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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소설] 부처님 한 분뿐이에요  / 김종광
[83호] 2020년 09월 01일 (화) 김종광 소설가

✽불교소설은 불교문학 진흥과 새로운 콘텐츠의 개발을 위해  ‘재단법인 보덕학회’의 후원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40년 전 얘기다. 

남편이 한 달째 말을 하지 않았다. 아내가 얼마나 미우면 저럴까.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정말이지 오늘은 가자. 어차피 죽을 목숨, 한 푼이라도 덜 낭비하자. 서울 대학병원에서도 모르겠다면 답이 없는 거다. 그냥 죽을병인 것이다. 지난 십 년 동안 없앤 병원비만 해도 논 두어 마지기값은 되겠지. ‘고약쟁이 짠돌이’ 남편, 내색하지 않지만 얼마나 아까울까. 

잠든 딸을 바라본다. 이제 겨우 세 살. 아픈 엄마는 없는 게 나아. 아빠가 건강한 새엄마를 들여올 거야. 시름시름 앓다가 갈 친엄마보다 씩씩한 의붓어미가 나을 거야. 

윗방으로 건너갔다. 큰애가 여덟 살, 작은애가 여섯 살. 애들아 미안하다. 너희가 싫고 미워서 가려는 게 아니야. 엄마가 많이 아파. 머릿속에 돌덩이가 들어 있어. 가슴속에는 시커먼 짐승이 똬리를 틀고 울어대. 엄마는 살아 있어도 죽어 있어. 그래서 가려고 해. 여동생 잘 챙겨야 한다. 

유서랄 것까지는 없지만 종이 한 장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을까. 다시 윗방으로 들어가 큰애 공책 한 장을 찢어갖고 나왔다. 

 

여보, 미안해요. 

우리 애들 잘들 부탁해요. 

좋은 새엄마 얻어서 잘 키워주세요.

 

농약을 마시기는 싫었다. 너무 아플 거다. 아픈 것까지는 참아도 까딱 잘못해서 죽지 못하다면, 병신이 될 거다. 마음병신에 몸병신까지 절대 안 돼. 

목을 매다는 것도 못하겠다. 생각만 해도 무섭고 끔찍해. 

낫으로 목을 그어버릴까. 부엌칼로 팔뚝을 잘라버릴까. 

신작로 풀숲에 숨어 있다가 차가 달려올 때 뛰어들까.

이 궁리 저 궁리 하면서 허위허위 걸었다. 어느새 저수지였다. 그래, 여기밖에 없어. 뛰어들기만 하면 돼. 뛰어들지 못하겠다면 걸어 들어가면 돼. 한순간일 거야. 수영도 못하니까 되살아날 방법은 없어. 들어가자, 들어가자. 수없이 다짐했지만 쉽사리 들어가지 못하고 우두망찰하는 사이에 별빛의 시간이 반짝반짝 흘렀다. 

 

저 빛 때문에 사는 거지. 남편은 집을 밝히는 한 점 빛에 환해졌다. 아내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까지는 마루의 백열전구를 끄지 않았다. 남편은 전기세, 전구값이 아까울 때도 있었지만 싫지 않았다. 오늘은 꼭 무슨 말을 해야지. 먼저 애교 부리면서 다가올 사람이 아니잖아. 10년을 겪고도 몰라. 내가 먼저 마음을 풀어야지.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마루에도 없고, 안방에도 없고 윗방에도 없다. 뒤꼍 장독대에도 바깥마당에도 텃밭에도 없다. 마루에 우두커니 앉았다. 4월 밤은 차갑고 차가웠다. 

벌떡 일어나 둘째 형님네로 달려갔다. 조카들 방에 불이 켜져 있다. 벌컥 열고 물었다. “작은엄니 안 왔냐?” “안 오셨는듀.” 셋째 형님네로 뛰었다. 형님 내외는 창고 방에서 가마니를 짜고 있었다. “형님 안녕하슈. 형수님, 우리 마누라 안 왔슈?” “안 왔는디요.” 바로 옆집 넷째 형님네로 뛰었다. 거기에도 없었다. 어디 갔다가 돌아왔겠지. 집으로 달렸다. 없었다. 대체 어딜 간 거야? 

이제 가볼 데는 원자울에 따로 사는 다섯째 형님네밖에 없었다. 달렸다. 원자울까지 뭐하러 간 거야? 형수가 또 집 나갔나? 애들 밥 먹여달라고 형님이 불렀나? 형님 내외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옳거니 싸움 말리러 갔구나. 그 양반들 당신 말을 잘도 듣겠다. 

“형님, 우리 마누라 어딨대유?” “정신없는 부모들을 대신해서 조카가 답했다. “안 오셨는듀.” 

그래, 이젠 집으로 돌아왔을 거야. 친정에라도 갔었나 보지. 이래서 친정이 멀어야 해. 친정이 가까워 놓으니 툭하면 가지. 아닌데, 아닌데, 잘 가지 않는데. 암튼 돌아왔을 거야. 집에는 아내 대신 조카들이 와 있었다. “작은엄니 왔냐?” “안 오셨슈. 근디 작은아버지 이거 보셨슈.” “뭘 봐, 뭘?” 박사조카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아내의 글씨였다. “이게 뭐여!” 남편은 털썩 주저앉았다. 

“작은아부지, 별일 없을뀨. 성황당 가보셨슈?” 남편은 서낭당으로 달려갔다. 나뭇가지에 목이라도 매단 섬뜩한 모습을 상상했다. 야, 개자식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다행히 없다. 남편은 주저앉아 소리 질렀다. “서낭당 똑똑히 들어유. 우리 마누라 잘못되면 불 싸질러버릴겨.” 박사조카가 다른 조카들에게 찾아볼 데를 나눠주고 말했다. “작은아부지, 지는 혹시 모르니께 저수지에 가볼께요. 작은아버지는 또 생각나는 데가 있으면……” 저수지, 그래 왜 저수지 생각을 못했을까. 남편은 달렸다. 거의 날았다. 저수지가 보이자 “기분아, 기분아!” 소리 질렀다. 박사조카도 따라오면서 “숙모, 숙모!” 불렀다. 

 

불빛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풍덩 뛰어들었다. 민물은 시렵고 시려웠다. 한 발 한 발 들어갔다. 그래, 죽는 거 별거 아니다. 물이 허벅다리를 넘어 허리를 넘어 가슴까지 올라왔다. 플래시 불이 물을 휘저었다. 

“저깄네유. ……작은엄니 뭐하시는규?” 

물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물이 목까지 올라왔다. 한순간 가라앉았다. 

아내를 끌고 나온 남편은 정신없이 인공호흡을 했다. 재건청년회교육 때 이런 걸 배워서 뭐하나 했는데 이렇게 써먹을 줄은 몰랐다.

“숨은 돌아오신 것 같유. 얼른 따뜻한 데 눕히고……”

아내를 둘러업고 남편은 또 정신없이 뛰었다. 방에 뛰어들어 젖은 옷을 좍좍 벗기고 퍽퍽 주물렀다. 아내는 눈을 꼭 감은 채 뇌었다.

“미안해유. 죽지 못해서……”

아이구, 이걸 그냥. 남편은 손바닥을 높이 들었다가 내리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나와 보니 조카들이 걱정스럽게들 서성거리고 있었다. “오늘 일은 없었던 거다. 이 일 입 밖에 내는 놈은 나한테 죽을 줄 알어. 얼른들 가.” “이미 동네 소문 다 났을뀨. 작은아버지가 얼마나 방정맞게 뛰어다니고 소리소리 질러댔게유.” “니들만 아무 말 안 하면 뎌. 남아일언중천금 알지? 이거 소문나면 쪽 팔려서 이 동네 못 산다.”

아내는 죽지 못한 것이 다행스러우면서도 한스러운 한편, 남편이 때리기라도 할까 봐, 하다못해 쌍스러운 욕지거리라도 퍼부을까 봐-죽고는 싶어도 얻어맞거나 욕먹기는 싫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남편은 하도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자식이 셋이나 있는 어미가 죽을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죽을 생각을 넘어 저수지에 뛰어든단 말인가. 내가 바람을 피웠나? 내가 패기를 했나? 문득 아내가 무서워졌다. 무서워서 전전반측했다. 

아침에 아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밥을 했고 상을 차렸다. 남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밥을 먹고 광산으로 출근했다.

남편은 사무실에 일하는 아내의 오빠를 찾아갔다. 

“야, 나 무서워서 못 살겄다. 네 동생 데려가.”

“왜 또 어디 많이 아퍼?”

“아픈 건 내가 고쳐주겠다고. 근데 한밤중에 죽겄다고 저수지 뛰어나는 여자랑 워찌 살아? 나랑 사는 게 죽기보다 싫다 이거잖아. 데려가. 나도 나랑 살다가 죽었단 얘기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데려가. 장인이 없으니께 네가 책임져. 가서 병을 고치든 새 시집을 보내든 알아서 해. 내 집에서 데려만 가.”

 

“오빠랑 어디 좀 가자.”

“어디 가는데?”

“부처님한테.”

“내가 절이라고 안 가봤겠어.”

“사람마다 맞는 절이 있대.”

“부처님이 다 똑같지 뭐.”

“아니래. 사람마다 자기에게 맞는 부처님이 계시대.”

아내가 그때까지 가본 절 중에 가장 작은 절이었다. 그 절의 주지는, 여승이 아니고 전냇마누라(신위를 모시고 길흉을 점치는 여자)였다. 아내는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호랑이를 본 적은 없지만 여인이 호랑이처럼 보였다. 여인이 호랑이처럼 무서운 안광으로 쏘아보았다. “왜 이제 왔어?”

아내는 그 여인이 모시는 부처님들께 비손하노라니 머릿속의 바윗덩이가 으깨졌다. 가슴속에 들어앉은 시커먼 짐승이 조그맣게 줄어들었다. 그 부처님을 뵌 후로도 시난고난했지만, 죽고 싶을 정도로 아프지는 않았다. 아프면 그 부처님께 달려갔다. 그 여인이 집으로 찾아와 부처님 말씀을 읊어주기도 했다. 정월 대보름에는 맡아놓고 왔다. 조상님밖에 모르던 남편도 부처님을 믿고 그 여인을 신뢰하게 되었다. 

 

*

 

큰애가 모처럼 집에 왔는데 글을 한 편 써야 한다면서 낑낑댑니다.

“뭘 써야 하는데 그리 어려워하냐?”

“불교 얘기를 써야 되거든요.” 

“부처님 얘기 쓰는 겨?”

“그래야겠죠?”

“니가 부처님을 알아?”

“잘 모르죠.”

“그런데 어찌 써?”

“그러게요. ……저어기 성주사지 아시죠?”

“성주사지? 성주면에 있는 절터? 알지.”

“그 성주사(聖住寺)가 낭혜(郎慧) 국사(國師) 무염(無染) 스님이 중창한 절이었잖아요. 지금은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만 남았지만…….”

“그래서?”

“그 무염대사님 얘기를 한번 써보려고요. 위인전처럼.”

“그래……”

“좀 들어보실래요. 시작 부분……”

“그래 한번 들어보자.”

“부처 혹은 석가모니는 원래 ‘깨달은 성자’라는 뜻. 아주 옛날, 북인도 어느 소왕국에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 그는 깨달았고 가르쳤다. 후학들이 그의 가르침을 전파한 것이 불교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깨닫기보다 깨달은 사람 부처를 믿기 비롯했다. 깨닫는 것보다 믿는 게 쉽기 때문일까? 원래 깨달은 사람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었으나, 사람들은 오로지 깨달은 사람은 부처밖에 없다고 여겼다. 하여 언제부턴가 부처를 절대자로 추앙하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신으로 믿듯이. 이슬람인들이 유일신 알라를 믿듯이. 심지어 사람들은 부처가 태어났다고 전승되어온 날까지 기념하게 되었다. 그것이 초파일이었다. 초파일, 성주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무염대사는……”

“큰애야, 부처님이 별로 안 좋아하실 것 같다.”

“왜요?”

“뭐랄까…… 좀 불경스러운 것 같아. 우선 ‘님’ 자를 하나도 안 붙였잖아, 부처님, 예수님, 알라님 해야지. 그리고 또 뭐랄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도 모르게 부처님 계신 곳을 향해 합장했습니다. 큰애의 불경스러움을 용서하소서. 얘가 50이나 먹고도 아직 철이 없습니다. 

 

*

 

9년 전에 이런 일기를 썼습니다. 

 

2010.10.13.

무척 추웠어요. 물이 떨어지는 대로 얼고 있어요. 내 나이 올해로 63살. 어느새 먹었는지 모르게 먹고 말았네요. 22살 처녀 시절. 형제간 우애 있다는 한 가지 조건으로 딸을 시집보내신 우리 아버지. 형제가 우애가 혼자만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는 걸. 많은 부엌일을 하면서 알게 됐지요. 그 우애들. 이제 조카들 세대가 되고 보니 먼 얘기가 된 것 같습니다. 

평생을 병과 싸우며 부처님께 비손하며 조상님께 매달리며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기고 자살하려고 세 번씩이나 시도했는데 죽지 못했습니다. 약을 먹고 죽는 것도 팔자 속이라고 되새기며. 

이제는 다부지게 살고 있지요. 

그 어려운 시절 넘기고 이제는 착한 아들들, 예쁜 딸, 착한 며느리, 잘생기고 똑똑한 사위, 손자 손녀…….

한 가지 작은며느리 아직 보지 못해 마음속이 짠하게 앙금이 걸려 있습니다. 몸조심하시라는 자식들 전화에 힘이 납니다. 새엄마 손에 구박받을까 봐 참고 또 참았지요. 내겐 너무도 힘든 젊은 시절이었지요. 가슴에 멍이 든 내 지난 시절 하늘이나 알겠지요. 

우리 남편 일찍 조실부모하시고 둘째 형님 손에 크고 성장하고 공부했어요. 중학교를 졸업시킨 다음 그때부터 네가 벌어 살라는 형님 말씀에 자기가 알아서 사는 고달픈 인생살이가 시작되었답니다. 

스물아홉에 스물두 살인 나를 만나고 서른한 살에 큰아들을 낳고 삼 남매를 두었지요. 한시도 단 하루도 집을 마음 놓고 떠나지 못하는 우리 남편, 너무도 자주 앓어서 병원과 한의원 문턱을 셀 수도 없이 드나들며 살아가는 아내를 고치기 위해 애써 벌어놓은 돈도 모으지를 못했지요. 

농사일에 광산일에 고달픈 인생을 살면서, 나를 지금 이렇게 살아 있게 했답니다. 그 정성이, 아니 그 노력으로 벌어들이지 못했으면 지금쯤 살기가 너무 팍팍하겠지요. 다행히 자식들이 마음고생 시키지 않고 잘 성장해주어서 고마웁게 생각합니다. 죽을 때 자식들 짐이 되지 않았으면 하네요. 어느 날 함께 갈 수 있으면 하지만 그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랍니다. 

 

9년 전 일기 그대로지요. 나는 평생 ‘병과 싸우며 부처님께 비손하며 조상님께 매달리며’ 살았어요. 이젠 조상님께는 매달리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당신을 데려갔기 때문이지요. 정말로 조상님이 계시다면 당신이 그리 허무히 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젠 부처님밖에 없어요. 내가 믿고 의지할 분은. 

두 번 더 자살하려고 했을 때도 나를 살린 건 부처님이었어요. 거짓말 같은 얘기지만 부처님이 나타나서 야단쳤습니다. 살라고, 살아야 한다고. 첫 번째 죽으려고 했던 건 생생한데, 이상하게 두 번째 세 번째는 기억이 안 나요. 기억 안 나는 게 좋죠. 저수지 뛰어들었던 기억 떠오르기만 해도 무서운데, 목매달라고 했거나 농약 마시려고 했거나 그런 등골 서늘한 기억까지 나 봐요.

 

*

 

당신은 1980부터 81년까지 동네 반장일을 맡아봤지요. 반장 마누라 하느라고 덩달아 고생 많았죠. 당신 대신 돈 받으러 다닌 게 한두 번인가. 당신은 ‘반장일지’를 썼었지요. 일지는 일지지요, 삭막해서 못 읽겠어요. 그 반장일지 마지막 장 뒷면에 생뚱맞게 편지가 적혀 있었지요. 

 

아버지! 

이렇게 아버지를 불러봅니다. 저에게는 아버지란 말이 새롭기만 합니다. 아버지 밑에서 어리광을 부리던 일곱 살에, 아버지께서 저를 버리고 떠나셨습니다. 그래도 저는 어머님께 그런대로 어리광을 부리면서 자라났지요. 

그 후 5년, 아버지께서 제 곁을 떠나신 서러움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아버지께선 어머님마저 제 곁을 떼어 놓으시고 모셔갔습니다. 

아버지 기억나십니까? 이 어린 자식 어떡하라고 그러셨습니까? 

허나 저는 형님 아주머님들 많이 계시니까, 딴 고아처럼 헐벗고 굶주리지는 않았고 길거리에 버려지지는 않았습니다. 허나 옛말에 한 치 건너 두 치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때엔 세상에 어지러워지고 살림살이가 어려워 우리만이 아니고 동네 전체가 그래 먹고 살기조차 어려운 시절, 내 친자식 먹여 살리기도 어려운 시절,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마는, 형님 아주머님들께서 별 차이점을 두지 않고 생활하시었건만 마음 좁은 이 자식, 형님 아주머님들 눈치를 보며, 어린 이 자식 어린 뼈가 굳어 가면 갈수록 아버지 어머님을 이 자식 많이 원망했습니다. 

아버지, 철부지 이 자식 키우지도 못하시고 가실 바엔 머리나 채워주고 떠나시지 머리까지 돌대가리, 공부도 못해, 학교도 못가, 두엄지게 밀방에 몸을 달아 생일꾼이 됐지요. 할 줄 모르는 일을 하다 보니 매일 지청꾸러기, 낮에 땅엔 엎드려 울고, 저녁엔 하늘 보고 울며, 어린 뼈를 굳어져 20년을 지냈습니다. 

아버지 옛말에 부모 복 없는 놈은 색시 복도 없다드니 그 말이 맞더군요. 동네 딴 친구들은 다 장가들고 아들딸 다 낳는데 이 자식은 누가 색시 준다는 사람이 없더군요. 20살, 25살, 지금이야 걱정이 아니겠지만, 그땐 실망이 큽니다. 아버지 아무리 지하에 계신다 할지라도 불쌍한 막내아들 배필 하나 점지 못해줍니까? 아버지, 아, 그땐 연분이 없고, 인연이 없어 그랬다고요? 예, 좋습니다. 늦게나마 연분을 찾아 노총각 신세 면하게 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저는 나이 어린 신부를 맞아 평생 행복하게 살리라고, 저희 내외는 아버지 산소에 찾아가 무릎 꿇고 맹세하고 빌었습니다. 아버지, 생각나지 않습니까. 막내아들 아리따운 막내며느리가 평생을 행복하게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고 애원하던 그 가냘픈 목소리, 그 목소리! 

아버지, 저에게는 무엇이 잘못되어 있습니까. 그 천신만고 끝에 맞이한 이 막내며느리 왜 이리 비리비리합니까. 아버지, 이 막내자식, 여편네 데리고 다니면서 얼마나 눈물을 흘리는지 아시겠지요. 아버지 잘못이 있으면 잘 가르쳐주세요. 아버지, 아버지, 인생의 운명이란 다 이런 건가요. 

아버지 슬하에, 6남 2녀 8남매. 아버지께서 다 모셔가고 큰누님, 작은형님, 막내 3남매 남았습니다. 아버지처럼 모시던 둘째 형님 그렇게 예고도 없이 비참하게 모셔갔습니다. 아버지 왜 이러십니까? 아버지 불효한 줄 저 알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이 막내아들에게도 벌을 내리시겠지요. 아버지께서 벌을 내리시면 이 자식 달게 받겠습니다. 

허나 아버지, 이 자식, 이 막내아들이 밉다 해도 죄 없는 막내며느리 아닙니까. 참 불쌍합니다. 철없는 나이, 22세 저에게 시집와 시부모 사랑 한 번 못 받고 아버님 어머님 소리 한번 못해보고, 며늘아가 소리 한번 못 들어보고, 고집쟁이, 고약쟁이, 구두쇠 남편 믿고, 투정 한번 않고, 호강 한번 못 받아보고, 꽃다운 색시가 40 넘은 호박꽃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아버지! 세 손자들은 저처럼 고아 만들지 말아야죠. 아버지,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20년간 다 못다 한 정 아내에게 정을 듬뿍 주고 사랑하며 어린 자식들 잘 가르쳐 제가 하지 못한 한을 풀어볼까 합니다. 아버지, 부디 미련한 이 자식 잘못이 있으면 잘 가르쳐 주시고 양지하시어, 불쌍한 이 자식 지금껏 고생한 일들이 헛되지 않게 이 자리를 빌려 엎드려 사죄하오며, 복되기를 비옵나이다.

 

둘째 시아주버님 돌아가고 나서 쓴 글이네요. 남편이 50 바라보고 내가 불혹 넘었을 때. 그때 당신은 정말 힘들어했어요. 부처님한테는 죄송하지만, 당신이 부처님보다 더 의지한 형님이었으니까. 아버지 대신 길러주고 가르쳐준 분이었죠. 당신은 형님에게 효도하는 게 낙이었어요. 정말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게 돌아가셨죠.

 

*

 

무염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의 8세손이다. 

명주(강원도)에서 무염은 유명한 소년이었다.

“신기햐, 신기햐.”

“세 살 때 ‘천자문’ 깨우친 거?”

“원래 나중에 크게 될 사람은 다 그래. 한 번 보고 한 번에 외우지.”

“그거 말고, 앉을 때 가부좌 틀고 합장하는 거 말여. 애기부처 같다니까.”

“그림을 그려도 부처님을 그리고, 뭘 만들어도 꼭 탑을 본뜬댜.”

무염은 열세 살에 말했다. “유학은 비루합니다. 불도(佛道)를 배우고 싶어요.”

어머니 화씨도 각오했었던 모양이다. “그래, 부처님께서 너를 원하시니 어쩌겠니.”

아버지 김범청도 기꺼이 허락했다. “너는 꼭 깨닫도록 하여라.”

무염은 출가했다. 설악산 오색석사에서 수도했다.

스승 법성선사(法性禪師)가 말했다. “빠른 발로 달린다면 뒤에 출발하여도 먼저 도착한다! 그것을 나는 너에게서 직접 보았다. 나는 아는 것이 적다. 그대에게 더 이상 가르쳐 줄 것이 없다.”

“모자라고 모자랍니다. 더 배우고 싶습니다.”

“원효대사처럼 중국에 가지 않아도 깨우칠 수 있다. 허나 진정으로 더 배우기를 원하다면 중국에 가거라.”

무염은 중국에 가다가 잊을 수 없는 일을 겪는다. 바다 한가운데서 배가 두 조각 났다. 널빤지 한 장에 의지하여 보름을 표류했다. 

구사일생 끝에 깨달았다. “깨달았지만 배울 게 많다!”

마침내 중국에 들어가서 24년 동안 두루 배우고 익혔다. 845년에 귀국했다. 

왕가의 유력자가 권했다. “지금 웅천주(熊川州, 지금의 충남) 서남쪽 모퉁이에 우리 가문의 봉토가 있습니다. 절이 하나 있습니다. 오합사(烏合寺)라고 아주 유명한 절이었지요. 근근이 유지해오다가 커다란 불이 일어나 사찰이 반쯤은 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자비롭고 현명하신 분이 아니라면 누가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겠습니까. 부디 이 부족한 사람을 위하여 머물러 주셔요.”

무염이 흔쾌히 수락했다. “인연이 있다면 머물러야겠지요.”

입 가진 사람들이 자기가 제일 잘 아는 척 떠들었다.

“웅주가 옛 백제 땅이잖어. 백제 망한 지 2백 년이지만 백제가 신라가 되나. 그 오합사가 말하자면 백제 땅에 박아놓은 신라 군사기지나 마찬가지라고.”

“절더러 군사기지라니?”

“무기 든 중이 수백 명인데, 그게 군사기지가 아니면 뭐여.”

“백제사람들도 문제지만, 하도 반란이 많이 일어나니께 아예 병사를 길러달라고 부탁을 한 거랴. 장보고 같은 사람이 또 안 나타나겠느냐고?”

해상왕 장보고가 허무하게 죽었을 무렵이었다.

무염의 오합사는 빠르게 발전했다. 웅주에 자리 잡은 김씨 왕족들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았다. 아무리 후원을 받더라도 개인의 능력이 모자라면 될 일이 아니었다.

“누구든 깨우칠 수 있다. 누구나 깨우친 사람 부처가 될 수 있다. 때로는 깨우친 사람 부처, 부처님을 진심으로 믿는 것만으로도 깨우칠 수 있다.” 

무염의 간단하지만 큰 희망을 주는 가르침은 널리 널리 퍼졌다.

누구든 깨우칠 수 있다고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가. 대중은 깨우치기보다 깨우친 사람을 믿으려고 했다. 부처를 믿음으로써 안심하고자 했다. 부처만 믿는 게 아니라, 무염도 믿었다.

“생불(살아 있는 부처)이시잖아.”

그렇게 무염도 생불이 되어갔다. 신라 왕실은 무염에게서 새로운 불교를 보았다. 서라벌과 신라 왕실을 좌지우지하는 불교 세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강력한 존재감과 심지어 군사력까지 가진 무염에게 주목했다.

각종 난리와 관리들의 가렴주구로 고아들이 넘쳐났다. 무염은 고아들을 되는대로 받아들였다. 배우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는 문자를 가르쳤다. 싸움질 좋아하는 아이에게는 무예를 가르쳤다. 농사짓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는 농토를 주었고, 장사하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는 밑천을 대주었다. 서로 사랑하는 청춘은 맺어주었다. 

왕실은 오합사에 ‘성주(聖住)’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이때부터 오합사는 성주사, 오합산은 성주산이라 불렸다. 성주사처럼 새 왕실이 새롭게 후원하는 절들이 늘어났다. 

“그니께 그 절은 좀 달러. 아무나 부처가 될 수 있댜.”

대중은 ‘아무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절을 ‘달마교’라고 불렀다. 중국 달마대사가 처음으로 그런 소리를 했다나. 훗날 학자들은 ‘선종’이라고 했다.

“그럼, 그 전부터 있었던 불교는 뭐라고 부르지? 겁나게 공부 많이 해야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거.”

“원효대사가 공부교 우두머리였다메? 원효교라고 하지 뭐.” 훗날 학자들은 ‘교종’이라고 했다. 

선종 9산 중의 하나인 성주사는 더욱 번창했다. 절에 머무는 신도만 평균 2천여 명에 달했다. 성주사에서 자란 아이들은 웅주 곳곳에 퍼졌다. 무염이 성주사에 온 지 30년이 지나자, 무염의 말 한마디로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이 만 명에 이른다는 소문이 퍼졌다. 

신라 왕이 무염을 귀하게 여긴 것이 무염이 반역할까 봐 겁나서였다는 말이 날 만했다. 신라 왕들은 무염을 국사로 삼았다. 나라의 스승. 왕은 자문을 받고자 국사를 서라벌로 자주 불렀다. 왕을 노리는 세력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반란을 꿈꾸는 자는 각오해라. 나에겐 1만 군사를 가진 무염 국사가 있다!” 

서라벌이 신라의 시작이라면 웅주는 신라의 끝이었다. 땅으로도 가고 바다로도 갔다. 무염이 그 먼 거리를 오가는 것은 단순한 행차가 아니었다. 신라 왕실이 대중을 살피고 위안하는 길이었다. 앞으로 최치원이 ‘살아 있는 전설’로 살아갈 것이라면, 무염은 살아 있는 전설로 40년을 살았다.

무염이 늙어 절에만 머무르게 되었다. 역마(驛馬)들이 왕명을 전하려고 산중에 그림자를 이었다. 

그러나 한 늙은 중이 세상의 타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웅주에서 서라벌까지 멀지만 쉬이 갈 수 있었던 그 길. 쉬이 갈 수 없는 길로 변해가고 있었다. 산적과 해적들이, 군인들이, 호족들이 수시로 뜯어내고 해코지했다.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왕래할 수 없는 길이 되고 말았다.

 

*

 

부자조카며느리가 또 왔다 갔어요. 작은시어미 별 탈 없는지 살펴봐주러 오는 건 너무 고마운데, 그놈의 예수님 타령 때문에 진절머리가 나요. 당신 계실 때는 당신이 무서워서 잘 안 오고 예수님 믿으라는 말도 덜하더만, 당신이 없으니 작정하고 전도하려 드네요. 한번 시작했다면 끝이 없어요. 당신 없으니 무방비 상태입니다. 부처님만 알고 예수님의 예 자도 싫어하던 당신 생전엔 감히 부처님이 보호하사 우리 집에 ‘아멘’ 소리조차 들어올 틈이 없었죠.

부자질부의 예수님이 보호하사 소리를 듣노라면, 돌아가신 셋째 성님이 생각나요. 저런 며느리랑 사니 어떻게 예수를 안 믿을 수 있었겠어요.

이십 년 전인가요, 삼십 년인가요, 고샅길에서 셋째 성님과 딱 마주쳤어요. 

“다저녁에 어디 가셔유?”

“교회 간다네.”

“교회유? 교회를 가신다구유?” 

깜짝 놀랄밖에요. 나보다 열 배, 백 배, 아니 천 배 독실한 보살 성님이 교회라니요. 우리 동서 중에 시주를 제일 많이 하는 게 셋째 성님이었죠. 스님 탁발 나왔을 때도 제일 많이, 절에 불공드리러 가서도 제일 많이. 제일 넉넉한 살림살이기도 했지만 부잣집이라고 다 시주를 많이 하는 건 아니잖아요.

“……부처님이 알고 계셔유?”

“다닌 지 벌써 1년 되었어.”

“진짜요? 어떻게 그리 감쪽같이 다니실 수가 있대요? 나만 모르고 있었나유?”

“절 가는 척 교회 간 거지. 영감 돌아가시고 의지할 데가 없어 절에 부쩍 많이 다녔응께 아무도 의심을 않데. 또 절 가슈, 잘 댕겨오슈 노상 인사 받았는데 실은 교회 댕겨오는 거였어. 오늘은 그냥 답답해서 말하고 싶었네. 자네한테만이라도. 막내서방님한테도 비밀로 해줘. 서방님이 알면 무슨 난리 칠지 모르니까. 며늘아기보다 무서운 게 막내서방님이야.”

“왜 교회 다니시는듀? 부처님이 잘 안 해주셨슈?”

“부처님이 그럴 분이신가.”

“스님이 섭섭하게 했나뷰. 절을 바꿔보시지……. 부처님 모시는 스님이 참 중요헌 것 같어유.”

“며늘아기한테 전도당했어. 창피해서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동네 소문 안 낸다는 조건으로다 다니는 겨.”

그러고 헤어졌는데, 며칠 뒤 밭매다가 쉴 참에 자초지종을 털어내셨죠.

“며늘아기가 교회 다니는 사람이었더라고. 내가 시어미 노릇 나섰다가 되려 발목 잡혔네. 며늘아기야, 우리 집안은 대대로 부처님을 믿었다, 너도 예수님 버리고 부처님 믿어라. 며늘아기가 바락바락 대들면서 예수님 못 믿게 하면 이혼하겠대. 어마, 무서워라, 네 마음대로 해라 그랬지. 제사야, 큰아들네가 지내니까.”

“어쩐지. 부처님 얘기만 나오면 도리질이라더니. 어째 들어오는 조카며느리마다 예수교일까요?” 

“며늘아기가 나한테 전도를 하데. 나중에는 거의 협박이라. 교회 안 가면 집 나가겠대. 그놈의 집 나간다는 소리. 나간다고 했을 때 나가라고 했으면 내가 좀 배부르게 살았을까. 가끔 며느리 몰래 절에도 가. 부처님한테 교회 갈 수밖에 없는 사정을 말씀드렸지. 야단 많이 맞을 줄 알았는데, 부처님이 별로 뭐라고 않데.”

“아휴, 부처님이 뭐라고 하겄슈, 사정이 그런디. 근데 왜 같이 안 다니시는데요? 이왕 다니시기로 한 거 시어머니랑 며느리랑 다정하게 가시면 보기도 좋잖유.”

“어떤 며느리가 시어머니랑 같이 다녀. 같은 집에 사는 것도 힘들어하는데. 며늘아기가 다니는 교회는 저기 개미벌교회인데 나는 시경리교회 다니래.”

“그래도 자기가 먼 데 가고 시어머니는 가까운데 보내네유.”

“걔는 멀다고 지 남편이 태워다줘. 나는 가깝다고 만날 걸어다니고.” 

“……교회, 무섭지 않으셨슈?”

“처음엔 참 무서웠지. 호랑이굴 들어가는 것처럼. 교회를 절이라 생각하고, 목사님을 스님이라 생각하고, 예수님을 부처님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안해지데. 신기하데. 다니니까 차차 괜찮아. 예수님 말씀이나 부처님 말씀이나 그게 그거더라고. 부처님 얼굴이나 예수님 얼굴이나 거기서 거기더라고. 부처님 예수님은 똑같아. 찬송이나 염불이나 똑같아.” 

그러고 돌아가시기 석 달 전인가 “몸도 성찮으시면서 또 교회 가시는 거예유?” 여쭈었을 때 넋두리하셨죠.

“그러게 어느새 20년을 다녔구만. 부처님인지 예수님인지 안 봐도 살 수 있지만, 교회 가면 먹을 거 준다네. 간식을 줘. 집이 무섭기도 해. 밤에는 방 안에서 꼼짝 않고, 낮에는 나가서 일만 하는 데도……. 요새는 교회가 제일 편안하다네. 교회에서 꿈도 안 꾸고 자. 집에서 자면 자도 자는 게 아녀. 내가 교회서 졸기만 한다고 목사님이 전화했는지 막 혼났어. 그래도 단꿈 꾸려고 교회 가. 교회가 아닌지도 몰라. 목사님이 설교하는 소리가 절에서 부처님 말씀 듣고 있는 것 같거든. 부처님이 불러주는 자장가 같아.”

도대체 그게 가능한 소리인가 했어요. 목사님 설교를 부처님 말씀으로 듣는다는 게. 

그게 가능하더라고요. 부자질부가 제 시어머니 전도한 실력으로다 나를 전도하려고 막 해대는 말을 들을 때 말이죠, 수가 생겼어요. 

우리가 평생 부처님 믿었지만 당신이나 나나 뭘 알고 믿은 건 아니잖아요. 그저 절에 가면 부처님께 신심으로 빌고 스님 말씀 깊이 새겨듣고 불경 테이프 트로트 듣듯 듣고 뭐 그런 거잖아요. 오죽하면 노상 염불하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뜻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귀에 익은 풍월이 있잖아요. 부자질부가 예수님 말씀이라고 늘어놓는 소리를 들어보니 뭐 부처님 말씀이나 도긴개긴으로 들리더라고요. 제 귀가 잘못된 걸까요. 암튼 예수님을 부처님으로 바꿔 듣고 교회 가자는 소리를 절에 가자는 소리로 바꿔 듣습니다. 그래야 견디지, 그냥은 못 견뎌요. 

하고 보니 참말로 다행입니다. 큰며느리가 천주교 신자라는 말 들었을 때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죠. 며느리들한테 전도당해 결국 예수님 수십 년간 믿다가 간 둘째 성님, 셋째 성님 막 생각났어요. 셋째 성님은 어쩔 수 없이 예수님 믿는 거라 부처님도 믿었지만, 둘째 성님은 부처님 완전히 버리고 예수님만 믿었잖아요. 교회 사람들과는 달리 성당 사람들은 전도하려고 심하게 애쓰지 않는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예수교는 예수교잖아요. 다행히 며느리는 날라리 기독교였습니다. 성당도 어릴 때 다닌 거고 무종교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작은며느리도 독실하게 부처님 믿는 집안입니다. 다행입니다, 다행. 나는 며느리한테 전도당하고 싶지 않아요. 며느리들이 아니라 조카며느리한테 시달리게 될 줄이야. 나를 하나님의 종으로 만드는 게 사명이라는 질부를 어찌해야 할까요.

부처님, 제게 힘을 주세요. 저는 부처님 한 분으로 충분해요. ■ 

 

김종광 / 1998년 《문학동네》에 단편소설로 등단.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 신동엽창작상 수상. 소설집 《경찰서여, 안녕》 《모내기 블루스》 《낙서문학사》 《처음의 아해들》 《놀러 가자고요》 장편소설 《야살쟁이록》 《똥개 행진곡》 《조선통신사》 산문집 《웃어라, 내 얼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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