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송광사를 찾는 사람들은 극락교(極樂橋)와 능허교(凌虛橋)를 건넌다. 무지개 모양으로 쌓아 올린 이 두 돌다리 위에는 팔작지붕을 한 화려한 회랑(回廊)이 세워져 있다. 극락교에는 청량각(淸凉閣), 능허교에는 우화각(羽化閣)이다. 청량각은 일주문 밖에, 우화각은 일주문 안에 있다. 마음을 맑게 씻고(淸凉) 일주문을 들어가면 한 마리 나비가 되어(羽化) 자유로이 허공을 날아오른다.

 

“김 선배, 뭐해요? 얼른 들어가야 해요.”

앞서 우화각을 건너간 사진기자 박선태가 회랑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때까지 소설가 김진우는 우화각을 건너가지 않고 밖에서 현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량각과 달리 우화각에는 현판을 정면이 아닌 측면에 달아놓았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옆으로 돌아가야 능허교 무지개 아치 위에 걸려 있는 현판을 본다. 현판을 바라보던 김진우가 손짓하며 박선태를 부른다.

“박 기자! 이리 좀 와 봐. 여기 이거 한번 찍어둬.”

“그거 지난번에 왔을 때 다 찍었어요.”

“아냐, 이거 다른 거야. 빨리 오라니까.”

박선태가 우화각을 되돌아 나와 김진우에게로 왔다.

“뭔데 그래요? 지난번 우화각 현판을 찍으면서 능허교도 여러 컷 찍었어요.”

“저길 봐. 저거 보여?”

박선태는 김진우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능허교 무지개 아치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뭘 보라는 거죠?”

“못 봤어? 저기 무지개 아치 아래 중앙을 자세히 봐. 줄에 엽전 세 닢이 매달려 있잖아.”

“아, 저거요. 저거 엽전이에요? 저걸 왜 저기에 달아놨죠?”

박선태가 얼른 개울로 내려가 아치 가까이 다가갔다. 능허교 돌다리 아래 천장에 용머리를 조각하고 거기에 철사를 걸어 엽전 세 닢을 매달아 놓았다. 그것을 본 박선태가 소리쳤다.

“와! 김 선배, 진짜 눈 좋다. 이걸 어떻게 봤지. 엽전 맞네. 상평통보도 있어요. 누가 이걸 매달아 놓았을까요. 부적인가?”

“자세히 봐 봐. 묶은 모양을 보면 나중에 단 게 아니라 공사할 때 달아놓은 거 같지 않아? 방금 자료를 찾아봤는데, 공사할 때 사용한 공금 중에 남은 돈이래. 능허교를 놓는 데 사용하던 돈이라 다른 곳에 쓸 수 없어서 나중에 이 다리를 보수할 때 사용하도록 그렇게 매달아 놓은 거란다.”

“진짜 대단하다. 엽전 세 닢도 이렇듯 청렴하게 정리하라는 거네. 요즘 땅 투기로 시끄러운 그 ‘땅집공사’ 직원 양반들 여기 와서 이걸 봐야겠어요. 아니, 우화각 현판을 왜 정면에 안 달고 여기에 있나 했더니, 이걸 보라는 거네요. 와, 정말 신기하다.”

“이거, 특종 한번 만들어봐.”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진우는 딴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소를 놓아 기르는 거지요. 소는 제 살길을 알아서 찾아요. 그렇게 고삐를 하지 않고 자유롭게 놓아 기르면 소다운 소가 됩니다. 줄을 놓으면 길이 보이지요.”라고 하던 승찬(僧讚) 스님의 말을 곱씹고 있다. 줄을 놓으면 길이 보인다. 그는 엽전을 매달고 있는 철삿줄을 바라보았다. 자기 몸이 삭아 부서질 때까지 엽전을 붙들고 있는 저 철삿줄.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엽전을 보라는 게 아니라 질긴 인연을 끊지 못하는 저 철삿줄의 허망을 보라는 것이다. 철삿줄은 엽전을 붙잡고 있는 게 아니라 엽전에 붙잡혀 있다. 그래서 이 다리가 능허교며, 그 위에 우화각을 올렸다. 엽전은 인연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림자에 붙들려 있는 이 질긴 인연을 끊어야 허공을 건너는(凌虛) 한 마리 나비가 된다(羽化).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던 박선태가 재촉한다.

“어서 가시죠. 벌써 시작하는 거 같은데.”

“응, 알았어. 가자.”

오늘 대웅보전에서 지난해 입적한 회광당(廻光堂) 승찬 대선사 일각(一覺) 스님의 추모 법회가 열린다. 김진우는 한 신문사의 요청으로 박선태 사진기자와 함께 추모 법회를 취재하러 왔다. 사실 그는 추모 법회보다 이번에는 우화각의 나비에 더 큰 의미를 두고 기사를 쓰려고 한다.

김진우가 우화각에서 나비(정확히 말하면 나비의 그림자다)를 발견한 건 세 번째 방문했을 때다. 두 번째 방문했을 때 승찬 스님에게 들은 돈오점수(頓悟漸修)가 결정적 계기였다. 이번까지 합쳐 그는 모두 네 번 송광사를 방문한다. 두 번은 불교 관련 신문사 객원기자로, 한 번은 〈불교TV〉 프로그램 진행자로 방장(方丈)이던 승찬 스님을 인터뷰했다. 같은 스님을, 그것도 같은 사람이 세 번이나 인터뷰하는 일은 매우 보기 드문 인연이다. 더구나 이번 추모 법회까지 그가 취재한다.

두 사람은 서둘러 대웅보전으로 갔다.

 

첫 번째 인연

그해 10월 중순, 김진우는 한 불교 신문사로부터 송광사 방장 승찬 스님을 인터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승낙하기 전에 그는 습관처럼 자기를 선택한 이유와 과정을 물었다. 담당자 쪽에서 보면 좀 불쾌한 질문일 수 있으나 그는 꼭 그렇게 물었다.

그 무렵 김진우는 ‘번아웃 증후군’을 치료받고 있었다. 손을 떨 정도로 심한 불안증으로 힘들어했다. 주로 혼자 있을 때 그러한 증상이 나타나기에 주변 사람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평온하게 있다가 갑자기 울적해지거나 별스럽지 않은 일에도 폭발할 듯이 기분이 들뜬다. 불안감은 이렇게 급격하게 기분이 변하는 변곡점에서 발생했다. 이런 증상이 반복되면서 점차 그 경계도 모호해졌다. 감정의 변곡점에서 불안해지는 건지 불안해지면서 슬프고 기쁜 감정이 튀어나오는 건지 원인과 결과가 서로 뒤섞이면서 가끔 혼미해지는 증상도 나타났다.

처음 이러한 증상이 나타났을 때 김진우는 남들보다 감정이 좀 예민한가 보다 했을 뿐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무엇이든 일할 때는 그런 증상이 사라졌다. 일에 몰두하느라 자각하지 못한 건지 증상이 사라진 건지는 사실 정확하지 않다. 아무러하든 일할 때는 편안해진다. 그러다가 일 없이 시간이 비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런 증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증상이 점점 심해지자 병원에 가야 할까 고민한 적 있으나 일에 몰두하면 거짓말처럼 사라지기에 그는 그대로 견뎠다. 그는 빈 시간을 채울 일을 끊임없이 찾았다. 작품을 쓰든지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뒤지지 않으면 종일 책을 읽거나 친구를 불러내 식사를 했다. 그러다 별생각 없이 며칠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뭐든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야 했다. 남들이 볼 때는 하고 싶은 일을 주저 없이 하며 행복하게 사는 줄 안다. 문제는 밤이다. 잠을 자면 해결되지만 이런 증상이 나타나면 잠을 잘 수가 없다. 그럴 땐 속수무책이다. 밤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작품을 쓰거나 책 읽는 것밖에 없는데 불완전한 감정으로는 작품을 쓸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다.

작년 봄부터 이런 증상이 나타났다. 2년 걸려 쓴 장편소설을 출간한 기념으로 동료 작가들과 간소하게 축하연을 하고 온 그날 저녁에 김진우는 극심한 외로움과 슬픔에 휘둘렸다. ‘이게 뭐지?’ 하다가 장편소설을 쓰느라 진이 빠져 그런가 보다 여기며 그는 가벼이 넘겼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그런 증상이 심해져서 어떨 때는 이유도 알 수 없는 슬픔을 못 이겨 눈물 흘리기도 했다. 혼자 술을 마실 때도 있었으나 잠시 해결될 뿐 술이 깨면 더 심해졌다.

곰곰 생각을 되짚던 김진우는 화들짝 놀랐다. 그는 형수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그 일이 원인인 듯했다. 그제야 그는 서둘러 병원에 갔다. 더 심해지면 아무래도 사고를 저지를 것 같았다. 증상을 들은 의사가 “혹시 어떤 일에 몰입하고 있나요?”라고 묻자 잠시 망설이던 그는 “없습니다” 했다. 이런저런 질문을 하던 의사는 ‘한 가지 생각에 깊이 빠지면 그럴 수 있다. 대개 그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일어날 확률이 높다’라고 했다. 어떤 일이든 완벽하게 하려거나 지고지순한 프레임에 빠지는 사람에게 잘 나타나는 증상이라며, 의사는 그에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형수가 된 그녀는 김진우의 여자친구였다. 해외 출장을 간 형 대신에 참석한 어느 모임에서 그는 9살 연상의 방송국 프로듀서인 그녀를 만났다. 첫눈에 반해 그는 스토커로 오해받을 정도로 끈질기게 따라다닌 끝에 마침내 그녀의 마음을 붙잡았다.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 데이트를 하면서 가볍게 키스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는 한 번도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 없다. 그 말이 듣고 싶어서 그는 한결같은 몸짓으로 그녀에게 “사랑해”라고 했으나 그럴 때마다 그녀는 가볍게 웃기만 했다. 그 웃음에 감추어진 그녀의 마음을 알고 싶어서 그 이유를 묻자 그녀는 ‘쑥스럽다’라고 했다. 9살 연상이라는 게 불편해서 그럴 거라 이해했지만, 그는 늘 마음 한쪽에 묻어 있는 불안을 지우지 못했다.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할 즈음에 그 불안이 그에게 악몽으로 다가왔다. 언제부턴가 그녀가 이런저런 이유로 그와의 약속을 피했다. 딱히 싫다거나 헤어지자는 말을 서로 한 적은 없지만, 그렇게 희미하게 빛바랜 시간이 흘러가던 중 그는 상상할 수 없는 충격과 맞닥뜨렸다. 형과 혼담이 오가던 형수가 될 사람이 그녀라는 걸 안 것이다. 이미 결혼 날짜가 결정된 뒤였다. 그의 형은 그녀가 자기 동생의 여자친구였던 걸 몰랐으며, 그녀도 결혼할 남자가 그의 형인 줄 몰랐다. 이러한 사실을 서로 모른 채 그렇게 혼담이 진행되었다. 20년이 지난 일이다.

그녀가 가족이 되고 나서 얼마 뒤였다. 어느 날 그녀와 단둘이 있을 때 김진우는 그녀에게 단호하게 “형과 이혼해” 하고 말했다.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그녀는 곧 표정을 수습한 뒤 “빨리 너도 결혼해” 하고는 웃었다. 그 뒤 그도 그녀도 그 일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한 일이 없다. 어쩌다 둘만 있게 되면 그가 먼저 자리를 피해 버렸다.

지금까지 김진우가 결혼하지 않은 건 그녀 때문이다. 이를 알아차린 그녀가 주변 여성을 소개하거나 부모를 통해 혼담을 성사시켜 보려고 했으나 그는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린 그는 일부러 그녀에게 ‘너 때문에 결혼하지 않는다’라는 의사를 간접 표현하며 괴롭혔다. 방송국 프로듀서인 그녀는 가끔 그의 작품을 방송에 소개하거나 인터뷰 프로그램에 출연하도록 주선해 주며 마음을 돌려보려고 노력했다. 처음 몇 번은 모르고 응했으나, 이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그는 언론 매체에서 섭외가 오면 일일이 확인했다. 그녀가 관련되었으면 정중하게 거절한 뒤 그 사실을 꼭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다행히 이번 승찬 스님 인터뷰는 그녀가 개입한 게 아니었다. 그러함에도 다른 때와 달리 김진우는 신문사의 요청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루 말미를 두고 머뭇거렸다. 법력이 높은 스님이라는 신문사 측의 소개를 듣고는 혹시 묻어둔 자신의 이런 문제들이 드러나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는 그녀가 형과 헤어져 혼자가 되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그녀와 결혼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는 그녀가 형과 이혼하거나, 아니면 형이 빨리 죽었으면 하고 바란 적 있다. 나이가 그보다 12살이나 더 많기에 그는 형이 자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거라 굳게 믿는다. 언젠가 뉴스에 동생이 형을 살해한 사건이 보도되었을 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범인을 감싸다가 깜짝 놀라기도 했다.

 

송광사 방장 스님이 있는 곳은 삼일암(三日庵)이다. 상좌 스님과 전화로 일정을 조율할 때 ‘삼일암’이라는 말을 듣고 김진우는 본찰과 따로 떨어져 있는 암자인 줄 알았다. 여느 암자와 달리 삼일암은 송광사 경내에 있다. 절 안에 있는 절인 셈이다. 송광사는 일주문도 특별나다. 절 들머리에 홀로 서 있지 않고 여염집 대문처럼 양쪽에 담장을 둘렀다.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이라는데 송광사에는 대웅전 앞에 석탑과 석등이 없다. 처마 끝에 풍경(風磬)도 달지 않았으며 주련(柱聯)도 없다. 보통 조실 스님이나 방장 스님이 머무는 곳 당호가 ‘염화실(拈花室)’인데 송광사 삼일암에는 ‘미소실(微笑室)’이다. 전각을 비롯하여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가르침을 담아서 가람 전체에 불법을 깨치는 서사(敍事)가 흐른다.

김진우는 상좌 스님의 안내로 박선태 사진기자와 함께 미소실로 들어갔다. 큰 통나무로 만든 앉은뱅이책상 앞에 승찬 스님이 환하게 미소 띠며 앉아 있었다. 처음 만나는데도 마치 자주 보던 인연처럼 그는 스님이 낯설지 않았다. 엄숙하리라 예상하고 긴장했으나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평범한 인상이어서 그는 오히려 이런 모습에 얼른 적응이 안 되었다.

김진우가 건네준 명함을 들고 바라보던 승찬 스님이 “소설가라……” 하며 혼잣말을 했다. 그는 명함에 ‘소설가’라고 큼직하게 찍었다. 일종의 부적 같은 의식이다. 스님들이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는 것처럼, 소설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자는 경계 같은 것이다.

“나도 한때 소설가가 되려고 했지요.”

잘못 들은 줄 알고 김진우는 눈을 크게 뜨고 스님을 바라보았다. 시인과 수필가 스님은 더러 보았으나 소설가로 활동하는 스님을 그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스님이 소설가가 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방장 스님이 소설가가 되려고 했다니 특별한 관심이 갔다. 그는 스님이 출가한 동기가 궁금했다.

“언제 소설가가 되려고 하셨습니까?”

“젊을 때 잠깐 그랬지요. 박종화 선생의 《금삼의 피》와 《다정불심》, 이광수 선생의 《무정》과 《단종애사》를 읽으면서 소설을 한번 써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어요.”

스님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불가에 들어와서 그 꿈을 접었어요”라고 했다.

“스님께서는 〈오계(五戒)의 노래〉를 작사하고 한글 경전 보급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이시니, 불교의 가르침을 소설로 완성해 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스님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웃음으로 답했다. 더 구체적인 답을 묻는 건 예의가 아닐 듯하여 김진우는 화제를 바꾸었다. 스님 뒤쪽 벽에 ‘목우가풍(牧牛家風)’ 액자가 걸려 있었다. 목우가풍은 송광사 스님들의 수행 가풍이다.

“송광사 목우가풍은 어떤 것입니까?”

“글 뜻 그대로 소를 놓아 기르는 거지요. 소는 제 살길을 알아서 찾아요. 그렇게 고삐를 하지 않고 자유롭게 놓아 기르면 소다운 소가 됩니다. 줄을 놓으면 길이 보이지요.”

소다운 소, 목우(牧牛)는 길들인 소가 아니라 스스로 길을 찾는 소다. 틀에 가두지 않고 타고난 결을 따라 자유롭게 살도록 하는 것이다. 정(定=선)과 혜(慧=화엄)를 함께 수행하는 정혜쌍수(定慧雙修)로 결사(結社)하여 퇴락하던 고려불교를 일으킨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법호가 목우자(牧牛子)다. ‘목우가풍’은 그리하여 탄생했으며, 송광사를 움직이는 눈에 보이지 않은 힘이다.

 

승찬 스님은 출가하기 전에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어느 날, 담임을 맡은 반 여학생이 울면서 선생님에게 달려왔다. 남학생이 아이스케키를 했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그 남학생을 교무실에 불러 체벌했다. 처음에는 회초리로 손바닥을 두세 대 때려주고 잘못했다는 말을 듣고자 했으나 세 대를 맞고도 남학생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래서 한 대 더 때렸다. 그래도 입을 다물고 있기에 잘못했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그렇게 때렸다. 이제 선생님이 곤란해졌다. 그만 때리자니 체면이 구겨지고, 더 때리자니 아이가 다칠지 몰라 진퇴양난에 놓였다. 시작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하는데 문득 ‘내가 누구인가?’라는 의단(疑團)이 고개를 들었다. 분명히 체벌로 제자의 잘못을 고치려던 선생님이었는데, 그 선생님은 사라지고 오기로 가득 찬 낯선 사람 하나가 서 있는 걸 발견한 것이다. 이 의단으로 고심하던 끝에 선생님은 학교에 사표를 내고 불가(佛家)로 왔다.

 

“찾으셨습니까?”

“그 물건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거였지요. 선종 제3조 승찬 스님께서 못 찾은 그 ‘죄’라는 물건처럼, 이것도 존재하지 않은 허망(虛妄)이었어요. 길에 있는 무거운 돌을 하나 주워서 들고 있었던 게지요.”

“그게 깨달음이군요.”

 

한센병으로 고생하던 한 사람이 법력 높은 선종(禪宗) 제2조 혜가 스님을 찾아갔다. 그는 스님에게 “죄를 많이 지어 몹쓸 병에 걸렸습니다. 제발 이 죄를 씻고 병을 낫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하고 사정했다. 그러자 혜가 스님이 “그 죄를 가지고 오면 내가 병을 낫게 해드리리다” 했다. 아무리 뒤져도 죄를 찾지 못하자 그는 빈손으로 혜가 스님에게 왔다. 혜가 스님은 “찾지 못한 걸 보니 그대에게는 죄가 없는 게요. 이제 그 무거운 물건을 버리고 그 자리에 불법을 담으시오” 했다. 이 인연으로 그는 혜가 스님으로부터 ‘불법의 구슬을 꿴 스님’이란 뜻으로 ‘승찬(僧璨)’이라는 법명을 받고 선종 제3조가 되었다.

한자가 다르지만, 김진우는 방장 스님의 법호 승찬(僧讚)이 선종 제3조 스님의 법명에서 따왔을 거라 믿었다. 제자를 체벌했을 때 일어난 의단이나 죄를 지어 한센병에 걸렸다며 매달렸던 의단 모두 허망이며, 이를 깨닫고 불가로 온 두 스님의 인연길이 같다.

“깨달음은 모양이 없어요. 그냥 본래 있던 그 자리, 그것이지요. ‘그 자리’를 찾는 건데 뭐 대단한 일이겠소. 손바닥 뒤집기지, 여반장(如反掌). 그걸 사람들이 어렵다고 합니다. 세상에 손바닥 뒤집을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안 뒤집어서 못 뒤집는 거지.”

“알 것 같으면서도 쉬 와닿질 않습니다. 아직 먼지를 덜 닦아서일까요?”

“오롯한 내 마음을 붙잡지 않고 방편을 찾으려니 안 보이는 거요. 된장찌개를 끓이면서 주식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내려갔는지, 아이가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지 못하는지, 남편이 돈 잘 벌어오는지 어떤지 생각하는 것과 같지요. 제 마음은 다른 데 두고 엉뚱한 남의 마음으로 된장을 끓이는데 그 된장찌개가 맛있겠소?”

당연히 맛이 없다고 해야 옳다. 김진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밖으로 꺼내 보여주는 순간 그 물건은 이미 본래의 그 물건이 아니다. 이름으로 포장된 또 다른 형상이다. 그는 입안까지 올라온 대답을 삼켜 버렸다.

답을 찾지 못한 줄 여겼는지 승찬 스님이 말을 이었다.

“화가는 그림 그릴 때 오직 그림에만 몰두하고, 김 선생처럼 소설가는 소설을 쓸 때 오직 그 소설에만 마음을 쏟을 게 아니겠소? 그게 김 선생이 찾는 그 물건이오.”

“일거일투즉예불(一擧一投卽禮佛: 손 한 번 들고 발 한 번 옮기는 게 곧 부처님께 올리는 예배다)” 김진우는 승찬 스님의 오도송(悟道頌) 한 구절이 생각나 빙긋이 웃었다. 그의 웃음을 본 승찬 스님 역시 말없이 웃었다. 이심전심이다.

“당호(堂號)가 ‘미소실(微笑室)’인데 보통 ‘염화실(拈華室)’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미소실로 한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연꽃을 드니(염화) 가섭존자께서 빙그레 웃었지요(미소). 가섭존자께서 연꽃 속에 든 ‘본래 모습’을 봤는데 그 물건은 이름도 형상도 없어요. 그렇다고 그 물건에 이름을 붙여 꺼내 보이면 대중은 모두 본질은 내버려 둔 채 그 이름을 붙들 게 아니겠소. 이제 보이오?”

염화(拈華)는 연꽃을 쥔 부처님이고 미소(微笑)는 깨달음을 얻은 가섭존자다. 누구든 깨달으면 부처가 되지만 부처를 꺼내 보이면 그건 이미 부처가 아닌 형상이 된다. 깨달음은 찰나에 오지만, 그 한 번의 깨달음으로 ‘영원한 부처’가 되는 게 아니라 찰나 찰나가 이어지는 끝없는 시간 속에서 깨침을 이어가야 한다. 이게 돈오점수(頓悟漸修)다. 깨달음은 멈추는 게 아니라 꽃을 들고 나비를 찾는 수행 과정이다. 그래서 염화실이 아니라 미소실이다. 수행자의 처소라는 의미다.

김진우는 어깨를 움찔했다. “……이제 보이오?” 한 승찬 스님의 말이 죽비가 되어 어깨를 내리친 것이다. 평생 그를 옥죄던 그 질긴 끈이 그제야 그의 심안(心眼)에 조금 들어왔다.

 

두 번째 인연

김진우가 승찬 스님을 두 번째 만난 건 TV 방송 프로그램 진행자로 인터뷰하면서다. 그해 1월 27일, 눈 쌓인 길을 뚫고 순천 송광사를 찾았다. 카메라 촬영팀은 전날 미리 내려가서 송광사 요사채에서 숙박하고, 그는 인터뷰 당일 서울에서 승용차로 내려가 촬영 팀과 합류했다. 이번에도 인터뷰는 오전 10시에 삼일암 미소실과 미소실 앞뜰에서 진행했다.

지난번에 만나고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승찬 스님은 김진우를 알아보았다. 그가 삼배를 올리자 스님이 합장하며 말했다.

“참한 인연을 얻어 또 만나는 모양입니다. 성불하세요.”

“스님께서도 그동안 여여하셨습니까?”

“절집은 늘 그러하지요.”

스님은 얼굴 전체로 빙긋이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김진우는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큰스님에게 올리는 인사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그는 승찬 스님을 바라보면 가슴이 뚫리듯 청량한 기운이 일었다. 엄숙하고 무거울 거라는 예상과 달리 집안 어른을 만나듯 편했다.

김진우는 지난번에 놓친 질문을 꺼냈다. 보조국사 지눌 선사가 이곳 송광사에서 정혜결사를 할 때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설파했다. 얼마 전 해인사 백련암에서 성철 스님이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하였다. 순간 깨닫고 그 깨달음을 수행해 나아가는 게 돈오점수인데, 깨닫고 나면 더 깨달을 게 없는 경지에 이른다는 뜻으로 돈오돈수라고 한 것이다. 자칫 돈오점수를 편 조계총림과 돈오돈수를 던진 가야총림 두 가문이 논쟁을 벌이는 모습으로 오해할 수 있다. 돈오점수든 돈오돈수든 깨달음을 찾는 방편에서 보면 다르지 않다. 아무러하든 일반 대중으로서는 이 방편의 깊은 의미를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 그는 지난번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이 질문을 놓친 걸 후회했다. 방송국에서 승찬 스님과 인터뷰한다고 했을 때 그는 마치 이 의문을 풀기 위해 필연으로 찾아온 인연이라 여겼다.

“스님, 돈오점수와 돈오돈수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릅니까?”

승찬 스님은 또 한 번 손을 들고 뒤집었다. 그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이 넓은 우주도 결국에는 하나의 모양이지요. 하물며 부처님이 계시는 삼천대천세계는 수많은 우주를 모아놓았으니 하나라는 개념조차도 없는 곳입니다. 분별은 작은 마음에서 이는 물결 같은 것이지요. 옳다 그르다 나눌 필요도 없고 땀 흘리며 좇을 필요도 없고, 그저 한 마리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면 답이 거기 있어요.”

우화각(羽化閣)! 김진우는 우화각의 나비를 떠올렸다.

“우화각이 그 세계입니까?”

“나비를 보았다면 날아간 나비의 그림자를 붙잡은 게지요.”

승찬 스님이 또 빙그레 웃는다. 오리무중이다. 그때 김진우는 《장자》의 ‘망량문영(罔兩問景)’이 생각났다. 그림자의 그림자다. 그렇게 허망을 좇는다는 의미 같은데 확연히 다가오지를 않는다.

“좀 더 쉽게 이해하는 길은 없을까요?”

“여반장(如反掌).”

승찬 스님은 다시 손을 뒤집어 보였다. 김진우는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쉽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는데 그게 아니었다.

“손등과 손바닥은 같은 손에 붙어 있지요. 이리 가까운 곳에 있지만, 손바닥은 손등을 못 만나고 손등은 평생 손바닥을 못 만납니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이 두 물건은 만날 일이 없어요. 만날 일이 없는 두 물건을 왜 안 만날까 고민하는 일은 부질없어요. 손바닥일 때는 손바닥이면 되고, 손등일 때는 손등이면 됩니다.”

김진우는 지리산 화엄사에서 진진응(陳震應) 스님과 경허(鏡虛) 스님이 나눈 문답을 떠올렸다. 곡차를 좋아하는 경허 스님에게 진진응 스님이 안주와 술을 올리면서 “스님께서는 왜 이런 걸 즐기십니까?” 하고 묻자 경허 스님이 “찰나에 깨달아서 내가 부처 된 줄 알았는데 수많은 세월 몸에 밴 습관이 더 생생히 이네. 바람은 고요한데 파도가 용솟음치듯, 이치를 깨쳤으나 망상이 일고 있다” 하고 오언절구의 시로 답했다. 어느 불교 모임에서 김진우는 경허 스님의 이 시를 놓고 친구들과 논쟁을 벌인 적 있다. 이런저런 다양한 의견이 나왔으나 그는 “돈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승속(僧俗)의 경계를 허물었다”라고 했다. 사람들은 경허 스님의 파격적 일화를 무애행(無碍行)이라 말했지만, 그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깨달음의 경지는 ‘답게’다. 사람은 ‘사람답게’, 짐승은 ‘짐승답게’, 꽃은 ‘꽃답게’, 동물이든 사물이든 그 본래의 존재 의미대로 살라는 것으로 해석했다. 당시 그의 친구들은 그의 이 주장을 궤변이라고 했다.

그때였다. 인터뷰 녹화를 진행 중인 미소실에 주지 스님과 상좌 스님이 급하게 들어와서 녹화를 중단시켰다. 담당 PD가 당황하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으나 상황을 알려주지 않은 채 녹화를 잠시 중단하고 모두 나가 달라고 했다. 이 상황을 보고 뭐라고 한 마디 말할 듯도 한데 승찬 스님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촬영 팀은 녹화를 중단한 채 모두 밖으로 나왔다. 큰스님의 인터뷰 녹화를 중단시킬 정도면 촌각을 다투는 긴박한 일임이 틀림없다. 김진우를 비롯한 촬영 팀은 영문도 모른 채 미소실 밖에서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기다렸다. 20여 분 뒤, 주지 스님과 상좌 스님이 문을 열고 나와서 “죄송합니다. 이제 진행하셔도 됩니다” 하고 돌아갔다.

촬영 팀이 다시 복귀했다. 승찬 스님과 마주 앉은 김진우는 카메라를 테스트하는 동안 스님에게 물어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무 일도 아닙니다. 별스럽지도 않은 걸 공연히 소란스럽게 했어요.”

스님은 참 편안해 보인다.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이 가득 담겨 있다. 표정으로 봐서는 정말 아무 일도 아닌 듯했다. 분명히 긴급한 일이 발생한 것 같은데 한 치의 동요도 없이 평상심을 유지하자 김진우도 그대로 마음을 정리하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인터뷰 촬영을 끝낸 뒤 김진우는 서울에서의 일정 때문에 일행보다 먼저 미소실을 나왔다. 고속도로에 막 들어서는데 라디오뉴스에서 송광사가 나온다. 볼륨을 높이던 김진우는 깜짝 놀랐다. 어젯밤 송광사에 도둑이 들어와 국사전 벽을 뚫고 조사 진영 13점을 훔쳐 갔다는 것이다. 16점 가운데 제1대 보조국사와 제2대 진각국사 진영은 성보박물관에 전시 중이었고, 제14대 정혜 국사 진영은 보존처리를 위해 수장고에 가 있는 바람에 이 3점만 무사했다. 송광사 주변에는 지금 삼엄한 경비가 펼쳐졌으며, 경찰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고 한다.

김진우는 차를 갓길에 세우고 급히 촬영팀에게 전화했다. 담당 PD가 “김 작가님, 미리 잘 나갔어요. 우린 지금 여기 붙잡혀 있어요. 언제 풀릴지 몰라요” 하며 볼멘소리를 한다. 그는 창문을 열고 찬바람을 들이마셨다. 손이 떨릴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촬영을 중지시킨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그가 놀란 건 보물 도난 사건이 아니다. 그런 일을 보고 받고도 “아무 일도 아닙니다. 별스럽지도 않은 걸 공연히 소란스럽게 했어요”라며 평상심을 유지하던 승찬 스님의 모습이다. 그게 어찌 별스럽지 않은가. 촬영을 중단시키면서 보고할 정도로 위중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무심할 수가 있을까. 들고 있는 무거운 돌을 자유자재로 내려놓을 수 있는 그 힘이 무엇일까. 그는 알 듯 모를 듯 맴도는 의문을 끝내 풀지 못했다.

 

세 번째 인연

세 번째 승찬 스님 인터뷰 진행 요청을 받았을 때 김진우는 이건 보통 인연이 아니라는 예감을 받았다. 어떻게 같은 스님을 같은 사람이 세 번씩이나 인터뷰하는 일이 생길 수 있는가. 그것도 각기 다른 언론 매체에서 요청이 들어왔다. 그는 지난번 〈불교TV〉에서 인터뷰하던 날 일어난 국사 진영 도난 사건이 제일 먼저 생각났다. 그날 아무 일 없는 듯 평상심을 보였던 승찬 스님의 그 법력에 대해 꼭 한번 물어보고 싶었다. 마치 그 염원이 이루어지듯 그에게 세 번째 승찬 스님을 만나는 인연이 찾아왔다.

포근하고 따뜻한 웃음이 얼굴 전체에 배어 있는 승찬 스님의 표정은 늘 그대로다.

“스님, 또 뵙습니다.”

삼배를 올린 뒤 김진우가 웃으며 말을 건네자 승찬 스님이 “전생에 참한 인연을 맺었던 모양입니다” 하며 웃었다.

“지난번 인터뷰하던 날을 기억하시는지요.”

“그럼요. 그때도 김 작가가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날 국사전에 모시던 스님들의 진영을 도난당한 사건이 있었잖습니까?”

“그랬지요.”

“그날 촬영하던 우리는 주지 스님한테 모두 쫓겨났지요.”

“허허, 손님에게 큰 결례를 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니고, 그때 제가 스님께 무슨 일이냐고 여쭈었을 때 아무 일 아니라고 하셨잖습니까? 저는 승용차 안에서 라디오뉴스로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차를 갓길에 세우고 잠시 정신을 추스르고 난 뒤 운전했어요. 그런데 스님께서는 어찌 그런 평상심을 보이셨는지, 저는 지금까지 그게 참 궁금합니다.”

“어허, 내가 김 선생께 바위를 하나 안겨 드렸군요. 그게 뭐라고 여태 무겁게 들고 계셨습니까. 던져 버리지 않고.”

“때가 많이 묻어 아직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나 봅니다.”

“그놈, 때를 가져와 보세요. 그러면 내가 그 바위를 깨 드리겠습니다.”

질문하던 김진우는 멈칫했다. 어디서 들어본 말이다. 선종 제3조 승찬 스님이 혜가 스님을 찾아갔던 바로 그 장면 아닌가. 승찬 스님을 욱죄던 그 죄는 순간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불법이 들어앉았다.

그 생각을 하는 바람에 김진우는 다음 질문을 놓쳐버렸다. 이미 답이 나와서 더 물을 수도 없었다. 이렇게 끝나면 기사를 쓸 수가 없다. 신문 한 면을 채워야 하는데, 벌써 여기에서 막히면 안 된다.

김진우의 속내를 알고 있다는 듯 승찬 스님이 말을 이었다.

“우리 큰스님들이 나들이를 가신 게지요. 국사전에 오랫동안 갇혀 계셨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나가셔서 다른 중생들이 어떻게 사는지 지금 살펴보고 계실 겁니다. 우리보다 더 잘 대접하려고 모시고 갔는데 무슨 걱정이겠어요. 설마 불쏘시개 하려고 그 밤중에 힘들게 벽을 뚫고 몰래 모시고 갔겠습니까. 아마도 여기보다 더 잘 대접받고 계실 겁니다. 그러다가 모시기 힘들면 다시 돌려보내거나 더 잘 모시는 사람이 데려가겠지요. 어디에 계시거나 우리 큰스님들은 극진하게 잘 대접받으실 겁니다.”

김진우는 능허교에 매달려 있는 엽전 세 닢을 떠올렸다. 철삿줄에 매달린 엽전이 바람에 흔들리며 찰그랑찰그랑 소리를 내는 듯하다.

인터뷰를 마치고 삼일암에서 대웅보전 쪽으로 내려오던 김진우는 걸음을 멈추었다. 대웅보전 뒤쪽 축대 아래에 하얀 나비들이 날아다녔다. 드문드문 연분홍 나비들도 보인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이렇게 수십 마리 나비가 어우러진 군무(群舞)를 그는 여태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거리가 좀 떨어졌지만, 나비들이 놀라지 않게 그는 조심조심 다가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나비가 아니었다. 꽃이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인데 꽃을 나비로 보다니, 그는 너무 황당하여 웃음이 나왔다. 가까이에서 보니 화초라기보다 제멋대로 자라는 잡초 같다. 서로 뒤엉켜 무질서하게 자라는데, 그 엉킨 몸을 뚫고 허공으로 나온 가느다랗고 긴 줄기 끝에 나비처럼 생긴 꽃이 달렸다. 이 줄기가 바람에 휘청이면 꽃은 나비가 되어 춤춘다.

김진우는 급히 인터넷에서 자료를 뒤졌다. 가우라(Gaura lindhe-imeri)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이 나비 같다 하여 ‘나비바늘꽃’이라고도 부른다. 나비에 바늘이라니, 이름 또한 독특하다. 아름다운 유혹 속에 감추어놓은 매서운 독침이다. 더 혼미하게 하는 건 꽃말이 ‘섹시한 여인’이다. 사찰 경내에서 입에 올리기는 조금 민망한 듯도 하지만, 숨김없이 본질을 보여주는 이 모습 또한 그에게는 돈오로 보였다.

그 순간, 김진우는 청량각과 우화각이 이 나비 앞으로 옮겨오는 기현상을 체험했다. 그는 얼른 눈을 한 번 문지른 뒤 다시 바라보았다. 누각(樓閣)은 보이지 않고 나비들만 날아다녔다. 환상이었나? 분명히 그는 방금 두 누각을 눈앞에서 보았다. 혹시나 하며 다시 살펴봤지만, 대웅보전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 이곳에서는 누각들이 보이지 않는다.

 

나비를 가슴에 품고 돌아온 김진우는 한 달 뒤 승찬 스님이 미소실에서 입적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그가 만났을 때, 한 달 뒤에 입적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오도(悟道)로 ‘참나[眞我]’를 찾으면 생명의 끝자락도 볼 수 있다던 말을 그는 승찬 스님의 입적에서 보았다.

이 불가사의한 경험과 체험을 여기저기 자랑삼아 이야기하고 다니던 김진우는 더 놀라운 일과 맞닥뜨렸다. 입적하기 하루 전날 미소실에서 승찬 스님을 만났다는 어느 대학교수의 칼럼을 읽었다. 한 달이 아니라 하루 전날까지도 평상시처럼 변함없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날, 국사전의 조사 진영 도난 사건 때 보여준 승찬 스님의 법력이 벼락처럼 그를 때렸다. 이날부터 그는 이 자랑을 멈추었다.

 

이미 대웅보전에서는 승찬 스님의 추모제가 시작되었다. 김진우와 박태선 기자는 입구 쪽에 서서 제단 위의 승찬 스님 영정을 향해 합장 삼배로 인사 올렸다. 스님이 김진우를 바라보며 웃는다. 그때, 하얀 나비 한 마리가 허공을 날아가고 있었다. ■

 

 

✽불교소설은 불교문학 진흥과 새로운 콘텐츠의 개발을 위해  ‘재단법인 보덕학회’ 후원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김호운 penker@naver.com
1978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장편소설로 《황토(荒土)》(전2권) 《님의 침묵》(전3권) 《스웨덴 숲속에서 온 달라헤스트》 《표해록(漂海錄)》 《바이칼, 단군의 태양을 품다》 《장자의 비밀정원》 등과 소설집 《겨울 선부리》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청소부》 외 산문집 다수. 한국소설문학상, 한국문학백년상, 녹색문학상, 시선 올해 최고작품상(소설부문), 둔촌이집문학상, PEN문학상 등 수상, 현재 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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