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근대’와 ‘민족’을 화두로 고뇌한 지식인

1. 들어가는 글

조명제
신라대 교수
이미 흘러간 유행가처럼 되었지만, 1990년대에 문화유산 답사가 붐을 이룬 적이 있었다. 어느 베스트셀러 답사기에 잘 드러나듯이 불교는 문화유산 가운데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하지만, 거기서 불교란 한 마디로 일상에서 살아 있는 종교가 아닌 미학의 대상으로 전락된 것이었다. 일반 독자에게 불교란 사라진 것, 돌과 나무를 비롯한 유형물에 미적 가치로만 남아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한 이미지는 사회적 편견이나 선입관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불교계가 앞장서서 그러한 이미지를 재생산하였다. 어디서나 ‘천년 고찰’을 자랑하고,‘전통사찰’을 상투적으로 내세운다. 그것은 현실적인 잇속과 관련되는 현상이지만, 불교계의 자기 인식이 얼마나 빈곤한지를 잘 보여준다. 나아가 이러한 사고는 단순히 전통에 대한 인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과거에 이미 창조적인 활동을 완결하고 그 사상적 요소는 전부 나와서, 오늘날에는 그것을 선택하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사용하면 좋다고 하는 발상에 매여 있다. 더욱이 전통의 묵수(墨守)가 지나쳐 오로지 지금 전해져 오는 것만을 정통으로 간주한다.

이와 같이 오랜 역사의 무게에 짓눌려 불교를 지적인 문화유산만으로 간주하는 시각도 문제지만, 그러한 시각이 올바른가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고민도 별로 없다. 가령 불교사 또는 불교학의 연구 대상은 대부분 고대, 중세에 한정되고, 현재의 불교와 깊은 관련을 갖는 조선 후기, 근대의 불교에 대한 연구는 초보적인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근대불교사 연구는 1990년대 이후에 서서히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일천한 연구사를 감안하더라도 기존의 근대불교사 연구는 연구 시각과 방법론에서 학계 일반의 흐름에 뒤처진다. 가령, 일본 불교의 침투와 그에 저항하는 민족불교라는 역사상의 추구는 침략과 저항이라는 구도로 근대사를 바라보던 시각과 마찬가지이다. 내셔널리즘 과잉에 대한 비판이 학계에서 제기된 지 오래되었음에도, 불교학계는 여전히 흘러간 유행가를 되풀이하는 인상을 준다. 나아가 이러한 시각은 근대불교사의 다양한 흐름과 의미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근대의 불교는 단순히 지금과 가까운 시대의 불교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근대화가 사회, 역사 전체를 규정한 거대한 지적, 문화적 변동이 일어난 시대에 불교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전통적인 불교로부터 근대적인 불교로 어떻게 전환하여 갔는지, 그러한 과정에서 전통과 근대가 어떻게 대응하였는지, 나아가 탈근대적인 방향 등 근대불교와 관련된 문제는 그 무게감도 작지 않지만, 오늘의 불교계를 이해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한편, 근현대 불교를 정통론이나 문중 중심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태도도 여전하다. 특히 ‘비구·대처 분쟁’ 이후에 이러한 편향적 시각이 심화되었다. 엄밀한 학문적 검토를 거치지 않고, 마치 선험적인 결론을 전제로 하거나 특정 문중의 인물을 현창하는 식의 태도가 근대불교 연구에도 적지 않게 드러난다.

반면, 불교의 근대화와 관련된 지식인 승려들은 대처승으로 비하되거나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여러 가지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식민지 시기에 일본 유학을 통해 근대불교학을 본격적으로 수용하였고, 불교의 근대화와 관련한 다양한 활동을 하였던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근대와 불교라는 문제를 논할 때에 이들을 제외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근대불교사의 역사상을 제대로 묘사할 수 없다.

이러한 문제 인식과 관련하여 허영호(許永鎬, 1900~1952)는 그의 생애와 활동이 근대불교사의 흐름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서 주목된다. 그는 범어사 출신의 승려 지식인으로, 그의 생애와 행적은 지역사회에서의 민족운동과 일제의 침략 전쟁에 대한 협력, 근대불교학의 수용, 불교 근대화를 위한 다양한 모색으로 이어졌다. 제한된 지면이라 한계가 있지만, 허영호의 삶과 불교 근대화에의 지향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것이 어떻게 굴절되어 전개되었는지를 통해 근대불교의 자화상에 대한 한 단면을 제시해보기로 한다.

2. 현실참여와 굴절

허영호
허영호는 1900년 12월 22일에 동래에서 태어나 10대와 20대 시절을 고향에서 보냈다. 그는 1915년 3월에 동래 동명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1917년에 설립된 범어사 지방학림을 다니며 근대적인 교육과정의 기초와 전통적인 불교학을 배웠다. 그의 10대 시절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맞물리면서 자연스럽게 민족의 현실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는 시기였다.

그러한 면은 그가 1919년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데 잘 드러난다. 그가 3·1운동에 참여한 것은 동래 지역에서 범어사 승려들이 만세시위 운동을 주도한 것과 관련된다. 그는 “한 번 죽음은 자유를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一死莫如得自由)”라는 격문을 작성하며, 동래의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결과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이후 허영호는 1920년대 전반기에 몇 년간 정신적인 방황을 하면서 지내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이 분출하면서 근대의 사상과 이념이 다양하게 수용되고, 여러 사회 세력들이 이합집산하면서 충돌하는 격정적인 흐름이 이어졌던 때였다.

그는 이러한 시대 상황의 전환기에 20대 전반이라는 청년기를 겪으면서 사회운동의 노선과 방향을 어떻게 모색할 것인지, 문화운동과 사회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이념과 사상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경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고 갈등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는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운동이 표면화되는 것을 계기로 내면적인 침잠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사회 활동에 나섰다. 그는 1925년 11월에 결성된 동래청년연맹의 창립과정에서 창립준비위원과 창립위원으로 참가하여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어 1928년 2월에 결성된 동래청년동맹과 같은 해 4월에 설립된 신간회 동래지회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이 계속되고, 운동의 주도권을 둘러싼 내부적인 변화와 갈등 등으로 인해 운동의 역량이 위축되면서 허영호는 지역사회의 민족운동에서 한발 물러나게 되었다.

허영호는 동래 지역에서 사회운동을 실천하는 한편으로, 1926년 8월에 문예잡지인 《평범》을 창간하여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활동하였다. 그가 잡지를 간행한 것은 1920년대에 사회의 제반 담론을 잡지가 주도하던 분위기에서 영향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세계 사상계의 대세로 일어난 개조론 내지 문화주의의 영향은 문화와 문화사업에 대한 국민적 각성으로 이어져 수많은 출판사가 탄생하고 저작물의 출간 붐이 조성되었다.

허영호가 잡지 《평범》을 창간하였던 배경에는 이러한 시대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는 잡지의 편집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원고를 집필, 번역하였으므로 《평범》은 사실상 자신의 1인 잡지였다. 《평범》에 실린 글은 시, 소설, 콩트 등의 창작물과 번역 작품, 외국문학의 신변잡기적 소개, 취미, 과학, 생활 에세이, 생활, 종교 등 다양한 영역에 이르지만, 그 가운데에 문예 글이 가장 많다. 그는 당시의 문예 작품이 일반 민중의 취미에 적당하지 않고, 일부 특수계급의 감상에 그쳐 일반 민중과 아무런 교섭이 없다고 비판했다.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쉽고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대중적 잡지 간행에 뜻을 두고 문예 글을 중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잡지 간행은 석 달 만에 끝나게 되었는데, 재정적인 문제와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잡지의 독자층이 제한적이었고, 아무리 쉬운 문예 잡지를 추구하더라도 대중은 여전히 계몽적 대상으로 놓여 있을 뿐이고 독자 대중으로 형성되기가 쉽지 않은 한계를 갖고 있었다. 더욱이 잡지의 내용도 특별히 두드러진 점이나 차별성을 갖지 못하였다.

이러한 한계는 편집자인 허영호가 지닌 역량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추구하는 대중이 누구인지 애매모호한 데다가 그 자신이 근대적인 사상과 문화 흐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당시 잡지 문화를 따라가거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없는 수준에 그쳤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동래 지역사회에서 불교 잡지가 아니라 대중 문예지를 모색하였던 것은 지역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인데, 지역 문화사와 관련된 의의가 적지 않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허영호는 20대 청년 시절에 동래 지역에서 사회운동과 잡지 발간 등 다양한 실천적 방향을 모색하였지만, 결국 좌절과 실패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1929년에 사회운동의 길을 접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가 유학을 떠난 데에는 동래 지역의 사회운동이 침체되던 상황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수밖에 없던 현실적인 상황과 함께 근대불교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자 하는 그의 의욕과 관련된다. 또한 1920년대에는 승려의 일본 유학이 점차 확산되고 있었던 데다가 그의 재적 사찰인 범어사가 유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였기 때문에 일본 유학이 실현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항일비밀결사 만당의 주역들. 뒷줄 왼쪽부터 허영호, 김법린, 최범술, 앞줄 오른쪽 첫번째가 김상호, 네번째가 강유문이다.
그는 1930년에 일본 다이쇼(大正) 대학 불교학과에 입학하여 근대불교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1932년 2월에 졸업하였다. 유학 중에도 학업에만 매달리지 않고 1930년 5월에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인 만당 동경 지부에 가입하여 불교 사회운동에 참가하였다. 그가 만당에 참여하였던 것은 민족운동에 대한 관심과 함께 만당에 김법린을 비롯한 범어사 출신 승려들이 다수 활동하였던 것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1932년에 허영호는 유학 생활을 마치고 김법린, 장도환 등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는 중앙불전 학감 겸 교수로 활동하며, 불교계의 현안에 대한 문제와 불교 근대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가 중앙 불교계에서 활동한 것은 역시 범어사 출신의 인맥과 관련된다.

당시 범어사는 경남의 대표적인 사찰인 통도사, 해인사 등과 함께 불교계를 주도하는 위상을 갖고 있었다. 1930년대 초기에는 보성고보 교장인 김경홍, 불전 학감인 허영호, 불교사 주필인 김법린 등을 비롯하여 교무원의 운영 이사진까지 모두 범어사와 통도사 출신이었다. 이와 같이 범어사, 통도사, 해인사 등 경남 3본산이 교무원의 주도권을 쥐자, 다른 지역의 사찰들이 반발하였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허영호가 보성고보 운영과 관련된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40만 원 증자안을 제출하자, 그에 대한 반박문이 발표되는 등 커다란 분규로 이어졌다.

이러한 분규와 관련하여 교무원의 재정 문제 등으로 인해 불교계를 대표하는 잡지인 《불교》가 1933년 7월에 폐간되었다. 그리하여 허영호는 몇 년간 중앙 불교계와 거리를 두다가 1937년에 다시 《불교》가 속간되면서 편집 및 발행인으로 취임하여 1939년 1월호(신19집)까지 편집인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그는 조선불교청년총동맹 경성동맹이 부활되는 임시대회를 주도하였고, 교무원의 평의원, 상무이사, 재무이사 등을 역임하고, 조선불교 조계종의 종정 사서를 지냈다.

이와 같이 허영호는 1937년 이후 1945년까지 식민지 조선의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의 한 사람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태평양전쟁의 파국으로 치달으면서 식민지 조선의 물자와 인력을 총동원하는 바람에 식민지 사회의 모순이 극대화되던 때였다. 허영호는 이전의 민족운동에서 전향하여 일제의 전쟁에 협력하면서 ‘친일’담론을 다양하게 남겼다.

그는 1940년 10월에 황국신민화와 전쟁 동원을 목적으로 설립한 국민총력조선연맹에 불교계를 대표하는 평의원으로 참가하였다. 또한 1941년 8월 7일에 그는 각종 종교, 사상, 정신문화단체 등이 연합하여 만든 ‘애국을 위한 모임’에 불교의 대표로 참가하여 ‘조국 일본을 수호하자’라며 궐기에 앞장섰다.

 이어 그는 1942년 9월 1일~10일에 일본과 조선불교 대부분의 종파가 연합하여 식민지 조선을 순회 강연한 내선합동 시국강연회에서 연사로 참가하였다. 또한 평남 진남포, 안주, 평북 선천, 정주, 신의주, 의주, 강계 등지에서 ‘대동아전쟁과 일본의 사명’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이 시국강연회의 목적은 대동아전쟁의 긴박한 상황을 설명하고, 불교도와 조선인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각오를 주입하는 데 있었다. 아울러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과 일본불교의 일치단결이라는 황도불교를 강조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또한 1943년 3월에 불교문화보급회를 설립할 때에 그는 이종욱, 김태흡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발기 취지는 종교보국, 포교보국, 직역봉공 등을 주장하며, 국체관념을 투철하게 하고 황도불교를 선양하며 흥법보국의 신념을 함양시켜 일본의 전쟁에 협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협력은 일본강점기 말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특히, 전황이 일본에 불리해지면서 조선인에 대한 징용과 징병 요구가 확대되자 허영호는 종교단체 대표자들과 함께 전국을 순회하면서 특별지원병 지원을 촉구하는 강연에 참가하였다.

전쟁 협력이라는 경력에도 불구하고 허영호는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다양한 사회 활동을 펼쳤다. 9월 1일에는 건국준비위원회 개최를 위한 첫 모임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이어 초대 동국대학교 학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그는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 비상국민회의 주비회 기초위원, 기미독립선언기념 전국대회준비위원회 위원, 전조선문필가협회 추천회원, 민족대표외교사절후원회 등 다양한 사회 활동에 불교계의 대표 인사로서 참여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회적인 행보는 정치 활동으로 이어졌고, 1949년 경상남도 부산 갑선거구의 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그의 국회 활동은 신문, 의사기록 등을 통해 간략하게 알 수 있는 정도이다. 그는 무소속으로 활동하다가 국회 정파인 이정회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의 정치 역정은 1950년 5월에 실시된 부산시 갑구 국회의원 선거에 낙선하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거의 알 수 없지만, 그의 친인척의 전언에 따르면 동국대 제자들과 함께 월북하였다고 한다. 그 후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다가 몇 년 전 방북취재단에 의해 평양 인근에 안장된 무덤의 비명에 의해, 1952년 1월 전란 중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3. 근대불교학의 수용과 한계

19세기 말에 제국주의의 침략이 동아시아 세계에 본격화되면서 조선은 제국주의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에 따라 자립적 근대화의 길이 아닌 외부로부터 강요된 근대 세계가 앞에 놓였다. 곧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근대문화의 수용도 일본을 경유하게 된 것이다. 일본을 통한 근대문화의 수용을 학술, 제도, 지식정보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가장 중요한 루트는 유학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식민지 조선 불교계의 경우 일본 유학을 통하여 근대불교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되고 커다란 자극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불교가 근대화를 모색한 것은 그 나름의 계기와 특징이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신불분리’와 ‘폐불훼석’이라는 국가적인 불교 탄압과 급속한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일본 불교계는 메이지 정부와 일정한 타협을 통하여 교단을 안정시키면서 불교 근대화를 모색하였다. 특히 유럽 유학을 통해 당시 새롭게 정립된 문헌학적 불교학을 수용하는 방향이 추구되었다. 이들 유학생은 근대 학문적인 방법론에 입각한 새로운 근대불교학을 수용하였고, 그들이 귀국하면서 각각 제국대학과 종립대학에서 산스크리트어, 빨리어 등 언어학, 문헌학적 지식과 근대과학적인 종교학, 역사학, 철학, 사회과학 등의 새로운 지식 체계를 도입하여 근대불교학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의 근대불교는 유학생을 중심으로 지적 회로의 확대, 그리고 번역을 중심으로 한 지식정보의 교류를 통하여 동아시아 불교계에 커다란 사상적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종래 일본불교의 침탈, 침략이라는 측면이나 이른바 ‘친일불교’라는 시각에서 일본불교와의 교류나 영향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근대 불교사의 역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 하겠다.

허영호의 경우, 일본 유학을 통해 근대 불교학을 수용하고 불교 근대화의 길로 나아간 대표적인 승려의 한 사람이다. 그는 1920년대에 다양한 독서를 통해 근대문화와 근대불교를 어느 정도 접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가 근대불교의 본령에 본격적으로 다가선 계기는 역시 일본 유학이라는 경험이었다. 그러면 그가 일본의 다이쇼 대학에서 근대불교학을 배우면서 가장 관심을 가진 분야는 무엇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는 언어학, 문헌학에 입각한 근대불교학을 공부하고 반야학과 관련된 분야에 흥미를 가졌다. 이는 다이쇼 대학 불교학과 졸업논문으로 〈반야부경의 성립차제에 대하야〉를 제출하였다든지, 반야부를 중심으로 한 대승경전의 번역에 집중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아울러 그러한 번역의 주된 대상은 한역본(漢譯本)보다 산스크리트어 판본이었다.

그가 다이쇼 대학에 유학하였을 때에는 근대불교학의 언어학적, 문헌학적 연구가 체계화되고, 일본 불교학계 나름대로 독자적인 영역을 형성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는 산스크리트어, 빨리어에 대한 학습을 한 후 처음으로 《반야심경》의 산스크리트어 원전과 현장역(玄奘譯) 한문본과 비교, 대조하여 한글로 주석을 붙인 성과를 제시하였다.

또한 그는 반야부의 성립 경위, 과정 등을 고증, 분석하였다. 나아가 언어학에 대한 지식과 관심은 불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산스크리트어, 빨리어와 한글의 발음을 비교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관심을 확대하기도 하였다. 이어 근대불교의 지식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하여 《불교성전(상)》 《불타의 의의》 《사종의 원리》 등을 저술하여 출판하였다.

허영호는 인도불교의 원전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한역본 경전에 대한 번역 작업을 집중적으로 수행하기도 하였다. 《십이문론》 《아미타경》 《천수경》 《마등가의딸경》 《보시태자경》 《천태사교의》 《대승기신론》 《원인론》 등 다양한 한역 불전을 번역하여 불교 잡지에 소개했다.

이러한 번역은 종래 이루어졌던 불전의 한글 번역과 차원이 달랐다. 구한말 이래 불전 번역은 경전을 한문에서 한글로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였다. 이에 비해 허영호의 번역은 대부분 한글로 쉽게 풀이한 데다, 근대불교학의 연구 성과를 수용하여 용어의 개념이나 표현까지 고려하여 우리말로 옮겼다. 이러한 성과는 근대불교의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한편, 그는 당시 불교계의 현안이나 방향에 대한 인식에서도 전통적인 불교의 틀을 극복하고 불교의 근대화에 대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가령, 당시 불교가 본래의 이상을 잃고 자기 보존에 급급하다고 지적하면서 불교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는 불교사에서 상좌부불교에 대한 대중불교, 출가불교에 대한 재가불교, 성문불교에 대한 보살불교의 발달, 그리고 이론불교에 대한 실행불교의 제창 등의 사례를 들면서 새로운 불교 제창이 요구된다고 하였다. 그러한 신불교는 전통적인 종파의 부활이 아니라 불타의 교법에 의지하면서도 시대를 향도할 수 있는 새로운 불교, 곧 현대인의 생활 요구에 해답을 주고 만족을 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허영호의 근대불교에 대한 인식과 그에 따른 성과는 근대불교의 학문적 기반을 토대로 당시 불교계의 불교 근대화를 위해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그의 학문적인 성과나 근대 인식은 일정한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먼저 그의 번역 작업은 대부분 1937년에서 1940년에 이르는 시기에 이루어진 특징을 갖고 있다. 이때는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태평양전쟁이라는 파국으로 나아가던 때였다. 그리하여 일제가 황민화 정책을 본격화하고 불교계에 전쟁 수행에 대한 협력을 본격적으로 강요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허영호는 스스로 일제의 전쟁을 지지하고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것은 그의 근대와 불교에 대한 인식 자체가 갖는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며, 그가 번역에 몰두한 것도 시대 상황이나 현실인식의 한계와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그가 1937년 이후에 조선불교의 의미, 특성 등에 대한 논설을 집중적으로 발표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그러한 담론은 대개 원효불교의 이해, 통불교론 등 조선불교의 독창성을 강조하는 특징을 가진다. 그는 조선불교의 특징을 종파불교가 아니라 통불교라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그는 조선불교의 재조직은 통불교로서 조선불교의 확립을 전제로 한다고 규정하였다. 아울러 통불교는 단순히 근본불교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근본불교의 원의에서 3천 년의 역사불교를 지양, 통일하여 현재의 조선불교에 귀납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이러한 놀랄 만한 계획의 완성을 약속한 불교는 현재 세계 어느 불교보다 조선불교가 가장 적합한 상태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원효불교나 통불교론을 주장한 것은 자신의 독창적인 논리라기보다는 이미 최남선이 제기한 이래 당시 불교계에서 유행한 담론이며, 조선불교의 특징을 증명하는 논리였다. 그런데 이러한 조선불교의 특징이나 우수성을 강조하는 것은 동양문화, 일본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논리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내선일체 담론이 바탕에 깔린 것으로 일본제국의 확장과 함께 만주나 동남아시아를 타자화하면서 나타난 논리와 관련된다. 허영호가 이러한 담론을 수용한 것은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황도불교를 제창하는 식민지 조선의 불교계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며, 결국 보수적, 퇴행적인 불교 인식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인식은 백백교 사건을 예로 들면서 불교의 각성을 촉구한 글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백백교와 같은 유사종교가 발생하고 융성하는 원인은 사회적 불안과 민중의 생활에 대한 위협이 극단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곧, 일반 민중은 필연적으로 종교를 갖지 않을 수 없는데, 사회가 불안하면 민중을 사교의 길로 몰아넣게 된다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는 일반 민중의 종교에 대한 욕구를 해결하지 못하는 현실을 반성해야 하며, 그것은 전통적인 불교가 공허하고 대중에게 먼 것이 원인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은 불교의 봉건적인 체질을 탈피하고 근대화를 추구하는 방향과 생각이 담겨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현실인식과 관련하여 일정한 문제점이 있다. 1937년 2월에 표면화된 백백교 사건은 겉으로 보면 유사종교의 폐단을 극명하게 드러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1935년 이후 비공인 종교였던 신종교들을 ‘종교유사단체’로 규정하고 ‘사교 일소’라는 명분으로 종교 탄압을 통해 국민사상 통제를 강화하고자 한 총독부의 방침에 백백교 사건이 신종교 탄압의 좋은 명분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당시 유사종교로 불리던 비공인 종교는 항일독립운동과 관련된 경우가 적지 않았고, 중일전쟁 이후 기성 종교가 일제에 순응하면서 민중의 조선 독립에 대한 희망을 일정하게 대변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허영호가 총독부의 사교 탄압에 대한 명분과 논리를 그대로 수용한 것은 그의 현실인식과 상황 판단에 문제가 적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실인식의 문제점은 그가 일제의 전쟁에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그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당위성을 인정하고, 후방에서 전쟁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자 하는 ‘총후보국(銃後報國)’의 논리를 적극적으로 선양하였다. 또한 총후보국론에 입각한 국민운동이 확대될 때에 그는 전시국가에 처한 국민으로서 국가 정책을 충분히 이해하고 협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전시체제에 어떻게 협력해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까지 제시하였다.

이러한 전쟁 협력 입장은 궁극적으로 천황제를 선양하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그는 “황도(皇道)를 천하에 선양하고 국위를 팔굉(八紘)에 편진(徧振)하여 만민을 황화(皇化)에 자윤(滋潤)케 하고 보토(普土)를 군덕(君德)에 귀순케 하니 위로 황실의 존엄, 아래로 국민의 위대 참으로 빛나도다.”라고 천황제를 찬양하였다. 나아가 내선일체론에 따라 조선인에 대한 창씨개명이 강요되자, 그 자신도 창씨개명에 동참하여 도쿠미츠 쓰바사(德光翼), 도쿠미츠 요시(德光允)라는 창씨명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전쟁 협력 담론은 일제가 제기한 대동아공영권을 합리화하는 논리까지 이어진다. 허영호는 그러한 논리를 남방불교의 한계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대동아공영권의 불교가 어떠한 역할을 할 것인지를 주장하는 방식으로 제시하였다. 그는 남방불교가 계율을 중시하는 특징이 있지만 형식적인 현상과 습속만을 보고 계율 지상주의에 추종하는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즉 계율은 인간의 각성과 완성을 기초하고, 도덕적 행위 또는 윤리적 실천에 따라 가치를 갖지만, 그러한 계율의 근본정신을 잊고 현실생활과 유리된 형식적인 율문(律文)에 얽매이는 것은 단순히 전통을 묵수하는 남방불교의 문제라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남방불교의 성격이 결국 국가, 사회적으로 발전이 없고 정체된 생활을 가져온 병폐라는 것이었다.

그는 동남아시아의 정체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북방불교도가 그들에게 새로운 생기를 주고 밝은 희망, 굳은 신념과 자각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본제국이 동양 국민을 지도해야 하는 세계사적 전환을 맞이한 시국에서 불교도가 담당할 불교 원리를 확립하여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기존의 종단불교는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담당하기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으며 ‘승려로서 생각하는 불교, 종단으로 생각하는 불교를 떠나서 국민으로 생각하는 불교’를 세워야 하며, 그것은‘대동아공영권을 지도하는 국민으로서 생각하는 불교’ ‘세계를 지도하는 국민으로서 생각하는 불교’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대동아공영권의 불교, 세계적 불교란 현실적으로 제일선에서 생명을 국가에 바치는 장병들을 생각하고, 자기 수행에 매몰된 승려불교를 청산하여 국가의 진군에 함께 나아가는 불교라는 것이었다.
아울러 그러한 불교란 대동아공영권의 이상을 확립하고, 대동아 신질서에 부응하기 위해 종래의 봉건적인 불교를 탈피한 새로운 ‘지도 불교’라고 하였다. 그는 그러한 불교가 동아 사상 가운데 최고의 철학적 논리를 갖추고 대승불교의 극치를 이룬 일본불교라고 단언하였다.

이와 같이 허영호가 대동아공영권의 이상에 적합한 불교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면서 제시한 전쟁 협력에 대한 논리는 자신의 독창적인 논리가 아니라 일본의 사상계와 불교계에서 제시한 것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일본이 서구 열강의 아시아 침략에 대항하며 아시아의 해방과 평화를 명분으로 하는 대동아공영권을 제기한 것은 철저하게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전쟁의 확대에 따른 후방의 동원, 협력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러한 대동아공영권의 이론을 합리화하는 데에 교토학파의 사상가들이 앞장선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교토학파의 사상가, 학자들이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시하면서 화엄의 법계연기설을 원용하는 등 불교사상에 주목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불교계에서 왕법불법일치설과 같은 논리만이 아니라 대동아공영권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화엄철학과 결합하는 학설이 제기될 정도였다. 거칠게 말한다면, 불교가 근대일본에서 근대서양에 대항하는 동양 또는 일본문화의 원리로서 발견되었고, 그것이 천황제 파시즘이 주도하는 세계 전쟁을 합리화하고 국민을 동원하는 담론으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담론은 그대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식민지 조선에서 재현되었다. 총독부는 전쟁에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한 것만이 아니라 식민지 지식인들이 국민 동원의 담론을 모든 문화 방면에서 확산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허영호의 경우 불교계에서 그러한 전쟁 동원의 담론을 적극적으로 수행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나아가 그러한 전쟁 협력 담론은 조선불교의 공적 입장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달리 말한다면 일제의 전쟁에 협력하거나 그러한 담론을 적극적으로 제시한 것은 허영호 개인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불교계, 특히 근대불교를 지향한 대부분의 불교 지식인에게 공통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식민지 불교의 모순과 한계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이며, 그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제한된 지면에다 아직 본격적인 연구가 제시되지 않은 상황에서 필자가 이런 문제에 즉답을 내릴 만한 입장은 아니다. 더욱이 식민지 조선의 근대화는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일본을 경유한 식민지 근대화가 갖는 구조적 모순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거시적인 문제가 놓여 있기에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다만, 식민지의 근대불교가 일본의 근대불교로부터 받은 영향을 기본적으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일본의 근대불교가 갖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의 근대불교는 기본적으로 19세기 유럽에서 형성된 문헌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근대불교학을 받아들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유럽 세계에서 불교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과정은 불교 문화권과의 교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남겨진 문헌을 통해서였다. 이와 같이 문헌에 의한 불교를 이해하는 서구 근대의 불교학은, 실은 기원에 있는 역사적 붓다의 이상화, 그것에 반비례하는 현실불교의 멸시라는 대조적인 결론을 낳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일본불교는 유학생을 통해 직접 서구의 근대불교학을 수용하고, 제국대학과 종립대학에서 언어학, 문헌학적 지식과 근대과학적인 종교학, 역사학, 철학, 사회과학 등의 새로운 지식체계를 도입하여 근대불교학을 형성하였다. 이들 유학 출신 불교학자들이 제국대학으로 대표되는 대학 시스템에 편입되면서 그들의 주된 관심은 근대불교학의 완성으로 나아갔다. 반면에 그들은 현실의 불교를 세계사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라는 근대 일본이 안은 문제를 해명하는 데에는 아예 외면하였다. 아울러 현실적으로 근대국가로서의 이념과 상징을 형성해 가는 작업에서 원칙적으로 불교가 배제되었다.

이후 일본의 불교계는 유럽 근대로부터 건너온 근대불교학이라는 지적 불교 세계에 빠지게 되었다. 그 결과 일본불교는 불교학과 불교계가 분리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아카데미즘 불교학은 연구 대상을 텍스트에만 두고, 역사적 현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으므로 자연히 현실적으로 무력한 존재로 전락하였다. 반면, 현실의 불교계는 종파의 개조와 전통적 교의에만 관심을 갖게 되어, 양자는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고 자신만의 영역을 지키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결국 근대 이후 일본의 불교계가 국가와 타협하고 권력과 결탁하면서 식민지 지배를 지원하는 방향이나 전쟁에 찬성하는 등 국가불교로의 길로 나아갔던 흐름과 관련된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의 불교가 일본 유학을 통하여 근대불교학을 수용하면서 불교의 근대화를 모색한 것은 결국 이러한 일본불교의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

 

조명제 
신라대학교 사학과 교수. 부산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고마자와대학 불교학부 박사후과정, 교토대학 연구원을 역임했다. 주요 논저로 《고려후기 간화선 연구》 등의 저서와 〈근대불교의 지향과 굴절〉 〈백암성총의 불전 편찬과 사상적 경향〉 〈일연의 선사상과 송의 선적〉 〈선문염송집의 편찬과 종문통요집〉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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