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방식으로 불교사 서술한 학승

1. 머리말

금명보정(錦溟寶鼎, 1861~1930)은 학계는 물론 불교계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전통적 학술 방식에 의해 불교사 서술을 시도한 근대의 학승이었고 강학의 전수를 통해 평생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 또한 송광사 주지를 역임하면서 당시 교단 내에서 위상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대외 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청허계와 함께 조선 후기 양대 계파의 하나였던 부휴계의 적통을 이은 그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집성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고 많은 역사 관련 저작을 남겼다. 특히 고려 후기의 선승이자 학승인 보조지눌의 유풍을 계승하고 선양하고자 하였으며 지눌로 상징되는 조계종의 역사적 정통성에 주목하였다. 금명보정이 제창한 조계종명(曹溪宗名)은 이후 학계의 논의를 거쳐 불교계의 공론으로 확산되었고 한국불교의 대표 종명으로 자리 잡았다.

2. 삶의 궤적과 시대와의 조우

금명보정은 인조의 반정공신 학성군 김완의 후손으로 1861년 전라도 곡성군 운용리에서 태어났다. 15세 때인 1875년 송광사에서 금련경원에게 출가하였고 경파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그는 당대의 유명한 교학 종장들에게 승려 교육과정인 이력과정을 배웠고 송광사 출신 허주덕진 밑에서 참선하여 의심을 깨쳤다. 일생 동안 송광사를 주요 근거지로 하여 화엄사를 비롯한 호남 일대에서 주로 활동하였는데, 송광사는 부휴선수(1543~1615) 이후 부휴계의 본산 격 사찰이었다. 또 호남은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이 이 지역 학승들과 유불 교류와 사상적 접목을 시도한 지역으로 고증학적 방식에 의한 불교사 서술 전통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지역적 배경에서 성장한 보정은 한국불교의 역사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고 많은 저작을 통해 전통의 집성을 추구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인 1898년 그는 선교양종 자헌의 품계를 받아 주지에 해당하는 송광사 도총섭을 맡았고 이후 4번에 걸쳐 직을 연임하였다. 도총섭직은 1911년 총독부의 사찰령이 반포되면서 공식적으로 명칭이 주지로 바뀌었는데, 1904년에 직을 그만둔 보정은 1921년에 다시 추대되었지만 결국 고사하였다. 앞서 그가 도총섭직을 수행하고 있던 1899년에 고종은 해인사의 고려대장경을 3부 인출하여 삼보사찰인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에 각각 안치하게 하였다.
이때 보정은 송광사 승려 50명을 해인사에 파견하였고 인출된 대장경 한 질을 송광사 장경전에 봉안하였다. 또 이 무렵 송광사가 위치한 순천의 하급관리들이 ‘작란’을 일으켰고 이에 보정이 행정 교섭을 맡아 송광사에 부과되었던 잡역을 면제하고 각종 폐단을 금지하는 조치를 칙명으로 받아냈다.
19세기 말에는 정국의 혼란과 외세의 진출 속에서 대한제국과 황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불사와 법회가 자주 벌어졌고 여기에 황제를 필두로 정부기관이 직접 재원을 조달하는 등 이전과 다른 양상이 펼쳐졌다. 1902년 4월에는 궁내부 칙령에 의해 사찰과 승려를 관리하는 공식기관인 사사관리서가 서울 인근 원흥사에 세워졌고 원흥사는 전국 사찰의 대법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때 반포된 〈대한사찰령〉과 〈사사관리세칙〉에는 “사원의 잡역 등을 혁파하고 관속 및 민간 잡배의 토색과 주구 등을 일체 못하게 할 것” 등을 규정하여 사찰에 대한 사적 침탈을 법적으로 금지하였다. 이때 승보사찰 송광사는 전국 16개 중법산(中法山)의 하나로 지정되어 호남을 대표하는 사찰로 인정받았다.
이 시기에 보정은 도총섭으로서 송광사의 공무를 담당하기 위해 서울에 종종 왕래하였다. 1902년 10월에는 고종이 기로사를 세우고 원당을 설치하기 위해 각지의 고승들을 초빙하였는데, 이때 상경한 보정은 황제의 병환 쾌유를 위해 열린 원흥사 화엄회에 참석하여 전국의 고승들이 운집한 가운데 설법하기도 하였다. 다음 해에는 정3품관 정명원이 송광사에 와서 고종의 환갑을 기념하는 성수전을 낙성하고 위패를 봉안하였는데 고종은 원당의 축조 비용으로 금 1만 관과 내탕금 5만 냥을 내려주었다. 보정은 이 성수전의 건립을 위해 몇 차례 직접 상언을 올렸고, “승려 또한 신하이며, 군주를 위하는 마음은 본래 부처를 위하는 데에 뜻이 있으므로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은 곧 부처를 공경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원당 봉안의 공덕과 진휼해 준 황제의 은택을 기렸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송광사에서는 큰 규모의 백일재가 열렸는데 보정은 고종이 송광사에 심은 3대 인연과 공덕을 기리면서 후세에 환속하여 다시 제왕이 되기를 염원하는 천도문을 지었다.
보정은 대한제국의 불교 관리기관인 사사관리서 체제가 막을 내리게 된 1904년에 도총섭을 그만두었고, 1905년 을사늑약으로 통감부 체제가 시작된 후에는 대외적 활동을 일체 하지 않았다. 대신 1908년 의병이 조계산에 숨어 일본군에 항거하자 일본군의 방화로 인해 몇 개의 암자가 불타고 얼마 후 송광사가 전소될 위기에 처하자 그는 절을 지키고 순교할 것을 서약하였다. 보정은 당시를 ‘동란서비(東亂西飛)’의 시대로 보고 나라의 운수는 1902~1903년에 기울었고 백성의 마음은 1904년과 1905년 사이에 크게 동요하였다고 한탄하였다. 또한 강상(綱常)이 바로 서고 어지러움에 시대의 성쇠가 달려 있는데 상하에서 강상이 문란하고 사람들이 각기 자유로울 뿐 마땅한 일을 하지 못한다고 하여 당대를 혼란의 시대로 규정하였다.
결국 1910년에 일제의 강제병합으로 한국은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1911년에는 총독부가 불교 교단을 직접 관할, 통제하기 위한 법적 제도로서 사찰령이 반포되었다. 사찰령의 핵심은 30본사 주지의 인사권과 사찰 재산의 최종 처분권을 조선 총독이 행사하는 것으로 한국불교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 식민지 종교정책의 전형이었다. 30본사의 하나가 된 송광사는 1912년 1월에 본말사법을 신청하였고 교종본사 봉선사 다음으로 가장 늦은 1913년 2월에야 인가를 받았다.
이 시기에 보정은 대외적 활동을 하지 않고 저술과 교육에 전념하였는데, 송광사에 보통학교가 세워지자 한문과 불교를 가르쳤고 1914년 강원을 설치하여 강석을 맡았다. 그는 교육 문제만큼은 전통적 방식과 근대식 교육을 혼용해야 한다고 보았는데, 승려의 경우에도 안으로는 선과 교, 염불을 가르치고 밖으로는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의 단계별 과정을 통해 신학문을 습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문명개화를 위해서는 세계의 풍류와 동서양의 철학을 배워야 함을 강조하였고 실제로 제자 용은완섭을 일본 도쿄에 유학 보내기도 하였다. 1915년 이후 보정은 지리산 천은사를 시작으로 대흥사, 태안사 등을 유력하며 저술에 전념하였고 1922년에 다시 송광사로 돌아왔다. 1923년 송광사 학당을 이전하여 벌교에 송명교당이 건립되자, 그는 “불교의 포교로 시작하여 민족 양육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여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는 말년을 송광사에 주석하면서 강원에서 후학 양성을 담당하다가 1930년 2월에 입적하였다.

3. 사승 계보와 저작의 특징

금명보정은 《동사열전》의 편자인 범해각안, 화엄교학에 정통한 함명태선 등 당대의 교학 종장들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화엄 강주로 일생을 살았다. 법맥에 있어서는 송광사 부휴계의 주류 계보를 이었는데, 비문의 〈계보〉에도 풍암세찰, 응암낭윤에서 금련경원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계승한 것으로 나온다. 그는 부휴계의 조사인 부휴선수와 그 적전인 벽암각성을 원세조(遠世祖), 풍암세찰과 그 스승 영해약탄을 근세사(近世師)로 추숭하는 등 자파의 전통을 선양하였다.
보정의 제자로는 용은완섭, 백은종택 등이 있고 해은재선이 강학을 계승하여 1918년과 1928년 두 번에 걸쳐 강석을 전수하였다. 비문의 음기에 나오는 수업 문생 가운데 유명한 이로는 만암종헌(송만암), 기산석진(임석진)을 들 수 있다. 송만암은 백양사 출신으로 근대불교의 대표적 학승인 박한영에게 수학한 바 있고 해방 이후에는 고불총림을 만들어 불교 수행 전통의 계승을 추구하였으며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불교중앙학림을 졸업한 임석진은 보정의 비가 건립되었을 당시 송광사의 주지였고 《송광사지》를 편찬하는 등 보정의 유풍을 이어 송광사의 역사를 집성하였다. 한편 그의 비문을 지은 송태회는 평생 깊은 우의를 나눈 사이로 1917년 《조선본말사찰일람지》를 지었고 송광사 및 부휴계와 관련된 다수의 기문을 지었다.
보정은 일생 동안 수많은 저작을 남겼는데 특히 불교사에 정통하여 역사 전통의 집성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의 〈행록초〉에는 〈저술〉과 〈편록〉이 구분되어 나오는데, 먼저 〈저술〉로는 《시고(詩稿)》 3권, 《문고(文稿)》 2권, 《불조찬영(佛祖讚詠)》 1권, 《정토백영(淨土百詠)》 1권이 있고 〈편록〉으로는 《조계고승전(曹溪高僧傳)》 1권, 《석보약록(釋譜畧錄)》 1권, 《저역총보(著譯叢譜)》 1권, 《삼장법수(三藏法數)》 1권, 《속명수집(續名數集)》 1권, 《염불요해(念佛要解)》 1권이 있다. 그 밖에도 《대동영선(大東詠選)》 《질의록(質疑錄)》 《십지경과(十地經科)》 《능엄경과도(楞嚴經科圖)》 등이 소개되어 있다. 한편 〈비문〉에는 시문집과 편록을 합쳐 수십 종의 저작이 있다고 나오지만 실제 기재된 것은 〈행록초〉의 저작 내역과 비교할 때 《향사열전(鄕史列傳)》이 추가된 정도이다.
이들 중 시문집인 《다송시고(茶松詩稿)》 3권과 《다송문고(茶松文藁)》 2권, 《불조록찬송(佛祖錄贊頌): 불조찬영》 1권, 《정토찬백영(淨土讚百詠): 정토백영》 1권, 《염불요문과해(念佛要門科解): 염불요해》 1권, 《조계고승전》 1권, 《저역총보》 4권, 《대동영선》 1권, 《질의록》 1권이 한국불교전서 제12책에 실려 있다. 또한 〈비문〉과 〈행록초〉에는 나오지 않는 《보살강생시천주호법록(菩薩降生時天主護法錄)》 1권과 《백열록(栢悅錄)》 1권도 보정의 저술로 같은 책에 수록되었다. 이처럼 서명이 확인되는 그의 저작은 총 17종에 이르며 이 중 11종이나 되는 책이 한국불교전서에 들어가 있다.
저작의 내용상 특징은 우선 불교사와 관련된 책이 많다는 점이다. 본격적인 불교사서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조계고승전》 《석보약록》 《불조록찬송》이 있고 《저역총보》 《질의록》 《백열록》과 《대동영선》도 불교전적, 비문 및 문집 등의 목록, 불교 용어와 개념 해설서, 불교 관계 기문과 시문 선집 등으로 전통의 총괄 집성이라는 차원에서 광의의 역사 범주에 포함된다. 19세기와 20세기 초는 역사서, 사전류, 족보, 문집 등의 저술 및 간행이 매우 성행했던 시기이고, 불교계에서도 《동사열전》 《산사약초》 등의 불교사서와 각 사찰의 연혁과 기록을 수록한 사지(寺誌)의 편찬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불교사 및 전통의 정수를 담아낸 보정의 저작 내역에서도 이러한 시대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저술 내용을 보면 선과 교, 염불을 함께 수학하는 조선 후기 삼문수업(三門修業)의 전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젊어서 송광사에 반년간 머물며 보정을 만나 본 적이 있는 권상로는 그가 교학과 참선, 염불 모두에 정통하여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고 평하기도 하였다.
보정은 특히 불교사에 큰 관심을 쏟았는데, 《불조록찬송》(1921)에는 서천 28조와 동토의 조사 89인, 《화엄경》 및 화엄 관련 조사 86인, 신라 조사 22인, 선종 구산선문 조사 9인, 해동 열조 112명, 지눌 이후 조선 후기 부휴계를 망라하는 조계종 조사 105명의 명단과 해당 찬송이 기록되어 있다. 인도와 중국에 이어 한국불교사 전체를 시야에 넣으면서도 화엄학 전통과 조계종 계보를 별도의 항목으로 정리한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는 조선 후기에 성행한 화엄학과 교학전통의 계승, 부휴계 중심의 불교사 이해와 조계종명 제창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또한 앞서 나온 《조계고승전》(1920)에서 보조지눌 이후 수선사의 계보와 송광사를 주요 근거지로 한 조선 후기 부휴계의 조사, 즉 조계종의 고승 계보를 특화하여 그 전기를 수록했다는 점에서 이들 책을 편술한 보정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다.
그가 이처럼 불교사에 큰 관심을 가지고 많은 저술을 남기게 된 데에는 《동사열전》의 저자인 범해각안의 영향이 매우 컸을 것으로 보인다. 보정은 젊어서 각안에게 수학하였고 그의 행장과 시집 발문을 직접 지었을 정도로 깊은 사제의 연을 맺고 있었다. 각안은 법맥상 청허계 편양파에 속했고 대둔사(대흥사) 12대 종사이자 18세기 화엄강학의 대가였던 연담유일의 문손이자 선 논쟁과 차로 유명한 초의의순의 제자이기도 했다. 대둔사는 정약용의 지도와 유불 교류에 의해 19세기 초 《대둔사지》가 편찬되는 등 불교사 서술과 교학 연구의 전통이 깊은 사찰이었고 각안은 〈대둔사지약기〉를 쓰기도 했다.
각안은 20여 편에 달하는 많은 저술을 지었는데 《동사열전》 외에도 〈사략기(史略記)〉 〈사비기(四碑記)〉 등 역사 관련 글이 있으며 불교용어 사전인 《명수집(名數集)》, 시선집인 《동시선(東詩選)》, 경전을 소개한 〈유교경기(遺敎經記)〉 〈사십이장경기(四十二章經記)〉 등이 저작 목록에 들어 있다. 이처럼 비록 법맥상의 계파는 달랐지만 보정의 불교사에 대한 관심은 각안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고 저작 내용과 경향성에서도 양자는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이들의 구체적인 불교사 인식이 부휴계와 청허계라는 자파 전통의 계승과 정통성 확보에 경도된 감은 있지만 한국불교 역사전통의 집성 및 선양이라는 점에서는 양자의 지향이 같았다.

4. 부휴계 중심의 조계종 인식

보정은 조선 선종의 법맥에 대해 “부휴와 청허가 전법의 비조가 되었고 원효와 보조는 신라와 고려의 도를 얻은 산종(散宗)”이라고 기술하였다. 이러한 전법 인식은 고려 말의 태고보우가 중국 임제종의 정맥을 전수해 온 후 그 법이 청허휴정 등으로 이어졌다는 조선 후기 임제태고 법통설에 입각한 것이다.
임제태고 법통설은 17세기 전반 편양언기 등에 의해 정립된 후 청허계와 부휴계 모두에서 수용되면서 불교계의 공론으로 자리 잡았다. 보정 또한 자파의 조사인 부휴선수가 처음에 화엄교학을 배웠지만 깨달은 이후 임제종이 되었다고 하여 부휴계의 법맥과 가풍이 임제 계열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별도로 보조지눌의 유풍과 송광사의 부휴계 전통을 결합시킨 또 다른 차원의 불교사 인식이 표출되었는데 바로 조계종에 대한 재인식이었다. 조계종은 고려에서 조선 초까지 한국 선종의 대표적인 종파로 존재하였지만 공식 종단이 없던 조선 후기에는 임제종의 법맥을 계승한다는 임제태고 법통이 성립되어 정통성을 확보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망각의 장에 갇혀 있던 역사 속의 조계종을 끄집어내어 조계종명을 다시 내세운 것은 매우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보정은 조계종의 표방과 함께 그 종조로서 보조지눌을 선양하고 위상을 제고하는 작업을 병행하였다. 즉 지눌은 선종 9산은 물론 교종까지 아우르는 선교 통합의 종으로 조계종을 개창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와 함께 조계종의 정통성은 지눌과 수선사 16국사를 거쳐 조선 후기 부휴계를 통해 계승되고 발현되었다고 보았다. 그가 편술한 《조계고승전》에는 임제태고 법통의 계보와 나옹혜근, 무학자초 등 여말선초 나옹계 고승들의 명단은 기재되어 있지만 조선 후기 최대 계파였던 청허계에 속한 승려들은 거의 취급하지 않았고 대신 부휴계 승려의 전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조계종의 종조인 지눌의 권위를 높이는 한편 지눌의 조계종 유풍을 부휴계가 계승해 왔다고 보는 것이 보정의 조계종 인식의 실체였다.
여기서 고려시대의 보조지눌과 조선 후기의 부휴계는 현격한 시간 차와 법맥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송광사라는 공간과 사상적 지향점을 공통의 매개로 만날 수 있었다. 보정은 지눌이 조계산(송광사)의 조사이며 조선 후기 삼문(경절문, 원돈문, 정토문) 수업의 종주라고 하면서, 정혜쌍수의 핵심이자 중생구제의 방편인 이 선, 교, 염불의 전통이야말로 지눌의 개창 이후 송광사에 면면히 전해져 왔음을 강조하였다. 이는 선교겸수를 표방한 지눌의 보조 유풍을 부휴계가 계승하고 있다는 자의식의 표명이며 자파의 정통성을 지눌과 조계종에서 찾은 것이다.
한편 보정이 부휴계의 입장에서 조계종의 정통성을 내세울 무렵인 1910년대 후반 송광사에서는 부휴계 조사의 탑비가 중건되거나 새로 이안되는 일이 일어났다. 즉 보조암 북쪽에 있던 풍암세찰, 벽담행인 등 3인의 조사 탑이 부도전의 본래 자리로 옮겨졌고, 1920년에는 보정의 주도로 부휴선수의 탑비가 다시 세워지면서 조계종주로 현창되었다. 여기의 조계종은 사실상 부휴계를 직접적으로 의미하는 것이었고 보정은 부휴종이라는 명칭을 쓰기도 했다. 이처럼 보정의 조계종 인식과 송광사 측의 현창사업은 지눌을 내세워 부휴계의 역사적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일련의 기획이자 시도였다.
보정은 일반 불교사 이해에서도 부휴계 위주의 역사인식을 그대로 표출하였다. 그는 권상로의 《불교약사》에 대한 서평에서, 《선문염송》과 《염송설화》 등은 지눌의 수선사 계통에 의해 송광사에서 만들어졌는데 그 사실이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고 또 부휴계 백암성총이 17세기 말에 불서를 대대적으로 간행한 사건도 누락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편양파 설파상언이 《화엄은과》를 저술한 것은 실려 있지만 백암성총이 《화엄회편》을 간행한 공적 등은 기술하지 않았다고 하여 비판하였다.
이처럼 보정이 지나치게 부휴계 중심의 불교사 인식을 표명하게 된 배경에는, 현실적인 필요성과 이해관계도 개재되어 있었다. 당시 계파와 법맥의 문제는 사찰의 운영 및 유지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1912년 총독부에서 반포한 〈본말사법〉의 총칙에 의하면 본말사의 주지는 청허와 부휴의 법손으로 한정되었고 〈송광사본말사법〉에는 부휴계 법손만이 주지를 맡을 수 있다고 명시해 놓았다. 부휴계는 이 밖에도 법주사, 동화사, 은해사의 본말사 주지가 될 수 있었는데, 당시 법맥이나 계파가 다른 사찰이 같은 본말사 안에 편제되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즉 쌍계사의 경우 법류가 다르다고 하여 해인사의 말사를 거부하고 부휴계 사찰로 본산을 바꿔 달라고 요청하였고, 부휴계에 속한 화엄사 또한 선암사의 말사로 편입되자 1913년 주지대리 진진응의 주도로 본산 청원운동을 펼치고 분규를 겪은 후에 1924년  31본산으로 승격되었다. 이처럼 계파와 법맥의 문제는 매우 큰 현실적 구속력을 갖는 것이었고, 수적으로 열세에 처해 있던 부휴계로서는 자파의 역사적 정통성을 주장하고 그것을 선양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5. 조계종명의 제창과 그 영향

1908년 전국의 사찰 대표 52명이 원흥사에 모여 최초의 통합종단 원종이 창립되었고 해인사 출신의 이회광이 초대 종정이 되었다. 이회광은 원종이 설립인가를 받지 못하자 합방 직후인 1910년 10월 일본으로 건너가 원종과 일본 조동종과의 연합조약을 비밀리에 체결하였다. 이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자 이는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팔아먹는 ‘매종역조’의 행위라는 격렬한 비판이 일었고, 이에 1911년 1월 박한영, 진진응, 한용운 등이 송광사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임제종 설립을 결의하였다. 임제종은 이후 범어사에 종무원을 두고 송광사, 통도사, 해인사를 3본산으로 하여 세력 확대를 도모하였고 불교계는 원종과 임제종으로 양분되었다.
보정은 임제종 건립의 주도 세력인 박한영과 오랜 교분을 쌓았고 송광사 임시총회에서 개설된 임제종에는 우호적이었다. 반면 일본 조동종과 연합조약을 체결한 원종의 이회광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1911년 6월 총독부에 의해 사찰령이 반포되고 이후 30본산 체제가 가동되면서 원종과 임제종은 모두 폐지되고 한국불교의 명칭은 ‘조선불교 선교양종’으로 정해졌다.
보정이 1910년대 후반부터 조계종명을 적극 제창하게 된 것은 이러한 시대배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비록 보정의 조계종 인식이 부휴계 정통론에 기반한 계파적 성격이 강한 것이었지만 그가 제기한 조계종 명칭 자체는 한국불교의 역사적 정체성과 자주성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이었다. 임제종 건립이 무산되고 선교양종을 내건 사찰령 체제가 출범한 상황에서 조선불교의 역사적 정통성을 담아낼 수 있는 종명과 종조로 조계종과 보조지눌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보정이 《조계고승전》을 탈고한 1920년은 한국불교를 일본 임제종에 통합하려는 이회광의 또 다른 기도가 발각된 시점이어서 조계종명은 매우 시의성이 큰 대안이었다. 또한 조계종 전통이 선과 교를 통합하여 왔다는 보정의 인식은 다양한 전통을 포섭해야 했던 시대적 요청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보정이 《조계고승전》 등을 편술, 조계종명을 제창할 무렵인 1920년대 이후 조계종과 지눌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증폭되고 이전과는 다른 평가와 입론이 대두한 점은 매우 주목된다. 먼저 김영수는 근대에 들어 원종, 임제종, 선교양종 등 다양한 종명이 제기되었지만 일본의 선종과 구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계종 명칭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권상로도 1920년대 후반에 이르면 신라 때에 자립한 조계종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조선불교는 법계상 조계종파라고 하여 전과는 다른 주장을 펼쳤다. 이후 이재열이나 이종익은 조계종 보조종조론을 적극적으로 제기하였다. 비록 태고법통이 여전히 학계와 불교계에서 그 정통성을 인정받고 있었지만 이처럼 조계종에 대한 역사적 인식과 그 중요성은 점차 확산되고 있었다.
한국불교의 종조 논의를 체계화시킨 이는 방한암이었다. 그는 1930년에 글을 발표하여 한국 선종의 초조는 신라의 도의이고 이후 선종 9산의 조계종 전통이 지눌과 수선사로 계승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태고보우를 초조로 보는 당시의 시각에 대해 보우는 중흥조가 될 수는 있지만 초조는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또 보우를 비롯해 여말선초의 선종 법맥은 임제가 아닌 조계종이었고 한국불교의 연원과 계통 또한 보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재차 강조하였다. 이는 한국 선종을 대표하는 조계종의 역사적 정통성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이때 제기된 도의−보조−태고의 계보가 이후 종조론의 기본구도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논쟁 과정 속에서 1930년대 후반 이후 시작된 총본산 건립운동의 결과 1940년 11월 31본산 주지회의에서 종명 개정이 논의되었고 선교양종 대신 조계종명이 의결되었다. 이어 1941년 4월에는 종명 조계종, 총본사를 태고사로 하는 총본산 체제가 성립되었는데, 금명보정의 수업 문생이었던 송광사 주지 임석진과 송만암이 각각 총본산건설위원회 상임위원과 건설위원회 고문 등을 맡았고 송만암은 조계종의 종무고문이 되었으며 방한암이 초대 종정이 되었다. 보정에 의해 조계종명이 제창된 후 논의의 확산을 거쳐 이것이 현재 교단의 종명으로 확정되기까지는 이들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종조는 전통적인 태고법통에 입각하여 태고보우가 종조로 모셔졌는데 전부터 조계종과 태고법통의 결합을 주장해 온 김영수와 권상로 등이 총본산 건립운동에 일찍부터 관여해 왔음을 고려해 볼 때 이들의 의견이 상당 부분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해방 직후 1945년 10월에 열린 전국승려대회에서는 종명을 ‘조선불교’, 법맥은 태고법통, 교리는 원효의 대승행원과 지눌의 정혜겸수를 계승한다고 합의하였다. 이후 1954년 비구승과 대처승의 대립 과정에서 비구 측이 태고보우 대신 보조지눌을 종조로 삼자고 주장하였지만 종정 송만암에 의해 비판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이어 1962년에 만들어진 통합종단 대한불교 조계종은 초조 도의, 중천조 보조, 중흥조 태고를 내세워 조계종의 역사성과 태고법통의 정통성을 결합시켰고, 이는 선종−도의, 조계종−보조, 태고법통−태고를 종합하는 상징적 조합으로서 현재까지도 그 권위를 확보하고 있다.

6. 맺음말

금명보정은 전통에서 근대로의 전환기에 살았던 송광사의 부휴계 승려이다. 그는 대한제국 시기에 송광사 도총섭을 역임하면서 정부와 황실의 지원을 이끌어냈고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에는 교육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보정은 전통적 방식으로 불교사를 서술한 마지막 세대로서 한국불교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고 집성하는 데 한평생을 바쳤다. 또한 그의 불교사 인식은 보조지눌의 유풍과 송광사 부휴계의 정통성을 결합한 계파적 성격이 강하였지만, 그가 조계종명을 제창한 이래 종명과 종조 논의가 확산되고 그것이 정식 종명으로 현실화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

 

김용태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HK교수.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박사, 일본 도쿄대학 인도철학과 석사. 논문으로 〈역사학에서 본 한국불교사 연구 100년〉 〈동아시아 근대 불교연구의 특성과 오리엔탈리즘의 투영〉 등이 있고,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전통의 흐름》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 임제법통과 교학전통》 등의 저서가 있다. 본지 편집위원.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