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백성욱
(白性郁, 1897년~1981년)
1. 근대의 혼란과 불교 지식인

근대는 혼란의 시대다. 국가나 사회가 요동치니 그 속에 갇힌 개인도 방황했다. 방황 속에서 그들은 속절없이 침몰하기도 했다. 이제 나를 주재하는 건 내가 아니라 시대였다. 그렇다고 시대가 나를 책임지지도 않았다. 지식인들은 이런 혼란 속에서 자신이 걸어야 할 방향을 찾아 헤맸다. 그 방향이 집단적 가치에 기반했든 극히 개인적인 가치에 기반했든 관계없이 그들은 살려고 고투했다. 삶의 방향을 잡았다고 해서 삶이 그 방향대로 곧이곧대로 나아가는 건 또 아니었다. 시대가 길을 잃었기에 나의 길도 흐릿했다.

지식인들은 이런 때 혼란스러울 정도로 변심했고, 또한 변신했다. 시대에서 전망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변신은 생존 도구였다. 근대 한국에서 불교 승려는 특별한 상황에 있었다. 조선 말이나 대한제국 시기 그리고 일본강점기를 거치면서 승려는 개화하고 불교는 근대화되었다. 물론 그것의 정도나 방향은 다양했다. 전통 속에서 굳건히 생활한 사람도 있고, 유학을 통해서 개명한 세상을 만나 근대인이 된 이도 있었다. 한때 독립을 외치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자 식민지 정부 주변을 기웃거린 이도 있었고, 조선 승려들에게 일본 학도병 참가를 독려하다가 해방 후에는 민족의 중흥을 운위한 이도 있었다. 그들이 사는 법이었다.

이 글에서 필자는 근대 한국의 대표적인 승려 가운데 한 명인 백성욱(白性郁, 1897~1981)을 다룬다. 백성욱이 특별한 이유는 그가 당시로선 대단히 힘든 유럽 유학을 통해서 불교를 학습했고, 이후 교육과 수행뿐만 아니라 정부 관료로서 교육행정가로서 적극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불교계를 넘어서는 근대 지식이 있었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대단히 전통적인 입장에서 불교를 교육하고 이해했다. 백성욱은 김법린(金法麟, 1899~1964)과 비교하면 특징을 더욱 뚜렷이 파악할 수 있다.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백성욱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전 분야를 통틀어 최초기 유럽 유학생에 속하지만 오히려 대단히 전통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김법린은 서구 근대학문의 가치를 인정하고 불교학 방법론을 근대화하고자 했고, 서구문명을 수입하여 동양문명과 대화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문명의 출현을 기대했다. 이에 비해 백성욱은 전통적인 불교 이해를 강조했다. 물론 이때 근대적인 요소가 개입되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방향은 전통의 것을 개혁하고자 하는 쪽이 아니었다. 필자는 백성욱이 충분히 근대를 체험했지만 오히려 전통의 것에 더 침잠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근대화’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그는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그의 생애와 저술을 개략적으로 소개하여 백성욱이라는 인물 자체에 대해 이해를 높이고, 아울러 그의 문화적 보수성을 몇몇 텍스트를 통해 살펴보려 한다.

백성욱은 비교적 최근까지 생존했지만 그의 생애와 학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자료는 많지 않다. 들려오는 이야기는 많지만 그것을 실증할 만한 공개된 자료가 부족한 것이다. 그는 승려였고, 유럽 유학을 했고, 학자로서 학생을 가르쳤고, 교육행정가로 일했고, 정치가로 활동했다. 그런 까닭에 근대 학문의 세례를 비교적 일찍 받았지만 학문적 성취는 그리 크지 않다. 근대 한국불교의 상황을 고려하면 대단히 아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다.

2. 출가와 중앙학림

《백성욱박사문집》에 소개된 〈약력〉에 따르면 백성욱은 1897년 한성부 연화방(蓮花坊)에서 백윤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몇 가지 정황을 보면 일찌감치 부모님을 여읜 것으로 보인다. 연화방은 조선시대 서울의 행정구역으로 현재 창경궁의 남동 지역을 가리킨다.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원남동, 명륜동, 종로4가 등에 걸친다. 옛날 이곳에 연꽃 연못이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백성욱은 1901년부터 1903년까지 호동(壼洞)학교를 다녔는데, 호동은 현재 원남동에 해당한다. 이는 이곳 지형이 호리병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백성욱의 출생지나 학습지를 보면 백성욱은 서울의 한복판에서 나고 자랐다. 또한 그가 태어난 1897년은 한국 근대사에서 특별한 해이기도 하다. 이해 10월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선포되고 고종은 황제에 즉위한다. 수백 년간 중국에 정치적으로 종속됐던 조선은 이제 근대적 민족국가 건립을 위해서 일종의 독립을 시도했다. 1903년 호동학교 졸업 이후 백성욱의 행적은 자세하지 않다. 그의 〈약력〉에 따르면 1910년 출가 때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하지만 6년여 동안 그가 어느 곳에서 누구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는 알 수 없다.

1910년 7월 백성욱은 봉국사(奉國寺)에서 최하옹(崔荷翁, 생몰년 미상)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여기서 봉국사는 서울 정릉 소재 봉국사로 보인다. 백성욱의 은사 최하옹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크게 알려진 내용이 없다. 이후 백성욱이 출가 은사에 대해 언급한 경우도 거의 없다. 그의 〈약력〉에 따르면 백성욱은 출가 이후 1911년부터 전국 사찰에 설치된 불교전문강원에서 불교경전을 학습했다. 역시 어느 절에서 어떤 공부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후 그가 불교중앙학림에 입학했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 이 기간 불교적 소양을 갖출 만한 학습을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917년 백성욱은 경성 불교중앙학림에 입학했다. 불교중앙학림은 명진학교(1906)→불교사범학교(1910)→불교고등강숙(1914)→불교중앙학림(1915)→불교전수학교(1928)→중앙불교전문학교(1930)→혜화전문학교(1940)→동국대학교(1946)로 이어지는 근대한국의 대표적인 불교고등교육기관이었다. 중앙학림은 예과 1년과 본과 3년으로 구성됐다. 지방 강원을 마친 자나 예과를 마친 자에 한해 본과 입학자격을 부여했다. 〈약력〉에 따르면 백성욱은 1919년 중앙학림을 졸업했다. 하지만 예과 과정 없이 본과 3년 과정만을 거쳤다고 해도 1920년에 졸업하는 게 옳다. 〈약력〉에서 1919년 ‘졸업’이라는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조사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백성욱이 중앙학림을 다닌 마지막 해인 1919년은 한국근대사의 일대 사건인 3^1운동이 있었다. 중앙학림의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중앙학림 강사였던 한용운은 백성욱이나 김법린 같은 중앙학림 학생을 자택으로 불러 만세운동 참여를 권유했다. 이후 많은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들은 서울에서 3^1운동에 참가한 후 지방 사찰로 가서 다시 운동을 조직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당시 중앙학림은 불교계에서 특별한 역할을 했다. 학습된 젊은 승려들이 집합해 있었고, 시대의 고동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백성욱은 중앙학림 재학 시절 단순히 승려로서가 아니라 청년 지식인으로서 민족이나 사회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3. 중국 체류와 유럽 유학

불교중앙학림에서 3^1운동을 경험한 백성욱은 오래지 않아 중국으로 출국한다. 훗날 《불교》에 게재한 그의 글 〈느낌〉에 따르면 백성욱은 1919년 5월 10에 중국 발해만 소재 항구도시 잉커우(營口)에 도착했다. 이런 사실을 보면 그가 3^1운동과 관련한 국내 활동에 장기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출국 자체가 용이하지 않은 상황에서 5월에 출국했다면 3^1운동 즈음이나 아니면 그 이전부터 준비했을 것으로 보인다. 백성욱이 어떤 이유로 출국하고, 어떤 경로를 거쳐 누구의 도움으로 중국에 도착했는지 현재로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백성욱은 배편으로 중국에 도착했고, 이후 아마도 중국 국내 선박으로 상하이에 도착했을 것이다. 《불교》에 실린 그의 기고를 보면 상하이 체류 중에 많은 글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체류 기간은 거의 1년여에 이른다. 이 기간 그의 활동은 분명하지 않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있었고, 임정 인물들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총독부에서도 요주의 인물로 백성욱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구체적 활동은 분명하지 않다.

필자가 보기에 청년 백성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 가운데 하나가 그의 상하이 체류다. 당시 급변하는 중국의 정세와 신문화운동의 조류, 그리고 국제도시 상하이에서 흡수했을 넘쳐나는 근대지식과 세계성 등은 조선의 젊은 승려를 가격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백성욱이 상하이 체류 당시 쓴 글을 보면 여러 면에서 변화를 포착할 수 있다. 거기에는 문학에 대한 관심과 중국 사회상 소개, 그리고 서구지식에 대한 흡수 등이 곳곳에서 보인다. 유럽 유학도 한국에 있을 때 계획한 것이 아니라 중국 체류 중에 선택한 길이 아닐까 추측한다. 이승만의 권유로 유럽 유학을 결정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사료를 좀 더 검증해야 할 듯하다.

백성욱이나 김법린의 프랑스 유학을 생각하면 주목해야 할 사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1920년 5^4운동 이후 시작해 수년간 중국에서 지속된 ‘근공검학(勤工儉學) 운동’이다. 당시 프랑스 정부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복구를 위해서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는 정책을 폈는데, 중국 지식인들이 중국인 청년을 모집하여 노동자로 파견하여 그곳에서 학업을 병행하게 하는 운동을 펼쳤다. 1차로 1천6백 명가량을 파견했다. 훗날 중국 공산당을 이끈 저우언라이(周恩來)나 덩샤오핑(鄧小平) 등이 근공검학 운동 출신이다. 그들은 프랑스에서 노동자로 생활하면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백성욱의 유럽 유학과 근공검학 운동 시기는 정확히 일치한다. 그가 근공검학 운동 속에서 중국인 청년들과 함께 프랑스에 도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그런 분위기 속에서 머나먼 유럽의 프랑스와 심정적 거리감을 좁혔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김법린에 대해서도 동일한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것도 사료상 증거가 없는 순수한 추측이다. 현재로선 그렇다.

〈약력〉에 따르면 백성욱은 1920년 프랑스 파리 보배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이 ‘보배’ 고등학교가 정확히 프랑스 어느 학교인지 알 수 없다. 여기서 보배는 아마도 프랑스 파리 북부 보베(Beauvais)인 듯하다. 그런데 백성욱이 ‘보베고등학교’를 다녔다는 이야기인지 ‘보베’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다는 이야기인지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보베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백성욱은 그곳에서 독일어와 라틴어를 수학했다.

이듬해 그가 독일로 진학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독일어와 라틴어를 공부한 게 당연해 보이지만, 왜 프랑스에서 그것을 준비했는지 의문이다. 현재로선 왜 그가 프랑스에서 이런 학습을 했는지, 언제 독일로 옮겼는지 어떤 이유로 프랑스에서 다시 독일로 진학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백성욱은 1922년 독일 뷔르츠부르크(Würzburg) 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한다. 뷔르츠부르크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에 있는 고도(古都)이다. 뷔르츠부르크 대학교는 1582년에 설립되어 현재까지 이른다. 이 대학교는 설립자가 뷔르츠부르크 지역 주교였던 만큼 가톨릭 신학 연구가 활발했다. 하지만 근대 시기 과학 분야에서도 대단한 성과를 이루었다. X선을 발견해 제1회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빌헬름 뢴트겐(Wilhelm Conrad Roentgen)은 당시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물리학연구소 소장이었다. 이후 이 학교에서 많은 노벨상 수상자가 나온다. 프란츠 브렌타노(Franz Brentano, 1838~1917) 같은 저명한 철학자가 이곳에서 학생을 가르쳤고, 철학자 블로흐(Ernst Bloch, 1885~1977)는 이곳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는 학자 가운데는 하이데거 철학 전공자인 박찬국 서울대 철학과 교수가 이 학교 출신이다. 대단히 유서 깊은 뷔르츠부르크 대학을 백성욱이 선택한 것을 보면 그가 특별한 정보를 갖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독일에서 이미 근대적 불교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그가 불교학이나 인도학 연구로 유명한 학교나 교수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도 밝혀야 할 지점이다.

백성욱은 〈약력〉에 따르면 대학 입학 3년 만인 1924년 9월 뷔르츠부르크 대학을 졸업했고, 이듬해인 1925년 10월 〈불교순전철학〉으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백성욱은 《불교》 7호(1924)에 자신의 학위논문을 〈불교순전철학〉이라는 제명으로 소개하는데, 이 글의 서언에서 “1924년 2월에 이곳 철학교수 마이야 박사에게서 논제 〈불교순전철학〉이라는 것을 얻어 가지고, 동 5월 2일에 완성하여 동 철학과에 제출하여 박사논문의 인증을 얻었다.”고 밝혔다. 여기서 철학교수 ‘마이야’ 박사는 1922년부터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철학과에서 근무한 한스 마이어(Hans Meyer, 1884~1966)로 보인다. 그는 서양 고대철학과 중세철학을 연구한 학자다. 불교에 대한 특별한 이해가 있었다고 보이지 않는다.

백성욱이 1924년 9월에 뷔르츠부르크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이 학부 과정인지 대학원 과정인지 알 수 없다. 백성욱의 언급에 따르면 자신의 박사논문은 1924년 졸업에 맞춰 쓰인 것임이 틀림없다. 따로 대학원을 입학한 것이 아니다. 〈약력〉에 따르면 1924년 ‘졸업’하고 1925년 박사학위를 ‘획득’했다. 그런데 〈서언〉에 따르면 1924년 5월 학위논문을 ‘완성’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 글(서언)을 쓴 1924년 7월 이전에 학위 ‘인증’을 받았다. 여기서도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1924년 졸업은 무슨 의미인지, 그것과 박사학위 ‘획득’은 어떤 의미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박사학위 ‘획득’과 ‘인증’ 사이의 시간적 간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아직 풀어야 할 문제인 것 같다. 백성욱은 1925년 9월 11일 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1925년 9월 9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4. 〈불교순전철학〉의 구성

백성욱이 남긴 글 가운데 가장 학술적인 글은 1925년 《불교》 제7호(1월 1일 자 발행)에서 14호까지 연재한 〈불교순전철학(佛敎純全哲學)〉이다. 게재일과 그의 귀국일을 대조하면 이 글은 모두 그가 우편으로 투고한 글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순전’은 글자대로 풀면 ‘순수하고 온전하다’는 의미다. 일본 근대에 ‘순전철학’이라는 표현으로 서양철학 술어인 형이상학을 번역했다. 그래서 ‘불교순전철학’이란 표현은 꼭 백성욱의 표현은 아니다.

백성욱은 〈불교순전철학〉이 범어로는 ‘아비달마’라고 했고 독일로 ‘Buddhistishe Metaphysik’이라고 했다. 지금 같으면 ‘불교형이상학’이라고 풀 수 있다. 이를 봐서도 알 수 있듯 〈불교순전철학〉은 불교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의를 말한다. 부파불교나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개념 분석으로서 ‘아비달마’를 가리키는 건 아니다. 본문에 의거해서 풀면 여기서 ‘달마’는 진리를 가리킨다. 불법 자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이 글에서 백성욱이 인용한 경론은 《화엄경》 《원각경》 《대승기신론》 《원오불과선사어록》 등 대부분 대승경론이나 선어록류이다.

이런 점을 보면 이 글은 초기불교나 부파불교에 대한 글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또한 그가 인용한 경전에서도 알 수 있듯 김법린이 범본 《유식이십론》의 번역을 시도한 것과 달리 조선불교 전통에 오히려 좀 더 충실한 듯하다. 물론 그가 주장하는 내용은 근대적 불교학의 세례를 분명히 입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논의 전개는 비교적 전통적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성욱은 서분, 정종분, 유통분이라는 다분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글을 구성했다. 서분은 제1절 ‘역사적 개념과 불교순전철학’ 제2절 ‘관념’ 제3절 ‘논리(사색의 방식)’로 구성됐다. 정종분은 제1장 〈붇다〉와 제2장 〈달마〉로 구성됐다. 결론에 해당하는 유통분은 집필하지 않았다. 정종분 제1장 〈붇다〉는 제1절 ‘붇다의 개념’, 제2절 ‘판취쓰칸다(오온)’, 제3절 ‘사트바(인격)’, 제4절 ‘안타아트만(심, 정신, 주재)’으로 구성되고 제2장 〈달마〉는 제1절 ‘달마’, 제2절 ‘천류(遷流)의 판정’, 제3절 ‘로카야프라바바타타(세계의 起始)’, 제4절 가야(육체)로 구성됐다.

〈불교순전철학〉에서 백성욱은 유럽의 불교학 연구 성과를 꽤 충실히 이용한다. 당시 한국불교계에서는 이런 정보가 대단히 선진적이었을 것이다. 범어 발음을 표기할 활자가 없었지만 그것을 굳이 한국 발음으로 표기하려 노력했다. 물론 또한 그는 서양철학의 개념틀을 일부 이용한다. 장절(章節) 제목에서 비록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서양철학의 몇 가지 영역인 존재론, 인식론, 논리학 등이 묘사되고 있다. 실제 내용도 그러하다. 백성욱은 “전 우주의 진리 아래서 주관과 객관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주체와 대상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백성욱은 불교에서 말하는 붓다와 달마를 각각 주관과 객관의 문제로 취급한다. 그는 서언에서 불교순전철학이라는 주제로 학위 논문을 쓰게 된 계기를 밝힌다. 그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불교철학의 주관’ 방향으로 일저(一著)를 두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불교철학의 주관’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언어 사용으로 보자면 대단히 이상한 말이다.

주관과 객관이라는 말은 우리가 뭔가를 인식할 때 그 인식의 행위자와 인식행위의 대상을 나눌 때 쓰는 표현이다. 인식주관은 물론 감관을 갖추고 인식행위를 하는 주체이다. 그렇다면 ‘불교철학의 주관’이라고 하면 불교철학 자체가 주체인가? 그렇지 않다. 그가 말하는 불교철학이 순전철학, 즉 형이상학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불교철학의 주관’은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주관의 입장에서 불교를 다뤄보겠다는 것이다. ‘불교철학에 있어서 주관의 문제’ 정도가 될 것이다. 실제 본문에서 이런 의도는 곧바로 드러난다.

5. ‘주관과 객관의 통일’이라는 근대적 형식

백성욱은 본론에 해당하는 정종분을 제1장 〈붓다〉와 제2장 〈달마〉로 구성했다. 이 도식 자체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 전통적으로 불교를 가리킨 불법(佛法)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는 둘을 각각 우주 진리의 주관과 우주 진리의 객관으로 규정한다. 주관과 객관이라는 인식론의 기본 형식은 서양철학적 표현이다. 그런데 거기에 ‘우주’라는 표현이 더해지면 다소 낯설어진다. 백성욱은 ‘불교순전철학’은 “전 우주의 진리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했다. 이 전 우주적 진리를 주관과 객관으로 구분하면 붓다와 달마이다.

백성욱은 붓다와 달마를 각각 ‘진리에 내재한 주관’과 ‘진리에 내재한 객관’으로 취급한다. 그는 이 세계를 진리 전체로 파악한다. 세계 전체가 온전히 하나의 진리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한 “참된 것은 전부다”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진리(truth)라고 하는 말은 분명 근대적인 명명이다. 그것을 불교 술어로 하자면 제(諦, ariyasacca)에 해당할 것이다. 이 말은 ‘성인에 의해 알려진 것’이라는 의미다. 초기불교에서는 이른바 사성제를 제시했다. 이때 말하는 진리는 ‘고통 인식과 그것의 극복’이라는 대단히 종교적 차원의 것이다.

백성욱이 말하는 진리는 우주적이고 철학적이다. 개인을 초월하여 전 우주를 설명할 수 있는 진리이다. 이 진리는 불교 내부 맥락에서 출현했을까? 아니면 근대적 맥락에서 출현했을까? 필자는 둘의 결합이라고 본다. 백성욱은 달마의 의미 변형을 시도함으로써 불교형이상학을 시도한다.

달마는 이 우주진리본체의 대명사이다. 만일 붓다를 우주진리 본체의 주관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면 달마를 우주진리 본체의 객관(대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불교》 제10호).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절대정신으로 불리는 궁극적 진리는 “실체(Substanz)로뿐만 아니라 주체(Subjekt)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헤겔은 바로 주체 개념을 통해서 절대정신의 자기 전개를 설명하려 들었다. 이 세계는 절대정신의 자기 전개 과정이다. 이것은 끊임없이 생성하지만 무질서하지 않다. 백성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교순전철학의 관념은 이미 기술한 것과 같다. 간단히 말하면 ‘천류의 판정(判定)’일 것이다. 그것은 불교철인들이 만상을 고정불변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직 천류의 단계로 인정함이다(현세기 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럼으로써 존재하는 모든 것은 ‘천류의 판정’ 가운데 한 부분이다. 곧 진화의 도정일 것이다.(《불교》 제11호)

삼라만상의 변화를 제행무상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꼭 진화론적으로 이해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단순한 변화 자체에 가치를 부여할 수는 없다. 백성욱은 우주적 진리에 주관이 존재함을 밝힘으로써 세계의 생성을 설명하려 든다. 그는 범어 어원 분석을 통해서 붓다(Buddha)가 ‘깨달은 자’와 ‘지혜’ 두 가지 의미가 있음을 말한다.

불교철인들이 아는 붓다는 우주진리 자체이다. 그래서 달마[達摩, 法, 客觀]와 상대관념이 될 때는 붓다가 주관이 되는 것이다. “가없는 허공은 붓다[覺]가 발생시킨 것이다.”[無邊虛空, 覺所現發], 또 “마음, 부처, 중생 이 셋은 아무런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와 “붓다가 모든 중생 심중(心中)에 있다”는 등 이상 증명으로 보아서 우리는 확실히 ‘붓다’라는 글자가 사물의 명칭으로부터 사람의 명칭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붓다’의 자의가 본래부터 능력을 장치(藏置)하였음이다.(《불교》 제8호)

백성욱은 ‘붓다’의 의미가 원래 사물의 명칭이었음을 강조한다. 그는 사물의 명칭이었던 것이 인칭으로 바뀌었다고 말하는데, 과연 무엇을 의도하고 있을까. 백성욱은 붓다가 인명(人名)일 때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개별 인간에 제한된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붓다는 본래 사물의 명칭이었음을 강조한다. 붓다라는 개념을 형이상학적으로 다루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그것을 우주론적 차원으로 상승시키기 위해서 붓다(buddha)에서 인격(人格)을 탈각시키려 한다.

6. 세계 출현과 달마

백성욱은 붓다와 진리로서 달마를 결합시켰다. 하지만 우주적 진리가 된 붓다는 세계를 현상하기에 여전히 주체적이다. 앞서 백성욱이 《원각경》에서 인용한 “가없는 허공은 붓다[覺]가 발생시킨 것이다.”라는 구절도 이런 의도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는 자칫 우주창조로 보일 수 있지만, 그는 앞서 붓다는 우주진리 자체임을 말했다. 그것이 드러난 것도 우주진리의 주관과 객관으로 총괄된다. 하나의 진리 속에 있다. 그는 우주진리 본체로 명명한 달마를 단지 관념이 아닌 구체적 세계로 파악하려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달마−허공−자연’이라는 도식으로 달마와 자연을 등치시키려 한다.

“선남자야. 일체중생이 이 달마[法界]로부터 유출되지 않은 이가 없고, 이 달마로 복귀하지 않는 이가 없다.” (중략) 달마가 이 우주를 만들었다는 것보다는 이 우주가 달마로부터 생겼다. 또 한 방면으로는 이 우주가 달마로부터 정돈되었다. 만일 사람이 거짓[幻]으로부터 진리로 돌아간다면 이들 만상은 곧 달마일 것이다.(《불교》 제10호) 이 우주는 허공의 한 부분이다. 만일 허공이 붓다로부터 출발했다고 가정하면 곧 세계가 붓다 위에 건립되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불교》 제13호)

백성욱이 말하는 달마는 불성(佛性)이나 법계(法界)를 번역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불성론에 입각해서 그것을 우주론적으로 확장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백성욱은 화엄이론을 빌려서 이 세계가 달마에서 유출되고 달마에 의해 그것은 정돈(질서)된다고 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심진여는 곧 일법계대총상법문의 본체이다. 이른바 마음의 본성은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않지만 일체제법은 단지 (마음의) 망념 때문에 차별이 존재한다. 만약 마음의 망념을 여읜다면 (차별된) 일체 경계의 상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백성욱은 이 세계가 비록 차별된 것이고 그대로 긍정할 수 없는 것이지만 허공의 일부라면 그것을 긍정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허공은 곧 붓다가 산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붓다에게서 출현한다. 이렇게 세계 성립은 긍정된다. 근대 시기 백성욱뿐만 아니라 일본의 불교철학자 가운데서도 세계의 성립을 불교적으로 긍정하려는 노력이 많았다. 좋게 말하면 현실 긍정이다. 부정적으로 말하면 불교의 출세간적 요소를 축소하고 국가나 사회로 개인을 포섭하려는 기획이다.

백성욱도 세계의 출현을 설명하는 우주론으로서 불교를 말하기도 한다. 그는 이를 위해서 《대승기신론》의 구상차제설(九相次第說)을 이용한다. 구상차제설은 무명업상으로 시작하는 삼세(三細: 세 가지 미세 번뇌)와 육추(六麤: 여섯 가지 거친 번뇌)가 차례로 전개됨을 가리킨다. 여기서 번뇌는 일종의 의식이기도 하다. 구상차제설은 궁극적으로 번뇌세계로서 현상이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단순화시키면 번뇌의 전개라고 할 수 있다.

백성욱은 《기신론》에서 말하는 세 가지 미세한 의식 활동 가운데 첫 번째인 무명업상(無明業相)을 단지 업상으로 명명한다. 그는 이 업상을 무명(avidyā)이 아니라 명(明, vidyā)으로 풀었다. 이렇게 보면 백성욱은 9상(相) 전체를 무명으로 해석하지만 그것의 출발은 무명이 아니라 명으로 이해한 것이다. 결국 거짓 세계까지 진리 위에 놓임을 설명하려는 입장이다. 사실 이런 경향은 근대 시기 자주 보인다. 세계에 대한 무한한 긍정은 현실을 피하지 않고 참여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불교 본연의 종교적 긴장 없이 국가나 사회가 요구하는 현실적인 가치를 마치 불교적 가치인 양 호도하는 잘못을 초래하기도 했다.

7. 정치활동과 종교운동

백성욱은 독일에서 귀국 후 1926년 4월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임명된다. 1928년 9에는 교수직을 사임하고 금강산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한다. 1938년 백성욱은 금강산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다. 10년에 걸친 금강산 생활은 그에게 최초의 유럽 유학승이라는 개명한 청년 지식인의 이미지보다는 도력 높은 도인의 이미지를 더 강하게 부여했다. 〈약력〉에선 금강산 생활을 시작한 지 오래지 않은 1929년부터 백성욱은 《대방광불화엄경》을 제창했다.

백성욱이 금강산 수행 시에 그에게 배운 김기용에 따르면 백성욱은 “누구나 《대방광불화엄경》을 일심으로 독송하면 모든 재난은 소멸하고 소원을 성취한다”고 설했다. 유럽에서 근대적 교육을 받은 엘리트 승려의 발언이라고 하기에는 종교 경험에 대한 확신이 너무도 굳건해 보인다. 그리고 1930년대와 1940년대 이후 그의 생애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학자로서의 역할보다는 신행자 내지 종교활동가로서 역할이 더 컸다.

해방 이후 백성욱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건국운동에 참여했다. 1950년 2월 내무부 장관에 선임되었고 전쟁이 발발한 다음 달인 7월 사임했다. 이듬해인 1951년 2월 한국광업진흥주식회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는 젊은 날 독일에서 광부로서 일한 경험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1952년 8월 5일 전쟁 통에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8월에는 동국대학교 총장에 취임했고 1961년까지 재임했다. 총장 임기 중인 1954년에는 동국학원 이사장에 취임했다.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 이후 치러진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두 번째로 부통령직에 출마해 낙선했다.

백성욱은 해방 이후 1950년대 말까지 줄곧 정치 일선에서 활동했고 아울러 1950년대는 교육행정가로 활동했다. 이런 활동은 4^19혁명과 5^16 군사쿠데타 등 정치상황의 급변에 따라 변화했다. 필자는 승려 출신인 백성욱의 정치 활동에 대해서는 그 영향력의 크기를 떠나 종교와 정치라는 차원에서도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개신교인 이승만과 불교 승려 백성욱이라는 어떻게 보면 대단히 이질적인 두 사람이 어떤 지점에서 만나고 결합했는지 살피는 것은 한국의 현대정치와 종교를 이해하는 데 한 사례가 될 것이다.

백성욱은 동국대학교 총장 퇴임 이후 부천 소사에 ‘백성목장’을 설립했다. 이는 일종의 수행공동체로서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공부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곳에서 특히 강조한 공부는 《금강경》 독송이었다. 그는 이 《금강경》 독송이 특별한 영험이 있음을 강조했다. 이후 그의 영향을 받아서 금강경독송회가 설립되기도 했다. 일찍이 금강산에서는 제자들에게 ‘대방광불화엄경’ 일곱 자를 마치 아미타불 염불처럼 염송하도록 했다. 최초 유럽 유학승이라고는 하지만 그가 제시한 수행법은 전통적인 방법론에 속한다.

동국대학교 재직 시절에도 그는 《금강삼매경론》이나 《화엄경》 《선문염송》 《조론》 《보장론》 등을 강의했다. 이런 모습은 범어 《유식이십론》을 번역한다든지 서구의 근대적 불교학 방법론 도입을 시도한 김법린과 대비된다. 아울러 백성욱이 부통령 선거에 입후보할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그가 점괘를 신봉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스스로 도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최초 유럽 유학승 백성욱은 독특한 인물이다. 현재 공개된 자료로는 그를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아직 발굴되지 않았거나 공개되지 않은 자료가 많이 있을 거라고 짐작된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욱을 평가한다는 것은 다소 위험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상과 같이 몇 가지 측면에서 그를 평가해 보았다. 근현대 한국불교를 생각하면 필자로서는 그가 학자로서 역할이 대단히 제한적이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백성욱은 근대적 불교학 방법론을 습득한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그런 그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좀 더 집중했더라면 해방 이후 불교학 연구가 좀 더 진전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김법린도 그러하고 백성욱도 마찬가지인데, 불교계의 엘리트 지식인들은 단지 학자로서 활동할 수 없는 구조 속에 있었다. 결국 역할의 혼돈이 있게 마련이다. 불교계 상황도 그러했고, 시대 상황도 그러했다. 여러 역할이 한두 사람에게 요구됐다. 학교 연구실이나 강의실이 아니라 장관실이나 총장실 혹은 수행도량에서 생활했다. 그런 역할이 불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근대적 학문을 안정되고 체계적으로 정착시키지 못한 불교계로서는 안타까울 뿐이다. 이런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백성욱과 같은 불교계 인물에 대해선 좀 더 진전된 연구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

김영진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HK연구교수.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중국근대사상가 장타이옌(章太炎)의 불교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근대사상과 불교》(2007), 《공이란 무엇인가》(2009), 《근대중국의 고승》(2010), 《불교와 무의 근대》(2012)를 썼고, 《대당내전록》(공역, 2000)과 《중국근대사상사약론》(2008)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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