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불교대중화에 생애를 헌신하다

 

1. 근대불교 최고의 포교사

 

청년기의 김태흡(1899~1989)

‘대중불교’ 또는 ‘불교대중화’는 한국 근대불교계에서 보편적으로 파급된 논리로, 대중불교운동의 전개는 근대 이전의 한국 불교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징 중의 하나로 지적할 수 있다. ‘대중불교’는 “산간에서 도시로, 승려에서 대중으로”를 지향하고 실현하는 불교를 의미하고, ‘대중불교운동’은 집단적·조직적 활동만이 아닌 대중불교를 구현하기 위해 시도된 일체의 행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근대불교사 연구에서 불교대중화 내지 대중불교운동에 관한 논의는 그 중요성 및 필요성에 비해 활발하지 못한 형편이다. 불교개혁론에 대해 비교적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것과 달리, 불교학교·불교잡지·역경(譯經) 등 몇몇 분야에 관한 단편적인 논의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특히 대중불교운동의 이념적 지향과 성격, 개별적인 활동이 아닌 전반적인 흐름에 대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이러한 연구의 부진은 대중불교운동을 주도한 당시의 불교 지성들이 실천적인 측면에 강조점을 두고 있어, 불교개혁론과 같은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대중불교론을 남기고 있지 않은 점에 기인한다.

여기에서, 김태흡(1899~1989)의 존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당시 불교계의 대표기관인 교무원의 중앙포교사로서, 대중불교운동의 이론적·실천적 측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였기 때문이다. 김태흡은 중앙포교사로 재직한 7년이라는 기간 동안, 불교잡지를 중심으로 불교대중화의 이론과 방안에 관한 많은 논설을 발표하였다. 또한 각황교당의 토·일요일 설법, 경성방송국의 라디오방송, 전도대 조직을 통한 노상포교, 불교합창단과 불교 극단의 창단 등 다양하면서도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김태흡은 불교대중화를 위한 다양한 시도와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 대중불교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김태흡과 그의 대중불교운동에 대한 불교학계의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본격화된 그의 친일 행적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일면적 차원에서 그의 다른 업적까지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김태흡의 ‘친일’을 변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김태흡의 친일 행적은 이미 임혜봉의 《친일불교론》(1993),《친일승려 108인》(2005)에서 자세히 다루어졌고,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2009)에도 등재되어 있으므로, 이 지면에서 반복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근대불교사 내지 근대불교문화사의 복원이라는 관점에서, 김태흡의 생애와 대중불교운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을 피하지 않을 것이다.

2. 생애와 저술

1) 생애

김태흡의 생애를 알 수 있는 자료로는 《대은대종사 문집》(2009)에 수록된 〈대은대종사 연보〉(권1)와 〈대은당 소하대선사비〉(권5), 그리고 그의 저서 《신앙의 등불》(1975)의 부록인 〈나의 개안(開眼)〉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자료는 출생 및 활동 시기의 연대 파악에서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면, 제자들에 의해 작성된 연보·비문은 김태흡의 출생연도를 1894년 4월 4일로 적고 있는 데 반해, 자서전적 성격의 글인 〈나의 개안〉에서는 1898년 기해(己亥) 4월 15일로 되어 있다. 또한 전자에는 그의 나이 35세 때에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후자에서 김태흡은 “내가 귀국한 것은 1930년 서른세 살 되던 해”라고 적고 있다. 이렇듯 김태흡 자신과 그의 문도회에서 작성한 기록 모두 활동 연대는 신빙성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항목의 서술은 이들 자료의 내용을 참고하되, 그 구체적인 연도의 제시는 필자의 조사에 의한 것임을 밝힌다.

김태흡은 법명이 대은(大隱)이고 법호가 소하(素荷)로, 1899년 4월 4일 경기도 강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광현(金光賢), 어머니는 충주 지씨이다. 40세가 가깝도록 자식이 없던 양친이 마니산에 가서 3일간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드린 후에 그를 낳았다고 한다. 3세 때에 강화도를 떠나 서울로 이사했는데, 그해 군관이었던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부터 몸이 병약했던 그는 1906년 비구니였던 외할머니의 권유로 철원 심원사에서 계암(桂庵) 스님을 은사, 청호(晴湖) 스님을 계사로 하여 출가하였다.

이듬해인 9세부터 13세까지 경기도 장단 화장사와 양주 보광사에서 응봉(應峰)·우운(雨雲) 스님에게 범패와 나비춤을 배웠으며, 두 스님을 따라 여러 사찰에 재(齋)바지를 다녔다. 1912년 범패승 생활을 마감하고, 금강산 유점사에서 사미과를 배웠다. 이어서 건봉사·용주사·법주사·마곡사·대승사·화엄사 등을 다니면서 사집과(四集科)·사교과(四敎科)·대교과(大敎科)를 마쳤다. 1919년 그는 21세의 젊은 나이에 법주사 진하(震河) 스님으로부터 전강(傳講)을 받고 강사가 되었다. 법주사에서 1년을 지낸 뒤 이듬해 봄에 문경 대승사의 강주청장(講主請狀)을 받고 한 철 동안 학인들을 지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좀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자각과, 그에 앞서 도쿄로 유학을 떠났던 친구 이영재(李英宰, 1900~1927)의 권유로 인해 1920년 가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도쿄에 있는 예비학교에 들어간 그는 중등과정을 속성으로 마치고, 도요(東洋)대학 인도철학과에 입학하여 2학년을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김태흡은 대부분의 일본 유학생들과 달리, 사찰의 도움 없이 신문배달원·인력거꾼을 비롯한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였다. 힘들고 바쁜 고학 생활 중에서도, 그는 1924년 5월 이영재·최범술 등과 함께 재일불교청년회의 기관지인 《금강저》의 창간을 주도하였고, 제7~15호의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으며, 다수의 글을 발표하였다. 또한 방학 중에는 귀국하여 동료들과 함께 전국 각지를 돌며 불교강연회를 열기도 하였다.

 

동경의 조선불교유학생들의 모습(1926.3). 가운데줄 왼쪽 끝이 김태흡이고 중앙이 그에게 유학을 권했던 이영재다.
도요대학에 이어 니혼(日本)대학 종교학과에 입학한 그는 1925년에 졸업하였고, 이듬해 3월 같은 대학 종교연구과에서 〈종교와 사회사업발달사의 연구〉라는 논문으로 종교학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에 대해 당시 《불교》의 소식란에서는 “우리 유학생으로서 문학사(文學士)가 되기는 군(君)이 효시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니혼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할 때까지 도쿄제국대학에서 사료편찬원으로 근무하면서, 같은 대학 사학과의 청강생으로 공부하였다.

 

9년 동안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김태흡은, 1928년 5월 경성 각황교당의 초대 포교사로 임명되어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전개한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각황사에서 토·일 설법을 시작하였는데, 포교사를 그만둔 1934년까지 토요일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설법을 진행하였고, 일요일은 청년신도를 대상으로 불교교리 및 사상에 대해 강연하였다. 그리고 그는 각황사의 청년신도들과 함께 시내를 돌면서 거리포교를 진행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깃발을 세워놓고 목탁을 치며, 행인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한 것이다. 거리포교는 서울 시내에서만 한 것이 아니라, 평양 일대에서도 행해졌고 그때마다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러한 적극적인 포교 방식으로 인해 김태흡은 “이로부터 나에게는 ‘포교 미치광이’라는 별명이 붙었는가 하면, ‘포교왕 김아무개’라는 평판도 듣게 되었습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또한 그는 불교계 인물로는 처음으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1929년 1월과 10월에 각각 ‘소크라테스의 윤리철학과 불교의 실천도덕’과 ‘가정평화의 묘체’란 제목으로 방송을 한 것이다. 한편, 그는 설법과 강연 외에도, 포교 현대화의 일환으로 불교합창단과 극단을 조직하였으며, 많은 찬불가와 희곡 작품을 창작하고 직접 연극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김태흡은 중앙포교사로 활동한 7년 동안 그 이전과는 다른 다양한 포교 방식을 시도하였고, 지속적으로 《불교》에 포교 관련 글들을 발표하였다. 바로 이 기간은 김태흡의 생애에서 가장 눈부신 시기이자, 근대 불교문화사를 풍성하게 만든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1935년 8월 《불교시보》의 창간을 기점으로 불교대중화를 위한 그의 눈부신 활동은 그 빛을 잃어간다. 김태흡은 창간사에서 “종교부활·정신작흥(精神作興)·신앙고취를 부르짖는 심전개발운동(心田開發運動)에 한 팔이 되고 한 다리가 되는 것”이 《불교시보》의 사명이자 목적이라고 밝혔다. 심전개발운동은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총독부에 의해 시행된 것으로, 조선 민중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목표로 하였다. 곧 이 운동은 조선 민중들을 천황에게 절대복종하는 충량한 신민으로 만들고, 농촌진흥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병참기지로서의 농가의 경제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김태흡은 자신이 천명한 대로 《불교시보》의 많은 지면을 심전개발운동에 관한 사설과 논설로 채웠으며, 직접 전국을 순회하며 심전개발운동을 선전·보급하기도 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시작된 이후 김태흡은 보다 노골적인 친일 활동을 전개한다. 《불교시보》 《신불교》에 일제의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고 ‘내선일체’ ‘황도불교(皇道佛敎)’를 선양하는 많은 글을 발표하였다. 또한 전국 각지를 돌며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의의’ ‘황은 감격과 국민의 진로’ ‘국민총력운동과 승려의 각오’ 등의 주제로 시국강연을 하였다. 1941년 2월에는 라디오방송을 통해서도 시국강연을 하였는데, ‘감사봉공’이라는 제목의 이 방송에서 그는 “아침에는 황은에 감사하며, 낮에는 장병의 은혜를 감사하며 저녁에는 부처님의 은혜와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멸신봉공(滅身奉公)” 하자고 주장하였다.

한편, 김태흡은 이 기간 동안 잡지사이자 출판사였던 불교시보사를 경영하면서, 1938년 7월 만주 봉천 관음사의 주지를 맡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1945년 만주 지역의 사찰을 관리하는 ‘개교감독(開敎監督)’에 임명되어, 만주 장춘의 화엄사 주지로 부임하던 도중에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직후 서울에 온 김태흡은 주지 싸움으로 공석이 된 봉은사의 주지가 되었는데, 1945년 12월 전(前) 주지 홍태욱의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살인교사 죄목으로 8년형을 선고받고 5년 동안 복역했다. 자서전인 〈나의 개안〉에서 그는 자신의 친일활동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없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사건의 경위와 당시의 심정을 자세히 술회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복역을 마친 직후에 진범이 잡혀서 자신의 억울한 누명이 벗겨졌다고 한다.

그 이후 김태흡은 자신의 표현대로 “세상에 얼굴을 내밀지 않고” 후학 양성과 저술활동에만 전념하였다. 곧 전주 정혜사·서산 개심사·용인 화운사 등의 강원에서 학인들을 지도하였고, 팔만대장경 번역편찬위원(1961년)과 동국대 역경원 한글대장경 번역위원(1968년) 등을 역임하였다. 1989년 4월 13일 김태흡은 “부지런히 정진해서 요익중생(饒益衆生)하라”는 당부를 남긴 채, 서울 상도동 사자암에서 세수 91세, 법랍 84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2) 저술

김태흡은 권상로(1879~1965)와 함께 근대 불교계를 대표하는 문필가로, 신문·잡지 등에 수많은 글을 발표하였고, 20여 종의 단행본을 남겼다. 특히 《불교》와 《불교시보》에는 매 호마다 거의 빠짐없이 그의 글이 실려 있다. 김태흡의 저술은 최근에 간행된 《대은대종사 문집》(전 7권)에 대부분 모여 있어,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문집》의 제1권은 석존의 생애 및 사상과 관련된 내용으로 단행본 《석가여래약전》(1932)과 《석가여래일대기》(1974)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제2권은 《피안의 메아리》(1977) 《신앙의 등불》(1975) 《삼세인과》(1978) 《금강신앙》(1972) 등 기존 단행본의 집성이고, 제3권은 관음신앙과 관련된 단행본과 잡지의 기고문을 수록한 것이다. 제4권~7권의 경우는 각각 경전 강의 및 교리 해설, 구도·신앙· 신행, 고승·선사상·종교, 불교사·불교문화·불교문학 관련 글들을 수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저술은 대부분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신앙 안내서와 불교의 교리 및 사상을 알기 쉽게 해설한 대중포교서에 해당한다. 쉬운 어휘와 간결한 문체로 된 김태흡의 대중포교서는 당시의 신도들에게 널리 읽혔는데, 특히 《석가여래약전》은 1932년에 처음 간행된 이래, 재판, 3판, 4판을 거듭하여 1940년대까지 총 4만여 부가 팔릴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김태흡 저술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문학작품의 비중이 크다는 점과 당시의 승려로서는 유일하게 희곡을 창작했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다. 그는 동시대의 불교 지성과 달리, 자유시, 창가(찬불가), 시조, 소설, 희곡, 동화, 기행문, 수필 등 문학의 전 장르에 걸쳐 다수의 작품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조사된 김태흡의 문학작품은 자유시 7편, 시조 5편, 소설 8편, 찬불가 9편, 희곡 19편, 동화 25편 등으로, 유학 시절에 창작한 일부 시(詩)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교의 선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승려이자 시조시인인 조종현(1906~1989)은 그의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이 작가의 작품은 오로지 불교 선전을 목적으로 하고 지은 것이요, 다른 것은 아니라고 단언하여도 무방하다. 기왕이면 민중불교의 실현에 적합한 작품을 발표하여 주시는데 예술적 가치를 존중해주기 바란다.” 곧 조종현은 김태흡 문학의 예술적 성취가 미흡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지만 작품의 문학적 성취와는 별개로, 대중이 흥미를 갖고 있는 문학이라는 매체를 통해 불교를 전파하고 있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불교대중화의 측면에서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특히 그의 찬불가와 희곡 작품은 백용성(1864~1940), 권상로, 조학유(1894~1932) 등의 찬불가와 함께, 근대 불교계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대중불교운동의 이념적 지향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불교대중화의 이론과 실천

1) 불교 인식

김태흡이 불교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의 문제는 그가 불교의 대중화를 주장하고 실천한 근거이자, 자신이 전개한 대중불교운동의 최종 목표로도 볼 수 있으므로, 여기에서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태흡은 불교를 이지주의(理智主義)·이상주의·평등주의·인격주의의 종교로 규정하고 있다. ‘이지주의’는 과학과 철학을 아우르는 불교의 성격을, ‘이상주의’는 ‘자각(自覺) 각타(覺他) 각만(覺滿)으로 세상을 구하고 중생을 제도함’을 가리킨다. ‘평등주의’와 ‘인격주의’는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고, 초인간적인 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닌 누구든지 노력하면 불타가 될 수 있다는 인격향상주의를 의미한다. 그는 이러한 정의에 덧붙여, 이들 요소는 과거의 기성종교에서 찾을 수 없는 불교만의 특징이며, 바로 이 점으로 인해 불교는 현대 및 미래의 중심적인 종교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상주의는 한용운이 《조선불교유신론》(1913)에서 ‘불교의 주의’로 제시한 ‘구세주의’에, 평등주의·인격주의는 ‘평등주의’에 해당한다. 평등주의와 구세주의가 ‘불교유신’을 위한 한용운의 전제라면, 김태흡에게는 불교대중화의 전제 내지 출발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김태흡은 불교의 본질과 관련하여 초기불교의 ‘대승(大僧, Maha sangha)’을 주목하고 있다. 그는 여러 글에서 ‘대승’ 내지 ‘승려’의 의미를 반복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지금에 이르는 승려라는 말은 일부의 출가자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재가자까지 포함되어 있는 말이다. 승가(僧伽)라는 말을 번역하면 단체라는 뜻이니 쉽게 말하면 불교를 믿는 교단”이라는 언급이 그것이다.

김태흡이 이렇게 ‘승가’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당시 불교계의 상황과 관련이 있는 동시에, 그가 전개한 대중불교운동의 근거 내지 기반이 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곧 승려 중심의 산중불교인 당시 한국불교계의 상황은 조선왕조 5백 년 동안의 억압 정책으로 인해 변질된 것으로, 본래의 불교는 대중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태흡에게 당시의 ‘산중불교’는 일시적인 기형에 지나지 않으며, ‘대중불교’는 불교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된다.

그는 ‘대승’의 정의에서 더 나아가 불교의 본질을 대승의 사상과 동일시하고 있다. 사회적 직업을 존중하고 어떠한 사업이라도 진실하게 종사하는 것이 대승의 사상이자 불교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또한 불교의 생명은 사회의 생명에 있고 사회의 생명은 승가의 생명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대승의 의미를 망각한 채,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고 불교를 승려만의 소유로 고집하는 것은 불교 본연의 모습이 아니므로,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독선을 추구하는 산간불교에서 대중불교로 전환해야 함을 촉구하고 있다.

2) 불교대중화 방안

그는 이러한 불교 인식을 바탕으로 산간불교에서 대중불교로 전환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곧 그는 불교 정신을 고취, 보급하기 위한 학교교육과 사회교육기관의 완비, 한글 단행본으로 된 불타 전기 및 교리서의 제작 배부, 불교회관의 건립과 여학교 경영 등 비교적 다양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포교 방식에서도, 김태흡은 사찰 중심의 산중과 포교당 중심의 도시로 구분한 뒤, 전자는 각 마을을 직접 찾아가는 순회설교를, 후자에서는 정기포교, 수양강화, 특별수양강연회 등을 실시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는 이를 통해 농촌과 도시에서 자연스럽게 불교의 존재를 알리고, 대중들의 존경 또한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김태흡의 불교대중화 방안은 〈불교포교에 대하여〉란 논설에서 집대성된다. 이 논설에서 그의 주장은 포교 공간, 포교 방식, 부속기관의 세 가지 문제로 집약된다. 전당식 포교당에서 회관식으로의 전환, 찬불가, 한글 경전 등 시대에 맞는 포교 방식의 도입, 그리고 유치원, 야학교 등의 부속기관 설치가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포교 방식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1) 강설포교 ① 조선어 성전에 의한 강화식 포교 ② 통속교화강연 ③ 선문(禪門) 제창 ④ 특별경전강의(유마·원각·반야·능엄경 등)
(2) 문서포교 ① 잡지 ② 저서 ③ 번역 ④ 서간
(3) 의식포교 ①불전헌공(佛前獻供) ② 장례식 ③ 화혼식 ④ 추도식
                    ⑤ 장엄의식 ⑥ 가찬의식(歌讚儀式)
(4) 특별포교 ① 개인상대 ㉠ 가정방문 ㉡ 병자위문 ㉢ 신앙상담 ㉣ 불경교수
                    ② 군중상대 ㉠ 학교 ㉡ 공장 ㉢ 감옥 ㉣ 노방전도 등
                    ③ 지방순회 ㉠ 도시 ㉡ 농촌 ㉢ 어촌 ㉣ 사원
                    ④ 특수강습(하기대학 불교강좌 그 외 불전강습회 등)
(5) 감화포교 ① 아동 및 학동감화 ㉠ 유치원 ㉡ 일요학교 ㉢ 간이서당 ㉣ 야학강습회
                   ② 불량아동감화 ㉠ 고아원 ㉡ 맹아원 ㉢ 감화원 ㉣ 탁아소
                   ③ 환자 및 불구자 위문
                   ④ 이재민 및 빈민구제
                   ⑤ 오락감화 ㉠ 종교성극 ㉡ 종교영화 ㉢ 종교음악
(6) 신앙본위단체조직 ① 불교신우회 ② 불교부인회 ③ 불교청년회
                                 ④ 불교소년회 ⑤ 불교소녀회 ⑥ 불교친목회 등

그는 인용문에서 보듯, 포교 방식을 강설, 문서, 의식, 특별, 감화포교와 불교단체 조직 등의 여섯 가지 항목으로 나누고, 다시 각 항목에 대해 세부 항목을 설정하고 있다. 설정된 세부 항목으로 볼 때, 그는 특별포교와 감화포교에 보다 중점을 두고 있는데, 불교의 사회적인 역할과 활동을 강조했던 그의 불교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포교 방안은 근대불교계의 대표적인 의식집인 《석문의범》의 〈간례편(簡禮篇)〉에도 수록되어 있다. 《석문의범》이 한국 근대불교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한다면, 당시 불교계의 공인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그의 대중화 방안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임을 확인할 수 있고, 또한 그 의의 내지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3) ‘월인(月印)코러스’와 ‘룸비니(藍毘尼)드라마클럽’

불교가 이렇게 예술의 종갓집임을 불구하고 불교음악으로 일부의 범패를 제하고는 서양음악에 조화될 만한 음악을 하나도 만든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을 좋아하는 청년남녀는 예수교회당으로 갈지언정 불교포교당에는 오지를 아니하며, 찬양대라든지 합창코러스라 하면 교회당의 전용물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에 깊이 느낀 바가 있어서 우리 불교도 현대적으로 선전하자면, 아무리 하더라도 현대적 예술의 힘을 빌지 아니하면 아니 되리라 생각하고 기회를 바라고 있던 차에, 마침 이번 성도재일을 당하여 신앙 본위로 불타의 정신에 감격하고 모인 청년 남녀가 30여 명이나 되어서 거룩하게 성도가극(成道歌劇)을 연습하고 출연하여 마치었는고로, 이분네를 붙들고 영영(永永)한 음악대와 성극(聖劇隊)를 조직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음악과 성극을 출연하자고 상의하였더니 한 사람도 빠지지 아니하고 참가하여 주기로 되었다. 그래서 성도재 다음날 9일 밤에 대(隊)의 이름을 짓고 발회식을 하게 되니, 음악부는 ‘월인(月印)코러스’라는 이름으로 얼굴을 들고 나오게 되고, 극부(劇部)는 ‘룸비니(藍毘尼)드라마클럽’이라는 하이카라모던식의 이름을 가지고 나오게 되었다.

장황하게 인용한 위의 글은 불교합창단 ‘월인코러스’와 불교극단 ‘룸비니드라마클럽’의 창단 경위를 밝힌 것이다. 인용문을 통해, 합창단과 극단은 1930년 1월 성도기념식 때 공연되었던 성도가극의 성공에 자극받아 각황교당의 청년부를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또한 ‘현대적 불교 선전’ 곧 포교 현대화의 일환으로 기획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성도가극’은 그의 첫 번째 희곡인 〈승리의 새벽〉을 가리킨다.

그가 조직한 극단과 합창단의 구체적인 활동이 이후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관련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불교잡지의 소식란을 통해 찬불가와 희곡이 공연된 사실은 확인된다. 희곡은 19편의 작품 중, 〈승리의 새벽〉 〈우주의 빗〉 〈떡〉 〈우란분〉 〈전화(錢禍)〉 〈불타의 감화〉 〈애욕의 말로〉 〈불타의 홍원〉 〈쌀〉 〈입산〉 등 10편이 석가탄신일, 성도일 등의 기념식에서 공연되었다. 찬불가의 경우는 〈종소리〉 〈월인천강곡찬불가〉 〈물독〉 등이 합창단에 의해 불렸다. 이들 작품은 주로 사원, 포교당, 학교 등에서 공연되었지만, 희곡인 〈불타의 홍원〉과 〈우란분〉의 경우는 일반 극장인 부민관에서 공연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김태흡의 찬불가와 희곡작품은 일정한 내용적 경향성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먼저, 그의 찬불가는 동시대의 찬불가와 달리 독자에 대한 권계나 당부가 없다는 점과, 불전(佛傳) 및 경전의 내용을 노래하고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고행가〉 〈룸비니원〉 〈오도가〉는 불전을, 〈물독〉과 〈목련의 지효〉는 각각 《잡비유경》의 비유담과 《목련경》의 내용을 요약하여 노래한 것이다. 그리고 불전이 소재인 찬불가는 신이성의 배제와 불타의 인간적 형상화라는 내용적 특징을 보여준다.

김태흡의 희곡은 대부분 불전, 경전, 불교설화 등을 각색한 것이고, 창작희곡은 〈애욕의 말로〉 〈전화〉 〈누구든지〉 등의 3편뿐이다. 이들 작품 중, 불전의 내용을 각색한 몇몇 희곡에는 원전에 전혀 없는 내용이 보이고 있다. 그 예로 ‘룸비니드라마클럽’의 창단 계기가 된 〈승리의 새벽〉을 살펴보자.

이 작품은 불전의 팔상(八相) 가운데 ‘수하항마(樹下降魔)’ 곧 6년간의 고행을 마치고 수자타의 유미죽을 먹은 뒤, 보리수에 앉아 마왕을 항복시키고 성불하였다는 내용을 극화한 것이다. 불전에서는 일반적으로, 수자타가 수신(樹神)이나 범천(梵天)의 명령으로 태자에게 찾아가서 죽을 공양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수자타는 우연히 길을 가다가 강물에 떠내려갈 위기에 처해 있는 태자를 발견한 뒤, 시녀인 푼나와 함께 태자를 구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불전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찬불가와 마찬가지로 작자가 의도한 석존의 형상화와 관련이 있다. 곧 김태흡은 불전에서 신격화·신비화되어 있는 석존의 모습을 탈색하고, 육체적인 고통을 겪는 현실적인 인물로 형상화하기 위해 이 장면을 삽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만일 우리가 오지 않았더라면 어찌 될 뻔하였어”라는 푼나의 대사와, “내가 이번에 꼭 죽게 되는 것인데, 너희 때문에 살아났구나.”라는 태자의 대사는 인간적 형상화를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김태흡의 희곡작품은 ‘불타의 인간적 형상화’ 외에 또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창작희곡인 〈애욕의 말로〉는 애욕에 눈이 멀어 자신의 처를 버리고 어머니에게 상해를 입힌 주인공이 걸승의 교화로 인해 뒤늦게 자신의 죄를 깨닫는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작품의 끝 부분에서 걸승은 참회한 주인공에게 “마음이 어두우면 악귀로 변하고 마음이 밝으면 부처가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지옥과 천당이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오직 마음 가운데 있는 거다. 그대가 아까까지도 지옥생활을 하더니, 이제부터는 천당으로 놓여나오는구나. 마음 한번 고치는 바람에.”라고 하여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수하항마’의 각색인 〈항마의 밤〉에서 태자는 “오직 마음이 굳세기로 유명한 자”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렇듯 김태흡의 희곡에는 전 작품에 걸쳐 마음을 강조하는 등장인물의 대사가 빈번하게 나타나 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마음 또는 자각의 강조는 불타의 인간적 형상화와 함께 그의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불타’와 ‘마음’의 강조는, 김태흡의 불교 인식이 사원·포교당·학교라는 대중불교의 현장에서 구체화된 것으로, 그가 전개한 대중불교운동의 이념적 지향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불타와 마음으로 ‘불교’를 단순 명료화하여 이를 노래와 연극을 통해 적극적으로 대중에게 확산시키고 있는 점은, ‘유불불이(儒佛不二)’라는 절충론으로 ‘숭유억불’에 대응했던 근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하겠다.

4) 《불교시보(佛敎時報)》의 ‘여성란’과 ‘아동란’

 

《불교시보》 창간호(1935년 8월).
김태흡이 발행한 《불교시보》는 1933년 7월에 종간된 《불교》 이후 교단의 기관지가 없는 상황에서 조선불교의 기관지를 자처하며 창간되었다. 그는 간행 목적으로 불교계 소식의 보도와 심전개발운동의 고취를 들고 있다. 잡지의 체재는 ‘부인란’ ‘포교지도란’ ‘수양강화(修養講話)’ ‘아동란’ 등의 고정란, 심전개발운동·황도불교에 관한 논설, 교리 해설, 불교계 소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잡지는 일제의 심전개발운동과 군국주의 및 내선일체 정책을 선전하고 있다는 문제점을 보인다. 그렇지만 ‘부인란’ ‘아동란’ 등 고정란의 다양화와 지속성은 근대불교계에 존재했던 다른 잡지들과 구별되는 특징으로, 특히 부인란과 아동란의 상설화는 불교대중화의 측면에서 평가할 만하다.

 

근대 시기에 간행된  30여 종의 불교잡지 가운데, 여성독자를 위한 고정란을 마련한 잡지는 《조선불교월보》(1912. 2~1913. 8, 통권 19호)《해동불보》(1913. 11~1914. 6)와, 이 《불교시보》 외에는 없다.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여성 신자의 비중을 생각한다면, 불교잡지의 여성에 대한 관심은 극히 적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불교잡지가 설정한 주요 독자층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여성을 위한 ‘언문부’를 상설하고 있는 《조선불교월보》조차 그 독자층에서 여성을 제외하고 있다.

《불교시보》의 ‘불교부인란’은 창간호부터 87호(1942.10)까지의 8년 동안 거의 빠짐없이 실려 있는데, 주로 불교 교리의 해설, 여성불자의 역할에 관한 논설, 신앙체험담, 불전설화(佛典說話) 등을 수록하고 있다. 김태흡이 대부분의 글을 담당했고, 신앙체험담의 경우는 간혹 여성 필자의 글이 실리기도 하였다. ‘불교부인란’은 내선일체와 총후보국과 관련된 몇몇 기사를 제외하면, 대체로 기복적·미신적 신앙을 버리고 경전과 염불을 통해 올바른 믿음을 가질 것을 당부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아동을 위한 고정란 역시 《불교》(28~36호, 1926.10~1927.6)를 제외하고는 다른 불교잡지에서는 시도되지 않은 것이다. 《불교시보》의 ‘아동란’(10~57호)은 불전동화, 전래동화, 창작동화 등의 동화가 내용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총 34편의 동화 중 16편이 불전동화에 해당하고, 《잡보장경》 《법구비유경》 《백유경》 등의 출전이 밝혀져 있다. 아동란에 수록된 동화작품들은 그 끝 부분에 화자의 논평 내지 의미부여가 제시된 특징이 있다. 곧 〈음악으로 성공한 소년〉(15호)의 “무슨 재주든지 이 소년처럼 정성스럽게만 하면 성공되지 않는 일이 없는 것이다.”와, 〈노루의 보은〉(55호)의 “우리도 무슨 짐승이든지 살리기를 좋아하는 생각으로 지내며 죽이지 말기를 끝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렇듯 《불교시보》의 ‘부인란’과 ‘아동란’이 그동안의 불교 잡지에서 소외되었던 여성과 어린이로 독자층을 확대하고, 흥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불교정신 또는 불교적 덕목의 학습을 시도했다는 점은 불교대중화의 측면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4. 불교대중화운동의 의의와 한계

 

청년기의 김태흡(1899~1989)

개항 이래 한국불교는 근대적 전환이라는 과제와 직면하였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근대 국민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시도한 일련의 사회개혁이 실패로 돌아가고 식민체제에 편입되면서, 한국불교는 외래종교인 기독교의 교세 확장과 일제 침략의 선봉을 자처했던 일본불교의 침투에 맞서야 하는 절박한 현실에 놓인다.
곧 근대 시기의 한국불교계는 기독교와는 다른 종교로서 불교의 정체성과, 일본불교와 구별되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정립해야 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불교대중화를 실현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에 직면한 것이다. 이에 대한 불교계의 구체적인 대응으로는 근대적 교육기관 및 포교당의 설립, 유학승의 파견, 역경 및 출판사업, 불교잡지의 발간 등을 들 수 있고, 이러한 움직임들은 대중불교운동이란 이름으로 포괄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대중불교운동의 중심에 김태흡이 있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김태흡은 거리포교, 불교잡지의 편집과 발행, 대중포교서의 저술 및 간행, 찬불가·희곡 창작을 통한 예술 공연 등의 대중불교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중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동시대의 불교 지성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으로, 그 가치와 의의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의 대중불교운동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는 불교대중화에 대한 당위성만 내세울 뿐, 왜 불교를 대중화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불교대중화인가에 대해서는 성찰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전개발운동’의 본질을 망각하고 ‘마음’이라는 공통분모에만 집중하여 일제의 정책에 협력한 것이고, 더 나아가 불교 정신에 배치되는 침략전쟁을 옹호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근대불교 연구의 영역 확대와 활성화를 위해서는, 여전히 김태흡과 그의 대중불교운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식민지 시기 친일 승려들의 친일 논리를 규명하기 위해서도 김태흡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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