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출판의 배에 불교를 실어나른 뱃사공

1. 《석문의범》을 펴낸 학승

진호석연(震湖錫淵), 즉 안진호(安震湖, 1880~1965)는 일제강점기 가장 유명한 승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본산 주지를 역임하거나 역량 있는 말사 주지를 역임하지도 않았고, 또한 불교계의 중심인물로 의제와 담론을 주도한 인물도 아니었다. 물론 안진호와 안석연 및 소백두타(小白頭陀) 또는 만오생(晩悟生)이라는 필명으로 《불교》 등에 60여 건의 글을 발표하기는 하였지만, 그의 존재를 강력하게 각인시킨 것은 불교의례를 집대성한 《석문의범(釋門儀範)》의 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상회(卍商會)를 통한 불교서적 편찬의 일환으로 간행된 《석문의범》은 《불자필람(佛子必覽)》을 증보한 것으로 일제강점기 이후 지금까지 불교의례를 담은 서적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히며 준거가 되었던 대표적 불교 간행물이다.

불교문화연구원에서 편찬한 《한국불교문화사전운주사, 2009. 2)은 말 그대로 한국불교문화의 대표적인 내용을 표제어 700여 개로 정리한 간략한 사전이다. 이 가운데 근대불교계를 대표하는 30여 명의 인물들 가운데 한 명으로 안진호가 정리되어 있다. 즉 경허·만공·만암·성월·구하·용성·청호·이동인·홍월초·한용운·권상로·김법린·박한영·이능화·이종욱·최범술·한암·학명·경봉·운허·계명·금오·동산·청담·인홍·광덕·성철·월하·청화·수옥·혜옥·일엽·일타·숭산·효봉 등과 더불어 안진호가 표제어로 설명되어 있다. 또한 안진호의 대표적인 저작물인 《석문의범》도 표제어로 포함되어 설명되어 있다. 이는 근대 불교문화사에서 안진호와 《석문의범》이 지닌 위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안진호는 《석문의범》과 뗄 수 없는 존재로 각인되어 있는 셈이다.

일제강점기 불교출판은 백용성이 1921년에 설립했던 삼장역회와 대각교당, 1924년부터 《불교》를 발간한 불교사(佛敎社), 그리고 안진호가 운영했던 만상회(1935)와 김태흡의 불교시보사(1935)가 대표적이다. 이들 가운데 삼장역회와 대각교당은 1940년 백용성의 입적과 함께 그 역할을 마감했고, 김태흡의 불교시보사도 해방과 함께 출판을 그만두었다. 서대문에 있었던 안진호의 만상회는 해방 후 장소와 이름을 바꾸어 ‘법륜사(法輪社)’라는 상호를 사용면서 출판을 계속했다.

해방 후에도 목각본이 아닌 특호 활자의 명조체 인쇄본이 주는 신선함은 스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공부하기 편하고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상회에서 발간한 불교서적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 수 있었다.

이에 안진호는 만상회를 통해 강원의 사미과 교재인 《초발심자경문》을 비롯하여 《치문(緇門 사집과 교재인《서장(書狀선요(禪要)도서(都序절요(節要》 등을 현토 주해하여 간행하였다. 또한 《석문의범석문가곡(釋門歌曲)다비문(茶毘文)》등의 법요 의식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여 출판하였다. 그리고 주요한 경전으로《목련경지장경법화경》 등을 번역 출판하였고, 《팔상록영험실록(靈驗實錄)》 등 60종이 넘는 불교서적을 간행하였다. 이에 안진호 스님은 ‘책부자’ ‘책 장자(長者)’라는 별명이 붙었거니와 책값을 1전 한 푼 깎아 주는 법이 없는 직판이어서 ‘부처님을 팔아먹는 놈’이라는 욕도 얻어먹었다고 한다. 여하튼 불경의 대중적 보급을 위한 우리말 현토와 언해본의 발간과 불교의식의 통일을 가져왔다는 점은 불교문화사에서 혁혁한 공헌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 수학과 포교활동

안진호(安震湖)는 본명이 석연(錫淵)이고 본관은 순흥으로 1880년(고종 17)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안진호 스스로 14세의 어린 나이에 예천 용문사(龍門寺)에 들어와 불교이력을 두 번이나 졸업하고 강사가 되기까지 20여 년 동안을 용문사를 본사로 활동하였다고 적고 있다. 즉 1893년 14살의 나이로 용문사에 들어왔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안진호 스님에 대한 자료는 16세에 용문사에서 글을 읽다가 불경을 열람하던 중 발심하여 이듬해인 1896년 신일(信一)을 스승으로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9년 동안 용문사 강원에서 수학한 후 김룡사, 대승사, 봉선사를 비롯한 여러 절의 강원에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30대에는 소금장수, 40대에는 등유장수를 하였으니 이는 세상에 소금 역할과 등불 역할을 하겠다는 염원에서 우러나온 만행(萬行)이었다.

그러나 안진호의 행적 중에서 1906년 세워진 명진학교(明進學校)의 제1회 졸업생이었다는 점이 부각될 필요가 있다. 권상로와 더불어 명진학교에서 신학문을 접한 경험은 이후 안진호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명진학교와 관련한 안진호에 대한 자료가 없는 실정이어서 딱히 무어라 설명하기 어렵다. 실상 명진학교의 경험에 대한 기록은 지극히 단편적이다.

명진학교 1회 졸업생으로 이종욱·강용선·안진호·최용식·강대련·김선은·권상로·박해운·김동선·한용운·최환허 등이 거론되고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예를 들면 권상로의 ‘자서연보(自敍年譜)’에 따르면 1905년(27세) 8월 명진학교에 입학하여 3개월 후 중퇴하였다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안진호 역시 26세의 나이로 명진학교에 입학한 것이 된다.

실제 명진학교에 대한 인식과 수업 태도 및 근대학문의 수용은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중법산에서 파송된 대교과 이상을 수료한 승려들의 지식수준이 높았고, 나이 역시 19~30세의 중견 승려들이었기 때문이다. 강대련 등 일제강점기 본산 주지들의 자필 이력서에는 명진학교 수료 내용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이를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여하튼 이들은 지방의 각 사찰의 사립학교 설립에 따라 교사와 강사로 유출되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안진호 역시 명진학교 졸업 이후 경북 예천에서 포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며 활동하게 된다.

1914년 여름 예천군 용문사와 명봉사(鳴鳳寺) 연합으로 불교의 진리를 선포하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불교포교당을 설립하였다. 이듬해인 1915년 안진호는 포교당 신도들을 중심으로 예천불교회를 조직하였다. 예천불교회는 불교발전에 대한 토론을 통하여 첫 사업으로 일반 노동자를 대상으로 포교당 내에 야학회를 설치하였고, 이에 40여 명의 학생들을 모집할 수 있었고 예천불교회 간부들이 야학회 교수를 담당하였다.

일제의 ‘포교규칙’에 따라 신고된 내용은 ‘대본산 김룡사 말사 용문사 명봉사 예천포교소’는 예천 노하동 24번지에 위치하였고 1915년 및 1918년 포교사는 안석하(安石荷)였다. 따라서 안석하는 안진호의 또 다른 이름으로 추정된다.

용문사와 명봉사 연합 예천포교당은 1917년 김룡본말사 공동사업으로 전환되었다. 포교당 부설 야학회는 1921년 불교유일야학회로 부르다가 1922년 4월 여자부를 개설하였고, 1922년 9월 여자부를 주학으로 변경하고 여자 교원을 충원하면서 이름이 예천불교유일학원(醴泉佛敎唯一學院)으로 개칭되면서 포교사 곽유종, 감원 김용주가 부임하였다.

포교사가 1922년 곽유종으로 변경되었다는 점에서 안진호는 1914년부터 1921년까지 예천포교당을 근거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1921년 가을 안진호는 권상로와 함께 일이 있어 1개월 동안 대구를 방문하고 통도사와 범어사에 머물다 돌아왔다. 유일학원은 1923년 불교교당 신축 문제가 불거지고,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출자 문제와 전국적인 가뭄으로 인한 재정 문제로 1924년 폐지상태가 되었다.

안진호는 1923년 3월 횡령죄를 범하고 도주하여 안동지청 검사국에서 기소중지 처분을 받고 있으며, 당시 소재불명 상태였다. 통도사 주지 김구하는 1921년 8월 21일 김룡사 안석연(안진호)에게 100원을 대여한 후 1923년 10월경 다시 500원을 대여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자들은 안석연의 차용증서 금액을 600원으로 변경하였다는 혐의를 포함하여 진정서를 제출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안석연은 소재불명으로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1922년부터 1925년 서울에 나타날 때까지 안진호의 행적은 불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30대에는 소금장수, 40대에는 등유장수를 하면서 세상에 소금과 등불 역할을 하겠다는 염원에서 우러나온 만행을 했다는 40대 시기로 파악된다.

안진호는 생활 근거지를 경북 지역에서 서울로 옮기게 되는데 1925년의 일이다. 처음 서울에 자리 잡은 것은 이회광(李晦光, 1862~1933)이 운영하던 정동 중앙포교소였다.

1925년 안진호는 조선불교단의 일본 시찰 사업의 일환으로 일본불교를 시찰하게 되었다. 즉 1925년 8월 20일부터 일본 교토·나라·오사카 등지를 견학하면서 청수사, 흥복사 및 법륭사 등에서 숙박하면서 간사이(關西) 지역을 돌아보고 9월 2일 서울로 돌아왔다. 이는 사단법인 조선불교단에서 매년 시행하기로 한 ‘내지불교(內地佛敎) 견학’ 사업의 제1회 행사였는데, 안진호는 중앙포교소 승려로 참가했던 것이다.

3. 일본불교 시찰의 문화적 충격

불교계에서 일본 시찰은 1909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17년 30본산 연합사무소 위원장 김구하를 비롯한 교계 실세들의 일본불교 시찰이 가장 유명하였다.

조선불교단 제1회 내지견학 단원으로는 중앙포교소 승려 안석연을 비롯하여 노인정 승려 정찬종(鄭贊鍾), 불교신자 염시모(廉時模) 등 외부인 3명과 조선불교단 사무원 이윤현(李潤鉉) 및 조선불교단에서 운영하던 《조선불교》 기자 정창조(鄭昌朝) 등 5명이었다. 조선불교단 외부 인사 3명 가운데 한 명으로 참가한 셈인데, 안진호를 제외하고 남산 노인정 승려 정찬종을 비롯한 인사들은 조선불교단 등과 관련한 친일적인 색채가 다분하였다.

조선불교단은 1925년 일본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조선인 유력자들이 참여하였던 단체였다. 서울의 중앙 조직과 지역 조직에 모두 포함되었고, 지부로 평양과 신의주·대구·부산 등지에 각각 설치되었다. 이들의 목표는 조선불교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 강화와 내선융화 정책의 보조 그리고 조선인에 대한 사상적 통제를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강연회와 강습회를 개최하고 기관지 《조선불교》를 발행하였다. 또한 일본에 유학생과 견학단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매달 세 차례씩 조선인 승려를 초청해 조선인을 상대로 불교강연을 하도록 하고 특별강연회나 불교 강좌도 여는 등 지속적인 활동을 했다.

일본불교 시찰은 조선불교단의 처지에서 보면 조선불교계 인사들의 중요한 친일화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소위 ‘내지 견학’ 또는 ‘내지 시찰’은 발전된 일본의 각종 시설과 일본불교계를 보여줌으로써 일제에 대항하고자 하는 생각 자체를 갖지 못하게 하거나 의식을 변화시키려는 정치적 목적이 내포되어 있었던 사업이었다.

조선불교단 제1회 불교시찰단 5명은 1925년 8월 20일 조선불교단 사무실에서 기념촬영을 마치고 밤 10시 경성역을 출발하였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에서 내려 오사카로 향한 일정이었다. 이때 안진호는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고 있다. 1917년 권상로가 김구하 등 중앙불교계 대표들과 일본불교 시찰을 했을 때의 찬탄 위주의 그것과 사뭇 다른 것이었다. 즉 삼국시대 불교를 비롯하여 각종 문예와 기술을 일본에 가르쳐주었는데, 조선시대 불교 박해에 의해 쇠퇴하여 이제는 교수는 고사하고 발전된 일본불교를 견학해야 하는 처지를 수치스럽게 인식하고 있다. 삼국시대 불교와 문화의 발전에 대한 자부심은 이제 발전된 일본과 일본불교를 돌아봐야 하는 상황으로 바뀐 현실 때문이었다.

안진호 일행이 견학한 시설들은 신사(神社), 이세대묘, 신문사, 방적회사, 제사공장, 양로원, 납골당, 시청, 공원, 학교, 박물관과 기념관 등 각종 시설물과 더불어 일본의 각 종파의 대표적인 사찰들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 국내 견학의 목적과 성격의 일단을 알 수 있는바, 발전된 일본의 문물을 보여주고 웅장한 사찰들과 그들이 운영하는 시설물들을 다양하게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에 각 사찰에서 운영하는 대학과 여학교, 유치원, 양로원, 납골당 등은 조선불교와 내용과 규모에서 현격한 차이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안진호는 여타의 것보다 더욱 비교되는 것은 각 사찰에서 자랑삼아 내오는 사지(寺誌)의 존재였다는 점이다. 각 사찰마다 사지를 내오는 것을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았음과 동시에 귀국 이후 각 사찰의 사지 편찬에 종사하기로 원을 세우게 되었다.

4. 대중적 글쓰기

안진호는 1925년 1월부터 《불교》에 고정 코너를 갖고 연속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는 퇴경 권상로의 배려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권상로는 1924년 7월 창간한 《불교》를 1931년 5월 제83호까지 편집 겸 발행인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경북 예천을 고향으로 한 그들은 특히 용문사와 김룡사를 매개로 깊은 인연을 지니고 있었다. 1살 차이였던 몽찬(夢燦, 권상로)과 석찬(錫燦, 안진호)의 양찬으로 불리며 천재적 면모를 과시하였고, 호형호제하며 서로 막역한 사이였다. 실상 안진호가 경상도에서 서울로 근거지를 옮기게 된 배경에는 퇴경 권상로가 먼저 자리를 잡은 것도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하여 권상로는 안진호에게 《불교》 매호 〈일호일언(一號一言)〉이라는 고정코너를 두고 재미있는 주제를 선택하여 특별한 형식 없이 자유롭게 글을 쓰게 하였다. 이에 소백두타(小白頭陀)라는 필명으로 안진호는 일반인들이 재미있어 할 수 있는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 ‘삼신할머니’ ‘가시내’ ‘신라 때 불가사리’ 등 통속적인 주제나, 자신이 스스로 겪었거나 들었던 소백산 지역의 ‘희방사 창건유래’ ‘용문사의 신비’ 등의 소재, 그리고 문화적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던 1925년 일본 시찰 등의 주제를 채택하여 지면을 구성하였다. 이는 1925년 1월부터 시작하여 1927년 2월까지 22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이 〈일호일언〉 고정 코너는 다른 사람의 글이 실리지 않고 오로지 안진호를 위한 것이었다.

소백두타라는 그의 필명은 스승과 같은 존재였던 최취허의 연방두타(蓮邦頭陀)라는 필명을 연상시킨다. 소백산 자락에서 태어나 소백산 자락의 사찰에서 공부하였던 안진호의 처지에서 보면 소백산의 주인임을 자처할 만하다.

한편 만오생(晩悟生)이라는 필명으로 안진호는 1926년 11월부터 1928년 7월까지 같은 《불교》에 〈양주각사순례기(楊州各寺巡禮記)〉를 15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이는 1927년 발간된 《봉선사본말사지(奉先本末寺誌)》 편찬을 위해 양주군 각 사찰을 직접 답사한 내용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최초로 발간된 본말사지였던 《봉선사본말사지》가 안진호의 각 사찰을 직접 답사하는 고단한 발품을 통해 이 세상에 나왔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불교》에 1925년 1월부터 1931년까지 지속적으로 글을 쓰고 있는데, 소백두타·만오생·진호생(震湖生)·등운산(騰雲山人) 안석연·운산초재(雲山樵滓) 안진호 등의 필명으로 다양한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1932년 안진호 이름으로 〈석왕사행(釋王寺行)〉을 《불교97호(1932. 7)에 발표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불교》는 권상로의 뒤를 이어 1931년 7월 84호부터 만해 한용운이 맡아서 1933년 1월 108호까지 편집을 담당하였다. 권상로 편집인 당시의 연재 글을 이어서 지속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오생이라는 필명은 1926년 11월 《불교》에 사용하기 시작하여 이후 이 필명으로 많은 글을 썼다. ‘늦게 깨닫는 사람’이라는 뜻의 만오생은 겸손의 표현임과 동시에 늦게라도 깨닫겠다는 의지의 반영이기도 하다. 이 필명은 《불교》 29호(1926. 11)에 〈양주각사순례기〉를 쓰면서 비롯되었는데, 같은 잡지에 이미 ‘소백두타’라는 필명으로 고정 코너였던 〈일호일언〉을 쓰고 있었기에 또 다른 필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1937년 안진호라는 이름으로는 〈규봉정혜선사(圭峰定慧禪師)의 비문(碑文)《(신)불교》 38호(1937. 7)을 게재한 것을 끝으로 잡지 《불교》와는 인연을 끊고 있다. 잡지에 쓴 안진호의 글은 우선 쉽게 읽힌다. 일반인들이 재미있게 여길 수 있는 어렵지 않은 주제와 편안한 글쓰기 덕이다. 또 다른 안진호의 글쓰기 주제는 각지의 사찰을 순례한 답사기였다. 이는 사지 편찬을 위한 실질적인 답사를 배경으로 현장감 있는 글쓰기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안진호가 사지 편찬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글쓰기도 1930년 중반 이후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이는 만상회를 통한 불서 간행에 주력한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1935년 간행된 《석문의범》의 폭발적 수요는 안진호를 불서 간행에 주력하게 했던 것이다.

5. 사지편찬과 안진호

1) 사지 편찬 현황

일제강점기 30본산의 본말사지로는 1927년에 간행된 안진호 편찬의 《봉선본말사지(奉先本末寺誌)》가 본격적인 최초의 본말사지인 셈이다. 그러나 전년도인 1926년 《신흥사지(新興寺誌)》가 잡지 《불교(1926. 7. 1)의 별책부록으로 발간된 바 있다. 이는 명승지인 설악산에 위치한 신흥사를 찾는 탐승객들을 위해 신흥사의 간략한 연혁을 담은 23쪽 분량의 사찰 소개용 소책자였다. 물론 《봉선본말사지》 편찬 이전에도 불교계 내부에서 사적(史蹟)과 승사(僧史)의 편찬 노력이 있어 왔다.

이미 1910년 각황사에서 사적과 승사를 편찬할 목적으로 편찬위원 서해담(徐海曇)·이회명(李晦明)·김현암(金玄庵)을 선정하기도 하였다. 이에 1910년 12월 각황사 포교사 서해담이 각 지방 사찰에 배포하기 위하여 통도사 역사와 승려 이력을 편집 발간하기도 하였고, 또한 《조선선교약사(朝鮮禪敎略史조선종사(朝鮮宗史)》 등을 통해 승려의 계보를 정리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불교계의 노력과 전통은 1911년 사찰령 반포 이후 조선불교계가 30본산으로 정리됨에 따라 각 본사가 주축이 되어 사지편찬이 하나의 흐름으로 전개되었다. 1911년 사찰령 이후 편찬된 사지로 가장 빠른 것이 각황사 개교사장이었던 서해담이 1910년부터 준비한 《통도사사적》으로 이것이 책자로 발간된 것이 1912년의 일이다. 《통도사사적》은 물론 본말사지 형태로 발간된 것이 아니었다.

발간은 되지 않았지만 1920년 김영수(金映遂)가 편찬한 40여 쪽 분량의 《실상사지》와 50여 쪽 분량의 《해인사지》가 있다. 이들 《실상사지》와 《해인사지》는 간행되기 전의 정서된 형태의 필사본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실상사지》는 송광사 조계총림 도서관 장서인이 있으나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해인사지》는 일본 천리대학(天理大學)의 금서룡문고(今西龍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 1927년 8월 안진호가 편찬한 《봉선본말사지》가 일제강점기 최초의 본말사지로 간행됨으로써 각 본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8년 6월 만해 한용운의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事蹟)》이 발간됨으로써 이러한 본말사지 편찬의 역사적 흐름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송광사 사고(史庫)》(1928~1934)가 간행은 되지 않았지만 편찬되면서 사지편찬은 거역할 수 없는 대세가 되어갔다.

1920년대 말 이후 1930년대 ‘관광’이라는 시대적 조류에 따라 관광용 안내 책자 형식의 약지(略誌)가 제작 배포되었다. 이미 1926년 최관수의 《신흥사지》가 잡지 《불교1926. 7. 1)의 별책부록으로 발간되었다. 이는 명승지인 설악산에 위치한 신흥사를 찾는 탐승객들을 위해 신흥사의 간략한 연혁을 담은 23쪽 분량의 사찰소개용 소책자였다. 이러한 소책자 발간은 193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제작 간행되었다. 즉 안진호 편집, 권상로 교열의 《설봉산석왕사약지(雪峰山釋王寺略誌)》가 1934년 5월 20일 발행되었다. 80쪽이 채 안 되는 소책자 형식의 《설봉산석왕사약지》는 경원선을 통해 명승지로 이름을 날렸던 안변의 석왕사를 소개하는 차원에서 편찬되고 제작된 것이다.崔應觀 《雪峰山釋王寺略誌 1934. 5. 20.

인근의 주을온천과 명사십리 및 안변 석왕사는 일제강점기 내내 대표적인 탐승의 대상이었고, 가고 싶은 여행지였다.

또한 1934년 5월 20일 《설봉산석왕사약지》와 같은 날짜, 같은 인쇄소(鮮光印刷所)에서 《도봉산망월사지》가 인쇄, 발간되었다. 《도봉산망월사지》도 안진호 편찬으로 38쪽 분량의 소책자였다. 이는 봄가을 행락철이 되면 망월사역을 임시로 개설하여 관광객을 맞는 도봉산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같은 관광용 소책자는 1937년 안진호 편찬의 신연활자본(新鉛活字本)의 《삼각산화계사약지》가 있다. 서울 인근의 대표적 명승지였던 화계사에 대한 소개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들은 이름난 명승지로 관광객들을 유치할 수 있는 사찰들은 관광객의 편의를 위한 소책자 형식의 약지를 제작한 것이다. 즉 《설악산 신흥사지》 《설봉산 석왕사약지》 《도봉산망월사지》 《삼각산화계사약지》 등은 직간접적으로 안진호와 관련이 있는 편찬물들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기존의 본말사지와 형식을 달리하는 《경북오본산고금기요(慶北五本山古今記要)》가 경북불교협회의 이름으로 1937년 8월 발행되었다. 편찬자는 강유문(姜裕文)으로 동화사·은해사·고운사·김룡사·기림사 등 경북 5본산의 역사적 기록이 되는 자료를 수록한 것이다. 본말사지가 본사와 말사의 역사적 기록인 점에 비하면 《경북5본산 고금기요》는 각 본산의 역사적 기록을 수집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경북 지역의 5개 본산을 묶은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총본산 건설로 나아가는 지역별 본산연합의 형태로 경북불교협회라는 조직이 만들어져 활동하고 있던 상황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본말사지 가운데 안진호가 관여한 것으로 《봉선사지》《건봉사 사적》 《전등사지》 《유점사지》 등이 간행되었고, 편찬은 되었으나 간행되지 못한 화엄사지·해인사지·고운사지·백양사지·석왕사지·김룡사지·봉은사지 등의 본말사지가 있었다. 그리고 관광 책자용 소책자의 약지들이 있다. 이렇듯 일제강점기 사지 간행에서 안진호의 역할과 위상은 독보적이다.

2) 사지편찬에서 안진호와 한용운의 차이

1927년 안진호 편찬의 봉선사본말사지와 1928년 한용운 편찬의 ‘건봉사본말사사적’의 간행은 조선불교계에 본말사지 편찬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들 책자는 사뭇 분위기가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1927년 건봉사 본말사 회의를 통해 건봉사 본말사지 편찬을 결의한 이후 건봉사 주지 이대련은 김일우, 최관수로 하여금 각 말사를 찾아 고기록을 수집하고 편집을 마치게 하였다. 이러한 자료를 기초로 하여 최종 건봉사 사적 편찬의 임무는 만해 한용운이 맡았던 것이다.

1928년 간행된 ‘건봉사본말사사적’의 〈범례〉에서 “사실(史實)은 각 본사에서 녹송(錄送)한 기록에 의함”이라 적었듯이 만해 한용운이 직접 답사하여 수집한 자료가 아니었다. 각 본말사에서 보내온 기록에 근거하고 있었다. 더욱이 만해 한용운은 조선 사찰의 역사적 기록은 완벽하지 않을뿐더러 단편적으로 보존된 기록조차도 기이하고 황당한 내용이거나 문식(文飾)에 치우쳐 역사적 사실이 소략하여 역사적 가치가 거의 없다고 보았다. 이는 전설을 수록하지 않고 기록에 의거하여 서술했다는 점과 더불어 자료의 고증 및 재구성을 통해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는 한용운이 편찬자의 입장을 배제하려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태도를 견지했다고 할 만하다.

물론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상황과 만해 한용운에 대한 일제 당국의 감시 속에서 건봉사의 의승군 관련 기록은 일제의 검열에 의한 삭제 및 검열을 의식한 간결한 기술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점을 들 수 있다. 더욱이 한용운은 연대 서술 방식에서 일본 연호를 철저하게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사찰령 관련 서술을 최소화함으로써 일제에 대한 항거를 하고 있다. 이는 한용운의 편집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만일회와 같은 건봉사의 특징적 내용에 대한 간결한 기술과 건축물의 창건과 중건 중심의 기술 및 읍지 등을 참조하지 않은 것은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물론 1년밖에 되지 않는 짧은 편찬 기간이라는 문제와 더불어 1878년 대화재로 인한 자료 부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자료발굴과 수집에 대한 적극성과 충실성에서는 안진호는 한용운과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안진호는 직접 본말사를 답사하면서 자료를 모으고 직접 필사하거나 자료가 없는 경우 나이 많은 스님으로부터 사찰에 전해오는 전설 등을 구술받았다. 이렇게 직접 답사하면서 느끼는 현장감과 구술 등을 통한 적극적인 자료발굴과 자료수집 자세는 모범적이었다.

1926년부터 봉선사 사지편찬 작업에 착수한 이래 백양사, 석왕사, 유점사, 김룡사, 전등사 등 본말사 200여 사암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하였다는 점은 높이 사야 하는 대목이다.

이렇듯 각 본말사를 직접 답사하여 자료를 수집하는 방식은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 당시 교통이 불편한 현실에서 직접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사암에서 소장한 각종 문서와 현판 및 석물의 내용을 직접 필사한다는 것은 대단한 공력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강원도에 소재한 건봉사 말사들의 교통편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도 보통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유점본말사지 편찬을 위해 노력한 모습을 살펴보자. 퇴경 권상로와 여름방학 때를 이용하여 금강산에서 보기로 약속하고 안진호는 자전거로 춘천을 향해 출발하였다. 춘천을 거쳐 화천-철원-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사찰들을 방문하여 자료를 조사하면 얼추 여름에 금강산에 도착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안진호는 자전거를 급히 몰아 춘천 상원사를 찾아 관음굴·통천굴을 돌아보았다.

다음날 흥국사로 넘어가서 전설 등을 청취하고 다시 춘천 시내 소양포교당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군수 최만달 씨를 찾아가 《춘천읍지》를 빌려 포교당으로 돌아와 하루 종일 초사(抄寫)하였다. 다음날 새로 신축한 안화산 보광사를 찾아보고 돌아오는 길에 빌렸던 읍지를 군수에게 돌려주었다. 그 길로 청평사를 찾아가 이틀 밤을 묵고 나서 다시 자전거를 타고 화천군 관응사에 가서 사료를 수집하였다. 다음날 화천 군수를 찾아가 읍지를 빌려 그 자리에서 화천군의 사찰 연혁을 적고 그 길로 김화군 천불암에 도착하고 있다. 한마디로 강행군이었다.

이렇듯 직접 발로 돌아다니며 기록을 수집하고 자료가 없으면 노승을 만나 전설을 채록하는 일을 통해 새로운 사지를 편찬하였던 것이다.

3) 사지 편찬의 또 다른 역사 만들기

안진호는 1925년 12월 봉선사 강사로 초청되어 1927년 봄까지 재직하였다. 당시 봉선사 주지였던 홍월초(洪月初)는 봉선사 강사로 재직하던 안진호에게 사지 편찬을 의뢰하였다. 봉선본말사지의 편찬은 일제의 조선통치의 기초자료 수집에 의해 촉발된 것이기도 하다. 즉 양주군청은 1926년 8월 11일부로 양주서(楊州庶) 제1755호 〈봉선본말사에 대한 ‘향토사료’의 건〉을 봉선사 사무소로 보내왔다. 각 사찰을 상세히 조사하여 9월 말까지 회보하라는 내용이었다. 봉선사는 이를 다시 등사하여 양주 관내 17개 말사(망월사, 천축사, 수종사는 봉은사 말사로 제외)에 9월 20일까지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통첩을 내렸다. 그러나 반수 이상은 회신이 없자 봉선사 주지 홍월초는 강사 안진호에게 양주군 각사를 방문하여 직접 연혁을 취합할 것을 부탁하였던 것이다.

일부 의식 있는 승려들은 관청의 요구가 아니더라도 솔선하여 본말사의 사료를 정밀히 조사하여 책을 편찬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봉선사 주지 홍월초 역시 10여 년 전부터 봉선사 및 각 말사와 관련한 사찰의 연혁과 역사책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관청의 향토사료 제출 요구를 받으면서 안진호에게 강원을 몇 주 휴강하더라도 봉선사 본말사의 연혁을 직접 수습하여 참고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봉선사의 말 못할 내부 사정도 한몫하였다. 그것은 봉선사 소유의 산림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광릉의 원찰이었던 봉선사는 드넓은 광릉의 산림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실제 봉선사 소유의 산림이 전혀 없어 문제가 되었다. 땔나무를 위해 국유림과 이왕직(李王職) 산감수(山監守)의 수모를 받는 상황이었다. 이에 일본 시찰 이후 안진호는 봉선사 강사로 있을 때 양주 군청으로부터 사료수집 공문을 받자 당시 주지 홍월초에게 묘안을 제출하게 된다. 즉 안진호는 산림을 몇 정보라도 회복하자면 이번 기회를 잃지 말고 본말사지를 편집하면서, 봉선사의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특히 왕실로부터 사패(賜牌)를 받았다는 문구를 기입한 후 당국에 운동해 보자는 의견을 냈던 것이다.

봉선사 본말사의 사료수집과 산림 회복이라는 목적이 결합된 봉선사지 편찬 작업은 홍월초의 역사의식과 안진호의 헌신적 자료조사 덕택으로 1927년 8월 15일에 간행될 수 있었다.

그리고 봉선사가 소망하던 바대로 1927년 5월 드디어 산림 9정보를 얻게 되었다. 봉선사가 산림을 확보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던 것은 대웅전 상량에서 발견되었다는 고기(古記) 3통, 즉 〈봉선사법당중수기〉 〈봉선사중수기〉 〈대웅전중수기〉 등의 존재다.

이는 또 다른 역사 만들기라 할 수 있다. 우선 이 3통의 문서에는 간기(刊記)가 없다는 것과 대웅전 상량에서 3통의 성격이 다른 문서가 동시에 고스란히 나온다는 것도 의심스러운 점이다. 이는 1914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조사한 봉선사의 고문서 〈운악산봉선사법당중수기1751)와 〈운악산봉선사청풍루중수기1845)를 비교하면 더욱 명확해진다. 이 〈운악산봉선사법당중수기〉는 ‘건륭 16년 신미 4월 무위병납(無爲病衲) 월화상훈(月華霜勳) 근지(謹識)’로 기록되어 있는바, 1751년(영조 27) 4월의 월화상훈이 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안진호의 《봉선본말사지》에는 〈봉선사법당중수기〉라는 이름으로 ‘건륭14년 기사 4월 일 안동(安東) 권황(權) 찬(撰)’으로 되어 있다. 같은 법당중수를 2년 만에 다시 한다는 것은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다. 둘 중에 하나는 문제가 있는 것임에 분명하다. 봉선본말사지에 실린 법당중수기의 찬자는 사지에서조차 권쇠(權衰)와 권황 등으로 달리 쓰이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동시에 〈봉선사법당중수기〉의 본문에는 특히 ‘실전조자복지구기(實前朝資福之舊基)’에 원형의 강조점을 찍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안진호와 홍월초가 목적하고자 했던 왕실로부터 사패 받은 문구의 삽입이라 하겠다.

그리고 안진호는 《봉선본말사지》에서 ‘건륭16년 신미 4월 무위병납 월화상훈’이라는 기사가 있으나 자획이 박락되었기에 이를 생략한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이를 ‘방적당 중건(放跡堂 重建)’ 조에 적음으로써 ‘방적당 중수기’로 보이도록 처리하였다. 그러면서 〈운악산봉선사청풍루중수기1845)는 그대로 싣고 있다.
이는 1913년 이후 사찰림 확보 차원에서 진행된 역사 만들기로 봉선사의 창건연대를 고려 광종 때 운악사로 만들기 위한 고육책이었음 보여준다.

한편 권상로의 《한국사찰전서》의 봉선사 조에는 자료로 김수온의 〈봉선사기(奉先寺記)〉와 강희맹의 〈봉선사종명(奉先寺鐘銘) 월성경의(月城敬義)가 기록한 〈봉선사중수기〉와 1939년 석전영호가 찬한 〈운악산봉선사기실비(雲岳山奉先寺記實碑)〉를 싣고 있다. 그리고 안진호가 편찬한 《봉선본말사지》의 기록을 따라 고려 광종 20년 법인 탄문이 개산하고, 조선 예종 원년에 정희왕후가 세조를 위하여 중창한 것으로 적고 있다. 봉선사에서 발견되었다는 고기(古記) 3통 가운데 하나인 월성경의가 기록한 〈봉선사중수기〉와 고려 때 탄문이 개산했다는 안진호의 봉선사 연혁을 온전히 반영하고 있다.

안진호의 사찰조사 자료는 어떤 형태로든 권상로에게 수용되어 반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점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권상로는 전국의 개개 사찰에 대하여 《동국여지승람·범우고·가람고 등에서 발췌한 자료를 기초로 하였고, 안진호는 본산별로 사지를 정리하면서 보다 다양한 고기록 및 구전 자료 등을 수집한 것이었다.

6. 나오며

안진호를 간단하게 말한다면 근대 불교계를 대표하는 강백이자 만상회를 통한 불교서적의 편저자이자 사지 편찬의 대가라는 점이다. 안진호는 일제강점기 당대를 대표하는 불교계 강사로 널리 알려졌던 인물이다. 1932년 당시 대표적인 강사와 학인들로 본사 주지들에게 홀대받는 인물로 장안사 강용선(姜龍船), 동화사 동명(東溟)·동수(東秀)·정태(正泰) 그리고 봉선사 안진호 및 용주사 양영복(梁永福)·양응찬(梁應讚)·손계조(孫啓照) 등을 꼽고 있기도 하다. 안진호는 일제강점기 예천포교당과 용문사를 비롯하여 봉선사, 고운사, 백양사, 상원사 등지에서 강백으로 이름을 떨쳤다. 또한 강사를 역임하면서 해당 본말사의 사지를 편찬하는 임무를 부여받음으로써 일제강점기 불교계 역사서술의 커다란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 되었다.

사지(寺誌)는 사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찰의 역사를 종합한 ‘사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사찰의 역사 문화적 정체성을 확보하고 그에 근거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유수한 사찰에서 사지 편찬을 목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당대 기록에 대한 욕구는 있어 왔다. 그것이 보다 더 절박한 상황과 목적이 있다면 그 기록의 정당성은 더욱 확장되는 것일 것이다. 일제강점기는 역사적 기록에 대한 욕구가 다른 어떤 시대보다 강할 수밖에 없었다. 외세에 의해 나라가 강탈당한 상황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애국지사들은 국외에서 보다 적극적인 역사연구와 역사서의 간행을 염원하였고 그 목적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것은 단순한 역사저술과 역사서 간행이 아니라 민족혼을 되살리는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신채호·박은식으로 대표되는 인물이 그들이었다.

불교계의 역사편찬은 사찰을 중심으로 하는 사지 편찬의 전통이 있어왔고 조선시대에도 상당한 사지가 편찬되었다. 더욱이 가파른 근현대를 지나온 우리의 처지에서 기록의 소중함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950년 6·25전쟁으로 불탄 봉선사와 금강산의 건봉사와 유점사를 비롯한 사찰들은 일제강점기에 편찬 간행된 《봉선본말사지》와 《유점사본말사지》 및 《건봉사 사적》의 역사적 중요성을 웅변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사지 편찬과 만상회를 통한 불서 간행으로 불교문화사에서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던 안진호는 1945년 해방 뒤 출판사 이름을 법륜사로 바꾸고 성북동으로 옮겨 출판사업을 계속하였다. 1920~1930년대 열정적인 답사와 저술 그리고 강백으로 후진 지도를 했던 시대적 열정에 비해 해방 후 혼란과 전쟁 그리고 대처 분쟁으로 인한 불교계의 내분은 안진호의 역할과 활동을 제약하는 것이었다. 육체적 쇠락과 비례하며 안진호의 저작 활동과 불서 간행도 그리 활발하지 못한 채 1965년 2월 21일(음력 1월 20일) 사가인 만상암에서 입적하였다. 양주 불암산의 불암사 부도바위에 있는 안진호 마애부도에는 1965년 2월 22일 열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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