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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겠노라, 힘깨나 쓰는 자들이 깃발을 쳐들고 설치는 시절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삼한 땅에서 스님들의 운수행각을 가로막는 법은 없었다. 임금에서부터 무지렁이 백성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을 하늘처럼 섬기는 세상이었다.

속세를 벗은 스님이라도 누군가와 연락 주고받을 일은 있게 마련이었다. 저절로 소식을 모으고 나누는 거점 사찰이 정해졌다. 서라벌에서 해변으로 이어지는 설악산의 신흥사, 대관령을 넘어 내륙으로 파고드는 오대산의 월정사, 옛 고구려 땅과 송악을 잇는 벽란도의 성각사, 삼남 지방에서 올라오는 길목 태화산의 마곡사가 그곳이었다.

처음에는 도반들끼리 안부나 나누는가 싶더니 점차 각 산문의 통문도 내걸리고, 차츰 근방 대중들의 회합 장소로도 쓰이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올해의 경우는 각별했다. 삼복더위가 수그러들 무렵부터 수상한 통문이 삼한 땅 방방곡곡을 누비더니, 9월 9일 중양절에 맞춰 마곡사에서 원로 고승들의 회의가 열렸다.

그때까지는 교종 산문과 선종 산문 불제자들이 무릎을 맞댄 적도 없거니와, 까마득한 옛날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의 승려들이 한자리에 모여 본 일이라곤 없었다. 이변이었다. 교종 산문에서 보종 선사와 관혜 선사, 선종 산문에서 신방 대사와 진해 대사, 신라 땅에서 현휘 대사와 담제 대사, 백제 땅에서 석총 대사와 형미 대사, 고려 땅에서 희랑 대사와 긍양 대사, 발해 땅에서 재웅 대사와 영선 대사 등 원로 고승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최고령인 덕분에 회의를 주재하게 된 보종 선사는 눈을 반쯤 감은 채 보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대중들은 저마다 할 얘기가 많은 듯싶었으나, 보종 선사는 흰 눈썹 한 번 꿈틀거리는 법이 없었다. 숫제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다. 너무 번거로워 귀찮아졌는지, 어떤 한 가지 생각에 골몰한 탓인지 회의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 때문에 모두들 보종 선사의 주의를 끌려고 음성을 훨씬 높였고, 마치 싸움이라도 벌이려는 것 같았다.

 

― 세상은 어지럽소이다. 사방에서 도적 떼가 출몰하고 민심이 흉흉해지는가 싶더니, 여기저기 새 나라가 들어서고 새로운 왕이 생겨났소이다. 그 불똥이 불문까지 번진 지도 오래외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승복을 걸쳤던 궁예마저도 왕이 되었고, 쇠둘레에 대궐을 짓고는 각 산문으로 초대장을 돌렸소이다. 뒤늦었으나 우리가 뜻을 모아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소이다.

신라 땅에서 온 현휘 대사가 간결하게 개회 인사를 마치자, 백제 땅에서 온 석총 대사가 재빨리 비집고 나섰다.

― 궁예란 자는 스스로를 미륵이라 칭하고, 명주 관내 사찰의 젊은 대중들을 선동하여 원로 고승들을 내쫓았으며, 포고령을 내걸어 장토마저 빼앗아 무지렁이 백성들에게 나눠줬다고 하더이다. 그 무식함과 흉포함은 통탄할 일이외다.

교종 산문의 관혜 선사가 석총 대사의 말을 이어받았다.

― 그 말을 믿지 않소. 나는 궁예를 직접 본 적이 있소이다. 궁예는 미륵용화세상에 대해 말했고,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에 대해 말했소이다. 진골 귀족들과 벼슬아치들과 지방 호족들의 횡포에 대해서도 말했고, 승려들이 장토를 소유하며 처첩을 거느리는 타락한 세태와 관행에 대해서도…….

석총 대사와 함께 백제 땅에서 온 형미 대사가 두 팔을 홰홰 내저었다.

― 무지렁이 백성들은 거룩하고 진골 귀족들, 벼슬아치들, 지방 호족들과 원로 고승들은 모두 다 사악하다는 말이오?

회의가 첫머리부터 다툼으로 번질 기세이자, 신라 땅에서 현휘 대사와 함께 온 담제 대사가 가사 자락을 확 젖히면서 벌떡 일어났다. 보통 사람의 갑절은 되어 보이는 몸짓만으로도 좌중의 입을 제압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 예까지 달려온 값에 걸맞은 의논을 하자면 목청부터 높일 게 아니라, 대충이라도 삼한 땅에서 빚어지고 있는 작금의 실정을 함께 돌아봐야 할 것이외다. 그런즉, 소승이 먼저 신라 땅의 일을 말씀드리겠소이다. 진골 귀족들의 횡포를 지켜보다 못한 여왕이 물러나면서 신라 왕실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소이다. 상주 땅에서 원종과 애노란 자가 민란을 일으키자 아자개, 홍술, 원봉, 능문, 양문, 왕봉규 등이 저마다 가까운 관아로 쳐들어가서 차고앉아버렸소이다. 백성들을 도탄에서 건져내겠노라 외치면서, 스스로를 장군이라 칭하고 있소이다. 신라 땅은 상주 아래쪽과 강주 동쪽으로 바짝 쪼그라들었으나, 그마저도 여러 장수들이 나누어 차지한 꼴이고 보니 목불인견이외다. 횃대 밑에서 범 잡는다는 짝으로, 겨우 서라벌 부근만을 움켜쥔 진골 귀족들은 그런 난리판에서도 제 뱃속 채울 궁리뿐인즉, 나라가 어디로 떠내려갈지 모를 형편이외다.

석총 대사가 촉새처럼 튀었다.

― 완산주의 백제 땅 사정은 전혀 아니올시다. 일찍이 견훤대왕께서 탐관오리들을 쓸어내고 질서를 추상같이 바로잡았소이다. 그런즉 금강 아래쪽, 강주 서쪽의 옛 백제 땅 백성들 살림살이는 매우 요족하오이다. 견훤대왕은 하늘 아래 둘도 없는 성군이며 강력한 힘을 지닌 장군이외다. 우리 불제자들이 견훤대왕이 삼한을 통일하게끔 힘써 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소이다.

고려 땅에서 온 희랑 대사가 그 말을 넘겨받았다.

― 견훤이란 자가 성군이란 말 더는 듣고 있을 수가 없소이다. 그자는 흉포하여 살육을 일삼고 모든 일을 힘으로 찍어 눌러서 해치운다는 소문이더이다. 오죽하면 스스로 상주장군이라 칭하고 나선 그자의 애비인 아자개란 자가 아들인 견훤을 돕지 않고 양길 장군의 휘하에 들었다가 궁예에게 투항했겠소이까. 그건 그렇다 치고, 고려 땅의 형편부터 말씀을 드리겠소이다. 북원의 치악산 석남사에서 봉기한 양길 장군 도움 덕분에 중원 땅의 청길, 괴양 땅의 신훤, 명주 땅의 순식, 명지성의 성달, 송악 땅의 왕륭에 이르기까지 모두 궁예의 휘하에 들었소이다. 또한 오로지 미륵부처의 가피와 넉넉한 아량으로 백성을 어루만지는 덕분에 삼한 땅의 대부분은 물론, 백제 땅 서남해의 나주와 뇌산군도 고려에 귀속되었소이다. 이제 와서는 바짝 쪼그라든 신라나, 완산주에 웅크린 백제 따위는 저절로 녹아 없어질 날만 기다리는 형편이외다.

희랑 대사의 말끝이 채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형미 대사가 발끈하고 나섰다. 그래봤자, 방금 자신이 내뱉었던 말에다가 석총 대사의 말을 이어 붙이는 게 고작이었다.

― 무지렁이 백성들은 거룩하고, 진골 귀족들과 벼슬아치들과 지방 호족들과 원로 고승들은 모두 다 사악하다는 말이오? 궁예란 자는 스스로를 미륵이라 칭하고, 명주 관내 각 사찰에서 원로 고승들을 내쫓았으며, 포고령을 내걸어 장토마저 빼앗아 무지렁이 백성들에게 나눠줬다 하더이다. 그 무식함과 흉포함은 통탄할 일이외다.

고려 땅에서 희랑 대사와 함께 온 긍양 대사가 차분하게 그 말을 넘겨받았다.

― 그렇소이다. 서라벌의 진골 귀족들은 맹수나 맹금처럼 백성들의 피땀을 착취하고, 사찰의 호화와 사치는 개탄할 지경에 이르러 있소이다. 불교는 오랜 세월을 두고 왕실이나 진골 귀족들의 비호를 받아오면서, 그들의 부귀공명이나 수복강녕을 빌어주는 신앙으로 굳어버렸소이다. 승려와 사찰의 위치가 높아져서 덕행 높은 승려들은 국사나 왕사가 되었고, 금하신이라 일컫는 진골 신분의 벼슬아치가 뒷배를 봐주는 서라벌의 사찰만 해도 사천왕사, 봉성사, 감은사, 봉덕사, 봉은사 등 여럿이외다. 각 사찰들은 또 엄청난 토지와 재산을 갖고 있소이다. 백제 땅 또한 다를 게 없소이다. 동리산의 대안사 재산목록에는 보유 곡식 2천9백여 섬, 전답 4백4결, 땔감을 가꾸는 시지 1백43결, 염전 43결, 노비 23인, 전답을 관리하는 복전 40인이라고 적혀 있었소이다.

담제 대사가 이어받았다.

― 사찰의 규모 또한 상상하기 힘들 만큼 크외다. 성주산 성주사는 불전 80칸, 행랑 8백여 칸, 수각 7칸, 창고 50여 칸으로 무려 1천 칸에 이르외다. 각 산문에는 또 얼마나 많은 불제자가 들끓고 있소이까? 성주산문에는 낭혜 대사의 제자가 2천 명, 이엄 선사의 제자가 5백 명이나 되오이다. 가지산문에는 체증 대사의 제자가 8백 명, 진공 대사의 제자가 4백 명이며, 실상산문에는 홍척 대사의 제자가 1천 명, 수철 선사의 제자가 5백 명이나 되오이다. 각 산문마다 1천 명에서 2천 명에 이르는 승려들이 들끓고 보면, 그 속에 장사꾼이나 유랑농민은 물론이고 심지어 도둑의 무리까지도 섞여 들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없게 되었소이다.

현휘 대사가 그 뒤를 받쳤다.

― 일찍이 궁예가 몸을 의탁했던 서라벌의 세달사만 해도 불전 50칸, 행랑 2백여 칸, 창고 50여 칸으로 무려 3백 칸이 넘는 대사찰이었소이다. 북쪽으로 내이군(영월)까지 뻗쳐 있는 토지가 전답과 시지를 합쳐 5백 결이 넘었거니와, 딸린 암자와 토지관리사에 흩어져 있는 불제자의 숫자 또한 5백이 넘었소이다. 그러고 보면, 불문의 폐해를 누구보다도 궁예가 잘 알고 바로잡고자 할 것이외다. 서라벌 귀족들이 차지한 장토, 지방 호족들의 장토, 사찰의 장토를 빼놓으면 곡식 한 포기 꽂을 땅 한 뼘을 찾아보기 어려웠소이다. 귀족이나 호족의 노비가 아니라면 사찰에 빌붙어 소작 농사를 지을 도리밖에 없는 처지이고 보니, 고통받는 것은 이래저래 무지렁이 백성밖에 없었소이다.

관혜 선사가 차분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 우리는 진골 귀족들과 벼슬아치들과 지방 호족들의 패악을 잘 알고 있지 않소? 각 사찰의 폐해에 대해서도 말이오. 궁예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진실한 불제자인지 알 수 있소.

석총 대사의 목청이 가장 크게 튀었다.

― 진실한 불제자? 천부당만부당한 말이오. 그는 거짓 불제자였으며, 그럴듯한 말로 백성들을 현혹하는 요물이외다.

선종 산문의 신방 대사가 이어받았다.

― 궁예는 신라 백제 고구려 발해 땅을 합쳐서 당나라와 맞설 수 있는 거대한 통일 왕국을 만들겠노라, 백성들을 선동하고 있소.

긍양 대사가 반대하고 나섰다.

― 허나, 궁예는 자신이 세우는 왕국이 미륵부처의 나라인 용화세상이라 했소이다.

형미 대사가 흥분하여 외쳤다.

― 그렇소. 궁예는 이 땅에서 부처님의 설법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하겠다 했소. 허나, 그 일은 부처님 아닌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인간이 부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야말로 부처님에 대한 모독이 아니겠소. 감히 미륵부처를 사칭하는 일도 그렇거니와, 스스로 손에 칼을 쥐고 살생을 일삼으면서 용화세상을 입에 담는다는 것 자체가 망발이오.

분위기가 점점 열기를 더해 가자 발해에서 온 영선 대사가 조심스레 음성을 낮췄다.

― 삼가 머리 숙여 여러분께 경의를 표하는 바이오. 우리는 궁예가 백성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미륵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고려해 봐야 하오.

순간 법당 안에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침묵을 지켰다. 한참 만에야 석총 대사가 몸서리를 치며 말을 내뱉었다.

― 어느 놈의 씨인지도 모르는 애꾸가 말이오? 나는 이날 입때까지 미륵부처가 외눈박이 애꾸였단 말은 들어본 적이 없소.

형미 대사가 주르르 토를 달고 나섰다.

― 소문에 따르면 궁예는 신라 경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경문왕의 장인인 헌안왕의 자식이라고도 하더이다. 고구려 피란민의 몸에서 태어났다고도 하고, 혹은 그렇지 않다고도 하오. 그처럼 씨앗도 밭도 분명치 않은 애꾸가 미륵부처라니, 도대체가 말이 되는 소리라야 믿음이 가지 않겠소.

발해 땅에서 온 재웅 대사가 조용히 받았다.

― 나도 관혜 선사처럼 궁예를 만나본 적이 있소. 군사들을 자식처럼 아끼는 마음 씀씀이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백성들에게 베푸는 공평무사한 정사를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소. 그와 같은 행동 하나하나는 모두 부처님이 궁예와 함께하신다는 증거인 듯싶었소.

형미 대사가 거칠게 반박했다.

― 조심하시오, 재웅 대사. 헛것을 보셨소이다. 대사께서는 귀신의 조화가 씐 요술을 보고 온 겁니다.

 

때마침 마곡사에서 마련한 찻상이 들어왔다. 너나 가릴 것 없이 찻잔부터 받아 들고 목을 축였다. 덕분에 입씨름으로 번져가던 회의장 분위기는 적잖이 누그러졌다.

찻잔을 비운 현휘 대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합장을 하고 허리를 굽힌 다음 목청을 틔웠다.

― 우리는 미륵부처가 하생하시길 바라며 살아왔소이다. 미륵부처가 지금 오시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다는 말이오? 도탄에 빠져 허덕이는 백성들, 하루살이가 버거운 중생을 제도하실 미륵부처가 반드시 석가모니불이나 관음보살 같은 분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부처님께서 이르시기를, 천지 만물에 불심이 있다 했거늘, 외눈박이 애꾸라 하여 불심을 지닐 수 없는 것은 아니잖소? 원로 고승입네 하지만, 결국은 우리도 바닷가의 모래알과 같을 뿐이오. 바람에 날리는 검불 같은 우리 인생들……. 부처님이시여, 자비로우신 지혜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소서.

현휘 대사의 말은 폭탄과 같았다. 당연히 여러 원로 고승들의 분노 섞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 누가 궁예를 두둔하고 나선다는 말이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을 분별하지 말라 하셨소이다. 손에 칼을 들고, 자기 기준에 따라 분별하여 시비를 가리고, 함부로 인명을 살상하고, 고승들을 산문에서 내쫓고, 부처님께 드릴 공양미를 거둘 사찰의 장토를 강탈했거늘…….

흥분된 목소리로 석총 대사가 소리치자, 보료에 기대어 졸고 있던 보종 선사가 눈을 뜨고 손을 들어 올렸다. 그동안 전혀 움직임이 없었던 탓에 보종 선사의 손짓에는 권위가 실렸다.

보종 선사의 장중한 음성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 도반들이여. 나는 심산에 버려진 고사목처럼 늙고 지친 사람이오. 내 마음은 상처투성이요. 우리가 어쩌다가 이런 분쟁에 말려들게 됐더란 말이오? 궁예는 색다른 불제자임에 틀림없소.

석총 대사가 중간에 끼어들려 했으나, 보종 선사가 손을 들어 가로막았다.

― 도반들이여. 내 말을 끝까지 들으시오. 미륵용화세상을 말하는 궁예의 입과, 칼을 들고 힘으로 이루고자 하는 궁예의 행동은 이단이오. 교종 산문의 법도와도 다르고, 선종 산문의 법도와도 다르오. 허나, 나는 그를 칭송도 비난도 할 수 없소. 팔십 평생을 부처님의 설법에 충실해 온 나 자신이 아직도 깨우친 바도 없거니와, 이룩한 일 또한 전혀 없기 때문이오.

이번에는 희랑 대사가 나서려 했으나 역시 제지되었다.

― 도반들이여. 보는 이에 따라 생각은 갈라지고, 생각에 따라 의견은 분분하오. 내가 제안을 하겠소. 각 산문에서 궁예의 쇠둘레 입성에 맞춰 축하사절을 보내도록 합시다. 되도록이면 이 자리에 있는 도반들도 모두 참석하도록 합시다. 그곳에 가서 직접 궁예의 말과 행동, 궁예의 군사와 백성을 골고루 살펴본 다음에야 우리의 의견을 후회 없이 한 가닥으로 모을 수 있을 것이오.

 

 

2.

 

고려의 도읍인 쇠둘레에서 옛 발해 남경남해부의 안변으로 나가려면 추가령을 넘어야만 했다. 추가령을 분수령으로 남쪽 기슭의 물은 남서로 흘러 칠중하(임진강)가 되고, 북쪽 기슭의 물은 북동으로 흘러 남대천이 되었다. 그중 남대천 물줄기가 수천 년을 두고 백두대간을 찢어발겨 낭림산맥과 태백산맥으로 동강 내놓은 단애가 삼방협이었다. 좌우로는 이삼백 척이나 치솟은 기암절벽이 부챗살처럼 첩첩이 접혔다가 펼쳐지고, 바위 틈서리마다 뿌리박은 노송들은 삐뚤빼뚤 꿈틀꿈틀 하늘을 가리며, 휘어지는 모퉁이마다 말 두 필 비켜 가기에 옹색한 협곡이 턱턱 막아서서 행인들을 옥죄었다. 한 사람이 지켜도 만 사람이 통과하기 어렵다는 천혜의 요새였다.

치솟은 산비탈은 도랑물을 사납게 떠다밀고, 뿌리 깊은 바위들은 한껏 버팅기면서 몸뚱이를 뒤틀었다. 이 귀퉁이 저 모퉁이로 튕겨 나간 바위너설과 돌덩이들이 암벽에 부딪히고 깨지면서 물길을 뚫는 사이, 틈새마다 엉덩이 비비대며 눌어붙은 흙더미가 조각조각 엉겨 붙어 촌락이 되었다. 상방협, 중방협, 하방협이었다. 상방협과 하방협은 십여 호 남짓 웅크린 벽촌, 중방협은 삼사십 호가 이마를 맞댄 산촌이었다.

길만 험할 뿐, 지켜서 얻을 건 없었다. 발해의 남경남해부 도독으로 있던 대위소와 뒤이어 그곳을 차지했던 적의황의당 두목 명귀가 차례로 고려에 투항했으니, 고려 땅이긴 한 셈이었다. 하지만 때맞춰 거란을 통합한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침략했고, 쇠둘레에서는 왕건의 무리가 변란을 일으켰다. 일의 낌새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대위소는 재빨리 명귀를 제자리로 돌려보내며 당부했다. 남경남해부를 점령하시오. 삼방협곡을 틀어막으시오. 군사와 식량 확보를 위한 특공작전이었다.

덕분에 중방협 북쪽 단애 아래에서 울력이 벌어졌다. 정과 망치로 바위를 쪼개고, 집채만 한 돌을 굴려 내렸다. 벼랑에 의지해 석축을 쌓는 이들도 있었고, 아름드리 소나무를 베어 다듬는 이들도 있었다.

터다짐이 웬만큼 마무리되자, 군사들이 시신을 운구해왔다. 궁예 대왕의 주검이었다.

궁예 대왕의 양쪽 어깨를 원종과 애노가 떠받쳐 바로 세웠다. 아무도 왜 그러느냐고 묻지 않았다. 이미 대왕의 유언이 널리 퍼진 까닭이었다. 내 주검을 길가에 세워 달라. 대위소와 명귀가 맨손으로 흙더미를 무너뜨려 궁예 대왕의 발등부터 무릎까지 차근차근 덮었다. 다음엔 우르르, 군사들의 성토작업이 이어졌다.

한 발 뒤로 물러난 대위소가 뚜벅, 입을 떼었다.

― 내 손으로 궁예 대왕님을 삼방협에 파묻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소이다. 며칠 전, 망봉산성(명성산) 본부 막사에서 회의가 열렸습니다. 원종 대장군과 애노 대장군께서도 그 자리에 계셨지요. 누군가 대왕님께 말했습니다. 어제는 왕건이 쳐들어왔으니, 이번에는 우리가 쳐들어갈 차롑니다. 출군을 명해주십시오. 여기저기서 청원이 마구 이어졌습니다. 군사도 모일 만큼 모였고, 철원성의 형편도 알아볼 만큼 알아봤습니다. 국토가 사분오열되기 전에 역도들을 쳐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망봉산성의 군사가 일만 명에 이릅니다. 철원성에 있는 군사 수효도 더 많지는 못할 것입니다. 망설이지 마십시오. 만약 대왕님께서 진격한다면 저쪽에 남아 있던 군사들 대부분이 전의를 잃고 이쪽으로 넘어올 것입니다. 보병대는 우리가 우세하고 마병대는 저쪽이 우세하니, 밤을 도와 공격하면 우리가 단연코 승리할 것입니다. 대왕님께서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소이다. 한나절이 지나도 열릴 줄 몰랐습니다. 제풀에 지쳐버린 장군들이 막사 밖으로 빠져나간 다음에도 대왕님께서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지요. 밥상을 들여도 쳐다보지 않았고, 밤이 깊어도 꼿꼿하게 버티셨습니다.

그 자리에 없었던 명귀가 그 다음을 재촉했다.

― 헌데, 어찌 대위소 장군께서 대왕님을 모셔오셨소이까.

대위소가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대답을 내놓았다.

― 다음 날 첫새벽이었지요. 대왕님께서 동녘 하늘에 걸린 계명성을 바라보며 말에 올랐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초병이 전한 말씀인즉 간명했지요. 혹시 누가 찾거든, 한 바퀴 돌아보고 오겠다 했다 하라. 그만해도 충분히 불안했습니다. 초병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채찍으로 허공을 때렸지요. 여름날의 새벽은 청량했소이다. 시원한 바람을 갈라 젖히며 한탄강까지 달려갔지요. 쇠둘레 백성들이 모두 달라붙어 바위를 넘어뜨려 강물을 막았다던 직탕폭포 앞이었습니다. 대왕님께서 강물에 손을 담그고 계셨습니다. 파드닥, 물새 한 마리가 물결을 박차고 날아올랐지요. 어느새 성큼 떠오른 태양이 강물 위에 햇빛 가루를 흩뿌렸습니다. 대왕님께서 다시 말에 올랐지요. 저도 대왕님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습니다. 대왕님의 혼잣말이 똑똑히 들릴 만큼 가깝게요. 대왕님께서는 분명히 원종 대장군과 애노 대장군께 말씀하셨습니다.

대장군. 말인즉 옳소마는, 내가 철원성을 공격하면 인질로 잡혀 있는 장군의 식솔들은 어찌 되오. 대장군. 나도 알고 있소이다. 싸우면 이길 수도 있다는 것을……. 허나, 세상에 제 나라 제 백성을 토벌하려고 군사를 움직이는 왕도 있소이까. 대장군. 말은 쉽지만, 세상에서 비겁한 자와 싸우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잘 모를 것이오. 막상 싸움이 벌어지게 되면 그자들은 무고한 백성들을 방패막이로 세워놓고 이렇게 약을 올릴 겁니다. 너희는 우리에게 손댈 수 없어. 우리는 나쁜 사람이고 너희는 착한 사람이야. 너희는 너희와 같은 착한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고는 우리를 공격하지 못해…… 라고 말이오. 대장군. 우리 군사가 일만 명이고 저쪽이 일만 명이라면, 그리고 쇠둘레 백성이 육만 명쯤 된다면, 그리고 우리가 지든지 이기든지 한다면, 몇 명이나 잃을 것 같소이까? 아마, 삼만 명은 목숨을 버려야 승부가 날게요……. 그때에 이르러서야 싸움에서 이긴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오. 백성을 그만큼이나 잃고서야 어찌 이 땅 위에 백성의 세상, 미륵용화세상을 세울 수 있다는 말이오. 대장군. 그렇다면, 내가 나아갈 길은 어디란 말이오.

볕은 점점 더 따가워지고 있었소이다. 대왕님이 타고 있던 말은 어딘지 모를 산비탈에 닿아 더는 움직이지 않았지요. 대왕님께서 갑자기 말에서 내리더니 가파른 산비탈을 기어오르기 시작했소이다. 험한 바위산이었지요. 저도 정신없이 뒤따라 기어올랐소이다. 도끼날처럼 뾰족뾰족 날 선 돌부리가 손발을 마구 할퀴는 한편, 까닭 없이 다리가 풀렸지요. 손끝에 잡힌 바위 모서리가 부서지면 아래로 한참이나 굴러 내렸소이다. 가까스로 등성이에 올라붙었지요.

명귀가 다급하게 죄었다.

―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대위소가 흐리멍덩한 목소리를 밀어냈다.

― 다시금 혼잣소리를 내시면서 자꾸만 위로 올라갔소이다. 바위너설에 긁히고 찢긴 손발에서 줄줄이 피가 흘렀지요. 얼마나 더 올라갔을까, 눈앞이 확 트였소이다. 왕재봉이었지요. 보였소이다. 철원성도 보였고, 저잣거리도 보였고, 백성들의 집들도 보였고, 잿더미로 변한 새 궁궐도 보였지요. 눈 아래 보양호수, 그 옆은 비룡성, 그런데 대왕님이 안 보였소이다. 풀포기 사이로 털퍼덕 무너졌지요. 산비탈 저 아래에 대왕님이 엎어져 있었소이다. 죽기 살기로 뒹굴며 달려갔지요. 대왕님께서 온통 피투성이인 채로 또 혼잣말을 중얼거리셨소이다. 백성의 나라는 백성의 나라……. 백성의 나라는 백성의……. 바람이 불었지요. 풀잎들이 술렁거렸소이다.

명귀가 그 말을 무겁게 받았다.

― 그래서 대위소 장군께서 대왕님을 이리로 모셔왔던 게로군요.

대위소가 숨을 고르고 나서 대꾸했다.

― 내 주검을 길가에 세워 달라. 대왕님 유언이었소이다. 아시지요, 무슨 뜻인지?

성토 작업에 이어 석축 작업이 이어졌다. 가장 낮은 바위를 기반으로 하여 일백 척이 넘는 석벽을 쌓아 올리고, 모진 비바람도 스며들지 않을 촘촘한 돌 지붕을 얹는 일이었다. 그 옆에는 삼십 척 높이로 담장을 두르고, 아담한 너와집을 앉혔다. 묘지기가 머물 암자였다.

 

궁예 대왕 능침 조성에 꼬박 열흘이 걸렸다. 좁다랗게 찢어진 삼방협곡이 토해낸 보름달이 뾰족바위에 살짝 얹혀 있었다. 물맛 좋고 속병에 즉효라는 삼방약수터 앞, 원종과 애노가 나란히 앉아 마무리 작업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저만치서 울리는 삼방폭포 물 쏟아지는 소리도 시원했다. 침묵 끝에 원종이 뚜벅, 입을 열었다.

― 그때, 소식을 듣자마자 쇠둘레로 달려갔어야 했다네.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을 저지른 거라네. 대왕님께서 문후를 여쭈겠다고 들어온 왕건에게 물었다더군. 왕 장군, 아무래도 요즘 모반이라도 꾀하는 모양이지요. 그러자, 왕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더군. 잔꾀라면 세상에서 왕건을 덮을 자가 없잖은가. 엉뚱한 말을 잔뜩 늘어놓아서 대왕님의 정신을 홀랑 빼놓는 게 상책이라 여겼겠지. 왕건이 곧장 내질렀다대. 대왕님, 과연 옳사옵니다, 소장이 내심으로 모반을 꾀하고 있었사옵니다. 대왕께서 엄한 표정을 풀고 빙긋이 웃음을 빼물었다더군. 그대와 나는 그대의 아비 왕륭 장군의 시신을 두고 형제의 의를 맺은 사이, 뭐가 부족해서 모반을 한다는 말인가. 왕건이 여러 중신들을 둘러보면서 대답했다더군. 대왕님, 이 나라 고려가 대왕님 한 분의 나라입니까. 아닙니다. 고려를 세운 것은 대왕님이시지만, 목숨 바쳐 싸운 장군들의 몫도 분명 있사옵니다. 그렇건만 대왕님께서는 장군들의 몫까지 몽땅 백성들에게 던져주라고 강요하십니다. 전장에 목숨 내던져가며 대왕님을 보필하여 나라의 기반을 닦은 장군들에게는 언제까지나 근신하며 검소하게 살아가라 강요하십니다. 나라를 세우는 데 티끌만큼의 공도 보태지 않고 거듭 은혜만 입어왔을 뿐인 백성들은 더욱 풍족하게 살아가도록 애써 보살피십니다. 지난날에 철원성에서 농성하다가 도망친 능문 장군의 무리가, 백성들을 위한 미륵용화세상도 좋지만, 목숨 바쳐 싸운 장군들이 작은 특권도 누릴 수 없대서야 무슨 낙으로 앞장서 싸우겠냐고 말했사옵니다. 대왕님께서는 오로지 능력만을 따져서 장군의 자식들을 졸병으로 복무케 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의 자식들을 그 윗자리에 앉히기도 하셨사옵니다. 그뿐 아니라 두 분 왕자님마저 백성의 자식들 휘하의 졸병으로 배치한 적도 있사옵니다. 대소 관직을 맡고 있는 자들과 여러 장군들이 무슨 여망으로 앞장서 목숨 걸고 나라에 몸을 바치겠나이까. 한 말씀 더 드리자면, 대왕님께서는 한 번 정해놓은 포고령은 추상같이 이행하십니다. 대왕님의 식솔이나 장군들에게도 예외가 없사옵니다. 반면에 백성들의 허물만은 무조건 덮어주려 하시옵니다. 역사는 누가 기록합니까. 괭이 든 백성이옵니까, 붓 든 선비입니까. 대왕님의 명성에는, 포악한 임금이라는 업적이 산더미처럼 쌓여가고 있사옵니다. 미륵용화세상을 열고자 평생을 애써온 대왕님께서, 폭군이라고 매도되어선 안 되옵니다. 대저, 백성이란 무엇입니까? 이 땅에 고구려가 들어서면 고구려를 섬기고,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면 신라를 섬기는 게 백성이옵니다. 왕을 가려서 섬기는 법도 없거니와, 왕이 역적 무리에게 쫓겨나거나 죽게 되어도 팔짱 끼고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게 백성이옵니다. 오로지 저 살 궁리로 최소한의 재물과 노력을 바칠 뿐, 충성심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게 백성이란 것들이옵니다. 대왕님. 백성이 무엇이건대, 목숨 바쳐 공을 세운 장군보다 더 떠받들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대왕님, 이와 같은 사정을 살피시어 대왕님께 충성을 바친 여러 장군들의 처지를 헤아려주시옵소서. 조목조목 짚어가다 보니 왕건의 언변에는 신명이 붙고, 나름대로 조리가 서는 듯싶더라는 게야. 그 모양이 퍽 신기했던지 대왕님께서 그만, 실소를 하고 말았다더군. 왕 장군, 오늘따라 뭔가를 잘못 먹은 듯싶소. 그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하나같이 신라 땅 진골 귀족들이 내세우는 궤변과 다름이 없으니 말이오. 농담은 내가 먼저 시작했으니, 오늘의 일은 불문에 부칠 것이오. 그날 왕건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요설이란 게, 젊은것들의 역심이었다는 걸, 우리 모두가 놓치고 말았던 셈이라네.

애노가 한숨을 폭 내쉰 다음 토를 달았다.

― 나도 소문을 듣고 있었으니, 잘한 게 없다네. 젊은 장수란 것들이 모이기만 하면 수군거렸다고 하대. 여기 있는 우리의 처지가 똑같소이다. 지방의 호족으로 그럭저럭 밥술이나 먹으며 살아오던 집안 어른들이 난세를 만나 성주가 되거나 군수가 되었지요. 그뿐 아니오. 이 자리에 있는 젊은 장수들 절반쯤은 왕건 장군에게 누이를 내준 음덕으로 천거 받지 않았소이까. 예사로운 인연이 아니외다. 그런즉, 우리는 각자의 집안이 모처럼 잡은 번영의 기회를 놓치지 않게끔 뜻을 모을 필요가 있소이다. 부친들이 지녔던 성주의 지위와 우리가 갖고 있는 장군 지위를 대대로 자식들이 세습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지요. 흐음, 그런 걸 다 젊은 응석받이들의 가벼운 불평일 뿐이라 여기고 뭉갠 결과가 오늘에 이른 거라네.

원종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 그런 소문은 나도 듣고 있었다네. 환선길이 사람을 보내기도 했더군. 젊은 장수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대표를 뽑는 논의까지 했다더군. 역모라도 꾸미자는 짓이더냐 추궁했더니, 자신들의 자잘한 요구사항을 대왕님 앞에 나가서 밝혀줄 대표라더군. 한주 성주의 자식인 왕규란 자가 앞장을 섰다고 하네. 대표를 뽑되 우리의 대표는 약점이 많은 사람일수록 좋을 것이오, 하고 말일세. 중원 성주의 아들 유권설이 웬 소리냐는 듯 눈을 커다랗게 치뜨고 되묻더라나. 약점이라니요. 왕규가 차분한 목소리로 받아냈다더군. 큰일을 하다 보면 우두머리는 항상 뜻하지 않은 사태에 직면하게 되는 법이외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상대에게 회유될 수도 있고, 갑자기 표변하여 이쪽과 안면을 싹 바꾸는 경우도 있고, 일이 성사된 다음에는 자기 낯을 세우려고 엉뚱한 고집을 부리는 수도 있고……. 더욱이, 우리가 추진하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말이오. 첫째, 백성의 신분을 나누지 않으며 관직은 세습되지 않는다. 둘째, 농토는 백성들의 땅이니 아무도 소출을 빼앗지 못한다. 셋째, 성과 군에는 일백 명 이내의 군사만 둘 수 있다. 넷째, 사찰은 장토를 갖지 못하며 승려는 계를 지켜야 한다. 대왕의 포고령 넷 가운데서도 제일 중요한 첫 번째 조항을 깨뜨리자는 일이외다. 지난번에는 그걸 도모하려다가 능문 장군을 비롯한 아자개, 청길, 신훤 장군 등이 뺑소니를 놓게 되었고, 젊은 학자 네 명이 목숨을 잃었소이다. 그런즉, 우리 대표를 맡을 사람은 반드시 약점이 많아야만 한다는 것이외다. 그것도, 절대로 이쪽을 배신하지 못할 정도로 많을수록 좋겠지요. 계집질을 많이 한다거나, 남달리 탐욕이 많다거나, 책잡힐 문서를 남겼다거나……. 아무튼, 그런 것 말이외다. 그 말을 듣자, 왕건과 같은 송악군 출신인 배현경이 통쾌하게 웃어젖혔다더군. 핫하하, 그러고 보니, 살살이 왕건을 두고 빈정거리는 말인 듯싶소이다. 두 딸을 꿰찬 값으로 김행파에게 비룡성 지대장을 시켜줬다가 두 왕자를 항명죄로 옭아맨 꼴이니, 이 땅에서는 약점이라면 그를 덮을 자가 없을 것이외다. 뒤따라서, 역시 왕건의 어릴 적 친구인 종회가 배꼽을 쥐고 웃었다더군. 그건 그렇소이다. 왕건이란 친구가 어려서부터 일을 저질러 놓기만 할 뿐 책임을 지는 법이라곤 없었소이다. 발등에 떨어진 불똥에만 급급해서 감당 못 할 약속도 잘하지요. 지난번 능문 장군에게 써줬다는 문서로 미뤄보더라도 그렇지 않소이까. 명색이 반역을 꾀한 자들에게 농성을 풀고 낙향하는 조건으로 내세운 약속이 그게 뭐요. 내 심정도 당신들과 똑같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니 후일을 기약하자. 그야말로 죽을 꾀를 낸 것 아니오. 대왕님이 그걸 보신다면 이번에는 절대로 용납지 않으실 게요. 그러면서도 그 친구 운은 기막히게 좋단 말이외다. 장삿길에 나서면 남보다 이문을 많이 남기고, 싸움터에 나가면 공을 세우고, 가는 곳마다 계집들이 앞을 다투며 안겨드는 상지상 팔자올시다. 기다렸다는 듯이 흑양군에서 자신의 아낙을 왕건에게 시침들이고 벼슬살이를 시작한 임상원이 무릎을 치고 나섰다는군. 책임 문제라면 흑양군의 이 사람 집안에도 남아 있소이다. 멀쩡한 여인의 몸으로 왕건 장군에게 하룻밤 시침을 들고는 무려 십칠 년을 독수공방으로 기다리는 판이지요. 왕규가 그 말을 받아서 아퀴를 지었다는 게야. 그 일이라면, 말도 마시오. 내 아우 역시 왕건 장군에게 하룻밤 안긴 죄로 십팔 년이나 생과부가 되어 있다오. 허허허. 한즉, 약점이라면 왕건 장군을 덮을 자가 없소이다. 그러면서도 낯 두꺼운 넉살 덕분에 미움조차 사지 않으니, 과연 적임이외다. 그리 결정하도록 합시다. 허헛. 일껏 환선길의 통지를 받고서도 의심 없이 넋을 놓고 있었던 셈이니, 내 죄가 더 크다네. 나는 믿었다네.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대왕 앞에 밝혀줄 대표 따위라면 얼마든지 뽑아 보내더라도 상관없다, 대왕님께서는 눈 한 번 꿈적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고 말일세.

달은 점점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애노가 불쑥 물었다.

― 어쩔 거냐?

원종이 허공에 뒀던 눈길을 삼방약수로 떨궜다. 샘물에 잠긴 보름달이 가만가만 일렁거렸다. 애노의 물음은 약조한 일에 대한 마지막 다짐이었다. 왕건의 무리에게 볼모로 잡혀 있는 식솔들은 그자들 처분에 맡겨둘 것. 망봉산성을 지키는 장수들과 군사들은 대왕님의 뜻을 받들어 무기를 내려놓도록 할 것. 대위소와 명귀는 모든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최후의 거점인 남경남해부를 확보하고 있을 것. 원종과 애노는 궁예 대왕 능침이나 지키다가 백성들 오가는 길가에 나란히 서서 눈비를 맞을 것.

고여서 넘치는 약수의 흐름을 좇던 생각이 잠시 곁길로 흘렀다. 백성들의 나라란 무엇인가. 궁예 대왕의 미륵용화세상이란 또 무엇인가. 칠십 평생, 한 번도 끼어들지 않았던 의문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고려 건국 18년, 그동안 아내와 자식을 만들고 따스운 밥 먹으며 따뜻한 잠자리에 드는 안락함에 길들여졌던 탓일까. 그렇다면, 세습노비로 태어난 원종(으뜸 일꾼)과 애노(슬픈 노비)가 고려의 대장군이 되기까지 줄기차게 달려온 외길은 무엇이더란 말인가. 이제 그만 편히 살고 싶다는 소망이야 어찌 젊은 장수들만의 것이겠는가. 만인이 우러러보는 높은 관직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유혹이 왜 젊은 장수들만의 바람이겠는가. 안락함을 취하기로 작정한다면, 지금도 아주 늦지는 않았거늘……. 살갗을 간질이는 바람결 같은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기라도 하듯, 벌떡 일어나며 훌훌 옷을 털었다. 옷자락에 내려앉았던 달빛이 비늘 떨어지듯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애노가 스스로를 격려하듯 말했다.

― 평생 진골 귀족도 없고 노비도 없는 미륵용화세상을 바랐거늘, 이제 와서 바꿀 도리는 없잖으냐.

원종이 따라 일어서며 툭, 받았다.

― 그렇지. 묘지기나 잘하는 수밖에 없겠지? ■

 

강선
본명 강병석. 충남 홍성 출생.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소설가 등단. 소설집 《낱말 찾기》 《어둠꽃》 《여름하늘》, 장편소설 《서 있는 자의 꿈》 《궁예》(전 3권) 《누가 너를 시인이라 불렀는가》 《초록의 전설》 《활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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