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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 스무엿샛날 밤. 시동이 걸린 차가 움직인 시간은 정확하게 아홉 시였다. 강변북로의 정체가 풀릴 즈음인 여덟 시 반쯤 떠날 예정이었지만 고양이 세 마리를 이동 상자에 넣고 차의 뒷자리에 태워 안전벨트를 묶는 일에 시간이 걸렸다. 정작 우리의 짐은 벌써 낮에 실어뒀었다. 고향 간다고 기쁨에 들뜬 내가 서너 번이나 주차장에 다녀와 우리는 몸만 나가면 됐다. 

설 명절을 고향인 양양에서 쇤다는 결정에 일흔다섯 살의 늙은 몸과 맘은 고단해도 피로를 못 느꼈다. 열여덟 살 10월에 양양을 떠나 서울로 온 뒤, 여태 서울을 떠나지 못했으니 도대체 얼마 만인가! 

“중간에 서지 않으니까 다들 오줌 누고 갑시다!”

운전을 하는 둘째가 다그쳐서 우린 모두 소변을 보고 나왔으니 이제 두 시간 십오 분만 차에서 견디면 됐다. 둘째는 이 시간을 위해 버스로 출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 간단한 저녁을 먹었다. 한밤중의 운전이 은근히 걱정은 됐다. 특히 밤 운전을 싫어하는 둘째라 더욱 그랬다. 

내비게이션의 도로 통행량 표시엔 한동안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길음사거리부터 소통이 수월하지 않았다. 종암사거리, 월곡역, 북부간선도로 진입은 더디고 더뎠다. 뒷자리에서 고양이들은 저마다의 목소리로 울어댔다. 울음으로 의견을 주고받는 것 같았다. 어제 제주도에서 온 큰애는 뒷자리에 앉아 고양이들의 기분을 안정시키려고 사람 마음으로 애를 썼고 운전대를 잡은 작은애도 가끔 보탰다. 나만 가만히 있었다. 마치 무심한 것처럼. 

결코 무심해서는 아니었다. 나는 사람 집사. 고양이의 마음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참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첫째 고양이의 울음소리에는 분노와 울화가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분하다는 듯 악을 썼다. 그 애가 차로 이동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여름 휴가에도 양양에 갔었고 칠팔 년 전에도 하조대의 아파트에 사는 여동생한테 간 적이 있었다. 그래도 고양이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거나 익숙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차는 고속도로에 들어섰고 이제 정상적인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엄마는 고향 간다구 좋구나!”

단 한 번도 언짢은 기색을 내지 않는 내게 둘째가 말했다. 

“물론이지!”

내 귀에도 목소리에 가득 찬 감격이 느껴졌다. 정말 지난해만 해도 이런 일은 꿈도 꾸지 못했다. 

어머니의 고향인 강현면 물갑리의 집이 2005년 4월 낙산사와 함께 잿더미가 된 이후 양양에 잘 가지 못했다. 불탄 자리엔 복이 깃든다는 말이 있었지만, 그래서 값이 싼 조립식 주택을 들여놓아도 됐지만, 그땐 그만한 돈이 없었다. 한 해 한 해 세월이 가는 동안 늙었고 농촌 생활이 어렵다는 걸 알았다. 정겨운 뒷동산을 거느린 집터는 더할 수 없이 좋았지만 여기저기 드문드문 지어진 집들과 가로등 없이 어두운 길이며 승용차 없이는 길을 나서기 어려웠다. 나는 운전도 못 했고 소설 쓰는 일 이외에 능숙히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단순 소박한 살림살이 정도였다. 

화재 이후 오래도록 물갑리에 가지 못했다. 황폐한 터를 보고 싶지 않았다. 낙산사에 가지 않는 것도 그래서였다. 시커멓게 불탄 낙산사, 그리고 시커먼 민둥산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낙산사는 문화재나 관광지가 아니어서, 처참한 형상을 눈으로 확인하는 게 두렵고 두려웠다.

양양고속도로로 들어선 뒤로는 앞뒤에 차가 없어서 되레 한적함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어쩌다 속도를 내고 우리 차를 앞지르는 차를 보면 반가웠다. 

두 시간 이십 분쯤 걸려서 양양읍 구교리 성당 앞길, 나의 모교인 양양초등학교 골목에 닿았다. 집 앞 골목엔 차를 댈 수 없지만 밤중이라 차를 세우고 고양이부터 내릴 때, 나는 대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 보일러 온도를 높였다. 이동식 온풍기도 켰다. 방에 들여놓은 이동 상자의 문을 열자 고양이들은 언제 울었냐는 듯이 활기차게 나와서 집안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지난여름에 와서 일주일쯤 지내다 간 곳. 그 애들이 쓰던 두부모래며 스크래쳐 밥그릇 등이 그대로 있었다. 여름에 왔을 때 불안해서 책상 뒤에 숨던 둘째도 이번엔 멀쩡했다. 

행복감 때문에 나는 고단한 걸 몰랐다. 양양의 맑은 물을 주전자에 받아 가스 불을 켜고 물을 끓이고 공연히 텔레비전도 켜봤다. 딸들은 양양에서 먹고 싶은 음식들, 꼭 가고 싶은 곳을 검색하고 의견을 맞추느라 바빠 보였다.  

자정을 훌쩍 넘긴 뒤,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나 잤는지도 모르게 눈이 떠졌다. 동편 창으로 해맑은 햇살이 물결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정결하기 그지없는 햇살이었다. 아무렴! 이곳은 양양(襄陽)이었다. 고양이들은 우리보다 더 먼저 일어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내 발목에 감기고 머리를 비벼댔다. 똥을 누고 모래로 묻느라 분주한 둘째, 사료를 먹는 큰애. 방에서 게으르고 평화로운 하품과 기지개 켜는 사람 소리는 얼핏 손님 같았다. 

잠들기 전 우리 계획은 아침 식사로 섭국이었다. 여름이 되면 작은집 식구들, 삼촌까지 모두 바다로 가서 큰 솥을 걸고 섭(홍합)국 천렵을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양양에서 살던 시절의 기억들은 어제 일보다 더 영상이 또렷하고 색채는 선명하다. 혹시 치매가 오는 중인지 몰랐다. 먼 일이 더 선명해지는 기억의 반란.  

우리 세 식구의 약속 중엔 일정을 각기 또 함께하는 것이었다. 함께하는 것 중의 하나가 낙산사로 가는 것. 승용차와 도보와 시내버스. 낙산사로 가는 방법은 세 가지였다. 늙어서 무릎도 신통찮은 내가 원하는 건 걷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반대. 차로 가면 금방인데 왜 다리 아프게 걷느냐! 

“엄마는 소풍을 늘 걸어서 다녔으니까…….”

나는 침통하게 말했다. 아이들은 거침없이 소리 높여 웃었다. 

“엄마! 그건 다 옛날이야!”

그래, 맞다. 그건 옛날이었다. 양양 읍내에서 자동차를 가진 사람은 한 명도 없었을 것이고 버스 안내양을 하는 게 장래 희망이었던 여자아이들이 꽤 되던 때였다.

어쨌든 낙산사는 그믐날 가기로 결정했다.

 

추억, 하나

비가 많이 내리지 않으면 이번엔 꼭 간다고 했다. 지난주 금요일은 잔뜩 흐렸어도 비가 내리지 않아 모두 도시락을 들고 운동장에 모였는데 갑자기 굵은 비가 퍼부어서 소풍이 취소됐다. 우리는 이런 난데없는 비가 모두 구렁이의 울음이라고 믿었다. 

육이오 전쟁 때 미군의 함포사격으로 동편 교실들이 허물어졌고 그때 구렁이가 죽었다는 것. 다른 이야기도 있었다. 지붕을 고치러 올라간 인부가 망치인가 톱을 쓰다가 어미 구렁이와 함께 있던 새끼 구렁이를 죽였다. 슬픔과 고통 때문에 구렁이는 봄가을 소풍날과 운동회 날마다 운다고, 그게 비라고.

어쨌든 소풍만 가면 됐다. 집에서 닭을 길러도 이런 날만 먹어 볼 수 있는 달걀. 엄마는 알을 삶아서 두 개를 도시락 보자기에 싸줬다. 운동장에 모여 출석을 부른 뒤 아이들은 두 줄로 서서 교문을 나섰다. 선생님은 심심풀이처럼 ‘질서!’라고 소리쳤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그래서 찻길로 나서면 이내 줄이 없어졌다가 선생님이 소리치면 다시 아주 잠깐 질서라는 게 생겼다. 

“조용히 해!”

“줄 똑바로 맞춰서 걸어!”

가끔 잊고 있다가 생각난 것처럼 선생님이 소리치곤 했다. 선생님들도 자기들끼리 둘씩, 셋씩 모여서 걸으며 이야기하긴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의 호통은 곧장 효력이 나타났다가 사라져서 이내 아이들은 엉키며 떠들고 웃고 지렁이처럼 걸었다. 아이들은 해방이 된 1945년 8월에 기차를 타고 연창역에서 꾸역꾸역 내렸던 ‘로스케’들을 기억했다. 쫓겨나는 일본인들에게서 빼앗은 손목시계를 팔목에 몇 개씩이나 찼다고 했다. 로스케들이 흘레라고 부르던 시커먼 빵은 목침같이 생겼는데, 그걸 행군하는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뜯어먹고 잠을 잘 땐 베개처럼 베고 잔다고 깔봤다. 가까이 오면 몸에서 노린내가 나는데 새파랗거나 노란 눈알이 무섭다고 했다. 로스케들은 그해가 가기 전에 모두 기차를 타고 돌아갔고 5년이 지나 전쟁이 터졌을 때 비행기가 잠자리처럼 휘휘 돌고 가면 곧 바다에서 함포가 날아와 역의 건물에 떨어졌다고. 땅이 꺼지는 소리가 나고 먼지가 산더미처럼 피어오르고 불길이 솟아올라 사람이 죽고…… 사실 이런 이야기는 아이들이 모르는 것. 어른들의 이야기를 귀동냥한 것. 

우리는 여전히 떠들고 떠들며 구부러진 메마른 자갈길을 지렁이 모양으로 걸었다. 우리의 기쁨은 점심을 먹는 것, 보물찾기를 해서 공책이나 연필, 지우개 같은 것을 타는 것이었다. 

낙산사로 가는 길은 멀었다. 십 리가 조금 안 되는 거리였지만 걸어가는 데 오래오래 걸렸다. 아무도 부지런히 걷지 않았다.  

포월리를 지나면 벌써 바다 냄새가 맡아졌다. 저 남쪽, 둔덕 너머엔 남대천이 흐르고 이맘땐 바다에서 황어들이 배에 가득 밴 알을 낳으러 남대천으로 무리 지어 올라왔다. 황어가 올라오는 곳, 남대천과 바다가 만나는 곳을 굽이돌아 지나치면 조산. 어른들은 조산을 말할 때,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그곳은 ‘빨갱이’들이 많이 산다고. 빨갱이를 미워하면 좋은 일이 있을까? 학교에서도 미술 시간이나 국어 시간에 무찌르자 공산당, 때려잡자 빨갱이! 대한민국의 원수 김일성 괴뢰! 이런 글자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작문을 지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몰랐지만 열심히 미워해야 우리가 살 수 있다는 것만은 어렴풋이 느꼈다. 

길가에 솔밭이 이어졌다. 전쟁 전에는 백 년 된 소나무, 잘생긴 소나무가 빽빽했는데 폭격에 불타거나 베어져서 어딘가로 실려 갔다고 했다. 아이들은 소나무 사이로 걸어서 낙산사로 가까워졌다. 

“야, 니 저 간나가 낙산사 고아원에서 왔단 거 아너?”

“증말루?”

“닌 몰런?”

아이들이 이런 말을 했다. 그런 소문이 있었다. 낙산사 고아원에서 온 아이들 중엔 머리카락 색깔이 노랗거나 눈이 파란 아이도 있었다. 

봄날은 날이 흐리거나 비가 내리지 않으면 볕이 따가웠다. 아이들은 저절로 그늘 속으로 들어가 걸으려 했고 선생님은 손차양을 하고 줄을 맞춰 걸으라고 여전히 소리 질렀다. 어쩌다 생각났다는 듯이. 아이들은 선생님 말을 듣지 않았다. 뒤에 있던 춘희가 앞으로 와서 내 팔을 잡았다. 

“간나야, 니 생각 안 나너? 우리가 여기 왔었던 거. 미군부대! 없어졌다!”

미군부대! 춘희와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부둥켜안고 깡충깡충 뛰었다. 유치원에 다닐 때, 선생님과 함께 솔밭에 있던 미군 천막 막사로 왔었다.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던 위문공연이었다. 그런데 그런 것은 기억에 없고 부대에서 받아온 구호물자만 떠올랐다. 생전 처음 타본 국방색 스리쿼터라던 자동차로 어두워서야 돌아왔다. 성당 앞에 내렸는데 어찌 알았는지 할머니가 길가에 나와 기다리고 계셨다. 어둠 속에서도 다른 아이를 데려다주려고 가는 스리쿼터의 바퀴에서 피어오르는 흙먼지와 휘발유 냄새가 좋았다.  

“어이구우 이기 다 뭐너?”

할머니는 나보다 아름으로 안고 온 상자에 더 관심이 갔을까? 먹을 것이 없던 시절.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가 떠오른다. 종이 상자를 가운데 놓고 조심스럽게, 아주 소중하게 뜯던 할머니. 나는 미군부대에서 엄청 긴장했었는지 자꾸 어지럽고 졸렸다. 할아버지는 미군들이 어떻더냐고 물었고 고모는 깡통과 알록달록한 포장지와 기름종이에 쌓인 여러 가지 과자와 햄과 소시지 잼 초콜릿 따위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색연필과 서양 여자아이가 선으로만 그려진 종이도 들어 있었던 것 같다. 한동안 그 그림에 색칠을 하면서 나도 이렇게 눈이 크고 머리가 구불거리는 여자가 되고 싶다는 간절함을 키웠으니까.  

어쨌든 나는 미군부대에 다녀온 이후 집안에서 더 우쭐해졌다. 나를 그렇게 바라보고 그렇게 대우해준다고 생각했다. 미군을 만났다는 것, 미군이 주는 선물을 받아왔다는 것 때문에. 그 후 미군부대를 본 적이 없었다. 미군과 미국인 신부님이 같은 종족의 사람이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조약돌로 집을 짓고 

모래알로 떡 해 놓고 

엄마아빠 모셔다가 

맛있게도 냠냠! 

 

그날 불렀던 이 노래, 잊히지 않는다. 

 

낙산사도 학교처럼 허물어져 있었다. 우리는 그늘진 땡볕을 지나 갑자기 그늘이 지고 눅눅한 습기가 스민 진흙 길로 들어섰다. 큰길에서 바로 오른편으로 꺾인 야트막한 언덕인데 다른 세상 같았다. 그래서 마음도 달라져야 하고 태도도 달라져야 할 것 같은 옥죄임을 느꼈다. 홍예문으로 들어서면 또 한 번 세상이 달라졌다. 선생님은 더 또렷하고 엄숙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조용, 조용!”을 외쳤지만, 아이들에겐 그것이 외래어로 들렸을 것이다. 문화재로서, 예술성으로 홍예문이 어떤 가치를 가졌는지 아무리 말해도 우리는 알아듣지 못했다. 전쟁으로 망가진 것, 전쟁의 공포와 포악성에 대해서도 느낄 수 없었다. 우리의 생활 속에 그런 감정은 없었다.  

정작 우리를 얼음처럼 굳게 만든 건 사천왕들이었다. 어떤 여자아이는 사천왕의 부릅뜨고 튀어나온 눈망울과 추켜든 칼 때문에 무심결에 들여놓았던 걸음을 화들짝 빼기도 했다. 물론 나도 그랬다. 하지만 어떤 아이들처럼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남자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사천왕들의 전각을 지나고 소리 지르는 여자아이들을 흘깃거리고 심지어 비웃는 말까지 했다. 

이즈음, 그러니까 꽤 늙은 나이가 된 뒤에 나의 삶에도 ‘사천왕’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사천왕들은 부처님이 계신 곳에 나쁜 것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지켜줄 테니, 내 인생에도 사천왕이 있으면, 하고 바랐다. 

내 인생의 사천왕은 무엇일까……. 무엇이었을까. 

나를 부끄럽게 만든 불행들이나 타인과 사회로부터 주어진 다양한 모욕과 폄훼들. 그런 사천왕들 때문에 더 불행하지 않고 더 모욕받지 않고 더 폄훼되지 않았을 테니 이제 불행과 모욕과 폄훼를 밀어내지 않고 숨기지 않을 것!  

 

아마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언제 누가 낙산사를 만들었는지 설명하고, 불교와 관련한 지식들을 알려주려 애썼을 것이다. 신라시대, 의상대사 등등. 여러 차례 불타고 중건하고.

더러 선생님의 설명을 열심히 들으려는 아이도 있었고 자신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런 미신은 가까이하면 벌을 받는다고 멀찍이 떨어지거나 외면하는 아이도 있었다. 나는 외면하지 않았고 미신이라고 두려워하지도 않았지만 설명을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했다. 우리에겐 실감 나게 기다려지는 것이 있었다. 원통보전의 돌담과 탑을 나와서 언덕 아래로 내려가 점심을 먹어야 했다. 점심을 먹는 동안 선생님들이 언덕의 풀숲이나 돌 틈바구니, 나무 아래에 보물쪽지를 숨겨놓았다. 대부분 빈 종이를 찾기 쉬웠지만 그래도 선생님의 자취를 샅샅이 눈에 담아뒀다.

나는 일곱 살에서 열두 살까지 그리고 중고등학교에서도 봄가을 소풍으로 대개 낙산사에 갔었지만 보물을 단 한 장도 찾지 못했다. 보물을 잘 찾는 아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세 장까지도. 공책과 연필과 색종이 같은 것을 받아 흐뭇해하고 우쭐대던 아이들. 나는 주눅이 들었다. 행운은 나의 것이 아니라거나 심지어 불행한 아이라는 생각이 해를 거듭할수록 내 마음에 켜를 얹었다. 우리가 운명이라고 말하는 게, 혹시 이런 것일까?  

점심을 먹고 보물찾기를 하고 약간의 장기자랑 같은 것을 한 뒤에 바다 절벽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걸으면 홍련암. 바위 위에 지어진 암자. 그 안에 들어가면 마룻바닥에 손바닥 크기만큼 뚫린 구멍이 있다. 몸을 굽히고 관음굴로 불리는 구멍에 얼굴을 대고 한쪽 눈으로 내려다보면, 순식간에 소스라치게 됐다. 수억만 년 되었을 바위 사이의 좁은 골짜기로 파도가 밀려와 바위에 부딪힐 때의 굉음! 파도 거품 속에서 천 년 묵었다는 문어가 다리 하나를 추켜들어 내 몸을 휘감아 내릴 것 같은 오싹함이라니! 

 

열다섯 살이 됐다. 중학교 3학년이었다. 이맘때 나는 무턱대고 ‘시라는 것’을 썼다.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도 못 해 봤는데 자꾸 시가 써졌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 그중에서 사람이 아닌 것들은 모두 내 마음에 들어와 시라는 글자로 변해버렸다. 마치 형체를 가진 무엇처럼 어떤 것이 되었다. 나는 시라고 믿었다. 그런데 시를 쓰려면 혼자여야 했다. 고등학교와 같은 건물을 쓰는 학교 운동장은 넓고 운동장 가로는 커다란 소나무가 많았다. 나는 소나무 둥지에 기대앉기를 좋아했고 혼자서 책을 읽거나 생각에 잠기거나 연필로 공책에 쓰거나 그랬다. 아이들은 ‘혼자서 심각한’ 나를 몹시 야유하고 비웃었다. 심지어 좀 미쳤다고 따돌리기도 했다. 

도대체 시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하여간 마음이 현실로부터 스르르 달아나서 ‘낱말’들을 떠올렸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그랬다. 대개는 ‘슬픔, 고독, 허무, 죽음, 소녀……’ 같은 낱말들이었다. 가끔은 뜻도 모르면서 ‘사상, 혁명’ 같은 글자도 공책에 끄적거렸다. 

하여튼 이런 외톨이가 시를 써서 선생님한테 내면 ‘잘 썼다’고 말해줬다. 칭찬이었다. 칭찬은 정말 부끄러웠다. 칭찬 뒤에는 도망갈 곳이 없는 것 같았다. 

칭찬이 쑥스럽고 버겁고 거북하게 된 게 이런 탓이 아닐까? 남동생 탓! 

공부 잘하는 남동생. 어머니 곁에서 맴도는 남동생. 다 커서도 남의 집에 가지 않고 부모님과 함께 살 수 있는 남동생. 어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칭찬은 모두 남동생에 대해서였고 그 애가 듣는 칭찬의 그늘 속에도 낄 수 없었다. 

그래서 내겐 칭찬이 익숙하지 않고 미움받는 것에 익숙하도록 길러졌던 자식.

아직 초등학생이었다. 방학을 하고 통지표를 받았는데 거의 모든 과목에 ‘미’뿐이었다. 아버지는 화를 냈고 실망했고 어린 자식에게 화를 내는 스스로가 더 싫어 화가 돋워졌을지 모른다. 아버지는 사람은 모름지기 ‘펜대를 굴리며’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려면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아버지는 전공(電工), 노동자였다. 

그날 아버지가 내쫓았다. 처음에 몇 대 맞았는데 아버지는 때리던 팔을 툭 떨어뜨리더니 ‘너 같은 거 필요 없으니 아주 나가라’고 소리 질렀다. 아버지가 나가라고 했으니 나가야 했다. 집을 나와 무작정 걸었다. 익숙한 남대천 다리. 한여름인데 두려움과 슬픔이 마음에서 버석버석 얼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해가 지려는 것 같았다. 

다리의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였다. 등 뒤로부터 팔이 와락 잡아당겨졌다.

“야! 니가 정신이 나갔구나!”

어머니였다. 아직 나는 등을 돌리지 않았지만 순식간에 얼었던 슬픔과 두려움이 녹기 시작했다.

“이누무 지즈바야! 대관절 어딜 간다구! 니가 시방 제정신이너?”

따뜻해지기 시작한 내 기분과는 달리 어머니의 목소리는 분노에 찬 것 같았다. 어머니는 내 등짝을 한두 번 더 때렸다. 그리고 나를 돌려세웠다. 아직 뻣뻣한 나, 엄마의 분한 힘이 솟아 억세어진 팔에 질질 끌려 집으로 갔다.  

이날 어머니가 내게 한 말. 내가 이해하기엔 어려웠을지 모른다. 

여자는 기가 세면 팔자가 사납다. 기가 세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여자는 그저 숙이고, 또 숙이고 살아야 한다…….

이때 ‘여자의 기’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아듣지 못했고, 숙이고 살아야 한다는 것도 무턱대고 받아들이기 싫었다.

 

다시 열다섯 살 그날로 돌아가 본다. 

 

그날, 학교에 가지 못했다. 집에서 근신(謹愼)을 하라는 벌을 받았다. 왜 근신을 받아야 하는지, 선생님은 알겠지만 정작 나는 몰랐다. 선생님 말에 반항하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근신이라는 말의 의미도 이해하지 못한 나는 학교 가는 시간에 집을 나왔다. 교복을 입고 책가방은 정류장 근처의 동무네 집에 맡겼다. 학교 가는 시간에 학교와 반대로 가는 것이 창피하긴 했다. 그래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제방 길로 걸어서 남대천이 흐르는 방향으로 걸었다. 제방 길이 끝나는 즈음엔 남대천이 동쪽을 가로막고 하염없이 길게 누운 동해로 들어가는 곳이었다. 하얀 모래톱, 갈매기, 흰 파도, 파란 하늘, 목화송이 뭉게구름들.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보면 대청봉, 중청봉, 소청봉과 설악산 울산바위의 옆모습까지 보였을 것이다. 바다를 오른편에 두고 왼편의 소나무 숲을 따라 걸었다. 새소리, 날아다니는 벌레들, 길가의 수많은 풀들, 꽃들, 흘깃거리듯 콧속으로 스며드는 바다 냄새와 소 울음소리, 드물게 들리는 사람 목소리. 조산초등학교 가까이에선 선생님의 목소리와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낙산사로 접어드는 진흙 길은 한여름에도 시원했다.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홍예문 안으로 들어설 때, 아마 즐거웠을지 모른다. 그랬으니 나비처럼 사천왕문을 사천왕이 있는지도 모르게 지났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무언가 신비한 세상, 사람들이 사는 마을과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지는 깨끗한 흙 마당을 가운데 두고 양편으로 낮은 기와집인 요사채가 나왔다. 고요하고 고요해서 아마 나는 숨도 크게 쉬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면 학교와 집으로부터 숨 쉬게 되던 압박감이 사라져서 나비처럼 가볍게 거닐었을지 모른다. 

원통보전의 화강암 층계를 올라가 관음보살상을 바라보다가 다시 내려와 석탑을 손으로 만져보고 요사채로 나갔을 때 나는 황갈색 가사를 걸친 스님과 마주쳤다. 스님의 눈길에 끌려 돌아보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두려워서 웃었을 것이다. 스님이 내게 무슨 말을 물으셨다. 어디서 왔느냐고 했을지 모른다. 스님은 그윽한 미소를 머금고 사천왕 전각 오른편에 있는 요사채로 나를 안내했다. 

방은 작았다. 하지만 방바닥은 따뜻했다. 노랗게 콩기름을 먹인 장판은 정갈해 보였다. 스님은 쇠고리가 달린 두 짝의 벽장문 하나를 열고 무엇을 꺼내 방바닥에 놓았다. 혹시 작은 차탁 같은 것이 있었을까? 그런 건 없었다. 스님이 내 앞에 놓은 건 호두와 잣이 담긴 푸른 기가 도는 사기그릇이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했을까. 이젠 상상도 안 된다. 혹시 죽고 싶다고 하지 않았을까? 문학가가 되고 싶다고 그랬을지도 모른다.  

스님은 나를 오래 앉혀놓지 않고 내보내줬다. 순간 부끄러움 같은 것이 끼쳤다. 스님과 같은 층계에 있다가 갑자기 아래로 떨어져버린,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요사채를 나와서 하염없이 홍련암으로 걸어갔다. 사람이 없어 이내 관음굴에 눈을 댈 수 있었다. 예전처럼 두렵지는 않았다. 나는 한동안 얼굴을 떼지 않았다. 바위에 부딪는 파도 소리와 하얀 거품을 바라보며 불현듯 한 가지를 떠올렸고 이내 결심했다.  

이곳에서 자살하겠다……. 

죽겠다가 아니고 「자살」이었다.  

 

추억, 두 번째

자살할 일은 자주 생겼다. 그럴 때마다 한강 다리 위, 인천 앞바다를 떠올렸다. 이 세상과 인연을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은 분노와 복수심 뒤에 당연한 증상처럼 따라왔다. 서울 인구는 아직 5백만이 안 됐지만, 이호철 소설가는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소설을 썼고 나는 도로를 건널 때마다 달리는 자동차들이 많아서 불안했다. 문간방에 세 들어 살면서도 자주 쫓겨났다.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할 유일한 이유는 소설가가 되어보고 죽는 것. 그러나 소설가가 되는 관문은 딱 하나, 서울의 일간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신춘문예에 당선하는 길이었다. 서울에 처음 왔을 때, 당연히 대학 일학년, 열아홉의 나이에 아버지가 자부심을 가지고 구독하는 동아일보에 당선할 것으로 기대했다. 아니 굳게 믿었다. 그러나 열아홉은 고사하고 스물다섯이 되도록 꿈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서 하고 싶은 일은 단 하나, 소설을 쓰는 일. 할 줄 아는 것도 소설을 쓰는 일. 여태 누군가로부터 칭찬을 받았던 유일한 것도 소설을 쓴 것뿐이었다. 그러나 소설가가 되는 제도가 있었다. 제도(制度)라니! 

아주 먼 훗날, 명리학 선생님은 내 사주팔자엔 운명적으로 제도와 맞지 않는 글자가 있다고 했다. 그러니 제도라는 건 다 억압으로만 느껴졌을 것. 그래서 죽어야 했고 유일한 대안이었다. 죽으려면 홍련암으로 가야 했다. 그곳에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다시 제도의 문 앞에서 발을 굴러보기로 작정했다. 늦은 봄과 늦은 여름 사이에 다섯 편의 단편을 써서 다섯 개의 신문에 응모했다. 홀가분했다. 어쨌든 난 갈 곳이 있으니까. 홍련암으로.

홍련암에 가지 못했다. 갈 필요가 없어졌다. 다섯 개의 신문사 중에서 딱 한 군데, 서울신문에서 신춘문예에 당선했다며 편집국에 들러달라는 연락을 받은 것이었다. 그 순간 새처럼 몸이 가벼워졌다. 눈앞을 가로막았던 수많은 가지가지의 장애물들이 모두 사라지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포근하고 환한 길이 드넓게 펼쳐졌다. 그래서 홍련암을 잊었다. 

하지만 채 한두 달이 지나지 않아 꿈을 이룬다는 건 신기루일지 모른다는 걸 알아차렸다. 소설가 지망생일 때보다 내 앞날은 비좁고 캄캄하고 심지어 비굴해야 했다. 신춘문예에 당선했다고 갑자기 으리으리한 학벌이 생기고 부유한 혈연이 생기고 권력을 가진 지연이 생기지 않았다. 여전히 가난하고 앞날이 막막한 내 현실에 새로운 거품이 꼈다는 걸 이해한 뒤의 삶에 대한 공포감은 여태 경험한 두려움이 유치한 것이었음을 알게 해 줬다. 갓 태어난 영아(嬰兒) 같은 소설가. 내버려두면 금방 숨이 끓어질 소설가. 참혹한 기분으로 손을 뻗어 앞길을 더듬거렸지만 두려움과 비굴함만 짙어져 갔다. 그리고 운명인 듯 야금야금 홍련암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소설 한 편을 쓰고 어디에 발표하면 될지, 그 길을 아는 사람을 찾으러 나설 때 나의 내면은 저열하고 비굴하고 참혹해서 늘 눈을 감고 싶었다. 눈을 감으면 홍련암으로 가는 길이 훤히 보였다. 잘 아는 길, 익숙한 길, 거부감 없이 나를 받아줄 그곳.

그래서 한 남자를 붙잡았을까? 

 

섣달그믐 날, 딸 둘과 함께 낙산사로 갔다. 낙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새로 생긴 나무숲 길로 걸었다. 산불피해를 복구하며 새로 조성한 길이었다. 혹시 여기가 고아원 자리일까? 아이들은 상상도 못 하지만 나는 잊지 못하는 것 하나. 전쟁 뒤에 낙산사의 고아원에서 왔다는 아이들. 우리보다 몇 살이나 나이가 많았고 더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딘가로 가버린 아이들.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새로 생긴 길은 거의 지혜롭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난 정갈한 진흙 길로 느릿느릿 걷다 보면 홍예문이 나왔고 사천왕 전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사천왕 추억을 말했지만, 잘 듣지 않았다. 낮은 축대와 담장 사이로 난 문을 들어서서 요사채 앞에 이르렀을 때, 홀연히 사춘기 시절의 가사 입은 스님과 방이 떠올랐다. 원통보전에 들어가 관세음보살님께 절을 드리고 나와 해수관음상 쪽으로 갔다. 섣달그믐 날인데도 방문객들이 줄을 서서 걸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커다란 초를 사서 세 식구의 이름을 써 불을 붙여 촛불 방에 들여놓았다. 초를 팔던 보살님이 선물로 준 아주 작은 초롱에 달린 심장 모양의 연두색 종이에 우리의 이름과 소원도 앞뒤로 써서 소나무 가지에 매달았다. 멀리, 아니 조금 낮아진 대청봉으로부터 태초의 바람이 아무렇지 않게 불어와 소나무 가지에 매달린 수많은 초롱과 소원을 적은 이름표를 휘날려줬다. 행복감이나 평안은 무구(無垢)하고 즐거움은 청정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 하나로의 나는 가볍게 숲길을 걸어 새로 복원된 보타전으로 향했다.   

소풍을 다니던 시절엔 없던 전각, 보타전. 천수천안관세음보살님께 절을 했다. 저절로 우러러 몸을 접고 구부리고 순식간에 몰아(沒我). 왠지 모르지만 내겐 몰아의 순간이 눈물겨워지곤 했다. 자기연민이 아직도 군더더기처럼 남아서일까. 

해우소에 들러 근심을 버리고 팔짱을 낀 채 걸음이 느려진 나를 기다리던 아이들이 의상대로 가자는 시늉을 해 보였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상대와 소나무들 사이로 푸르디푸른 바다가 바라보였다. 

“엄마, 힘들지? 많이 걸어서!”

의상대를 돌아 나온 딸이 말했다. 

“엄만 저기 의자에서 쉬어도 돼!”

“옛날에 많이 가봤지?”

나는 의상대와 홍련암 사이에 서 있었다. 

“그래, 난 안 봐도 돼!”

내가 말했다. 홍련암 비탈길엔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로 빈틈이 없었다. 홍련암은 내 눈길의 끝에 아주 작은 모형처럼 서 있었다. 길이 달라져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다. 자연의 마음이 느껴지던 벼랑길은 사람들의 마음으로 바뀌어 ‘안전’하게 두꺼운 시멘트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다. 담장이 쳐져서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일은 없겠지만 자연과 추억을 도둑맞은 기분이긴 했다. 

그래도 멀리 모형처럼 보이는 홍련암을 두고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사람들의 마음이 미치지 못해, 자연의 마음이 고스란히 남은 곳도 있을 테니. 

 

기억과의 이별  

자연의 마음이 남아 있는 곳. 나는 흡사 자연과 이미 약속이라도 한 듯이 홍련암을 향해 걸었다. 안전을 위해 만든 난간에 의지하기도 했다. 난간에 기대 숨을 고르고 바다를 한참이나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떠올렸다.  

만약, 그것이 홍련암과의 약속이었다면 아주 오래된 일이었다. 그 오래된 일이 가슴에서 미세하게 움직이듯 하더니 이내 속살을 아리게 훑고 건드리며 자라나기 시작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홍련암에 왔던 건 스물일곱 살 봄날, 4월이었다. 죽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서 죽기로 했고 이미 오래전에 점찍어 둔 홍련암 깊은 곳으로 추락하기로 결심했다. 내 절망한 몸을 휘감을 문어의 다리도 괜찮았다. 되레 그것이 사는 일 같았다. 절망에도 힘이 있고 실패에도 힘이 있다는 건 늙은 후에 터득한 것. 

지금 생각하면 청춘에 만난 남자들은 연애가 아니라 내겐 일종의 공부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립거나 애틋함은 티끌만큼도 없다. 그런 공부 중에서 가혹하고 혹독한 것. 그런 감정으로 여태 남아 있는 것. 세월에도 삭지 않는 독한 것 하나. 

그를 어떻게 만났었는지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억나지 않는다. 서울신문에 발표된 내 소설을 읽었다, 잘 쓴다, 좋은 소설가가 될 것이다, 등등. 그의 접근은 이랬다. 하지만 나도 그에게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첫 번째. 반공법에 걸려 3년 형을 살고 나와 일본으로 밀항을 했고 1965년 교토대학에서 사르트르의 강연을 들었단다. 1967년, 반공법에 대해 말하는 남자. 밀항과 좌파 지식인 사르트르. 사상이나 철학이 아무리 훌륭해도 굶주리는 사람을 위한 쌀 한 톨 만들지 못한다……. 사르트르로부터 들었다는 말을 그가 한국말로 말했다. 

두 번째. 북한을 말하면 곧 죄가 되던 시절. 남북통일을 원하면 빨갱이와 이적행위가 되던 때, 그로부터 들은 이야기. 그는 북한에 갔었다고. 대동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먹었다고 말했다. 나는 두려움과 호기심과 무한 자유주의의 감성과 감상으로 그에게 사로잡혔다. 그를 피하면 뭔가 비겁한 것 같았다. 그는 감방에서 라틴어를 익혀 성경을 읽었다고 말했다. 나는 생계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를, 아니 그렇게 상상했던 나는, 그와 거의 다름없이 가난했지만 그래도 더 가진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나의 새로운 미래라고 믿었다. 

나는 걷잡을 수 없이, 그에게 빠져들었다. 그는 오로지 내게 말만 했다. 열세 살이나 나이가 많고 인생살이에서 많은 경험을 한 그는 나를 해부하듯 들여다보고 있지 않았을까. 그의 말에 따라 춤추는 나의 허영심과 열등감과 불안감들을 그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내 치졸한 반항심까지도.   

……어느 날 그가 사라졌다. 그의 사라짐을 이해했다. 마음으로 공범자가 됐다. 그는 한국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산속에 들어가 원시인처럼 살 수는 있다. 원시인처럼 사느냐, 쥐도 새도 모르게 일본으로 밀항을 하느냐, 단 두 가지의 선택만이 있다고 했으니까.  

그의 밀항은 내게 새로운 희망이었다. 왜냐면 그가 일본에서 자리를 잡은 뒤에 내게 사람을 보내 데려가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이별이라는 것. 실연이라는 것.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을 아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의 능력으론 그를 찾을 수 없다는 것, 그러므로 내 삶에서 그가 증발된 것이었다. 

현실로 돌아온 뒤의 나. 이미 내 존재가 한 남자에게 전부 쏟아 부어진 뒤라서 나는 껍질만 남았다. 껍질이어서 숨도 쉬기 어려웠다. 

죽기로 했다. 이 결심의 끝에 등대처럼 깜빡거리며 나타난 홍련암.  

스물일곱 살 되던 해 4월. 낙산사의 바람은 찼다. 눈을 들어 설악산을 바라보면 아직 허연 눈이 봉우리에 남아 있었다. 고향의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조산 앞바다까지 걸었던가? 인기척 없는 청정한 바닷가 모래밭에 앉아 오래도록 아득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모래알 하나보다 작은 내 존재가 사라지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소리 없이 울고 또 울면서 아무렇지 않게 느꼈다. 

홍련암으로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의상대를 지나 비탈길을 내려가 누른빛을 띠는 바위를 딛고 홍련암의 기둥이 버티고 있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다가가서 한 곳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소리도 없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아무 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도 않았다. 울다가, 울면서 그저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불현듯 누가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위를 쳐다보았다. 벼랑 위에서 누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잿빛 옷을 입은 스님. 따뜻한 방에서 내게 호두와 잣을 내주었던 스님 같았다. 

그러나 곧 스님의 형상은 사라졌다. 

어느 결엔가 울지 않고 나도 모르게 바위에서 일어나 벼랑 위로 올라갔다. 비탈길을 따라 의상대를 지나 걸었다.  

 

내 나머지 삶에, 가시밭과 늪과 사막 같은 것이 흡사 팥고물처럼 끼어들긴 했다. 어쩌면 ‘그일’은 생의 길잡이나 사천왕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시는 사무치는 마음으로 홍련암을 그리워하지 않게……. ■

 

 

이경자 someday48@hanmail.net 

1948년 강원 양양 출생.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7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역임. 소설집 《절반의 실패》 《사랑과 상처》 《혼자 눈뜨는 아침》 《천 개의 아침》 《오늘도 나는 이혼을 꿈꾼다》 《세번째 집》 등과 산문집 《이경자, 모계사회를 찾다》 등이 있다. 민중문학상, 한무숙문학상, 고정희상, 현대불교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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