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현대한국의 불교학자

1. 서론

효성 조명기​​​​​​​​​​​​​​(曉城 趙明基, 1905~1988)
효성 조명기​​​​​​​(曉城 趙明基, 1905~1988)

효성 조명기(曉城 趙明基, 1905~1988)는 한국불교의 연구지평을 넓히고, 불교총화론을 통해 새로운 불교관을 제시하고자 한 인물이다. 그는 24세(1928) 때에 통도사에서 출가하고, 불교전수학교를 졸업하였다. 30세(1934) 때에 일본 동양대학 불교학과로 유학을 가서 1937년에 졸업을 하고, 1939년에 경성제국대학 종교학 연구실 전공과(대학원)로 진학하였다. 그는 1945년에 혜화전문학교(다음 해 동국대학으로 변경됨) 교수가 되었다. 조명기는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소 소장(1962~1964), 동국대 부총장(1960~1961), 총장(1964 취임)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1946년 4월 25일에 창립된 ‘혁명불교도동맹’에 중앙위원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중앙위원은 박봉석, 김달진 등 20여 명이었다. 《불교신보》 4·5합집의 사설에 따르면, 혁명불교도동맹은 지식층이며, 혁명적 성향의 동지들이 모여서 조직한 것이라고 한다. 강령으로 교단개혁, 조국광복, 사회혁명을 내걸었다. 창립대회에서 7가지 당면주장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①승니와 교도를 구별하라. ②사원을 일반에게 개방하라. ③사찰토지는 국가사업에 제공하라. ④불건전한 교당을 숙청하라. ⑤승려는 생업에 종사하라. ⑥석가불을 본존으로 하라. ⑦종래의 의식을 폐지하고 타파하고 간소 엄숙한 새 의식을 실시하라. 이 가운데에서 석가불을 본존으로 하라는 내용은 뒷날 조명기가 추구한 신대승(新大乘)에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당면과제의 전반적인 내용이 조명기가 추구한 불교관과 관련이 있다.

또 1946년 12월 3일에는 ‘혁명불교도동맹’을 포함한 7개 불교혁신세력이 ‘불교혁신총연맹’을 결성하였다. 1947년 5월 14일, 불교혁신세력은 새로운 교단(조선불교총본원)을 설립하고, 이 새로운 교단에 협력하는 기관으로 ‘전국불교도총연맹’을 결성하였다. 이는 ‘불교혁신총연맹’을 ‘전국불교도총연맹’으로 바꾼 것이다. 이 ‘전국불교도총연맹’은 당면주장으로서 10가지를 제시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조선 민족의 생활원리가 될 교학의 체계를 확립하자”이다. 이 주장도 조명기의 저술에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조명기는 불교 혁신세력의 일부 주장을 그의 한국불교 연구 속에서 구체화하고자 하였다.

또한 조명기는 원불교와 재미있는 인연을 맺었다. 동국대 총장으로 재임 중이던 조명기는 불교지도자 모임에 참석하였고, 그 자리에서 원불교는 호남의 신흥불교로서 불교를 등에 업고 행세할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원불교 쪽에서는 선인연(善因緣) 맺기 운동으로 대응하였다. 그래서 조명기가 총장 퇴임을 한 뒤에 원불교 쪽에서 원광대 원불교학과 대학원 대우교수를 제안하였고, 조명기는 수락하였다. 그 뒤에 조명기는 원불교를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원불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새롭게 평가하였다.

불교는 재가와 출가마저 넘어서고 있는 종교입니다. 이것은 석가모니의 중도적 가르침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불교는 무아를 말하지만, 사실 불교만큼 자신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종교도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의 가장 근본 가르침에 바탕하여 심법(心法)의 본질을 실현하고 있는 종교가 바로 원불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불교는 중도의 원리를 현실과 잘 배합하여 회통의 논리를 펴고 있으며, 한국적 불교 확립이라는 한민족의 우수한 주체성 또한 멋지게 살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인용문 속에는 조명기의 원불교에 대한 관점만이 아니라 그 자신의 불교관이 잘 녹아 있다. 그리고 조명기 사상을 연구한 선행연구로서 고영섭의 논문이 있다. 이 글에서는 고영섭의 논문과는 다른 관점에서 조명기의 사상에 접근하고자 한다. 

2. 조명기 주요 저술의 개관과 비판 소개

조명기의 저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기서는 그의 주요 저술이라고 할 수 있는 《신라불교의 이념과 역사》와 《고려대각국사와 천태사상》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조명기는 한국불교사의 구분을 다음과 같이 시도한다. “삼국시대는 불교 전래기이고, 신라시대는 연구기이고, 고려시대는 보급기이고, 조선시대는 은둔기라 할 수 있다.” 이 관점에 서면 《신라불교의 이념과 역사》는 연구기에 해당하는 신라불교의 주요인물에 대해 검토한 것이고, 《고려대각국사와 천태사상》은 보급기에 해당하는 고려시대의 대각국사 의천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다.

조명기는 《신라불교의 이념과 역사》에서 인도불교, 중국불교, 일본불교의 장점을 인정하면서 한국불교의 특징을 이끌어내고자 한다. 자세히 말하자면, 인도불교의 장점은 석존이 인도에서 교화했다는 점에 있다고 보고 있는데, 다른 각도에서 말하면 소승에서 대승으로 발전한 점이 인도불교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불교의 장점은 교리를 조직적으로 체계화한 점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다른 측면에서 접근하면 대승에서 일승으로 진전된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불교의 장점은 중국과 한국의 불교를 받아들여서 그 불교를 보급하고 실천한 데 있다고 파악한다. 그에 비해, 한국불교의 특징은 통불교(회통불교, 화쟁불교)에 있다. 원효(元曉, 617~686)에 초점을 맞추면, 원효대사의 사상에서 한국불교의 특징을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미묘한 이론을 세우고 대중구제의 실행에 나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원효는 이론과 실천을 융합했다는 것이고, 이것이 한국불교의 특징이라고 조명기는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가 되는 인용문은 다음의 2개이다.

소승으로부터 대승으로 발전한 것이 인도불교의 특색이라 하면, 대승으로부터 일승으로 진전된 것이 중국불교의 특질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인도에서도 일승사상은 대승불교의 본질로서 주창되었으나, 이것이 완전히 교리와 실천을 구비하게 된 것은 실로 중국불교의 화엄과 천태의 이론, 정토와 선(禪) 등의 실천이었다. 그리고 한국불교는 최초부터 일승불교로서 출발하여 혹은 일대승(一大乘)의 이론으로 진전해서 대소승을 초월한 통불교를 건립하였다. 이것을 중국불교의 전부와 아울러 일본에 보냈다. 일본에서는 현상 그대로 보존하고 실천을 철저히 하고 있는 것이 그 특색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각국(各國) 불교는 그 나라의 문화와 민족성을 가미한 것이기 때문에 각각 특수성을 지닌 것이다. 가령 인도불교는 석존 기념적인 것이라고 하면, 중국불교는 교리연구적인 것이라 하고, 일본불교는 보급 실천적인 것이라 하면, 한국불교는 석존[이 추구한] 구원(久遠)의 이상불교(理想佛敎)라 할 수 있다.

인도불교는 석존의 기념사업이고 중국불교는 교리조직, 일본불교는 보급실천이라고 한다면 한국불교는 원효대사에서 그 특점(特點)을 볼 수 있다. 원효는 매우 미묘한[甚深微妙] 이론으로 불교의 진리를 명확히 하였고, 동시에 다른 쪽으로 대중구제의 실행(實行)에 주력하였다. 그래서 [원효는] 이론과 실천을 융합해서 일원화(一元化)하고자 한 것이 원효대사의 근본사상이며, [이것이] 특색 있는 한민족[韓族]의 불교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심재룡과 길희성 등은 비판하고 있다. 길희성은 종합불교적 또는 초종파적이라고 해서 원효식의 통불교를 연상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그 근거로서 길희성은 다음의 3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현재의 한국불교가 중국에서 들어온 불교사상과 신행(信行)의 전통을 종합적으로 전수하고 실천하고 있는 의미에서 통불교 또는 종합불교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해도, 현재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과 태고종은 선(禪)을 표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원효식의 통불교가 간화선까지 포용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원효는 한국불교의 역사에서 볼 때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의 경우만을 제외하고는 그 영향이 미미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현대에 이르러 원효의 재발견 내지 르네상스가 이루어진 것이다. 셋째, 한국불교가 일본불교보다 종파적 색채가 강하지 않고 원만한 통일적 불교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이는 원효와 보조지눌의 사상적 영향이라기보다는 조선조의 억불정책과 강압적 종파 통폐합에 의한 결과라고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길희성은 현재의 승가 구조와 제도에서 볼 때, 한국불교는 선(禪)이 주요점이 되고 교(敎)가 종속되는[禪主敎從] 선교융합(禪敎融合)의 전통이라고 보고 있다. 필자는 조명기와 길희성의 주장에는 각각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조계종의 관점에서 보면, 길희성의 주장처럼 선(禪)이 주요점이 되고 교(敎)가 종속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한국불교사의 전체적 흐름을 사상적 측면에서 조망하면, 조명기의 주장처럼 한국불교의 특징으로 원효의 화쟁사상이 중심적 위치에 있는 통불교를 주장할 수 있다.

《신라불교의 이념과 역사》에서는 앞에 소개한 원효 이외에도 의상, 원측, 태현, 경흥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조명기에 따르면, 의상(義湘, 625~702)의 사상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깨달음[覺證]을 인가하는 표징(表徵)으로서 법계도(法界圖)를 전달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중국의 화엄사상가와는 구분되는 방법으로 일승원교의 자내증(自內證)의 경지를 표현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원측(圓測, 612~696)의 저술에서 두드러진 특색은 모든 다른 학설을 망라하고 이것을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원측은 대승적 관점에서 자신의 종파를 고집하지도 않고 다른 종파를 배척하지도 않으며 공평하게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태현(太賢, 大賢, 신라 경덕왕 대의 인물)의 사상은 유식사상이 중심이 되었지만, 화엄사상과 원효의 화쟁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태현은 중국 법상종의 자은규기(慈恩窺基, 632~682)와 혜소(慧沼)의 주장이라고 해도 취할 것은 취하였고, 자신이 계승한 원측과 도증(道證)의 주장이라고 해도 비판할 점은 비판하였다. 태현의 유식학설은 자은규기와 원측의 사상의 장점만을 취하여 집대성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서술태도가 신라불교의 흐름[流潮]이라고 조명기는 파악하고 있다.

경흥(憬興, 신라 신문왕 대의 인물)의 저서에는 다양성이 있고, 경흥이 원효의 통불교 관점의 내용을 수용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신라불교 사상의 전반적 흐름에 비추어 볼 때, 경흥의 사상은 통불교 사상에 포함된다고 조명기는 보고 있다.

조명기는 《고려대각국사와 천태사상》에서 대각국사 의천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다.

(대각)국사의 근본사상은 불교 최고의 사상인 화엄과 천태를 일불승(一佛乘)으로 지양하고 정혜쌍수(定慧雙修: 敎觀兼修)의 방법으로 실천한 것이다. [대각국사는] 이것으로 전체의 사상계를 통일하여 국가에 하나로 돌아가고자 한 것이다. 이는 신라의 원효사상을 부흥하여 시대의 폐단[時弊]을 고치고 불교의 본래면목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이다. 이것의 구체안으로 [대각국사는] 고려불교를 전면적으로 개혁하여 천태종이라는 하나의 종파로써 전부를 통섭(統攝)하고자 한 것이다.

《고려대각국사와 천태사상》은 1편과 2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에서는 앞에 소개한 대각국사 의천을 검토하였고, 2편에서는 천태사상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1장에서 지자대사(智者大師, 天台智顗, 538~597)의 생애, 《법화경》, 천태종의 전적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 2장에서는 방법론이라는 제목으로 천태의 교판론을 소개하고 있으며, 3장에서는 사상론(思想論)이라는 제목으로 천태의 일념삼천설과 일심삼관을 풀이하고 있고, 4장에서는 실천론이라는 제목으로 4종류 삼매, 25방편, 10승관법, 천태의 삼신(三身)에 대해 말하고 있다. 조명기의 이 저술은 일본학계의 천태사상에 관한 저술이 번역되기 이전까지 한국에서 천태사상을 소개하는 대표적 개설서였다.

또 조명기는 《고려대각국사와 천태사상》에서 천태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천태학은 사상으로서는 반야공관(般若空觀)에 기초를 두고, 종파로서는 삼론종(三論宗)보다 한 걸음 더 나간 것이다. 지자대사는 심각한 체험에 기초를 두고, 용수(龍樹)가 제창하고 구마라집(鳩摩羅什, 343~413)이 전승한 공관불교(空觀佛敎)를 전개하였다. 그래서 [지자(智者)대사는] 넓은 지식으로 남북조의 불교사상을 통일하고, 치밀한 두뇌로 《법화경》을 중심으로 천태학을 전개하였다. 이는 중국불교가 낳은 가장 높은 사상의 하나이다.

그리고 조명기는 지자대사 이후의 중국 천태사상의 전개과정과 한국에서의 전개과정을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다.

지자대사가 천태학을 조직한 이후 제6조 당나라 형계담연(荊溪湛然, 711~782)이 다시 천태사상의 미세한 점을 연구하여 명확하게 하였다. 그리고 송나라 사명지례(四明智禮, 960~1028)의 일파가 천태학을 중흥하였다. 그 이외에 종파로서는 [천태학이] 그렇게 흥성하지는 않았지만, 천태사상은 불교전체에 영향을 주어 [불교의] 각종(各宗)과 각파(各派)의 교리 가운데 스며들었다. 한국에서는 신라시대의 원효가 불교의 전(全) 사상을 통섭하는 데에 천태사상의 역할이 컸고, 또 국가사상과 결부해서 역대 조사가 호국적 이념을 선양하기 위해서 숭상하였다. 특히 고려대각국사에 이르러 이러한 것의 완성을 이루게 되었다.

3. 새로운 불교관과 불교총화론의 제시

앞에서 조명기 주요저술의 내용에 대해 개관하였다. 여기서는 《신라불교의 이념과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서 조명기가 새롭게 주장한 내용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고려대각국사와 천태사상》은 조명기가 1962년 일본 동양대학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것에 기초해서 책으로 낸 것이기 때문에 내용이 상당히 공식적인 측면을 나타내고 있는 데 반해, 《신라불교의 이념과 역사》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신라불교의 이념과 역사》에는 조명기의 사상을 다채롭게 읽을 수 있는 요소가 많다.

조명기는 《신라불교의 이념과 역사》에서 ‘새로운 불교관’과 ‘불교총화론’을 제시하는데, 이 둘은 포함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불교관 속에 불교총화론이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논의의 편의를 위해 이 둘을 따로 구분해서 논의하고자 한다.
 
1) 새로운 불교관의 제시

조명기는 《신라불교의 이념과 역사》의 4장 첫머리에서 새로운 불교관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화합하여 현실문제에 역량이 있는 불교이고, 죽은 뒤의 안락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生)의 문제에 고민하는 불교이며, 고답적인 관념에 빠진 불교가 아니라 옛날과 지금을 통합하고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같은 책의 다른 곳에서는 조명기는 사원과 승려를 벗어나는 제3인(객관적)의 불교를 추구하고 있다. 이는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조명기가 1946년에 ‘혁명불교도동맹’의 중앙위원에 참여한 것과 연결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단체에서 당면과제로서 7개 항을 내걸고 있는데, 그 전반적 내용이 조명기가 주장하는 새로운 불교관과 관련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사분오열(四分五裂)의 파벌적 종교는 대중에 향하는 역량이 부족하여 성취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또한 사문제(死問題)의 종교이론보다 생문제(生問題)를 중심으로 하여야 사회의 원동력이 된다. 그리하여 [종교는] 사회적 발전을 위한 기능을 다해야 한다. 현대인의 정세는 석가모니가 바나나를 따 먹고 다니며 설법하던 시대와 매우 다르다. 사후(死後)의 안락을 꿈꾸는 것보다 생활경제의 절박함이 더 큰 문제이다. 그러므로 승려 이외의 대중불교는 고답적 관념에서 유희하는 탁상공론(卓上空論)에서 벗어나서 옛날과 지금[古今]을 융합하고 동(東)과 서(西)를 통일하는 종교, 곧 사회원동력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대중불교는] 허위가 없는 진실한 종교라야 하고, 형식을 벗어난 정신의 종교라야 한다. 또한 천하를 포용하는 보편타당성이 있는 유일한 진리의 종교라야 행세할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새로운 시대의 불교이다.

불교의 종교적 행(行)을 하려면 먼저 사원을 벗어나고 승려를 벗어나서 제3인(第三人)의 불교를 행하는 것이 참된 효력을 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주장은 동국대 교수였던 황성기(1919~1979)가 제시한 〈한국불교 재건론〉의 내용과 취지에서 거의 같은 것이다. 황성기는 한국불교의 당면과제로서 다음이 3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사찰보다 교리를 중심으로 해야 한다(조명기는 사찰을 벗어난다고 한다). 둘째, 승려보다 신앙을 본위로 해야 한다(조명기는 승려를 벗어난다고 한다). 셋째, 형식보다 구제주의(救濟主義) 불교를 해야 한다(조명기는 대중불교는 형식을 벗어난 정신의 종교라고 한다). 또한 황성기는 한국불교가 나아갈 길로 다음의 3단계를 제시한다. 첫째, 불교를 현실화해야 한다. 이때 현실화의 기준으로 2가지를 제시할 수 있는데, 그것은 현대인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불교이고, 현대인의 감각에 맞는 불교이다(조명기는 고답적 관념에서 유희하는 탁상공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앞에서 말한 대로 불교가 현대화가 되었다면, 불교의 대중화를 이루어야 한다(조명기도 대중불교를 주장한다). 셋째, 불교를 생활화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분야에서 자기생활과 불교가 하나를 이루었을 때, 불교에서 모든 중생을 널리 구제할 수 있다(조명기는 생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 사회원동력이 되는 종교를 주장한다).

2) 불교총화론의 제시

조명기는 《신라불교의 이념과 역사》에서 ‘불교총화론’ 또는 ‘총화불교론’을 제시하고 있다. “같은 불교로되 종파라는 이름으로 같은 불교인 사이에 담을 쌓고 서로 간에 적막함[相互寂寞]을 느끼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기 때문에 불교를 합리화하자는 것이 곧 불교총화론(佛敎總和論)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조명기는 현대에서 불교총화론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로서 일본의 무라카미 센쇼(村上傳精, 1851~1929)를 거론한다. 무라카미는 그의 저술 《불교통일론》에서 종파불교의 분열상황을 그치고 통일적 합동조화를 추구하였다. 다시 말해서, 교단불교의 개별적 대립을 넘어서 불교의 공통분모를 명확히 하고 그것으로 불교부흥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면 조명기가 추구하는 총화불교(불교총화론)는 어떤 것인가? 총화불교는 불교교리의 대립성을 극복하는 것이고,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면 교의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집착을 버리면 그 가운데 총화불교가 들어 있다고 조명기는 주장한다.

총화(總和)불교사상은 불교교리의 대립성을 극복하는 것이다. 불교가 인도에서 부파불교로 벌어진 것이 중국에 와서 종파가 되었다. 이 종파의 교의(敎義)를 각종(各宗)과 각파(各派)가 독자성이라고 과장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진리가 목표가 아니고 이기심과 경쟁심이 근본이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각각 한 가지 단서[一端]를 집착해서 만 가지의 전체[萬全]를 잃어버리는 것이 교의(敎義)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아집의 교의(敎義)만을 버린다면 총화불교는 그 가운데 있다. 불교진리에서는 아집은 절대적으로 배척하는 것이다.

《신라불교의 이념과 역사》의 내용을 해당 목차를 해체하고 총화불교에 주안점을 두고 읽으면, 이러한 총화불교(불교총화론)에 대해 조명기는 4가지 각도에서 더 자세히 서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총화불교는 선정에 들어가서 본성을 직관하는 것이다. 둘째, 총화불교는 조명기가 새로운 대승불교를 주장하는 것과 연결된다. 조명기는 석가모니만을 모시고 궁극에는 석가모니도 초월해서 진여(眞如)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셋째, 조명기는 총화불교의 하나인 한국불교의 화쟁사상이 한민족의 지도이념이 될 가능성을 제시한다. 넷째, 총화불교는 학문적 입장과 연결된다. 이때 학문은 종교학과 불교학이다.

① 조명기는 총화불교(불교총화론)를 직관을 가지고 설명한다. 총화불교는 선정(禪定)에 들어서 본성을 직관하는 것이다. 이 직관의 철학에서 인생을 보면, 이기고 지는 것 등이 없고 모두 화합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서양철학은 이론적인 성향이 강한 것이지만, 불교철학은 직관성이 강한 것이 그 특징이라고 조명기는 주장한다.

② 조명기의 총화불교(불교총화론)는 그가 새로운 대승불교를 주장하는 것과 연결되는데, 그것은 석가모니를 내세우고 다른 부처는 모시지 않는 것이고, 궁극에는 석가모니도 넘어서서 진여(眞如)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할 때 불교마저 넘어서는 것이고, 모든 불교이론은 허공을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가 된다. 그리고 이처럼, 조명기가 석가모니를 모시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그가 1946년에 혁명불교도동맹에 중앙위원으로 참여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이 단체에서는 7개의 당면주장을 제시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석가불(석가모니)을 본존으로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③ 조명기는 총화불교의 하나인 한국불교의 화쟁사상이 한민족의 지도이념이 될 수 있다고 파악하고 있고, 한국불교의 사상적 저술과 예술적 작품이 불교의 최고 이상을 발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조명기의 주장에는 과장된 표현이 있을 수 있지만, 그 표현에 휘둘리지 않고 내용을 가지고 판단한다면, 상당히 일리 있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래서 화쟁사상이 한민족의 지도이념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고, 또한 한국불교의 사상적 저술과 예술적 작품이 불교의 최고 이상을 표현한 것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면 그렇게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한편, 조명기가 화쟁사상이 한민족의 지도이념이 될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도 1947년에 결성된 ‘전국불교도총연맹’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단체는 조명기가 중앙위원으로 참여했던 혁명불교도동맹 등 7개 단체가 연합해서 만든 단체이다. 그리고 이 단체에서는 10가지 당면과제를 제시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조선인민의 생활원리가 될 교학의 체계를 확립하자’이다. 이러한 주장이 조명기의 학문세계에서 주요한 문제의식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④ 조명기는 학문적인 입장(종교학)에서도 총화불교에 접근하고 있다. 자신의 종파에서 제시하는 교의가 옳다고 주장하는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종교학의 임무라고 본다. 이는 총화불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조명기가 총화불교를 주장하는 것은 불교연구에서도 불교에서 벗어나서 ‘과학적 비판연구’를 강조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과학적 비판연구가 이루어져야 불교 전체의 모습도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교의 전체 모습은 교의(敎義)에 갇혀서 자신의 종파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데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된다. 또한 과학적 비판연구가 이루어질 때 일반학자가 불교학을 학(學)으로 인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4. 한국불교의 종조에 대한 견해와 비교철학의 안목

조명기가 불교총화론의 하나로서 원효의 화쟁사상을 강조하는 것은 한국불교의 종조(宗祖) 논쟁에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조명기는 당시의 종조 논쟁에 대해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원효를 제시한다. 그리고 조명기는 원효의 사상을 비교철학의 안목으로 비추어보고 있다.

1) 한국불교의 종조에 대한 견해: 원효의 강조

1941년에 조선불교 조계종이 등장하면서 종조와 법통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그것은 크게 보면 3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를 종조로 보는 주장인데, 이는 주로 김영수(1884~1967) 등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둘째는 도의(道義)국사를 종조로 보는 주장인데, 이는 주로 권상로(1879~1965) 등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권상로는 도의국사를 종조로 보고 태고보우를 중흥조로 보고 있다. 셋째는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을 종조로 보는 주장인데, 이는 이재열(1915~1981)과 이종익(1912
~1991) 등에 의해 주장되었다. 현재 조계종의 종헌에서는 두 번째의 견해, 곧 도의국사를 종조로 보고 태고보우를 중흥조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보조지눌을 종조로 보는 견해가 1954년 9월 전국비구승대회에서 제정한 종헌에 일시적으로 들어가기도 했지만, 1954년 8월에 비구 측이 전국승려대회를 열어 도의국사를 종조, 태고보우를 종흥조로 보는 주장이 채택되었다. 이후로도 보조지눌을 종조로 보는 견해가 제기는 되었지만, 종헌을 바꾸지는 못했다.

조명기는 이러한 종조 문제에서 원효가 중요인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조명기는 태고보우와 보조지눌을 종조로 하는 논쟁에 대해 비판적이다. 이는 종파불교의 관점에서 본 것이라고 비판한다. 나아가 과거의 불교 속에서 신대승(新大乘)의 단서를 찾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조명기는 한국불교의 종조 문제에서 원효를 강조하기 위해서 원효와 종밀을 비교하고, 이 비교를 통해서 원효의 우월성을 제시한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종밀은 선교융회(禪敎融會)를 주장하였지만 그것이 종파를 이루지는 못하였고, 원효는 총화불교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조명기는 이러한 원효의 사상에 근거해서 당시의 한국불교계의 종조 논쟁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나아가 조명기는 원효의 사상, 곧 총화불교가 골자이고, 고려의 조계종과 중국의 임제종은 모두 지말적인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임제종을 받아온 태고보우도 종조라기보다는 공로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한국불교의 종조는 원효라는 주장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또 하나 문제 되는 것은 외국에서 받아온 임제종이 정통이냐 본국에서 수업한 조계종이 정통이냐 하는 것이다. 이것도 모두 측면에서 보는 문제이다. 결국 종(縱)으로 크게 보면 원효사상이 골자(骨子)가 되고 다른 모든 불교가 보조적으로 혈맥이 되고 골육이 되어 금일까지 생장(生長)해 온 것이다. 그리고 지말적으로 본다면 중흥적 기분을 일으킨 것도 옳고 조계종에 다시 임제종을 추가하여도 충분히 수용하며 포옹할 수 있다. 조계종이라 하여도 순전한 조계종이 아니고 임제종도 역시 순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결국 특징 있는 한국불교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태고보우(太古普愚)는 법맥의 종조라기보다 측면적인 공로자라고 할 수 있다.
 
2) 비교철학의 안목

조명기는 원효의 사상을 비교철학의 안목에서 접근한다. 그래서 조명기는 원효의 사상을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의 장점을 아우른 것으로 보고 있다. 서양철학에서는 논리가 분명히 제시되어 있고 그에 비해 결론에서는 피부에 와 닿은 것이 적은 데 비해, 동양철학에서는 문장에 조리가 없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 가운데 유현한 이치가 있다. 그런데 원효의 저술 속에서는 서양철학의 경우처럼 논법이 분명하고 그러면서도 동양철학의 유현한 이치가 그 논법 속에 깃들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필자도 원효의 저술을 읽으면서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지만, 조명기는 필자의 생각보다 더 분명하게 원효 저술의 특징을 제시하고 있다.

원효사상의 골자는 화쟁주의(和諍主義)[에 근거한] 귀일운동(歸一運動)이다. 어느 저술을 보든지 그것이 중심이 되었다. 그 문장도 아름답고[美麗] 논법도 분명하여[整然] 독자에게 쾌감을 주는 것이다. 서양철학은 인식론적 논리학에서 발달한 것이므로 독본(讀本)의 매력으로 인해서 쉽게 이해할 것처럼 보이지만, [서양철학의] 결론에서는 항상 부족해서 완성을 볼 수 없다. 이런 것을 문학유희(文學遊戱)라고 평한다. 그러나 동양철학은 이와 반대로 논법이 분명하지 않아서[疎雜] 독자에게 잘 이해되지 않는[五里霧中] 감을 주지만, 운무(雲霧)의 저쪽에는 밝은 별[明星]이 존재하듯이, [동양철학에서는] 분명한 결론을 볼 수 있다. 이는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의 선학(禪學)의 단편적 어록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동양철학에서] 문장에 조리가 없는 것은 분명히 결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원효대사의 저서를 한번 읽으면 제일로 신통하게 보이는 것이, 서양철학의 특징인 정연한 논법으로 유현한 동양철학을 명료하게 말한 점이다. 즉, 동서양철학의 정수를 원효대사가 완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조명기는 원효를 소크라테스와 비교하고 있다. 조명기는 원효가 당시 특권계급이었던 승려에서 나와서 중생과 함께하는 삶을 살았다고 보고 있으며, 또 원효는 한국불교의 건설자이고 완성자라고도 평가한다. 그러면서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와 견줄 만하다는 생각을 내비치고 있다. 원효와 소크라테스의 비교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신라불교의 이념과 역사》가 출간된 해는 1962년으로, 이때 한국사회는 서구적 가치에 대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던 시기였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조명기는 원효를 서양철학에서 지행일치를 추구한 소크라테스와 비교한 것은 원효를 그만큼 선양하기 위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5. 결론

이 글에서는 조명기의 주요 저술 《신라불교의 이념과 역사》와 《고려대각국사와 천태사상》을 중심으로 그의 사상을 검토하고, 그의 사상의 특색에 대해 알아보았다. 조명기 사상의 특색은 새로운 불교관과 불교총화론(총화불교)에 있다고 하겠다. 조명기가 제시한 새로운 불교관은 사원과 승려를 벗어나서 제3인의 불교를 추구하고, 사회원동력의 종교를 모색하는 것이다. 또 조명기의 불교총화론은 불교교리의 대립을 극복하는 것이고, 한국불교의 화쟁사상은 불교총화론의 하나에 속한다.

조명기가 강조하는 불교총화론은 한국불교에서는 원효를 중시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이 입장에서 조명기는 당시에 벌어지던 한국불교의 종조 논쟁에서 원효가 중요한 인물이라는 주장을 제시한다. 또한 조명기는 원효의 사상이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의 장점을 아우른 것이고, 아울러 원효의 실천행은 서양의 소크라테스와 비슷하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신라불교의 이념과 역사》의 내용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다 수용할 수 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방법론과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제대로 다 소개하지는 못했지만, 《신라불교의 이념과 역사》는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이 잘 절충된 저술이라고 평가할 수 있고,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문헌학적 연구성과와 현실적 측면에 접목하려는 해석의 태도가 잘 어우러진 저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신라불교의 이념과 역사》는 불교연구자에게 어떻게 불교를 연구할 것인지에 대해 하나의 모형을 제시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명기의 불교연구는 현대적 불교학의 방법을 원용한 것이지만, 동시에 목적론적 성향도 강한 것이다. 그것이 그의 불교연구의 장점도 되겠지만 동시에 단점도 될 수 있다. 조명기는 한국불교를 살리겠다는 목적이 강했고, 그래서 한국불교에 대해 지나친 미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후학들은 조명기가 남겨놓은 학문적 유산에서 계승할 것은 계승하고, 목적론적 성향이 지나치게 강한 것은 비판적 안목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이병욱
고려대, 중앙승가대 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박사). 주요 저서로 《천태사상연구》 《고려시대의 불교사상》 《인도철학사》 《한국불교철학의 전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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