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항상 쉬지 않고 전진하는 학자필자는 어렸을 때 부친을 따라 조선조 명재상 방촌(尨村) 황희(黃喜, 1363~1452)의 시제(時祭)를 참관한 적이 있었다. 황희의 묘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황의돈 선생의 묘와 비석을 보고 감회에 젖었던 기억이 난다. 그분이 바로 동국대 사학과에 재임하셨던 해원거사(海圓居士) 황의돈(黃義敦, 1890~1964) 교수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당시 유명 서예가 배길기(裵吉基) 동국대 교수가 집안 어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동국대에 관심이 가던 터였다. 선생의 후학이 남긴 글에 의하면, 해원 선생은 늘
미산(米山) 홍정식(洪庭植, 1918~1995)은 고아한 인품과 세련된 불교학자의 이미지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새겨져 있다. 동국대학교 교수로 22년을 재직하는 동안 그는 전통적인 불교학에 현대를 맞대어 잇는 학문적 노력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다. 또한 정년퇴임 후에도 일반대중을 위한 불교교육의 저변확대에 힘쓰고 불교학계와 후학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근대 이후의 한국불교학을 일구며 마치 노학(老鶴)과도 같은 모습으로 고고하고 유연하게 평생을 살다 간 그의 학덕은 이 시대에도 아직 향훈이가득하다.1. 중앙
1. 포광의 전집 《한국불교사상논고》포광 김영수(包光 金映遂, 1884~1967, 이하 경칭생략) 박사를 알면 한국불교 연구의 역사가 보인다. 최근세의 격변하는 사회상황 아래 학교교육 제도가 시행·정착하는 과정에서, 그는 전통사찰 강원의 강주에서 시작하여 대학 강단을 개척하고, 학문연구의 터전을 닦아 불교사학의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의 사조에서 보면 최근세는 개혁불교기로 불린다. 그것은 조선 후기의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과 초의의순(草衣意恂, 1786~1866) 간에 시작된 선(禪)의 본질 논쟁이 가져온
1. 퇴경 권상로와 근대불교 이해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잠시 학문적 영역과 거리가 있는 방송국 자료실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곳 기증 도서 가운데 근대에 발간된 불교계 잡지가 있었다. 1924년 7월 창간 이후 1931년 5월 제83호까지 권상로가 편집 겸 발행인으로 있던 월간잡지 《불교》였다. 이후 1933년 8월 제108호까지 편집 겸 발행인은 한용운이었다. 필자가 퇴경 권상로(退耕 權相老, 1879~1965)를 알게 된 것은 이때 《불교》를 접하고서였다. 그가 편집한 잡지를 읽으면서 근대 불교계의 활동이 어제의 일처럼 느껴졌다.
1. 서론효성 조명기(曉城 趙明基, 1905~1988)는 한국불교의 연구지평을 넓히고, 불교총화론을 통해 새로운 불교관을 제시하고자 한 인물이다. 그는 24세(1928) 때에 통도사에서 출가하고, 불교전수학교를 졸업하였다. 30세(1934) 때에 일본 동양대학 불교학과로 유학을 가서 1937년에 졸업을 하고, 1939년에 경성제국대학 종교학 연구실 전공과(대학원)로 진학하였다. 그는 1945년에 혜화전문학교(다음 해 동국대학으로 변경됨) 교수가 되었다. 조명기는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소 소장(1962~1964), 동국대 부총장(1960
1. 불연 이기영의 살아온 여정1) 탄생에서 유럽 유학(1922~1960)불연 이기영(不然 李箕永)은 1922년 2월 20일 황해도 봉산군 만천면 유정리에서 태어났다. 부 이종준(李鍾駿), 모 한순애(韓順愛)의 2남 4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광주(廣州). 1941년 4월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예과에 입학하였다. 1944년 동 대학 법문학부 사학과를 수료하였다. 1944년 일제(日帝)의 학병으로 징용되어 태평양전쟁에 참전하였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구사일생으로 생환하였다. 곧이어 공산당 치하가 되면서 대지주의
1. 장원규 교수의 논문을 읽게 된 사연필자가 매헌(梅軒) 장원규(張元圭, 1909~1995) 교수의 존함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83년도이다. 당시 나는 연세대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었다. 송명(宋明) 이학을 전공하던 나는 당시의 사상가들이 인간 행위의 당위성을 어떤 방식으로 논증하는지에 관심이 많았다.주렴계·소강절·장횡거·정이천·정명도·주자·육상산·왕양명 등등의 문집을 많이 읽었다. 그 과정에서 《주역》(왕필 주), 《노자》(왕필 주), 《장자》(곽상 주) 등 위진시대의 3현학도 부지런히 읽었고, 주자의 《사서집주》와
한국의 불교학은 근대 한국학의 변천과 마찬가지로 전통적 교학에서 근대적 학문으로 변화해 왔다. 그러나 최근까지 전통 강원(講院) 교육이 유지되어 왔고 아직도 선원(禪院)의 선 수행은 전통적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일반 학문 분야보다는 전통적 경향이 강하게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20세기에 활동한 한국의 불교학자 중에서 전통식 교육에 오랫동안 종사했던 이들은 전통과 근대 학문의 접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이런 경우 전통과 근대적 학문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성과에 머문 경우도 많겠지만
1. 들어가는 말무현(无見) 심재룡(沈在龍) 선생은 1943년 인천에서 출생하여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고, 평생 헌신적으로 3남매를 길러낸 편모슬하에서 성장하면서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냈다.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하여 서울대 3대 천재의 하나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남다른 재치와 총명으로 많은 화제를 남기기도 했다. 졸업 후 잠깐 기자 생활을 거친 후, 학창 시절에 특별히 흥미를 갖던 언어분석철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자 하와이대학교 동서문화센터에서 지급하는 장학금을 들고 1969년 하와이대학교 철학과로 유학길에 올랐다.석사 학위를 마친
1. 그는 누구인가이능화(李能和, 1869~1943, 이하 모든 선현, 학자에 대한 존칭 생략)에 대한 정의는 단순치 않다. 근대기 한국에서 발아된 국학의 분야들을 돌이켜 볼 때 그렇다. 우리가 한국학이란 이름 아래 다루는 민속, 풍속, 무속, 민속종교는 물론 불교학이나 종교학의 표제 아래 다루는 한국의 유교와 도교, 기독교의 유입, 천도교, 대종교 등 어느 것 하나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심지어 여성문제나 기생문화와 한글창제의 문제까지도 다루고 있다. 가히 한국학 분야의 다면불 같은 인물이다. 그리고 그를 우리의 근대
1. 머리말김동화(1902~1980)는 해방 후 한국 불교학계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학자이다. 물론 그가 1940년대 이미 혜화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했지만, 불교연구를 본격적으로 행하고, 학술연구에서 영향을 끼친 것은 해방 이후다. 국내 불교학계에서 김동화의 업적은 비교적 분명하다. 불교학 여러 분야에서 체계적 연구가 부족하고 개론서가 거의 부재한 상황에서 김동화는 교과서가 될 법한 꽤 완성도가 높은 여러 저작을 내놓았다. 대략 열거하면 《불교학개론》 《원시불교사상》 《선종사상사》 《유식철학》 《구사학개론》 《불교교리발달사》 《대승불교
1. 머리말금명보정(錦溟寶鼎, 1861~1930)은 학계는 물론 불교계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전통적 학술 방식에 의해 불교사 서술을 시도한 근대의 학승이었고 강학의 전수를 통해 평생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 또한 송광사 주지를 역임하면서 당시 교단 내에서 위상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대외 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청허계와 함께 조선 후
1. 근대불교의식과 ‘찬불가’의 탄생찬불가는 말 그대로 부처님과 그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글의 ‘찬불가’는 현재 음악학계의 정의대로 근대 이후 서양음악의 영향을 받아 오선보로 작곡된 불교노래를 의미한다. 1910년대에는 ‘불교창가’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1920년대 중반
1. 머리말 최남선(1890~1957)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 ‘출판계, 문학계, 사학계, 언론계, 정치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친 근대인이다. 그러하기에 그를 간단히 ‘누구’로 규정하기는 힘들다. 중국의 경우라면 계몽사상가이자 학술가였던 량치차오(梁啓超)에 비견할 만하다. 하지만 최남선은 량치차
이번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승려 이회광(李晦光, 1862~1933)은 조선조 말과 일제강점기에 걸쳐 활동한 인물로 ‘불교계의 이완용’ ‘매종역조(賣宗易祖)의 친일승’ 등과 같은 수식어가 붙는다. 이회광은 조선조 말에는 강백(講伯)으로 명성을 떨친 승려였지만, 일제강점기에는 극렬한 친일 활동으로 강대련(姜大蓮),
근대는 혼란의 시대다. 국가나 사회가 요동치니 그 속에 갇힌 개인도 방황했다. 방황 속에서 그들은 속절없이 침몰하기도 했다. 이제 나를 주재하는 건 내가 아니라 시대였다. 그렇다고 시대가 나를 책임지지도 않았다. 지식인들은 이런 혼란 속에서 자신이 걸어야 할 방향을 찾아 헤맸다. 그 방향이 집단적 가치에 기반했든 극히 개인적
1. 근대불교 최고의 포교사‘대중불교’ 또는 ‘불교대중화’는 한국 근대불교계에서 보편적으로 파급된 논리로, 대중불교운동의 전개는 근대 이전의 한국 불교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징 중의 하나로 지적할 수 있다. ‘대중불교’는 “산간에서 도시로, 승려에서 대중으로”를 지향하고
진호석연(震湖錫淵), 즉 안진호(安震湖, 1880~1965)는 일제강점기 가장 유명한 승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본산 주지를 역임하거나 역량 있는 말사 주지를 역임하지도 않았고, 또한 불교계의 중심인물로 의제와 담론을 주도한 인물도 아니었다. 물론 안진호와 안석연 및 소백두타(小白頭陀) 또는 만오생(晩悟生)이라는 필명으
1. 들어가는 글 이미 흘러간 유행가처럼 되었지만, 1990년대에 문화유산 답사가 붐을 이룬 적이 있었다. 어느 베스트셀러 답사기에 잘 드러나듯이 불교는 문화유산 가운데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하지만, 거기서 불교란 한 마디로 일상에서 살아 있는 종교가 아닌 미학의 대상으로 전락된 것이었다. 일반 독자에게 불교란 사라진 것, 돌과 나무를 비롯한 유형물에 미
1. 이동인 자료 찾기한국 근대불교의 전개 과정에서 이동인(李東仁, 1849~1881?)은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근대사회의 격동기였던 1877년 무렵 어느 날 별안간 등장하였다가 1881년 갑자기 사라졌다. 불과 4년간의 짧은 활동이었지만, 30대 중반 나이의 이동인은 근대불교의 형성과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