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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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카라에 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 금희는 승문이 보낸 메일을 받았다. 연락이 끊어진 지 거의 9년 만이었다. 

 

잘 지내나?

나는 스리랑카에 있어. 

미얀마에서 정식으로 계를 받고 출가했다가 비자 문제 때문에 이쪽으로 옮겨왔어. 

재작년에 어느 한국 스님이 태블릿을 하나 사다 줘서 잘 쓰고 있다.

버스를 타고 세 시간만 오면 되는 가까운(!) 사원에 와이파이가 있어.

모처럼 여유 있게 혼자 앉아 한국 소식이 궁금해서 메일 쓴다. 

수요일까지는 여기서 지낼 것 같은데, 그때까지는 답장 보내면 볼 수 있다.

잘 지내라.

금희는 누군가가 장난 메일을 보낸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 주소를 다시 확인해 보았다. 승문이 틀림없었다. 서둘러 메일을 썼다. 포카라에 온 뒤 이틀 내내 아침 열 시쯤이면 정전이 되었다가 오후 서너 시가 되어야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으므로 전기가 끊어진다고 해도 두 시간 이상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금희는 마음이 급했다. 혹시 때맞춰 답장을 보내지 못하게 될까 봐 자판을 누르는 손이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

조식을 먹으러 내려가니 윤이 일행들과 식당에 앉아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식사를 주문하자, 윤이 다가와 앞자리에 앉았다. 

“오늘 한국에서 누가 오는데, 선생님과 방을 같이 써도 될까요? 호텔에 지금 빈방이 없다네요. 젊은 여성이라 다른 호텔로 보내기가 좀 그래서요.”

낯선 사람과 방을 함께 쓰는 일이 썩 내키지 않았으나, 상황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었다. 금희는 그러겠다고 승낙했다. 

“곧 산에 가니까, 며칠만 부탁드릴게요.”

윤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덧붙였다.

“선생님은 정말 같이 안 가실래요?” 

안 그래도 금희는 승문에게 포카라에 머물고 있다는 메일을 쓰면서 산에 올라가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나는 아무 준비도 없이 왔거든요.”

“필요한 건 여기서 살 수 있어요. 빌릴 수도 있고요.”

지난해의 마지막 날 밤이었다. 윤이 SNS 계정에 열대의 어느 강가에서 풍등을 띄우는 사진을 올렸다. 새해의 소망과 함께 불빛 하나를 띄운다면서, 소망이 소중한 이유는 노력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라는 글을 남겼다. 모니터 속 검푸른 하늘로 떠오르는 불빛들은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 떼처럼 보였다. 금희는 윤을 팔로우한 뒤 처음으로 댓글을 달았다. 아름답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뜻밖에도 곧 윤의 댓글이 달렸다. 선생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평범한 말이었으나 금희는 누구에게 들은 새해 인사보다도 다정하게 느꼈다. 

그 뒤로 금희는 윤이 올리는 게시물에 자주 찬사의 댓글을 달았다. 그럴 때마다 윤도 짧게나마 반응해주었다. 그런 일들이 이어지면서 금희는 한 번도 대면한 적 없는 윤을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사람들보다 가깝게 여겼다. 2월에 윤은 네팔의 포카라로 옮겨갔고, 자신이 머무는 숙소의 발코니에서 보이는 설산의 사진을 올렸다. 금희는 꼭 이 세상 풍경이 아닌 것 같다고, 언젠가는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고 댓글을 달았다. 그날 밤 윤이 메시지를 보냈다.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불쑥 메시지 드려요. 3월 말쯤 마음이 맞는 몇몇 친구들과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려고 해요. 혹시 보름 정도 시간을 내실 수 있으면 포카라로 오세요. 금희는 이게 무슨 꿈같은 소린가 하면서 메시지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제가 하는 일은 출퇴근할 필요가 없어서 어떻게든 시간을 낼 수는 있지만, 저는 북한산에도 올라가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히말라야를 어떻게. 금희의 답장에 윤이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에요. 저를 믿고 오세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요. 

포카라라는 글자를 보았을 때, 금희는 몇 년 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승문을 떠올렸다. 십여 년 전 인도와 네팔을 오래 떠돌다가 잠시 귀국했을 때 승문은 금희에게 정처 없던 여정에서 겪은 이런저런 일화를 띄엄띄엄 이야기해 주었다. 순백의 설산 그림자가 호수 위로 비치는, 그림 같은 포카라에 대해서도 들은 기억이 났다. 금희는 그 도시 이름을 들으며 티베트 전설 속의 샴발라 같은 신비한 낙원을 상상했다. 승문은 한국에서 석 달 정도 머물면서 금희와 함께 살던 집을 팔았다. 그리고 문서와 현실 속의 모든 인연을 정리하고 떠났다. 미얀마로 가서 단기 출가할 작정이라고 했다.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금희가 몇 번 메일을 보냈으나 메일을 확인한 흔적도 답장도 없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승문은 거의 잊었으나, 꿈속에서는 이따금 승문과 십여 년을 함께 살던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시간이나 경제적으로 넉넉한 상황은 아니었음에도, 금희는 윤의 메일을 받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포카라로 날아왔다. 이십여 년 만의 해외여행이었다. 한국보다 평균 물가가 저렴하다는 현실적 조건도 결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히말라야에 올라갈 생각은 아예 없었다. 그냥 작고 아늑한 방을 한 달쯤 빌려 번역 일을 하고 호숫가를 산책하면서 지낼 작정이었다. 정확한 의미를 가늠하기 힘들었지만,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윤의 말도 마음을 흔들었다. 내년이면 금희의 나이가 쉰을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아침을 먹고 방에 올라와 한 시간 정도 노트북을 들여다보았다. 열 시가 조금 넘어서 전기가 끊어졌다. 금희는 파일을 갈무리하고 노트북을 덮으려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메일함을 열어보았다. 그 새 승문의 짤막한 메일이 와 있었다. 

 

포카라라니 근사하다.

정식 트레킹인가? 나도 오래전에 안나푸르나를 한 바퀴 돌았다. 

한국에 돌아갈 계획은 없고, 마음껏 수행하다가 이곳에 뼈를 묻으려 해. 

좋은 시간 되길 바란다.

 

금희는 호텔을 나와 레이크사이드 거리를 구경하면서 걸었다. 북숍(Bookshop)이라고 적힌 영어 간판이 눈에 띄었다. 인터넷이 끊길 때마다 사전이 아쉽던 참이었다. 들어가 보니, 문구와 간단한 기념품을 진열한 매대가 전면 중앙을 차지하고 있고 책들은 뒤쪽 책장에 꽂혀 있었다. 네팔에서 출간된 지도와 여행안내 책자만 신간이고, 대부분 헌 책들이었다. 여행자들이 갖고 왔다가 놓고 가거나 팔고 간 책인 듯싶었다.

책장 사이를 돌아 나오다가 한국어책 몇 권을 발견했다. 여행 가이드북 그리고 불교와 명상에 관한 에세이였다. 금희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태엽 감는 새-제3권》이라는 제목의 소설책이었다. 책을 뽑아 들고 펼쳐 보았다. 속표지에 “신에게 구해야 할 것을 인간에게 구하지 말 것, 2004년 10월 16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날짜 옆에는 서명도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책을 도로 책장에 꽂았다. 기념품 매대에서 엽서 몇 장을 골라서 값을 치르고 서점에서 나왔다.

헤아려보니, 승문은 2005년쯤 포카라를 지나쳤을 것이다. 당시에도 서점이 이 자리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며칠이나 머물렀는지 모르지만, 승문이 서점에 들렀을 가능성은 있다. 《태엽 감는 새》가 그때도 책장에 꽂혀 있었다면, 책을 잠시 펼쳐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금희는 사거리에 멈춰 서서, 복잡한 도로 한가운데에 서 있는 보리수나무를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사흘 전에 처음 보았을 때는 저렇게 큰 나무가 차도 중간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 놀라웠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오래된 나무라 해도 도로 공사 계획이 확정되는 순간 곧 사라질 운명이 된다. 지금 금희가 나무를 보고 있듯 그 옛날 승문도 나무를 보았을 것이다. 금희는 자신이 본 것과 승문이 본 것, 그리고 나무가 본 것을 생각했다. 나무는 더 많은 것을 보았을 것이고, 더 오래 보게 될 것이다. 금희는 나무가 자신을 승문과 연결해주는 존재 같았다. 

호텔 방에 돌아오자마자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여니, 윤이 젊은 여성과 나란히 서 있었다. 

“선생님, 얘가 미미예요.”

미미는 노란 캐리어를 끌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긴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금희가 방을 비운 동안 미미는 윤의 방에서 씻고 쉬고 있었다고 했다. 미리 언질을 받았는데도 아무 생각 없이 늦은 오후에 돌아왔다며 미안해하는 금희에게 윤은 미안할 일이 아니라고 말한 뒤, 문 앞에서 돌아갔다. 

“이름이 미미예요?” 

“인스타 계정 이름이에요. 원래는 키우던 고양이 이름이고요. 몇 년 전에 죽었지만.”

금희는 진짜 이름이 무어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그걸 알아 무엇 하나 싶어 그만두었다. 사십 대인 윤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걸 보니 미미는 이십 대 후반이거나 많아야 삼십 대 중반인 듯했다. 

“언니도 산에 가요?”

“나? 나는 아직 마음을 못 정했어요.”

갑작스러운 언니라는 호칭에 금희는 당황했다. 미미는 노란색 캐리어를 열어 뒤적뒤적하더니 붉은색 원피스를 꺼냈다. 그리고 입고 있던 옷을 벗기 시작했다. 금희는 옷 갈아입는 것을 지켜보고 있기도 멋쩍어서 욕실에 들어가 손을 씻고 나왔다. 

“아저씨가 저녁 식사하러 나가재요. 언니도 같이 가요.”

미미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산행을 할 사람들은 미미까지 모두 네 명이었다. 윤과 미미, 그리고 윤의 후배 둘.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길 때 금희도 함께 갔다. 달리 할 일도 없었다.

“일정이 당겨진 사람이 있어서 시간이 별로 없고, 쏘롱라는 미미나 선생님에게는 힘들 거 같아. 안나푸르나 서킷을 반만 돌까 해. 일단 좀솜까지 비행기를 타고 넘어가서 묵티나트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푼힐이나 ABC를 거치는 게 나을 것 같아.”

윤의 설명을 멍하니 듣고 있던 금희는 자신이 언급되자 조금 놀랐다. 트레킹에 합류하는 쪽으로 마음이 거의 기운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윤에게 통보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말을 막고 그게 아니라고 끼어들기가 번거로워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서킷의 가장 힘든 구간을 빼고 반만 돈다고 생각하시면 되어요.”

윤은 금희를 돌아보며 확인하듯 강조했다.

“비행기 노선이 생기기 전에는 쉽게 갈 수 없는 곳이었어요. 선생님은 분명히 로우 무스탕 쪽을 좋아하실 거예요.”

윤은 잠시 미미와 금희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원래 가이드와 포터 없이 가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미미와 선생님은 아무래도 포터가 한 명 필요할 거 같아요. 추가 비용이 들어갈 텐데, 괜찮으시죠?”

“그럼요, 괜찮죠.”

미미가 대답했고 금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가 산행이 확정되고 나니,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어져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금희는 호텔에 돌아가면 승문에게 안나푸르나에 간다고 답장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언니는 아저씨를 언제부터 알게 되었어요?”

금희가 욕실에서 씻고 나오자 침대에 누워 있던 미미가 물었다. 

“인스타 팔로우한 지 3년쯤 된 거 같아요. 미미 씨는?”

“아저씨가 학교 앞에서 카페 할 때 제가 단골이었어요. 그러니 꽤 오래된 사이죠.”

“카페? 나는 IT 쪽 일을 한다고 들었는데.”

“웹디자인이요? 그건 그냥 알바로 하는 일이에요.”

갑자기 미미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언니는 왜 여기에 왔어요? 아저씨가 언니를 불렀어요?”

금희가 포카라에 온 뒤 내내 마음속에 품고 있던 질문이기도 했다. 윤은 왜 나를 불렀을까. 나는 왜 여기에 왔을까. 금희가 대답할 말을 찾는데, 미미가 이내 말을 이었다.

“저는요, 남편과 헤어지려고 왔어요. 여기 온다는 말도 안 하고 집에서 그냥 나왔어요. 얼마 전에 아저씨에게 이혼하려고 한다고 말했더니, 산에 같이 가자고 했어요. 잠깐 멀리 떨어져 있어 보라고요.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요. 하지만 더 남은 미련 없어요. 다른 여자를 맘에 두고 있는 남자랑 어떻게 살아요.”

금희에게는 뜻밖의 이야기였다. 저녁 먹는 자리에서 들뜬 목소리로 웃고 이야기하던 미미의 모습이 떠올랐다. 금희는 여전히 흥분을 억제 못 하는 목소리로 이어지는 미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사랑. 헌신. 욕망. 기만. 배신. 질투. 착각과 오해. 왜 나에게만 이런 불행이 이어지는 건지 이해할 수 없던 기억이 시간의 저편에서 희미하게 되살아났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누구나 거의 예외 없이 겪는 일들이었다. 금희는 만난 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낯선 사람 앞에서 몸을 부르르 떨며 말을 쏟아내는 미미의 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미미가 울음이라도 터뜨릴까 봐 불안하기도 했다. 금희는 미미에게 잠시 모든 걸 잊고 푹 자라고 당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 

한때는 금희의 심장 속에도 구구절절한 사금파리들이 뾰족하게 박혀 있었다. 혈관을 따라 굴러다니다가 불쑥 자신을 찌르고 밖으로 튀어 나가 타인을 겨냥하기도 했다. 그것들은 다 어디로 갔나. 과거는 낡은 상자에 대충 부려 넣어 창고에 쌓아둔 짐들 같았다. 얼마나 무거운지 내용이 무엇인지 이제는 가늠해보고 싶지 않았다. 아침에 승문의 메일을 확인했을 때도 반가움만큼이나 두려움도 컸다. 혹시나 승문이 한국에 돌아오거나 그래서 다시 모든 과정이 똑같이 되풀이되면 어떡하나, 라는 불안이 전혀 없지 않았다. 다행히 승문은 귀국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비행기는 아침 7시에 이륙했다. 금희는 히말라야의 깊은 계곡 사이를 날아가는 비행기 날개가 산등성이에 부딪힐 것 같은 불안함을 느끼며 앉아 있었다. 스무 명 남짓한 승객의 목숨이 조종사 한 사람에게 달려 있음을 체감하는 비행이었다. 좀솜 공항에 도착하자 공기의 냄새, 온도, 질감이 떠나온 도시와 전혀 달랐다. 겨우 20분 남짓의 비행 뒤에, 초목이 우거진 초록빛 산들은 사라지고 돌과 흙, 가시덤불뿐인 잿빛 산들이 나타났다. 하얗고 붉게 칠한 돌집들이 늘어선 거리에 들어서자 금희는 숨이 막혔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낯선 풍경이라 그러했고, 실제로 숨쉬기도 힘들었다. 100 미터를 달리고 난 뒤 가슴이 뻑뻑한 느낌과 비슷했다. 

공항을 벗어나자마자 네팔 남자 하나가 서툰 영어로 포터를 구하느냐고 물으며 따라왔다. 윤이 필요 없다고 거절했으나, 아침밥 먹을 식당을 찾는 내내 남자는 일행을 뒤따랐다. 뼈와 근육뿐인 체격의 마르고 왜소한 중년 남자였다. 남자의 집요함에 윤이 마지못해 승낙했다. 식당에서 윤의 후배 한 사람이 즉석에서 고용한 포터에 대해 미심쩍어하자 윤이 중얼거렸다. 

“쪼리를 신고 있어서 나도 찜찜했어. 그런데 어떡하겠어, 그렇게 간절하게 부탁하는데.”

토스트와 달걀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면서 윤은 그날의 일정을 설명했다. 칼리간다키강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까그베니라는 마을까지 올라간다고 했다. 힘든 길은 아닌데 오후가 되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바람이 부니 서두르는 게 좋겠다고 덧붙였다. 

포터로 고용된 남자는 카고 백을 들고 식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금희는 남자를 곁눈으로 훔쳐보았다. 여전히 맨발에 쪼리를 신고 있었다. 포터에게 15킬로그램 이상의 짐은 맡길 수 없게 법으로 정해져 있다고 윤이 말했으나, 짐을 꾸려보니 그것도 상당한 부피였다. 처음에는 포터를 고용한다는 것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고 오히려 짐을 더 내어줄 궁리만 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사람이 몸피에 비해 지나치게 큰 짐을 짊어지는 것을 목격하자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좀솜 거리를 벗어나 깊은 협곡 사이의 산길로 들어섰다. 금희는 걷는 속도를 조절하기 위해 맨 뒤에서 천천히 걸었다. 앞사람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려고 애쓰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말라붙은 강바닥의 너덜 길을 걷고 있었다. 도로 공사 중인 포클레인과 트럭을 지나치면서부터 물길로 내려온 것 같았다. 가장 무거운 짐을 진 포터는 얼마나 걸음이 빠른지 이미 보이지 않았고, 미미와 윤의 일행도 한참 앞서서 가고 있었다. 금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깎아지를 듯한 협곡의 거대한 벽에는 간신히 초록을 띤 덤불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고, 그 위로 푸른 하늘이 열려 있었다. 

정오를 지나면서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우기에는 물의 길이었을 드넓은 강바닥은 건기의 끝자락에는 바람의 길로 변했다. 나무도 바위도 없었으므로 바람은 거칠 게 없었다. 앞에서 걷던 사람들은 금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멈춰서서 기다려주었다. 처음에는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아 서둘렀으나, 나중에는 그런 마음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장엄한 황량함 속에 오직 걷고 있는 몸만 남았다. 

오후 늦게 까그베니에 도착했다. 롯지에 들어가 늦은 점심을 먹고 각자 방에 들어가 잠시 휴식을 취했다. 금희는 무거운 등산화를 벗고 침대에 누웠다. 새벽에 일어나 비행기를 타고 와서 바람 부는 계곡을 따라 산에 오른 일이 꿈만 같았다. 옆 침대의 미미는 어느새 가늘게 코를 골았다. 금희는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차라도 한 잔 마실 작정으로 방에서 나왔다. 식당에는 윤이 혼자 앉아 있었다. 

“차 한잔 마시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려고요. 후배들은 벌써 나갔어요.”

금희는 외투를 가지러 갔다가 미미를 깨워야 할지 망설였으나 곤히 자는 것 같아 그냥 두고 나왔다. 까그베니는 현대식 커피숍과 햄버거 가게 그리고 중세 무스탕의 고성이 나란히 존재하는 마을이었다. 돌과 진흙을 섞어 지은 집들 사이로 구불구불한 좁은 골목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같은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미로를 헤매는 건가 싶을 때 작은 광장이 나타났고, 때마침 털이 북실북실한 염소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금희와 윤은 수십 마리 염소들이 이동하는 흐름 속에 한동안 갇혀 있었다. 염소들의 목에 매달린 수십 개의 쇠방울이 일제히 흔들렸다. 끊이지 않는 댕그렁 소리와 함께 염소 떼가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윤의 후배들이 나타났다. 마을 끝에 있는 티베트 곰파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 후배들은 먼저 돌아가고 금희는 윤을 따라 곰파를 구경하러 갔다. 

두 사람이 롯지로 돌아오니 미미와 윤의 후배들이 식당에 있었다. 저녁을 먹으려고 두 사람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미미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일행들은 그날 찍은 사진들을 서로에게 보여주었다. 어디를 어떻게 찍어도 완벽한 그림이라며, 모두 감탄사를 연발했다. 

“형, 이것 봐.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아? 선생님, 이 사진 보세요.”

윤의 후배가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금희와 윤이 염소 떼에 갇혀 서성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금희는 사진이 마음에 들어 나중에 카톡으로 꼭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미미가 윤에게 왜 자기를 깨우지 않았느냐고 짜증을 냈다. 금희는 미미가 자신을 힐난하는 것처럼 느꼈다.

고도가 높은 탓인지 밤이 되자 기온이 뚝 떨어졌다. 난방이 전혀 안 되는 방은 춥고 을씨년스러웠다. 금희는 승문이 메일을 읽었는지 궁금하여 스마트폰을 켰으나 와이파이가 작동하지 않았다. 미미는 굳은 얼굴로 침대에 누웠다. 저녁 내내 금희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어젯밤의 뜨거운 친밀감은 어디로 사라지고 냉랭하고 서먹한 태도였다. 낯선 이에게 너무 많은 이야기를 쏟아낸 것을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금희는 짐작할 따름이었다. 

“몸은 좀 괜찮아요?”

미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춥지 않아요? 침낭을 바꿔줄까?”

금희는 좀솜으로 출발하기 전날, 윤의 조언에 따라 포카라에서 영하 5도까지 견딜 수 있다는 침낭을 샀다. 윤은 미미가 한국에서 가져온 침낭이 여름용이라 추울 것이라고 걱정하며 자신의 패딩 점퍼를 빌려주었다. 

“아니요. 패딩을 입어서 괜찮아요.”

금희는 미미의 창백한 얼굴을 보면서 한 번 더 침낭을 권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얇은 침낭 속에서 밤새 추위에 떨 자신이 없었다. 두꺼운 침낭 속에서도 뼈가 시렸다. 아무래도 한 살이라도 젊은 사람의 피가 더 뜨거울 것이라 변명하면서, 금희는 잠을 청했다.

“좀솜은 해발 고도 2,700미터. 까그베니는 2,800미터. 고도 차이가 100미터 정도라서 어제는 쉽게 온 편이지. 여기서 묵티나트까지 거리는 약 9킬로미터야. 평지로 걸어도 짧지 않은 거리인데 해발 고도를 1,000미터나 올려야 하니 어제보다 엄청 힘들 거야.” 

윤의 설명을 듣고 까그베니를 출발했다. 출발할 때부터 세찬 바람이 불어서 걷기가 힘들었고, 급경사가 시작되었다. 윤의 예상대로 몸은 매우 힘들었으나, 금희는 걸음을 멈추고 쉴 때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풍경에 감탄하며 희열을 느꼈다. 오직 바람과 산뿐인 세상은 아름다웠다. 저절로 오체투지를 하고 싶게 만드는 묵직한 아름다움이 스며 있었다. 문득 시신을 땅이나 바위, 나무 위에 내버려둔 채 시간의 힘으로 풍화되기를 기다리던 풍장의 풍습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바람이 영혼을 거두어 이 거친 땅에서 벗어나게 해주길 바랐을 것이다. 

자르콧에서 점심을 먹을 때만 해도 묵티나트까지 두세 시간밖에 안 걸릴 거라고 예상했다. 오전의 산행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일행은 차를 마시면서 오래 쉬었다. 다시 출발하자마자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모두 걷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맨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던 금희는 오히려 속도나 체력의 변화가 별로 없어서, 어느새 맨 앞에서 걷게 되었다. 물론 쪼리를 신고 가장 무거운 짐을 진 포터는 바람처럼 사라진 뒤였다. 능선 하나를 힘겹게 오르니 눈앞에 작은 호수가 나타났다. 물이 줄어서 연못이라고 해도 좋을 규모였다. 금희는 물가를 빙 돌아서 다시 경사가 시작되는 길목에 걸터앉았다. 오래 걸어온 발을 쉬게 해주려 등산화를 벗으면서 승문이 해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침부터 걷다 보면 오후 늦게나 해 질 무렵에 어느 마을에 도착해.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이면 다시 다른 마을을 목적지로 삼지. 그때는 걷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도 없었으니까. 그날도 그렇게 걷다가 오후 무렵 야트막한 고개의 정상 부근에 이르렀어. 길 아래쪽으로 호수가 보였어. 호기심이 생겼지. 호수 쪽으로 가는 한적한 오솔길로 접어들었어. 가시덤불을 헤치고 가야 했어. 도착해 보니 호수가 넓더라고. 멀리 건너편에 집 한 채가 가물가물 보였어. 롯지처럼 보여서, 오늘은 저기에서 머물면 될 거라고 마음을 놓았지. 배낭도 내려놓고, 신발과 양말도 벗고. 햇볕이 따듯해서 풀밭에 누워 깜빡 졸았나 싶어.

한기가 들어 잠이 깼는데 해가 지고 있었어. 설산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배낭을 둘러메고 호수 저편에 있는 집을 향해 걸었어. 호수를 빙 돌아서 가다 보니 눈으로 볼 때보다 한참 멀더라고. 그때부터 불안했어. 과연 도착해보니 롯지 같은 건 없고, 집처럼 보인 것은 돌로 쌓은 벽이었어. 짓다가 만 집이었지. 벽에 창문까지 달려 있는데 그 뒤는 허공인 거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머릿속이 하얘지더라고. 그 자리에 서서 생각했어. 이건 마치 내 인생 같구나. 내 인생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 위해 누군가가 일부러 세워 놓은 벽인가 보다. 

 

금희는 고개를 들어 호수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집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전깃줄이 여러 개 얽혀 있는 전봇대 하나가 쓰러질 것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등산화를 다시 신는 금희 옆으로 윤이 묵묵히 지나쳐갔다. 말 한마디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힘든 것 같았다. 

 

묵티나트에 도착할 때까지 빗줄기는 그쳤다가 흩뿌리다가 오락가락했다. 롯지들이 모여 있는 거리로 들어서자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거리 입구의 어느 롯지 앞에 윤과 포터가 서 있었다. 날은 어두워가는데, 미미와 다른 일행들은 아직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여기 방이 있다는데 올라가서 둘러보고 오실래요? 저는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윤이 부탁했다. 금희는 배낭을 내려놓고 포터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나무계단을 올라가니 꽤 넓은 이 층이 나타났다. 큰 방 서너 개가 있고, 방마다 이미 등산객 서너 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포터가 구석 방문을 열어 내부를 보여주었다. 좁은 방에 나무 침상 다섯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시트도 담요도 언제 세탁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낡고 지저분했다. 

“한 방에서 다섯 명이 잘 수는 없잖아요.”

금희는 롯지에서 나와 윤에게 설명했다. 나머지 일행이 도착해서 현관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미미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산에 올라오면 다 그래요.”

“위로 올라가서 더 나은 곳을 찾아보고 싶어요.”

“다들 너무 지쳤어요. 원래 포터들이 자기 단골집으로 손님들을 데려가요. 웃돈을 좀 받아야 그 사람들도 먹고살아요. ”

“난 여기서 못 자겠어요. 혼자 올라가서 다른 곳을 찾아보고 올게요.”

갑자기 윤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한숨을 쉬면서 덧붙였다. 

“마음대로 하세요.” 

금희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언덕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포터가 뒤따라왔다. 금희는 눈으로 보기에 새로 지은 듯 보이는 롯지들만 골라서 들어갔다. 대부분 방이 없었고, 어쩌다가 빈방이 있어도 여러 명이 함께 자야 하는 곳이었다. 롯지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24시간 핫 샤워’라고 써 붙인 롯지가 눈에 띄었다. 인터넷에서 많이 언급된 곳이라 금희가 마음에 둔 곳이었다. 그곳에는 빈방이 없었다. 그러나 비슷한 구조인 바로 옆 롯지에는 2인실과 3인실이 모두 가능했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욕실이 붙어 있는 방이었다. 금희가 그곳에서 방 두 개를 얻으려 하자 포터와 롯지 주인이 네팔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포터는 실망한 표정이었다.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언덕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금희는 그에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마이 네임? 니마,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니마는 금희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윤과 일행에게 금희는 유명한 롯지의 옆집에 방을 얻었다고, 뜨거운 물이 나오는 욕실이 붙어 있는 깨끗한 방이라고 전했다. 환호성을 기대했으나, 10분 정도 더 올라가야 한다고 덧붙이자, 모두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10분이든 5분이든 다시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특히 미미에게는 너무 괴로운 일인 듯했다. 사람들은 굳은 얼굴로 주섬주섬 배낭을 챙겨 일어섰다. 앞장서서 걷는 금희의 곁으로 윤이 다가왔다. 

“제가 선생님을 잘못 본 거 같아요.”

금희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고개를 돌려 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는요, 선생님이 정말 좋은 사람인 줄 알았어요.”

윤은 금희를 지나쳐 성큼성큼 가버렸다. 니마는 금희가 정한 숙소에 짐을 옮겨다 놓고 단골 롯지로 내려갔다.

그날 밤 미미는 두통과 오한을 호소하다가 화장실에 가서 토하기 시작했다. 물과 전기가 이미 끊어진 뒤였다. 금희는 손전등을 켜고 미미의 상태를 보러 갔다. 어둠 속에서 미미는 변기를 찾지 못했는지 온종일 먹은 음식을 화장실 바닥에 토해놓았다. 미미가 비틀거리며 침대로 돌아간 뒤 금희는 휴지로 토사물을 닦아냈다. 소화되지 않은 라면 면발들이 시큼한 냄새를 풍기며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화장실을 대충 치운 뒤 침대로 돌아와 미미를 살펴보았다.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어제보다 더 추운 밤이었다. 침낭을 바꿔줄까 잠시 망설였지만, 모르는 척하자는 마음이 더 강했다. 

아침에 금희는 심한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묵티나트 사원으로 출발하기 위해 롯지 앞에 모인 일행 모두 두통과 메스꺼움을 호소했다. 미미는 수척해진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산병에는 산 아래로 빨리 내려가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며, 윤은 모두 사원까지 가능한 한 빨리 다녀온 뒤 좀솜으로 내려가자고 했다. 

108개의 물줄기가 현생의 죄업을 씻어준다는 힌두교 사원을 지나 오색으로 펄럭이는 타르초가 불탑을 휘감고 있는 티베트 곰파로 넘어갔다. 하얀 돌을 쌓아 만든 오두막 같은 곳이었다. 금희는 불상 앞에서 절한 뒤, 앞선 사람들을 따라 바닥에 엎드려 작은 구멍 속을 들여다보았다. 희미한 파란 불꽃이 보였다. 불의 여신이 전해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라 했다. 사원을 빙 둘러 밖으로 나오니 윤과 일행이 초르텐이라 부르는 탑 근처에 모여 있었다. 금희는 그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조그만 가스레인지 불꽃 같은 것을 보면서도 뭔가를 빌게 되더라고. 너희도 그랬어?”

“그게 뭐라고 나도 막 엄숙해지더라.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어.”

“어? 나도 그랬는데.”

윤의 목소리에 이어 미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신기하다. 나도 그렇게 빌었어요. 아무도 미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금희는 아무것도 빌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해달라니, 아직은 모두 좋은 사람인가 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하게 얽힌 인연으로 쌓인 업을 내 힘으로는 풀 길이 없음을 깨닫게 되면,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믿음은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미움받지 않게 해달라고, 간신히 빌 수 있을 뿐이다. 금희는 문득 윤의 글을 떠올렸다. 소망이 소중한 이유는 노력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

 

결국 지프를 타기로 했다. 이틀 내내 걸어 올라온 길을 두 시간도 안 걸려 내려왔다. 좀솜에 도착하니 금희의 두통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세상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느낌은 여전했다. 다른 이들도 두통과 메스꺼움이 멈추었다고 했으나, 모두 지쳤으므로 오후 내내 쉬면서 1박하고 내일 트레킹 일정을 다시 짜기로 했다. 숙소를 결정할 때 다시 의견이 엇갈렸다. 금희는 가격이 아무리 비싸도 뜨거운 물이 잠깐이라도 나오는 욕실이 딸린 방을 원했다. 윤과 후배들은 가격이 저렴한 롯지로 가겠다고 했다. 결국 금희는 혼자 호텔에 묵기로 하고 미미와 윤의 일행은 단체실이 있는 롯지로 갔다. 아침 일찍 금희가 그들의 숙소 앞에 가기로 했다. 

호텔 방에서는 와이파이가 잡혔다. 금희는 스마트폰을 켜고 메일을 확인해 보았다. 금희가 포카라에서 보낸 메일은 여전히 읽어보지 않은 상태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런 상태로 다시 10년이 흐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금희는 읽지 않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짧은 메일을 하나 더 보냈다. 이제는 너를 승문이라고 부르면 안 될 거 같아. 스님. 성불하세요. 그날 밤 포카라를 떠난 뒤 처음으로 깊이 잠들었다. 아침에 금희는 간밤의 꿈을 돌이켜 보며 이상한 기분에 잠겼다. 꿈속에서 호수를 보았다. 호숫가에는 일곱 그루의 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예전에 승문이 자주 꾼다고 하던 꿈과 비슷했다. 

아침 일찍 금희는 윤의 일행이 머무는 숙소 앞으로 갔다. 10분쯤 일찍 도착하니, 니마 혼자 현관 앞 돌계단 앞에 서 있었다. 금희는 니마에게 다가가 물었다. 

“좀솜 근처에 호수가 있나요?”

니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금희를 바라보았다. 금희는 짧은 영어와 손짓을 섞어 질문을 거듭했다. 니마는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다. 둠바 레이크. 고우 투 브릿지. 고우 티니가온.

“여기서 얼마나 걸려요?” 

니마는 써티미닛이라고 했다가 다시 원아워라고 고쳐 말했다. 그러는 사이 윤의 일행이 나타났다. 그들은 버스를 타고 따토파니까지 내려가기로 했다고 금희에게 말했다. 

“따토파니에는 온천이 있어요. 거기서 하루 자고 고레파니로 올라갈까 해요.”

금희는 마을 옆 개울가에서 뜬금없이 뜨거운 물이 솟는 데가 있더라는 승문의 말을 떠올렸다.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옷을 입은 채로 목욕한다고 했다. 승문은 정말로 이 길을 지나간 것일까. 안나푸르나를 한 바퀴 돌았다면 당연히 좀솜을 지나 따토파니로 내려갔을 것이다. 윤의 일행을 따라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걷다가 금희는 갑자기 깨달았다. 죽을 때까지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것임을.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나는 여기서부터 혼자 갈게요. 꼭 들러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요.”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윤에게 말했다. 윤은 펄쩍 뛰면서 만류했다. 그러나 금희는 고레파니로 다시 올라가고 싶지 않으며, 근처에 있는 호수에 들렀다가 천천히 베니까지 걸어가서,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포카라로 가겠다고 설명했다. 스마트폰에 지도를 받아 왔고, 다른 트레커들도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조심해서 가겠다고 덧붙였다. 윤은 여전히 마뜩하지 않아 했으나, 금희는 니마에게 자신의 침낭과 짐을 받아 배낭을 다시 꾸렸다. 그리고 포카라에서 다시 보자는 인사를 건네고 윤의 일행과 헤어졌다. 

금희는 좀솜 시내의 여행사에 들러 둠바 호수로 가는 길을 물었다. 티니라는 마을로 가는 다리를 건너서 가다가 이정표가 나오면 오른쪽으로 가라고 했다. 시간은 두 시간쯤 걸릴 것이며 그곳에서 마르파로 내려가는 오솔길이 있다고 지도를 펴 보이며 알려주었다. 금희는 마을을 가로지르는 호젓한 골목을 지나가 현수교를 건넜다. 혼자 걷고 있으니 외로움이 몰려왔다. 과연 호수를 잘 찾아갈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다. 엊그제 윤의 일행과 묵티나트로 올라가던 여정이 전생의 일처럼 느껴졌다. 히말라야의 산자락을 오르는 동안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다 체험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말의 원래 의미와는 다르겠지만, 지나온 2박 3일의 시간이 1년처럼 느껴졌다. 

마을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었으나 다른 여행객들은 보이지 않았다. 구보하는 군인들과 냇가에서 물을 먹고 있는 당나귀 한 마리를 만났을 뿐이다. 경사가 급하지 않은 산길을 오르락내리락하던 끝에 오른쪽은 티니, 왼쪽은 둠바 호수를 가리키는 이정표를 만났다. 그곳에서 한 시간쯤 걸었고 다시 마을 하나를 지나치자마자 산길의 왼쪽 아래쪽으로 청록색으로 빛나는 호수가 나타났다. 

호수는 철조망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었다. 울타리 위로 오색의 타르초가 말갈기처럼 휘날렸다. 가까이 다가가니 입장료를 받는 관리실이 보였다. 관리실 옆에는 표지판이 하나 서 있었다. 

 

이 호수는 쿠춥 테렝가 곰파와 역사적 종교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런 연유로 이 호수에서 사는 물고기는 종교적 목적으로 키우는 것이며, 잡아서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호수의 물은 신성하게 여겨지며, 사원에서 종교적 의식을 행할 때 사용된다. 샹바 림포체 2세가 영적인 의식을 행하면서 이 호수에 곡식과 귀중한 금속을 담은 병을 묻었다. 

 

관광객은 하나도 없었고, 호수 위쪽으로 작은 곰파와 문을 닫은 것처럼 보이는 식당 건물이 보였다. 금희는 배낭을 내려놓고 호숫가 산책로에 잠시 주저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멀리 호수 건너편에 집 한 채가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그 집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집의 모습이 분명히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걸음을 멈추었다. 이제 집은 짓다가 만 형태가 아니었다. 푸른색 지붕과 네 개의 벽, 창문과 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제대로 있는 완전한 집이었다. 금희는 마음이 놓였고, 왠지 기뻤다. 승문이 십 년 전에 본 집이 바로 저 집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자 누군가를 향해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금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스님. 이제 완전한 집이 되었어요. 내가 지금 여기에서 봤어요. 

바로 옆에서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거센 바람이 타르초를 요란하게 펄럭였다. 금희는 바람이 세상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이 자리를 지나갈 때쯤 자신의 업도 흩어지고 사라지기를 소망했다. ■

 

부희령 samashti@hanmail.net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단편소설)로 등단. 서울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공부했고 인도에 체류하며 명상과 불교를 공부했다. 소설을 쓰고 외국의 좋은 책을 소개하며 영어로 된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한다. 지은 책으로 청소년 소설 《고양이 소녀》 《엄마의 행복한 실험실: 마리 퀴리》 《꽃》 등이 있으며, 《살아 있는 모든 것들》 《버리기 전에는 깨달을 수 없는 것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등 80여 권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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