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연구의 근대적 교상판석의 선구

1. 머리말

김동화
(1902~1980)

김동화(1902~1980)는 해방 후 한국 불교학계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학자이다. 물론 그가 1940년대 이미 혜화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했지만, 불교연구를 본격적으로 행하고, 학술연구에서 영향을 끼친 것은 해방 이후다. 국내 불교학계에서 김동화의 업적은 비교적 분명하다. 불교학 여러 분야에서 체계적 연구가 부족하고 개론서가 거의 부재한 상황에서 김동화는 교과서가 될 법한 꽤 완성도가 높은 여러 저작을 내놓았다. 대략 열거하면 《불교학개론》 《원시불교사상》 《선종사상사》 《유식철학》 《구사학개론》 《불교교리발달사》 《대승불교사상》 등이다. 《불교학개론》을 제외하면 주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간행됐다. 제목을 보아서 알 수 있듯, 그는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등 불교학 전반에 걸쳐 개설서를 내놓았다.

김동화는 이런 저작을 통해 불교학 연구자뿐만 아니라 일반 교양인들이 불교를 보다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이상의 저작은 한동안 불교 지침서처럼 사용되었고, 사람들에게 불교 이해의 틀을 제공했다. 또한 독자가 불교 전체를 조망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김동화는 저작 속에서 대단히 많은 불전을 인용했다. 남방 상좌부 불전이나 아함경 등 조선불교의 전통에서는 쉽사리 접근하지 않았을 불전이 곳곳에 등장한다. 또한 그는 대단히 설득력 있고 적절하게 불전을 인용하여 독자로 하여금 불전을 통해서 교리에 대한 실감을 얻게 했다. 전통적인 의미의 경증(經證)이나 논증(論證)이라기보다는 근대적인 논문 쓰기의 연장이었다.

특히 《불교학개론》은 한국전쟁 당시에 쓰였지만, 그 빼어난 완성도 때문에 지금까지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또한 한문 투에 익숙한 불교 교양인에게 그것은 마치 필독서처럼 애독됐다. 김동화의 저작 가운데 영향력이 가장 큰 것도 아마 이 《불교학개론》일 것이다. 지금까지 얼마나 간행됐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50여 년 동안 여러 차례 간행됐다. 지금은 한문 투 문장을 한글로 순화한 판본이 간행되기까지 했다. 일반 교양인뿐만 아니라 출가자도 이 저작을 통해 기본적인 불교 이해를 획득하는 경우가 많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산사를 방문하면 서가에 꽂힌 《불교학개론》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김동화는 일본에서 이룩한 근대 불교학의 성과를 비교적 체계적으로 수용했다. 또한 그는 그 성과를 근대적 불교학이 온전히 정착하지 않은 한국 학계에 성실하게 소개했고, 그것을 통해 해방 이후 불교 이해와 불교연구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물론 그는 문헌비평을 기반으로 한 엄밀한 불교문헌학 훈련을 받았거나 범어나 팔리어 능력을 갖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일본의 근대 불교학이 역경 속에서 구축한 근대적 불교학 훈련 프로그램을 국내 학계에서 강제하지는 못했다. 이런 한계가 있음에도 김동화가 자신이 처한 조건 내에서 학자의 자세를 잃지 않고 그야말로 무소의 뿔처럼 불교연구에 매진한 점은 높이 평가해야 마땅하다.
필자는 한국 불교학에서 김동화 혹은 김동화의 저작은 하나의 정리되지 않은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앞선 연구자 혹은 앞선 연구 성과 정도가 아니라 불교학의 경계를 넘어서 곳곳에 박혀 있는 조금씩 다른 기억이다. 필자가 주목하는 한 기억은 독자들이 김동화의 저작을 통해서 대단히 전통적인 불교를 이해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가 논의 전개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원전을 대단히 적절하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오히려 김동화가 설정한 불교 이해의 ‘틀’이 바로 근대적 불교 이해를 견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필자는 ‘근대적 교상판석’이라고 불러본다.

2. 김동화에 대한 기억의 재편

지금까지 국내 학계에서 김동화의 불교학에 대해 행한 연구는 많지 않다. 물론 그 이유는 해방 후 행해진 불교연구 성과나 활동한 불교학자를 불교학의 연구 대상으로 인식한 것이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최근에야 ‘근현대 한국에서 불교학의 형성’이 불교학의 주제가 되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김동화의 불교연구에 대한 지금까지의 주요 연구를 일괄하면 다음과 같다. 목정배의 〈김동화의 불교철학 탐구〉(《해방 50년의 한국철학》 철학과 현실사, 1996), 조성택의 영어 논문 “The Formation of Modern Buddhist Scholarship: The Case of Bak Jong-hong and Kim Dong-hwa,”(Korea Journal vol.45, no.1 Spring 2005) 제선(帝璇)의 《뇌허의 불교사상 연구》(민족사, 2007) 권오민의 〈뇌허 김동화의 불교학 관〉(《문학·사학·철학》 13호, 2008) 등이 있다.

목정배는 상기 글에서 동국대학교에서 김동화에게 직접 배운 제자로 김동화의 불교연구를 뇌허의 생애, 뇌허의 불교학 탐구, 뇌허의 한국불교관 등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소개했다. 특히 저자는 김동화가 선종을 종지로 내세운 조계종이 한국불교의 대표 종단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출현한 선종 독존의 분위기를 불편해했음을 지적하고, 김동화는 석존은 “인간 해방과 정신 해탈의 종교, 철학, 사상, 윤리, 문화를 창도하였고, 이러한 정신문화 대개를 하나의 수행적 선종에 귀일시키는 것은 협의의 세계로 함입하는 것”으로 보았다고 소개한다. 실제 김동화는 저작 곳곳에서 깨달음 혹은 견성이라는 한마디로 불교를 정의하거나 불전에 대한 이해 없이 불교를 과감하게 규정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냈다.

조성택은 상기 글에서 김동화와 박종홍을 함께 다루면서 “한국의 불교학에서 근대 유럽적 관점이 어떻게 재현되는가”를 살폈다. 그의 발상은 기본적으로 해방 이후 근대 불교학은 그저 분과학문으로 캠퍼스에 갇혔고, “유럽의 엄격한 문헌학적 전통은 결락된 채, 불교에 대한 유럽적 해석만이 불교학이라는 이름으로 남았다.”는 것이다. 유럽적 해석은 ‘근대적 해석’이나 ‘학문적 객관성’이라는 외피로 저들의 불교학에 생존했다고 파악한다. 조성택은 궁극적으로 물론 그들의 학술 성과를 계승한 현재의 불교연구에도 그런 경향은 지속되고 있고, 이의 극복이 요구되는 시점임을 말하는 듯하다. 이것이 바로 ‘탈근대의 불교학’에 대한 지향이라고 할 수 있다.    

제선의 상기 연구물은 현재까지 유일한 김동화에 대한 전문적인 단행본 저작이다. 저자는 김동화를 불교계의 선각자이자 훌륭한 학승으로 파악하고 다소 찬양조로 기술(記述)한다. 김동화의 불교연구가 놓인 근대적 맥락이나 근대성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의하지 않고, 김동화가 여러 저작에서 행한 불교 이해를 정리하는 방식으로 책을 구성했다. 그래서 다소 평면적인 전개가 되었다. 만약 김동화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면 김동화 불교학을 형성하는 앎의 회로를 추적해야 한다. 김동화는 개론서류의 여러 저작에서 경론 인용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만, 그가 어떤 연구서를 참고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밝히지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가 저술하는 내용이 순전히 자신의 생각인지 아니면 다른 연구자의 성과를 이용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물론 그가 ‘동의’했다는 추측 아래 그 모두 그의 생각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지만 그 주장의 맥락은 파악하기 힘들다.

권오민은 〈뇌허 김동화의 불교학 관〉에서 비교적 포괄적으로 김동화의 불교연구를 다뤘다. 그는 불교학자 김동화를 통해서 현재 불교학을 반성하고 비판하고자 한다. 또한 자신의 불교관이나 현실 한국불교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때론 직접적으로 때론 김동화의 발언을 빌려 기술한다. 그는 “불교는 결코 단일하지 않다”고 파악하고 이 신념에 대한 동조자로서 김동화를 거론하는 듯하다. 김동화는 분명 불교가 복잡다단함을 인정했다. 그도 물론 “마음이니 연기니 중도니 참선이니 하는 개념 하나로 전 불교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방식으로는 불교를 이해하는 것은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말했을 듯하다. 권오민은 불교(불교학)에 대해 현재 우리의 현실은 ‘차이의 긍정’ 없이 ‘동일성의 확신’만이 난무한다고 본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는 김동화도 불교를 단일한 신념 체계로 파악하는 듯하다.

불교에는 전연 교리적 발달이 없는 것이냐 하면 물론 그런 것은 아니다. 발달은 있으되 그것은 주로 진리를 표현하는 표현 방법의 발달이지, 결코 진리 내용의 발달은 아니다.

김동화는 불교 교리의 다양함을 불타 교설에 대한 ‘표현 방법의 차이’로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그가 변하지 않는 단일 교설을 인정한다는 말이다. 《불교교리발달사》 머리말에서 김동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도 만고에 변함없는 진리이나 연을 따라 나타남에 숨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진리는 가히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불어나고 줄어들고 더하고 덜 하는 것이 아니지만 시속의 연을 따라 변하기도 하고 불어나고 줄어들고 더하고 덜하며 깊고 낮고 빠르고 늦기도 하여 가감(加減), 은현(隱現), 돈점(頓漸), 심천(深淺)의 차별이 생기게 된 것이다. 

김동화는 먼저 불교는 단일한 교설임을 인정하고, 그 하나가 마치 유기체처럼 방법을 달리하며 변화하는 시대 상황에 대처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진리관은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진여수연(眞如隨緣)’과 유사한 발상이다. 이는 또한 대해일미(大海一味)라는 말이 가리키는 불설의 단일성에 대한 지지라고 생각해도 가능할 것이다. ‘불교교리의 발달’이라 함은 불교라는 단일체의 가감과 은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불교교리발달사라 함은 법을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고 시대문화의 변천상을 중심을 한 것이”라고 밝혔다. 법은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단지 법에 대한 이해의 변천을 다룬다는 의미다.

이상은 신앙인으로서 김동화와 근대적 불교학을 행하는 학자로서 김동화의 타협 지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조성택은 김동화의 진리관에서 ‘유럽적 해석’을 보았다고 했고, 권오민은 김동화도 불교를 단일한 체계로 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지적과 달리 김동화는 불교의 단일성에 대한 확신이 있다. 물론 두 사람의 지적대로 김동화의 불교학에 명확한 근대적 불교 해석과 교학 폄하 전통에 대한 분명한 반대 그리고 체계적 불교학습에 대한 강조가 있지만 뜻밖에 통상적인 불교도가 가질 법한 불교 신념체계의 통일성이나 단일성에 대한 분명한 지지가 있다. 승려라는 자기 정체성이 작동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불교에 대한 전통적인 사유와 신앙자의 색조를 확인할 수 있다.

 3. ‘개론’의 탄생과 새로운 분류법

1954년에 쓴 《불교학개론》 저자 서문에 따르면 김동화는 본래 ‘불교연구의 지남서’를 하나 쓰라는 주변의 권고에 따라 《불교학개론》을 1947년(단기 4280) 탈고했지만, 그 원고를 6·25사변 무렵 도난당했다. 낙담하고 있던 차에 동국대학교출판부가 일반인과 학생들이 읽을 만한 책을 부탁해서 집필을 시작했고, 우리가 아는 《불교학개론》의 원고는 1953년(단기 4286) 탈고했다. 그는 실제 한국전쟁 통에 피난지 부산과 대구를 오가며 원고를 썼다. 이는 근대 중국의 대표적 불교학자 탕용통(湯用彤)이 중일 전쟁기간 피난지에서 《한위양진남북조불교사(漢魏兩晉南北朝佛敎史)》를 완성한 것과 유사하다. 혼란 속에서도 그 혼란과 단절하고 내밀한 자신의 작업을 해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실은 그 내밀한 작업 속에 혼란함으로 고통받고 있는 자신과 사회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침투하기 마련이다. 탕용통도 그랬고, 김동화도 그랬을 것이다.

《불교학개론》이라는 서명은 지금 보면 대단히 상투적이다. 하지만 당시로선 이런 표현은 조금은 신선한 말이었다. 1950년대가 아니라 1900년대나 일본강점기였다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물론 낯설기도 했을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개론’이란 말은 근대 시기 영어 ‘Introduction’의 번역어로 출현했다. 개론이 아니라 개설이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했다. 그래서 《불교학개론》의 영어 표현은 An introduction to Buddhism 정도 될 것이다. 근대 중국에선 ‘상태(商兌)’ 같은 우아한 어휘를 선택하기도 하고, ‘천석(淺釋)’이나 ‘약설(略說)’같이 보다 편안한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전근대 불교에도 개론에 해당할 법한 장르의 글이 있었다. 중국불교에선 《화엄오교장》이나 《선원제전집도서》 같은 글이 불교 개론서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 응연(凝然)의 《팔종강요(八宗綱要)》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특정한 종파의 입장에서 기존 불교 교파나 전통에 대해 비평을 가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자기 종파의 위상을 재정립하고 상대적 우위를 주장하기 위한 방식으로 곧잘 통합적인 서술이 시도됐다. 이때 이른바 교판이 등장했다. 이 때문에 이런 책은 근대적 의미의 개론서같이 개관적 기술을 행하거나 대중적 동의를 획득하지는 못했다. 물론 이런 교판은 교리 비판뿐만 아니라 새로운 교리의 창안을 견인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기도 했다.

김동화는 《불교학개론》을 시작하면서 먼저 불교의 의미에 대해 자문한다. “우리 인생은 무엇을 위해 이 기구한 세상에 구태여 살지 않으면 안 되는가? 부모와 처자를 위하여 사는 것이 인생인가? 또는 사회 국가와 인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인생인가?” 이는 우리에게 “왜 사는가?” 질문한 것이다. 사실 대단히 당혹스런 질문이다. 우리 누구도 그에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붓다 같은 성인이나 고매한 철학자라면 젊은 날 고뇌에 차서 스스로 던질 법한 질문이다. 그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이 수행이고 철학이었을 것이다. 김동화는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라는 진지한 반성에서 종교나 철학이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불교는 무엇인가. 김동화는 “실로 참된 생을 찾고 영생을 얻게 하고자 하는 것이 즉 불교다. 즉 다시 말하자면 생사일대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불교다.”라고 말한다. 고승의 법문에서 흔히 듣고, 불교인이라면 한 번쯤은 했을 법한 조금은 상투적인 대답이다. 하지만 말로는 이 정도밖에 표현할 수 없다. 존재자의 근원적 고통을 해결하고자 하는 게 불교학의 목표는 아닐지라도 불교의 목표임은 틀림없다. 김동화가 《불교학개론》을 시작하면서 인간의 삶과 불교의 의미에 대해 질문한 것은 비록 학리적인 태도로 《불교학개론》을 기술하고 있지만 종교적 숙고에서 자신이 불교학을 했음을 알려준다.

김동화는 전체 3편으로 《불교학개론》을 구성한다. 김동화는 불교를 먼저 세 가지로 정의한다. 그것은 의불지교(依佛之敎), 불타즉교(佛陀卽敎), 성불지교(成佛之敎)이다. 이 말을 좀 더 풀면 ‘부처에 의지하는 가르침’이고, ‘부처가 곧 가르침’이고, ‘부처가 되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일찍부터 불교 전체를 통괄하는 분류에 불법승의 분류가 있다.”고 말하면서, 위 세 가지 분류 각각을 불·법·승 삼보에 배치한다. 그리고 그것을 교주론·진리론·해탈론으로 규정한다. 또한 그것의 성격을 종교적·철학적·윤리적이라고 이해한다. 이를 각각 경장·논장·율장에 배치한다. 그야말로 불교를 촘촘하게 조직(組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전근대 시기 존재하지 않은 불교 분류다.

삼보라는 표현이 대단히 전통적인 데 반해 ‘교주론·진리론·해탈론’이나 ‘종교적·철학적·윤리적’이라는 규정은 대단히 근대적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김동화의 저런 규정은 꽤 적절해 보인다. 법보라는 것이 근대 용어로는 당연히 진리여야 하고, 수행을 통해 해탈을 지향하는 출가자 집단이 바로 승보임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김동화의 이런 구분은 일반 불교인이라면 거부감 없이 쉽게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방법으로 불교를 구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보론(교주론)은 ‘역사적 불타론(응신론)’ ‘진리즉불타론(법신)’으로 구분했다. 이도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불신론에 기반을 둔 것이다. 응신으로서 석가불의 일생을 그렸고, 다분히 신격화한 붓다로서 법신을 말했다.

김동화는 진리를 말하는 법보론을 우주론, 연기론(현상론), 실상론(실체론), 지혜론(인식론)으로 구분한다. 김동화가 괄호 속에 규정한 현상론, 실체론, 인식론은 그야말로 근대 서양철학의 개념이다. 김동화에 따르면 법보론은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현상과 실재, 그리고 인식의 문제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 김동화는 기본적으로 현상과 실재라는 서양철학의 개념을 먼저 떠올리고, 그것을 연기와 실상이라는 불교 술어로 대체했을 것이다. 그런데 ‘실체론’이란 표현은 다소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실재론이나 존재론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왜냐하면 김동화가 실상론에 배당한 내용을 보면 대부분 존재자 혹은 존재함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탈론으로 규정된 승보론은 신앙론[信], 열반론[解], 수행론[行], 단혹증리론[證]으로 구분했다. 이런 세부적 분류 과정에서 다소 어색한 부분은 출현한다. 예를 들면 열반론이 신·해·행·증 가운데 ‘해’에 해당한다고 보았는데, 오히려 이는 앎의 문제로 앞의 법보론에 배당하는 게 좀 더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신·해·행·증 전체를 깨달음의 과정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이런 약간의 부조화는 감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신·해·행·증 개념을 통해서 승보론 전체를 끌고 가는 것은 탁월한 안목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불교학개론》이 분명 근대 불교학의 성과임에 틀림없지만 오히려 그것을 불교 전통에 충실한 입장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4. 서구 격의와 ‘학’의 수용

김동화는 근대 불교학의 분명한 세례를 받았다. 그는 붓다의 말씀으로 간주해 불교인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불경도 역사가 개입했음을 인정한다. 근대 유럽의 문헌학자들이 불설로 기억하는 수많은 불경이 각기 상이한 시간 층위에 산재함을 밝혔다. 불경은 각기 나이가 다르고 동일한 시기에 저술된 것이 아님을 선언했다. 전근대 시기 불교인들은 ‘불설’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이는 동일한 교설자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대 문헌학에서 불경이 다른 시기에 출현한 것임을 밝히는 순간 불경이 부처가 아닌 다른 이가 조작한 것일 수 있다는 종교적 위험이 발생한다. 이에 대해 김동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교의 모든 경전이 불설이라 되어 있다 하여 그것이 모두 석가세존의 직설법이라고 단정하던 것은 벌써 몰역사적인 옛날 학자들의 독단에 불과한 것이다. 설사 불교인만이 아무리 그렇게 단정하고자 한다 할지라도 불교 이외의 기타 문화가 그 모순성을 폭로하여 주고 있기 때문에 다만 불교 자신의 만족만으로써는 교리의 무질서 부조리성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여시아문’으로 시작하는 수많은 불경에서 동일한 한 명의 발언자를 상상한다면 그 숱한 말씀은 도대체 종잡을 수 없고, 혼란에 빠진다. 아함경을 설하신 분이 《반야경》을 설하시고 《해심밀경》도 설하시고 《법화경》도 설하시고 《화엄경》도 설하시고 《무량수경》도 설하셨다면 그냥 믿고 말 사람이면 모를까 그런 다양한 말씀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은 당혹스럽다. 김동화는 이런 교리의 무질서와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하여 역사를 개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역사라 함은 역사학적 방법론을 의미한다. 시대와 사회의 변천에 따라 불전이 작성되고 변화했음을 인정하겠다는 의미다. 근대 불교학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역사적 연구’이다. 김동화는 《불교학개론》 〈서론〉 제3장 ‘불교연구의 방법’에서 말한다.

불교연구는 어떤 방법으로 하면 용이하고 성과를 거둘 것인가? 만약 연구의 방법이 올바르지 않으면 《논어》를 읽는 자가 《논어》를 알지 못하는 격으로 공연한 노고만이 많고 하등 소득이 없을 것이다. 복잡다단한 불교교리의 연구에서는 더욱이 연구방법론이 필요한 것이다. 대개 어떤 사상을 막론하고 그것을 연구하는 데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해야 할 문제는 그 사상은 어떤 것인가? 또 그 사상은 어떻게 해서 흥기한 것인가 하는 등 두 가지일 것이다.

그가 말하는 두 가지 방법은 그 사상의 정체를 밝히는 것과 그 사상의 발생 및 성장을 밝히는 것이다. 이는 사실 방법이라기보다는 두 가지 접근법이라고 해야 한다. 김동화는 이를 각각 공간성과 시간성에 관한 문제라고 했는데, 시간성이라는 규정은 일면 타당해 보이지만 공간성이라는 규정은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김동화는 이 둘을 다시 논리적 연구와 역사적 연구라고 명명한다. 이 둘을 현대 학문분과로 나누면 철학적 연구와 역사학적 연구이다. 아니면 순전히 서양철학의 입장에서 보면 김동화가 말하는 논리적 연구와 역사적 연구는 각각 ‘본질의 정체와 현상의 성립’에 대한 접근이라고 할 수도 있다.

김동화가 논리적 연구와 역사적 연구 외에 제시한 방법론은 ‘보조학 연구’와 ‘주석적 연구’이다. 그는 보조학 연구의 내용으로 어학, 종교학, 미술, 문예, 고고학 등을 제시한다. 그리고 다시 세부 언어로 범어, 팔리어, 영어, 독어, 불어, 한문, 티베트어, 만주어, 몽골어, 일어 등을 거론한다. 물론 이런 언어를 모두 장악하기란 쉽지 않고, 실제 모두 섭렵한 불교학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한문 불전이 불교문헌의 다라고 생각한 근대 이전 불교 학습자와는 사뭇 다르다. 

어학의 범위로는 먼저 그 원전어인 범어와 팔리어를 연구하여야 하고, 이 두 가지 원전어를 연구하자면 그 학습의 기초로서 적어도 영어, 독어, 불어 3개국어 가운데 어느 한 가지 또는 세 가지 다 알면 더욱 편리하다. 그리고 다음에 대장경의 한역, 티베트역, 만주역, 몽고역 등 4종의 완본장경이 존재하는 이상 그 어느 한 가지에 통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며 만약 여러 역본을 비교 연구하고자 한다면 4개 국문에 모두 능통하여야 한다.

김동화는 여기서 원전어와 번역어라는 구분을 행했다. 중국에서 한역불전이 출현한 이후 그것은 동아시아에서 재현이 아닌 원본이었다. 그것은 결코 2차 문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근대 불교학은 문헌학에 힘입어 한역 불전이 번역 불전이라는 사실을 재확인시킴으로써 거기서 원본의 지위를 박탈했다. 일본 메이지 시기 불교학자들이 그렇게 범어와 팔리어 공부에 열을 오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거기에는 원본에 가까운 것이 사실에 가깝고 또한 좀 더 가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는 꼭 ‘부처님의 원음’을 더 잘 알려는 종교적 신념에서 출현했다기보다는 번역서가 아니라 꼭 외국어 원서를 봐야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는 사고에서 나왔다. 김동화는 근대 불교학의 기본적 발상에 동의하고 그것을 따를 것을 권장한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김동화의 ‘진화론적 교리발전’관이다.

불교에는 어떤 객관적 진리론이 있는가? 이것을 만약 불교발달의 역사상으로써 본다면 원시불교·부파불교·소승불교·대승불교·종파불교 등 종종의 시대적 발달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김동화의 교리발전사에서는 진화론적 발전관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근대학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공통성이다. 물론 그가 진리로서 불법은 발전하거나 퇴보하는 게 아님을 강조했지만 그가 기술하는 불교 교리 발전사에서는 기존 교리의 극복으로서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는 방식을 목격할 수 있다. “원시불교(BC 531~370)→부파불교(BC 370~100)→소승불교(BC 100~AD.150)→대승불교(AD150~470)→종파불교”의 도식을 제시한다. 현재 일반적인 불교 이해로서는 이런 도식은 다소 엉뚱하다. 먼저 부파불교와 소승불교를 분명히 구분했다는 점이다. 이는 김동화의 여러 저작에 걸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견해이다. 또 한 가지는 소승불교(김동화의 표현대로)가 종결하고 나서 대승불교가 출현한 게 아니라 실제 소승과 대승은 동거했다는 것이 현재 학계의 정설이다.

김동화의 상기 도식에서 보이듯 그의 진화론적 발전관은 교리사나 교단사 등 불교 내부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것의 인과관계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주로 등장한다. 그가 대승불교의 출현에 대해 “대승불교는 역사적으로 반드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어떠한 필연적인 과정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라고 평가하는데 이런 역사의 필연성을 진화론적 발전관으로 설명하려던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도 김동화는 그 발전이 ‘불교’라는 정법(正法)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자 불교의 자기 전개임을 말하려 한다.

대승불교의 흥기란 것은 기실 새로운 이상과 이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이상과 같은 정반합의 사상발전의 필연적인 과정의 순서에 의한 종합 운동이요 원시불교에 의한 복귀 환원 운동이었던 것이다.

헤겔식의 변증법도 실은 일종의 진화론적 발전관이다. 그것이 다윈의 생물진화론이나 스펜서류의 사회진화론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지만 문제의 출현과 그 해결을 위해 새로운 사유나 사건이 출현하는 것을 발전이라고 파악하기 때문에 여전히 진화론적 사유에 포함된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헤겔의 절대이성처럼 유일한 정답이 제시된 상황에서 진화나 발전은 과정적 진화이자 발전일 수밖에 없다. 새로운 절대자나 궁극자 혹은 완성자가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한 절대이성의 온전한 구현이나 그것으로 복귀가 절대적 선이다. 김동화의 경우도 불교는 하나의 법임을 선언하였고, 그것이 시대 변화에 따라 적절히 자기 전개하고 변모하는 과정을 발전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5. 근대적 교상판석

김동화는 《불교학개론》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저작에서 근대적 방법론을 동원하여 불교를 재편한다. 필자는 그것을 전통적인 방식과 다른 근대적 교상판석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불교라고 하면 매우 간단한 것 같지만 실제 불교를 연구하고자 하면 그 교리 내용은 실로 복잡다단하다. (중략) 그러므로 불교를 연구할 때 무엇보다도 그 연구의 대상인 불교 그 자체에 대체로 어떠한 조류가 있는지 먼저 구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바닷물을 들이켜 갈증을 해소하려는 어리석음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수당불교가 행한 교판도 실은 대상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이해와 장악을 목표로 한다. 근대 시기 출현한 학문 분류 또는 세계 분류도 마찬가지였다.

김동화가 근본적으로 불교 신앙인의 태도를 갖고 있지만 불교연구 자체에 이런 태도를 직접적으로 개입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근대적 객관성이나 합리성에 대한 강조가 자주 보인다. 특히 《불교학개론》 제2편 법보론(진리론)에서 객관성에 대한 논의가 중요하게 제기된다. 그가 말하는 ‘진리’는 종교적 진리를 의미한다기보다는 객관성 혹은 합리성이라는 근대적 의미의 방법론적 진리를 말하는 듯하다. 앞서 언급했듯 조성택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하여 김동화가 학문적 객관성이라는 이름의 유럽적 해석에 빠졌음을 지적했다. 김동화는 《대승불교사상》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에게 주어진 종교적 또는 철학적인 학문에 관한 한 그 기준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범주를 벗어날 수는 없으며, 설사 초월적 이상의 경지를 설정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사람의 궁극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방편에서 머물러야 한다.

김동화는 적어도 ‘학문’이라는 입장에서는 우리는 쉽사리 인간의 범주를 초월해서는 안 됨을 역설한다. 마치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을 먼저 구분한 것과 유사하다. 우리는 학문에서 초월적 언어를 쏟아내서는 안 된다. 비록 초월성을 학문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 초월성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그것이 어떻게 인간에게 작동하는가를 규명하는 것이어야 한다. 결코 학문하는 자가 초월자여서는 안 된다. 물론 이런 태도를 불교 본연의 목적과 불교연구를 분리시켜 객관성이라는 미명 아래 불교연구에서 종교성을 박탈하는 행위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이런 객관성의 기초 위에 그는 ‘종교·윤리·철학’이라는 근대적 학문 분류에 따라 전체 불교를 구분한다. 그가 말하는 “종교적 불교는 곧 신앙적 불교로서 정토의 여러 종파”이다. “윤리적 불교는 실천적 불교로서 계율종”이다. 철학적 불교는 다시 셋으로 나뉘는데 첫째 “조직적 불교로 성실종, 삼론종, 구사종, 섭론종, 법상종”이 있고, “사색적 불교로 화엄종, 천태종, 일련종, 진언종이고, 명상적 불교로 선의 여러 종파”가 있다. 상위 범주로서 ‘종교·윤리·철학’도 그렇지만 하위 범주로 “신앙·실천·조직·사색·명상”도 대단히 근대적인 규정임을 알 수 있다.

이때도 철학적 불교는 사실 이성적 불교를 말하고, 종교적 불교는 신앙적 불교를 말한다. 단지 이런 개념의 출현에서 근대성을 간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토제종, 일련, 진언 등의 표현에서도 김동화 불교학의 근대적 맥락을 추적할 수 있다. 복수의 정토종이나 일련종 그리고 진언종은 중국이나 한국에서 출현하고 전개된 개념은 결코 아니다. 이는 다분히 일본불교의 영향 속에서 행해진 분류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적어도 이 도식은 일본어로 된 원출처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왜냐하면 김동화가 너무도 당연하게 이 도식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다음 인용문에서는 서양철학이 동원된 새로운 교판을 확인할 수 있다.

후세의 진리 관찰법과 그 표현 방법을 본다면 대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 우주 간 삼라만상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요, 둘째는 이 삼라만상은 어떻게 하여 성립된 것인가 하는 등의 관찰이다. 전자는 공간적 관찰이고, 후자는 시간적 관찰이다. (중략) 공간적 관찰을 실상론이라고 하고 시간적 관찰을 연기론이라 칭한다. 실상론이라 하는 것은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실체 본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일체 만유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이요, 연기론이라 하는 것은 일체만유의 성립 유래 즉 생성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김동화는 서양 형이상학의 본체와 현상이라는 두 가지 범주를 통해서 불교 교판을 시도한다. 화엄학이나 천태학에서 보인 전통적인 교판과 달리 서양철학의 범주를 동원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독특하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점은 이런 교판이 실제 우리가 불교를 이해하는 틀로 지금까지 사용된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것을 대단히 자연스럽게 파악하고 있다. 김동화의 《불교학개론》 같은 불교 교과서를 통해서 실은 근대적 해석을 거친 불교를 습득한 것이다. 서양형이상학의 본체(본질)와 현상 개념은 실상과 연기라는 불교 용어로 바뀌어 불교 이해의 틀로 작동한다. 물론 이런 이해 방식은 김동화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일본 메이지 시기 불교연구에서 시작한다. 특히 현상 성립을 설명하는 연기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체 존재자의 발생 원인을 일체 유정의 업력에 있다고 보는 업감연기설, 발생 원인을 일체유정 각자가 선험적으로 가진 아뢰야식이라고 보는 아뢰야연기설, 실재적인 본체 즉 진여로부터 생기한다는 진여연기설, 일체 현상은 현상 그대로가 본체의 활현이라고 보는 법계연기설, 법계의 구체적인 실체를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식(識) 여섯 요소(六大)로 파악하고 삼라만상 그대로가 대일여래(大日如來)의 온전한 몸체[全身體]라고 보는 육대연기설, 일체 현상은 모두 원래 일활불(一活佛)로부터 연기했다는 불계연기설이 있다.(요약 인용)

김동화가 제시한 여섯 가지 연기설 가운데 ‘업감연기설→아뢰야연기설→진여연기설→법계연기설’ 같은 경우 지금도 국내 학계에서 사용하는 개념이다. 물론 그것이 전통적인 표현 내에서 사용되지만 실제 개념적으로 정착한 것은 근대 이후이다. 더구나 나머지 두 가지 육대연기설과 불계연기설은 진언밀교와 일련종의 이론으로 순수하게 일본불교의 내용이다. 불교학을 말할 때, 중국불교의 종파와 교리를 말하듯이 일본불교의 종파와 교리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김동화 자신도 말했듯 이런 개념은 당시 불교학계에서는 대단히 낯선 것이었다. 일본불교를 지향한다는 게 아니라 그의 불교 내지 불교학에는 일본불교의 전통에 대한 긍정이 분명하다.

김동화가 현상 성립을 설명하면서 제시한 연기설의 발전인 ‘업감연기설→아뢰야연기설→진여연기설→법계연기설’ 도식은 하나의 교리사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이런 도식이 가능한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이런 도식의 가능 여부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도식은 무엇을 모델로 하고 있는가이다. 사실 이런 도식은 메이지 불교학 내부에서 꽤 유통됐고, 1920년대 한국불교에서도 통용됐다. 이런 도식 혹은 사고의 유통 회로는 아마도 메이지 불교학에서 시작할 것이다. 그렇다면 메이지 불교학은 무엇을 모델로 아니면 힌트로 해서 이런 도식을 창안했을까.

이상 도식의 모델은 다름 아니라 칸트 이후 구축된 독일 관념론이었다. 유물론과 유심론(관념론)의 구분은 물체철학(物體哲學)과 심체철학(心體哲學)으로 전환됐고, 설일체유부 같은 경우 물체철학으로 배치하고, 대승불교를 심체철학으로 구분했다. 김동화가 말하는 진여나 법성은 절대적 보편체이다. 그것은 개별을 초월한 초월자이기도 하다. 관념론에서도 객관관념론, 주관관념론, 절대관념론 등의 구분이 있는데 불교의 진여 개념을 절대관념론에 배치하고 아뢰야식 개념을 주관 관념론에 배치한다. 이런 도식의 정착과 관련해서 필자가 주목하는 인물은 일본 도요(東洋) 대학의 전신인 철학관(哲學館)을 설립한 이노우에 엔료(井上圓了, 1858~1919)이다.

이노우에는 《철학요령(哲學要領)》에서 “불교에서 제기한 ‘만법은 진여이고, 진여는 만법’이라는 것은 헤겔의 ‘현상이 곧 무상이고 무상이 곧 현상’이라는 논의와 동일하다. 《기신론》에서 말한 일심(一心)에서 이문(二門)이 나뉘는 것은 셀링의 절대(絶對)에서 상대(相對)가 나뉜다는 논의와 같다. 진여는 스피노자의 본질, 셀링의 절대, 헤겔의 이상(理想, 精神)에 유사하다”라고 말한다. 스에키 후미코는 “이노우에가 진여론을 스피노자, 셀링, 헤겔 등과 비교했고 이노우에의 불교 해석은 헤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라고 평가한다. 김동화의 연기론 이해 틀도 상당 부분 메이지 불교학의 틀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6. 맺음말

지금까지 김동화의 불교학이 담고 있는 근대적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의 저작 가운데 가장 많이 읽힌 《불교학개론》을 중심으로 논의했지만 사실 그의 불교학을 분석하는 데 이것만으로는 역부족일 것이다. 필자는 김동화의 개론서류를 통해서 획득한 불교 지식이 다양한 불교문헌을 통한 것이지만 매우 분명한 근대적인 사고 틀에 기반하고 있음을 주장하고자 했다. 김동화의 불교학을 전면적으로 살피기 위해서는 그의 불교학이 어떤 앎의 회로를 통해서 구성된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김동화라는 인물 자체를 총체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의 해방 이전 활동까지 포괄한 섬세한 추적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이들 대부분을 행하지 못했다. 이후 필자의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

 

 

김영진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교수.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와 동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주요 저서로 《불교와 무(無)의 근대》 《근대 중국의 고승》 《공(空)이란 무엇인가》 《중국근대사상과 불교》 등이 있고, 역서로 《중국근대사상사 약론》 《대당내전록(大唐內典錄)》(공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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