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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67년 시월 그믐, 자시가 지난 시각이라 사방이 지척을 분간하기 힘든 어둠에 묻혀 있었다. 문틈으로 들어온 찬바람이 등촉을 건드리자 별실에 모인 열한 명의 그림자가 벽에 어른거렸다. 첨의재상 오인택의 집이었다. 내로라하는 전직 현직 고려 핵심 세력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전에 뭐라고 했습니까? 지금, 그 근본 없는 중놈이 나라를 망치고 있지 않습니까? 

응양군 상호군 조린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애초부터 신돈이 마음에 안 들어서 대놓고 노화상이라 부르며 거리를 둔 사람이었다. 

-예, 옳습니다. 훈구를 내쫓고 사람들을 마구 내치고 있으니 장차 국가의 큰 근심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전직 첨의시중 경천흥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무장답게 건장한 풍모에 전작을 한 터라 얼굴이 꽤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왕실의 외척이자 홍건적 침입 때 큰 공을 세운 일등 공신인데 일찌감치 자리에서 밀려난 것을 순전히 신돈의 계략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애초에 노비는 승려가 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노비 출신이 승려가 되었으니 이는 국법을 어긴 것입니다. 국법을 어긴 자를 마땅히 내치셔야 한다고 아무리 상소를 올려도 전하께서는 감싸고만 도시니……

윤관의 9대손 윤승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에 전염이라도 된 듯 크게 작게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방 안 분위기가 추를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모두 대대손손 권세를 누려온 권문세족들인데 뿌리가 흔들리고 팔다리가 잘려 나가는 위기에 처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오죽하면 이제현 대감이 ‘신돈의 골상이 옛날 흉인과 유사합니다. 청컨대 가까이하지 마시옵소서’라고 전하께 아뢰었겠습니까?

전직 첨의재상 목인길이었다. 전민변정도감 시행으로 그동안 갖고 있던 노비와 토지 일부를 잃은 양반들이 신돈을 비방했던 일을 언급한 것이다. 그나마 무장 세력은 낮은 계층 출신들이 많아서 천민과 평민의 등용에 관대한 편이었다. 하지만 사족 중에서도 명문 문벌과 유학자의 반발은 더 심했다. 

-도선 대사가 쓴 글에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자가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말이 있지 않소. 반드시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오. 

뒤쪽에 앉아서 다른 사람의 말을 조용히 경청하던 김원명이 한마디 했다. 그는 말을 뱉고는 티 나지 않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왕에게 신돈을 천거한 사람이었다. 그것을 아는 몇몇이 헛기침을 해서 불편한 심사를 드러내 보였다. 하지만 김원명도 새로운 토지개혁 때문에 크게 피해를 본 사람이었다.

-자, 이제 결론이 난 것 같습니다.

모임의 좌장 격인 오인택이 서둘러 정리를 했다. 

-신돈이 장차 국가에 큰 근심이 될 것이니 일찌감치 제거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어떤 방법을 써야 할지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왜적과 홍건적 침입 때 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하던 순간처럼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점점 밤은 깊어가고 풀벌레 소리만 스스스스 숨을 죽여 울고 있었다.

한데,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던가. 쥐띠에 안동 출신의 심부름꾼 이(李)가가 이들이 모의하고 있는 계획을 우연히 엿들었다. 그는 토지를 빼앗겨 노비로 전락했다가 양인으로 복귀한 자로 신돈을 하늘이 내려보낸 귀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판서 신귀의 심부름으로 제사 때 쓸 그릇을 빌리러 오인택 집에 들렀던 그는 거시기가 떨어져 나가라 신귀에게 되돌아가 그 사실을 일렀다. 같은 신 씨로 신돈의 총애를 받고 있는 신귀는 말을 타고 급히 신돈에게 달려갔다.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신돈이 대청마루로 나왔다.

-지금 전직 현직 대신들이 모여서 대사님을 내칠 모의를 하고 있습니다.

신귀의 말을 들은 신돈은 잠이 확 깼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가진 것을 빼앗겼다고 통탄해하는 자들이 죽기 살기로 덤벼들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갑작스러웠다. 게다가 열한 명의 모의자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다. 

-무엇이라고? 오인택의 집에서…… 게다가 거기 김원명도 끼어 있다고?

신돈은 입이 쓰고 목이 타서 계속 물을 마셨다. 모두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누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들 끝까지 믿을 수 있을까. 왕의 힘만 믿고 개혁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으냐며 그만 손을 놓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해 할 일이 남아 있어.’

신돈은 엎질러놓은 세간살이처럼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았다. 시각을 다투는 일이라 즉각 호위병을 대동하고 입궐했다. 

-전하, 저는 산수 간의 일개 승려였는데 전하께서 택하시어 여기에 이르렀사옵니다. 전하의 명을 어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간악한 자를 제거하고 현량한 이를 등용하여 고려의 백성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지게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저를 죽이려 합니다. 

신돈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분노한 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왕사는 왕의 스승이다. 그러하니 이들의 모의는 역적모의나 진배없다. 과인은 반드시 그 배후를 밝혀 죄를 엄히 물을 것이다.

왕이 내지르는 소리가 내전 앞마당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신돈은 궁궐을 나와 절 앞 오동나무 아래 앉았다. 동쪽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지며 여린 빛줄기가 넓적한 오동나무 잎을 비췄다. 장롱이나 소반도 되지만 거문고나 가야금 같은 악기가 되기도 하는 오동나무의 쓰임새가 생각났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귀하거나 천하거나 모두 쓸모가 있다.’

신돈이 오랫동안 꿈꾸던 세상은 굶주림 없이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세상, 고려인이 하나가 된 차별 없는 세상이었다. 왕의 성품이 대쪽 같고 어명이 아무리 지엄하다지만 권문세가들과 전면전을 치를 각오를 더 단단히 해야 했다. 신돈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눈을 감고 진언을 외었다.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왕의 부름을 받고 입궐하던 날부터 이 년여 동안 일어났던 온갖 일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제 일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2.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다. 금방이라도 눈을 퍼부을 듯 하늘이 거뭇거뭇했다. 빈 들 눈 쌓인 나뭇가지 끝에 까마귀 떼가 몰려와서 모질게 울어댔다. 내린 눈이 겹겹이 얼어서 신돈은 조심조심 발을 내디뎌 산길을 내려갔다. 저잣거리로 내려갈수록 통곡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남자들은 검은 갓을 쓰고 흰옷을 입고 여자들은 흰 저고리에 흰 치마를 입은 채 언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며 곡을 했다. 자애로운 국모를 잃어 설운 백성들이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신돈은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합장을 했다. 1365년 이월, 공민왕이 즉위한 지 14년 되는 해였다.

-법사를 찾아서 들게 하라.

왕비가 죽자 몇 날 며칠 잠을 못 자고 식음을 전폐하던 왕이 신돈을 찾는다고 했다. 

궁궐 안 빈과 시녀, 내관들도 상복을 입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원자 순산을 기원하던 불경 소리, 범패 소리가 하루아침에 명복을 비는 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인생은 덧없는 것! 사랑도 부귀영화도 한순간이로구나.’ 

신돈은 착잡한 심정으로 염주를 돌리며 침전으로 들어섰다. 상복을 입은 왕은 피골이 상접했다.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양쪽 눈두덩이가 짓물러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했다. 

-자, 사부도 한잔하시구려.

신돈의 술잔에 술을 따르는 왕의 손이 살짝 떨렸다. 취기가 오른 용안이 불그스름했다.

-전하, 무엇보다도 옥체를 보전하셔야 합니다.

신돈이 두 손으로 잔을 받으며 인사를 올렸다. 

-그대가 보기에도 내 몰골이 흉측하오? 사랑하는 왕비가 죽고 없는데 내가 무슨 낙이 있어서 잘 먹고 잘 살겠소?

왕의 목소리가 가뭄 든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졌다. 

-전하, 부처님께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만물은 돌고 돌아 한 모양으로 머무르는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신돈은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집착할수록 번뇌와 망상이 커질 뿐입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걸 가슴 아래로 꾹꾹 내리눌렀다. 

-자, 법문은 다음에 듣기로 하고…… 바깥 얘기나 들려주시오. 

술잔을 입에 대며 왕이 재촉했다. 왕은 신돈이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본 것들을 이야기해주길 원했다. 신돈이 경험한 내용은 왕궁에서는 쉽게 들을 수 없는 생생한 날것이었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여전히 권문세족들이 백성의 땅을 빼앗고 있습니다. 그 크기가 산과 산, 강과 강을 경계로 할 정도입니다. 온종일 걸어도 한 사람의 토지를 다 돌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땅을 차지한 자도 많습니다. 하나 백성들은 굶주리다 못해 제 자식을 내다 버리는 실정입니다. 

신돈이 이 절벽에서 저 절벽으로 간댕간댕 살아가는 백성들의 형편을 아뢰자 불그레한 왕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쯧쯔쯔쯔, 그대도 알다시피 우리 왕비는 권문세가가 나라를 쥐고 흔드는 것을 가슴 아파했어요. 

그렇게 말을 꺼낸 왕이 옆에 세워놓은 왕비의 초상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 않소, 왕비?

왕은 직접 그린 초상화를 어루만지며 말을 건넸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을 대하는 것 같았다. 왕이 그림 앞에 수라상을 차려놓고 떠먹여 주는 시늉을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 듯했다. 그림은 올림머리에 봉황 장식의 화관을 쓰고 자색 장포를 입은 차림새였다. 신돈이 입궐했을 때 보았던 우아하고 기품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긴 치마를 끌며 가까이 다가올 것처럼 보였다. 

왕비는 원나라 황실 위왕의 딸이었다. 본명은 보탑실리이고 왕이 지어준 고려 이름은 왕가진이었다. 사람들은 원나라에서 내려준 시호 ‘인덕공명자예선안휘의노국대장공주(仁德恭明慈睿宣安徽懿魯國大長公主)’를 줄여서 노국대장공주 혹은 노국공주라고 불렀다. 대장공주는 원나라 황제의 고모나 왕고모에게 붙이는 호칭이었다. 노국대장공주는 이전에 원나라에서 건너온 왕비들과 많이 달랐다. 그녀는 원나라 여인임에도 고려의 관례에 따르려고 애를 썼다. 연경에서 가례를 올릴 때는 황금 화관에 푸른 원삼 차림의 고려 신부 차림을 했다. 왕이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친원 세력을 숙청할 때도 왕을 지지했다. 극심한 가뭄으로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원나라에서 가져온 패물을 몽땅 백성들을 위해 써달라며 내놓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결혼한 지 십 년이 지났는데도 후사가 없자 그녀 스스로 나서서 혜비의 입궁을 성사시켰다. 그래도 여전히 후사가 없자 안극인의 둘째 딸을 비로 책봉하자는 중신들의 청을 가납하여 달라며 왕을 설득하기도 했다. 

지난해 중궁 전의가 기다리고 바라던 소식을 전했다. 

-전하, 중궁마마께서 회임하셨습니다. 태맥이 확실하옵니다.

혼인 14년 만의 경사였다. 덕이 많은 왕후였기에 회임 소식을 듣고 고려 전체가 잔칫집처럼 흥성거렸다. 왕은 곧바로 사면령을 내렸다. 

-이는 부처님의 은혜요, 왕비의 덕이로다. 이 기쁨을 만백성과 함께할 것이니 옥문을 열어 대역죄인이 아닌 죄인은 방면토록 하라.

백성들은 한마음으로 왕비의 순산을 빌었다. 그런데 오호통재라, 만삭의 그녀가 아이를 낳다가 난산 끝에 세상을 하직하고 만 것이다. 

왕이 휘청거리던 몸을 꼿꼿이 세우고 앉았다. 술 취한 기색 없이 정신을 바로 차리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신돈도 초상화에서 눈을 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과인이 고려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내정개혁을 추진하지 않았소? 그때마다 거세게 반발한 자들이 모두 권문세가들이었잖소.

왕의 소원은 고려의 자주독립이었다. 즉위하자마자 부원 세력을 제거하고 내정간섭이 심했던 정동행성을 폐지했다. 원에 빼앗겼던 쌍성총관부를 탈환했다. 하지만 반대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아서 지금은 개혁 정책이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그들 중에 내 목숨을 노리는 자도 있었잖소. 

왕은 그 일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다며 주먹을 꼭 쥐었다. 당시의 일이 떠오른 듯했다. 이 년 전 윤삼월, 왕이 복주에서 환궁하던 중 반도 50여 명이 흥왕사 침전을 기습한 사건을 의미하는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원나라의 기황후가 친원 세력을 등에 업고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책봉하려고 일을 꾸미지 않았던가.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우리 왕비가 원나라에 사실을 알리겠다고 하면서 날 보호해주곤 했는데……

퀭한 눈으로 중얼거리는 왕은 쓸쓸하다 못해 처량해 보였다. 왕의 외로움과 슬픔, 분노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신돈은 얼른 왕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술잔을 들고 먼 데 시선을 둔 왕은 잠시 어딘가를 헤매는 것처럼 보였다.

-아, 나도 사부처럼 자유롭게 산천을 유랑해보고 싶구려. 그러면서 그림을 맘껏 그리면 얼마나 좋을까?

왕은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솜씨가 뛰어났다. 홍건적 침입으로 도성이 함락되었을 때 몽진을 가서 환대받은 보답으로 복주목을 안동대도호부로 승격하고 직접 써서 하사한 안동웅부 현판과 영호루에 남긴 글씨, 천산대렵도 그림과 노국대장공주를 그린 초상화 등은 내로라하는 환쟁이들이 입을 벌릴 정도였다. 

왕은 다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다시 그림을 돌아다보았다.

-왕비, 알아보겠소? 그대가 가까이 두고서 이롭게 부리라고 하던 신돈 법사가 여기 있소. 언젠가 그대가 사부를 이세독립지인(離世獨立之人)이라 하지 않았소? 

그때였다. 왕이 몸을 돌려 앉더니 술상 위로 불쑥 손을 뻗어 신돈의 두 손을 잡았다. 왕의 손 마디마디에서 힘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법사가 나라를 위해 지금보다 더 큰 일을 해주어야겠소. 

-전하, 망극하옵니다. 신은 오로지 나라의 평안을 위해서 성심을 다할 뿐이옵니다. 

신돈은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을 했다. 

왕이 침수에 들고 나서야 신돈은 살그머니 침전을 나왔다. 맵싸한 겨울바람이 예리하게 얇은 옷 속을 파고들었다. 신돈은 옷깃을 여미며 작대기처럼 바싹 마른 어깨를 옴츠렸다. 

 

* * *

 

다음날 왕은 신료들을 정전으로 불러들였다. 옥좌가 마련된 단 앞에 만조백관이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관직에 따라 도열해 있던 신료들은 신돈이 등장하자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뒤늦게 자리에 오른 왕이 신돈을 찾았다. 

-왕사는 이리 가까이 오시오. 

왕은 신돈을 어좌 바로 밑에 앉게 했다. 신료들은 어리둥절했다. 왕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대신들은 들으시오. 오늘부터 신돈 법사를 진평후에 봉할 것이오! 

어명이 떨어지자 모두들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굴빛이 새하얗게 질리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크게 놀란 사람은 신돈 자신이었다. 신돈은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크게 쓸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설마하니 진평후에 봉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던 것이다. 신료들은 한여름에 우박을 맞은 것처럼 머리를 감싸고 우왕좌왕했다. 

-전하, 미천한 출신의 승려가 진평후라니……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왕은 커다란 눈을 굴리며 소란스러운 내전을 잠자코 둘러보았다. 그 눈이 사냥 직전 먹이를 주시하는 매의 눈초리를 닮아 있었다. 

-지금 조정은 권문세족들의 친당(親黨)이 뿌리처럼 이어져 서로 잘못을 숨겨주고 있소. 신진사대부들은 일단 출세하면 자기 집안이 미흡한 것을 속이고 명예를 탐해서 처음의 마음을 버리고 있지 않은가. 유생(儒生)들은 또 어떠하던가? 유약하여 강직함은 적고 문생이니 좌주니 동년이니 하며 서로 무리를 짓고 다니고…… 

왕이 쯧쯔쯔즈 혀를 찼다. 큰 소리를 내던 신료들이 자라목이 되어 서로 눈치를 봤다.

-알다시피 법사의 출신이 미천하외다. 하나 법사는 일찍이 도를 얻어서 욕심이 적을 뿐 아니라 조정에 아무 파벌이 없고 친당도 없어서 남의 눈치를 보지 않을 사람이오. 이세독립지인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 아니겠오. 그러니 국사를 논함에 있어서 치우침이 없을 것 아니오.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니 그리 아시오!

이는 법사의 출신을 가지고 왈가불가하지 말라고 단단히 쇠못을 박는 일이었다. 

신돈은 어머니가 계성현에 있는 옥천사 여종이었다. 아버지는 신씨 양반이었고 어찌어찌 어린 나이에 중이 되었다. 어머니의 신분이 천하여 무리에도 끼지 못하는 천덕꾸러기로 항상 산방에 거처해야 했다. 불법에 관한 지식이라고 해야 불가에서 귀동냥해 배운 것뿐이었다. 그렇게 이곳저곳 떠밀려 다니다가 우연한 기회에 원나라로 건너갔다. 넓은 세상을 둘러보고 큰 스승을 만나 새로운 가르침을 얻게 되었다. 신돈은 머리가 좋을 뿐 아니라 달변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재미있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니 금세 대중설법으로 유명해졌다. 자신을 임금께 천거한 밀직사 김원명도 신돈의 설법에 흠뻑 빠진 신도의 한 사람이었다. 

어쨌든 어미가 절의 노비였는데 왕사 중에서도 진평후라니…… 이는 하늘이 놀랄 일이었다. 신돈은 몸이 거대한 바위 아래 깔린 듯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앞으로는 국정의 모든 사안을 법사에게 물어 처리하도록 하시오!

왕은 단호했다. 기가 질렸는지 더 이상 이의를 말하는 이가 없었다. 왕과 법사가 함께 자리를 떴다. 그제야 불평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아니, 중이 왕사가 된 것도 이해할 수 없거늘 진평후라니! 도무지 말이 안 되지 않오. 오로지 종묘와 사직을 위해 대를 이어 일한 우리는 대체 무어란 말이오.

-국상으로 어수선한 틈을 타 간악한 중이 전하를 꾀어낸 게 틀림없소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신료들이 웅성거렸다. 화를 참지 못해 주먹으로 바닥을 두드리는 자도 있었다. 

 

* * *

 

왕은 신돈을 가까이에서 자주 보기를 원한다면서 대궐 가까운 곳에 새 집을 마련해주었다. 왕이 새 집에 행차하였을 때였다. 신돈이 마련한 수라상을 받고 매우 흡족해한 왕이 상을 물리고 난 직후 물었다. 

-진평후께서 나라의 종사를 위해서라도 세력가들의 횡포를 막아야 할 것이오. 과인의 힘만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구려. 어디 무슨 좋은 생각을 가지고 계시오? 

몇 차례 전쟁은 백성들에게 군공(軍功)을 통한 출세의 기회로 작용했다. 많은 이들이 신분 상승과 함께 관직에 진출했다. 공로를 세운 자는 많은데 관직은 한정되어 있고 재정은 바닥이 난 상태였다.  

신돈은 왕의 의중을 살폈다. 왕은 비록 심복이나 대신이라 할지라도 그 권력이 너무 커지면 꺼려했다. 태조 왕건도 궁예 휘하의 일개 장수였다가 군공을 많이 세워 궁예를 몰아내고 왕씨 왕조를 개창하지 않았던가. 지금 왕권을 위협할 가능성이 많은 대상은 무장 세력이었다. 신돈은 지금이야말로 무장 세력의 힘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왕이 눈을 반짝 빛냈다. 그리고 큰소리로 너털웃음을 웃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듣는 왕의 웃음소리였다.

이튿날, 왕은 교지를 내려 최고 권력자로 부상한 최영을 도지휘사에서 해임했다. 

-지금 경을 계림윤에 임명하노라. 속히 떠날지어다.

갑작스러운 교지에 놀란 신료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어명을 거두어달라며 읍소했다. 

-그대들은 지난 삼월 왜구가 교동도와 강화도를 침략했을 때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을 벌써 잊었는가?

왕이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어 물었다. 신료들은 그게 고함을 지르는 것보다 무섭다는 걸 알고 있었고 지나간 사건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없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일은 태조 왕건의 아버지 무덤인 창릉에서 왜구가 초상을 훔쳐 간 사건이었다. 

-당시 최고 지휘자가 누구였는가? 이 모두가 기강이 바로 서지 않은 탓이요. 그 책임을 묻는 것이니 더 이상 말을 마시오.

왕은 할 말만 하고 황금빛 용포를 펄럭이며 자리를 떴다. 쌩하고 찬 기운이 감돌았다.

드세기만 하던 무장 세력의 기운이 약화된 듯했다. 왕은 내심 기뻐하며 신돈에게 51개의 글자로 이루어진 긴 이름의 작위를 내려주었다.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 판중방감찰사사(判重房監察司事),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 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겸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이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고의 직책이었다. 신돈에게 왕을 대신하여 섭정할 수 있고 승려 세계와 속세의 모든 일을 두루 관장하는 막강한 권력을 쥐여준 것이다. 

-이제부터는 사부가 내 대신 맘껏 개혁 정책을 펼쳐보도록 하시오.

신돈을 쳐다보는 왕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대가 불법을 닦는 수행을 굽혀 세상을 구하는 것은 어떻겠소? 그렇게 질문을 하면서 상대의 의중을 떠보던 날의 눈빛과 똑같았다. 그때 절간에 앉아 목탁을 두드리는 것보다 이 한 몸을 세상을 구하는 일에 바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 꿈이 생각보다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전하…….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전권을 받은 신돈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편으로는 왕의 심중을 정확히 알 수 없어서 조심스러웠다. 왕은 무서운 사람이었다. 왕은 원나라에서부터 자신을 지극히 돌봐준 공신뿐 아니라 홍건족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삼 원수, 즉 안우, 이방실, 김득배마저 역적으로 몰아 단칼에 제거했다. ‘외적을 격파한 공은 일시에 있는 것이지만 임금을 무시한 죄는 만세에 용납되지 않는 것이라, 경중이 확연해서 서로 덮을 수 없도다.’ 이것이 삼 원수를 처벌한 직후 발표한 교서의 내용이었다. 

신돈은 자신이 꿈꾸는 평등한 세상의 실현을 위해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전하, 소인이 일찍이 듣자옵건대 전래의 대왕들께서 대신들의 참소와 이간을 많이 믿고 따랐다고 하옵니다. 바라옵건대 이같이 하지 않으셔야 세상을 복되고 이롭게 하실 것입니다.

신돈의 말에 정곡을 찔렸는지 왕은 아무 말 없이 잠시 뜸을 들였다. 

-사부가 무얼 걱정하는지 잘 알겠소. 앞으로 고려의 사직이 사부의 손에 달려 있으니……. 

처음에 신돈이 관직을 극구 사양하는 걸 어렵게 맡긴 일이 기억난 듯했다.

-좋소이다, 내 이렇게 맹세하리다. 스승께서 나를 구하고 나는 스승을 구하여 사생결단하여 다른 사람의 말에 미혹됨이 없을 것을 부처님과 하늘에 증명하겠노라!

선언을 한 왕은 지필묵을 가져오게 하더니 그 자리에서 맹세하는 글 서서(誓書)를 썼다. 그 글 아래 붉은빛 옥새를 찍었다. 마치 손가락을 베어 물어 지장을 찍은 것 같았다. 왕의 강한 의지와 진심이 느껴졌다. 

신돈은 임금이 써준 서서를 품에 안고서 방 안을 서성거렸다. 노비로 살면서 평생 일하고 매 맞고 굶주리다 죽은 어머니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따돌림을 받고 이 절 저 절 떠돌아다녀야 했던 어린 시절도 생각났다. 그때의 울분과 서러움은 그의 몸 구석구석에 지문처럼 남겨져 있었다. 신돈은 향초를 켜고 불경을 외며 부처님께 절을 올렸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것이 온전한 기쁨인지, 온전한 두려움인지 신돈 자신도 알 수 없었다. 

 

* * *

 

산이 바싹 말랐다. 석 달째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산이며 들이며 구릉으로 흙바람이 몰려다녔다. 개울도 바닥을 드러내고 그나마 뾰족이 얼굴을 내밀던 연둣빛 싹들도 누렇게 말라 죽었다. 도토리 줍고 도라지 캐면 가을에는 시난고난 견딜 수 있었지만 봄 가뭄은 속수무책이었다. 

개경 일대를 둘러본 신돈은 마음이 심란했다. 종묘와 학교, 창고, 사원뿐 아니라 농민의 토지를 권세 있는 가문에서 거의 점유하고 있었다. 토지개혁은 국가 차원에서 시행하지 않으면 안 될 정책이었다.

-전하, 몇몇 권문세가와 토호들이 공전(公田)을 사전화하여 국가의 재정을 흔들고 있사옵니다. 전제(田制)를 혁파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려주소서.

신돈이 왕께 나아가 청하였다. 왕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했지만 사실상 중요한 일은 왕의 결재를 받아야 했다. 

-과연! 사부의 생각이 나하고 다르지 않구려. 과인이 원년에 전제를 혁파하려고 하지 않았소? 그러나 간악한 무리들로 인해 흐지부지되고 말았잖소. 전제개혁은 작은 싹을 도려내는 것과는 다르오. 썩은 것을 뿌리째 뽑아내는 일이오. 사부는 이를 해낼 수 있겠소?

왕이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윗몸을 앞으로 내밀며 큰 눈을 껌벅였다. 줄기차게 시도했으나 칼끝이 목덜미를 스치는 순간을 경험하면서 개혁에 대한 의욕을 많이 빼앗긴 왕이었다. 

-민심이 천심이니 민심을 움직이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믿사옵니다.

-민심, 민심이라……

왕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왕의 재가를 받은 신돈은 현량들을 중심으로 해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도감의 판사가 되어 전국에 포고령을 내렸다.

 

요즈음 농지분배제도의 기강이 무너져서 수탈하는 부패가 생기게 되었다. 세도 있는 귀족들의 농지는 비대하여 농장을 이루고, 반면에 백성은 병들고 국가는 여윈다. 이에 도감을 두어 이 병폐를 시정하고자 한다. 

첫째, 불법으로 점유하고 있음을 뉘우치고 농지를 토지 주인에게 돌려준 자는 그 죄를 묻지 않겠다. 둘째, 서울과 그 주변은 15일, 지방은 4일의 여유를 준다. 셋째, 만일 기한이 지난 뒤에 불법으로 점유한 토지를 발견하는 날에는 법으로 엄중히 다스릴 것이다. 다섯째, 망령되이 호소하는 자는 반동으로 처벌할 것이다.

 

갓 벼린 도끼날처럼 서슬이 퍼런 포고령이었다. 영이 발표되자 나라 전체가 시끌시끌했다. 

-글쎄다, 발표하는 그대로만 된다면야……. 신돈이 제아무리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하지만…….

백성들은 기대감으로 들떠 있기는 했지만 글자 그대로 시행될지 알 수 없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원종과 충렬왕 때에도 잠깐씩 설치된 일이 있으나 번번이 실적을 올리지 못하고 슬그머니 사라진 제도였다. 또 왕이 최근까지 실현하려고 애썼지만 실패하고 만 것을 백성들은 기억했다. 

신돈은 이틀에 한 번씩 도감으로 나가 일을 처리했다. 도감은 주로 토지의 소유주를 밝히고 그동안 불법으로 빼앗은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일을 했다.

-본래 토지 소유주가 누구인가? 이게 땅을 빼앗은 게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공표한 대로 불법 점유물을 돌려받고 악질 관리들을 색출해냈다. 그들의 가산을 몰수하고 삭탈관직하기 시작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그 수가 도성 안에서만 일백여 명에 달했다. 

-에구머니나, 이번에는 다르네, 달라. 

-남의 눈치 볼 게 아니구먼. 우물거리다가 더 크게 다칠지 모르겠어.

도성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놀란 지방의 농장주들이 점유하였던 토지와 노비를 부랴부랴 원래의 임자에게 되돌려주었다. 

죄 없이 농노가 되었던 양인들이 본래의 신분을 되찾게 되었다. 비싼 이자를 견디지 못해 자진해서 노비로 전락했던 남편을 얼싸안고 애 업은 아낙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하루아침에 노비가 되어 설움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던 이들에게는 그저 꿈같은 이야기였다. 전민변정도감으로 노비 제도 자체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러나 원래 양인이었는데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풀어준다는 데 대해서는 벼슬아치들도 드러내놓고 반대하기가 어려웠다. 불평도 못 하고 끙끙 속앓이를 할 뿐이었다. 설마 하며 뒷짐을 지고 있던 토호들도 늦으면 된서리를 맞을까 두려워서 하나둘 도감으로 모여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기가 힘들어 농가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어 있다는 십실구공(十室九空)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런데 제집으로 돌아온 이들이 하나둘 늘어나 그 말이 무색하게 되었다. 어처구니가 제 구멍을 찾듯 토지가 제자리를 찾아가니 세금을 내고 군대에 지원할 백성들도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또 대궐 공사로 남자들이 차출되는 바람에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해 끼니 걱정을 해야 할 때였다. 신돈은 임시방책으로 조정 대신과 지방 고위관리들의 녹봉을 덜어 인근 백성에게 나눠주었다.

-성군이 나셨네! 성인이 나셨네!

큰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숨죽여 지내던 백성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만세, 만세, 만만세! 대보살님이 이 땅에 오셨네!  

노비 신분에서 해방된 자들이 노래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3. 

그새 날이 훤히 밝았다. 뒤돌아보니 지난 이 년여의 세월이 이십 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바람이 건듯 불자 마른 오동잎 하나가 신돈의 발치에 툭 떨어졌다. 주자가 오동잎 떨어지는 걸 보고 짧은 시간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고 했던 권학시(勸學詩) 내용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초심을 잃지 않은 채 민심을 믿고서 하던 일을 계속 밀고 나가자.’

신돈은 옷을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개혁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암초는 권문세족의 반발이 아니라 왕의 태도였다. 백성을 위해 개혁을 추진하겠다던 왕이 백성의 고충을 외면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왕은 일찍부터 노국대장공주의 영전 짓는 일에 매달렸다. 영정을 봉안하기 위한 영전 신축공사는 처음부터 대규모로 추진되었다. 지세에 맞게 방향과 크기, 구조 등이 정해진 채 공사가 꽤 많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왕은 영전과 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다시 짓기를 거듭했다. 심지어 왕륜사 영전이 협소하여 승려 3천 명을 수용할 수 없다며 장소를 옮겨 고쳐 짓도록 했다. 몇 차례 난으로 소실된 잿더미 대궐을 짓느라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인 것이 엊그제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백성들이 또다시 춥고 배고픈 겨울을 보내야 할 판이었다. 자칫하다간 민심이 흉흉해지고 종사마저 곤경에 처할 수도 있었다. 신돈은 어떻게 하든지 왕을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왕은 불쑥 왕과 왕비가 나란히 누워 있는 쌍릉으로 짓는 게 더 좋겠다고 말했다. 쌍릉으로 조성하려면 그동안 만든 것을 부수고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 하는 일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영전의 3층에 들보를 올려놓다가 스물여섯 명이 깔려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돈은 직접 나아가 이 사실을 왕에게 고했다. 

-전하, 이번 일뿐이 아니옵니다. 바닥을 드러낸 나라의 살림살이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헤아려주소서. 곳간은 진즉 비었고 당장 먹을 것이 부족하여……. 

왕은 몹시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노국대장공주 일에 관여하는 것은 역린을 건드리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던가. 신돈은 모른 척 말을 이어 나갔다.

-백성의 고충이 날로 심해지고 있사옵니다. 오래전에 시작한 공사가 거의 완공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하오니 전하, 새로 쌍릉 짓는 일을 재고해주옵소서.

신돈의 직언을 들은 왕은 화가 나서 얼굴이 푸릇푸릇했다. 

-사부가 앞서서 영전의 공역을 가로막으려는 것입니까? 

왕이 신돈을 노려보았다. 예전의 그 따뜻한 기운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떤 꿍꿍이가 있는지 찾아보려는 눈빛이 야생동물과 다름없었다. 신돈은 고개를 떨구고 내전을 나왔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 * *

 

신돈에 대한 왕의 전폭적인 지지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훈구세력들이 이때다 하고 왕과 신돈 사이를 휘저으며 칼날처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전하, 신돈이 전하의 총명을 흐리고 있습니다.

-일개 신하가 감히 영전 신축공사에 대해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는 것은 나라의 법도를 뒤흔드는 일이옵니다. 

신돈을 비방하는 상소가 한여름에 호박 달리듯 올라왔다. 모두 개경에 경제 기반을 둔 자들이었다. 

신돈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도 계속 이어졌다. 승려 출신 고인기가 역모 이야기를 흘리고 다녔다. 왕의 성품을 잘 아는 신돈이 왕에게 제거당하기 전에 먼저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칠월에는 유학자 이인이 익명서를 재상 김속명의 집에 던졌다. 김속명은 김원명과 형제였다. 그 내용은 매우 음험했다.

 

왕이 광종의 헌릉과 문종의 경릉에 참배하러 갈 때 신돈이 그 당파를 길에 매복시켜 왕을 해치려다가 경비가 삼엄해서 미수에 그쳤다. 신돈이 다시 새로운 거사를 준비하고 있다.

 

왕은 환관 최만생에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문득 며칠 전 명나라에서 자신을 고려의 국왕으로 책봉하겠다고 전언을 보내왔을 때 일이 생각났다.

‘주원장이 보낸 친서에서 신돈을 상국(相國)이라 부르고, 신돈 앞으로는 채색 비단과 황제 인장이 찍힌 조서를 보내오지 않았던가.’

불안한 생각에 사로잡힌 왕은 쉬이 잠들지 못하고 우리 안에 갇힌 호랑이처럼 침전 안을 왔다 갔다 했다. 접부채를 칼처럼 허공에 휘두르는 모습은 마치 광인 같았다. 왕이 손짓만 다르게 해도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최만생은 곧 불어닥칠 피비린내를 예감하고 마음을 졸였다.

아침 일찍 왕이 시중 이춘부를 불러들였다.  

-겨울에 천둥 치고 나무에 얼음이 어니 천도가 순조롭지 못하다. 이는 감옥에 억울한 죄수가 많기 때문 아닌가. 전민도감 설치는 본래 여러 관청을 규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니 치도(治道)에 어찌 합당하겠는가. 

이춘부를 질책하는 왕의 의도는 명백했다. 당연한 자연현상을 가지고 신돈이 위임받은 정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한 것이다. 

-대간과 육부는 날마다 출근해서 각기 과인에게 정사를 보고하도록 하라. 이제부터 내가 친정(親政)을 하겠노라!

1371년 공민왕 20년, 왕은 친정을 선포했다. 

신돈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잘 여문 열매를 따기 직전인데 유일하게 몸을 기대고 있던 지주대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신돈은 마음 또한 기댈 곳이 없어 비틀거렸다. 신돈의 눈앞에 평생 혼과 열을 바쳤으나 끝내 비명에 사라져간 충신들 모습이 어른거렸다. 왕은 신하들이 권세가 높아지거나 대중의 지지를 받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원나라에서의 인질 생활, 조카들과 왕권 경쟁에서 연이은 패배, 즉위 후 잦은 위기 등이 왕의 불안과 의심을 키워 왔던 것이다. 

대신들의 음모는 날이 갈수록 극성을 부렸다. 신돈을 풍자한 온갖 유언비어들이 떠돌았다. 신돈을 성인이라 부르며 우러러보던 세상인심도 손바닥 뒤집듯 날마다 변덕을 부리며 흉흉해지고 있었다.

 

* * *

 

새벽 햇살이 마당 가에 얼비치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담장 곁 가녀린 배롱나무 가지가 부러질 듯 능청거렸다. 비는 내리지 않고 멀리서부터 마른 천둥소리만 요란했다. 신돈을 따랐던 김란의 아우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서둘러 자리를 피하셔야겠습니다. 간밤에 기현과 그의 아들 기중수 등 몇몇이 체포되어 국문을 당했다 합니다. 

대질도 해명할 기회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죄명이 뭐라더냐?

신돈이 덤덤하게 물었다.

-역모라 하옵니다. 

‘역모라…….’

헛웃음이 나왔다. 권신을 죽여도 다른 권신이 성장했다. 왕이 신하를 믿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악순환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 업보인 것을 누구를 원망하리. 그동안 대중을 많이 구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아무려면 어떤가. 모두가 공(空)인 것을…….’

신돈은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고 그동안 해온 일을 하나씩 쓰기 시작했다. 다 쓴 글 위에 옥새가 찍힌 서서를 올려놓았다. 지난 일들이 모두 꿈속의 꿈만 같았다. 

그때였다. 밖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더니 방문 앞에서 큰 소리가 났다. 

-역적 신돈은 어서 나와서 어명을 받으라!

신돈은 몸을 꼿꼿이 세운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모든 것이 제행무상이로다. 이 세상에 나와 한바탕 춤을 추었으니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 색즉시공 공즉시색!’

신돈의 감은 눈앞에 누더기를 입고 바리때를 두드리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승려의 뒷모습이 아스라이 보였다. ■

 

김우남
이화여자대학교, 동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졸업. 2001년 《실천문학》 소설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뻐꾸기날리다》 《굿바이굿바이》 《엘리베이터 타는 여자》 장편소설 《릴리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 출간. 직지소설문학상, 노아중편문학상, 이화문학푸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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