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소설은 불교문학 진흥과 새로운 콘텐츠의 개발을 위해  ‘재단법인 보덕학회’의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둔황에서 서쪽으로 1,500km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만났다. 

“니마……!” 

그녀의 얼굴은 조심스러움과 놀라움, 반가움으로 뒤섞여 있었다. 나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맥주잔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유리컵이 시멘트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났다. 수젠…… 나는 속으로만 그녀의 이름을 소리 내었다. 그녀를 다시 만나리라고는 모래알보다 더 작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서로 알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는 듯, 일리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입을 벌렸다. 일리는 쿠차에 머물 동안 나를 태워주는 위구르인 택시 기사였다. 

내가 쿠차에 온 까닭은 사형의 제안 때문이었다. 

“1,300년이 지났지만, 모래바람이 아무리 거칠다 해도 옛 모습은 아직 남아 있지. 쿠차에 가면 흔적이 없던 오래된 얼굴을 우연히 만날 수도 있지 않겠나? 사람은 스스로 변해도 풍광은 스스로 변하지 않으니. 혜초 화상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시안은 너무 달라졌네. 오히려 쿠차에서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 결기가 굳으면서도 하염없는 심사가 녹아나는 얼굴이 아우님 마음속에 갑자기 나타날 수도 있고…….” 

혜초의 수많은 순례지 가운데 쿠차를 찾아가 보라는 사형의 제안은 수젠과 티베트 승려 사티의 얼굴을 느닷없이 떠오르게 했다. 모래 돌풍 속으로 가라앉았던 고대 왕국이 지각 변동으로 드러나듯 두 얼굴은 눈앞에서 회화나무 이파리처럼 반짝였다. 

사형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더니 찻잔을 부시고는 책갈피로 표시해 둔 《왕오천축국전》을 펴서 건넸다. 단풍으로 완전히 물들어버린 산기슭에 서남쪽으로 기울어지는 잔광들이 내렸다.

“혜초 화상이 서역에서 설산을 넘어와 시안으로 가기 전에 지친 몸도 추스를 겸 쿠차에 있었다네. 현대에 들어서 화상의 모습을 그린 진영이 있기는 하지만 그림이 품격만 있어서야 그 뜻을 다할 수 없지. 먼저 길을 떠난 구도자들의 해골만이 이정표가 되는 사막을 건너고, 산이 높아 새도 날지 않고 도적떼들만이 길목을 지키는 설산을 넘어 온 이력이 눈매에, 입술에, 이마에, 발길에 새겨져 있는 모습을 생시처럼 만나고 싶네. 바람의 경전 같은 모습, 그게 늘 그립지. 화상이 쿠차에 머문 때가 서기 727년 무렵이었네.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이 그 무렵 그곳 안서대도호부에 있었지. 같은 해동국 출신이고 동시대인이니 둘이 서로 왕래가 있었을 것이네. 쿠차에 있으면서 주변을 다녀온 기록이 있으니 누군가 말이나 마차, 낙타를 내어주었으리라는 짐작이 드는군. 세 권 중 전해지지 않는 나머지 두 권에 화상이 만난 사람들 이야기가 들어 있으리라 추측할 수 있지. 아우님이 화상의 진영을 완성하면 나는 사라진 두 권의 이야기를 찾아 나서겠네.”

사형은 경주 남산의 암자 주지로 있으면서 혜초사상연구회를 이끌어왔다. 사형에게는 혜초 화상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행 작가이고, 배낭여행의 선구자에다 최초의 불교순례 기록을 남긴 대사상가였다. 나는 펴진 쪽을 읽었다. 개원 15년 음력 11월 상순, 서기 727년에 혜초가 파미르고원을 넘어와 쿠차에 머물면서 적었던 기록이 있었다. 쿠차는 안서대도호부가 있는 곳이고, 대규모 군사 집결지가 있는 이곳에 절도 많고 승려도 많으며, 고기와 부추, 파를 먹는다는 풍속까지 곁들여 두었다. 

“빼어난 소설 《둔황》을 쓴 이노우에 야스시는 둔황을 한 번도 가보지 않고 썼다네. 소설을 쓰고 15년 뒤에 가 보았다는군. 예술가는 되풀이되는 무수한 생로병사, 제행무상, 일체개고를 등에 지고, 번지는 슬픔과 비애, 열정과 탄식을 불멸의 모습으로 이루는 존재이지 않겠나. 단순히 화상의 진영을 벽에 걸어 장식하려는 게 아니라는 뜻이네. 다만 진영이나 초상화는 소설과 그 영역이 다르다는 것을 사막 순례길에 서 있어 봐서 조금은 이해하고 있네.” 

그 말은 상상력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체를 직면해야 화상의 진영에 다가설 수 있으니 화실에서 현실로 떠나라는 요청이었다. 혜초 화상이 쿠차 부근, 지금의 스바시 고성에 있는 대사찰에 머물며 승속을 가리지 않고 같이 공양하고 설법하고 수행하고 서로 궁금한 점을 묻고 배우는 무차법회를 열었다는 이야기를 사형이 내게 전할 무렵, 해가 서쪽으로 설핏 기울고 있었다. 사형의 얼굴이 적막해 보였다.

“그 많은 사찰과 탑들은 모래 속에 파묻혔지만…….”

나는 쿠차 방문 시기를 11월 하순으로 맞추었다. 그때는 관광객들이 거의 없는 비수기라서 비용이 적게 들기도 하지만 음력 11월 상순이면 양력으로는 12월 초여서 옛과 다름이 없는 계절에 스며들어 구도자의 객수를 느껴보고 싶어서였다. 계절도 무차법회처럼 승속을 차별하지 않고 생사를 아랑곳하지 않으니. 

“누군가는 화상의 모습을 찾아올 수 있도록 모래 돌풍 사이 어딘가 이정표를 숨겨 두었으리라 여겨지네. 우리가 찾지 못했을 뿐이지. 아우님, 《왕오천축국전》에 실려 있는 다섯 편의 시를 이정표로 삼으면 어떨까 싶네. 고향 경주를 그리는 마음도 있고 정한도 있다네. 화상이 남천축국 용수보살의 석굴에 이르러 고달픈 구도자의 심사를 쓴 시는 절절하지.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이곳 남의 나라는 서쪽 땅 끝에 있네. 따뜻한 남쪽에는 기러기가 날아오지 않으니 누가 고향 계림으로 날아가 내 소식을 전해 줄까.’ 이 시를 보면 심성이 풀잎같이 여겨지는데 어떻게 죽음보다 더 먼 길을 떠나기를 마다하지 않았는지 몸 둘 바 없게 한다네. 그리운 사람은 시간이 허물어져 버리면 만나기 어렵겠지?”

사형은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북천축국의 절에서 입적한 승려를 애통해하면서 쓴 시를 소리 내어 읽어보라며 책에서 시가 실린 쪽을 찾아 주었다. 나는 그 시를 소리 내어 읽었다. “고향 집 등불은 주인이 없는데, 타향에서 일곱 보석이 열린 나무가 꺾어졌네. 신령스러운 혼령은 어디로 갔는가. 옥 같은 모습이 재가 되어버렸네. 생각하면 슬픈 마음 간절하오니, 그대 소원 이루지 못함이 못내 섧구나. 그 누가 고향 가는 길을 알 수 있으려나. 돌아가는 흰 구름만 속절없이 바라보네.” 내가 읽기를 마치자 사형은 차를 따르고는 산봉우리에 걸린 붉은 구름을 보고 있었다. 차에서 쓴맛이 났다. 나는 이 시편들이 어떻게 혜초의 얼굴을 찾아가는 이정표가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인지 어리둥절했다. 

“이 번역판을 가지고 가게. 뒤쪽에는 원문도 실려 있네. 화상의 진영을 모시고 싶다는 뜻을 인연들이 매정하게 뿌리치지 못했는지 귀한 시주를 받고 나니 속가에서 헉헉거리는 아우님 생각이 났다네. 슬슬 세상일 접어가면서 일생, 이 몸뚱이가 품었던 서원을 이루고 싶네. 암자에 화상의 진영을 모시고 싶었지. 계림으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진영이 모셔지면 언제나 고향 집을 밝히는 등불이 되고, 마침내는 낙타덤불 같은 본지풍광의 이정표가 될 수도 있으려나 싶어서…….” 

사형은 얼굴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틈을 내게 들키기 싫어서인지 딴전을 피우는 듯했다. 닦을수록 얼룩지는 성에 낀 유리창을 들여다보는 얼굴이었다.

“나는 거짓말할 때도 많았으니 지옥에 가서 날마다 혓바닥으로 밭을 3천 평씩 갈지 모르지만 서원이 어긋남이 없도록 참회하고, 후학들에게 멀고 깊고 넓은 세계를 두 눈에 보여주고 싶어서 아우님에게 청하니 부디 거절하지 말게. 우리 젊은 날, 잠시나마 같이 공양간에서 불 때고, 밥도 했으니 말이네. 그림값은 달라는 대로 주겠네. 자네는 할 수 있다기보다 해내야지. 우리 둘 다 밥을 축내는 식충이 소리는 죽어서도 듣지 말아야지.”

나로서는 이게 무슨 횡재인가 싶었다. ‘낙타덤불 같은 본지풍광’이라는 소리가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는데도 허리에서 감전된 듯한 통증이 일어났다. 나는 사형이 턱없이 나를 믿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식충이에 불과하지 않았느냐고 은근히 책망하는 데서 이유가 있을 법도 했다. 내가 해내어야 한다는 의무감도 넌지시 내밀었다. 사형은 돌아 나올 수 없는 미궁의 사막 속으로 나를 밀어넣고 있었다. 사티와 수젠의 얼굴을 떠올리면서도 나는 시를 이정표 삼아 따라가면 보물지도를 보고 금강석이 가득 묻힌 장소를 발견하듯 혜초의 얼굴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도 슬쩍 들었다. 나는 사형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곳에 갔다 온 뒤에 그림 작업은 어디에서나 해도 좋네. 요사채에서 해도 되고. 더 먼 곳에서 해도 좋네.” 

사형은 언젠가는 때가 오면 쓰려고 향로 뚜껑에 맺힌 그을음을 긁어 석 되 넘게 모아 장독 안에 두었다고 했다. 향 그을음은 채색할 때 검은색의 깊이를 낼 수 있는 최고의 물감이었다. 등신불을 만드는 사티에게서 들었다며 그을음 이야기를 했던 생각이 났다. 사형은 그 말을 기억하고 지금까지 향 그을음을 모아둔 모양이었다. 청금석으로 만든 안료로 내는 푸른색은 하늘을 데리고 내려온 듯 짙푸르다는 사티의 말도 생각났다. 

“혜초 화상이 이렇게 여행도 하게 해주시고 작업의 기회도 주시어 팽개쳐버린 꿈을 살펴보게 하시니 대사상가가 틀림없습니다. 현실에서 출발하지 않는 사상은 개똥 말똥이지요, 대사형!”

농담처럼 말하기야 했지만 진심이었다. 그림값을 달라는 대로 준다는 말에 눈이 커졌다. 달라는 대로 준다니 주는 대로 받으면 된다는 생각도 하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사형의 마음 씀씀이에 얼굴이 붉어졌다.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실연하고 난 뒤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제대해서 만났던 여학생은 내가 만들어준 작품 포트폴리오를 파리의 예술대학원에 제출해 입학하고는 소식을 끊었다. 먼저 입학한 뒤 내가 뒤따라가서 동거하며 공부하기로 맹세했는데. 나는 정처 없는 증오심에 내몰리다가 홧김에 출가하고 말았다. 사형이 먼저 그곳에 있었다. 내가 붓도 집어던지고 출가했다고 하자 사형은 싱글싱글 웃었다.

“뭐, 그런 일이야 흔하지! 나는 방장스님한테 밥상 들고 가다가 하루아침에도 열두 번이나 속이 뒤집힌다네. 밥상도 뒤집히지. 돌부리는 뒤집히지 않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칫솔 하나만 달랑 들고 사형은 산문에 들어섰다. 그렇게 사형 사제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사미계를 받고 석 달이 지나지 않아 환속했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 민달팽이가 쳇바퀴를 돌 듯하는 절집살이가 고단했고 흥미도 없어졌다. 실연의 상처가 여드름 딱지처럼 떨어지자 나는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은 열정이 반점처럼 툭툭 불거졌다. 어쩌면 그것보다 언젠가 그 여학생을 만나면 죽여 버리고 싶다는 분노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아서 증오심을 거두는 길이 수행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절망감도 있었다. 사형에게만 이야기하고는 짐을 싸서 산문을 단숨에 나왔다. 베이징의 중앙미술학원에서 2년간 초상화 공부를 하러 갔다가 돌아오기 다섯 달을 앞두고, 중앙미술학원에 온 수젠과 사티를 만났다. 둔황 막고굴의 고미술연구원이었던 그녀는 고미술학 연수를 왔고, 라싸 포탈라궁에서 온 사티는 등신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색채학과 해부학을 공부하러 왔다. 

 

스물네 살 때, 수젠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워서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 없도록 하는 처녀였다. 속눈썹은 가문비나무 잎처럼 길고 촘촘했고 파르스름한 눈자위는 해맑았다. 깊고 미려한 눈동자는 기품마저 서려 있었다. 입술은 해당화보다 붉으면서도 단정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품이 넓은 쑥색 원피스에다 파란 머플러를 길게 늘어뜨린 옷차림새는 타클라마칸사막의 고대 왕국 공주가 나타난 듯 신비한 느낌까지 주었다. 그녀가 파란색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 그 움직임 따라 유학생들의 눈길도 뒤따랐다. 유학생들 눈에는 그녀가 대학가 최고의 미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족으로 간쑤성 공산당 간부였고 어머니는 위구르인이었다. 그녀는 위구르어는 물론 영어와 불어, 일본어도 잘했다. 사라진 고어인 서하어와 토하라어도 해독하는 명민한 처녀였다. 막고굴을 구경하러 오는 한국인들에게 벽화 설명을 하느라 한국어도 익혔다고 했다. 그녀는 나의 어색한 중국어 발음을 교정해주는 선생 노릇도 훌륭하게 해주었다. 

미인에다 날씬하고 언어 능력도 탁월하니 텔아비브에서 온 존, 폴리네시아 총독 아들 렌들을 비롯해 수많은 유학생이 침을 흘렸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쟝이 목을 매달듯 그녀에게 열중하고 있으니 아무런 내색을 하지 못했다. 파리에서 온 쟝은 그녀의 기숙사 방문 손잡이에 날마다 비싼 장미꽃 바구니를 매달아두고 결혼해서 파리로 그림 공부를 하러 가자고 졸라대었다.

그녀는 내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녀가 파리를 가면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가 둔황에서 거저 가져가다시피 한 불교 경전들을 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고 고미술학 공부도 실컷 할 수 있지만, 베이징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는 남동생을 돌볼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연수 오면서 병명도 모른 채 시름시름 아픈 남동생을 데려와 대학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녀의 아버지는 뇌출혈로 몸 왼쪽이 마비되어 있어 그녀가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그녀는 쿠차에서 태어났고, 어머니도 그곳에 살고 있었다. 나는 사티에게 의논해 보면 좋겠다고 했다. 

학교 안팎의 식당 사람들, 남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자가용 영업 기사들에게는 그가 ‘운명의 대가’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음력 생년월일을 대거나 얼굴을 보면 사티는 마니차를 돌리며 과거와 미래를 단숨에 풀어냈다. 사티는 짙붉은 승복에 황색 배낭을 메고 다녔다. 손으로는 늘 마니차를 빙빙 돌리곤 했다. 나도 그의 능력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수젠이 자전거를 잃어버렸을 때였다. 사티와 내가 학교 안 남문 나가는 길 오른쪽에 있는 양꼬치 식당 야외 테이블 의자에 앉아 있는데 그녀가 달려와 자전거를 잃어버렸다며 울먹였다. 자전거는 번호판이 달려 있을 정도로 중요한 재산이어서 자전거 도둑이 많았다. 기숙사 방에 잠시 들렀다가 나온다는 생각에 입구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자물쇠를 채우지 않았는데, 그 사이 누가 수젠의 자전거를 타고 가버렸다. 그는 마니차를 돌리며 방향을 짚고는 벌떡 일어나 동문 쪽에 있는 외국인 교수 기숙사 쪽으로 뛰어가더니 30분이 채 안 되어 수젠의 파란색 자전거를 타고 돌아왔다. 가난한 유학생이 훔쳐 갔으니 누군지 궁금해하지 말라고 하는 그의 표정은 단호해 보였다. 

사티는 운명을 아는 능력이 탁월하니 그녀의 고뇌를 풀 수 있는 정답을 틀림없이 가지고 있을 터였다.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원망하는 듯한 눈빛도 얼핏 스쳤다. 투명한 수정에 비치는 연붉은 색조가 호탄에서 나는 백옥 같은 그녀의 뺨을 물들이던 모습이 내게는 오래 남아 있었다.

나는 설산과 해, 달이 있는 풍경화를 그리며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다 낙담하듯 잊곤 했다. 화가의 꿈은 점점 메말라 입시미술학원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붓질은 입에 하는 풀칠이 되고 말았다. 사형은 내가 밤마다 소주병을 껴안고 잔다는 풍문도 이미 들었을 터였다. 

내가 무슨 상념에 젖어들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 사형은 담담하게 웃었다. 노랗고 발갛게 뒤섞인 단풍들이 고개를 쭉 빼고는 두 사람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짙은 산그늘이 창문을 넘어와 찻잔이 놓인 탁자 위까지 올라섰다. 

“아우님이 그림을 완성하면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왜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때 내게 한 소식 가르쳐주시게. 나는 먹물 옷을 입은 덕분에 중생들 눈치만 보면 되지만 아우님은 나보다 바깥세상 사나운 이치를 더 겪었으니. 여러 번 쿠차를 갔지만 그림 솜씨가 없으니 아우님 생각이 자주 났다네. 당나라 시대에도 화가들이 많았는데 왜 얼굴이 전해지지 않았는지. 정신을 어지럽힌다고 일부러 남기지 않았는지 그 속내도 자네는 만날 수 있기를 바라네. 화상의 발길이 아우님 손끝에 내려설지도 모르지.”

나는 갑자기 손끝이 무겁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불멸의 연금술 같은 그림 솜씨가 있다 해도 혜초의 발길이 내 손끝에 내려서고 아니고는 내 의지와는 다른 일이었다. 인도 불경을 한자로 옮겼던 쿠마라지바처럼 조각상도 없으니 나는 정지된 상태로 드러나는 순간을 담으려 하지 말고, 그려야 할 그 모습에 나 자신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사형의 말처럼 혜초의 시를 이정표 삼아서 그 시를 썼던 시간을 내 속에서, 모래바람 속에서 찾아서 형상을 이루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사형이 여행경비로 쓰라며 100달러짜리 지폐가 두툼하게 든 봉투와 비상시에 쓰라고 비자카드를 《왕오천축국전》 옆에 두었다. 사형은 잔잔한 웃음을 내내 머금고 있었다. 지워진 청춘의 모습을 발견할 때보다 아찔한 순간은 없는지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나는 사형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바지에 손바닥을 자꾸 문질렀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딴생각을 하면 일을 맡길 수 없다며 제안을 거두어들일까 싶어서였다. 

사티, 수젠과 나는 베이징언어대학의 기숙사에 같이 있었다. 시내 왕후징 거리에 있는 중앙미술학원 기숙사보다 절반 넘게 기숙사비가 쌌기 때문이다. 나는 오전에는 언어대학에서 외국인을 위한 중국어반에 다녔고 오후에는 초상화를 공부했다. 우리는 기숙사 같은 동, 같은 층에 있었고, 수업이 끝나면 양꼬치 집 노천카페에서 자주 만났다. 사티는 수젠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새까만 밤송이머리를 하고 있어서 셋 가운데 가장 어려 보였다. 

그녀의 남동생은 대학병원에 와서야 뇌 디스토마라는 병명이 나왔다. 그때 베이징에는 디스토마 약이 없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온 뒤 디스토마 약을 넉넉히 구해서 그녀에게 부쳐주었다. 그 약 덕분에 동생이 나아서 무사히 어머니에게 데리고 간다는 편지 뒤에도 몇 번은 소식을 주고받았다. 병은 나았지만 손상된 뇌는 회복되지 않아서 아기처럼 되었다고 했다. 사티는 스승이 갑자기 죽어서 라싸로 돌아갔다는 소식도 편지로 전했다. 그 뒤 소식은 내가 화실을 이리저리 옮기면서 끊어졌다. 이메일이 나오지 않았을 때였다. 막고굴 연구소로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다. 그렇게 잊히고 말았다. 

두 사람과 소식이 끊어진 지 23년이 되었다. 소식을 알아볼 데도 없었다. 사티가 살아 있다면 포탈라궁 안에 있겠지. 그러나 두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백 년 만에 숨을 쉬기 위해 물 밖으로 올라오는 거북이가 바다 위를 떠다니는 널빤지 구멍 속으로 고개를 들이밀 확률’보다 더 낮았다. 그런데 10년 전쯤 어느 날, 나는 벽에 기대어 앉아 뉴스를 보다가 벌떡 일어서고 말았던 적이 있었다. 사티를 닮은 듯한 승려가 라싸 거리에서 티베트 독립을 외치며 기름을 붓고 몸에 불을 붙이는 장면이 뉴스 화면을 가득 채웠다. 불 속에서 승려는 우뚝 서 있었다. 옆에서 찍은 장면이어서 그가 사티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인터넷에서 뉴스를 다운받아서 느린 화면으로 몇 번이나 돌려보았다. 불꽃이 확 번지고 연기가 솟구쳐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불꽃을 달래듯 손에 뭔가를 쥐고 돌리다 꽉 쥔 채 정지하는 승려의 모습이 불꽃 속을 일렁거렸다. 사티가 아닐 거야.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쿠차에 온 뒤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는 듯 역 앞에 서 있거나 전통시장 거리를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녔다. 이슬람사원도 기웃거렸다. 낙타덤불이 듬성듬성 이어져 있는 초원과 흙과 돌 더미가 이어져 있는 암석사막에 하염없이 서 있었다. ‘낙타덤불 같은 본지풍광’이라는 사형의 목소리가 눈앞을 지나갔다. 나는 모래 먼지 속에서 독을 품고 뿌리내리는 낙타덤불일까? 낙타 풀 가시에 찔려 입 안으로 흥건하게 피를 내어서 독을 뱉아내며 이파리를 씹어 먹는 낙타일까? 모래바람 속에서 덧없는 듯 희미하고, 없는 듯 있고 있는 듯 없는 저 얼룩진 형상이 어떻게 본지풍광으로 가는 길일까? 사형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혜초의 모습은 단순히 이미지나 똑같은 대상을 수없이 다른 각도에서 그리면서 단련한 솜씨로 그릴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다. 사각형 스케치북 크기가 사막보다 더 사납고 아찔하게 보였다. 초상화 주문을 여러 번 받았지만 이렇게 막막한 적이 없었다. 나는 한 달 일정으로 중국에 와서 시안에 열흘 있는 동안 관광지가 되어버린 혜초가 머물렀던 대흥선사를 여러 번 다녔다. 댐이 생겨 옮겨둔, 혜초가 기우제를 지냈다는 선유사 거북바위도 찾아갔다. 《왕오천축국전》이 나왔을 당시에는 베스트셀러였을 것이고 어딘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가 한 조각이나마 굴러다닐 수도 있을 법하다는 허황된 생각에 팔선궁 도교당 부근 고미술 가게를 돌아다니다가 홀린 듯 쿠차로 날아왔다. 

“니마! 저……, 다와예요” 

그녀는 한국어로 수줍게 말했다. 사티가 내게 지어준 이름이 니마였다. 수젠에게는 다와라는 이름을 주었다. 두 이름 다 티베트어였다. 학생들이 흔한 영어 이름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게 유행하던 때였다. 수젠이 사티에게 쉽게 부를 수 있고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이름을 지어 달라고 했다. 

“니마는 해, 다와는 달이라는 뜻이다. 나는 강리, 설산이다. 강리 사티, 스승에게서 받은 이름이다. 눈 덮인 산꼭대기에서 마음을 다스린다.” 

사티가 지어준 이름은 우리만이 서로 부르고 알아듣는 암호였다. 소식이 끊어지기 전에 그녀는 둔황 막고굴연구소에 있었다. 둔황에서도 쿠차는 또 얼마나 먼 곳인가. 풍덩한 짙은 초록색 원피스를 발목까지 내려 입은 그녀가 머리를 휘감은 파란 머플러를 풀자 얼굴이 드러났다. 눈가로 명주실 같은 주름이 지고 희디흰 뺨은 모래바람에 얼룩졌지만, 그녀는 빼어난 얼굴 모습을 스산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눈동자는 전보다 더 깊어져 있었다. 

그때 나는 쿠차 고성 앞 양꼬치 전문식당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서역에서 사막을 지나 천 갈래 눈물을 뿌리며 파미르고원을 넘어온 혜초는 안서대도호부가 있었던 곳, 내가 바라보는 창밖 거리를 걸었을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가 이십 대 중반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자 죽어서도 식충이라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사형의 목소리가 불덩이처럼 굴러왔다. 나는 불에 덴 듯 소스라치며 허리를 바로 세웠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일리가 우리가 앉은 식탁 옆으로 걸어오는 그녀를 보고는 손을 흔들며 웃고 있었다. 나는 파란 머플러를 머리에 휘감은 여인이 일리에게로 오는 줄 알았다. 그 모습이 눈에 익다는 느낌이 희미하게 들었다. 뜻밖에 그녀는 내게로 다가서며 모래바람 속에 파묻혔던 내 이름을 소리 내었다. 소설 《둔황》의 주인공 조행덕보다 더 넋이 빠진 듯하고 쇠퇴해버린 내 꼴을 그녀가 먼저 알아보았다. 

수젠은 여행가이드가 되어 있었다. 일본인 단체여행객들을 식당에 데리고 왔다가 일리를 보았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나를 보았노라고 했다. 사라진 고어로 적은 고대 불교경전까지 해석하는 능력이 탁월한 수젠이 여행가이드가 되리라고 앞일을 훤히 내다본다는 사티는 알았을까. 일리가 수젠 대신 여행객들을 호텔로 안내할 테니 두 사람이 이야기하라고 했다. 일본인들이 저녁 식사를 마치자 그녀는 그들에게 일리를 소개하며 그가 호텔까지 안내할 것이라고 일러주고는 의자에 걸쳐둔 양가죽 외투를 입었다. 일본인들은 다음날 비행기로 쿠차를 떠나는, 그해 마지막 단체여행팀이었다. 겨울부터 봄이 오기까지는 거의 단체여행팀이 찾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식당 밖으로 나가 버스에 올라 여행객들 인원을 확인하고는 내렸다. 일리가 택시를 몰고 버스 뒤를 따라갔다.

우리는 식당 밖을 나와 포목가게를 지나 위구르 민속공연을 하는 주점으로 갔다.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역 앞에 가서 서 있었을 것이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저녁마다 역에 나갔다고 하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조심스럽게 소리 내었다.

“역 앞에는 절대 가지 말아요! 제 말이 들리나요?”

그 말은 암호처럼 들렸다. 나는 역에 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암호는 질문과 대답이 없고 해독하는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듣고 싶은 이야기, 묻고 싶은 질문이 더 많았다. 전통시장을 지나며 그녀가 내 오른팔을 가만히 잡았다. 민속주점에 자리를 잡고 앉자 나는 뉴스에서 봤던 장면을 이야기하며 사티의 소식을 먼저 물었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내 눈을 막막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그 눈빛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지만 어떤 짐작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전통악기 탕부르의 구슬픈 소리가 주점 안을 떠다녔다. 

수젠이 마음을 다잡은 듯 뭐라고 말하려는데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주점 유리창이 심하게 흔들렸다. 2, 3분 간격을 두고 역과 숙소가 있는 버스터미널 쪽 비행장 부근 그리고 신시가지 쪽에서도 폭발음이 날아왔다. 공연이 멈추었다. 전통춤을 추던 무용수가 놀란 얼굴을 하고 무대 위에서 달려 내려와 수젠을 껴안으며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수젠이 무용수의 어깨를 다독였다. 총소리가 잇달아 들렸다. 사이렌 소리가 났고 경찰차들이 구시가지를 빠르게 지나가더니 곧 잠잠해졌다. 수젠의 휴대전화가 계속 울렸다. 그녀는 전화기에 대고 위구르어로 빠르게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역 앞 경찰 파견대와 터미널 경비초소에 폭탄이 터졌어요. 외곽지 주둔부대에는 기관총 공격이 있었어요. 가끔은 이런 일이 일어나요. 해외에 살고 있는 위구르인들이 홍콩에 모여서 독립시위를 해도 여기 사는 위구르 사람은 몰라요. 위구르 땅에서 위구르 남자들은 콧수염도 마음 놓고 기르지 못해요. 니마, 오늘은 숙소로 가지 말아요. 위험해요! 우리 집으로 가요.” 

그녀는 침착한 낯빛이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조금 전, 역 앞에 절대 가지 말라고 했으니, 거기서 폭탄이 터진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을까. 나는 그녀에게 묻지 않았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크게 다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리가 일본인 관광객들을 안전하게 호텔로 데려다주었다고 해요. 일리가 택시를 몰고 이쪽으로 오니 그 차를 타고 우리 집으로 가면 되어요.”

폭발 사건이 없었다 해도 쿠차로 들어오고 시외로 나가는 모든 도로에서 검문, 검색이 늘 있었다. 나는 으레 그런가 싶었는데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폭발음과 총소리를 듣고 나니 불안했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서 일리를 기다렸다. 길 곳곳에 검문소가 세워져 있었고 방폭 조끼를 입은 경찰들과 군인들이 지나는 차와 사람들을 막아서 한 줄로 세우고 있었다. 일리의 택시를 타고 그녀의 집으로 가는 동안 검문을 네 번 받았다. 검문을 받을 때마다 차에서 내려야 했다. 그들은 택시 안을 뒤지고 트렁크를 열어 보았다. 차 밑바닥으로 폭발물 검사기를 넣어 확인했다. 수젠과 일리가 그들과 안면이 있어서인지 별 탈은 없었다.

나는 그녀의 집으로 갑작스럽게 가게 되었다. 그녀의 집 앞에는 레저용 녹색 스포티지 차가 한 대 주차되어 있었다. 그녀는 스포티지가 잔고장이 없고 험한 길을 다니기 좋다며 한국인 단체여행객 가이드를 아주 많이 했다고 말했다. 담을 따라 오래된 뽕나무가 세 그루 있었다. 대문과 유리창 틀이 짙은 파란색이었다.

“어머니와 남동생만 있어요. 중앙미술학원 연수에서 돌아온 얼마 뒤 아버지는 죽었어요. 가이드를 하면서 집도 사고 차도 샀어요. 니마, 아무 걱정 말아요.”

거실에는 머리카락이 백옥처럼 센 그녀의 어머니와 휠체어에 탄 남동생이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내 손을 두 손으로 잡아 자신의 이마에 공손히 대었다. 왼쪽 손목에 낀 백옥 쌍팔찌가 내 손목을 스쳤다. 남동생은 벙글벙글 웃기만 했다. 

“남동생 이름은 사말 이디쿠드, 바람의 영광이라는 뜻이어요. 사말의 병을 낫게 했던 당신과 같이 집에 간다고 했어요. 우연히 만났다고. 약속처럼……”

그녀의 어머니는 투루판의 청포도로 만든 포도주와 건포도를 들고 와 그녀에게 건네주며 방으로 들어가라는 눈짓을 했다. 그녀의 방안에는 침대 하나와 책상, 옷장이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사티와 수젠, 내가 회화나무 아래 곧게 서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든 액자가 놓여 있었다. 저런 모습으로 사진을 찍었다는 생각이 났다. 나는 오래전에 잃어버린 사진이었다. 

“가장 행복한 시절이어요.”

그녀는 사진 액자를 쓰다듬으며 그날을 현재형으로 말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모래바람처럼 일어났는지, 누런 바람 앞에서 소식을 알 수 없어 잊힌 시간들이 서로를 얼마나 얼룩지게 했는지 이야기했다. 뜰 앞 석류나무 가지가 공중에 부딪히는 소리가 쉼 없이 들렸다. 오아시스 마을은 모래바람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때아닌 빗줄기가 창문을 요란스럽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굴절된 젊은 날처럼.

사티의 소식을 이야기하면서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점점이 고이기 시작했다. 

“니마가 뉴스에서 본 얼굴이 사티였어요. 사티는 서 있는 등신불이 되었어요…….”

그녀가 내 뺨을 닦아주었다. 그녀의 눈물에만 정신이 팔려서 내 얼굴이 얼룩지는 줄 몰랐다. 

“사티처럼 이생을 살고 싶었어요.”

사티처럼!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던 그녀의 두 눈에서 그만 소리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저 울음 앞에서 나는 그녀에게 어떤 질문도 할 수 없었고, 질문해서도 안 되었다. 책상 위에 포도주병이 하나씩 늘어났다. 폭우가 쏟아졌다. 번개가 모래벌판으로 날아갔다가 창가로 되돌아오곤 했다. 

다음 날 아침, 수젠이 단체여행객들을 비행장에 데려다준 뒤 나를 태우고 스바시 고성으로 갔다. 수젠이 함께 가 볼 데가 있다고 한 곳이었다. 폐허가 된 벌판 사이로 쿠차 강이 지나갔다. 흙더미만 남아 있는 옛 절터에는 우리 두 사람밖에 없었다. 지난밤 폭우로 강은 물이 불어나 있었다. 수젠은 스바시는 ‘물머리’라는 뜻의 위구르어라며 천산에서 눈 녹은 물이 언덕 아래 강으로 흐른다고 말했다. 

“며칠 전 세 번이나 꿈에 사티가 니마를 데리고 저를 찾아왔어요. 우리 세 사람은 여기 서 있었어요. 사티는 황금 옷을 입은 듯 온몸이 환했어요. 똑같은 꿈이었어요. 우리는 볼 수 없지만 우리를 볼 수 있는 어딘가에서 사티는 걸어 다니는 등신불이 되어 찾아오나 봐요. 이제는 바람 소리만 가득하지만 여기 아주 큰 사찰이 있었듯이.” 

그녀는 모래 먼지가 휘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목소리 사이로 ‘혜초 화상이 여기서 무차법회를 열었다’고 알려주던 사형의 얼굴이 지나갔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가고 있었다. 긴 바람 소리가 우리 이름을 부르는 사티 목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흙더미 흔적들 사이에서 사티의 목소리에 겹쳐 모래바람은 두 사람을 날려버릴 듯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갑자기 큰 소리를 내지르며 혜초 화상이 오아시스 마을 사람들에게 설법하는 풍광을 떠오르게 했다. 그것은 햇빛과 바람이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광휘 속에 파랗게 펼쳐졌다. 나는 연필로 광휘 속에 드러나는 얼굴을 스케치북에 정신없이 그렸다. 휘몰아치는 선의 움직임을 따라잡고 싶었다. 그러나 그 광휘의 선은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이 순간이 바로 사형이 말하는 ‘바람의 경전’일까. 스케치북에는 희미한 모습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언덕 아래 흐르는 강물을 보았다. 

“강물이 어디로 흐르는지는 강만이 안다.”

낮았지만 엄숙한 사티의 목소리가 금방 있었던 일인 듯 귀에서 울려 나왔다. 그녀가 쟝과 함께 파리로 가야 하는지를 묻자 나온 대답이었다. 회화나무 연노랑 꽃잎들이 머리 위로, 눈앞으로, 바닥으로 세차게 떨어지는 초여름 저녁 무렵이었다. 사티는 ‘남동생이 다와의 관세음보살’이라고 했다. 수젠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날 처음으로 세 사람은 함께 회화나무 아래 서서 사진을 찍었다. 교내 사진사가 웃으라고 소리쳤다. 우리는 앞서 일을 잊은 듯 싱그럽게 웃었다. 그녀는 남동생을 간호하러 병원으로 갔다. 사티는 떨어지는 회화나무 꽃잎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사티의 얼굴에는 슬픔과 격정이 교차하는 눈빛이 새겨져 있었다. 

“남동생은 명이 짧다. 다와만이 그 명을 이을 수 있다. 다들 행복해지고 싶으니 운명이 궁금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고뇌가 깊은 시절이 가장 행복한 시절이다.” 

“사티, 너는 너의 운명을 알겠구나.” 

“증오도 거두고 성냄도 거두고 격정도 거두는 날이 온다.”

그의 말을 듣자 나는 마음속에서 외면해 왔던 증오가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사티가 말하는 그날이 내게도 올까? 내 운명이 어떤지를 묻고 싶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대답은 엉뚱한 질문을 자꾸 하게 했다.

“등신불을 만드는 법을 배운다니, 너도 등신불이 되고 싶은가?”

“등신불은 흔하다. 육조혜능도 등신불이고 구화산 지장왕보살도 등신불이다. 어떤 수행자는 등신불이 되려고 곡기를 끊고 솔잎을 양식으로 삼고 미리 옻물을 마신다. 그러면 서서히 마른 살갗만 남는다. 내장도 마른다. 나는 앉아서 죽고 싶은 생각이 한 점도 없다. 스승은 색채에 혼령이 담겨 있으니 그게 눈에 보이도록 공부하라고 이르셨다. 색을 알면 공도 안다.”

“사티, 너의 스승은 누구인가?”

“서 있는 등신불……!”

사티는 마니차를 돌리며 입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그의 주문은 가까이 다가섰다가 멀리 타원형으로 휘어지는 태양계의 회오리 소리처럼 들렸다. 왜 주문을 외우지? 기억하는 모든 이름을 위해서. 영어와 중국어를 섞어가며 우리는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았다. 너는 누가 기도해 주지? 내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이 한다. 나는 설산 꼭대기에 서서 다른 이들의 이름을 밝히겠지. 스승은 가슴속에서 무수하게 일어나는 생각을 믿지 말라고 이르셨다. 현실에도 고정된 믿음을 가지지 말라고. 현재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수젠의 청도 있었지만 그가 우리를 위해 기도하려고 티베트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의 본래 모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복제되어 미래 어딘가에서 기다렸다가 불쑥 나타나는 습관이 있는 듯했다. 그것은 눈에 드러나는 무수한 오차를 헤집고 시간에 덧씌워진 모습을 파헤치고 뒤흔들었다. 나는 간결한 사티의 목소리처럼 혜초의 모습이 어딘가에서 조금도 얼룩지지 않은 채 기다리고 있기를 바라는 간곡한 심정이 되고 가고 있었다. 광대하고 건조한 언덕으로 구름이 몰려오고 강 건너 쪽에 번개가 떨어졌다. 그녀가 내 손을 잡아당겼다. 비가 쏟아졌다. 우리는 차 안으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처음으로 인도 불경에서 한문으로 옮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을 동북아시아로 유행시켰던 승려 쿠마라지바의 고향 마을, 설산 파미르를 넘어온 혜초 화상이 아픈 몸을 추스르던 곳, 다와의 고향에서 우리가 만났어요! 비가 내리면 마른 강변이 한순간 초록빛으로 번져요.”

그녀의 집에서 사흘을 더 머물렀다. 쿠차에 있을 동안 수젠이 그녀의 집에 있는 게 안전하다고 했다. 숙소에 둔 여행 가방을 챙겨 그녀의 방으로 옮겼다. 경찰과 군인들이 서 있는 쿠차 거리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은 붉은 그림자 같았다.

나는 스케치북에 그녀의 어머니와 사말을 그렸다. 수젠이 웃고 있는 얼굴,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얼굴과 옆모습을 옮겼다. 사진 속 세 사람의 모습도 새겼다. 창문 너머 모래바람이 솟구쳐 올랐고 그 사이로 음력 11월 상순, 혜초가 쿠차에 머물렀던 날짜가 지나가고 있었다. 모래 돌풍이 쉼 없이 일어났고, 스케치북은 바람이 뒤덮은 모래사막처럼 깊고 넓게 확대되었다. 눈앞이 점점 흐려졌다. 나는 눈을 감고 그렸다. 눈을 감아도 젊은 날 세 얼굴은 투명하게 보였다. 선을 긋고 있는 나 자신이 분해되듯 바람 속으로 떠나갔다. 낙타덤불이 나타났다. 모래 돌풍 속에서 손끝 움직임만 남았고 그것도 곧 지워졌다. 몸이 모래바람에 건조되어 공중으로 날아갔다. 어느새 나는 그녀와 함께 쿠차강이 보이는 언덕에서 한순간 만났던 광휘의 선을 따라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지나왔던 나의 시간이 사라지고 파란 대문이 있는 그녀의 집도 사라졌다. 사라지는 모든 형상은 내게 상실도 아니었고 망각도 아니었다. 화살로 꽂히는 아픔도 아니었다.

모래 광풍 속에서 나는 과거에 걸어서 단단해진 길을 벗어나 어디선가 전혀 방향도 알 수 없는 낯선 길에 서 있었다. 스케치북에 연필이 움직이는 소리만 아득하게 들렸다. 사라진 길과 새로 난 길을 만드는 시간이 겹쳐 불꽃을 일으켰다. 가람이 파묻히고 탑이 무너진 자리에서 마음에 품고 있는 생사의 비밀을 내보이며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내게 무슨 질문을 하고 싶은가?’ 하는 눈빛이었다. 그 얼굴은 그녀와 함께 간 스바시 고성에서 푸른 색채로 찬 광휘처럼 찾아왔던 모습이었다. 그 얼굴이 본래 혜초의 진면목이 아닐 수 있다는 자지러지는 듯한 외침이 나의 내부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그러나 본래의 진면목을 내가 찾아갈 수 없고 드러낼 수 없다 해도 나는 그 얼굴, 그 어깨와 허리와 긴 손과 단단한 발을 그리는 맹목적인 순간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순간 나는 모든 곳에 있었고 어느 곳에도 없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온몸은 땀범벅과 속울음으로 차 있었다. 경주로 돌아갈 날짜가 다가서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그녀에게 《왕오천축국전》을 내놓으며 혜초의 모습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 흔적을 만나러 쿠차를 찾아왔다가 그녀를 만났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녀는 책 뒤쪽 원문을 살펴보더니 쿠얼러 부근 카라사르의 칠개성 천불동 절터에 가면 혜초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고 알려주었다. 

“꿈에서는 사티가 니마를 데리고 오고, 현실에서는 혜초 화상이 우리를 만나게 해 주었군요. 그 초상화는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없어요. 단순히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주려고 만든 전시품에 불과할지도 몰라요.” 

《왕오천축국전》에는 칠개성 절터가 오기라는 지명으로 나와 있었다. 구법승 법현, 현장이 오기를 거쳐 인도로 순례자의 길을 갔다. 수젠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각진 얼굴에 눈썹이 짙고 눈이 부리부리하고 집념이 강하게 보이는 혜초의 초상화 사진을 휴대전화기에서 찾아 보여주었다. 

불현듯 나는 그곳으로 가고 싶었다. 초상화가 조잡하다 해도 실마리를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쿠얼러는 위구르어로 ‘바라본다’는 뜻이라고 수젠이 가르쳐주었다. 다음날 낮 12시 36분 쿠얼러행 열차표를 인터넷으로 미리 끊었다. 쿠얼러는 쿠차에서 300km가량 떨어져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그곳에서 시안을 거쳐 경주로 돌아갔다가 좀 더 오래 머물 준비를 해서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수젠이 옷장에서 파란 머플러에 싼 상자를 꺼내어 내게 건넸다. 그녀는 사티가 라싸로 돌아가며 언젠가 니마를 만날 테니 그때 이 상자를 주라고 했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머플러 매듭을 풀고 나무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청금석으로 만든 파란색 안료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사티는 내가 이곳에 올 줄을 이미 알고 있었을까. 파란색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타클라마칸사막의 북쪽 오아시스 마을 너머 파란 불멸의 풍광 같은 혜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림을 완성하지 않으면 나는 시체로도 고향에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느낌이 서늘하게 찾아왔다. 사형은 그 어디에서나 그려도 좋다고 했다. 화실을 떠나 현실로 가라는 그곳이 어디인지 사형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을까. 

“오래 간직해 왔어요. 사티의 선물을 전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어요. 니마, 언젠가……, 차를 몰고 함께 스카르두에 가요. 그곳은 《왕오천축국전》에 대발율국으로 나와 있어요. 거기에도 샹그릴라 호텔이 있어요.” 

그녀는 셋이 자주 들렀던 베이징의 샹그릴라 호텔을 떠올리는 듯했다. 그녀도 잊지 않고 있었다. 셋 다 돈을 아끼느라 감자무침, 우육면, 볶은 면, 좁쌀죽으로 끼니를 때울 때가 많았다. 호텔 1층 라운지 바에서 그는 야채샐러드와 차를 시켰고 수젠과 나는 연어샐러드와 맥주를 시켰다. 그런 날은 사티가 누군가의 운명을 봐주고 사례비를 받은 날이었다. “방편은 즐거운 방편이어야 한다!”고 단단하게 소리 내던 사티의 얼굴에서 뜻밖에 사형의 얼굴이 스쳐갔다. 짐을 싸 들고 산문을 확 나서다 산길 끝에서 얼핏 뒤돌아보았을 때, 환속하는 내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 어서 가라는 듯 손을 내젓고 있는 사형의 모습이 왜 그때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현재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으니까요!”

사티가 내게 했던 말을 그녀가 외치듯 소리 내었다. 먼먼 후일을 기약하는 말이었지만 내가 혜초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할 때 비로소 나의 현재가 시작하리라는 예언처럼 들렸다. 우리는 휴대전화기에 서로의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위쳇에 서로를 친구로 등록했다. 이제는 연락이 단절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집 주소도 적었다. 여행 가방을 끌고 그녀의 집을 나서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왼 손목에 찬 백옥 쌍팔찌를 빼서 나와 수젠의 손목에 하나씩 채워주었다. 

개찰구 안으로는 열차표 없이 들어가지 못하지만 그녀가 가이드 일을 해왔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을 아는 역무원이 통과시켜 주었다. 열차를 기다리는 승객도 몇 사람 되지 않았다. 개찰구를 지나 내가 타야 하는 열차까지 그녀가 따라왔다.

“니마, 저는 이곳에서 오래 살 거여요. 용수보살은 700년을 살았어요.”

열차에 오르기 전,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말은 언제든지 찾아오라는 의미로도 들렸다. 언젠가 나는 그녀를 만나리라는 예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 예감은 불가능하다고 스스로 외면하면서도 가슴 깊이 간직한 기다림이었다. 시작조차 하지 않은 현재가 출발하기 위해 나는 또 얼마나 더 기다리는 날을 견뎌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러나 혜초의 시가 밝히는 이정표를 따라서 나는 하염없이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고향에서 더 멀리 떠나가 있어야 한다. 지금은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구도의 길을 떠나 파란 별이 된 혜초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나는 이곳으로 다시 찾아와야 했다.

“다와……!”

열차에 타기 전, 나는 그녀를 가만히 안으며 비로소 ‘가장 행복한 시절’에 만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파란 머플러를 머리에 두르고 짙은 초록색 원피스에 회색 양가죽 외투를 걸친 그녀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열차에 올라 좌석에 앉았다. 창밖에서 그녀가 나뭇잎처럼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낙타덤불과 모래와 흙, 암석이 뒤엉킨 사막의 마른 강가, 한 그루 나무로 서 있었다. 회화나무 꽃잎이 지고 피는 시간, 푸르른 날처럼 곧게 서 있는 그녀의 모습으로 떨어지는 꽃잎을 두 손으로 받쳐 들던 사티의 얼굴이, 먼저 길 떠나는 구도자를 배웅하는 혜초의 얼굴이, 사모하는 혜초를 떠나보내는 여인의 얼굴이 겹쳤다. 

나는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갖다 댔다. 경찰 몇 명이 그녀 등 뒤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열차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열차에 눈을 떼지 않으려는 그녀의 모습이 점처럼 멀어져 마침내 보이지 않았다. ■

 

 

문형렬 hwassan@hanmail.net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소설이 각각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꿈에 보는 폭설》 《해가 지면 울고 싶다》 소설집으로 《언제나 갈 수 있는 곳》 《슬픔의 마술사》 장편소설로 《바다로 가는 자전거》 《눈먼 사람》 《어느 이등병의 편지》 《아득한 사랑》 《연적》 《굿바이 아마레》 등이 있다. 현진건문학상 수상.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