 그 소리들을 들으며 여러 생각에 빠져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비는 그쳤지만 절 마당 한구석에 있는 달맞이꽃의 꽃잎이 모두 떨어져 있었다. 어젯밤, 이 보살 누나의 눈물이 떨어질 때 꽃잎도 같이 떨어졌던 모양이었다.

그날 이후 난 이 보살 누나를 보면 달맞이꽃이 떠올랐고, 또 달맞이꽃을 보면 이 보살 누나가 떠올랐다. 낮에는 다소곳이 몸을 사리고 있다가 해가 지면 그때부터 활짝 피는 달맞이꽃, 그 꽃잎이 비바람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 꽃잎이 떨어질 때 이 보살 누나의 눈물도 같이 떨어졌다. 

이 보살 누나는 그 후 정식으로 출가자의 길을 걷기 위해 경상도 청도에 있는 비구니 큰절로 공부하러 떠났다. 이 보살 누나의 떠남과 동시에 법당 마룻바닥에 떨어진 눈물도 이내 곧 흔적 없이 지워졌다. 그러나 내 가슴엔 그 밤에 떨어지던 빗소리와 꽃잎 소리, 그 소리들이 이 보살 누나의 눈물 떨어지던 소리와 함께 아직도 남아 있다. 

이 보살 누나가 출가자의 길을 가기 위해 구지암을 떠난 뒤부터는 윤 처사 아저씨가 음식 준비도 하게 되었다. 세 식구밖에 살지 않지만 매 끼니를 준비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나는 원래 입이 까다롭지 않아 뭐든 잘 먹지만 희명 스님은 가리는 게 많았다. 그러기에 요구 사항도 상당히 까다롭다. 그러나 윤 처사 아저씨는 희명 스님이 뭐라 하든 한 번 쓱 웃고 말면 그만이었다.

장작더미는 네모반듯하게 네 귀를 맞추어 쌓아라, 쌀 한 톨이라도 흘리지 않도록 조심해라, 부엌 바닥은 음식이 떨어져도 집어 먹을 수 있게 깨끗이 해라, 반찬을 많이 하지 말고 국 하나만 있으면 밥 한 그릇 비우게 하라 등등 이 보살 누나가 있을 때하곤 달리 세세하게 지적하는 게 많았다. 희명 스님 말씀이 옳긴 하지만 나는 숨이 막혔다.

‘으짜든지 고등학교 졸업 날 때까지만 참자.’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나도 구지암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론 도시락으론 밥만 싸 갔다. 반찬은 급우들 것을 같이 먹었다. 고등학교도 중학교와 같은 울타리에 있고, 중학교 동창들이 대부분 그대로 진학하였다. 게다가 절에서 다니는 줄 다 알기에 밥만 싸가도 다들 이해했다. 이제는 학스앵이라는 호칭도 아주 자연스럽게 되었다. 학승인 학생! 아이들은 절에만 살아도 학승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순사 젊은 스님들 말에 따르면 진짜 학승은 강원이 있는 절에 가서 불교를 학문적으로 제대로 공부하는 스님이란다. 나도 이제 그 정도는 아는 절집 사람이 되었다. 이 보살 누나도 불교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어쩌면 ‘학승’이 되기 위해 구지암을 떠났을 것이다.

“이 보살도 학승 자격을 따면 구지암으로 다시 돌아올 거야.”

도순사 젊은 스님들은 서로 쳐다보며 그런 말을 나누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상당히 알쏭달쏭했다.

‘이 보살 누나가 학승 자격 따면 구지암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신음 소리 같기도 하고, 흥얼거리는 소리 같기도 한 것이 눈을 뜨게 했다. 윤 처사 아저씨가 자다 말고 일어나 수첩을 뒤적거리며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처사 아저씨, 벌써 일어나셨어요?”

“나 땜시 깼구나. 날 밝을라믄 아직 멀었은께 더 자그라.”

윤 처사 아저씨가 더 자라고 손을 내저었다. 나는 일어난 김에 오줌을 누러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은 마당을 가로질러가야 한다. 그래서 오줌은 곧잘 마당 구석 풀 우거진 곳에 싸고 만다. 서둘러 오줌을 누고 방으로 들어갔지만, 윤 처사 아저씨는 여전히 수첩을 뒤적이고 있었다.

“무슨 특별한 날을 찾고 있다요?”

“아녀. 날마다 그날이 그날이제 특별한 날이 어디 있겄어?”

윤 처사 아저씨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수첩에서 계속 눈을 떼지 않았다.

“군대 가서 훈련받는다고 1주일 만에 옷이 왔고, 음, 한 달 있다가 자대 배치받았다고 편지가 왔는디…….”

윤 처사 아저씨는 거기까지 말을 하고 더 잇지를 못했다. 나는 윤 처사 아저씨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음, 부대로 급히 오라고 한 날이……. 그라고 가서 본께 이미…….”

나는 누워 있다 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래갖고 무슨 일 있었어요?”

“응, 아이가 군대 가서 죽었어.”

윤 처사 아저씨는 아이가 군대 가서 죽었다는 말을 덤덤히 내뱉고 말았다. 도리어 내가 충격을 받았다. 

“왜? 왜요? 뭣 땜시요?”

“데모했다고 군대로 끌려갔거든.”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데모도 안 했을 텐데 딸기 팔러 나갔다가 사라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죽었을까? 그럼 아버지 시신은? 그런데 아버지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딸기를 팔기 위해 끌고 나간 손수레만 발견되었을 뿐이다.

“응식이 니는 아버지를 잃고, 나는 아들을 잃고…….”

윤 처사 아저씨가 노래를 읊조렸다. 처음 듣는 노래였다.

 

부용산 산 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산 산허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 〈부용산〉(박기동 작사, 안성현 작곡)

“뭔 노래다요?”

“응, 옛날 노래여. 부용산이라구.”

“아까부터 계속 웅얼거린 것이 이 노래였던 모양이지라?”

“그랬는지 모르제. 아들놈이 생각 나믄 나도 모르게 부용산 노래를 웅얼거리게 된께…….”

윤 처사 아저씨는 아들이 군대에서 죽자 세상 살맛을 잃어버려 이 절 저 절을 찾아다니며 한 철씩 살다가 구지암에 들어온 뒤론 아예 눌러앉았다고 한다.

“도순사에서 허드렛일을 하믄서 밥 얻어묵고 있는데, 희명 스님을 우연히 만나 구지암까지 와서 빌붙어 살게 되었제.”

“그때 구지암엔 희명 스님 혼자 살고 있었던 모양이지라?”

“아니, 이 보살이 공양주 노릇함시롱 있었어. 막 고등학교를 나왔디야. 희명 스님 말씀으론 강원으로 공부하러 갈 때까정 밥 해주기로 했디야. 이 보살도 응식이처럼 구지암에서 학교를 댕겼는갑서.”

희명 스님 덕분에 이 보살 누나도 밥 안 굶고 학교도 다닐 수 있게 되었구나 싶었다. 희명 스님은 걸핏하면 내게 다짐을 두었다. 이 보살 누나에게도 그랬는지 모르지만…….

“응식이 너는 부처님 가피로 절에서 학교까지 다닌께 나중에 반드시 훌륭한 스님이 되어야 헌다. 알았제?”

중학교 다닐 땐 희명 스님이 하시는 말씀이 고맙고 당연하게 느껴졌지만, 고등학생이 된 뒤론 차츰 부담이 되었다. 때론 부담 정도가 아니라 되레 엇나가고 싶었다.

“치, 누가 날 데려다가 절에서 학교 보내래. 거지가 되든 깡패가 되든 내버려두었으면 좋잖아. 이게 뭐야. 아무리 깝치고 날쳐도 나는 결국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는 신세 아냐. 벌써 중이 되기로 정해져 있는 신세잖아!”

나는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어떻게든 희명 스님을 떠나리라 다짐했다. 고등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뭘 하든지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진 꾹 참고 구지암에서 잘 지내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마침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진 참고, 참고, 또 참으며 구지암 생활을 잘 하려고 마음먹은 게 나만의 속내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등학교 졸업식 뒷날 희명 스님이 나를 불렀다.

“이제 고등학교를 마쳤은께 큰 데 가서 제대로 불교 공부를 하고 오니라.”

“불교 공부라고라?”

그렇게 되묻기는 했지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잖아도 구지암을 벗어나고 싶었는데 희명 스님이 먼저 떠나라고 하는 것이었다. 불교 공부를 하러 가든 사회생활을 하러 가든 일단 희명 스님이 없는 곳으로만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얼마나 했던가.

“강원에 가서 공부하믄 진짜 학생이 되고 학승이 된단다!”

희명 스님은 내 고등학교 졸업을 기념하는 뜻으로 절 식구 모두 면소에 가서 외식을 하자고 했다. 그래서 윤 처사 아저씨와 나는 희명 스님을 따라 면소의 한 식당으로 갔다. 냉면에다 불고기를 파는 식당이었다.

“이 집 냉면이 맛있어! 밖에 나갔다 올 때 늘 여그서 저녁을 먹었제.”

살생을 끔찍이 싫어하는 희명 스님이기에 고기는 시키지 않으리라고 미리 짐작을 했다. 식당 아주머니가 주문을 받으러 오자 희명 스님은 우리 보고 뭘 먹겠느냐고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먹을 것을 정해 주문을 했다. 

“여그 엎어말아국수 삼 인분!”

‘엎어말아국수?’

나는 좀체 그런 음식이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윤 처사 아저씨도 감이 잡히지 않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물었다.

“엎어말아국수요? 고것이 뭣이다요?”

희명 스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먹어보믄 알제. 기가 맥히제!”

한참 뒤 식당 아주머니가 커다란 쟁반에 ‘엎어말아국수’ 세 그릇을 가져와 세 사람 앞에 하나씩 놓았다. 희명 스님이 먼저 젓가락을 들어 시범을 보였다.

“위에 있는 국수를 한 젓갈씩 먹음시롱 아래에 깔린 것도 같이 집어묵으믄 되제.”

위에는 냉면 면발이 가득하고 냉면 밑에는 얇게 썬 고기가 깔려 있었다. 윤 처사 아저씨와 나는 서로 마주 보며 가볍게 웃고 나서 젓가락질을 했다.

세 사람 모두 순식간에 냉면 그릇을 비웠다. 희명 스님이 윤 처사 아저씨와 나를 보고 물었다.

“오랜만에 목구멍 때 좀 벗겨냈제?”

윤 처사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입을 다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냉면을 다 먹고 나자 식당 아주머니가 매실차를 가지고 와 희명 스님께 물었다.

“애한테선 가끔 연락이 오는지요?”

애라고? 아마 이 보살 누나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희명 스님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중 공부 하러 간 녀석이 자주 연락하겄는가?”

“누구를 닮아서 그렇게 모진지…….”

식당 아주머니가 말끝을 흐렸다. 희명 스님도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나는 단정했다. 이 보살 누나구나. 근데 식당 아주머니가 그 누나 안부를 왜 묻지? 나는 궁금했지만 따져 물을 수가 없어 가만히 있었다. 윤 처사 아저씨는 어떤 상황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따라 희명 스님은 유난히 내게 잔소리가 많았다.

“응식이 니는 절에서 고등학교꺼정 다녔은께 인자 큰 절에 가서 불교 공부를 제대로 해서 중 노릇 한번 제대로 해야 한다!”

“스님같이만 하면 중 노릇 제대로 하는 것 아니라요? 지네 한 마리도 못 죽이게 할 정도로 계를 잘 지키는 것 스님한테 배웠으믄 되었제, 뭔 공부를 또 해야 중 노릇하는 것이다요?”

“아녀, 나는 중 시늉만 낸 것이여. 내가 중 노릇 제대로 못 했기에 이 보살도 공부 보냈제. 인자 응식이 니 차례여.”

절에 돌아와 잠자리에 누워 있자 오늘 일어난 일이 다 궁금했다. 희명 스님이 나를 공부 시키러 떠나보낼 생각인 것도 그렇고, 살생을 무지 싫어하는 분이 고기가 깔린 냉면을 사준 것도 평소의 희명 스님답지 않았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의아한 것은 이 보살 누나에 관한 것이다. 식당 아주머니가 왜 안부를 물었는지……. 어쩌면 아는 사람이 요새 보이지 않으니까 물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 

“윤 처사 아저씨,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는데, 아저씨는 아실랑가?”

“뭣이 궁금하디야?”

“이 보살 누나요. 식당 아주머니가 연락 자주 오는가를 왜 물어봤다요?”

“응, 그건…….”

윤 처사 아저씨도 말끝을 흐렸다. 사연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게 말을 하기는 좀 곤란한 모양이었다. 나도 더 묻지 않았다.

 

3월이지만 아직 찬 기운이 절 마당을 감싸고 있었다. 내가 순천의 큰절로 공부하러 떠나는 날이다. 희명 스님이 내 손을 잡고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강원에 들어가믄 한눈팔지 말고 오로지 공부만 열심히 해야 한다. 중 아니믄 팔만사천 지옥을 다 채울 수 없다는 말도 있다. 그만큼 중 노릇 제대로 한 사람이 없다는 얘기이다. 응식이 니는 중 노릇 제대로 하여 반드시 큰스님이 되어야 한다!”

나는 속으로 스님만큼만 하면 되겠지요, 라고 대꾸했다. 윤 처사 아저씨는 눈물을 보였다.

“인제 가믄 또 볼 수 있을지 모르겄다. 으짜든지 몸 건강히 지내야 한다.”

두 분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구지암을 떠났다.

큰절 생활은 쉽지 않았다. 군대 생활보다 더 힘들다는 행자 생활을 6개월 넘게 한 뒤 겨우 사미계를 받았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은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야 하는 강원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직 군대를 안 가봐서 모르는데, 군대를 다녀온 강원 선배들 얘기론 군대는 몸만 힘들지 머리는 힘이 안 드는데 스님 되는 일은 몸도 힘들지만 공부를 해야 해서 머리까지 힘들다고 했다. 4년여의 강원 생활을 마치고 가까스로 비구계를 받아 정식 스님이 되었다. 구지암에서 중고등학교 6년, 강원에서 4년 6개월, 그러고 보니 절에서 산 지 10년이 넘어서야 스님이 된 것이다.

강원을 마치자마자 여기저기 떠돌고 싶었다. 강원 동기들은 안거에 참여를 해서 장판 때를 묻히는 참선수행을 한다고 했지만, 나는 일단 떠돌기로 했다. 속으로는 떠도는 것도 수행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일반인들과 섞여 있을 땐 승복 입은 내가 표 나서 불편하지만, 절집으로 돌아다니기엔 승복 입었다는 게 참으로 다행이다 싶었다. 대한민국 어느 절에 가서든 승복 입고 있으면 자는 것 먹는 것을 걱정 안 해도 되기 때문이었다. 

전국을 떠돌다가 충청도 해안에 있는 절까지 왔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에 앓아누웠다. 그동안 전국을 떠돌아다닌 여독인지, 지난 10여 년의 긴장이 풀려서인지 알 수 없지만 몸과 마음 모두 가라앉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절 뒷방을 하나 차지하고 드러누워 땀을 쏟아내고 있었다. 거기서 희명 스님의 입적 소식을 알게 된 것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가까스로 기운을 차려 툇마루에 나가 앉아 있는데 마루 한쪽에 주소 띠지를 뜯지도 않은 불교 신문이 있어 아무 생각 없이 신문을 꺼내 펼쳤더니 한 면에 도순사 구지암 희명 스님이 입적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저 ‘아!’ 하는 탄성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방으로 다시 들어온 나는 걸망을 꾸렸다. 구지암으로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강원 마쳤으면 구지암부터 갔어야 하는데, 나는 전혀 그런 생각을 내지 않았다. 강원 생활 하는 동안에도 구지암에 한 번도 다녀오지 않았다. 내가 사사로운 정에 매이지 않을 만큼 신심이 깊어서도 아니었다. 구지암의 이 보살 누나와 윤 처사 아저씨가 그립기도 했지만, 희명 스님을 마주하는 게 무의식 속에서 버거웠는지 모른다.

걸망을 지고 밖으로 나오자 공양간에서 나이든 공양주 보살이 쪼르르 달려나와 걱정을 했다.

“스님,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으셨는데 어딜 가시려고요?”

“예, 이만하면 갈 만합니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나는 공양주 보살과 길게 대거리하지 않고, 주지 스님께 인사도 드리지 않고 절을 나섰다. 오늘 안으로 구지암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할 것이다. 구지암에 가면, 희명 스님만 없지, 어쩌면 이 보살 누나도 있고 윤 처사 아저씨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불교소설은 불교문학 진흥과 새로운 콘텐츠의 개발을 위해 ‘재단법인 보덕학회’의 후원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박상률
사람보다 개가 더 유명한 진도에서 ‘58년 개띠’ 해에 태어남. 1990년 《한길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진도아리랑》 소설 《봄바람》 동화집 《미리 쓰는 방학 일기》 희곡집 《풍경소리》 등 많은 책을 펴냄. 계간 《청소년문학》의 편집주간을 오랫동안 맡았으며, 1997년에 펴낸 소설 《봄바람》은 청소년문학의 물꼬를 튼 작품으로 지금도 독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 불교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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