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불교사학을 설계하다

1. 포광의 전집 《한국불교사상논고》

포광 김영수
包光 金映遂,
1884~1967

포광 김영수(包光 金映遂, 1884~1967, 이하 경칭생략) 박사를 알면 한국불교 연구의 역사가 보인다. 최근세의 격변하는 사회상황 아래 학교교육 제도가 시행·정착하는 과정에서, 그는 전통사찰 강원의 강주에서 시작하여 대학 강단을 개척하고, 학문연구의 터전을 닦아 불교사학의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의 사조에서 보면 최근세는 개혁불교기로 불린다. 그것은 조선 후기의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과 초의의순(草衣意恂, 1786~1866) 간에 시작된 선(禪)의 본질 논쟁이 가져온 불교의 수행 등에 관한 정체성 위에 전개된 새로운 시대적 과업의 성격을 띠고 있다. 백파의 3종선(義理禪·如來禪·祖師禪)과 의순의 2종선(의리선·격외선, 여래선·조사선)의 논쟁은 시대적 화두가 되고, 그 논쟁이 대를 이어 축원진하(竺源震河, 1861~1925)에 이르기까지 무려 1세기를 경과한다.

이는 결국 불교의 본질 회복으로 이어지며, 그 바탕 위에 개혁불교의 흐름이 전개된 것이다. 개혁불교는 경운원기(擎雲元奇, 1858~1936) 등의 임제종 운동, 한용운(韓龍雲, 1879~1844)의 《조선불교유신론》 등의 개혁운동, 이능화(李能和, 1869~1943)·권상로(權相老, 1879~1965) 등의 학문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진다. 포광은 이 학문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포광에 대한 관련 자료는 1983년에 편집해 낸 그의 전집 《한국불교사상논고》에 수록되어 있다. 이는 류병덕(1930~2007) 박사가 발의하고 조명기(1905~1988) 박사와 상의하여 묶어낸 것이다. 조 박사는 동국대 제자이며, 류 박사는 원광대와 전북대에서 학부, 석·박사 과정에서 지도를 받은 직제자이다. 당시 편집에 참여한 필자는 각종 강의안 등을 수습한 다음, 세 대학을 찾아 신문 등을 열람하고, 방송국의 협조를 얻어 재생한 조 박사 소장의 녹음테이프를 채록하기에 밤을 새웠다.

이렇게 하여 이루어진 전집은 전후 4권과 부록을 포함한 1책이다. 서두에는 연보 등을 싣고, 권1 불교문화·사상사에는 《불교교리발달사》 《한국사상사》 등 6권의 저술, 권2 연구논문에는 〈오교양종에 대하여〉 〈태고화상의 종풍에 대하여〉 등 14편의 한국불교에 관한 논고, 권3 일반 논고에는 〈불교대의에 대하여〉 〈편운탑과 후백제의 연호〉 등 29편의 연재글 등, 권4 국역불전에는 《국역 금강경》 《국역 선문염송》 등 3편의 육필원고를 묶었다. 부록에는 〈나의 생애와 사상〉(포광) 〈포광 스승님의 학문과 사상〉(한종만) 등 4편의 자료를 실었다.

따라서 포광의 학문과 사상은 이 전집에 망라되어 있다. 한국 불교사학의 설계 역시 이 가운데 드러난다. 다만 이후 전집에서 빠진 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금산사지》(금산사, 1933)와 《불교요의경》(내장사, 1947), 그리고 책 서문 등 유문이 흩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금산사지》는 소재, 명칭, 연혁, 사격(寺格), 유서, 고승, 사통(寺統), 당우, 불상 및 보물, 속암 등으로 금산사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였다. 이에 대하여 《불교요의경》은 대성출세품(大聖出世品), 경신귀의품(敬信歸依品), 선악인과품, 왕생정토품, 무아실상품, 불덕난사품(佛德難思品), 인세교성품(人世敎誠品), 섭심수행품(攝心修行品), 찬불발원품(讚佛發願品)으로 구성하여 삼장의 경구를 배치한 성전이다. 이른바 대중을 위한 《불교성전》이 한용운의 《불교대전》(홍법원, 1914)이 유일했을 때, 이러한 틀을 엮어 경종 삼았다.

포광에 대한 연구는 전집에 수록된 각종 기록과 제자들의 글을 비롯하여, 잡지 글과 연구논문 등이 전한다. 대체로 한국불교사 연구의 초석을 쌓아간 상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2. 강원(講院)과 대학을 잇는 생애

세수 84세까지 장수한 포광의 생애는 동서 열강제국이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격돌하는 가운데 조선왕조가 급속하게 쇠멸하던 시기부터 일제강점기와 조국광복, 그리고 한국동란을 거쳐 산업시대로 진입하던 시기에 걸쳐 있다. 태생적으로 국가와 사회의 변혁, 교계 및 학계의 근대적 변모, 그리고 현대 학문에 의한 연구풍토가 가꾸어지는 흐름을 체험하는 삶이었다. 특징적이라면 그는 이를 선구적 선택적으로 가꾸어나갔고, 거기에 ‘포광학문’이 존재한다.

포광의 생애는 편의상 4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기는 출생부터 1906년(23세) 출가건당(出家建幢)까지로 소·청년기의 성장수학시대이며, 제2기는 건당으로부터 1923년(40세) 결혼까지로 청·장년기의 주지강주(住持講主) 시대이다. 제3기는 결혼 이후부터 1945년(62세) 해방까지로 장·노년기의 교수주지 시대이며, 제4기는 해방부터 1967년(84세) 입적까지로 노·만년기의 학술연구 시대이다.

그는 1884년 6월 29일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양지촌에서 김해 김씨 상용공(相用公)과 충주 석씨(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명이 창진(昌辰), 족보 명이 용수(容修)이며, 출가 후의 법명이 영수(映遂)인데 평생 이를 사용해 왔으니 한결같이 불자이며 사문의 정체감으로 일관했음을 알 수 있다. 호는 포광, 또는 두류산인(頭流山人), 당호는 연실(然室)이다. 두류산은 지리산을 가리키므로, 그가 생장하고 활동한 지리산을 정신적 고향으로 삼고 있음이 드러난다.

역대의 고승명덕이 그러했던 것처럼 포광도 태양이 치마폭에 안기는 모친의 태몽 아래 태어났다. 이에 인연하여 후일 은사로부터 받은 호가 포광(抱光)인데 그 자신이 ‘손 수 변’을 떼고 포광(包光)으로 쓰게 되었다. 장남과 차남을 어려서 잃고 고단해 하던 모친은 그의 건강장수를 위해 스님을 모셨고 이 과정을 그는 ‘전생부터 맺어진 불교 인연’으로 본다. 나중에 모친이 서둘러 그를 입산 출가시킨 것도 타고난 총명함과 함께 태몽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3살 때, 유행하던 괴질에 걸려 부친이 사망하고 이어 화적당(火賊黨)에 의해 온 마을이 송두리째 불타버리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가족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 9세 되던 1892년에야 서당에서 《통감》과 사서삼경 등의 한학을 수학하게 되었는데, 발군의 총명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신동출세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모친의 염원에 의해 12세 되던 1895년 4월에 생가 근처의 영원사(靈源寺)에 출가하여 사미승이 되고, 12월 8일 부처님의 성도절을 기하여 환명정극(煥明正極)을 은사로 득도하였다.

득도 후 조석의 분수(焚修)와 의례작법을 익히고, 13세 되던 1896년 5월부터 강원의 학습과정인 이력(履歷)을 밟게 되었다. 천성이 총명한 그는 환희용약했다. 석월(石月)에게 《초발심자경문》 등을 배우고, 이듬해부터는 재룡(在龍)에게 《치문경훈》을 배웠다. 15세의 1898년 은사인 정극 화상에게 《서장》을 배우고, 이듬해 16세 되던 1899년에 《도서》를 마쳐 사집과를 수료했다. 17세 되던 1900년에는 《능엄경》의 연구과 일원으로 수학하고, 재룡이 해인사에 초빙되자 거기로 옮겨 《기신론》을 연구했다. 18세 된 1901년에는 《반야경》을 수학하다가 지리산 천은사의 수도암을 찾아 진응(震應)에게 《원각경》, 영원사 서응(瑞應)에게 《원각경서현담》을 수강하여 사교과를 마쳤다.

그해 겨울 해인사에서 재봉(齋峰)에게 《화엄경》을 수강하고, 이듬해 20세 되던 1903년 범어사 혼해(混海)에게 《화엄경현담》을 들었다. 그리고 21세 되던 1904년 재룡에게 《선문염송》을 수강하여 대교과를 수료했다. 전라좌도와 경상우도를 오가며 여러 고승 강백(講白)에게 수강하면서 불교의 묘리에 계합하고 고덕들의 행화(行化)를 두루 받들어 간직하게 된 것이다.

그의 향학열은 계속되어 이듬해에는 벽송사에서 정(鄭) 진사에게 사서삼경을 다시 열람함으로써 내·외전을 겸한다. 23세 되던 1906년 1월 3일에 이르러 건당식(建幢式)을 행하여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92)로부터 전해오는 임제법맥을 환명정극에게서 사승(嗣承)했다.

건당식을 마친 포광은 강주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영원사 강주가 되어 학승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지혜가 수승했던 그는 17~18세의 이력과정 시절에 이미 대리강사로 강석에 앉아 강설할 때, 용이 여의주를 머금은 듯 종횡무진하게 묘리를 밝혀나가 대중을 법열(法悅)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자격을 갖춘 강주로 거듭나게 되었으니, 그가 자리한 영원사에는 형안의 학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후 포광은 30세 되던 1913년 남원 실상사의 주지, 33세 되던 1916년 보은 법주사의 주지에 임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도 강주 생활은 계속했으므로, 일대의 장경(藏經)을 두루 섭렵하고, 그 명성은 일세를 풍미하여 35세 되던 1918년에는 마침내 서울의 불교중앙학교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는 《능엄경》 《사분율》 그리고 불교사를 강의하게 되었으니, 이 당시부터 불교사학에 대해 깊은 조예를 가졌으며, 정연한 조직력으로 불교학 각 방면의 체계화 작업에 착수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듬해 36세 되던 1919년 불교청년단체 대표로 상해임시정부를 방문하고 귀국하여 영원사로 귀환했다. 불교인의 각성과 민족혼의 계발에 뜻 둔 그에게 커다란 감동이 있었을 것이다. 37세 되던 1920년 함양 법화사의 주지로 부임했다.

이러한 포광이 남원군 소재 윤택중(尹澤重)의 2녀 여지(如脂)와 결혼한 것은 40세가 되던 1923년이다. 일제는 당시 일본불교의 제도화된 승려결혼 제도에 의해 각 사찰 주지에게 이를 강권하고 있었고, 불교개혁의 흐름 가운데는 그 당위성이 주장되기도 했다. 그는 결혼 후에도 승적이 계속되었고, 주지 등의 소임을 맡았음은 물론이다. 1928년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교수에 취임했는데, 이곳은 한국불교 역사자료를 집대성하여 《한국불교통사》(신문관, 1918)를 집술한 이능화는 물론 박한영(朴漢永, 1870~1948) 등 현대 한국불교 연구의 지남을 마련한 거성들의 연총(淵叢)이었다. 수학 과정이 각각 다른 이들 선지식의 만남은 조국을 잃은 때였으므로 더욱 각별하였을 것이다. 그 가운데 박한영은 그가 문인제자로 자칭하는 인물이었다.

이 당시에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밝히는 데 노력하며, 주옥같은 글들을 발표하여 후인들에게 방향타를 마련해주었다. 연구와 교수하는 기간이 비교적 길었던 만큼 포광학문의 전성기였던 셈이다. 한국불교사에 관한 다양한 연구성과가 당시에 발표되었다. 그러나 57세 되던 1940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일제가 강탈하여 한인 교수들을 퇴직시키자, 순천 선암사로 옮겨 주지에 임하고 이듬해에는 전북불교연합강당의 강주를 겸했다.

조국광복을 맞이한 1945년, 포광은 62세의 노년에 들어 있었다. 이후 승직을 맡는 일은 없었으나 항상 불교수행자의 모습 그대로였고, 일세를 풍미한 학덕에 의하여 곧바로 동국대 교수로 취임하여 불교사 등 여러 과목을 강의했다. 그리고 3년 후 65세 되던 1948년에 동국대 초대 학장으로 추대되어, 한국불교학계의 상징적인 존재로 우뚝 서게 되었다.

포광이 67세 되던 1950년 한국동란을 맞이하고는 향리로 돌아왔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원광대, 전북대에 재직하게 되었다. 즉 전시 전북연합대를 거쳐, 69세인 1952년 전북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원광대에 출강하고, 2년 후 70세 되던 1953년 원광대 교수로 옮기고 전북대에 출강했다. 당시 원광대에는 박길진(1915~1986) 학장을 비롯하여 이병기(1891~1968), 전원배(1903~1984), 서병재(1904~1989), 고형곤(1906~2004) 서경보(1914~1994) 등 걸출한 인물들이 있어 교유하는 마당이 마련된다. 74세인 1957년 원광대에 한국불교문제연구소를 개설하여 소장에 임하고, 이듬해 전라북도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78세 되던 1961년 전북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80세 되던 1963년, 제자인 조명기 총장의 초빙에 의하여 동국대 명예교수가 되어, 불교전적의 한글역에 만년을 잊고 살았다. 당시 번역된 많은 원고 중에 《금강삼매경론》 등은 전집에 수록되었지만 상당한 역서가 유실되었다. 이듬해 이 학교에서 학술공로상을 증여하여 노학자의 희망을 북돋아 주었으니, 만년까지 학계의 현역으로 있다가, 84세 되던 1967년 1월 10일 세수 84세로 입적했다. 다비에서 사리 15과를 수습하여 경상남도 함양군 송전리 문수동에 사리탑을 지어 봉안했다. 

3. 불교사학 연구의 기반

포광의 학문은 특히 제3기 장·노년기인 1930년대 이후에 두드러진다. 제3기와 제4기를 구분해 보면, 제3기가 주로 불교사가 중심이 되어 있다면, 제4기는 고대의 역사문화에까지 폭이 넓어진다는 특징이 드러난다.
그러면 포광의 불교사학 연구기반은 어떻게 갖추어졌는가? 우선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해박한 한문 실력을 바탕으로 내전의 경률론소(經律論疏)를 비롯하여 외전의 경사자집(經史子集) 등을 두루 섭렵한 데 있다. 동서고금의 고전에 박통한 그의 강의에는 문사철(文史哲)의 관련학도는 물론 동료 교수들이 청강하여 만석을 이루었다. 한문 원전의 해석에서부터 역사적 사실과 관련 자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질문이 이어졌고, 그의 대답은 언제나 명확한 해석이 관련 자료를 동반하여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둘째, 불교교리사의 발달과 각종 교학 연구를 바탕으로 오랜 기간 강단을 지키면서 교계와 학계의 상황에 대응한 데 있다. 그의 학문은 넓고 깊은데, 불교사학의 전개를 위해 한국사상사는 물론 중국과 인도의 불교사, 그리고 인도철학에 이르기까지 분명한 체계를 세워놓고 있다. 강의를 위해서 여러 가지 교재를 마련했는데, 예컨대 《인도철학》 등은 학생들이 흥미를 느끼도록 가사체로 구성했다.

불교사를 비롯한 이들 교재는 한결같이 학계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따라서 포광은 각 분야에 대해 독특한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 점은 불교사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불교철학 가운데 난해한 유식학(唯識學)이나 인명(因明)이론 등에 대해서도 해박하여 걸림이 없었다. 불교사상의 본질을 통효(通曉)한 위에 전개된 학문이라는 말이다.

포광은 자신의 사상이 몇 차례의 변천이 있었음을 분명히 했다.

7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나의 사상은 지식의 진보발전을 따라 첫째 신불숭배(神佛崇拜), 둘째 선악인과, 셋째 진여수연(眞如隨緣), 넷째 인신장존(人身長存), 다섯째 심신일체(身心一體), 여섯째 애진중고식(愛盡衆苦息, 사랑이 다하면 뭇 고통이 식는다), 이렇게 여섯 번이나 변천되었다. ……최후에는 애진중고식하면 중생심이 곧 불(卽是佛)이요, 불이 곧 중생심(卽是衆生心)이라, 이는 즉 심즉불(心卽佛)의 뜻을 오입(悟入)함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중시하는 애진중고식은 불교 진리에 깨달아 계합하는 계기, 곧 오도(悟道)의 체험을 말한다. 그가 25세 되던 1909년에 있었던 것으로 회고하고 있다.

애진중고식의 불교 진리를 오입하게 된 것은 나의 연령이 26세 되는 해 2월 어느 날로, 기초연(奇超然)이라는 학인에게 《육조단경》을 가르치던 순간이다. 육조대사께서 《열반경》을 40년 강했다는 지도(至道) 선사가 “제행이 무상이란 생멸법이라, 생멸이 다하면 적멸이 극락이라(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란 것을 가지고 의문하는 것을 해답하여 주면서, “너의 말은 집각생사(執恪生死)의 견해이다.”라고 훈계하는 구절을 설명하던 차에, “집각생사” 하면서 나는 설명이 중지되고 묵언이 한참 계속되었다. 잠시 후에 나는 “그렇지” 하면서 빙그레 웃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불교경전에 대한 나의 전래(前來)의 모든 의혹은 일시 해소되어 버렸다. 그 후 언제인가 《아함경》을 열람하다가 애진중고식이란 것을 보고 《단경》의 집각생사나 《아함》의 애진중고식은 똑같은 의미인데 오직 《단경》의 것은 생에 대한 애착심을 방하(放下)치 못한 것을 경책하는 말씀이고, 《아함》의 것은 생에 대한 애착심만 방하하면 안락하니라 하는 것이 많을 뿐이라고 판정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포광의 오도체험은 사생관을 확립시키면서 인생의 격을 한 단계 올려놓았고, 이것이 그의 생애를 일관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런 바탕 위에 전개된 그의 불교학을 류병덕 박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포광 박사의 불교학은 매우 광학(廣學)이면서도 주체성(主體性)이 뚜렷하다는 특징이 있다. 불교가 한국에 유입되고부터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밝히는 데 있어서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학자가 사제(四諦), 십이인연(十二因緣), 팔정도(八正道)라는 기본교리의 전달에 그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그는 젊은 시절 이미 불교의 본질에 통효하고, 이후는 오히려 불교가 어떤 사상적 특징을 가지고 전개되었느냐를 밝히는 데 주력해 왔다. 예컨대 화엄학을 포광 박사만큼 정통한 인물이 없었는데, 그 저류에 반야사상(般若思想)이 깔려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당시의 불교학자들은 한결같이 불교의 기본원리는 혜원(慧遠, 335~417)의 《대승의장(大乘義章)》 원전을 놓고 풀어가는 것을 능사로 알고 있었다. 혜원은 사제를 밝히는 데 있어서 고·집(苦集)은 세간법, 멸·도(滅道)는 출세간법으로 나누어 보고 있는데, 포광 박사는 이를 답답하게 여겼다. 그는 도(道)에 가장 큰 무게를 두었다. 도를 구도자의 주체성으로 본다. 즉 지혜발현의 주체가 되는 것이 도라고 본다. 그 입장에서 고관과 집관, 그리고 멸관을 풀어나간다. 그렇게 함으로써 달관된 도관이 되며, 여기서 지혜가 발현된다는 것이다. 고는 인연에 따라 생기니 실체가 없다. 모든 것이 다 고이지만 그렇다고 낙을 찾아가는 그러한 선택적 사고는 주체자라고 할 수 없다. 모두를 고로 볼 때 인연취집(因緣聚集)이므로 달관의 고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애진중고식(愛盡衆苦息)이 된다. 애욕과 집착을 떠난 마음에 고가 쉬어지며, 편안함을 얻게 되는 원리이다. 팔정도 역시 정견(正見)의 견지가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이다. 오견, 편견, 탁견이면 안 된다. 정견이 지혜주체의 관점이다. 이렇게 보면 정견이 팔정도의 한 분야라기보다는 정견이 주제이며 이를 위해, 즉 정견이 되려면 나머지 7정도가 필요하며, 그렇게 될 때 지혜발현이 가능해진다.

대승불교를 열어가는 데 있어서 육바라밀(六婆羅蜜)을 말하는데, 그것 역시 보시(布施)를 주체로 본다. 십지보살(十地菩薩)이 되어 대승으로 가는 실천행의 포괄적인 표현이 보시이다. 보시하기 위해 지계(持戒) 등의 5바라밀이 요청된다는 말이다. 대승사상에서 자리이타를 말하는데 이에도 몇 단계가 있다고 포광 박사는 말한다. 첫째 단계는 내가 이로워야 너도 이롭다는 것으로, 결국은 이기적 구도자가 되고 만다. 둘째는 나도 이롭고 너도 이롭다는 것으로, 이는 실체의 생활상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결국은 영미의 공리주의 철학에 유사해지고 만다. 셋째는 너의 이로움을 나의 이로움으로 보는 단계이다. 이를 자리(自利) 즉 이타(利他)라 할 수 있다. 내가 이롭다는 그것이 곧 저 존재를 이롭게 하는 것으로 봄으로써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 마음이 바로 대승적 발심이다. 이를 우리는 자각각타(自覺覺他)라고도 한다.

이타심이란 구도자가 공(空)한 마음으로 원인만 조촐하게 하는 것이다. 종자 속에서 그 계기를 만나, 자각각타와 자리이타 즉 성자의 그 가르침을 알아 불성을 찾을 때 초심(初心)이 살아나게 된다. 포광 박사는 “발심과 필경은 둘이 아니요, 두 마음 중에서 초심을 내기가 어렵나니라. 자신은 아직 득도하지 못했으나 타를 인도하리라, 그런 까닭에 초발심에 경례하는 바이라(發心畢竟二無別 如是二心初心難 自未得度先導他 是故敬禮初發心)”라고 자주 외웠는데, 《중론》에도 나오는 게송이다. 부처님께 절하는 것도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남 먼저 초발심을 일으킬 수 있었나이까”라는 뜻에 있다고 하면 이러한 초발심의 중요성이 분명해진다.

불교교리의 본지를 밝히는 포광의 사상이 얼마나 독특했는지 강조된다. 이와 관련해 보면, 일찍이 포광은 〈화엄사상의 연구〉를 발표하여 불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일이 있었다. 이 연구는 화엄학 연구의 토대를 쌓은 역할을 했지만 문제는 그 서문이었다. 이에서 그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외동아들 라훌라의 임신 출생을 정각(正覺) 이후 환궁(還宮)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고, 이에 대한 반박 기사가 불교 매체를 장식하였다.

그는 실상사 한편에 있는 옛탑, 곧 편운탑에 새겨진 연호(年號)에 주목하였다. 그것을 후백제의 연호로 풀이하면서 후백제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할 정도의 통치체계가 갖추어졌음을 밝혀낸 것이다. 그의 학설은 그렇게 시대를 장식하는 힘이 있었다.

 4. 오교양종과 조계선종의 체계

이 ‘오교양종과 구산선문’ 그리고 ‘조계선종’은 포광의 불교사학을 대표하는 주제어이다.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장식하는 대표적인 불교 인물이 원효(元曉, 617~686), 의상(義湘, 625~702)이라면, 불교사를 대표하는 불교역사의 기록이 이들이며, 그의 연구성과에 의한 것이다.

포광의 불교학 연구는 불교사 중에서도 한국불교사의 정리가 가장 두드러진 업적이다. 이들은 주로 《진단학보》 《신불교》 등의 잡지를 통해 발표되었다. 〈오교양종에 대하여〉(1937), 〈조선불교 종지에 대하여〉(1937), 〈조계선종에 대하여〉(1938), 〈조계종과 전등통규(傳燈通規)〉(1942~1943), 〈태고화상의 종풍(宗風)에 대하여〉(1942), 〈종조(宗祖) 종명(宗名)의 질의에 대하여〉(1944)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한국불교의 종파 연혁을 오교구산 시대-오교양종 시대-선교양종 시대의 흐름으로 파악했다.

오교구산 시대에서 오교[敎門]의 성립을 다루어 열반종(涅槃宗)은 보덕(普德, 7세기)이 《열반경》을 소의경전으로 하여 개창하였고, 계율종(戒律宗)은 자장(慈藏, 7세기), 법성종(法性宗)은 원효, 화엄종(華嚴宗)은 의상이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개창하였으며, 법상종(法相宗)은 진표(眞表, 8세기)가 개창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밖에 소승종(小乘宗)은 아도(阿道), 총지종(摠持宗)은 혜통(惠通, 7세기), 신인종(神印宗)은 명랑(明朗, 7세기), 천태종은 의천(義天, 1055~1101)의 개창으로 밝힌다. 구산[禪門]은 도의(道義, ?~784~821~?)의 가지산문(迦智山門), 홍척(洪陟, ?~826~?)의 실상산문(實相山門), 혜철(惠徹, 791~861)의 동리산문(桐裡山門), 현욱(玄昱, 787~868)의 봉림산문(鳳林山門), 도윤(道允, 800~868)의 사자산문(師子山門), 무염(無染, 800~888)의 성주산문(聖住山門), 범일(梵日, 810~894)의 사굴산문(闍崛山門), 도헌(道憲, 824~882)의 희양산문(曦陽山門), 이엄(利嚴, 866~932)의 수미산문(須彌山門)을 말한다. 오교가 삼국시대 말에서부터 통일신라 중기까지라면, 구산은 신라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역사이다.

오교양종 시대는 고려 숙종 조 이후의 불교종파를 총칭하는 말로, 포광은 역사상에 나타나는 다양한 종파를 오교양종에 대비시켰다. 오교의 흐름을 법상종은 자은종(慈恩宗)-자은종-자은종으로, 원융종은 화엄종-화엄종·도문종(道門宗)-화엄종으로, 열반종은 시흥종-열반종·소승종-시흥종으로, 법성종은 중도종-중도종·신인종(神印宗)-중신종으로, 계율종은 남산종-남산종-총지종(摠持宗)으로 이행된 것으로 보았다. 구산은 조계종-총지종·조계종-총남종(摠南宗)·조계종으로, 천태종이 개창되어 천태법사(法事)종·천태소자(疏字)종-천태종으로 전개된 것으로 파악하여 이를 양종으로 보았다.

그리고 선교양종 시대는 교문과 선문의 대립에서 선문의 독존으로 전개된 조선시대의 흐름을 정리했다. 태고보우 이후 조선시대의 선종을 서산휴정(西山休靜, 1520~1604)의 서산파와 부휴선수(浮休善修, 1543~1615)의 부휴파로 나누고, 서산파를 다시 사명파(四溟派), 편양파(鞭羊派), 소요파(逍遙派), 정관파(靜觀派)로 나누었다. 부휴파와 서산 4파를 사자상승(師資相承)하여 오늘의 종통법맥(宗統法脈)을 이루고 있으니, 포광의 오교양종에 대한 고찰은 삼국시대 불교에서 신라-고려-조선을 거쳐 근대에 이르는 통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포광은 조계종의 종취(宗趣)를 분명히 하면서 “이는 달마(達摩, ?~528)의 법손으로 조직된 교단인데, 오교를 상대할 때에는 선적종(禪寂)宗이라 하고, 천태종을 상대할 때는 조계종이라 불렀다”고 보았다. 후일 〈조계문답〉에서 그는 “고려 조계종의 종조는 구산(九山) 선사요 조선불교 조계종의 종조는 태고보우 국사”라고 보고, 종지를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설을 전개했다. 〈태고화상의 종풍에 대하여〉나 〈종조·종명의 질의에 대하여〉 등의 논고는 이를 보완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한국불교의 주맥을 이루는 조계종과 관련된 연구이다. 한국불교가 일본강점기를 경험하면서 1910년 임제종 운동과 여러 형태의 중앙통제기관을 거쳐 1941년 조계종으로 명명하게 된 것을 보면, 그의 연구는 당시 교계의 주요사안을 다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연구 주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두된 현안문제에 그치지 않고, 한국불교의 방향을 열어가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당시 교계나 학계가 그를 선지식으로 삼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할 것이다.

포광의 이러한 학설은 일본학자 다카하시 도루(高橋亨, 1878 ~1967)의 〈조선불교 종지변천〉 등의 논고를 반박한 1930년대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각국사 묘지(墓誌)〉와 〈의정부 상계(上啓)〉 등의 자료를 이용하여 한국 불교사학의 기본적인 설계를 마친 셈인데, 한국사 정리에서 분야사 연구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들은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그의 오교구산설이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연구성과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가 이루어졌음은 말할 나위 없다.

특히 신라시대의 오교개종설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많다. 예컨대 김영태 박사는 “오교는 그 사적 용례를 통해서 볼 때 다섯 교종이라는 종파 수적인 용어보다는 오히려 당시 교학계 교단을 총칭한 말인 것처럼 보인다. 오교대선(五敎大選)이나 오교도승통(都僧統)이나 오교법석(法席)이라는 사례를 통해서 특히 그러하다.”고 반론했다. 다섯 교종이 신라시대에 있었다는 사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종익 박사는 오교를 〈대각국사 묘지〉의 기록에 부회한 것은 착오라고 지적하면서 “대각묘지에 나오는 열반·법상종은 본디 우리나라에 없던 종명이다.”라 주장했다.

그러면 이와 같은 포광의 학설이 갖는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계속 유효한 까닭은 무엇인가? 허흥식 박사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본다.

김영수가 세운 종파에 대한 정의는 몇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탁월한 것이고, 이 정의를 바탕으로 신라말까지 오교구산이 성립되고 고려 중기에 오교양종이 있었다는 학설은 오랫동안 학계의 통설로 받아들여졌다. 종파를 중심으로 한국불교사를 이해하려는 이들 사이에 부분적인 수정을 내세우기도 했지만 오교구산설은 최근까지 높은 지지를 받으면서 통설화되었다.
 
한국학의 여명기를 살아온 포광은 한국불교사의 지평을 여는 시기를 담당하였던 만큼 그 연구는 어느 것이나 새로운 체계를 세우는 입장에 서 있다. 학설에 보완할 사항이 없지 않음에도, 여전히 통용된다는 것은 이를 대치할 만한 새로운 학설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인간적인 면에서 포광은 친일학자로 분류되는 경우가 있다. 일제 강점하에서 대일본제국 무운장구의 기원법요를 거행하고, 시국강연회에서 〈동양평화의 정신〉이라는 주제의 친일강연을 했으며, 일제 말기에 선암사 주지로서 총독부에서 할당된 일제 군부 비행기 대금을 총본산 태고사 총무원에 납부했다는 행적을 문제 삼은 것이다.

반면 불교중앙 총무원장으로 동국대학교 총장을 지낸 김법린(1899 ~1964) 박사는 〈3·1운동과 불교〉라는 글에서 김영수의 항일업적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다.

(1919년) 8월 중순인가, 김포광 강백을 (상해임시정부에) 밀파하였다. 수원(隨員)으로 김상헌(金祥憲) 씨가 동행하였다. 제산(諸山)의 기덕첨위(耆德僉位)는 이 대표 파견과 운동자금의 조달에 갸륵한 숨은 정성을 다하였다.

일제강점기라는 질곡을 거치면서 드러난 행적의 문제는 극단적인 평가로 나타나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를 후인들에게 맡기더라도, 포광의 한국불교 연구 특히 불교사학의 설계는 오늘의 우리 학계를 건재케 하는 원천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

 

양은용
원광대학교 한문학과 명예교수. 원광대학교 및 동 대학원 졸업. 일본 교토불교대학 대학원에서 〈고려불교의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한국불교사상사를 전공하면서 원광대학교 한국문화학과 교수, 한국종교학회장 등 역임. 주요 논저로 〈한일양국의 미륵상조성과 미륵사주불〉 〈신라 심상과 일본의 화엄학〉 등의 논문과 《한국근대사상사탐구》 《한국학 여명기의 인물과 학문》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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