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숲의 평상

오래된 공원 테니스코트 뒤편 낮은 언덕 위, 밑동이 굵은 늙은 소나무들이 십여 그루 서 있다. 땅에 솔잎이 깔려 있고 송진 냄새가 바람결에 퍼진다. 테니스코트는 2면인데 클럽 회원이 80명을 넘어 주말은 늘 붐빈다. 은퇴자들이나 자유업 종사자들은 평일 낮에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시간을 정해 코트에 나간다.

45세 프리랜서 작가인 나는 화 · 목요일 오전에 시간이 나서 아버지뻘인 70대 원로들과 공을 친다. 전직이 해군 함장, 고급관리, 교수, 소방서장, 의사, 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사람들이다. 모두 구력(球歷)이 30년이 넘는다. 그들은 못 하고 죽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인간이란 이야기하고 싶어 못 견디는 본능을 가진 족속이라 호모스토리쿠스라 불러야 한다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소설 소재나 얻어볼까 하는 생각으로 지난달 내가 슬쩍 이런 제안을 했다.

“어르신들, 생애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을 돌아가면서 회고하심 어때요? 요새 어르신들 자서전, 회고록 쓰기가 유행임다. 내용 좋으면 집필 도와드리고 출판도 안내해 드릴 수 있슴다.”

그들은 일제히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일주일에 한 사람씩 회고 이바구를 하고 그날 점심값 내는 걸로 합시다.”

우두머리 격인 전직 해군 함장의 말에 모두 동의했다.

맨 처음에 한 함장의 이바구나, 두 번째 전직 소방서장의 이바구는 꽤 재미있었다. 세 번째로 이바구할 사람은 정부 기관의 국장을 지낸 박영원 씨였다. 고졸 학력으로 말단 직급에서 시작해 2급 이사관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작년엔가 5급 사무관으로 퇴직한 클럽 회원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박 국장은 대단해. 말단에서 이사관까지 오르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 빠져나가기와도 같지.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불가능해. 조상님들 공덕도 있어야 하지.”

나는 박 국장의 회고 담론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철저한 출세주의자일 것이라 짐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회고하기 이틀 전 소나무 숲 평상에서 내게 말했다.

“하도 오래된 일이라 기억을 불러내고 있네. 베트남전 참전 시절 이야기야. 이 작가는 환상방황을 아는가? 독일어 ‘링반데룽’을 번역한 말이지.”

그는 라켓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108과(果)의 염주를 줄여 만든, 단주(短柱) 또는 합장주(合掌柱)라고 부르는 불물(佛物)이었다.

“불심 깊으셨던 할머니가 지녔다가 내 어머니에게 물려주셨고, 내가 베트남전쟁에 품고 갔던 것이네. 이거 때문에 영혼이 덜 망가졌다고 여기고 있네.”

단주는 요즘 불심 깊은 불자(佛子)들이 들고 다니는 것과 조금 달랐다. 짙은 흑홍색의 나무 구슬들이 조금 투박해 보이고 예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14과(果) 합장주군요. 왜 열넷입니까?”

“관세음보살의 십사무외(十四無畏)를 뜻하네. 석가세존에게서 열네 가지 두려움 없는 공덕을 받은 거에 유래하지.”

“환상방황은 등산하다가 짙은 안개 때문에 방향 잃고 자기도 모르게 그 자리에 다시 오는 위기를 뜻하는 말이지요. 그게 14무외 불물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요?”

“목요일 날 내 이바구를 들어보게. 글로도 쓰고 있네. 이 작가가 소설로 써먹어도 돼. 나 옛날에 이 작가가 졸업한 한국대학 국문과 지원했었네.”

“아, 그러셨습니까?” 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박 국장은 도입부에서 독자를 유혹의 갈고리로 걸어버리는 우리 소설쟁이들의 수법을 아는 듯했다. 거기까지 말해 한없이 궁금하게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문득 좋은 소설 거리를 얻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번뇌의 시간

만 74세 생일을 앞두고 망각의 골짜기 깊은 곳에 묻힌 기억의 조각들을 불러내며 이 글을 쓴다.

내 고향은 북인천의 해안으로 김포가 가깝다. 우리 집안은 30리 멀리 김포 한강 변에 있는 용화사에 다녔다. 증조모님이 거기서 기도한 뒤 내 할아버지를 잉태하셨다. 그렇게 태어난 내 할아버지의 짝인 할머니는 열심히 그 절에 다녔고 주지 스님에게서 합장주를 받으셨다.

내 외가가 김포에 있었다. 일가가 용화사에 다녔고 내 어머니도 처녀 시절에 여러 번 가셨다. 불공드리다가 만난 어머니들끼리 사돈 맺자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다. 혼인한 뒤에 할머니는 여러 며느리 중 늘 내 어머니를 데리고 용화사에 가셨다. 어머니가 나와 형제들을 잉태했을 때도 불공을 드렸다니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우리 4남매는 불교 모태신앙이다.

지금 용화사는 운양산 언덕 아래 강변도로가 뚫리고 조망이 좋아 신도들이 넘쳐난다. 서울 사람들 대상 템플 스테이로 유명하고 강변 언덕에 매우 고급스러운 요양병원을 지어 잘 운영하는 모양이지만 나 어릴 적에는 퇴락해가는 작은 불당 하나가 전부였다.

여섯 살 때인가, 소달구지를 타고 처음 용화사에 갔다. 누나들과 아우도 갔다. 운양산은 잎이 무성한 참나무들이 우뚝우뚝 서 있었다. 산 아래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변에 돛단배가 보였다. 법당 안 불상은 옛날 강을 지나던 뱃사공이 꿈에서 ‘배 밑 강물 속에 부처가 있다’는 계시를 받고 건져내 언덕 위에 모셨다는 내력이 있었다. 하얀색 입상(立像)이었는데 늘 웃고 있었다.

오체투지를 배워 불상 앞에 절했다. 주지 스님은, 증조모가 다니실 때로 따지면 4대(代)로 잇는 분이었는데 참한 아내를 둔 대처승이셨다. 우리 식구들은 불공이 끝나고 절 아래 스님댁으로 내려갔다. 신도들이 보살님이라 부르던 스님 부인이 산나물 무치는 솜씨가 좋아 우리는 맛있다 맛있다 하며 고추장에 비벼 먹었다.

스님은 탁발하던 중 여러 번 우리 집에 오셨다. 봄철 보릿고개에 공양미가 적어 스님 식구들이 굶는다는 말도 돌아서, 어머니는 따뜻한 쌀밥을 지어 드시게 했다.

고등학교 3년을 껄렁껄렁하게 보낸 내가 대학입시에 떨어지자 아버지는 엄하게 나를 다잡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라고 용화사로 보내셨다. 주지 스님은 새벽 예불 때마다 나의 합격을 기원하진 않으셨다. 나는 용화사가 가난한 것이 스님이 신도들에게 헛된 희망을 안겨주는 설법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어서 서운하지는 않았다.

내가 합격 통보서를 들고 가서 부처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자, 스님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외우라고 하셨다.

“대승불교의 시발점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고 많은 경전이 있느니라. 그 심장과 같은 핵심을 뽑아 놓은 것이라 ‘심경(心經)’을 붙였느니라. 외우면 어떤 위급한 때라도 역경을 이기고 새 길을 찾게 되느니라.”

베끼는 데만 두 시간이 걸리는 260자의 한문 경전, 108번을 쓰자 거의 외우고 뜻도 알게 되었다.

그 후 동사무소 직원이 되어 새마을 모자를 쓰고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느라 한동안 용화사에 가지 못했다. 큰비가 한 번 내리고 불당이 손을 쓸 수 없게 되자 대규모 중수를 했는데, 내 부모님은 많은 돈을 내셨고 나도 한 달 월급을 보냈다.

스물두 살 때, 휴직하고 입대했다. 병적 카드에 행정공무원으로 기록된 내가 왜 행정 병과(兵科)를 못 받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어쩌다가 단기복무 하사관 교육을 받고 어쩌다 특전사로 배치돼 검은 베레를 쓰고 낙하산을 타게 됐다.

반년 만에 베트남 파병 명령이 떨어졌다. 여단장은, 적을 사살하는 전투가 아니라 은밀히 정찰하는 임무를 수행할 것이므로 크게 위험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특전사는 대위 팀장 아래 소위나 중위 부팀장과 정보, 폭파, 병기, 통신, 의무 등 5개 병과 2명씩의 사병으로 짜인 팀이 기본조직이었다. 내 병과는 폭파였다. 죽어도 못 간다고 뻗칠 수도 있었으나 대신 넣을 사람이 없었다. 낙하산 강하, 헬기 자일 강하를 식은 죽 먹기처럼 하고 폭파 특기를 가진 사람이 몇 있기는 하나 그들 역시 곧 파병될 예정이었다. 그러니 나는 출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를 이끄는 팀장 오 대위는 책임감 때문에 갑자기 엄숙해지고 얼굴이 무쇠탈처럼 변했다. 부팀장 정 중위는 그렇지 않고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냈다.

“적과의 조우를 피하므로 위험은 적을 거라고 하지만 가봐야 알지, 죽고 죽이는 전쟁이니까는. 나는 어째 가슴이 으스스하다.”

파병 직전 휴가 때, 나는 어머니와 함께 용화사에 갔고 주지 스님은 목탁을 울리며 나의 안전을 기원해 주셨다. 나는 어머니 말씀에 순종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염송하며 108배를 했다.

내가 참배를 끝냈을 때 어머니가 스님에게 물으셨다.

“스님, 아들이 단주를 품고 가도 되겠지요?”

“네, 부처님이 지켜주실 겁니다.”

스님은 그렇게 말하고 내게 고개를 돌렸다.

“적군도 소중한 중생이니 함부로 죽이진 마라. 업보를 쌓게 되니 죽은 이를 보면 기원해 줘라.”

나는 그게 불교 정신이라 여기며 분명히 대답했다. “네, 스님.”

어머니가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단주를 품고 베트남으로 떠났다. 아우가 보낸 편지에 의하면 어머니는 불철주야 나의 무사를 기원하셨다. 작은 석불을 구해 대청에 모셔 놓고 108배를 올리셨다.

우리가 인생길에서 간혹 갖게 되는 희망이 대개 그렇듯이 위험이 적을 것이라는 희망은 산산이 부서져 허공으로 날아갔다. 우리가 베트남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두 달 앞서 파병된 4개 정찰팀 48명 중 9명이 전사했거나 중상을 입고 귀국해 있었다.

내 동기생 최 하사는 두 달 먼저 왔을 뿐인데 눈이 살기(殺氣)로 번뜩였다.

“적 지역에 열두 명이 장거리정찰 나가는 건 미친 짓이야. 백 명 이상 적에게 걸리면 끝장이야. 너도 하사니까 가장 힘들고 위험한 첨병조장 맡을 거야. 정신 바짝 차려. 전사자들 중 하사가 다섯이야. ”

나는 그야말로 정신이 번쩍 났다.

다섯 번째 정찰팀이라 우리 팀은 알파 팀, 베타 팀, 찰리 팀, 델타 팀에 이어 에코 팀이라는 명칭을 받았다. 곧바로 혹독한 적응훈련에 들어갔다.

도착 후 보름이 지나 첫 정찰 명령을 받았다. 4개 팀이 산악지역으로 침투하는데 가장 쉽고 안전하다는 곳이 우리 팀에게 맡겨졌다.

폭파 특기 내 조수인 김 상병은 개신교 신자였다. 십자가 목걸이를 예쁜 애인 사진과 함께 보여주었다.

“저를 지켜줄 거라고, 꼭 목에 걸라고 했어요.”

나는 주머니에서 단주를 꺼냈다.

“난 어머니 염주 갖구 있어. 우리 팀원들, 이런저런 부적을 품고 있을 거야.”

다음날, 우리는 헬기로 정찰 지역 상공까지 날아가 50미터 자일을 타고 땅에 내렸다. 전원 착륙한 뒤 신속히 적의 추격 반경을 벗어나야 했다. 적이 헬기 소리로 침투를 알아채고 포위선을 치며 달려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본진 9명에 앞서 길을 열어가는 첨병조장이 되었다. 방향을 유지하고, 적과 갑자기 조우하거나 부비트랩을 밟으면 먼저 죽어주는 게 임무였다. 1번 첨병은 밀림도를 휘둘러 관목 줄기와 넝쿨을 헤치며 길을 열고, 2번은 적과 조우하면 주저 없이 자동소총 연발사격으로 사살하는 게 임무였다. 3번인 나는 지도를 보며 방향을 잡아주는 책임자였다.

나무들이 빽빽해 맨몸으로도 빠져나가기 어려운 밀림을 헤치고 나아갔다. 5일간의 식량인 C레이션 통조림 30개, 수통 다섯 개, 탄약 300발, 수류탄, 폭약, 클레이모어 지뢰, 연막탄, 오성(五星) 신호탄 등이 가득 차 배낭은 40킬로그램이 넘었다.

숨이 차서 헉헉거리고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배 창자가 뜨거워져 단내가 올라왔다. 땀이 눈에 들어가 쓰리고 앞이 잘 안 보였다. 손수건을 정찰복 맨 위 단춧구멍에 꿰어 매달았다. 그러면서 나침반과 지도를 읽고 본진이 잘 따라오나 확인하고 상황을 보고하고 명령을 받아야 했다.

한 시간 만에 휴식 명령이 떨어졌다. 각자 맡은 책임 방향을 향해 엎드려 경계하며 쉬었다. 물은 수통 뚜껑으로 하나밖에 마실 수가 없었다. 하루 한 통 이상을 쓰면 2~3일 뒤엔 모자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밀림을 헤치며 적정을 관찰하고 오후 4시 30분에 숙영 준비에 들어갔다. 안전하고 유리한 지역을 정하고 대원을 3개 조로 나누었다.

부팀장 정 중위가 명령했다.

“네 명씩 3개조를 짜고 원형으로 4중 방어선을 쳐라.”

1차 방어선은 양담배 갑 크기의 경보기였다. 거미줄같이 가느다란 실을 뽑아 전면(全面)에 깔아놓았다. 침입자의 발에 걸려 길게 힘을 받아 끊어지는 순간 경보기의 파란 불빛이 빨간색으로 바뀐다. 2차 방어선은 조명지뢰였다. 침입자가 인계철선을 건드리면 빛을 뿜어 대낮같이 밝아지므로 적이 보이면 클레이모어를 터뜨리고 총탄을 퍼부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조수인 김 상병과 함께 3차와 4차 방어선에 클레이모어 지뢰 화망(火網)을 구축했다. 전기식 격발기를 누르는 순간 베어링 구슬 770개가 터져나가는 무시무시한 무기였다. 가로 22센티미터쯤, 세로 12센티미터쯤, 두께 3센티미터쯤 되는 푸른색 플라스틱 직육면체인데 앞쪽으로 휘어져 있어 전방 120도 방향의 모든 것을 휩쓸어버렸다. 땅에 꽂아 설치할 수 있게 양쪽 밑에 집게다리가 달려 있었다. 폭발력이 수류탄 다섯 배가 넘어 단번에 열 명 이상 목숨을 날려 보낼 수 있었다.

다른 대원들은 조별로 판초 우의 두 개를 딸깍 단추로 연결해 천막을 쳤다. 야전삽으로 바닥을 고르고 가장자리에 배수로를 파면서 샌드백을 20개쯤 만들어 방어선 정면 쪽에 방탄 턱을 만들었다.

진지 구축이 완료되자 30미터쯤 떨어진 좌우 조와 신호줄로 연결했다. 줄 양쪽 끝에는 손목에 걸 수 있게 둥근 고리를 만들었다. 고리를 양 손목에 걸고 툭툭 당기는 방법으로 다른 조와 30여 개 신호를 소리 없이 교환할 수 있었다.

한 시간 이상 걸려 모든 것이 완료되자 저녁 C레이션을 먹고 자리에 누웠다. 자동소총은 허리띠에 걸고, 수류탄 두 개는 가슴 앞에 찼다. 밀림은 물속에 잠기듯 어둠에 잠겼다.

깊은 잠에 빠졌던 나는 초번 경계병 김 병장이 옆구리를 찔러 깨어났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신호줄 고리를 받았다. 낚싯줄 당기듯 툭툭 두 번씩 당겨 양쪽 경계조에 신호를 보냈다. ‘여긴 이상 없다. 거긴 어떤가?’라는 뜻이었다. 곧 같은 신호가 왔다.

깊은 밤 밀림은 먹물의 바다처럼 캄캄했다. 무릎 앞에는 손잡이에 형광 칠을 한 클레이모어 격발기들이 놓여 있고 방탄 턱에는 경보기가 파란 불빛을 내고 있었다. 파낸 땅에서는 썩은 나무 조각이 인광(燐光)을 냈다. 고개를 돌려 보면 잠든 동료들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안 보였다.

경계는 시각보다는 청각 중심이었다. 밤에 모든 생명이 잠드는 건 아니었다. 귀 기울여 보면 온갖 생명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새들의 울음도 들리고 도마뱀 울음, 하이에나, 멧돼지, 노루, 토끼 들이 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들이 뚝 그치고 고요해지면 더 긴장되었다.

문득 오체투지로 108배를 하시는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여 단주를 꺼내 굴렸다.

“어머니, 밀림에서 경계 서고 있어요. 지금 단주를 손에 잡고 있구요.”

호호이 호호이. 어디선가 큰 새가 두 번 길게 울었다. 높은 나무 위인지 마치 하늘에서 무언가가 답하는 것 같았다.

자정 무렵, 경계 임무를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고 다시 누웠다.

사흘째 되는 날, 산속으로 더 깊이 이동해 정찰하고 숙영에 들어갔다. 하룻밤만 지나면 임무가 끝나고 이대로 첫 정찰은 지나갈 것이었다.

그날 밤에 일이 터졌다. 경계 임무를 끝내고 잠들었던 나는 경계 중이던 김 병장이 입을 틀어막는 바람에 깨어났다. 그것은 적의 출현을 알리는 비상 행동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보니 경보기에서 빨간빛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나는 정 중위를 입을 틀어막아 깨웠다. 중위는 침착하게 일어나 김 병장에게서 신호줄을 받아들었다.

열심히 신호줄을 당겨 팀장에게 보고한 중위가 성대 울림 없이 입술을 빠르게 움직여 명령했다.

“김 병장은 클레이모어 타격 준비. 박 하사, 김 상병은 수류탄 투척 준비!”

퍽. 조명지뢰가 터졌다. 불빛 속에 드러난 적이 AK소총을 난사했고 나는 총탄을 피해 엎드리며 김 병장의 등을 쳤다. 김 병장은 손깍지를 껴 클레이모어 격발기 전부를 누르며 가슴으로 덮었다. 어마어마한 폭음이 천지를 뒤흔들었고 폭발광은 한여름 태양을 마주 볼 때처럼 빛났다. 한꺼번에 터진 클레이모어 다섯 개의 후폭풍이 판초 우의 천막을 날려 보냈다. 나는 수류탄 두 개를 불빛 속으로 던졌다. 모두 3~4초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단 포대에서 155밀리 야포로 조명탄을 우리 머리 위로 쏘아대기 시작했다. 조명탄이 낙하산에 매달려 천천히 내려오고 밀림은 대낮처럼 훤했다.

중위가 명령했다.

“박 하사와 김 병장, 포복 접근해 적을 확인 사살하고 무기 노획하라.”

나는 몹시 추운 겨울날처럼 앞니를 덜덜 떨면서 포복해 나갔다. 상반신이 날아간 시체가 가시대나무 더미에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모두가 죽어버려 내가 확인 사살할 적은 없었다. 적 7명을 사살하고 소총 6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안전지역으로 대피해 아침을 맞은 우리 팀은 철수하기 위해 이동했다. 팀장 오 대위와 부팀장 정 중위는 첫 정찰을 나와 적과 조우하다니 이게 웬일이냐, 하는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상반신이 날아간 시체가 자꾸 눈에 떠올랐다.

부대로 귀환하니 부팀장에게 무공훈장, 팀장과 김 병장에게 주는 무공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단장의 하사금도 내려오고 특별외출이 허가되었다. 우리는 콘돔을 두 개씩 들고 선임하사관 인솔로 닌호아 읍으로 나갔다. 다른 팀 선례에 따라 마치 꼭 그래야 하는 듯 떠들며 나갔다.

우리는 맥주에 조니 워커 위스키를 타서 마셔 빠르게 취해갔다. 정해진 순서인 것처럼 여자들을 샀다.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소리쳤다. ‘야, 박영원. 싫다고 해.’ 그러나 혼자 빠질 수는 없었다. 내가 거부한다면 병장, 상병들에게 얕보일 게 분명했다. 전쟁터에서 믿을 것은 동료들밖에 없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여자와 해봤냐는 이 중사의 물음에 나는 취해서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아니라고 답했고 이 중사는 제일 예쁘고 어려 보이는 여자애를 안겼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동정(童貞)을 버렸다. 거의 인사불성으로 취해 있었으므로 그 말을 한 것도, 그렇게 여자를 골라준 것도 나중에 알았다.

그러고 며칠 뒤, 정찰 나간 델타 팀에서 비보가 날아들었다. 대원 하나가 적의 저격탄을 맞고 전사한 것이다. 팀장 오 대위가 살벌한 얼굴로 말했다.

“델타 팀은 정찰 중에 만난 아이놈을 살려 줬다. 애놈 말을 들은 적이 추격했고, 저격탄이 명중한 거다. 델타 팀은 그 애놈 잡아서 사살했다. 너희들, 죽어서 유골 상자에 담겨 돌아가지 않으려면 인정사정 보지 말고 쏴라.”

우리는 전사자의 명복을 비는 묵념을 올리고, 비정한 정찰병이 되기로 다짐했다. 팀장의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선임하사관 이 중사는 놀기 좋아하고 장난기도 있는 사람이었는데 자동화 사격장으로 인솔해가서 서슬이 퍼렇게 소리쳤다.

“20리 밖의 적들이 들을 수 있게끔 크게 서른 번 복창한다! 알겄냐?”

“넷!”

“나를 지키고 전우를 지키기 위해 인정사정없이 쏜다! 양심 따위는 밀림에 사는 하이에나한테 줘 버린다!”

우리는 목이 쉬도록 악을 써서 복창했다. 고국의 부대에서였다면 ‘하이에나’ 때문에 웃으며 악을 썼겠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악을 쓰며 사람 모형 표적에 자동소총 총탄을 퍼붓는 우리의 치아가 하이에나 이빨 같았을 것이다.

이날 나는 어머니의 단주를 깨끗한 흰 수건으로 싸서 사물함에 깊숙이 넣었다. 인정사정없이 총 쏜다는 다짐이 불교의 자비심과 충돌하기 때문이었다.

명령을 받으면 정찰 나가고, 귀대하면 여자를 사러 나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출동할 때 어느 날은 군목(軍牧)이 와서 기도했다.

“주님, 당신의 아들들의 생명을 지켜주시옵소서. 의로운 전투를 하게 지켜주시옵소서. 또한 양민을 적으로 오인하지 않게 밝는 눈과 판별의 지혜를 주시옵소서.”

군목도 용화사 스님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불교 모순, 기독교 모순이다.’ 나는 혼자 머리를 가로저었다.

‘자비심을 가지면 나와 동료의 생명이 위태해지고, 영혼 없는 기계처럼 비정하게 총을 쏘면 내 영혼이 망가진다. 어찌해야 하는가?’

나는 그런 의문을 안은 채 헬기에 올랐고 늘 그랬듯이 50미터 자일을 타고 1번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첨병조를 이끌고 앞장섰다.

4박 5일 정찰하는 동안 잊으려 해도 종교 모순이라는 생각은 간헐천이 분수(噴水)를 뿜듯 불쑥 솟아오르곤 했다. 그래서 나는 두 번 정찰 진로를 잃을 뻔했다. 잡념, 아니 마음속 갈등 때문이었다.

간신히 정찰을 끝내고 본부로 복귀했다.

어느 날, 김 병장이 울상을 하고 말했다.

“내가 보낸 사진 보고 누나가 편지에 썼어요. 눈빛이 파병 전보다 열 배는 강해졌다고.”

막사에 있는 전신대 거울, 그 앞에 선 우리는 우리의 눈이 살인마의 눈처럼 무서운 빛을 뿜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살기(殺氣)였다. 그러나 그 상황을 피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늪 웅덩이에 빠지듯 전쟁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환상방황을 넘어서

5월이 되고 베트남 중부는 우기에 들어섰다. 하루 한 번 갑자기 거센 스콜이 쏟아지더니 비가 오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그래도 장거리 정찰은 계속되었다. 나는 가장 유능한 첨병조장이 되어 갔다. 다른 팀은 첨병조가 방향을 잃어 톡톡히 고생하고 있었지만 나는 별로 헛다리를 짚지 않았다.

첫 정찰 때처럼 적이 숙영지 방어 정면으로 오는 우연은 없었으나 소규모의 적과 조우해 닭싸움하듯 후다닥 총 쏘고 끝나는 전투, 적의 기지를 발견해 좌표를 찍어 아군의 집중 포격을 유도하는 전과가 이어졌다. 큰 위기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단사령부에서 뜻밖의 명령이 내려왔다.

 

직할 공수지역대의 장거리 정찰팀은 단순한 정보정찰을 넘어서 적을 타격하는 공격정찰도 병행할 것. 적의 공세가 확대될 것이므로 적의 예상 통행로에 무인 클레이모어를 매설할 필요가 있다.

수동식 클레이모어는 경계병이 보고 판단해 폭발시키지만 이건 자동으로 터지니 양민들이 몰살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받은 명령이니 피할 수 없었다.

다음 주에 정찰을 나가서 3일째 되는 날, 팀장이 지도를 펴 보이며 명령했다.

“박 하사, 무인 클레이모어 매설하라. 정찰 기간에 한 번은 해야 한다. 들켜서 적의 손에 넘어가면 큰일 나니까 빈틈없이 해라.”

“첫 매설이니까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부팀장 정 중위가 팀장의 허락을 받고 따라나섰다.

책임이 상관에게 있는 것이므로 나는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클레이모어 여섯 개를 배낭에 넣고 정 중위와 경계병 한 명과 함께 근처 산길로 갔다.

밋밋한 야산의 와지선에 우마차가 다니는 산길이 나 있었다. 중위는 길이 기역자로 꺾인 곳을 자동소총 총구 끝으로 가리켰다.

“저기쯤 하자.”

길섶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클레이모어를 세 개씩 매설하고 풀잎과 나뭇가지로 덮었다. 어느 쪽에서 오든 타격하는 구도, 클레이모어 하나는 인계철선 접촉자를 때리고 나머지 두 개는 뒤따라오는 자들을 때리는 구도였다. 적 1개 소대쯤 단번에 박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전방 후방이 없는 비정규전이니 양민들이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었다. 나는 손이 떨리고 가슴도 떨렸다. 회로 전선에 마지막으로 건전지를 연결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어머니, 저 여기서 무인 지뢰 묻어요. 양민 안 들어오게 기도해 주세요.”

풀밭에 몸을 숨긴 채 자동소총을 들고 사위를 경계하던 중위가 몸을 일으켰다.

“뭐라고 중얼거렸냐? ……너 어머니가 주신 염주, 사물함에 넣었다고 들었다.”

“염주 품고 있으면 더 죄짓는 거 같아서요.”

정 중위는 머리를 끄덕이며 이를 악물었다.

“여긴 전쟁터니까 어쩔 수 없다. 나중에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살고 봐야지.”

그날 밤, 고맙게도 내가 매설한 무인 클레이모어 화망으로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다음 날 아침에 화망을 철거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 이번엔 무사히 넘어갔어요.”

그날, 첨병조를 이끌던 나는 놀라운 일을 겪었다. 파병된 지 넉 달 만에 환상방황에 빠진 것이다. 혹독한 고생을 하며 정찰 코스를 따라 이동했는데, 한 시간 전에 지나간 그 자리에 다시 온 것이다. 머릿속이 멍해지고 낭패감과 더불어 두려움이 밀려왔다.

첨병조장은 전진 방향을 잡아 길을 여는 책임이 있었다. 한국에서라면 산봉우리나 하천 같은 저명한 지형지물이 보여 쉽게 지도상 내 위치를 찾지만, 베트남 밀림은 달랐다. 지형지물은 30미터 높은 교목을 타고 꼭대기에 올라가도 보기 어려웠다.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는 큰 바위나 가시대나무 덩어리가 앞에 있으면 우회해야 하고, 즉시 우회한 만큼 방향을 회복해 나아가야 했다.

나침반은 팀원 전원이 갖고 있었다. 방향이 빗나가는 듯하면 누구든지 지적하여 회복할 수 있었다.

“정신 차렸어야지. 어째 다시 여기에……! 귀신에 홀린 것 같다.”

팀장이 탄식했다. 이제까지 내가 길을 잘 찾았기 때문일까? 내 정강이를 걷어차거나 때리지는 않았다.

보이지 않는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이끈 것 같았다. 나는 몹시 두려운 데다 맥이 빠져서 손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정찰 명령은 이날 6킬로미터를 정찰하라는 것이었다. 2킬로미터를 헛돌았으니 목표치 정찰은 불가능해졌다.

더 큰 건 위험의 증대였다. 밀림 사정에 익숙한 적이 정찰 흔적을 발견하면 소리 없이 추격하므로 모두의 생명이 위태로워진 것이다. 이따금 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우리를 추적하며 연락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신속 기동이다. 박 하사가 기진맥진했으니 첨병조장은 선임하사가 대신 맡아라.”

팀장이 명령했다.

우리 팀은 다행히 그 정찰을 무사히 마치고 귀대했다.

공수지구대 내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몇 개 팀이 정찰 중 1회가 아니라 거의 매일 무인 클레이모어를 매설한다는 것이었다.

“팀장 부팀장 선임하사는 직업군인이니까 진급이 목표잖아요. 훈장이 필요해서들 욕심내는 거지요.” 소문을 듣고 온 김 병장이 말했다,

열흘 뒤 다시 정찰을 나갔다. 나는 또 첨병조장을 맡았고 무인 클레이모어 매설 명령을 받았다.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그건 하면 안 돼. 천벌을 받을 짓이야.’ 하고 소리쳤지만 매일 매설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 여겼다.

내 표정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부팀장 정 중위가 다가왔다.

“꺼림직하면 네 조수 김 상병을 시키겠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싫다고 조수에게 시킬 수는 없었다.

“아닙니다. 저의 일인 걸요.”

그다음 정찰은 우중 작전이었다. 군화는 속까지 젖은 데다가 흙덩이가 달라붙어 몇 배로 무거워졌다. 온종일 빗속으로 기동하니 사타구니 안쪽이 젖은 바지에 스쳐 상처가 났다. 말을 들어보니 성기의 귀두 부분이 벗겨진 대원도 있었다.

숙영지에서 비를 맞으며 천막을 치고 방어선을 깐 뒤에 옷을 벗어 팬티까지 하나하나 비틀어 짜서 다시 입었다. 의무병에게서 빨간색 머큐로크롬을 받아 상처 난 사타구니에 발랐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 때문에 펄펄 뛰어야 했다.

그런 극한상황에서 나는 다음날도 첨병조를 이끌었다. 그러나 다시 환상방황을 저질렀다. 잃어버린 시간을 회복하기 위해 더 긴 시간을 기동했고, 결국 처음으로 숙영 천막을 치지 못한 채 숙영했다. 판초를 뒤집어쓰고 쭈그려 앉아 비를 맞으며 밤을 보냈다. 숙면하지 못해 모두 지쳤다.

나는 다음날 극심한 열병에 걸렸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무전으로 군의관과 교신한 결과에 의하면 급성 말라리아였다. 폭풍우가 계속 이어져 구급 헬기가 오지 못했고, 나는 의무특기 장 병장의 구급낭에 있는 키니네를 먹었다.

오후에 증상이 악화되어 헛소리하며 의식을 잃었는데, 나중에 들으니 어머니를 계속 찾으며 울먹였다고 했다. 정찰은 중단되었고, 나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팀원들과 더불어 헬기를 타고 귀로에 올랐다.

사단 지휘부에서 작은 산을 하나 넘으면 활주로와 헬리포트가 있고 그 옆에 우리 공수지구대와 의무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나는 의무대에서 하루를 지냈으나 증상이 심해 다음날 나트랑에 있는 102후송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열이 내린 뒤 깨어나 보니 내 손목에 어머니의 단주가 감겨 있었다. 정 중위가 내 사물함을 열어 단주를 꺼냈고, 내가 후송되기 직전에 의무대로 달려와 손에 쥐여준 것이었다.

나는 후송병원 병상에 누운 채, 열병을 앓으며 비몽사몽처럼 꾸었던 몇 번의 꿈을 생각했다. 끝없이 이어진 어둠 속을 빙빙 돌며 헤매는 꿈, 그러다가 가물가물한 작은 불빛을 발견하고 달려가는 꿈이었다. 나는 두 번 겪은 환상방황이나 말라리아 감염이 부처님이 내리신 시련과 은혜라고 생각했다. 그 안에 어머니의 단주가 있다고 생각했다. 단주 알을 굴리며 이제는 절반은 잊어버린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외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어머니 저는 잘 있습니다. 말라리아에 걸려 후송병원에서 잘 먹고 잘 지냅니다. 어머니가 주신 단주 덕분이며, 할머니와 어머니가 쌓으신 부처님 공덕 때문입니다. 여긴 나트랑이고 안전합니다. 작전에는 안 나가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

 

며칠 후, 정찰에서 돌아와 휴식에 들어간 팀원들이 단체 문병을 왔다. 나트랑 시내 외출을 겸해서 온 것이었다.

내가 정 중위에게 단주를 지니게 해 줘 고맙다고 하자, 중위는 미소를 지었다.

“네가 밀림에서 급성 말라리아 앓을 때 내 꿈에 네 단주가 보였다. 네 어머니의 기도의 힘인 것 같다.”

팀장 오 대위가 단주를 만져도 되느냐 물었고 나는 손목에서 풀어 건넸다.

“나는 네가 링반데룽에 빠진 게 마음에 갈등을 일으켜 집중력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여겼었다. 그러다 사람다워지라는 계시라고 생각했다. 사실 종교는 다르지만 내 어머니도 새벽마다 교회 가셔서 기도하시니까. 아무튼 네 염주 때문에 우리 팀은 나쁜 짓도 못 한다. 다른 팀처럼 매일 무인 클레이모어 까는 거 난 그렇게 못한다. 정찰 기간에 한 번은 명령이니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나는 두 장교에게 고개를 숙여 존경과 고마움을 표시했다.

전쟁은 그런 선량함과 무관하게 흘러갔다. 내가 퇴원하기 전에 팀은 다시 장거리 정찰을 나갔고 부팀장 정 중위가 전사했던 것이다.

복귀한 뒤 나는 다시 첨병조장이 됐고 마지막 정찰까지 어머니의 단주를 품고 나갔다. 다시는 환상방황을 겪지 않았다. 귀국 직전까지 내 무인 클레이모어 화망에는 멧돼지, 노루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팀원들은 부처님이 내리신 기적이라고 했다.

무사히 귀국해 어머니에게 단주를 돌려 드렸다.

“네 눈에서 살기를 없애야겠구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네. 절에 가고 싶어요.”

이튿날 어머니를 모시고 용화사에 갔다.

용화사 부처님은 대자대비한 모습으로 어머니와 나를 굽어보셨다. 나는 가장 경건한 자세로 108배를 올렸다.

 

살아 있는 날들

박영원 국장의 회고는 글보다는 이야기로 듣는 것이 훨씬 더 실감이 났다. 경청하는 테니스 원로들도 그가 비싼 값으로 시켜 준 초밥 도시락을 먹다 말고 이바구에 빠져들었다.

나는 궁금했던 환상방황과 14무외의 관계에 대해 물었다.

박 국장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다섯째가 육신의 상해(傷害)와 병마를 이기게 하는 구원, 여덟째가 험한 길을 헤쳐 나가게 하는 구원, 열두째가 자식의 복덕을 가져오는 구원이네. 내가 겪은 두 차례 환상방황은 자비와 살생이라는 양면이 서로 충돌해서 생긴 내면의 갈등 때문이었어. 말라리아 감염, 무인 지뢰 화망에 생명들이 안 온 건 모두 우연이지. 내가 번뇌하며 구원의 길을 찾으려 한 건 할머니와 어머니의 공덕이 밴 단주 때문이었지. 그게 우리 팀원들에게도 전염됐어. 나는 심오한 불교철학은 잘 모르지만 그게 부처님의 자비위신력(慈悲威神力)이라고 생각하네.”

함장이 물었다.

“혹시 전우들의 소식을 듣소?”

“다들 평범하게 살았소. 다른 팀엔 PTSD인가, 그 전쟁 후 공포증이라는 거에 걸려 무서워서 지하철 못 타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소.”

전직 교수가 입을 열었다.

“환상방황은 구원의 길로 가기 위한 시련을 상징해요. 어머님의 기도와 단주가 박 국장뿐만 아니라 팀원들까지 구원으로 이끌었지요.”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결례되는 질문 같은데, 특별히 관운이 좋았던 것도 불교의 공덕이라 생각하슈?” 소방서장이 물었다.

박 국장은 천천히 고개를 젓다가 이내 끄덕였다.

“내가 열심히 산 때문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내가 관운이 좋다고 말하니 그것도 있겠지요. 할머니와 어머니의 공덕이라는 생각도 해요. 그러나 문득 고급공무원으로서 누린 영화는 헛것이고, ‘나에게 아직 심판이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살생하는 전쟁에 갔었으니까요. 수류탄을 던졌고 무인 화망을 깔았으니까요. 불교의 업보는 무한대의 시간 아승기겁(阿僧祇劫)을 뛰어넘는다니까 그걸 쌓는 건가? 나는 답을 몰라요. 그걸 느낄 때마다 절에 가서 108배도 하고 참선도 하고 그렇게 살아요. 그러다가 부르면 가는 거지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단주 알을 굴렸다.

“참 잘하셨습니다.”

나와 다섯 명의 테니스 원로들은 그에게 큰 박수를 쳤다.

그 후 나는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했고 공간과 상황의 리얼리티를 확보하기 위해 여러 차례 그의 구술을 들었다. 내 차에 모시고 김포 용화사에도 갔다. 불당의 부처님을 바라보면서 문득 나는 무슨 업보를 쌓으며 살고 있을까 생각하며 경건해졌다. ■

 

  ✽불교소설은 불교문학 진흥과 새로운 콘텐츠의 개발을 위해    ‘재단법인 보덕학회’의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원규 leewk33@daum.net
1947년 인천 출생.동국대 국문과 졸업. 《월간문학》 신인상 및 《현대문학》 장편공모 당선으로 소설가 등단. 동국대 겸임교수 역임. 소설집으로 《훈장과 굴레》 《침묵의 섬》 《펠리컨의 날개》 《마지막 무관생도들》 등 다수와 대하소설 《누가 이 땅에 사람이 없다 하랴 1~9》 르포르타주 《독립전쟁이 사라진다》 인물평전 《약산 김원봉》 《김산 평전》 《조봉암 평전》 등이 있다. 대한민국문학상 신인상, 한국문학상, 우현예술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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