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 찬불가로 불교대중화 이끈 유학승

1. 근대불교의식과 ‘찬불가’의 탄생

찬불가는 말 그대로 부처님과 그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글의 ‘찬불가’는 현재 음악학계의 정의대로 근대 이후 서양음악의 영향을 받아 오선보로 작곡된 불교노래를 의미한다. 1910년대에는 ‘불교창가’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1920년대 중반 이후 ‘찬불가’란 용어로 정착된 것이다. 불교창가 또는 찬불가의 등장은 무엇보다도 근대 시기에 모색되고 형성된 ‘새로운’ 불교의식과 관련이 있다.
불교의식집인 《석문의범》(1935)의 〈간례편(簡禮篇)〉에는 3대 예식(강탄절·성도절·열반절)과 설교의식, 강연의식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들이 바로 ‘새로운’ 불교의식에 해당한다. 《석문의범》의 〈간례편〉은 1910~20년대의 불교 잡지와 신문에 지속적으로 소개되었던 불교행사와 법회의 의식 절차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근대 이전에는 접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근대불교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의식에는 반드시 ‘찬불가’가 포함되어 있는데, 강탄절과 강연의식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이 두 의식은 각각 “개식(開式)→삼귀의→독경(讀經)→찬불가→입정(入定)→설교→권공(勸供)→예참(禮懺)→축원(祝願)→퇴공(退供)→폐식(閉式)”과 “귀의삼보(歸依三寶)→반야심경→찬불가→입정(入定)→강화(講話)→사홍서원(四弘誓願)→산회가(散會歌)”의 순서로 되어 있다. 이렇듯 찬불가는 근대불교의식의 구성요소이자, 의식가요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찬불가는 《불교》 7호(1925.1)에 수록된 권상로 작사 백우용 작곡의 〈봄맞이〉를 시작으로, 《석문의범》 소재 찬불가까지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80여 편의 노래가 집중적으로 제작·발표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과 더불어, 찬불가가 의식가요 곧 사적인 노래가 아닌 공공의 노래라는 점을 고려하면, 찬불가의 활발한 창작과 향유는 근대불교계의 대표적인 ‘문화현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들 찬불가의 노랫말에 보이는 내용적 경향성은, 당시 불교계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대중불교 운동의 이념적 지향으로 볼 여지가 있다. 이러한 ‘찬불가 운동’의 중심에 이 글의 대상인 조학유(曹學乳, 1894~1932)와 그의 찬불가가 있다.
조학유의 《찬불가》는 근대불교계의 대표적 잡지인 《불교》 28~41호(1926.10~1927.11)에 연재 형식으로 수록되어 있다. ‘찬불가’란 제명 아래 매호 2곡씩 총 24곡이 악보와 함께 실려 있는데, 최초의 찬불가 전집인 《찬불가》(김정묵 편, 1946)와, 근래에 간행된 《찬불가 전집》(제3세대 불교음악동인회 편, 1993)에도 수록되어 있다. 특히 이들 노래 중 〈찬불가〉와 〈산회〉는 발표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각종 법회에서 널리 불리고 있다. 이렇듯 조학유의 《찬불가》는 24편이라는 비교적 많은 작품 수와 전 곡의 악보가 모두 전한다는 점, 그리고 현재까지 꾸준히 향유되고 있다는 점 등에서 1920년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찬불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근대불교 문화사의 복원과 근대불교 지성의 발굴이라는 관점에서, 조학유의 생애 및 사상과, 《찬불가》의 성격과 시대적 의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조학유의 생애와 사상

1) 생애
해인사 출신의 승려인 조학유는 법호가 석종(石鐘)으로, 1894년에 태어났다. 그는 1914년 일본 도쿄의 도요야마(豊山) 대학에 입학하여 근대 학문을 공부한 뒤, 1919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하였다. 그리고 1932년 12월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조학유의 생애에 대해서는 이상과 같은 단편적인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고, 보다 구체적인 행적은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당시의 신문 및 불교잡지의 몇몇 기사와 아래의 인용문을 통해 그의 주요 활동 및 불교계에서의 위상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고(故) 조학유 씨는 동경 풍산대학(豊山大學) 출신. 그는 김법룡(金法龍) 김승법(金承法) 이지광(李智光) 이종천(李鐘天) 정황진(鄭晄震) 이혼성(李混惺) 김정해(金晶海) 김도원(金道源) 등 제씨(諸氏)와 함께 조선불교도 일본 유학생의 선배이다. 그는 왜소한 포류(蒲柳, 냇버들)의 신체로서 뜻한 바는 특별히 많아, 혹은 교원, 혹은 포교사, 혹은 학교경리, 또는 조선불교혁신운동 등 그 생애가 바로 분망(紛忙)하였던 만큼 뜻을 반도 이루기 전에 몸이 먼저 가게 된 것이다. 그가 《불교》에 발표한 불교창가는 불후할 자취. 나는 그를 지난 무진년(戊辰年, 1928) 남해도(南海島)에서 처음 보고는 작년 여름 8월 29일 오후 3시 북악산 아래 성북동 미륵당에서 모였던 것이 영원한 최후였던 것이다. 오호(嗚呼)!

일본 유학생 출신 승려들에 대한 인물평의 성격을 띠고 있는 이 글은, 조학유에 관한 정보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인용문에서 필자는 조학유의 생애 및 활동을 일본유학생, 교원, 포교사, 학교경리, 조선불교혁신운동 등으로 정리하고 있다. 또한 《찬불가》를 ‘불후할 자취’로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필자만의 견해가 아닌, 당시 불교계의 평가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용문에서 제시하고 있는 포교사, 학교경리, 불교혁신운동의 구체적인 내용은 신문 및 불교잡지의 소식란에서 확인된다. 먼저, ‘학교경리’는 불교전수학교와 중앙불교전문학교의 서무주임을 가리킨다. 조학유는 전수학교의 개교(1928.4.30)와 동시에 임명되었고, 전수학교가 전문학교로 승격한 뒤에도 입적할 때까지 근무하였다.
‘조선불교혁신운동’은 그가 조선불교청년회, 조선불교유신회, 조선불교청년총동맹, 만당(卍黨) 등 주요 불교청년 단체의 핵심인물로 활동한 사실을 가리킨다. 곧 조학유는 불교청년회의 상무간사와 불교청년 총동맹의 회계장(會計長)을 역임하였고, 비밀결사인 만당 결성의 핵심 주동자이자 당원이었다. 또한 1922년 4월 회원 2,284명의 연서로 총독부에 정교분립과 사찰령 폐지에 관한 건백서를 제출한, 불교유신회 15인의 대표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포교사’의 경우는, 1927년 8월 25일 대구 동화사에서 개최된 조선불교 포교사대회 관련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대회의 발기인과 참석자 명단에 각각 ‘남해불교회 포교사’와 ‘남해군 불교당 포교사’로 명기되어 있다. 포교사대회는 불교계 포교사업의 단합과 통일을 위해 기획된 것으로, 불전(敎典), 포교의식, 포교방법, 예식(禮式) 등의 제정에 관한 안건들이 논의되었다. 조학유는 이 대회에서 포교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28년 3월에 열린 제2회 포교사대회에도 참석하고 있다.
포교사로서 그의 활동은 《찬불가》의 제작·발표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불교》에 찬불가를 연재한 시기와 포교사 활동 시기가 일정 부분 겹치기 때문이다. 조학유가 언제부터 포교사였는지 알 수 없지만, 제2회 포교사대회에 포교위원으로 참석하고 있는 사실을 고려하면, 적어도 1927년 8월을 전후한 시기부터 찬불가 연재가 끝나는 11월까지는 포교사였음이 확실하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찬불가》는 조학유가 포교사로 활동한 시기에 제작 또는 발표한 것으로, 그의 찬불가 제작은 무엇보다 포교사로서 대중 교화의 필요성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조학유의 생애 및 당시 불교계에서 활동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그는 다양한 이력의 소유자로, 짧은 생애였지만 불교혁신운동과 대중불교운동에 헌신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2) 논설에 나타난 사상적 경향
조학유의 저술로는 《찬불가》 외에, 아래와 같은 8편의 논설이 전하고 있다.
 
〈종교기원에 대하여〉(《조선불교총보》 9호, 1918.5)
〈종교의 기초적 관념〉(《조선불교총보》 10호, 1918.7)
〈종교의 이상〉(《조선불교총보》 12호, 1918.11)
〈낙관인가 비관인가〉(《조선불교총보》 13호, 1918.12)
〈환본적나라(還本赤裸裸) 하라〉(《조선불교총보》 15호, 1919.5)
〈종교와 지식〉(《조선불교총보》 19호, 1920.1)
〈인격의 요소〉(《취산보림》 3호, 1920.1)
〈불전(佛專) 승격에 대하여〉(《일광》 1, 1928.12)

이들 논설은 그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대부분 ‘종교’와 관련된 내용으로 되어 있다. 〈불전 승격에 대하여〉만 당시 불교계의 최대 현안인 전수학교의 승격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 나머지 논설들은 그의 불교 개혁 및 불교대중화 활동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조학유는 우선 종교를 “종교심과 만유현상의 관계 감응의 총칭”으로 규정한 뒤, “종교의 기초는 자신의 육체상 향상적(向上的) 행복 또는 정신상 안립(安立) 행복을 추구하여 완성하고자 하는 생존욕망”에 있다고 하였다. 그에 있어 ‘종교심’은 “경구(驚懼)와 신의(信依)의 생각과 안심입명(安心立命)의 욕망으로 조직된 것”을 의미한다.
〈종교의 이상〉에서 조학유는, 종교는 미신의 일종으로 과학 문명의 시대인 현대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당시 사람들의 종교 인식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종교가 비록 미신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진리의 이상처(理想處)’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 점으로 인해 과학 만능의 시대인 현대에도 종교는 여전히 필요한 존재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신인동일(神人同一)의 지위와 생불평등(生佛平等)의 권위를 발휘함이 금일 신성한 종교의 유일무이한 목적”으로, 종교의 이상은 ‘신인동격(神人同格)의 묘역(妙域)’에 도달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그가 주장하고 있는 종교의 목적이나 이상은 불교의 ‘성불(成佛)’에 다름 아니고, ‘신성한 종교’는 바로 불교이다. 조학유의 논설에서 ‘종교’는 불교를 가리키는 한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은 인생으로 하여금 냉정한 세계로 인도하고, 종교는 인생으로 하여금 온후(溫厚)한 경지로 향하게 한다. 만약 지식만 구비하고 종교심을 결여하면 인류사회는 마침내 이익만을 다투어 서로 괴롭히고 빼앗는 냉정에 빠질 것이요, 만약 종교심만 풍부하고 지식을 갖추지 않으면 인생세계는 마침내 무문맹목(無文盲目)의 감(憾)을 드러낼 것이다. 지식은 종교를 돕고 종교는 지식을 도와서 양자가 서로 기대고 조화를 이루어야 여기에서 바로 평화적 사회와 이상적 인격을 온양(醞釀)할 것이다. (중략) 우리의 처세에서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는 온후한 종교심은 조금이라도 없기가 불가능한 사정이다. 이 종교심을 한층 증세(增勢)하여 심신을 평안하게 하고 행복을 추구하고자 신불(神佛)의 경지에 나아가기를 바라는 동시에, 지식의 선악사정(善惡邪正)을 간택(簡擇)하는 공(功)을 반드시 요구할 것이며, 우리가 지식으로써 위장(威張)하는 동시에 반드시 평화로운 종교심을 바탕 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예컨대 구주전란(九州戰亂)을 회고하라. 어떤 이유로 이 같은 역사상 미증유한 참상을 겪었던 것인가? 종교의 심(心)은 너무 박약하고 지식의 능(能)만 너무 팽창한 까닭으로 마침내 종교의 피(皮)를 파열하여 지식의 탄(彈)이 폭발함이 아닌가?

인용문에서 조학유는 종교와 지식의 성격을 각각 ‘온후’ ‘평화’와 ‘냉정’ ‘변별’로 제시한 뒤, ‘평화적 사회’와 ‘이상적 인격’을 위해서는 양자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만약 지식만 있고 종교가 없으면 인류사회는 서로의 이익을 빼앗기 위해 다투게 되고, 반대로 종교만 있고 지식이 없으면 선악의 구별이 없는 맹목적인 사회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밑줄 친 부분은, 그가 종교와 지식의 조화를 주장하면서도 전자에 보다 강조점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이유를 ‘종교심의 박약’과 ‘지식의 팽창’으로 파악하고 있는 점 또한 조학유의 의도가 사실은 종교심의 강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의 ‘종교심’은 불교의 신앙적 측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종교심의 강조는 조학유의 논설에 보이는 공통된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그는 〈낙관인가 비관인가〉에서, 현대의 청년들에게 종교적 정신생활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환본적나라 하라〉에서는 과학문명이 일종의 ‘기술’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인류에게는 종교심이 있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심’ 또는 불교의 신앙적 성격의 강조는, 동시대 불교 지성들의 사상적 경향 내지 불교 인식과 차이가 있다. 한용운, 권상로, 김태흡 등은 조학유와 달리 불교의 합리적·철학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용운과 권상로는 불교를 ‘구세주의’와 ‘평등주의’의 종교로, 김태흡은 이지주의(理智主義), 이상주의, 평등주의, 인격주의의 종교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학유의 사상적 경향은 그가 지은 《찬불가》의 노랫말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다음 장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3. 조학유의 《찬불가》와 그 특징

1) ‘찬불가’의 개념 규정
조학유의 《찬불가》는, 35·37호를 제외한 《불교》 28~41호에 매호 2곡씩 악보와 함께 실려 있다. 각 작품의 제목에는 ‘제1곡(第一曲)’ ‘제2곡(第二曲)’ 등의 표시가 있는데, 제1곡인 〈찬불가〉 앞에 작자의 〈서언〉이 수록되어 있다.

① 종래에 불교창가(佛敎唱歌)라고 몇 종이 있었으나 다만 가사뿐이므로 각처에서 주곡(奏曲)이 같지 않아 사계(斯界)에 많은 포부를 가지신 이들의 통일을 숙망(宿望)하던 바이나, 아직 보이지 아니하므로 갑갑함을 부득이하여 본 찬불가를 술(述)하게 된 바입니다. 원래 사계에 대한 작곡의 지식은 넉넉지 못함으로 타교회(他敎會)에서 사용치 않는 각종의 호곡(好曲)을 인용하고 다소의 첨삭을 가하여 편술(編述)한 바이오니 여러분의 양해를 비는 바입니다.
② 본 찬불가는 곡보, 가사를 일반으로 주창(奏唱)키 위하여 비교적 천이(淺易)하게 편술한바, 더욱 복음(複音)의 번거로움을 피하고 단음으로만 하였습니다.
③ 본 찬불가는 5편(編)에 나누어 4~50종으로 편술한바, 제1편은 3대 예식, 제2편은 보통예식, 제3편은 석가일대(釋迦一代), 제4편은 일반단체, 제5편은 일요학교 및 유치원에 사용케 하였습니다.
④ 본 찬불가를 인쇄 결책(結冊)하고자 하였으나 후일 포부가의 완작(完作)이 출현하기를 기대하므로, 임시의 허비를 생략하고 〈불교〉지에 축호(逐號) 게재하려 하오니 사용코자 하시는 여러분의 통일을 바라는 바입니다.
⑤ 불교 고유의 범음성(梵音聲)은 종교적 예식으로 사용함에는 가장 건숙(虔肅)한 음조를 띠고 있으므로, 현금 야부(野浮)한 창가곡에 가감 사용하였으면 불종교에 특유한 유일의 악곡으로 생각합니다마는, 더구나 이들 음악에는 조금도 소양이 없으므로 유감이나마 모든 것을 후일의 작곡가에 미룹니다.
인용문은 〈서언〉의 전문이다. 〈서언〉은 《찬불가》 제작의 동기 및 목적(①), 음악적 성격(① ②), 체재 및 구성(③), 《불교》 연재의 이유(④), 불교음악에 대한 작자의 견해(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그는 인용문 ①에서 당시 불리고 있던 ‘불교창가’의 문제점을 지적한 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찬불가》를 편술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동일한 가사를 각처에서 저마다 다른 곡조에 얹어 부르고 있으므로, 노랫말과 악곡의 통일을 위해 이 《찬불가》를 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급은 조학유가 ‘찬불가’를 ‘불교창가’와 구별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찬불가’에 대한 개념 정의로도 볼 수 있다. 하나의 가사를 여러 곡조로 부르는 ‘불교창가’와 달리, ‘찬불가’는 특정한 노랫말에 특정한 악곡이 결합된 불교노래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찬불가》의 악곡에 대해서는, 자신이 창작한 것이 아니라 ‘타 교회의 호곡’을 편곡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선행연구에 의하면 《찬불가》 악곡 대부분은 일본 정토진종 찬불가의 일부 혹은 전체 선율을 차용한 것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인용문 ③은 《찬불가》의 체재 및 구성에 관한 서술이다. 이에 의하면 《찬불가》는 40~50종의 노래들을 3대 예식, 보통예식, 석가일대, 일반단체, 일요학교 및 유치원 등의 다섯 항목으로 나누어 수록한 것이 된다. 그러나 《불교》에는 ‘제3편 석가일대’ 중 ‘제24곡 태자의 고행’까지만 실려 있어, 조학유의 의도와 달리 연재가 중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록 제24곡 이후의 노래들이 전하지 않지만, 이 ③을 통해 《찬불가》의 대체적인 성격은 파악이 가능하다. 조학유의 《찬불가》는 단순한 연재가 아닌 찬불가집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불교의식 및 행사에서 가창을 전제로 한 의식가요라는 점이 그것이다. 《찬불가》가 ‘찬불가집’ 편찬의 일환으로 기획된 사실은 인용문 ④의 “본 찬불가를 인쇄 결책하고자 하였으나”라는 언급에서도 확인된다.
한편, 《찬불가》는 의식이나 단체와는 그 성격이 다른 ‘석가일대’의 항목을 설정하고 있다. 현재 전하는 24편 중 13편이 ‘석가일대’에 해당하는데, 이 항목의 비중이 크다는 점은 《찬불가》의 내용적 특징의 하나로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은 조학유가 ‘찬불가’의 내용적 범위를 암시한 것으로도 보인다. 곧 인용문 ①에서 특정한 가사에 특정한 악곡이 결합된 불교노래를 ‘찬불가’로 정의했다면, 여기에서는 ‘석가’ 관련 노랫말로 그 범위를 한정한 것이라 하겠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서언〉은 제작 동기, 악곡, 구성 등 《찬불가》 자체의 정보뿐만 아니라, ‘찬불가’의 개념 및 범위까지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학유가 불교의식에서 가창되는 ‘석가’ 관련 노래로 ‘찬불가’를 규정하고 있는 점은, 현재 불교계의 ‘찬불가’ 정의와 차이가 있어 주목된다고 하겠다.

2) 구성과 내용
《불교》에 수록된 조학유의 찬불가 24편의 제목을 그 편명과 함께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3대 예식 : 〈찬불가〉 〈불타의 탄생〉 〈불타의 성도〉 〈불타의 열반〉
보통예식 : 〈집회〉 〈산회〉 〈축진산(祝晉山)〉 〈교당낙성〉 〈교당기념일〉 〈화혼식(花婚式)〉 〈불전추도(佛前追悼)〉
석가일대 : 〈정반왕궁〉 〈백상(白象)의 꿈〉 〈룸비니원의 봄〉 〈실달(悉達)의 명명(命名)〉 〈성모(聖母)의 사(死)〉 〈염부수하(閻浮樹下)의 느낌〉 〈선각왕녀(善覺王女)〉 〈삼시전(三時殿)〉 〈궁중의 감상〉 〈춘일(春日)의 산보(散步)〉 〈월하(月下)의 명상〉 〈애(愛)의 별(別)〉 〈태자의 고행〉
               
이 노래들은 해당 편목에 따라 그 내용 및 성격이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3대 예식’의 노래들은 탄신일, 성도일, 열반일 의식에서 가창될 것을 전제로 지은 것이다. 〈찬불가〉의 경우는 3대 예식의 구별 없이 불렀을 것으로 보인다. 제목 옆의 “이 창가는 설교하기 전에 사용할 것”이라는 부기(附記)를 통해, 이들 의식 절차의 ‘설교’에 앞서 부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제목 옆의 부기는 〈불타의 성도〉에도 있는데, “이 창가는 당일 제등행렬에 최적(最適)함”이라고 되어 있다.
〈찬불가〉는 후렴구의 “일심을 함께 받들어서 경배합시다”에서 알 수 있듯이, 청자들에게 부처님을 경배할 것을 권하는 노래이다. ‘경배’의 이유로는 광명, 복, 사랑이라는 석가의 공덕이 제시되어 있다. 이 노래는 여타의 찬불가와 달리 어려운 불교 용어를 되도록 피하고 알기 쉬운 시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점은 《찬불가》 소재 작품들에 공통으로 보이는 특징이기도 하다.
〈불타의 성도〉는 ‘성도일’에 부르는 찬불가답게 그에 맞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1절에서는 석가가 부귀영화를 버리고 6년간 고행하여 무상도(無上道)를 깨친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2절은 성도 이후 석가가 중생을 제도하여 ‘행복길’을 연 것을 노래하고 있으며, 후렴구에서는 ‘좋은 오늘’을 함께 경축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1절은 성도의 ‘사실’, 2절은 성도의 ‘의미’에 해당하는데, 〈불타의 탄생〉과 〈불타의 열반〉 또한 탄생·열반의 사실과 그 의미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4절로 된 이 노래들은 1절에서 각각 “대성 불타 탄생하셨네”와 “이 세상을 떠나신 오늘이로다”라는 ‘사실’을 제시한 뒤, 2~4절에서 “광명 나라 보여주셨네”와, “죽고 남이 무상을 보이심인가”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3대 예식의 작품들은 해당 기념일의 제시와 이에 대한 의미 부여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이들 노래는 석가를 경배하거나 ‘오늘’을 경축할 것을 강조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권계의 내용이 없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다음으로 《찬불가》의 ‘보통예식’은 법회·포교당 관련 의식과 진산식·결혼식·추도식을 가리킨다. 곧 ‘보통예식’에 속한 7편의 노래들은 법회의 시작과 끝, 포교당의 낙성식과 기념식, 주지의 취임식인 진산식, 그리고 신도들의 결혼식과 추도식에서의 가창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 작품들 역시 ‘3대 예식’의 찬불가와 마찬가지로 해당 의식 또는 행사의 성격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화자의 권계 내지 당부가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고, 이 점은 ‘보통예식’에 속하는 노래들의 공통된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화자의 권계는 대체로 각 작품의 마지막 행에 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신체 건강 지키세”(〈산회〉), “우리 불법 새롭게 주지 하소서”(〈축진산〉), “부처님 교화 변치 말고 만만년 영원하도록”(〈교당기념일〉)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이들 노래에는 의식의 종류 및 내용과 상관없이 ‘부처님’이란 시어가 등장하고 있다. 〈산회〉는 “사랑 많은 부처님은 우리를 항상 도우시네”라 노래하고 있으며, 〈교당낙성〉과 〈교당기념일〉에는 각각 “부처님의 한량없는 자비로운 마음” “부처님의 한량없는 좋은 법으로”라고 되어 있다. 결국, 보통예식의 노래들은 ‘부처님’의 시어와 석가 관련 내용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고 하겠다.

一.
여러 사람 한가지로 기뻐하는 오늘날
불타 전에 맹서하고 가약 맺는 형제야
산과 같고 바다 같이 높고 깊은 연분을
무량겁에 쉬임없이 굳게 서로 맺어서
이 세상에 반갑하게 다시 서로 만났네

二.
우리 다시 한가지로 심향일주 받들어
불타 전에 예배하고 참맘으로 비나니
부처님은 무량하신 대자 대비심으로
원하게 안락한 가정 이뤄 주시고
무궁하게 행복을 받게 하여 주소서 

〈화혼식〉의 1절은 결혼식의 ‘사실’과 ‘이유’, 2절은 안락한 가정을 이루고 무궁한 행복을 받게 해달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노래는 각 절의 청자를 다르게 설정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 내용 및 성격이 달라지고 있다. 1절에서는 ‘가약 맺는 형제’가 청자로 제시되어 있고, 2절은 ‘부처님’을 대상으로 하여 화자가 바라는 바를 서술하고 있다.
화자의 기복은 이 노래 외에 〈불전추도〉에서도 나타난다. 이 작품의 3절은, “그러나 죽지 않는 일편영지는/ 부처님의 도우시는 힘을 입으샤/ 믿음 있고 안락한 구품연대에/ 좋은 행복 많이 받게 빌고 비노라”로 되어 있다. 화자는 부처님의 도움으로 청자인 ‘일편영지(一片靈地)’가 극락에 왕생하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기복’ 내지 ‘기원’은 《찬불가》의 다른 작품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찬불가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내용이다. 이는 불교의 신앙적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2장에서 살펴본 바 있는 조학유의 사상적 경향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대중과 직접 부딪히는 포교사의 입장에서 신도들에게 익숙한 불타관 내지 불교관을 작품에 수용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끝으로, ‘석가일대’는 〈정반왕궁〉부터 〈태자의 고행〉까지의 13편에 해당한다. 이들 작품은 각각 석가의 잉태, 탄생, 작명(作名), 결혼, 출가 등의 주요 사건을 노래한 것이다. 불전(佛傳)의 팔상(八相)으로는 ‘도솔래의(兜率來儀)’부터 ‘설산수도(雪山修道)’까지의 내용에 해당한다. 조학유의 〈서언〉에 의하면 이 제3편은 연재가 중단된 것으로, 〈태자의 고행〉 이후의 노래들은 팔상 중의 수하항마(樹下降魔), 녹원전법(鹿苑轉法), 쌍림열반(雙林涅槃) 등의 내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학유가 처음 기획한 찬불가 작품이 40~50종이므로, 《찬불가》 전체에 서 13편을 차지하고 있는 ‘석가일대’에 가장 큰 비중을 두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석가일대’의 작품들은 ‘삼대예식’ ‘보통예식’과 몇 가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곧 ‘우리’ ‘형제’ 등 구체적인 청자를 제시하지 않고, 청자에 대한 권계의 내용이 없으며, 석가에 대한 찬양이나 기복이 드러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비교적 다양한 내용 및 성격의 노래들이 공존하고 있으며, 특히 교술성의 약화와 서정성의 강화는 내용적 특징의 하나로 지적할 수 있다.
一.
중생제도 하려는 실달태자는
부귀영화 버리고자 결심하셨네
그러나 인정이라 쓰린 가슴은
잠든 중에 이별할 야수다라라

二.
항하수의 물보다 깊은 애정을
이 나에게 의탁한 야수다라요
이로부터 실달은 태자 아니다
내 간 후는 라후라에 낙을 부쳐라

三.
시드러진 꽃같이 잠든 야수다라
너를 두고 가는 것은 무정할지나
나는 오직 중생을 건지렴이다
슬퍼말고 잘 있어라 야수다라야

四.
재촉하는 말걸음 왕궁을 뒤두고
새벽하늘 찬바람에 이슬 떨치며
가는 곳은 어디냐 멀고 또 깊은
쓸쓸한 눈바람의 설산이로다

인용문은 출가 당시의 상황을 노래하고 있는 〈애의 별〉을 옮긴 것으로, 태자의 심경 묘사가 중심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용문의 2~3절에서 태자는 아내인 야수다라에게 이별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태자의 직접 발화는 “인정이라 쓰린 가슴”과 함께 석가의 인간적 형상화를 위한 장치로, 이로 인해 석가의 인간적 측면이 보다 강화되어 있다. 그리고 “가는 곳은 어디냐 멀고 또 깊은/ 쓸쓸한 눈바람의 설산이로다”라는 결구는, 출가를 앞둔 태자의 심적 갈등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구절은, 설산 자체에 대한 묘사뿐만 아니라 태자의 심리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3대 예식’과 ‘보통예식’의 노래들에서 석가는 시혜(施惠)의 존재 내지 기복의 대상으로 형상화되어 있었는데, 이 〈애의 별〉을 포함한 ‘석가일대’의 노래들은 인생에 대해 고민하고, 출가를 앞두고 심적 갈등을 겪기도 하는 ‘인간’으로서의 석가를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상이한 불타관의 공존은 《찬불가》가 비교적 다양한 성격의 작품들로 구성된 ‘찬불가집’이라는 점에 일차적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찬불가》를 연속된 하나의 작품으로 볼 때에도, 그 이유에 대한 다음과 같은 추정이 가능하다. 곧 ‘3대 예식’ ‘보통예식’ ‘석가일대’의 배열순서 및 불타 형상화의 양상은, 시혜의 주체이자 기복의 대상인 현재의 석가가 과거에는 중생들과 같은 ‘인간’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함에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누구나 석가처럼 불타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찬불가》는 석가에 대한 단순한 찬양의 노래가 아니라, 불교의 존재 이유가 ‘성불’에 있음을 강조하고, 청자들에게 성불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당부한 노래가 된다고 하겠다.

4. 조학유 《찬불가》의 성격과 시대적 의의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1920~30년대에 간행된 의식집과 불교잡지에는 많은 ‘찬불가’ 작품이 전하고 있다. 조학유의 《찬불가》는 찬불가만을 수록한 ‘가집’으로, 동시대의 찬불가와 몇 가지 점에서 다른 특색을 보이고 있다.
우선, 《찬불가》는 다양한 불교의식을 설정하고, 의식의 종류에 따라 각각의 찬불가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3대 예식 이외에 진산식, 결혼식, 추도식 등에서의 가창을 위한 찬불가 제작은 그 유례가 없는 일이고, 의식의 내용 및 성격에 맞는 노랫말의 창작 역시 유일한 예에 속하는 것이다.
노랫말의 표현과 내용에서도, 《찬불가》는 어려운 불교용어 대신 알기 쉬운 시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어를 통해 석가의 구체적인 공덕을 제시하고 있는 특징을 보인다. 특히 《찬불가》의 ‘3대 예식’ ‘보통예식’에서는 사랑·행복·광명·평화 등의 시어가 작품마다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사랑’과 ‘행복’은 각각 동시대 찬불가의 ‘대자대비(大慈大悲)’와 ‘열반’ 내지 ‘해탈’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들 시어로 석가와 그 공덕을 구체화시키고 있는 점은 근대 이전의 의식가요인 범패와 구별되는 내용적 특징이기도 하다. 범패의 가사는 ‘석가’만을 노래하는 경우가 많지 않고, 석가를 찬양하고 있는 경우에도 공덕의 제시와 그 찬탄의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끝으로, 《찬불가》는 그 〈서언〉에서 ‘찬불가’의 개념과 범위를 규정하고, 이 규정에 의해 찬불가를 제작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조학유의 ‘찬불가’ 규정은 현재 불교계 및 음악학계의 찬불가 정의와 다소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관련 연구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라 여겨진다.
한편, 근대불교계에서는 1924년 7월 《불교》의 창간을 기점으로 불타 관련 담론들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찬불가》는 ‘불타 담론’의 측면, 곧 석가일대기의 근대적 변용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지적할 수 있다.
근대불교계의 ‘불타 담론’은 전통적인 대승불교의 불전(佛傳) 및 불타관(佛陀觀)에 의거한 담론들과, 서구 및 일본 근대불교학의 연구 성과를 반영한 ‘새로운’ 불타 담론들이 공존 또는 충돌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중에서도 일본 유학생 출신의 승려들이 주도하고 있는 후자가 불타 담론의 주된 흐름으로, 인간으로서의 석가 인식 내지 형상화가 주요 관심사였다. 오봉산인(五峯山人)과 김태흡은 불타의 인간적 형상화가 신앙의 문제와 관련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곧 신적 존재로서의 석가 관념은 기복신앙의 원인이 되므로, ‘현대인’의 요구에 맞고 보다 깊은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석가가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인격자·성자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학유의 《찬불가》는 이들과 달리 전통적인 불타관과 새로운 불타관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의 작품 안에서 상이한 불타관이 공존하고 있는 경우는 보기 드문 예에 속하는데, 이 또한 ‘신앙의 문제’와 관련된다고 보인다. ‘기복불교’의 척결은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1913) 이후, 근대의 불교지성들이 지속적으로 제기해온 문제였으나 ‘기복불교’는 해소되지 못했고, 1920년대에도 여전히 성행하고 있었다.
포교사로 활동했던 조학유는 이러한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고, 이 때문에 그는 일반 신도들에게 익숙한 대중불교의 불타관을 수용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면서도 그는 당시에 새롭게 등장한 불타관 역시 반영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이들 노래의 배열을 통해, 단순한 ‘기복’을 불교의 목적인 ‘성불’의 추구로 전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불타 담론으로서 《찬불가》가 갖는 의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특징은 알기 쉬운 시어의 사용과 구체적인 석가의 공덕 제시와 함께, 《찬불가》가 발표 당시는 물론이고 현재까지 널리 불리는 이유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김기종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HK 연구교수.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박사. 논문으로 〈근대불교잡지의 간행과 불교대중화〉 〈김태흡의 대중불교론과 그 전개〉 〈조학유의 찬불가 연구〉 등이 있고, 《월인천강지곡의 저경과 문학적 성격》 《동아시아 불교의 근대적 변용》 《테마 한국불교 Ⅰ》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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