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 개화를 향해 달려간 비운의 승려

1. 이동인 자료 찾기

한국 근대불교의 전개 과정에서 이동인(李東仁, 1849~1881?)은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근대사회의 격동기였던 1877년 무렵 어느 날 별안간 등장하였다가 1881년 갑자기 사라졌다. 불과 4년간의 짧은 활동이었지만, 30대 중반 나이의 이동인은 근대불교의 형성과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지니고 있다. 역사소설가로 유명한 신봉승은 이 점에 착안하여 그의 일생을 다룬 소설 《이동인의 나라》(전 3권, 동방미디어, 2002)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동인의 높은 위상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 어느 해에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출가 승려였지만 소속 사찰도 분명하지 않다. 이처럼 어둠에 싸인 그의 생애는 결국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실종’으로 마무리돼 버렸다. 그런데도 근현대의 불교 인물을 탐구하는 이 자리에서 선뜻 이동인을 주제로 쓰겠다고 대답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헌신한 숭고한 가치를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이다. 이동인은 승려의 신분이었지만 불교계보다는 근대 정치와 외교의 일선에서 조선의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일본에 밀항하여 근대화의 항로에 순풍을 달고 있었던 일본의 근대문명을 국내의 개화파 인사들에게 전달하였고, 마침내 국왕 고종을 알현하여 근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지원으로 개화 운동을 열정적으로 실천하던 1881년 3월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면서 개화기의 ‘풍운아’는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남긴 자취는 근대사의 한 페이지에 뚜렷이 남아 있다. 이러한 가치를 다시 한 번 되새기려는 것이 이 글의 첫 번째 의도이다.

두 번째는 오늘을 계기로 이동인의 행장과 활동에 관한 자료를 발굴하겠다는 나 스스로와의 약속이다. 최근 우연한 기회에 이동인의 친필 편지 두 통을 발견하였다. 1997년에 출간된 경봉 스님의 《삼소굴 소식》에 원본과 내용이 실려 있다. 사실 ‘발견’이라 할 것도 없는 ‘열람’이지만, 그동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었다. 이동인의 출신 사찰과 일본에서의 활동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자료를 찾는 연구자의 기본 소임을 소홀히 하고 있었음을 자백한다.

지금까지 선학들의 노력으로 이동인에 관한 대체적인 윤곽은 살펴볼 수 있으나, 아직도 그가 2년 넘게 활동했던 일본에서의 행적은 많은 사실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이동인은 1879년 9월 일본에 건너가 교토(京都)의 동본원사(東本願寺)와 도쿄(東京)의 천초별원(淺草別院)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방문한 조선 관료를 안내하고, 많은 일본 인사들을 만났으며, 각종의 모임에 참가하는 등 다양한 활약을 펼쳤다. 이러한 과정이 모두 동본원사와 천초별원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신분을 감추기 위해 동본원사에서 정토진종의 승려로 출가하여 계를 받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동본원사의 도움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동본원사와 천초별원에는 그에 관한 기록과 자료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동인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린 자료가 오쿠무라 엔신(奧村圓心, 1843~1913)의 《조선국포교일지(朝鮮國布敎日誌)》인데, 이 자료 역시 1970년에 동본원사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그러므로 동본원사 등의 기록물을 꼼꼼히 탐색한다면, 이동인에 관한 새로운 자료를 발굴할 수 있을 듯하다. 열 일 마다하고 당장 시작해야 할 일이지만,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오늘을 계기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는다.

2. 개화사상의 형성과 이동인

이동인이 역사의 무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유대치와 김옥균 등의 개화사상가들과 만나면서부터이다. 잘 알다시피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은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한 근대화의 상징적 인물이다. 유대치(劉大致, 1831∼?)는 김옥균을 비롯한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개화사상가들을 이끌었던 스승과도 같은 존재이다. 이들과의 만남에서 이동인은 출가승 신분이었지만 근대화의 당위성을 깨달았고, 비로소 근대화의 실천에 헌신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동인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개화사상의 의미와 개화사상가들의 활동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개화사상은 한국근대사의 새벽을 연 새로운 사조였다. ‘개화(開化)’라는 용어는 《주역》에서 비롯되었다. 즉 “사물을 열어서 그 이치를 탐구해 일을 이루고, 백성을 교화시켜서 아름다운 풍습을 만든다(開物成務, 化民成俗)”는 사상이다. 1873년 이후 일본에서 ‘문명개화’라는 말이 크게 유행하였고, 19세기 중엽 양반사회의 부정과 유학적 지배이념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움직임으로서 수용되었다. 개화사상의 선구자는 박규수(朴珪壽, 1807~1877)와 강위(姜瑋, 1820~1884), 오경석(吳慶錫, 1831∼1879) 등이다. 박규수는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당시 온 나라가 개항을 반대하였지만, 개항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사람이다. 개항만이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면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선진기술을 수용해야 하며 국가 간의 교역을 통해 부국(富國)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근대화를 위해 무엇보다도 젊은 세대들의 역할을 강조하였고, 그들의 교육과 계몽에 힘썼다.

강위는 시문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었으나 민란을 겪으면서 현실 개혁에 참여하였다. 박규수의 추천으로 강화도조약 체결 과정에 참여하여 개항을 관철시켰다. 1880년에는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개화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였다.

오경석은 중인 출신 역관으로, 일찍부터 중국을 왕래하며 개화문명의 힘과 가치를 깨달았다. 그는 중국에서 《해국도지(海國圖志)》 《영환지략(瀛環志略)》 《박물신편(博物新編)》 등 세계 각국의 지리와 역사, 문물, 과학기술 등에 관한 서책을 들여와 개화사상 보급에 힘을 쏟았다. 특히 절친한 친구였던 유대치와 함께 풍전등화 같은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며 언젠가는 개화를 위한 일대 혁신을 일으켜야 한다고 공감하였다.

이러한 개화사상의 선구자들은 조선의 개혁을 위해서는 양반 자제들에게 혁신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양반들 중에서도 기성세대가 아니라 젊고 진취적인 인재들이 그 대상이었다. 이들을 규합하는 과제는 박규수의 몫이었다. 1870년 무렵 박규수는 자신의 사랑방에서 김옥균,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박영교(朴泳敎), 박영효(朴泳孝), 김윤식(金允植) 등 엘리트들을 본격적으로 교화하기 시작하였다. 개화사상의 실천에 앞장섰던 박영효는 개화사상을 “박규수 집 사랑채에서 나왔다.”라고 증언하였다.
김옥균 등은 개화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1874년 무렵 개화당(開化黨)을 결성하였다.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시작하여 박영효의 집, 탑골 승방[普門寺], 화계사(華溪寺)로 이어진 공부방이 이제 조선의 근대화를 지향하는 어엿한 정치적 당파로 성장한 것이다. 대략 50명 정도로 추산되는 개화당 인사들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정치와 외교, 교육 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였다.

1877년 김옥균 등에게 개화사상을 전파하던 박규수가 사망하자 그 선도 역할은 유대치에게 돌아갔다. 유대치는 오경석과 박규수 등이 외교 활동의 전면에서 개화 활동을 펼친 반면, 재야에서 개화사상을 선양하는 일을 맡았다.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는 별명이 말해 주듯, 그의 활동은 막후에서 개화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유대치는 의관(醫官)으로서 청계천에 의원을 운영하였다. 이곳에 개화를 꿈꾸는 젊은 인사들이 드나들었고, 그는 오경석의 지원을 받아 각종의 신서적과 문물을 전파하였다. 바로 이 무렵에 이동인이 등장한다. 구체적인 정황은 전하지 않으나 출가 승려로서 남다른 개혁 의지를 지녔던 이동인은 유대치를 만나 불교사상을 가르치고, 개화사상을 배우면서 김옥균 등의 개화당 인사들과 뜻을 함께하였다.

개화당의 결성 목적은 자주적 근대국가의 성립에 있었다. 이를 위해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 개화사상을 실천에 옮겼지만, 불과 3일 만에 실패하였다. 갑신정변의 실패와 함께 개화사상도 몰락한다. 이로 말미암아 19세기 말 열강의 침탈에 맞서 정세를 올바르게 판단하고 주체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인재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결국 조선의 근대화는 한동안 유예될 수밖에 없었다.

3. 이동인의 개화 실천 운동

1) 국내에서의 활동

개화파는 일본을 모델로 삼아 근대화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서구의 사상과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근대사회로 발전하고 있었다. 일본을 통해 ‘근대’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였고, 그 구체적 실천 방안이 조선에 들어온 일본불교 종파와의 접촉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동인이 비로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이동인은 부산 출신으로 통도사에서 출가하여 법명을 기인(琪仁), 법호를 서명(西明)이라고 하였다.

1877년 무렵 이동인은 서울 화계사 삼성암(三聖庵)에 머물고 있었다. 이곳을 기반으로 개화파들에게 불교사상을 전수하고, 그들로부터 개화사상을 습득하였다. 훗날 개화운동을 이끌었던 김옥균, 박영효, 오세창, 서재필 등의 진술에 한결같이 등장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의 회고담에는 이동인의 등장과 활동에 관한 정확한 시점은 보이지 않는다. 이동인의 활동 시기를 정확히 전하는 첫 기록은 1878년 6월 2일 정토진종 본원사(本願寺)의 부산별원 방문 사실이다.

일본불교 종파가 공식적으로 조선에 포교소를 개원한 것은 1877년 10월의 부산별원이 처음이었다. 책임자는 오쿠무라 엔신으로 부산의 일본 영사관 관사에서 포교를 개시하였다. 오쿠무라는 이후 1897년까지 20년간 일본불교의 최초 포교사로서 한국 근대불교의 전개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당시의 활동을 《조선국포교일지》와 《조선개교 오십년지》 등에 상세히 남겼고, 이를 통해 개화기 불교의 현실과 한일 근대사의 다양한 모습들을 살필 수 있다.

《조선국포교일지》의 1878년 6월 2일 기록에 이동인이 처음 등장한다. “경기도 삼성암의 승려가 찾아와 하루 종일 정토진종의 교리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동인은 처음에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출가 승려로서 일본불교에 관해 문의하였고, 석 달이 지난 9월 15일에 다시 찾아가 3일 동안 머물며 역시 불교에 관한 이야기만 나누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사실 불교가 아니라 일본의 근대문명에 있었다. 만남 초기에는 불교 이야기를 통해 접근하였지만, 친숙해진 이후에는 “항상 시사를 말하고 국제 간의 정세를 설명하면서도 불교에 관해서는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라고 한다(《조선개교오십년지》 한국근현대불교자료전집 제62권, 민족사, 1996. p.137).

당시 이동인은 30세 전후로 일본의 신문물과 사상을 익히기 위해 스스로 별원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동인이 부산별원을 찾아가기까지에는 개화파의 치밀한 계획과 의도가 반영된 듯하다. 개화파의 일본 교섭은 유대치의 계획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유대치에게서 개화사상을 익힌 이동인은 그를 통해 개화파의 리더였던 김옥균을 만났다. 개화파는 일본을 통해 근대화를 실현하기 위해 일본과의 접촉을 시도하였고, 그 방안이 출가 승려인 이동인으로 하여금 일본의 불교종단을 찾아가도록 한 것이다.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이동인과 오쿠무라의 만남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오쿠무라의 눈에 비친 이동인은 매우 특별한 인물이었고, 포교의 사명을 지닌 그는 오히려 자기가 먼저 한국인들에게 다가갈 일이었다. 즉 오쿠무라는 이동인을 한국 포교의 일선(一線)으로 삼고자 예우하였던 듯하다. 이동인은 불과 몇 차례의 만남만으로 신임을 얻었고, 그해 12월 11일에는 오쿠무라에게 간청하여 정박 중이던 일본 군함 비예함(比叡艦)을 관람하기도 하였다.

이동인과 오쿠무라의 만남은 1879년 초여름까지 계속되었다. 그해 4월 25일에는 일본의 초대 공사(公使)로 부임하던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1842~1917)를 만난다. 하나부사는 1877년 9월에 외무부의 대리공사(代理公使) 자격으로 조선에 들어와 개항장 개설 등의 업무를 담당한 일이 있었다. 2년 뒤인 1879년 4월 다시 입국하여 부산에서 29일까지 머물다 서울로 올라갔다. 바로 이 기간인 4월 25일 이동인은 오쿠무라의 알선으로 하나부사를 만난다. 당시 하나부사가 이동인과의 대화를 기록하여 〈동인문서(東仁聞書)〉라는 문건을 남겼고, 현재 일본 도쿄도립대학 도서관에 《화방문서(花房文書)》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이광린, 〈개화승 이동인에 관한 새 사료〉 《한국개화사의 제문제》 pp.2~15. 일조각, 1986).
이동인과 하나부사의 만남은 두 시간 남짓 진행되었다. 내용을 대략 살펴보자.

조선은 빈약(貧弱)하지만 우국지사가 여럿 있다. 그 첫 번째 인물이 김옥균이고, 오경석·강위·유대치·박영효 등이다. 나라를 걱정하는 말을 꺼낼 수도 없고, 입을 열면 화를 당한다. 조선에서 큰일을 도모하려면 세도가의 힘이 필요하다. 조선의 무역은 대부분 서양과 이루어지는데, 서양인은 타인이다. 그러나 일본인은 형제이므로 조선과 일본이 무역을 통해 이익을 도모해야 한다. 조선의 풍부한 광산과 전야(田野)를 일본과 함께 개발해야 한다. 조선의 상업은 육의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일본이 자금을 투자하여 선박과 기기를 구입하면 개항장 등의 전국을 왕래하면서 상업 유통을 활발히 할 수 있다. 조선의 근대적 개혁을 위해서는 일본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 조선인 수십 명을 선발하여 일본의 육해군, 외무, 회계 등의 제도를 배워야 하는데 일본이 이를 지원할 의사가 있는가를 묻는다. 이에 대해 하나부사는 자질을 가진 인사라면 일본 입국을 허락하고, 계획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상의 대화를 통해 이동인의 풍모를 엿볼 수 있다. 특히 대화 기록의 첫머리에 하나부사는 이동인을 “옷차림과 두발 모두 고위관리나 서생(書生)과 같고 말하는 품이 우리와 달랐다.”라고 평가한 점이 눈길을 끈다. 당시 30세 전후의 이동인은 출가 승려였는데 승려의 당연한 모습인 삭발이 아니라 서생의 모습이었다는 점이다. 이 글의 앞부분에 실은 이동인의 사진은 1879년에서 1881년 사이에 일본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삭발이 아니라 짧지만 머리를 기른 모습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동인이 처음 유대치를 만난 것은 불교사상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이후 개화당 인사들과 동지의 인연을 함께 하면서 본격적으로 개화운동에 뛰어들었다. 삭발이 아닌 서생들처럼 머리를 기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보인다. 즉 위의 기록에서처럼 나라를 걱정하는 말조차도 꺼내기 어려운 실정에서 삭발한 승려의 모습으로는 개화운동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동인은 하나부사에게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도움을 요청하였다. 조선의 자원을 개발하고, 상업과 무역을 진흥시키기 위해 일본의 지원 여부를 묻는다. 끝으로 조선의 개화 인사를 초빙하여 일본의 근대문물을 체득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달라고 한다. 언뜻 보면 참으로 경우에 어긋나는 이야기이다.

낯선 외국인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솔직하게 조선의 현실을 토로하고 자원 개발과 무역, 나아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던 일본 방문까지 청탁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무례함이나 결례보다는 나라의 근대화를 위한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경략가(經略家)의 모습을 먼저 발견한다. 이보다 앞서 6개월 전쯤에 정토진종 부산별원을 찾아가 오쿠무라에게 시사와 국제정세를 말하고, 군함을 견학시켜 달라던 모습 그대로이다. 당시 이동인은 아무런 관직이나 경력이 없는 일개 승려일 뿐이었지만, 오쿠무라와 하나부사는 공통적으로 그의 풍모와 의욕을 높이 평가하면서 기록을 남겼던 것이다.

2) 일본에서의 활동

하나부사와의 면담 이후 두 달여 만에 이동인은 오쿠무라를 다시 찾아와 일본으로 유학을 청탁하였다. 개화파의 일본 방문은 원래 김옥균이 직접 할 예정이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동인이 대체 인물로 발탁된 것이다. 두 달가량의 공백은 이러한 계획의 수립 과정이라 짐작된다.

1879년 9월 상순 이동인은 오쿠무라의 도움으로 마침내 일본의 화물선을 타고 밀항을 감행한다. 교토의 동본원사에 도착한 그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이름을 ‘조야계윤(朝野繼允)’이라는 일본식으로 바꿨다. 이후 ‘조야동인(朝野東仁)’으로 쓰기도 하고, 동경에 있을 때는 ‘조야각지(朝野覺遲)’라고도 썼다. 성(姓)으로 사용한 ‘조야(朝野)’는 ‘조선의 야인’이라는 뜻으로 당시 본인이 처한 시대적 환경을 표현한 듯하다.

동본원사에서 이동인은 일본말을 공부하고, 정세(政勢)와 문화를 익히는 데 애썼다. 이 무렵에 이동인이 오쿠무라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일 경성의 노옹(老翁)께서 찾으려고 하는 화물을 무사히 출관(出館)할 수 있겠습니까? 이후부터 경성에서 오는 소식을 듣는 대로 곧바로 저에게 적어 보내 주시기를 천만번 간절히 바랍니다. 11월 8일 조야각지(朝野覺遲) 재배(再拜) 오쿠무라 엔신 전(殿)

이 자료는 통도사 경봉(鏡峰, 1892~1982) 스님의 유품으로 1997년에 출간된 《삼소굴 소식》(역주 석명정, 영축총림 통도사 극락선원, pp.337~338)에 원본 사진까지 소개되었으나, 그동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필자도 최근에야 이 편지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이 편지에서 지칭하는 ‘경성의 노옹’은 유대치를 말한다. 11월 8일은 1879년이라 추정된다. 그가 일본에서 활동한 시기는 1879년 9월부터 1880년 12월까지이다. 즉 편지를 보낸 11월 8일은 1879년과 1880년 둘 중 하나인데 1880년 11월 8일에 그는 원산에 귀국해 있었다. ‘조야각지’는 ‘조선의 야인으로 깨달음이 늦다’라는 뜻의 겸손한 표현이다.

 이동인이 일본에서 고국의 개화 인사들에게 근대문명에 관한 다양한 서책과 사진 등을 보낸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위에서 말하는 화물은 필시 이러한 물건들이었을 것이다. 이 편지를 통해 밀항 초기의 활동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삼소굴 소식》에는 위의 편지와 함께 1880년 6월 20일에 보낸 또 다른 편지가 있다. 잠시 뒤에 살펴볼 것이다.

이동인은 1880년 4월 정토진종에 출가하여 정식으로 수계하였다. 일본 승려의 신분으로 개화운동을 원활히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이후부터 그는 본격적인 개화운동을 실천하였다. 우선 발전하는 일본의 모습을 관찰하고 국내의 김옥균 등에게 신서적과 근대 문물의 실상을 전했다. 또한 정치·사회의 유력자와 교제하며 일본의 정책, 정세, 제도 등을 폭넓게 탐구하였다. 그 구체적 활동 가운데 하나가 흥아회(興亞會) 참석이었다. 흥아회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아시아의 흥성을 모색하는 사회단체로서 1880년 3월 동경에서 창립되었다. 흥아회에서는 매월 《흥아회보고(興亞會報告)》라는 기관지를 발간하였고, 1880년 4월호에 이동인은 〈흥아회에 참석하여(興亞會 參)〉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이 글에는 필자를 “동파본원사(東派本願寺) 유학생 모(謀)”라고 하여 본명은 없으나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이동인이 틀림없다고 한다. 글은 순 한문체로 약 690자 정도의 한 페이지 분량이다.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인이 나라를 다스린다 해도 제도를 시대에 맞게 개혁해야 한다. 오늘날 아시아가 유럽에 곤욕을 받는 이유는 옛 제도에 안주하여 새로운 개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은 발달한 상공업과 함포 등을 내세워 인도 등의 아시아를 능멸하고 있다. 아시아인들은 근대기술을 수용하여 미국의 조지 워싱턴이 영국의 간섭을 배격하고 독립을 쟁취하였듯이 아시아 7억의 인구도 분발해야 한다.’ 

이와 같이 이동인은 아시아인이 힘을 모아 근대문명을 발전시키고 자주적 발전을 도모할 것을 역설하였다. 흥아회는 한·중·일 삼국이 힘을 모아 구미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봉쇄하자는 목표를 내세웠으나, 그 이면에는 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일본의 야욕이 숨어 있었다. 즉 창립 과정에 황실의 하사금이 있었고, 내무장관도 참여하는 등 정부의 국책 단체였다. 일본에 온 지 열 달 만인 당시의 이동인으로서는 이러한 은밀한 배경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그의 성품으로 볼 때, 흥아회가 내세운 아시아 공영(共榮)의 모토는 큰 매력으로 보였던 것 같다. 이후 1880년 9월 5일과 11월 18일의 월례회에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어 꾸준히 동참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881년 신사유람단 일원이었던 강위도 이듬해에 다시 일본을 방문하여 흥아회에 참석하였다. 이처럼 흥아회에 대한 포장된 인식은 당시의 개화 인사들이 지녔던 시대적 한계라고 보인다.

흥아회 활동 등으로 인맥을 넓혀가던 이동인은 당시 일본 사회의 거물이었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를 만나기도 하였다. 후쿠자와는 오늘날에도 일본인이 근대의 위인으로 손꼽는 인물로서 현재 사용하고 있는 일본 지폐 만 엔짜리에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그는 계몽가이자 교육자로서 일본의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제창하여 제국주의 침략 이론을 선동하고 한국을 병합하려는 야심을 지녔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의 배후에 참여하여 정변에 사용되었던 총칼과 화약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두 사람의 만남 과정과 대화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근대화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일본의 도움을 강조하는 이동인과 조선 지배의 야욕을 지닌 후쿠자와의 대화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이동인의 행보는 일본인과의 만남에 국한되지 않았다. 1880년 5월 12일 그는 주일 영국공사관 서기관인 어니스트 사토(Ernest Satow, 1843~1929)를 찾아가 영국과의 수교 방안을 모색하였다. 사토는 영국의 극동 관계 전문가이다. 1862년에 일본에 건너가 1883년까지 주일영국공사를 지냈다. 이보다 앞선 1878년 사토는 제주도와 부산에 다녀간 일이 있었다. 이동인은 사토를 통해 조선에서의 영국의 역할을 강조하였고, 사토는 그를 통해 한국어를 익히고자 하였다. 사토는 일기 형식으로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 이동인과의 만남을 자신의 상관인 당시 일본 고베(神戶) 주재 영국 공사 애스턴(W.G. Aston)에게 보냈다.

 애스턴은 훗날 초대 주한 영국 총영사를 역임하고 1884년 갑신정변 때 우정국 현장에 있었던 인물이다. 이 기록은 현재 영국 공문서보관소(Public Record Office)에 〈사토 문서(Satow Papers)〉라는 이름으로 소장되어 있다. 이광린 교수가 〈개화승 이동인의 재일 활동〉(《신동아》 1981년 5월호)이라는 제목으로 일부를 번역·소개하였다.

5월 이후 두 사람의 만남은 계속되어 7월부터 9월 초까지 한 달 이상을 거의 매일 만났다. 이동인은 조선의 자원개발 필요성과 국제정세를 피력하였다. 사토는 유럽의 근대 문물에 관한 사진 자료 등을 제공하고, 몇몇 유럽인을 소개하였다. 이보다 조금 앞선 6월 20일 이동인이 오쿠무라에게 보낸 편지가 전한다.

뜻밖에도 6월 14일 자로 보내신 혜서(惠書)를 6일 만에 받아 읽게 되니 그 기쁨은 목마를 때에 미음 먹는 것과 시장할 때에 맛좋은 음식이 생긴 것보다 더 좋습니다. 곧 달려가서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대개 움직거림은 반드시 사람을 쓸데없이 마음만 쓰이게 할 것 같아서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서로 이야기하고 의논할 일은 산과 같고 바다와 같이 많은데 어느 날에나 동녘(일본)으로 건너오시겠소. 느릿느릿한 세월 같지만 일각(一刻)이 삼추(三秋) 같아서 이마에 손을 얹고 목을 빼고 기다리오니 양해하소서. 번거로워하실까 봐서 이만 줄입니다.
6월 20일. 동경 천초(淺草) 추방정(陬訪町) 6번지 조야학인(朝野學人) 삼가 드림. 오꾸무라 선생께.
—《삼소굴 소식》 pp.339~340.

편지의 내용은 별다른 주제가 없는 안부 인사 정도이다. 사실 비밀리에 개화 운동을 펼치던 이동인의 입장에서 편지를 통해 진솔하게 구체적 일을 의논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서로 이야기하고 의논할 일이 산과 바다처럼 많다’는 표현에서 오쿠무라와의 긴밀한 협조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이 편지와 앞서 말한 1879년 11월의 편지는 모두 경봉 스님의 유품으로 현재는 통도사 극락선원의 명정(明正) 스님이 소장하고 있다. 편지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이 편지를 경봉 스님이 소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이동인에 관한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이동인의 출신 사찰이 어디인가의 문제인데, 논자에 따라 통도사와 범어사로 나뉜다.
경봉 스님은 1907년 통도사의 성해(聖海)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으므로 이동인의 시대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위의 편지는 성해 스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 짐작된다. 구체적인 전수 과정은 알 수 없으나 편지를 받은 오쿠무라는 이동인의 본 절인 통도사에 전해 주었고, 성해−경봉−명정 스님으로 이어지며 현존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오쿠무라의 일지에 적혀 있듯이 이동인은 자신을 통도사 승려라고 소개하였고, 결국 이 말은 사실이었다.

1880년 8월 11일 이동인은 수신사로 동경에 온 김홍집(金弘集)을 만나 외교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수신사 일행이 머무는 처소가 이동인이 있던 천초별원이었다. 우연한 결과가 아니라 여기에는 개화파의 어떤 의도와 계획이 있었던 것 같다. 즉 이동인과 김홍집을 연결시켜 개화의 일정을 앞당기려는 구체적 계획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특히 일본 측이 요구하는 인천항의 개항 문제가 주요 의제 중의 하나였다. 당시 이동인은 통역을 담당하였는데 김홍집은 유창하게 일본말을 구사하고 남다른 자질을 지닌 그의 모습에 매료되어 ‘쾌남아(快男兒)’라고 칭송하였다. 1880년 9월 8일 이동인은 수신사 활동을 마치고 귀국하는 김홍집과 함께 돌아왔다.

1880년 9월 28일 이동인은 일본에 밀항한 지 15개월 만에 원산으로 귀국하였다. 부산이 아니라 원산으로 온 것은 당시 오쿠무라 엔신이 정토진종의 원산별원을 개원하기 위해 이곳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이동인은 도착 즉시 오쿠무라를 만난 후 다음 날 서울로 향한다. 그런데 며칠 뒤 10월 4일 이곳에서 유대치와 오쿠무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앞에서 말했듯이 개화파의 일본 교섭은 유대치의 계획에서 시작되었다. 즉 유대치는 이동인과 오쿠무라의 만남을 기획하였던 장본인인데, 그동안 철저히 장막 뒤의 그림자로 남아 있었다. 오쿠무라로서는 1년 전 이동인을 만나면서부터 익히 유대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유대치는 탁정식과 김옥균의 소개 편지까지 지참하고 있었다.

이후 개화파와 오쿠무라의 긴밀한 교류는 유대치가 전담하였다. 첫 만남 이후 한 달 사이에 유대치는 십여 차례나 오쿠무라를 만났다. 유대치가 오쿠무라를 만난 직접적인 이유는 이동인, 탁정식 등의 도일(渡日) 경비를 마련하는 데 있었고, 나아가 개화파의 자금을 조성하는 데 큰 목적이 있었다. 이를 위해 오쿠무라에게서 상당한 금액을 차입하고, 그의 도움으로 일본과의 사무역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유대치는 오쿠무라에게 우골을 보내고, 회화·당목을 받았으며 또 월 이자를 주는 등 두 사람의 사이에 일정한 물건 거래와 금전 관계가 있었다(한석희 《일제의 종교침략사》 김승태 옮김, 기독교문사, 1990, p.45).

이후 이동인은 서울에 도착하여 김홍집을 만났다. 김홍집은 그를 민영익(閔泳翊, 1860∼1914)에게 추천하였다.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조카로 당대의 세도가였지만, 일찍이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개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민영익은 이동인의 범상한 자질과 국제정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확인하고 그를 국왕 고종에게 안내하였다. 조선 말 천민 신분의 승려 출신 이동인은 마침내 국왕을 알현하기에 이르렀다.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고종에게 근대문명의 실상을 설명하고,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조선의 앞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열심히 피력하는 그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고종 역시 평상시에 김옥균 등을 가까이 두고 개화문물의 실체를 청해 듣는 등 조선의 변화를 꾀하고 있었다. 고종은 이동인을 통해 근대 일본의 발전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국제정세의 변화를 전해 들었다.

이동인이 국왕을 만나기까지는 개화파의 치밀한 기획이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개화파는 조선의 안위를 위하여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중국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고종으로 하여금 이동인을 일본 주재 청국 공사 하여장(何如璋, 1838~1891)을 만나는 밀사로 삼도록 하였다. 고종은 다시 일본으로 떠나는 그에게 밀서와 친필로 서명한 여행허가서를 건네주었다.

1880년 10월 15일 이동인은 다시 원산에 도착하여 6일간 마에다 겐키치(前田獻吉) 일본 총영사의 관사에서 유대치와 긴한 밀담을 나눴다. 10월 23일에는 서울에서 찾아온 밀사를 만나 최근의 정황을 들었다. 24일, 30일에는 마에다 총영사, 오쿠무라, 유대치 등과 함께 향후의 계획을 논하였다. 아마도 인천항 개항을 둘러싼 개화파의 추진과 수구파의 반대 등에 대한 대처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던 것 같다.

11월 5일 이동인은 탁정식과 함께 일본의 천성함(天城艦)을 타고 원산을 출발하였다. 11월 15일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여행 가방을 든 채로 사토(Satow)를 찾았고, 그의 관저에서 머물렀다. 이동인은 사토에게 조선이 러시아의 침공 위협에 직면해 있으니 영국이 서둘러 병력을 이끌고 조선에 가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당시 관리들은 독일의 협조를 기대하지만, 자신은 영국의 도움이 한층 더 적절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사토가 이동인과의 만남을 지속한 이유는 무엇보다 한국어 공부에 목적이 있었다. 전체 28건의 서신 기록 가운데 한국어 공부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만남이 지속되던 7월 19일의 편지에서는 이동인을 영국과 조선과의 외교를 진행하는 데 대리인(agent)으로 삼자고 하였다. 만남이 깊어지면서 이동인의 자질과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단순한 한국어 선생이 아니라 외교 관계의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다.

11월 18일 이동인은 동경에서 열린 흥아회 월례회에 참석하고, 19~20일에는 유대치와 함께 청국 공사 하여장을 찾아갔다. 이동인은 국왕의 밀서를 전달하며 미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중국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 무렵에 이동인은 한미수호조약의 조약문 초안을 작성하였다. 1882년 1월에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이 중국의 이홍장(李鴻章)을 만나 미국과 수교를 요청하며 조약문을 건넸는데, 이 초안을 이동인이 작성한 것이다.

3) 이동인의 실종

이동인은 1880년 12월 1일 마지막으로 사토를 만나고, 12월 18일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부산에는 유대치가 마중을 나와 대원군 일파가 이동인에게 위해를 가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는 개의치 않고 동래부를 찾아가 왕의 특사라며 내일 서울로 올라갈 가마를 준비하도록 시켰다. 12월 19일 서울로 가기 위해 동래부를 찾았다. 그러나 동래부사는 이동인을 의심하여 투옥해 버렸다. 유대치가 백방으로 노력하여 일주일 만에 방면되어 12월 27일 서울로 출발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이동인은 다시 고종을 알현하고 하여장을 만난 일 등을 상세히 보고하였다.

1881년 2월 25일 이동인은 통리기무아문의 참모관에 임명된다. 통리기무아문에서 신식 군대를 창설한 이후 무기와 군함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동인을 일본에 파견하여 그 구입에 관한 일을 맡겼다. 그가 당시 최고의 일본 전문가로 인정받았다는 증거이다.

불과 2년 전 승려의 신분으로 일본에 밀항한 그였지만, 이제는 당당한 조선의 관리로서 수시로 궁궐을 드나들며 세도가와 함께 국정을 논의하였다. 이동인은 3월 9일 일본으로 떠나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다. 누구도 정확한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가 머물고 있던 민영익의 집에 궁궐의 문기수(門旗手)가 찾아와 국왕의 부름이라고 데리고 나간 이후의 일이라고 한다. 누군가에 의해 암살되었음이 분명한데, 그 실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당시의 소문은 대개 대원군 등의 수구파에 의한 소행이라고 하였다. 이동인이 국왕의 밀사로 일본에 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대원군 세력들이 분노하고 그를 처치할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김옥균은 김홍집의 소행이라고 의심하였다. 김홍집은 수신사로 일본에 가서 이동인을 만나 그를 귀국시키고, 민영익에게 소개해 준 장본인이다. 그런데 이동인은 여러 차례 김홍집의 의견에 맞서, 그를 따르지 않고 민영익에게 밀착하고 있었다. 김홍집은 개화파 중에서도 온건 개화파로, 민영익·김옥균 등의 급진 개화파와는 국정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 특히 개화를 위해 중국의 역할을 중시하였으나, 이동인은 철저하게 일본 중심적이었다. 당시 김홍집의 참모였던 이조연(李祖淵, 1843~1884)은 이러한 이동인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무기와 군함 구입 등의 일은 일급의 국가기밀 사항이었으나, 이동인이 이를 공공연하게 발설하였다고 했다. 이동인이 사라진 직후의 일이므로 김옥균의 생각은 신빙성이 높다. 그러나 정확한 사실은 여전히 미궁으로 남았다.

1881년 3월 9일 이전에 이동인은 암살되었지만, 그에 관한 이야기는 사토의 편지에 여전히 계속되었다. 1881년 4월 28일 탁정식은 애스턴에게 이동인이 본국에서 수구파의 위협으로 생명이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으므로, 그를 구명하는 데 필요한 1, 2천 엔을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사토는 이때부터 탁정식을 통해 이동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탁정식은 강원도 백담사의 강사 출신으로 자는 몽성(夢聖), 법명은 각지(覺地)·무불(無佛)이었다. 화계사에서 김옥균을 만나 개화 운동가로 변신하였다. 1880년 5월 함께 일본에 들어와 이동인과 함께 다양한 개화 운동을 펼쳤다. 또한 1883년에는 차관 교섭차 일본을 방문한 김옥균을 수행하였으나, 1884년 2월 고베에서 병사하였다.

탁정식의 동경 여정 역시 오쿠무라의 알선으로 이루어졌다. 이동인은 사토에게 탁정식을 소개하고, 사토는 다시 탁정식을 애스턴에게 소개하여 한국어를 배우도록 하였다. 이 인연으로 사토는 이동인이 행방불명된 이후 탁정식을 통해 저간의 사정을 전해 들었다. 5월 3일 탁정식은 사토를 찾아와 이동인은 수구파의 위협을 피해 은신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6월 22일 두 사람은 다시 만났으나 탁정식은 이동인에 관해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고, 죽었을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사실 탁정식이 사토와 애스턴에게 했던 말은 대부분 거짓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이동인이 암살된 직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4월 초순에 일본의 부산 영사 곤도 모토스케(近藤眞鋤)에게 암살 배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 일이 있었다. 즉 고종은 배후가 대원군이라고 의심하지만, 김옥균은 김홍집 일파의 소행으로 짐작한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탁정식은 이동인의 사망을 알면서도 사토 등에게 ‘이동인은 수구파의 위협으로부터 피신하고 있다’며 그를 구명하기 위해 돈을 빌려 달라고 하였다.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겠지만, 여기에는 ‘수구파의 위협’ 운운하여 김홍집 관련설을 감추려는 의도도 보인다. 정확한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탁정식과 김홍집과의 관계에 대한 좀 더 세밀한 고찰이 필요할 듯하다.

8월 23일 사토는 이동인이 규슈(九州)의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했다는 소문을 듣는다. 이 소문이 사실이기를 바란다는 심정을 토로하며 그는 매우 흥미있는 사람이며, 목숨만 부지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자기 나라의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길 것이라는 말을 남긴다.

이동인이 일본에서의 2년 남짓 활동 중에서 가장 많이 만났던 인물이 사토이다. 즉 사토는 당시 이동인을 가장 잘 알고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인물이다. 사토는 한국어 공부를 위해 이동인을 계속 만났지만, 만남이 이어지면서 그를 한·영 관계의 대리인으로 지목할 만큼 중요한 존재로 인식하였다. 결국 이동인은 낯선 영국인의 말처럼 ‘자기 나라의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길 인물’이었으나 아쉽게도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말았다.

4. 이동인의 역사적 위상

이동인은 3년이 못 미치는 짧은 기간 동안 개화기 정치와 외교의 무대에서 활동하였다. 1878년 6월 그에 관한 첫 기록이 등장한 이후부터 1881년 3월까지 2년 9개월 동안 개화를 위해 헌신하였다.

이동인의 활동은 대체로 세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는 국내의 활동으로, 1877년 이전 유대치와 김옥균을 만나 개화사상을 체득하고, 1878년 6월 이후 개화의 모델이었던 일본을 배우기 위해 부산별원의 오쿠무라를 찾아간 시기이다. 오쿠무라에게 근대문명과 국제정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피력하고 일본의 역할을 요청한다. 또한 일본의 공사로 부임하는 하나부사를 만나 조선의 광업 개발과 상업 진흥을 위해 일본의 투자를 권하였다.

두 번째 시기는 일본에 밀항하여 교토 본원사에 머물던 1879년 9월부터 1880년 4월까지이다. 이 시기에 이동인은 일본말을 배우고 근대문명을 직접 체험하였다. 주요 임무는 국내의 개화파에게 근대문물을 전하고, 국제정세를 제공하는 일이었다.

세 번째는 1880년 4월 거주지를 도쿄로 옮겨 본격적으로 근대화 방안을 모색하고, 국내를 오가면서 구체적 실천을 감행한 시기이다. 흥아회에 자주 참석하여 아시아인의 결속을 강조하고, 후쿠자와 유키치와 같은 일본의 유력자를 만나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방안을 논의하였다. 또한 영국인 사토에게 러시아의 위협을 영국의 군사력으로 방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고종의 밀서를 지참하고 하여장을 만나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추진하였다.

이동인은 아시아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국제적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이동인을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의 안목과 열정에 감복하였다. 일본을 두 차례나 왕래하며 개화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던 그는 1881년 3월의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만다. 개화를 원치 않았던 수구 세력의 소행이었는지, 개화파 내의 갈등 때문이었는지 사실은 알 수 없으나, 그의 죽음은 우리 역사의 근대화를 정지시키는 불행한 사건이었다.

이렇게 이동인은 개화 격동기의 무대에서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30대 초반의 젊은 승려가 꿈꾸었던 ‘개화 세상’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3년 후 그가 없는 가운데 개화당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이제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었던 개화는 그 누구도 입에 담지 못하는 ‘짐승의 짓’으로 전락하였고, 외세의 무력에 의해 왜곡된 근대사가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

한상길 /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동국대 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박사. 저서로 《조선후기 불교와 寺刹契》 《월정사》 《근대 동아시아의 불교학》 《동아시아 불교의 근대적 변용〉 등이 있다. 논문으로 〈개화사상의 형성과 근대불교〉 〈개화기 일본불교의 전파와 한국불교〉 〈한국 근대불교의 형성과 일본, 일본불교〉 〈일본 근대불교의 한·중포교에 대한 연구〉 〈한국 근대불교의 대중화와 석문의범〉 〈한국 근대불교 연구와 ‘민족불교’의 모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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